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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루는 밤

1. 001~004 잠 못 이루는 밤

001-♥︎01

잠이 안 와서 살짝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지탄다가의 역사는 에도 시대 초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합니다. - P7

전후 농지개혁으로 일본 각지의 대지주들과 마찬가지로 지탄다가도 토지의 대부분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당주였던 지탄다 쇼노스케는 시류를 읽는 눈이 뛰어났던덕에, 주식으로 번 돈을 밑천으로 지탄다가의 농업을 한발 앞서 근대화하고 그렇게 해서 얻은 부를 더욱 늘렸습니다. - P8

집안 자랑 같지만, 지탄다 쇼노스케라는 인물은 단순히 사업 능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받을 만한 인격도 갖추었던 모양입니다. 쇼노스케는 사실 저희 할아버지입니다. 일찍 돌아가셔서 어떤 분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않습니다. - P9

그리고 오늘 밤, 저는 또 신사로 갑니다.
내일부터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가 시작됩니다. 가미야마 고등학교의 다채로운 문예계 동아리 중 하나인 저희 고전부는 대단히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할 생각이긴 하지만…………… 행운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새전함에 백 엔 동전을 던져 넣고 불빛이라곤 달빛뿐인 경내에서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뒤 고전부 분들을 떠올립니다. - P11

후쿠베 씨의 쾌락주의적 언동이 어디까지 본심인지에 대해저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기주의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마야카 씨가 속상해하는데 웃으면서 모른 척할 것 같지 않습니다.
오레키 씨는 편히 자고 있을까요. - P12

세 분의 모습을 가슴에 품고 기도를 드립니다.
내일부터 사흘간, 저희에게 행운이 있기를. 그 ‘산‘을 어떻게든 넘을 수 있기를.
눈을 뜬 저는 씻을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혀 지갑에서 오십엔을 더 꺼냈습니다. - P12

002-♣︎01

잠이 안 와소 베개 밑에 들어 있던 안내 책자를 꺼냈다.

(중략).

끝까지 훑어본 뒤 나는 완성도에 만족해 안내 책자를 머리맡에 놓았다. 책자 앞면에 고딕체로 커다랗게 ‘야제 100배즐기기‘라고 씌어 있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제42회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라고 씌어 있다. 제작은 총무 위원회. 나,
후쿠베 사토시가 소속된 위원회다. - P17

 직권 남용과 부수입의 경계를 명확히 가늠하는 것.
이게 또 재미있는 일이다. 이 안내 책자로 말하자면, 마지막코너인 ‘참가단체 한마디‘에 작은 장난을 쳤다.
작년까지 이 코멘트 코너는 오십음순으로 나열했는데, 그것을 남몰래 등록한 순서로 바꾸었다. 위원장에게는 ‘아카펠라부가 오십음* 중 맨 첫 자로 시작한다는 이유만으로 공식홍보의 자리인 코멘트 코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자리를 매번 차지한다는 건 공평하다고 할 수 없다‘고 설명했지만, 의도는 사실 단순했다. 내가 속한 단체 중 하나인 고전부의 코멘트를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위치에 놓고 싶었던 것뿐이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위원장도 금세 전폭적으로 찬성했다.

・아, 카, 사, 타, 나, 하, 마, 야, 라, 와순. 각 자음은 아이우에오 순으로 모음 변화한다. - P18

아아, 기대된다. 축제 자체도, 그리고 우리 고전부가 실패를 어떻게 만회할지도.
극복해야 할 문제가 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좌우지간 지금은 푹 자고 내일을 대비하자. 모처럼 축제를즐기는 중에 에너지가 나는 사태가 벌어졌다간 후쿠베 사토시, 인생 최대의 실책이다. - P19

003-♠︎01

워낙 야행성이다 보니 잠이 안 온다.

