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우리가 알고 있는 양은 많지 않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양은 광대하다.
-피에르 시몽 리플라스가 남긴 마지막 말


(전략).
예외적인 대칭 대상물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몬스터(nonster 괴물라고 불렸다.  - P8

그때까지 구체적 모습을 구성해내지는 못했지만 여러 데이터를 면밀히 살펴본 결과, 연구자들은 몬스터가(만일 실제로 존재한다편) 196,883차원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맥케이는 수론 분야의 논문을 읽고 있다가 196,884라는 수를 보았다.
그는 크게 놀랐다. 수론 분야에 속하는 대상물이 몬스터와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로 보였다.  - P9

콘웨이는 이 연관성을 ‘문샤인(moonshine)‘이라고 이름 붙였다. - P10

대칭의 수학적 연구에서 몬스터로 옮겨가는 과정을 기술하려면 많은 지면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내용을 몇 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가능하다. (중략). 26개의 예외적 대상물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몬스터이다. - P11

몬스터가 다른 수학 분야와 관련성이 있다는 사실은 심오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아무도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입자물리학과의 관련성도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는 형편이다.  - P13

1

테아이테토스의 정이십면체


수학에서 이해라는 것은 없다. 단지 익숙해질 따름이다.
-존 폰 노이만

(전략).
플라톤의 정다면체의 존재성은 단순 모델을 구성하는 방식으로는 확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도 그 그림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테아이테토스가 천착한 문제는, 각각의 면이 정삼각형이나 정사각형, 혹은 정오각형이고 모든 각이 동일하며 모든 모서리가 같은 길이를 갖는 입체 도형을 이론적으로 작도하는것이었다. 이는 대칭에 관한 문제이다. - P15

고도의 대칭성을 지닌 대상물을 찾는 것은 이 책의 후반부에서 다루는 주제이며 플라톤의 정다면체는 항시 염두에 두어야 할 좋은 원형이다.  - P16

(전략). 또한 회전과 거울 대칭을 연이어 적용할 수도 있다. 정육면체에는 많은 개수의 대칭이 존재한다. 과연 몇 개나 될까? - P17

답은 48개이다. 이 48개의 대칭들이 모여 이른바 정육면체의 대칭군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회전만으로 얻는 대칭들을 모으면 모두 24개*가 되는데 이들은 부분군을 이룬다.

*회전 대칭이 24개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정육면체에는 여섯 개의 면이 있고 이 여섯 개는 각기 맨아래에 위치시킬 수 있다. 그리고 밑에 위치한 면을 네 개의 위치로 옮겨가도록 회전시킬 수 있다. 따라서 6×4=24를 얻는다. - P18

19세기에 수학자들은 대칭군을 좀 더 단순한 군들로 분해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군을 ‘원자 대칭군‘ **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 수학자들은 ‘단순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단순‘이라는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매우 복잡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원자 대칭군이란 더 간단한 군으로 분해되지 않는 군을 의미한다. - P18

대칭을 의미하는 symmetry라는 단어의 두 어근은 그리스어에서나왔다. syn은 ‘함께‘ 라는 뜻이며 metry는 ‘측량‘을 뜻한다. 두 개 이상의 대상물을 함께 측량한다는 개념은 매우 유용한 개념이며 이 주제에 대한 괴테의 생각은 이미 프롤로그에서 언급하였다 - P20

갈루아는 대칭을 이용해 심오한 문제를 해결한 최초의 수학자였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수학 분야의 틀을 만든 사람이다. - P21

2

갈루아-한 천재의 죽음


학생은 모름지기 누더기에 맨발로 학문의 전당에다 불경을 저질러야 한다. 지식을 숭배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지식에 의문을 제기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기 때문이다.
-J. 브로노우스키, 「인간 등정의 발자취」



(전략). 그러나 혁명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덧없는 것이었지만 수학자로서의 그는 불멸로 남아 있다. 갈루아 이론과 갈루아 군은 오늘날 수학에서 자주 접하는 주제이다. - P24

한편 그해 가을에 새로 부임한 수학 교사 루이 리샤르(Louis P. É.
Richard)는 갈루아의 뛰어남을 곧바로 간파했다. 그는 갈루아가 아날레드 마테마티크(Annales de Mathématique)」에 독창적인 논문을 제출하도록 격려했고 (중략). 리샤르는 논문초고를 과학원 회원인 코시(Augustin L. Cauchy, 1789~1857)에게 직접 가져갔다. 코시는 거의 예외를 두지 않고 자신의 논문만을 과학원에서 발표했던 수학자였다. (중략). 좀 더 면밀하게 검토하도록 과학원 회원들은 코시에게 집으로 가져가게 했지만 코시는 논문을 분실하고 말았다. - P26

