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우리는 다음 날 저녁에 이케부쿠로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이케부쿠로에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는 나는 약속장소를 어디로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P116

분게이자에 있는 카페는 극장 안에 있다는 입지 조건 때문에아무리 생각해도 카페의 손님=분게이자의 손님일 텐데, 이상하게도 영화 마니아 분위기를 풍기는 손님은 늘 적었다. 안에 들어가 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카페였다.  - P117

주문을 받으러 온 웨이터에게 오야나기 감독이 들르지 않았느냐고 묻자, 감독을 알긴 하지만 요즘은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맥주 두 병과 피자 하나를 시키고 한동안 앉아 있었다. - P119

두 번째 간 술집은 ‘도리하치鳥八‘.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듯이 꼬치구이집이었다. 감독이 학생 때부터 단골로 드나들었던 가게라는데, (중략).
"옛날부터 영화감독이 꿈이라는 소리를 했지만 진짜 감독이될지는 몰랐지. 자, 한 잔 받아." - P119

우리는 다시 이케부쿠로의 네온사인 번쩍이는 길거리로 나와 오늘 마지막으로 들러볼 술집으로 향했다.
술집 이름은 ‘라메르‘. 우리 같은 젊은이들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운 고급 라운지였다. 마음을 굳게 먹고 들어갔는데, 역시 평소라면 들어올 곳이 아니었다. - P120

우리 테이블에 온 눈이 무척 큰 호스티스가 작은 목소리로 "시노부입니다" 하며 인사했다. (중략).
우리가 불편해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시노부가 말했다. - P120

"여긴 처음이에요?"
(중략).
"오야나기 도시조라고, 영화를...."
"어머! 도시짱을 알아요?"
- P121

"감독님 밑에서 일해요. 지금도 영화를 찍는 중이지만요.‘"
"알아요. <탐정영화> 맞죠? 여러 번 이야기했거든요. 맥주만시킬 거예요? 돈 때문이라면 괜찮으니까 더 마셔요. 아, 감독님이 드시던 술 내드릴까요?"
"아, 아뇨. 그건 좀......." - P121

"아, 그러니까, 그게 언제였지? 음, 어제다. 맞아요. 어제요. 요즘 내가 날짜 계산을 영 못하네. 왜 이러지?"
나와 미나코는 재빨리 눈빛을 교환했다.  - P122

술값은 딱 만 엔이 나왔다. 맥주 두 병과 안주, 얼음 값인데 비싼 건지 싼 건지 알 수 없었다. - P123

5

"그런 내용은 답변드릴 수 없습니다."
미리 준비해 간 감독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사람이 투숙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프런트의 젊은 직원은 답변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중략).
"이 친구의 아버지일지도 모릅니다."
미나코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역시 눈치 빠르게 고개를 숙이는 정도의 재치는 보여줬다. - P125

"그분은 틀림없이 이 호텔에 투숙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키노 마사히로³*라는 이름으로......."
직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중략).
"안타깝게도...... 한 시간쯤 전에 체크아웃하셨습니다."



*일본의 영화감독

3장

3. 마키노 마사히로, 牧野雅裕, 1908 - 1993 - P126

"<탐정영화>를 완성하는 거야."
"우리가?"
미나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 P128

la foli4장 피프회의


1

11월 23일 오전 열한시. 치프회의가 끝났다. 사무실에는 전스태프에 연기자들까지 모여 있었다. - P131

"오늘로 감독은 열흘째 행방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계속 손을 놓고 있다가는 개봉 날에 맞춰 영화를 완성하기 힘들어질 겁니다. -치프회의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각 파트가 협력하여 어떻게든 <탐정영화>를 완성한다."
당연한 결론이지만 사람들이 살짝 술렁거렸다. - P131

히사모토는 또 당신이냐는 투로 하스미를 바라봤다.
"우리에게도 발언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운명 공동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연기자라는 입장에서도 그렇고 투자자로서도 이 영화가 성공하지 못하면 큰일이니까. 잠자코 보고만있을 순 없어요." - P132

"이건 나만의 의견이 아녜요. 다 함께 결정한 겁니다. 영화의 결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걸 결정할 때는 우리도 참여했으면 해요. 연기를 하는 건 우리니까. 우리도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이 아니면 곤란합니다."
그다지 무리한 주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투자한 사람‘의 의견이기까지 하니 더욱 거절할 수 - P132