책이나 읽을까 했는데 책꽂이에 있는 책 중에는 지금 기분에 맞는게 없었다. 거실로 내려와 텔레비전이라도 볼까 하고리모컨을 들었는데, 이쪽도 죄 보고 싶지 않은 것들뿐이다.
하는 수 없이 방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데스크톱컴퓨터를 켰다.
이 컴퓨터는 원래 누나가 쓰던 건데, 지금은 오레키가의공동 인터넷 전용 단말기다. 그래 봤자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은 나뿐이고, 나는 인터넷을 하며 노는 취미가 없다. 구형 모 - P20

어느 단체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꽤나 작정하고 만들었다. 사진이며 일러스트, 손으로 그린 지도 등을 풍부하게 사용하면서도 화면이 보기 편하고 정보도 쉽게 얻을 수 있다.
대충 둘러본 뒤, 이제 내가 소속된 특별 활동 동아리인 고전부의 소개나 읽어 볼까 하던 차에 접속이 끊겼다.
어디가 문제인지 이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하면 가끔 뚝끊어질 때가 있다. 슬슬 잠이나 자자고 생각했을 때, 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가벼운 것을 보니 누나다. - P21

"호타로‘
발소리 주인에 대한 내 판정은 옳았다. 누나 목소리다. 어쩐지 잠에 취한 것 같다.
"너, 내일부터 학교 축제지?"
얼굴만 부엌 쪽으로 돌렸다.
"그래."
"얼른 자." - P22

"네 태도를 보면 다 알아. 뭐, 그보다 고전부의 학교 축제는 원래 말썽 없인 안 끝나. 그게 전통이라고."
어이구 저주인가.
"너도 참 귀찮은 동아리에 들어갔구나."
"......
하마터면 맞받아칠 뻔했다. 나더러 고전부에 들어가라고한 사람은 누나다. - P23

얼마 동안 침묵이 흐른 뒤, 뒤쪽에서 뭐가 날아왔다. 정말부적이라도 주었나 싶어 봤는데 도무지 영검한 효력이 있을것 같지 않았다.
만년필이다.
영검함은 몰라도 풍격은 있었다. 짙은 검은색에 점잖은 은색으로 가장자리를 둘렀다. 그렇게 싸구려는 아닐 것 같다.
"그거 가져."
・・・・・・ 고맙다고 하면 되는 건가?"
"잉크는 다 썼고 펜촉은 갈라졌어." - P25

004-◆01

(전략).
흥미가 생겨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네. 내가 어휘는 풍부한것 같은데 쓸모 있는 말을 별로 모르지 뭐야."
"쓸모없는 어휘는 풍부하고?"
"탱크 데산트라든지, 운둔근이라든지. 아니,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가령 호타로는 ‘에너지 절약‘을 좌우명으로 들잖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건 그냥 자칭이잖아. 오레키가 진짜 소중히 여기는 게
‘에너지 절약‘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일이야." - P28

아휴 참, 어쩔 수 없다.
개인적으로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에 애착이 있어서 더신경이 예민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밤을 꼬박 새우고형편없는 컨디션으로 나갈 수도 없고.
잠자리에서 데굴데굴 굴러 나와 약상자에서 수면제를 꺼냈다. 이 약,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 P30

2
무수히 쌓인 그것

2-1.005~012 고전부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005-♠︎02

충분히 즐긴다. 말은 간단해도 실제로는 제법 쉽지 않은작업이다. 개인의 이해력의 차만 해도 도저히 무시할 수 있는요소가 아닌데, 기호의 차는 더더욱 큰 요인이다. 같은 마술을 봐도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그게 얼마나 대단한 마술인지 100분의 1도 모를 것이다. - P33

아침에 평소보다 일찍 등교했다.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당일. 후쿠베 사토시가 "기대된다. 아아, 기대된다" 하고 하도 외쳐 대기에 작은 심술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사토시는 유난스레 히죽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탁견이라고 해 주고 싶지만, 뭘 모르는군, 호타로 뭘 몰라." - P34

후쿠베 사토시. 이 녀석과는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사토시는 외모로 따지면 갈색이 감도는 눈동자를 가진 것과 멀리서 보면 여자로 착각할 만큼 선이 가는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는 사이클링으로 다진 다리 힘이 여간 아닌데, 겉만 보면 비실비실하다.
하지만 이 녀석의 진정한 특징은 정신에 있다. 방금 주고받은 대화에서도 얼핏 드러난 것처럼, ‘즐기는 것‘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학업이며 사교 같은 할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방치할 정도다. - P36

이바라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이어지는 인연이지만, 중학교 입학 이래 사복을 입은 모습을 본 적이 몇 번 없다. 하지만 사토시가 그렇다면그럴 것이다.
이바라는 지금까지 사토시에게 몇 차례 고백했다. 그런데 사토시는 자신도 호감이 없지 않을 텐데 계속 얼버무리기만 한다. 왜 그러는지 나는 짐작도 안 되거니와 알고 싶지도 않다. - P37