갈루아의 기본 아이디어는 대수방정식의 해에 대한 것이다. - P28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던 문제를 풀거나 새로운 내용을 발견하는 것이 수학 연구의 큰 기쁨이지만 새로 발견한 결과를 비밀로 해두는 경우도 있다. 필요한 세부 사항을 확인하고 나서 발표할 준비가 될 때까지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두려는 까닭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아이디어를 가져다가 세부 내용만을 덧붙여 자신의 연구성과라고 우길 우려가 있다. - P30

현재의 시점에서 그때를 돌아보면 델 페로, 타르타글리아, 카르다노, 페라리 모두 천재였다고 말할 만하다. 과학사학자인 조지 사턴(George Sarton)이 말하고 있듯이 이 네 사람은 과학사를 통틀어 가장기묘한 집단이었다.⁶ - P32

6) George Sarton, Six Wings: Men of Science in the Renaissance, IndianaUniversity Press, 1957, p. 28. - P306

거의 250년이 지난 뒤에야 라그랑주(Joseph Louis L. 1736~1813)가 「방정식의 대수적 해법에 대한 고찰」이라는 매우 영향력있는 논문을 썼고 이 논문으로 대수학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5차 이상의 방정식 해법은 어느 누구도 찾아내지 못했다. - P32

가우스는 1799년에 이렇게 썼다. "많은 기하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고려할 때일반적 방정식의 해를 대수적으로 얻어낼 희망은 밝지 못하다. 해법은 불가능하며 모순되는 듯 보인다."⁷ - P33

7) Jean-Pierre Tignol, Galois Theory of Algebraic Equations, Englishtranslation, Longman, 1988, p. 274. - P-1

아벨의 논문은 제곱근, 3제곱근, 4제곱근 등의 거듭제곱근으로는그 근을 나타내지 못하는 5차방정식이 존재함을 보였다. 일부 방정식에 대해서는 그런 방법으로 해를 나타낼 수 있지만-예를 들어 2의 해를 얻으려면 2의 5승근을 취하면 된다.-어떤 방정식은 가능하고 또 어떤 방정식은 불가능한지 밝혀내는 것이 문제였다. - P34

한편으로 갈루아는 제출해놓은 두 편의 논문에 대한 답변을 목이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코시는 갈루아의 논문을 집으로 가져갔지만 자신의 연구에 정신이 팔려 갈루아의 논문을 제때 살펴보지 못했다. (중략). 갈루아는 논문을다시 써서 마감일인 3월 1일 직전에 제출했다. 푸리에(Jean B. J., Baronde Fourier, 1768~1830)는 갈루아의 논문을 집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5월15일 푸리에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갈루아의 논문은 행방불명이 되었고 심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 P36

3

무리수 근



탈레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아는가라는 문제였다.
-아리스토텔레스


갈루아의 연구가 뛰어난 이유는 대담한 아이디어가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 P43

무리수의 존재를 처음으로 깨달은 이들은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이다. (중략). 그들은 삼라만상을 정수와 정수의 비로 나타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정사각형에서 대각선과 한 변 사이의 비가 무리수라는 사실을발견하고서 당혹감을 느꼈다. 그 때문에 결속력에 문제가 생겼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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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유지


승리 후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승자와 타인의 심리전


‘승리‘라는 단어에는 강렬한 쾌감이 뒤따른다. 시험에서일등을 하거나, 경쟁자를 제치고 승진하거나, 원하던 사람과 연애할 때 느끼는 그 달콤함. 문제는 바로 그 순간, 대부분의 사람이 무방비해진다는 것이다. - P265

마키아벨리스트는 숨어 있다가 ‘기회‘를 엿본다. (중략).

나르시시스트는 ‘승자의 자리‘를 탐낸다. (중략).

사이코패스는 ‘공포‘를 이용한다. (중략).


승리 후의 방심은 단순히 개인의 교만 문제가 아니라,
주변에 포진한 ‘은밀한 적‘을 불러 모으는 신호탄이 된다. - P267

승리 뒤의 그림자

우리는 승리를 만끽하면서도, 그 이면에 어떤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는지 자주 간과한다. 

(중략).

사람들은 승자에게 무의식적인 질투를 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저 자리가 내 것‘이라는 욕망을 드러내기도한다. 그렇다면 과연 ‘승리‘란 무엇인가? - P268

다크 심리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한 사람이라면, ‘승리 후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격언의 의미를 바로 깨달을것이다. 이것은 단지 겁을 주는 말이 아니다. - P270

패배가 무서운 게 아니다. 진짜 무서운 건 승리에 취해모든 감각을 잃는 것이다. - P271

DARK APHORISM


삶의 무기가 되는
다크 심리 기술



당신이 만약 ‘다크 심리 기술‘을 어설프게 시도한다면, 상대방의 분노를유발하는 등 오히려 역효과를 당할 위험성이 있다. 또한 뒤집어서 생각하면, 이러한 방식으로 당신에게 접근하는 사람을 경계하라.