정말이지 지난번 전화도 그렇고 히사모토는 미나코와 내 문제에 지나친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설마 마흔 가까운 나이에 처자식까지 있으면서 미나코에게 반한 것은 아니겠지. - P134

"그렇다고 끙끙거리며 고민하진 마. 자, 여기서 특별 퀴즈!"
기운 내라는 듯이 미즈노가 멋대로 퀴즈를 냈다.
"<니켈로디언>¹에서 언급되는 D. W. 그리피스²의 영화 제목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왔다.
"<국가의 탄생>³"
・・・・・・ 그럼 <굿모닝 바빌론>에서 언급되는 영화는?"
"<인톨러런스>⁴...... 지금 문제 두 개 냈지?"


4장

1. LA, Nickelodeon, 1976.
2. D. W. 12, D. W. Griffith, 1875-1948.
3. 7, The Birth Of A Nation, 1914.
4. 2, Intolerance, 1916. - P135

나는 원래 추리력이 뛰어난 편이 못 된다. 추리소설을 좋아해 자주 읽기는 해도 돌이켜보면 범인을 맞힌 적은 없다. - P136

그런데 이 <탐정영화>는 짚이는 부분이 없었다. - P136

결국 바꾸어 말하면, 이때 내 머릿속에 있던 의문은 "누가 범인인가?‘가 아니라 ‘누가 범인이라야 제대로 된 영화가 될까?‘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저택의 여주인인 사기누마 준코의 죽음은 혹시 살인이 아닐까? - P137

2

몰아치는 비바람 소리를 뚫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중략). 그는 벌떡 일어나 숨을 죽였다. 비명은 저택 안에서 들린 것 같기도 했고, 밖에서 난 것 같기도 했다. - P137

"아가씨는 분명 조금 전에 욕실에 들어가셨.."
다카오는 깜짝 놀란 듯이 고개를 들더니 욕실로 달려갔다. 다쓰미와 야부이도 뒤따랐다.
다카오가 탈의실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 P139

"저는 사모님 방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호소노 선생도 어떤지 봐주세요."
혹시 모르니까,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그 말을 한 다쓰미도 알지 못하는 듯했지만 야부이는 아무것도 되묻지 않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 P140

돌아보니 이스즈가 비난이 담긴 눈으로 다쓰미를 향해 버티고서 있었다.
"여기・・・・・・ 이방 열쇠는 누가 가지고 있죠?"
"열쇠? 거긴 하야시 씨 방이에요. 아세요?"
"압니다! 하야시 씨 이외에 이 방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누굽니까?" - P143

"사기누마 준코 씨. 사모님은요?"
"글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가지고 있었을지도? 가지고 있었을지도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지금은 어떻다는 겁니까?" - P144

야부이가 바로 부정했다.
"말도 안 됩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죠? 이건 사고예요. 아니면 자살이겠죠. 거기 문이 잠겨 있죠? 보조열쇠는 저하고 사모님만 관리합니다. 설사 누가 방에 들어가 하야시 간호사를 밀어 떨어뜨렸다고 해도 문을 잠글 수는 없었을 겁니다." - P145

3

우리는 러시를 보고 토론에 들어가기 전에 화이트보드를 준비해서 사기누마 저택의 평면도를 그렸다.  - P145

호소카와는 아직도 모르겠느냐는 투로 두 손을 자기 가슴에 얹고 말했다.
"나죠. 당연하잖아요? 내가 아니면 대체 누가 범인이겠습니까?"
사실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은 심정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아니면 대체 누가 범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거죠?" - P146

호소카와는 호기롭게 자신을 ‘살인범‘으로 고발했다.
호소카와의 의견을 이상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니, 너무나도 당연한 추리였다. 그러나 그 점이 어려운 문제였다. 의사가 범인이라는 결말에 의외성을 느낄 관객은 한 명도 없을 테니까. - P148

그러면서 호소카와는 간호사 역을 맡은 모리 미키를 가리켰다. 갑자기 눈길을 받게 된 모리 미키는 불편하다는 듯이 고개를돌렸다.
"그럼 하야시 간호사의 방 열쇠는 어떻게 손에 넣은 거죠?"
히사모토가 가장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 P149

"그럴까요? 호소카와 씨가, 아니 호소노 의사가 투약 실수로 사기누마 준코를 죽게 만든 사실을 은폐하려는 것을 하야시 간호사가 알고 있었다고 하면, 당연히 의사가 자기 입을 막으려 들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 텐데요."
히사모토가 정확히 찔렀다. 호소카와는 얼굴을 찡그렸다. - P151