006-♣︎02

저기 가는 사람은 마야카가 틀림없었다. 호타로를 길가의불상으로 잘못 보는 일이 있어도 마야카를 잘못 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달려가 어깨를 탁 쳤다.
"안녕, 마야카!"
"아이 참, 아프잖아!"라며 노려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 세게 때렸는데, 마야카는 오늘 아침 그런 기분이 아닌 모양이다. 몸을 움찔하더니 천천히 돌아보았다.
"......안녕." - P38

"일반인 앞에서 그런 용어는 쓰지 마."
요새는 코스튬 플레이쯤이야. 금기어일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뭐, 마야카가 그런 것을 쑥스러워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터라 구태여 반론하지 않았다. 참고로 마야카가 오늘 코스프레를 하고 온다는 것은 사전에 알고 있었다. 마야카가 소속된 만화 연구회에서 사복 등교 신청서를 총무 위원회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 P39

본인이 원해서 한 게 아닌 코스프레 모습에서 시선을 돌리고 끈 달린 주머니를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렸다.
"어쨌거나 고생 많아. 나중에 만연에도 얼굴 내밀게."
마야카는 살짝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야카는 만연 문집에도 기고했지?"
"응."
"읽어 볼게....... 힘들었겠어. 고전부하고 만연하고 이벤트까지 동시에 진행하기."
"응, 힘들었어. 누구는 원고를 줄 생각도 안 하고 말이지."
내 딴에는 위로한답시고 한 말인데, 마야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이쿠, 이야기가 그쪽으로 갔나. - P41

007--♠︎03

주머니에 딱딱한 게 들어 있다. 아까부터 신경 쓰인다.
만년필. 정확히는 과거에 만년필로 사용되었던 쓰레기다.
잉크를 다 썼고 펜촉이 갈라진, 누나가 준 부적이다. 어젯밤 바닥에 그냥 둘 수도 없어서 버릴 생각으로 내 방으로 들고 왔는데, 아침에 급하게 집을 나오면서 손수건과 같이 가지고 나온 모양이다 - P43

가미야마 고등학교의 조감도는 H자 형태다. 두 개의 세로줄 중 한쪽은 주로 교실이 있는 일반동이고, 다른 한쪽은 과학과 예체능 쪽 특별 교실이 모여 있는 특별동이다. 가로줄은 두 건물의 연결 통로다. 정말로 조감하면 일반동에서 연결 통로가 뻗은 것도 보일 것이다. 그 끝에는 체육관이 있다. - P44

지학 교실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살풍경한 교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나를 보더니 바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오레키 씨."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한다. 긴 검은 머리가 찰랑거렸다. 고전부 부장 지탄다다. 십중팔구 이 녀석이 일등으로 와있을 줄 알았다. - P45

이 문집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와 지탄다. 그리고 사토시가 한 일이라곤 원고를 쓰는 것뿐이었다 해도 지장 없을 것이다. 그런데 원고를 쓴다고 문집이 완성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페이지 수를 확정하고, 글씨체와 종이를 고르고,
원고 배치를 생각하고, 쪽 번호의 위치를 정해서 최종적으로인쇄소에 발주한다. 이런 일련의 작업을 전부 이바라가 혼자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들어가는 삽화조차 이바라가 그렸다. - P47

회의를 통해 사전에 정한 <빙과>의 발행 부수는 서른 부우리가 각자 한부씩 사고, 지도 교사와 동아리실 비치용으로각각 한 부를 빼고 나면 판매용은 스물네 부. 그것도 다 못 팔것을 각오한 숫자였다.
그런데 인쇄된 <빙과>는 그보다 조금 더 많았다.
그래 봤자 일곱 배 정도.
별로 두껍지 않은 문집도 이백 부를 쌓아 놓으면 ‘산더미‘
같아진다는 사실을 학습했다. - P48

<빙과>의 배포 가격은 이백 엔으로 잡았다.
이바라와 지탄다가 필사적으로 계산을 다시 한 결과는 이미 들었다. 우리는 원래 서른 부를 한 부에 사백 엔씩 받고 팔예정이었다. 그 가격으로 서른 부를 다 팔면 매상과 학교에서나오는 활동비로 인쇄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빙과>는 이백 부가 인쇄되었다. 그 자체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실수이지만, 대량 생산 효과로 한 부당 제작비가 급격히 낮아졌다. 이백 부를 다 판다고 생각할 경우 가격은 120엔까지 낮출 수 있는 모양이다. - P50

