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윤리학에 있어서도, 윤리학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어려움과 불일치는 주로 아주 단순한 원인에 기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그 원인은 당신이 대답하고 싶어 하는 물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먼저 정확하게 규명하지 않은 채로 그 물음에 답하고자 시도하기 때문이다. - P5
어쨌든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시도를 아예 하고 있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작업을 빠뜨린 결과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철학자들은 ‘예‘나 ‘아니요‘, 그 어떤 대답도 정확하지 않은 물음에 대해 이러한 대답이 참임을 입증하려고 여전히 무진장 애를 쓰고 있다. - P6
즉,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 모든 윤리학적 명제가 증명되거나 반박되는, 혹은 확증되거나 의심스럽게 되는 증거의본성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게 된다. 일단 우리가 이 두 물음의 의미를정확히 인정하면, 이러한 물음에 대한 특정의 모든 대답에 대해, 이를 옹호하는 논증이나 반박하는 논증에 정확히 어떠한 종류의 이유들이 관련되어 있는지가 명백하게 밝혀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 P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증명과 반박에 꼭 필요할 뿐만 아니라 관련되어 있는 증거의 종류는 정확하게 규정될 수 있다. 이러한 증거는 두 종류의 명제를, 그리고 오직 두 종류의 명제만을 포함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즉, 이러한 증거는 우선 첫째로 해당 행위의 결과와관련된 진리, 즉 인과적 진리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러한 증거는 또한 제일의 혹은 자명한 종류의 윤리학적 진리도 포함한다. - P7
따라서 이 책의 주 목적 중 하나는 칸트(Kant)의 유명한 책 제목을 약간 변경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즉, 나는 ‘과학적임을 자임할 수 있는 미래 윤리학을 위한 서론(Prolegomena to any future ethics that can possiblypretend to be scientific)‘에 대해 글을 쓰고자 노력해왔다. 달리 말해 윤리학적 추론의 근본 원칙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자 노력해왔다. - P8
나의 첫 번째 부류의 윤리학적 명제들은 증명이나 반박이 불가능하다는사실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 가끔 나는 이를 ‘직관‘이라고 부르는 시지웍(Sidgwick) 교수의 용례를 원용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일상적인 의미의 직관주의자가 아님을 알아주기를 간청하는 바이다. 시지윅 교수 자신은 자기의 직관주의와 일반적으로 직관주의라 불리는 상식적인 입론을 구별시켜주는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 중요성을 결코 명쾌하게 깨닫지 못한것 같다. - P9
엄밀한 의미의 직관주의자는 두 번째 부류의 명제, 즉 어떤 행위에 대해 그 행위가 옳다고 혹은 의무라고 주장하는 명제는 그러한 행위의결과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증명 내지 반증할 수 없다고 역설하는 것에 의해 차별화되는 자를 말한다. - P9
이 책이 이미 완성되었을 때,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다른 윤리학자의 입장에서보다 나 자신의 입장과 훨씬 더 흡사한 입장을 브렌타노(Brentano)의 「옳고 그름에 관한 지식의 기원」¹이라는 논문에서 나는 발견했다. 브렌타노는 다음 네 가지 점에서 나의 입장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 같다.
1) Franz Brentano, "The Origin of the Knowledge of Right and Wrong. Cecil Hague영역, Constable, 1902. 나는 이 책에 관한 서평을 썼는데, 나는 이 서평이 The InternationalJournal of Ethics(Oct., 1903)에 게재되기를 희망한다. 나의 입장이 브렌타노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좀 더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 나는 이 서평을 언급할지도 모른다. - P10
즉, (1) 모든 윤리학적 명제를, 그것들이 단일의 고유한 객관적 개념을 진술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정의된다고 간주하고 있다는 점, (2) 이러한 명제들을 나와 똑같이 두 종류로 날카롭게 구분하고 있다는 점. (3) 첫 번째 종류의 명제는 증명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점, 그리고 (4) 두 번째 종류의명제를 증명하는 데 관련된 꼭 필요한 증거의 종류에 관한 그의 주장 등에있어서 그의 입장은 나의 입장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 P10
지금 내 책을 다시 쓸 수 있다면, 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책을 썼을것이며, 그랬다면 훨씬 더 나은 책이 되었으리라고 나는 믿고 싶다. 그러나 새롭게 쓴다 해도 나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욕심으로 인해 그에 상응하는 정확성과 완결성은 얻지 못한 채, 오히려 내가 전달하고자 그렇게 애쓴 생각들을 내가 지금보다 더 모호하게 만들어버리지 않았을까 의심스럽다. 사정이 어찌 되었든 간에, 현재의 내용대로 이 책을 출간하는 것이 아마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비록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이러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전히 결점으로 가득 차있음을 나는 겸허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
트리니티 대학, 케임브리지(Trinity College, Cambridge) 1903년 8월 - P11
제1장
윤리학의 주제와 대상
1. 우리의 일상적인 판단 가운데, 그 진위 여부에 윤리학이 확실하게 관련되어 있는 몇몇 판단을 지적하기란 아주 쉬운 일이다. - P39
이러한 것들이 윤리학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지만, 정작 윤리학의 영역을 규정하려는 논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참으로 윤리학의 영역은 이 모든 판단에 공통적이면서 동시에 이러한 판단에만 고유한 그 무엇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포함하도록 규정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다음과 같이 묻지 않을 수 없다. - P40
2.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예들에 국한하여 논의하는 한, 이러한 예들은 모두 ‘행위(conduct)‘¹의 물음과 관련되어 있다고 우리가 말한다고 해도 큰잘못이 없을 것이다. 즉, 이러한 예들은 우리 인간 행위에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나쁜가. 그리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의 물음과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이 선하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언제나 그 사람이 올바르게 행동한다는 것을 대개 의미하기 때문이다.