히사모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 세부적인 문제는 나중에 논의해도 늦지 않습니다. 자, 다른 의견은 없습니까?" - P152

"물론 가짜지. 아마 사기누마 준코는 병으로 글씨도 제대로쓸 수 없는 상태였을 게 틀림없어. 게다가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는 건강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글씨를 쓸 수 없지. 삐뚤삐뚤 엉망으로 써놓으면 누구 글씨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지."
소도구인 유서는 그냥 접은 백지였고, 내용이 화면에 나온 것도 아니라서 부정할 수 없었다. - P153

"거꾸로 이야기하면 내가 범인이 아닐 경우, 준코의 죽음은 자살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자, 준코가 진짜 자살했다고 생각합니까?"
어려운 문제였다. - P153

히사모토가 말했다.
"사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기누마 준코는 자살한 게 아니라, 애당초 죽지도 않았을 가능성 말입니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나도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 P154

"아, 아, 안 돼요! 우, 우리, 어, 엄마는, 침대에 누, 누워 있기만 하면 되. 된다고 해서 추, 출연한 건데……………"
그렇다!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왕년의 유명한 여배우, 사기누마 준코를 연기한 사람은 스도의 어머니였다! - P155

"아무리 재미있어도 앞뒤가 맞지 않으면 곤란하지."
"뭐라고?"
호소카와가 매서운 눈으로 하스미를 바라보았다. 하스미는 태연하게 그 시선을 받아내며 대꾸했다.
"투약 실수로 죽었다고 한다면 내가 가지고 있던 그 행방불명 관련 신문기사 스크랩은 뭐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건가?" - P156

4


(전략).
미스즈는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알리바이 시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분명히 의사가 수상쩍어. 하지만 수상한 사람이 그대로 범인이 되는 탐정영화가 과연 있을까? 하야시 간호사를 충동적으로 살해했다면 몰라도 호소노 의사 같은 인텔리가 알리바이 공작도 없이 그랬다는 건 이상하지 않아?" - P158

히사모토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끼어들었다.
"미스즈 씨는 대체 누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걸 먼저 말씀해주시죠."
미스즈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 얼굴을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물론 사기누마 이스즈죠." - P158

"내 말 좀 들어보겠어? 난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가 욕실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어. 발가벗은 채." - P159

나는 깜짝 놀랐다. 미스즈의 추리뿐만 아니라 이런 상황에도. 호소카와는 호소노 의사가 범인이라고 하고, 미스즈도 자기가 연기한 사기누마 이스즈가 범인이라고 한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잠시 그들의 표정을 살핀 뒤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호소카와나 미스즈나 자기가 범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 P159

결국 그들에게 감독의 실종으로 야기된 지금의 사태는 자기가 주인공으로 올라설 기회인 셈이다. - P160

사실은 역시 옷 벗기는 싫어 하는 비장할 정도로 결의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것도 오야나기 감독에게 단련된 연기일까?
"벗고 싶어서 벗는 거야 자기 맘이지만 난 아무래도 사기누마 이스즈가 간호사를 죽여야 하는 동기가 뭔지 모르겠네." - P161

히사모토가 내용을 정리하며 기록하는데 머뭇머뭇 손을 든사람이 있었다. 미술감독인 가와마타였다. (중략).
가와마타도 쑥스러운지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그러니까 그게, 욕실 문제 말인데요...." - P162

히사모토가 꼬박꼬박 재촉하지 않으면 가와마타는 설명을 이어가지 않았다.
"욕실 창문은 사람이 드나들 수 있게 만들지 않았어요." - P162

어떤 창문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잠깐만요. 드나들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죠? 창문은 충분히 크잖아요?"
미스즈가 당황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붙박이창이라 여닫을 수 없습니다. 양옆으로 비스듬하게 낸 작은 창은 열 수 있지만 기껏해야 15센티미터쯤 되는 틈이에요. 개나 고양이라면 몰라도 성인은 절대로 드나들 수 없습니다." - P163

내가 입을 열었다.
"저, 한 가지 제안이 있는데요."
(중략).
"예를 들어 아주 훌륭한 추리가 여기서 나왔다고 가정해보죠. 지금까지 전개된 스토리의 여러 수수께끼를 해결하고 재미까지 있는 추리가요."
"가정을 전제로 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히사모토는 지긋지긋하다는 투로 말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 P164