참고로 설령 다 팔려도 수익은 우리 수중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일 찻집‘ 금지를 표방하는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에서는 이익을 내는 게 허용되지 않는다. 일인당 천 엔 이하는봐준다는 말도 들었지만, 그 이상 흑자가 발생할 경우는 국고, 아니고 학교 측에서 거두어 가는 게 규칙이다. - P51

"문제는 고전부의 지명도가 낮은 거하고 동아리실의 입지조건이 나쁜 거네."
"네, 그게 제일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해요."
두 사람의 의견에는 나도 동감한다. - P52

"새 판매 장소를 마련한다는 말이죠. 전 어떤 방법으로 손님을 여기까지 모셔 올지 그 생각만 했지 뭐예요. 오레키 씨.
발상의 전환이네요."
"아니. 전환이라 할 정도는……………."
"하지만 당일에 허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글쎄. 그런 문제는 총무 위원인 사토시의 분야다. 그런데사토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좀 애매한걸. 물리적 공간으로 생각하면 물론 가능하지만 문제는 ‘이치‘론이야. 고전부한테만 그런 특권이 허용될 것인가, 아닌가. 우리 위원장 아니면 학생회장하고 직접 담판을 짓는 게 좋을걸." - P53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은 도무지 유쾌한 것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사토시는 유난히 즐거워 보인다. 후쿠베 사토시는 원래 그 어떤 일도 즐기는 인간이다. 말썽도 바라는 바일지 모른다. 사토시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보다 선전에 주력하고 싶은데."
‘호, 선전? 무슨 아이디어라도 있냐?"
"암, 있고말고. 비책이 있지." - P54

"대강의 방침은 정해졌군. 지탄다가 판매 장소 협상, 사토시가 선전."
"일단 그렇게 가죠. 그런데 오레키 씨는요?"
나?
실은 나도 비책이 있다. <빙과>의 판매 촉진에 크게 기여하면서 내 좌우명에도 위배되지 않는 훌륭한 방법이. 나는 헛기침을 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난 말이지." - P55

....뭐, 정말 이백 부를 다 팔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손톱끝만큼도 안 한다만.

[남은 부수 200부] - P57

008-♥︎02

(중략).
마이크 앞에 선 회장님은 멀리서도 알 수 있을 만큼 숨을크게 들이쉬었습니다. 그러고는 커다란 목소리로 대뜸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지금부터 제42회 간야제를 개최합니다!" - P57

총무위원회에서 발행한 『간야제 100배 즐기기』에 따르면, 개회식에는 브레이크 댄스부 분들이 출연한다고 합니다.
부끄럽지만 브레이크 댄스라는 것은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댄스는 알겠는데 브레이크라는 말이 조금 위험해 보입니다.
예전에 얼핏 봤던, 무대 위의 물건을 부수고 다니는 것 같은퍼포먼스가 아니면 좋겠는데요. - P58

댄스의 속도가 빨라집니다. 빨라요, 정말 빨라요. 팔다리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잔상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훌륭합니다. 곡도 단숨에 고조돼서 ・・・・・・ 아뇨, 음, 이렇게까지 소리가크니까 귀가 아픈데요. 큰 소리는 조금 불편합니다. - P59

저는 이윽고 회의실 앞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교실과 다를 바 없는 미닫이문에 ‘총무 위원회‘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습니다. 문을 노크합니다.
어머나?
"실례합니다."
대답이 없습니다. 손잡이를 잡고 옆으로 당겨 보니 잠겨있습니다.
그렇군요. 생각해 보니 저는 개회식 도중에 빠져나온 셈입니다. 총무위원회 분이 아직 아무도 안 와 계신 것도 그럴 만합니다. 조금 일렀나 봅니다. - P61

다만 불만이 하나 있다면 제목이 ‘제42회 간야제‘라는 점입니다.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의 정식 명칭은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이고, 간야제는 그다지 의미가 좋지 못한 속칭입니다. 왜 의미가 좋지 못하다는 것인지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구석에 ‘학생회 집행부‘라고 씌어 있는데, 집행부에서 정식으로 만든 포스터라면 간야제라는 이름을 피했으면좋았을 것 같습니다. - P62