‘다크 심리학‘은 상대방의 심리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심리 조작(PsychologicalManipulation)‘과 일부 중복되지만, 그 접근 방식과 목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심리 조작은 ‘조종자의 마음대로 상대방을 몰아간다. 반면 다크 심리학은 ‘심리의 작동원리‘를 이해해 상대방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 P273

#2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방법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싶다면, 다섯 가지를 기억하라.

첫째, 상대방이 과거 사건을 회상하면서 갑자기 현재 시제‘로 말하기 시작한다면,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거짓말쟁이는 자신의 거짓말을 더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 종종 실제 기억에서 ‘일부 세부 사항‘을 빌려온다.

(중략).

‘사람의 마음은 얼마든지 숨길 수는 있지만,
표정, 몸짓 등 비언어적 표현으로 알 수 있다.‘ - P277

#4

시선을 읽거나, 시선을 끌거나


(전략).
갑자기 시선을 멈추는 건 내면이 흔들려서다.
그 시선을 읽을 줄 안다면,
상대방의 속마음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선을 읽거나, 시선을 끌거나
어떻게 시선을 쓰느냐에 따라 관계가 달라진다. - P279

#5

때론 ‘몸짓 언어‘를 사용하라

분위기를 장악하고 싶다면,
적절한 몸짓 언어(Body Language)를 사용하라.

(중략).

둘째, ‘웃는 얼굴‘을 너무 많이 보이지 마라.
웃는 얼굴을 남용하면 경계심을 없애고,
경계심이 없는 사람은 만만해 보인다.

(중략).

‘때론 말 한마디보다, 몸짓이나 태도가 정확하다.‘ - P280

#7

명령하지 말고 유도하라

(중략).

첫째, 선택지는 제한하고 유도하는 질문을 하라.
둘째, 직접 선택하고 동의했다는 점을 강조하라.
셋째, 강제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다고 알려줘라. - P283

# 8

‘이해의 착각‘에서 벗어나라

당신은 그들에게 이해받았던 적이 없다.
그저 ‘이해받고 있다‘란 착각에 빠져 있었다.

(중략).

‘이해받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이해하려는 노력을 주고받아야만 한다‘ - P284

#12

순응하지 말고, 불복종하라


불복종은 일종의 신호다.

(중략).

‘권위자의 명령이나 조직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처한 상황에 따라 거절하는 불복종도 필요하다.‘ - P288

#14

사실이 아닌, 사실처럼 보이는


거짓말은 굳이 하지 마라.
사실(Fact)은 아니지만,
‘사실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말하라.

(중략).

‘레토릭(Rhetoric)‘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
레토릭의 원리와 기법을 이해하고 활용하라,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믿으며,
사실이 아닌 자신에게 필요한 확신을 믿는다‘ - P291

#17

상대방을 내 편으로 만드는 법


(전략).

사람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수록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역설적인 심리가 있다. - P296

이러한 현상을 벤 프랭클린 효과(Ben Franklin Effect)라고 한다.
실제로 미국의 정치가 벤 프랭클린(Ben Franklin)은 자신의 정적에게 일부러 책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책을 빌려준 상대방은 프랭클린을 싫어하지 않게 되었고, 이후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후략).

‘상대방을 내 편으로 만들고 싶다면, 먼저 그 사람에게 부탁을 해보라‘ - P297

#19

상대방의 속마음을 알아내는 법


(전략).

그러므로 질문 대신에 ‘문장‘을 사용하라.
(후략).

그러니 의도를 감추고, 의견처럼 말하라.
그러면 상대방은 정정하려 들 것이고,
그 정정 속에는 진심이 섞여 나온다. - P300

#22

마음도 거래가 된다

(전략).

당신의 작은 고백은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빚진 상태‘로 만들고,
속마음을 쉽게 끌어낼 수 있게 한다.

(중략).

‘사람의 마음이란 가장 은밀한 거래이다.
진심을 알고 싶다면 먼저 작은 대가를 지불하라‘ - P304

# 23

길들여진 선택

은밀하게 결정을 유도하고 싶다면,
당신이 원하는 선택을
다른 사람들의 예시로 포장하라.

(중략).

‘결국 독립적인 결정이란 환상일 뿐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타인의 결정에 조종당한다.‘ - P306

#24

사랑과 돈의 상관관계

(전략).