미스즈는 내 의도를 바로 깨달았는지 표정이 확 밝아졌다.
"맞아! 한신 정도라면 다시 찍어도 상관없잖아? 욕실 창문만 교체하고 같은 앵글에서 다시 연기하면 돼. 간단하잖아!"
히사모토는 얼굴을 찡그리며 턱을 괴었다.
"글쎄, 그게 어떨까? 촬영이 끝난 부분을 의심한다는 거야? 그러자면 한도 끝도 없어."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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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나코는 잠시 내가 제정신인지 의심하는 것 같았다. 아니, 진짜 의심했다.
"무슨 뜻? 그게 무슨 뜻이지?" - P104

"맞아! 무슨 이유이든, 한창 촬영중인 감독이 사라질 리가 없어. 이건 방해공작이야. 사보타주야!"
"사보타주라기엔 좀 지나치지."
"이 영화를 완성하지 못하면 FMW는 도산해 누군가 우리 회사를 망하게 하려는 거라고." - P105

3

다음으로 우리가 한 일은 다시 전화통을 붙잡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도쿄 안에 있는 유명 호텔들을 뒤졌다. - P106

"어쩌지? 좀 더 수준이 떨어지는 호텔에도 전화해볼까? 감독이 좁고 불편한 비즈니스호텔을 견뎌낼 수 있을까?"
내가 물었지만 미나코는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별 도리가 없었다. 우리는 작은 호텔까지 샅샅이 걸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은 얼마든지 있고, 전화요금은 감독의 부담이 될 것이었다. - P107

"아냐. 지방엔 당연히 많지만 도쿄에도 호텔보다 여관이 훨씬더 많을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정말이라니까."
"그럴 리 없어. 도쿄에서 여관이라니. 난 몇 번 본 적도 없는데." - P108

도쿄의 숙박시설이라는 항목을 보니 1988년도 집계가 나와있었다. 호텔은 481곳, 여관은 무려 2106곳이었다.
"이천! 이럴 수가. 이렇게 많으면 조사할 수 없어!" - P108

. 어쩌면 감독은 밤에 출발한 게 아니라 이른 아침에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쯤 맥도널드에 앉아 빅맥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파는 것과 같은 맛인지 확인하고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 P110

맞는 말이다. 직접 아는 사람일수록 소문이 퍼질 가능성은 더 크다. (중략).
히사모토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출자자나 매스컴에 들통 날 위험은 절대 피해야 해. 그것만은 피해." - P111

히사모토는 이케부쿠로 부근에 있는 술집 세 곳과 아카사카에 있는 요정 한 곳, 긴자의 고급으로 여겨지는) 스낵바 두 곳의 이름을 가르쳐줬다.
"위치는 알지? 모르면 술집에 전화해서 물어봐."
"술집에서 든 비용은 당연히 경비로 청구할 겁니다. - P112

"..... 할 수 없군. 하지만 최소한만 경비로 인정할 거야. 알겠어? 맥주 한 병과 간단한 안주 정도라면 경비로 처리해줄게. 물론 영수증이 있어야 인정해 그 이상은 네 돈으로 해결해."
미나코가 내 소매를 잡아당기며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 P112

"미나코? · 할 수 없지. 둘이 다니면 수상하게 여기진 않겠군. 알았어, 경비로 처리해줄게. 하지만 똑똑히 들어. 영수증 잊지 말라고. 뭘 주문했는지 내역도 꼼꼼하게 적어달라고 해. 맥주와 간단한 안주만 인정이다. 알았지?"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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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결혼할래?"
"뭐?"
난데없는 민석의 질문에 홍미는 삼겹살을 뒤집던 집게를 떨어뜨릴 뻔했다. - P50

"너는 가끔 도가 지나친 농담을 하더라." - P51

"소개팅해줄게."
"너 친구 없잖아."
"친구 말고 그냥 회사 사람."
"너 회사 사람들이랑도 안 친하잖아." - P52

 홍미는 그걸로 약간 안심이 되었다. 민석에게도 거절할 기회를 한 번 준 셈이니까 그걸로 공평해지지 않았을까. 홍미는 민석이 좋았다. - P54

. 양지는 고맙다고 말하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서 다시 쪼그려 앉았다. 홍미는 또 그 뒤통수를 지켜보았다. - P55