"안녕하세요. 총무 위원장인 다나베 선배시죠?"
전에 벽신문 <가미 고 월보》에서 사진으로 봤던 다나베 총무위원장이 틀림없습니다. 기름한 얼굴에 렌즈가 작은 안경을 꼈습니다. 깔끔하게 다듬은 짧은 머리와 더불어 상당히 성실할 듯한 인상을 줍니다. 다나베 선배는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정중히 답례해 주었습니다. - P63

다나베 선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습니다. 몹시 난처한 표정입니다.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어렵게 말한 것 같지 않은데요.
"우리는 정해진 대로 간야제를 진행하는 것뿐이라 말이지. 갑자기 판매 장소를 늘려 달라고 한들 좋을 대로 하시라고 할순 없어." - P64

서른 부였을 인쇄 부수가 이백 부가 된 것은 본래 마야카씨의 책임이 아닙니다. 저도 주문서를 봤는데, 마야카 씨는분명히 인쇄소에 서른 부를 부탁드렸습니다. 다만 마야카 씨는 동시에 개인적인 문집을 이백 부 부탁드렸습니다. 마야카씨가 어째서 개인적으로 문집을 이백 부나 찍으려 했는지는저도 모릅니다. 문제는 마야카 씨의 문집과 <빙과>가 혼동됐다는 것입니다. 마야카 씨는 확인을 철저하게 하지 않은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런 사태를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 P65

다나베 선배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이백 부란 말이지. 만연도 그 정도로 팔리진 않아. 응, 조금이라도 더 팔기 위해서 판매 장소를 늘리고 싶다는 건 알겠어. 도와주고 싶지만…………… 사정은 어느 부에나 있으니 말이지. 고전부만 갑자기 따로 판매 장소를 만들 순 없거든." - P66

010-◆02

(중략).
사실 고전부로 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인쇄소에 발주하면서 똑똑히 확인하지 않은 것은 정말 큰 실수였다. 그에 대한 책임감도 물론 있다. 하지만 고전부에 가고 싶은 마음의 절반정도는 만연에 가고 싶지 않다는 기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 P69

만연 동아리실은 일반동 2층의 제1 예비 교실이다. 고전부가 쓰는 지학 교실에 비하면 일반 교실 바로 옆이라는 위치는꽤나 운이 좋은 것이다. 복도에는 ‘만화 연구회‘라고 쓴 간판이 있을 뿐 별로 야단스러운 느낌은 없다. 부장인 유아사 쇼코 선배의 방침이다. - P70

부장은 가미야마 고등학교 교복인 세일러복을 입고 있었다. 분장은 전혀 하지 않았다. 원래 코스프레는 동아리실을지키면서 판매와 호객을 담당할 다섯 명이 할 예정이었다. 부장은 그중에 포함되지 않는다. 나와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않는데도 유아사 부장에게는 어른 같은 관대함이 있었다. 포용력도 느껴진다. 나쁘게 말하면 가끔 아무 생각 없는 것처럼보일 때도 있다. 고양이와 툇마루가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포동포동한 얼굴에 쌍꺼풀진 큰 눈, 유아사 부장은 내 분장을 흘깃 보더니 말했다. - P72

손님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까지 아직 시간이 좀 더 있을 것 같다. 나는 ㄷ자로 책상을 늘어놓은 제1 예비 교실을둘러보았다. 만연의 주력 상품은 고금의 만화 백 편을 모아리뷰를 쓴 문집 『제아미즈」. 왜 『제아미즈냐고 물었더니 작년 문집 『간아미즈』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간아미와 제아미를 이용한 말장난. 14, 15세기 일본에서 노의 원류인 사루가쿠를 대성시킨부자를 말한다. - P73

분위기가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은 아니다. 불꽃이 튀는 것도 아니다. 만화를 좋아하는 마음은 다들 똑같다. 하지만 역시 나는 축제 기간 중 만연을 못 벗어날 것 같다. 그런 내가 고전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만연에 <빙과>의 위탁판매를 부탁하는 것 정도다. 만연에서 <빙과>를 팔 수 있다면 지명도를 고려할 때 스무 부 정도는 어떻게 되지 않을까.
지금은 분위기가 이러니 무리겠지만, 긴장이 조금 풀려 분위기가 가벼워지면 부탁해 볼 생각이다. 되도록 빨리. - P74