사랑이 영원할 거라 믿고 싶지만,
현실에서 모든 관계는
돈 앞에서 무너지고 흔들린다.

(중략).

‘모든 관계의 밑바닥엔
돈이라는 차갑고 무정한 현실만 남는다.‘ - P308

#28

누군가가 당신에게 소리를 지른다면, 그 사람의 눈을 보고 이렇게 말하라.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말한 게 전부 사실이군요."
그러면 상대방은 더 이상 말하지 않을 것이다. - P311

#30

상대방의 말이 거짓인지 알고 싶다면, 그의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하라. 누구나 거짓말을 할 때는 행동이 눈에 띄게 변한다. (후략). -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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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나는 지미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던 열세 살부터 알고 지냈다. 그때 프랭크는 틈틈이 지미에게 - P97

오늘 밤 지미와 니나는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다. 나는 두 사람이 함께해서 마음이 놓였다. 레오를 돌봐주기 시작한 뒤로 저녁에 프랭크와 대화할 때마다 긴장이 감돌았기 때문이다. - P98

"오늘 저녁엔 우리가 들러리 노릇을 할 것 같은데." 지미가 프랭크에게 말했다.
"언제는 안 그랬어?" 프랭크가 말했다.
"베스, 새로운 일은 어떤지 얘기해 줘요." 식탁에 앉자 니나가말했다.
나는 언제나 어려운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사람이었다. - P100

니나가 식탁에서 일어나더니 지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니나가 무릎을 굽히는 그 순간, 우리 모두 깨달았다. 지미는 프랭크를 보았다. ‘이게 진짜라고?‘ 하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 지미의 얼굴은 당황스러움에서 경이로움으로 바뀌었다.
"지미 존슨, 내 하나뿐인 사랑, 나와 결혼해 주겠어? 네가 청혼하기를 기다렸다가는 노처녀가 될 것 같은데." - P102

"그럼 결혼식은? 여기서 하자" 내가 말했다.
"이런 결혼식 생각을 못 했어요." 니나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모든 사람을 초대할 거예요. 마을 사람 전부 다. 이제 파티를열 때가 됐다고요." 지미가 말했다.
블레이클리 목장에서 열리는 결혼식이라는 콘셉트에 우리 모두 흥분에 휩싸였다. - P103

과거


나는 메도랜즈에서 열리는 만찬 모임에 갈 준비를 마치고 어머니의 침실에 있었다. 언니 엘리너도 같이 있었는데, 언니는 어머니 침대에 늘어져 패션에 대한 조언과 울프 가족에 대한 비아냥을 쏟아내고 있었다. - P104

내가 도착했을 때쯤 만찬 모임은 한껏 무르익었다.
"왔구나, 우리 베스" 다이닝룸에 들어선 나를 보자 테사가 말했다. 그곳에는 게이브리얼, 그의 부모, 미국에서 온 친구들 몇 명이 모여 있었다. - P105

나는 오늘 저녁을 위해 차려입었다고 생각했지만 루이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루이자는 끈 없는 검정 새틴 드레스를 입고 어여쁜 목에는 딱 달라붙는 진주 목걸이를 둘렀으며 과감하게 가슴골을 드러낸 채 이 가족 파티에 등장했다. - P106

리처드는 새로운 총리 앤서니 이든Anthony Eden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처칠이 떠나서 슬픈지 묻는 등 나를 어른처럼 대했다.
나는 부모님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읊었다. 한때 처칠이 훌륭한 정치인이기는 했으나 이제 은퇴해야 할 때이고 이든은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부모님은 보수당 지지자였으나 그 이야기는 혼자만 간직하기로 했다. - P107

약간의 추궁 끝에 스콧 가족에 대한 정보를 일부 짜맞출 수있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 할리우드 힐스Hollywood Hills에 살았다. - P108

"앨프리드 히치콕과 아는 사이세요?" 유명인 때문에 들뜬 목소리였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음, 남들만큼은 알지. 그 사람은 혼자 틀어박혀 지내는 성격이라." - P108

게이브리얼은 그런 사람이었다. 부모님과 여자 친구를 비롯해아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할리우드 제작자에게 자기 아이디어를 발표하라고 요청받는다면, 나는 떨려서 그대로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게이브리얼은 정반대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며 할말을 정리했고 우리는 기다렸다. - P109

게이브리얼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테사가 끼어들었다. (중략). 테사는 나를 바라보았다. 의도가 뻔했다. "베스, 솔직하게 대답해 보렴. 좋은 조건으로 결혼할 기회가 생겨도 거절할 거니?" - P109