어떤 날에 양지는 악감정 같은 건 다 잊은것 같다. - P56

집까지는 승용차로 30분 남짓이었고그동안 경식은 옆 좌석에 앉은 홍미를 힐끔거리면서 자신의 연애사를 들려주었다.
"이런 얘길 해도 되려나." - P58

"홍미 씨도 어른이니까, 이런 얘길 해도되겠지."
홍미는 웃으면서 들었다. - P59

"그럼 같이 하나 만들까?"
홍미는 어안이 벙벙했다. 가끔 어떤말들은 무슨 뜻인지를 바로 알아채고 싶지가않다.
"내일 뵐게요." - P60

 이직을 결심하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보냈을 때 홍미는 자신이 갈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아주잘 알았다. 그런 걸 모른 척하고 살아가는 일이 불가능하다. - P61

그렇기 때문에 자잘한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날 밤 늦은 귀갓길에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서 뭔가 허전한 걸느꼈다. - P62

이제 홍미는 양지의 일기 중 절반 정도를 세단했다. - P63

"이거 뭐지?"
청소를 하는 날이었다. 세단함 속의 종이들을 꺼내다가 누가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홍미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 P64

일기장을 거의 다 갈고 겨우 한 권의분량이 남았을 때 홍미는 그 모든 것들을 야금야금 갈아버리지 말았어야 했나, 살짝후회했다. 하지만 그걸 남겨두어서 어쩌잔 말인가. 그건 결국엔 짐이 될 것이다. - P65

 단번에 모든 걸 포기하게 될지도 몰랐다. 홍미는 방으로 뛰어들어와 컴퓨터를 켜고 검색을하기 시작했다. - P66

홍미가 양지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결국 일기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홍미는 양지에 대해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기본적인 정보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게 될확률이 컸다. - P69

공씨가 홍미를 찾고 있다는 연락을받았을 때 홍미는 깜짝 놀랐다. - P69

 홍미는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일기는이미 없었기 때문이다. 일기는 이미 모두 세단해버린 뒤였다. - P70

"그거 제가 버렸어요."
무슨 권리로 그걸 다 버렸냐는 듯 공씨는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가진 지 아직 일주일도 안 됐으면서 어떻게 그걸버릴 수가 있냐는 표정이었다. - P71

공씨는 별다른 표정 없이 그종잇조각들을 보다가 누런 것을 가려내려는홍미를 만류했다.
"됐어요. 그만해요. 이만큼만 가져갈게요." - P72

"잠깐, 잠깐만 더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흥미가 숨을 헐떡이며 묻자 공씨는 근처 카페로 가자고 홍미를 이끌었다. - P74

오후 1시에 퇴근하고 점심을 먹으면서나집에 가는 길에 전화를 걸었죠. - P75

하루는 오늘 뭐 하셨느냐고 물으니까일기를 썼다 하더라고요. 일기도 쓰세요? 하고 물으니까 몇 년 전부터 소일 삼아 쓰기시작했대요. 제 얘기도 썼다면서 웃었어요. - P77

오히려 산전수전 다 겪은, 말하자면 때가 탈 만큼다 탄 사람들인데, 가끔 순수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늙을수록 애 같아진다는말이 그런 건가 싶더라고요. - P78

그래도 그 뒤로도 아주 가끔씩 전화했어요. 이미 봉사나 그런 게 아니라 친근한 사이가 되어있었으니까요. 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고 저도 할머니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 P80

 나는진짜 내 속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그게 너무서운했어요. 할머니는 왜 나한테 거짓말을 했을까요? - P81

그러고 얼마 뒤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들었어요. 처음에는 슬펐다가 자살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무서웠어요. 내 책임인 것 같아서요. - P82

일기는 전부 가짜였다. 사실이 써 있는것이 아니었다. - P82

"일기는 안 읽어본 게 차라리 나을지도몰라요. 공씨라는 사람에 대해 쓴 내용이많지만 사실이 아닌 것 같거든요."
(중략).
공씨는 그렇게 결론 내린 듯했다. - P83

"그리고 저는 이걸로 다 떨쳐버릴 거예요.
못 읽게 된게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르겠네요.
아가씨 말대로 어차피 다 거짓말이라니까." - P83

"옥상에서 뭘 태우는 건 불법이라고요."
홍미의 말에 공씨는 웃었다.
"그게 중요해요, 지금?" - P84

뿔테 안경 너머의 눈빛이 흰 담배연기가 뒤섞인 입김을 내뱉으며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 P84