고전부의 활동 목적이 불분명한 여파로 <빙과>의 내용도무질서해졌다. 펴 보지 않아도 기억한다. 나와 지탄다는 빙과 사건의 전말을, 이바라는 고전으로 존중되는 만화에 관해썼다. 사토시는 고전적 패러독스와 관련된 조크를 칼럼풍으로 썼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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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대만금마장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 관객상을 거머쥔 데 이어 2024 홍콩금상장영화제, 2024 홍콩감독조합상에서 연이어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젊은 창작자가 등장했다. 장편 데뷔작 <연소일기>로 잠재력을 인정받은 탁역겸 감독은 자살과 우울증이라는, 자국 홍콩이 마주한 사회문제를 소년요우제(황재락)의 삶에 투영한다. 요우제의 부모는 또래보다 늦되는 그를 영재 동생 요우쥔(하백염)과 비교하며 매순간 몰아붙인다. 부모의 기대치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요우제에게 돌아오는 건 그를 무시하는 주변인들의 가시 돋친 말뿐이다. 탁역겸 감독은 "육체적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치유될 수 있지만,
말로 인한 상처는 평생 마음에 남는다"며 타인의 말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살과 우울에 대한 깊은 이야기

<연소일기>
탁역겸 감독 - P20

"우리 다음에는 꼭 형도 데리고 여행 가요"라는요우쥔의 대사가 마음에 남았다. 형이 죽었다는걸 알면서도 요우쥔은 부모에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우울증 이론의 5단계 중 첫 단계는 ‘부정‘인데나는 이것이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몇년 전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처음 보인 반응도 요우쥔과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배경들을 요우쥔의 반응에 적용했다.


요우제가 삶을 포기하지 않는 전개를 생각해본적 있는지.

있다. 만약 요우제가 살아남아 성장했다면 부모에게 반항하고 심지어 맞서 싸우기 시작하는청소년이 됐을지도 모른다. - P20

홍콩에서 작품의 반응이 무척 좋았는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안타깝게도 홍콩의 자살 문제가 내가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심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연소일기>를 관람할 한국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영화의 주제가 무겁고 진지해 대중이 쉽게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살과 우울에 관해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은 관객에게는 작품이 꼭 닿길 바란다. 나도 그 주제에 관해 궁금한 것이 정말 많다. - P21

작별하지 않는다

빅토르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사 매혹적인 이유에 관하여


송경원

운명은 죄가 없다. 삶의 무게를 저티기 힘들 때 우하응 이 묵직항 울림의 단어에 너무 많은 책임을 미루곤 한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었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손을 놓을 때 그 무기력한 낙담조차 정해진 운명일까. (중략).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사라진 유명 배우를 추적하난 어느 영화감독의 걸음에 동행하는 영화다. 노년의 영화감독 미겔 가라이(마놀로 솔로)는 한 TV프로그램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후략). - P44

운명과 자유의지

운명이란 단어를 사용할 땐 앞뒤 행간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설사 세상의 일들이 모두 결정되어 있고 바꿀 수 없다는 게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 사실을 어떤 결정의 이유로 삼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중략).
짐작하겠지만 이 영화가 제5ㅣ하는 선 답을 찾는 게임이 아니다. 차라리 열쇠의 형태를 감상하는 시간에 가깝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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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바지. SF 단편 만화집 세트 - 전2권 - 하우스도르프 연결공간 + 슈뢰딩거의 고양희
반-바지. 지음 / 김영사 / 2024년 12월
평점 :
절판


인터넷에서 자주 봤던, sf에 관한 좋은 단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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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윤리학에 있어서도, 윤리학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어려움과 불일치는 주로 아주 단순한 원인에 기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그 원인은 당신이 대답하고 싶어 하는 물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먼저 정확하게 규명하지 않은 채로 그 물음에 답하고자 시도하기 때문이다. - P5

 어쨌든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시도를 아예 하고 있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작업을 빠뜨린 결과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철학자들은 ‘예‘나 ‘아니요‘, 그 어떤 대답도 정확하지 않은 물음에 대해 이러한 대답이 참임을 입증하려고 여전히 무진장 애를 쓰고 있다. - P6