"좋은 조건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뭔데요?" 나는 답을 피하며 되물었다. "그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를 것 같은데요."
‘테사, 예를 들자면 당신의 결혼은 내가 본 그 어떤 결혼보다 문제가 많고 망가져 있는걸요.‘ - P110

나는 화가 나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남자들은 성적 능력이나 침대 기둥에 새긴 ‘정복한 상대‘의 수를 과시해도 끊임없이 칭송받는다. 반면 여자들은 감히 똑같이 했다가는 조롱당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조롱을 퍼붓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여자들이다. - P112

1968년

(전략).
게이브리얼의 말에 따르면, 그가 레오의 양육권을 임시로 갖게 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내 스스로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것에 대해 죄책감을 심하게 느껴서 레오에게 선택권을 주었기때문이었다. - P113

"아줌마는 내 편을 들어줄 줄 알았어요."
레오는 평소답지 않았다. 날 선 목소리에서 불안이 느껴졌다.
목멘 소리를 하는 걸 보니 눈물을 참고 있는 듯했다.
"난 네 편이야. 완전히 그리고 네 엄마도 그럴 거야. 내가 하고싶은 말은 이것뿐이야." - P115

잠시 후, 레오는 게이브리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중략).
"제법인데." 게이브리얼은 레오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그래, 우리 시골 소년이 아빠 모르게 또 뭘 배웠을까?" - P116

하지만 잠시 후 나를 바라본 게이브리얼의 눈동자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왜 이러는 거야? 왜 레오에게 죽은 네 아이 이야기를 하는 거야?‘ - P117

과거

여름이 저물자 헴스턴은 계절의 변화에 맞춰 모습을 바꾸었다. (중략).
처음에 그는 끊임없이 편지를 썼다. 그리움으로 불타고 시처럼 읽히는 편지였다. 그러다가 학기가 진행되고 대학 생활에 점점 몰두하게 되자 편지가 달라졌다. 열정은 사라졌고 다급하게, 더 안 좋게는 의무감에 쓴 느낌이었다. - P117

나는 11월에 있을 세인트 앤스 면접을 준비하느라 파티 초대를 거절했고, 눈이 아파서 책을 덮을 수밖에 없을 때까지 밤낮으로 공부했다.
"너무 무리하는구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며 같이 산책을 나가 맑은 공기를 마시며 기분 전환을 하자고 구슬렸다. - P118

(전략).
우리는 방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옷을 찢을 기세로 벗기 시작했다. 알몸으로 게이브리얼의 침대에 누워 오랜만에 그의 살이내 살에 닿는 느낌을 만끽했다. - P119

"너한테 옥스퍼드를 보여줘야겠어." 몇 시간 뒤, 여전히 침대에누운 채 게이브리얼이 말했다.
(중략).
"누구 생일 파티?"
"토머스 니컬스, 톰이라고 있어. 2학년이야."
게이브리얼은 약간 망설였다.  - P120

처음 파티에 갔을 때는 짜릿하고 흥분됐다. 톰과 루이자는 학생 둘이 살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큰 집에서 함께 지냈는데, 사방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 P121

나는 전형적인 부잣집 여자들처럼 니트 카디건과 스웨터 세트를 입고 여러 겹의 진주 목걸이를 한 글로리아, 클라우디아, 이머전을 보며 미소 지었다.  - P122

나는 이 질문이 지긋지긋했고 나 자신도 너무 지긋지긋했다.
사실 면접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 P124

나는 가까스로 미소 지었다. "게이브리얼이 자기 글에 워낙 비밀스러워서 사실 우리 둘 다 그래."
"혹시 내 얘기 중?"
게이브리얼이 와서 우리 사이에 서며 미소 지었다.
그를 보자마자 루이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 P124

"베스에게 네 멋진 소설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이야 루이자는 이렇게 말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루이자를 보고 있지 않았다. 게이브리얼을, 볼이 빨개진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불편해 보였다. - P125

버스 내 눈에 보이는 네 모습이 네게도 보이면 좋을 텐데, 넌 파티장에 있던 수많은 여자애들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이야" - P126

1968년

(전략).
"서른 번째 생일은 평생 한 번이잖아." 프랭크는 이렇게 말하며 호텔 앞에 차를 세웠다.
우리는 호텔의 모든 것에 흥분했다.
(중략).
"돈 걱정은 하지 말랬잖아. 한 번도 안 쓴 오래된 트레일러를 팔아서 여유 자금이 좀 생겼어. 이제 다른 말은 하지 않기로 약속해." - P127