 나는 왜 서둘러 늙어버렸을까. 아직도미처 써보지도 못한 새날들이 너무 많은데. - P86

일기장의 모든 것이 거짓인지는 알 수 없지만일부는 분명 가짜였다.
"희망 사항을 쓴 걸까? 누가 다녀갔으면 좋겠다고. 일어날 일들을 미리 연습해본거지." - P87

"집주인이 빚이 많나 봐."
(중략).
"인터넷에 물어보니까 내가 못 받을수는 없다. 소송을 걸면 내가 무조건 이기고소송비용도 주인이 내야 되니까 소송 걸기전에 아마 다 줄 거래. 그렇게 법으로 정해져있대." - P88

홍미는 잠깐 헷갈렸다. 법 없이도 산다는건 착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나.
"법 같은 건 상관없이 산다고. 배 째라하고 산다고." - P88

홍미는 제도가 양지에게 맺어줬던 공씨라는 사람을 떠올렸다. 양지는 법에 기대지 않고는 관계도 맺을 수 없는사람이었다. 왜 홍미를 찾아보지는 않았을까. - P89

"민석아, 나랑 결혼할래?"
"안 돼."
"왜, 전엔 하자며."
"생각해봤는데 그래도 친구가 한 명은 결혼식에 와야 할 것 같아서. 너 말고는 친구가 없거든." - P90

"이러다 혼자 죽으면 어떡하지?"
"매일 일기를 쓰자."
"그게 무슨 도움이 돼?"
"덜 심심하겠지." - P91

무표정하게 아무 대꾸도 않고있다가 언젠가 한번은 사장님, 심심해서그러세요? 하고 물어보았다.  - P91

얼마 뒤에 경식은 조용히 홍미를 불러서 회사 형편이 좋지 않아 인원 감축이 필요하다며 그만두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 P92

부당해고, 권고사직, 실업급여 같은 것들을 잔뜩 검색해본 다음에 홍미는 실업급여를 받으며 컴퓨터 학원에 다니기로 결심했다. - P92

홍미는 그날 밤 사무실에 갔다. 세단함에는 세단된 새하얀 종이들이 또 잔뜩있었고 홍미는 그걸 사장실 곳곳에 마구뿌렸다.  - P93

집으로 돌아온 홍미는 자신이 한움큼 집어 온 종잇조각을 좌식 책상 위에 펼쳐놓았다. - P94

한창때
달의 빛은
공짜다


홍미는 그것을 자신의 수첩에 잘끼워두었다. 할머니로부터 물려받기로 한것은 그게 전부였다. - P95

홍미는 밤 10시쯤 일찌감치 잠들었다가 깨서 자정이 넘은 것을 확인하고 문득 누구에게라도 새해 인사 메시지를보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P96

좋아하는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싶고 그걸미리 연습 삼아 해보고 싶었다고 말할까하다가 말았다.

-그럼 고민석의 명복을 빕니다.
-불길하게 무슨 소리야!
-이것도 연습 삼아 - P96

작가의 말

이 소설은 어느 자리에선가 "너는 왜이렇게 늙어 있냐?"라는 말을 들은 데서부터 출발했다.  - P98

(전략). 잘 알지도 못하는사람이 나를 알아보았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그러니까 어쩌면 그 사람의 말이 맞을지도모른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뒤이어 아주 늙어버린 여자와 아직 늙지 않았지만 서둘러 늙어버린 여자아이가 떠올랐다.  - P99

누군가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면 매일이 일종의 연습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생각부터 한다. 쓰고 버려지는 습작들을 떠올려서만은 아니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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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플 마니아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축하 편지가 다이어리와 달력이 든 상자와 별개로 왔다.

이상야릇한 감정이 든다.
특별한 일이라 생각하면 그건 그것대로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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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굉장하네!" 후터키가 고개를 저었다. "난 어땠는지 알아? 종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고...." "에이, 설마!"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종소리? 어디서?" "그걸 모르겠더라니까. 게다가 두 차례나 한 번 들리고 또 한 번." 슈미트 부인도 고개를 저었다. "정신이 나가려나 봐." "아니면 나도 그게 다 꿈이었으려나." - P18

. 후터키는 문가에 기댄 채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집 밖으로 도망쳐 나갈지를 궁리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어 보였다. 밖으로 나가려면 부엌을 통과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고 창문에서 뛰어내리기엔 그는 너무 늙어 기력이 없었다. - P19