즉,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 모든 윤리학적 명제가 증명되거나 반박되는, 혹은 확증되거나 의심스럽게 되는 증거의본성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게 된다. 일단 우리가 이 두 물음의 의미를정확히 인정하면, 이러한 물음에 대한 특정의 모든 대답에 대해, 이를 옹호하는 논증이나 반박하는 논증에 정확히 어떠한 종류의 이유들이 관련되어 있는지가 명백하게 밝혀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 P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증명과 반박에 꼭 필요할 뿐만 아니라 관련되어 있는 증거의 종류는 정확하게 규정될 수 있다.
이러한 증거는 두 종류의 명제를, 그리고 오직 두 종류의 명제만을 포함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즉, 이러한 증거는 우선 첫째로 해당 행위의 결과와관련된 진리, 즉 인과적 진리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러한 증거는 또한 제일의 혹은 자명한 종류의 윤리학적 진리도 포함한다. - P7

따라서 이 책의 주 목적 중 하나는 칸트(Kant)의 유명한 책 제목을 약간 변경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즉, 나는 ‘과학적임을 자임할 수 있는 미래 윤리학을 위한 서론(Prolegomena to any future ethics that can possiblypretend to be scientific)‘에 대해 글을 쓰고자 노력해왔다. 달리 말해 윤리학적 추론의 근본 원칙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자 노력해왔다. - P8

나의 첫 번째 부류의 윤리학적 명제들은 증명이나 반박이 불가능하다는사실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 가끔 나는 이를 ‘직관‘이라고 부르는 시지웍(Sidgwick) 교수의 용례를 원용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일상적인 의미의 직관주의자가 아님을 알아주기를 간청하는 바이다. 시지윅 교수 자신은 자기의 직관주의와 일반적으로 직관주의라 불리는 상식적인 입론을 구별시켜주는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 중요성을 결코 명쾌하게 깨닫지 못한것 같다.  - P9

엄밀한 의미의 직관주의자는 두 번째 부류의 명제, 즉 어떤 행위에 대해 그 행위가 옳다고 혹은 의무라고 주장하는 명제는 그러한 행위의결과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증명 내지 반증할 수 없다고 역설하는 것에 의해 차별화되는 자를 말한다. - P9

이 책이 이미 완성되었을 때,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다른 윤리학자의 입장에서보다 나 자신의 입장과 훨씬 더 흡사한 입장을 브렌타노(Brentano)의 「옳고 그름에 관한 지식의 기원」¹이라는 논문에서 나는 발견했다. 브렌타노는 다음 네 가지 점에서 나의 입장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 같다.

1) Franz Brentano, "The Origin of the Knowledge of Right and Wrong. Cecil Hague영역, Constable, 1902. 나는 이 책에 관한 서평을 썼는데, 나는 이 서평이 The InternationalJournal of Ethics(Oct., 1903)에 게재되기를 희망한다. 나의 입장이 브렌타노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좀 더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 나는 이 서평을 언급할지도 모른다. - P10

 즉,
(1) 모든 윤리학적 명제를, 그것들이 단일의 고유한 객관적 개념을 진술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정의된다고 간주하고 있다는 점, (2) 이러한 명제들을 나와 똑같이 두 종류로 날카롭게 구분하고 있다는 점. (3) 첫 번째 종류의 명제는 증명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점, 그리고 (4) 두 번째 종류의명제를 증명하는 데 관련된 꼭 필요한 증거의 종류에 관한 그의 주장 등에있어서 그의 입장은 나의 입장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 P10

지금 내 책을 다시 쓸 수 있다면, 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책을 썼을것이며, 그랬다면 훨씬 더 나은 책이 되었으리라고 나는 믿고 싶다. 그러나 새롭게 쓴다 해도 나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욕심으로 인해 그에 상응하는 정확성과 완결성은 얻지 못한 채, 오히려 내가 전달하고자 그렇게 애쓴 생각들을 내가 지금보다 더 모호하게 만들어버리지 않았을까 의심스럽다.
사정이 어찌 되었든 간에, 현재의 내용대로 이 책을 출간하는 것이 아마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비록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이러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전히 결점으로 가득 차있음을 나는 겸허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