저녁 식사 때는 식탁 위로 손을 맞잡고 근엄한 웨이터가 추천한 비싼 와인을 마셨다. 둘 다 주눅이 들어서 더 싼 와인을 추천해 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아무렴 어때? 당신 생일인데." 프랭크가 와인 잔을 부딪치며말했다. - P129

비싼 와인을 순식간에 마셔버리자 웨이터가 한 병 더 마시겠느냐고 물었고, 프랭크는 좋다고 대답했다.
"언제 이런 걸 해보겠어? 아내와 함께 취하니까 좋은데"
두 번째 병은 실수였던 것 같다. - P130

우리는 바비가 죽던 날에 후회스러운 일이 너무도 많았다. 그 일들을 제대로 했더라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 P131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는 괜찮아질까? 우리 둘 다 잃어버린 아이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않을 때가 올까? - P131

과거

(전략). "널 두고 가야 하다니 고문이 따로 없네. 확실한 건, 수업 시간 60분 동안 가웨인을 생각할 틈이 없겠는데."
"빠지면 안 돼? 이번 한 번만?"
게이브리얼은 손 글씨가 빼곡한 큰 종이를 몇 장 꺼내 보였다.
"안타깝게도 이번 주에 제출해야 할 과제가 있어. 오래 안 걸릴거야." - P133

그때 초록색 공책이 눈에 들어왔고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뻗었다 펼치려는 찰나 내가 뭘 보게 될지 퍼뜩 떠올랐다. 이건 게이브리얼이 쓴 소설인 것 같았다. - P134

하지만 공책을 펼치자마자 소설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게이브리엘의 일기였다 - P134

나는 얼른 공책을 덮었다. 다른 사람의 일기를 읽는 것은 최악의 기만행위이자 아주 저급하고 추악한 짓이었다. - P135

파티에서 본 루이자가 게이브리얼이 우리 쪽으로 왔을때 기뻐하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중략). 그리고 게이브리얼의 얼굴이 빨개전 것도 똑똑히 보았다. 배신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겠지.
나는 그날 일기를 다시 읽었다. 이제 단어 하나하나가 반박의 여지가 없는 증거로 보였다. - P136

나는 원래 내 옷을 서둘러 입고 기분 나쁜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중략).

게이브리얼, 다 끝났어.
더 이상 널 안 볼 거야.
이유는 네가 잘 알겠지.
베스가 - P137

그리고 잠시 후, 게이브리얼이 정신없이 역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나를 찾아낸 그가 물었다. - P138

"차라리 다행이야. 사실대로 말할 배짱 같은 건 없을 테니까도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우리 둘을 농락할 셈이야? 네 어머니가 너에 대해 경고했지. 넌 사람들을 이용하고 싫증 나면 다음 사람으로 갈아탄다고. 네가 옥스퍼드에 가자마자 날 싫증 낼 거라고 그 말을 귀담아들을 걸 그랬어."
나는 최악의 말을 내뱉고 말았다.
게이브리얼의 분노가 다른 무언가로 바뀌었다. - P138

"가야 하잖아" 게이브리얼은 계속 나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
‘네 말이 맞아. 우린 끝났어" - P139

2.바비


과거

바비는 폭풍우가 한창이던 어느 날, 주방 바닥에서 태어났다. 하루 종일 바람이 집 창문을 어찌나 거세게 흔들던지, 가끔은 창문이 날아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 P142

옥스퍼드 입학 제안을 거절하고서 몹시 속상했다. 특히 그 일로 어머니가 무척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게이브리얼과 루이자와 같은 동네에서 2년을 보내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그렇게 할수는 없었다. - P143

사람들은 내가 게이브리얼과 헤어지고 프랭크와의 연애로 자연스럽게 넘어가서 놀랐을 테지만, 그 놀라움을 굳이 표현하지는 않았다. - P144

1968년


니나의 아버지는 컴퍼스 인에서 술을 무료로 대접하며 두 사람의 약혼 파티를 열고 싶다고 고집했다. 나는 금요일 밤에 공짜 술을 주면 잘해봤자 사람이 몰려들어 소란을 피울 테고 최악이면 싸움이 나서 쑥대밭이 될 수 있다고 말할까 했지만, 술집 주인이니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 P150

나는 그의 체격을 견디지 못하고 곧 부서질 것 같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올라가서 쉽게 균형을 잡고 숟가락으로 잔을 두드리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결혼식은 블레이클리 목장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 P151

지미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헬렌과 나는우리끼리만 통하는 눈빛과 절반쯤 잘린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프랭크는?" 헬렌의 말에 우리는 한 발 떨어진 곳에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는 프랭크를 바라보았다.
"좋아. 우리 둘 다." 내가 말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실이었다. - P153