:. 1) [역자 주] ‘conduct‘는 명사적 성격이 강한 행위‘로, ‘action‘은 동사적 성격이 강한 ‘행동‘으로구분하여 번역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두 개념이 의미상 차이가 없을 때에는 혼용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 P40
물론 윤리학이, 선한 행위가 무엇인가의 물음과 관련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P41
즉, 모든 행위가 선한 것이 아니며, 일부 행위는 악하고 또 일부 행위는 아예 선과 무관하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행위 외의 다른 것들도 선할 수가 있다. 만약 행위 외의 다른 것도 선하다면, ‘선‘은 행위 및 다른 것들에 공통적인 어떤 속성을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 P42
선 일반에 관해 어떤 확실한 결론을 얻은다음, 선한 행위의 물음을 해결하고자 시도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우리라 나는 기대한다. 왜냐하면 ‘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이미 꽤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제일 물음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악인가?"이다. 그리고 이 물음(혹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논의에 대해 나는윤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왜냐하면 어쨌든 윤리학은 이러한 논의를 포함함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 P42
3. 그러나 이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우리 각자가 "나는 지금 선한(good) 일을 하고 있다."고 혹은 "나는 어제 좋은(good) 저녁 식사를 했다."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진술들은, 비록 아마도 틀린 대답일 수도 있지만, 그 당사자에게는 지금 다루고 있는 우리의 물음에 대한 일종의 대답이 될 것이다.²
2) [역자 주] 영어 ‘good‘은 우리말로 ‘선한‘, ‘좋은‘ 혹은 ‘착한‘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 물론 윤리학 원리에서 무어는 선의 정의 물음을 주로 다루기에 대부분의 경우 ‘good‘을 선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무어는 도덕과 무관한 사물에 대해서도 ‘good‘이라는형용사를 사용한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 역자는 ‘선한‘이나 ‘선‘으로 번역하지 않고, 일상 어법에 맞게 ‘좋은‘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좋은 의자‘라는 표현은 적절하지만, ‘선한 의자‘라는표현은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What is good?"의 문장처럼 정의와 연관될 때 이는 그냥 ‘선‘을 뜻하기도 한다. 또 ‘the good‘의 경우도 사물을 포함하는 경우에는 ‘좋음‘으로, 도덕적 의미로만 사용될 경우에는 ‘선‘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 P43
4. 그러나 "무엇이 선인가?"라는 물음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책은 좋은 것이다."라는 대답은, 어떤 책은 참으로 아주 나쁘기 때문에 명백한 거짓이지만,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될 수도 있다. 그 대부분에 대해나는 다룰 생각이 없지만, 이러한 종류의 윤리 판단은 참으로 윤리학에 속한다. "쾌락은 선이다."라는 판단도 마찬가지이다. - P4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윤리학‘과 같이 덕의 목록을 포함하는 윤리학 저술들에서 내려지는 판단들은 바로 이러한 종류에 속한다. 그러나 이는 대개 윤리학과는 전혀 다른 탐구로 간주되고 있는 학문, 즉 훨씬 평이 좋지 않은 결의론(Casuistry)의 실질적 내용을 구성하는 판단과 정확히 동일한 종류의 판단이다. - P44
아무튼 결론은 보다더 특정의 문제를 다루는 반면에, 윤리학은 보다 더 일반적인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이는 이 두 학문이 정도에 있어서 다르다는 의미이지 결코 그유에 있어서 다르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이는 비록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의 ‘특정의(particular)‘와 ‘일반적인(general)‘ 이라는 개념에도 보편적으로 타당하게 적용된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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