트리니티 대학, 케임브리지(Trinity College, Cambridge)
1903년 8월 - P11

제1장

윤리학의 주제와 대상

1.
우리의 일상적인 판단 가운데, 그 진위 여부에 윤리학이 확실하게 관련되어 있는 몇몇 판단을 지적하기란 아주 쉬운 일이다. - P39

이러한 것들이 윤리학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지만, 정작 윤리학의 영역을 규정하려는 논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참으로 윤리학의 영역은 이 모든 판단에 공통적이면서 동시에 이러한 판단에만 고유한 그 무엇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포함하도록 규정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다음과 같이 묻지 않을 수 없다. - P40

2.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예들에 국한하여 논의하는 한, 이러한 예들은 모두 ‘행위(conduct)‘¹의 물음과 관련되어 있다고 우리가 말한다고 해도 큰잘못이 없을 것이다. 즉, 이러한 예들은 우리 인간 행위에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나쁜가. 그리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의 물음과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이 선하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언제나 그 사람이 올바르게 행동한다는 것을 대개 의미하기 때문이다.


:.
1) [역자 주] ‘conduct‘는 명사적 성격이 강한 행위‘로, ‘action‘은 동사적 성격이 강한 ‘행동‘으로구분하여 번역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두 개념이 의미상 차이가 없을 때에는 혼용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 P40

물론 윤리학이, 선한 행위가 무엇인가의 물음과 관련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P41

즉, 모든 행위가 선한 것이 아니며, 일부 행위는 악하고 또 일부 행위는 아예 선과 무관하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행위 외의 다른 것들도 선할 수가 있다. 만약 행위 외의 다른 것도 선하다면, ‘선‘은 행위 및 다른 것들에 공통적인 어떤 속성을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 P42

선 일반에 관해 어떤 확실한 결론을 얻은다음, 선한 행위의 물음을 해결하고자 시도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우리라 나는 기대한다. 왜냐하면 ‘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이미 꽤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제일 물음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악인가?"이다. 그리고 이 물음(혹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논의에 대해 나는윤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왜냐하면 어쨌든 윤리학은 이러한 논의를 포함함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 P42

3.
그러나 이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우리 각자가
"나는 지금 선한(good) 일을 하고 있다."고 혹은 "나는 어제 좋은(good) 저녁 식사를 했다."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진술들은, 비록 아마도 틀린 대답일 수도 있지만, 그 당사자에게는 지금 다루고 있는 우리의 물음에 대한 일종의 대답이 될 것이다.²

2) [역자 주] 영어 ‘good‘은 우리말로 ‘선한‘, ‘좋은‘ 혹은 ‘착한‘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
물론 윤리학 원리에서 무어는 선의 정의 물음을 주로 다루기에 대부분의 경우 ‘good‘을 선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무어는 도덕과 무관한 사물에 대해서도 ‘good‘이라는형용사를 사용한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 역자는 ‘선한‘이나 ‘선‘으로 번역하지 않고, 일상 어법에 맞게 ‘좋은‘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좋은 의자‘라는 표현은 적절하지만, ‘선한 의자‘라는표현은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What is good?"의 문장처럼 정의와 연관될 때 이는 그냥 ‘선‘을 뜻하기도 한다. 또 ‘the good‘의 경우도 사물을 포함하는 경우에는 ‘좋음‘으로,
도덕적 의미로만 사용될 경우에는 ‘선‘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 P43

4.
그러나 "무엇이 선인가?"라는 물음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책은 좋은 것이다."라는 대답은, 어떤 책은 참으로 아주 나쁘기 때문에 명백한 거짓이지만,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될 수도 있다. 그 대부분에 대해나는 다룰 생각이 없지만, 이러한 종류의 윤리 판단은 참으로 윤리학에 속한다. "쾌락은 선이다."라는 판단도 마찬가지이다. - P4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윤리학‘과 같이 덕의 목록을 포함하는 윤리학 저술들에서 내려지는 판단들은 바로 이러한 종류에 속한다. 그러나 이는 대개 윤리학과는 전혀 다른 탐구로 간주되고 있는 학문, 즉 훨씬 평이 좋지 않은 결의론(Casuistry)의 실질적 내용을 구성하는 판단과 정확히 동일한 종류의 판단이다. - P44

 아무튼 결론은 보다더 특정의 문제를 다루는 반면에, 윤리학은 보다 더 일반적인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이는 이 두 학문이 정도에 있어서 다르다는 의미이지 결코 그유에 있어서 다르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이는 비록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의 ‘특정의(particular)‘와 ‘일반적인(general)‘
이라는 개념에도 보편적으로 타당하게 적용된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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