다들 파티에 열이 올라, 동네 경찰관 앤디 모리스가 한 손으로 지미의 등을 받치고 일으킬 때까지 그가 얼마나 취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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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나는 결심했지. 그토록 내가 숨겨왔던 것을기록하기로 타인이 기대하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구, 나를 결코 가만 놔두지 않고 매춘이라는 극단적인 지경으로까지 내몬 유혹에의 욕구 뒤에 숨겨진 그 무엇을 급기야는털어놓기로 하여 내가 글을 쓸 때마다 누군가의 환심을 살 필요성이 불거져나온다면, 그건 그 이면에 있는 것을 말들로 치장해야만 한다는 걸 의미하며, 굳이 멋진 글이 되고싶어서가 아니라 몇 마디 말만 덧붙이면 남들이 읽기에도충분한 글이 되겠기에 그런 것이지, 결국 내가끝장냈어야할 그것은 글을 쓰면서 오히려 더더욱 힘을 얻어갔고, 매듭이 풀렸어야 할 것들이 갈수록 더 꼬이고 조여져서 마침내 온통 매듭 천지가 되어버려 그 매듭으로부터 내 글쓰기의 고갈되지 않을 광적인 원료가 살아남으려는 나의 투쟁이생겨나게 된 것이지."
이 책의 지독하리만치 내밀한 부피는 바로 그런 데서 연유한다. - P-1

나는 말할 때 남들한테 들어달라는 식으로 말하는 습관이배어 있지 못해, 그래서 내가 말하는 걸 중간에 끊을 방도가없는데, (중략), 그렇게 내가 자라난바로 그 광신적인 가톨릭 마을엔 신부들의 구마술(驅魔術)요법으로 치료받고자 각지에서 몰려든 정신분열증 환자들로 넘쳐났지만, (중략), 이따위 얘기들을 줄줄이 늘어놓는다면 당신인들 어찌 질겁하지 않을 수 있을까? - P10

(전략), 그때까지 나를 규정해온 모든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그리고 공부를 계속하는 것과 작가가 되길 원하는 것, 장래에 희망을 두는 것과 자기 자신을 여기저기 함부로 탕진하는 것, (중략), 나 자신을 창녀로 만들었다는 얘기를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주워섬긴다면? - P10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내겐 너무 많은 수녀들, 즉 알량한 세례명들로 축소되어버린 영적인 어머니들만 득실거렸던게 아닌지, (후략). - P12

기억이 나, 이불 속에 있던 그녀의 몸과 동그랗게 웅크린고양이처럼 베개 위에 반쯤만 내밀고 있던 그녀의 머리, 그나마 그녀의 잔해마저 서서히 평평해지면, 거기 그녀가 있다는 걸 말해주는 건 머리카락 몇 올뿐, 그것만이 그녀의 존재와 그녀를 덮은 이불을 구분해주는 전부였지, (후략). - P13

그리고 또 전혀 잠은 안자고 하느님만 믿는 우리 아버지.
사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하느님을 믿는 일뿐이었어, (중략),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항상 떠벌리길 제3세계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며 죽어가는 이때 이처럼 손쉽게 기름지게 사는 게 부끄럽지도 않냐며 무슨 뉴스라도 되듯 사람들 흉을 봐대는 일뿐이었다구, (후략). - P14

그리고 또 내게는 자매가 한 명 있었지, 내가 태어나기 일년 전에 죽었기 때문에 나로선 전혀 알지 못하는 언니였어, 이름은 신시아였고 너무 어린 나이로 죽는 바람에 이렇다 할 개성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지, (중략), 나로선 그렇게 결론내릴 수밖에없는 게, 그녀의 죽음 때문에 내가 태어난 거거든, 그런데 말이야 자식을 하나밖에 갖지 않겠다던 부모님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우리 두 자매가 모두 살아남았다면, 나는 분명 언니를 빼다 박았을 거야, (후략). - P17

그리고 내 인생이 있었어, 이상 모든 것, 어머니나 아버지혹은 언니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나만의 인생 말이야, (중략), 요즘 사람들은 자동차든 종교든 그저 장식으로만 치부하기에 십자가상도 단지 미적인 용도로 지니고 다닌다는 거지, (중략), 나로 말하자면 죽은 몸뚱어리 하나를 어떻게 신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 그것부터가 아직까지 이해 불가능이지만 말이야. - P19