 이 농장이 조성되고 2년이 지난 뒤에, 지금으로부터는 7년 전에 이곳이흥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처음 왔을 때처럼, 다 해진 바지에 빛바랜 윗옷을 걸치고 굶주린 빈털터리 신세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 P20

 "여보게, 아무도 없나? 슈미트!" 그는 목청껏 부르며 혹시라도 슈미트가 도망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재빨리 문을 열었다. 집을 빠져나가려고 막 부엌을 나온 슈미트 앞에 후터키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어허, 이것 봐라!" 그가 비웃듯이 말했다. "우리 이웃께서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려고?" - P20

 음침한 목소리로 후터키가 말했다. "돈을 들고 튈 작정이었지! 안 그래? 내 말이 맞지?" - P21

슈미트가 몸을 숙이며 왼손으로 식탁 가장자리를 움켜잡았다. "자네가 최근에 나한테 말이야, 여길 뜰 생각이 없다고 하지 않았으면 내가 이런 부탁도안 하지. 여기선 자네가 돈을 쓸 데도 없지 않겠나. 꼭 1년만이야.... 겨우 1년이라고! 우린 여기서 떠나려고 해. 알아. 떠나야만 한다고. 그런데 2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벌판의 단칸집도 못 산다고. 1만이라도 빌려주게, 응?" "내가 알바 아니지." 후터키가 화를 참으며 대꾸했다.  - P22

그는 죽음이 절망적이고 영구적인 종말이 아니라 일종의 경고라고 확신했다. "그냥 달라는 게 아니란 말이야." 슈미트가 자기도 지겹다는 듯이 말했다. "빌려달라는 건데, 이해가 안 돼? 차용하는 거지. 정확하게 1년 후에 한 푼도 모자라지 않게 돌려준다니까." 식탁의 두 사내는 의기소침했다. - P23

 후터키도 으르렁댔다. "자넨 크라네르와 작당을 해서 둘이 함께 해 뜨기 전에 튀려고했지. 그래놓고 나더러 믿으라고? 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내가 바보다 이거지?" 둘은 침묵했다. 화덕 앞에서 슈미트 부인이 접시를 딸그락거렸다. 두 사내는 담배를 말기 시작했다. - P24

 후터키는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종일이나 남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떡하고? 헐리치나 교장 말이야." 슈미트는 의기소침해져서 손가락을 비벼댔다. "나도 모르지. 헐리치는 아마 하루 종일 잠이나 잘 거야. 어제 호르고시네서 엄청 마셔댔거든. 그리고 교장? 지옥에나 가라지 신경 안써! 만일 그자가 우릴 훼방 놓으면 먼저 무덤에 들어간 빌어먹을 그의 엄마 곁으로 내가 보내버릴 테니까 진정하라고." - P25

"남쪽으로 갈 거야." 내리는 비를 응시하며 후터키가 말했다. - P25

 안쪽에서는 윗부분에 손가락 굵기로 난 틈에서부터 흘러내린 빗방울이 점점 고여 창틀을 메우고는 창턱까지 흐른 뒤 다시 방울방울 후터키의 무릎으로 떨어졌지만, 그는 먼곳을 떠도는 상념에 빠져 자기 옷이 젖는 것도 알지 못했다. - P26

 유리잔과 침대, 아카시아 가지, 차가운 바닥. 그는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따뜻한 물 한 대야! 아, 젠장! 난 날마다 족욕을 할 거야." 그의 등 뒤에서 슈미트 부인이 가만히울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괴로운 듯 다른 곳을 바라보고 섰다. - P27

"저기 헐리치 부인과 크라네르 부인, 교장과 헐리치가 가고 있어." "크라네르네가?" 슈미트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어디?" 그가 창가로 다가갔다. "극장에 가는 거겠지." 후터키가 확신하듯 중얼거렸다. - P28

 "영수증이야. 내가 자넬 속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거야." 후터키는 목을 비스듬히 하고 재빨리 종이를 읽은 다음 말했다. "셈하자고!" 그는 손전등을 슈미트 부인의 손에 쥐여주고는 번뜩이는 눈빛으로 슈미트가 뭉툭한 손가락으로 식탁 가장자리에 내려놓는 지폐를 노려보았다. - P30

 후터키는 지팡이를 찾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탁자에 주저앉았고, 슈미트는 헛것이 보이나 싶었다. "대체 뭐하는 거야!" 그가 소리 죽여 윽박지르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후터키는 개의치 않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불기 남은 성냥을 흔들어 끄며, 그만 포기하고 자리에 와서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 P31

일순 후터키와 슈미트는 말문이 막혔다. "장거리 버스 차장이 시내에서 두 사람을 봤다고 했다." 슈미트 부인은 이렇게 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마을을 향해 걸어가는 걸 봤대. 날씨가 이렇게 엉망인데! 차장 말로는 두 사람이 엘레크로 가는 갈림길에서 농장 쪽을 향해 가더라는 거야." - P33

"그게 사실이라면…." 그녀가 눈을 빛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슈미트가 퉁명스럽게물었다. "하지만 둘 다 죽었잖아!" "그래도 사실이라면..." 이번엔 후터키가 슈미트 부인의 말을 이어가듯 낮게 말했다. "그렇다면 호르고시의 아들놈이 예전에 거짓말을 한 게지." - P34

"그들은 1년 반 전에 죽었는데, 1년 반 전이라고! 누구나 그렇게 알고 있어. 그런 사실을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되지. 속임수에 넘어가면 안 돼! 이건 덫이야. 알겠어? 덫이라고!" 후터키는 듣고 있지 않았다. 벌써 외투의 단추를 잠그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제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가는 걸 보게 될 거야." - P35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난 갈 테니까, 당신은 마음대로 해." 후터키가 코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들이 정말로이곳에 있다면 말이야." 그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자네는 이리미아시에게서 도망칠 수 없을 거야. 그렇지?" - P36

그녀는 빗물에 얼룩지는 유리창 너머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두 남자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차바퀴 자국이 깊게 난 길의 웅덩이를 피해 걸으며 술집으로 갔다. 후터키는 담배를 말아 물고 흡족하고 희망에 부푼 기색으로 연기를 뿜었다. 모든 긴장이 사라졌다. - P37

사나운 빗줄기 속에서 슈미트의 욕설과 후터키의 기대에부푼, 기운을 북돋아주려는 말이 뒤섞였다. 후터키는 말하고또 말했다. "짜증 내지 말라고. 보란 듯이 잘살 수 있게 될 테니까! 흥청망청 마음껏 즐기며 살 거야!" - P38

2

우리는 부활한다
We Are Resurrected


머리 위의 시계가 벌써 10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들이 달리 무엇을 기다렸다고는 할 수 없었다. - P41

어지러운 생각들이 몇 분 동안 소용돌이치다가 허약하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쓸모없는 문장들이 만들어져 나온다. 그것은 급조된 다리처럼 세 걸음만 걸으면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그 다음 내딛는 마지막 발걸음에 와장창 무너지는 것이어서, 결국에는 지난밤 관인이 찍힌 소환장을 처음 받았을 때 빠져들었던 소용돌이 속으로 거듭해서 휘말려 들고 마는 것이다. - P42

"비와 나뭇가지라." 그는 마치 오래 묵은 와인을 음미하고 몇 년산인가를 알아맞히려는 것처럼 그 말을 혀에 올려 따라 해보지만 단지 시늉을 할 뿐이고 그로서는 어떤 말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 P44

"봐, 저자들은 일부러 이러는 거야. 말하자면...." 큰사내가 맥없이 웃는다. "오줌 지리지 말고 귀나 세워 다시 처졌잖아." - P45

귀가 처진 사내는 불쾌한 듯조금 떨어져 앉고, 그의 작은 머리통은 외투 깃에 가려져 거의보이지 않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잖아." 그가 자존심 상한 듯이 웅얼거린다. - P46

 마치 방문자가 당황한 나머지 잘 손질한 외투 밖으로 남루한 멜빵바지를 노출하거나 신발 밖으로 구멍 난 양말을 드러내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 - P47

상관은 기운없이 뒤로 몸을 기대고 두 사람을 천천히 훑어본다. 그러다 표정이 밝아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쪽 벽의 작은 문을열고 들어가며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기다리게 허튼짓하지말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몇 분 뒤, 키가 훌쩍 크고 대위 계급장을 단 파란 눈의 남자가 그들 앞에 나타난다 - P49

"잠시만요!" 그는 주머니에서 소환장을 꺼내 의기양양하게 들어 보인 뒤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대위가 그걸 힐끗 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호통을 친다. "글도 읽을 줄 몰라요? 맙소사! 여기가 몇 층입니까?" 두 사내는 뜻밖의 갑작스러운 호통에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아, 그렇지요." 작은 사내가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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