아버지는 창녀와 동성애자, 부자와 유명인사 등등, 비난받을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곳이라며 틈만 나면 대도시에 대한 자신의 혐오감을 토로하셨지, (중략), 그리고 대학 건물의 별관들 역시 어떻게 섹스숍 같은 곳과 마주 볼 수 있느냐, 세상에 교육과 매춘 사이의 간격이 그토록 가깝다면 다들 어디로 발길을 향하겠느냐며 야단이셨어, (중략), 섹스노동자란 용어 정말 기발하지 않아, 그 말 속에선 세상에 가장 오래 된 직업, 가장 유서 깊은 사회적 기능에 대한 존중의 예(禮)가 느껴져, (중략), 하긴 어느 학문 이론인들 그만한 쾌락 앞에서 배겨나겠어? (중략), 드디어 나로 하여금 내 터전을 박차고 나가게 만든 계기가 나서주었고 나는 황홀한 기분으로 그에 응했어.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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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 재생을 걸어 놓은 플레이리스트처럼, 똑같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거듭됐다. 나는 속으로 화를 내다가, 후회하다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다가, 다른 방향으로 후회하다가. 이것도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다가, 부끄러워하다가,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다가,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하다가, 화를 내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는 낮 열두 시였다. - P123

. 대화는 예상할 만한 이야기들로 시작됐다. 승윤이 어제 나랑 싸우고 들어왔다고, 이정엽 사장님은 "애들끼리 싸우면서 크는 거지." 정도의 입장인 반면 어머니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고, 숨은 사정이 있는 듯해서 연락했다고 했다. - P124

나는 승윤이 내게 결정권을 넘겨주었다는 사실, 최소한의 선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 P124

어른들이 말하기를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자란다고들 한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있다. 어른들이 옳을 거다. (중략). 그 둘을 이 시점에 분간할 방법은 없고, 그렇다면 지금의 내게 필요한 건 시간이다. - P125

6


이정엽 사장님을 만나게 되는 일은 없었다. 승윤에게 내뱉은 말 때문에, 사모님 앞에서 낯을 붉혀야 하는 상황 역시 피했다. - P126

어디에도 가지 않게 된 토요일에, 나는 2학년 1학기 문학 조별과제 자료를 뒤적거리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말리의 일곱 개의 달』을 소개하는 PPT였다. - P126

물론 딴짓을 한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서『말리의 일곱 개의 달』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수능이 네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잘하는 짓이다. 집중이 하나도 안 됐다. - P127

솔직히 말하면 나는 광주나 제주에 연고도 없는 애들이 한강의 작품에 나오는 5·18 민주화 운동이나 4.3 사건을 어떻게 자기 역사로 받아들이는지, 그게 정말인지가 항상 의아했다. 아니, 비단 근현대사뿐만이 아니다. 역사 전체가 그렇다. - P127

그러니까 나한테는 다른 사람들이 과거를 자기 세상의 일부로여기는 감각이 미스터리였던 거다. 보통 애들은 숨 쉬듯이 그 일을 하는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 P128

이런 젠장. 모두 헛생각이다.
나는 싹 관두고 스터디 카페에 가서 공부했다. 방학 내내 그랬다. - P128

삼거리 앞 공원에서 요한을 마주친 건 개학식 전날이었다. - P129

"방해하려던 거 아니니까 하던 거 계속 해라."
"응, 아니...... 나 원래 연속으로 네 개까지만 해. 다섯 개부터는 아직 안 돼."
"그래도 많이 늘었네."
승윤이 갑자기 요한을 붙잡고 턱걸이 강습을 시킨게 작년 말이었으니 그로부터 반 년이 지났다 - P129

요한에게는 오늘 날씨나 점심 메뉴를 읊는 것과 똑같은 어조로, 위로가 필요한 종류의 문제를 태연하게 읊으면서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 P130

"그거 나 때문일걸. 롤 하다가 싸웠거든. 서로 손절했어."
대뜸 이런 말을 꺼내는 게 현명한 판단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멍청한 짓을 너무 많이 한 상태였다. - P131

"둘이 언제 한번 싸울 거 같긴 했어서……………."
"승윤이 형이 너랑 게임할 때는 난리 안쳤냐."
"그냥...... 평소랑 비슷해. 그런데 롤 할 때는 살짝 심하긴 해."
"지랄한다는 뜻이네." - P131

"줄타기를 잘해야지. 선을 반드시 넘어야 할 때만 딱 넘고, 아닐 때는 사리고."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나도 잘 모른다. 모르니까 맨날 싸우고 혼자 다니는 거지."
요한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 P133

요한은 영어 성적 이야기를 꺼냈다. 영어는 녀석이 만점을 노릴 수 있는 유일한 과목이었고, 얼마 없는 자부심이기도 했다.  - P134

"나는 내가 필리핀에서만 지냈으면 완전히 달랐을 거라고 생각해. 거기서는 이런 일이 없었거든. 예전엔 나도 공부 잘했어. 반에서 1등 한 적도 있고 친구도 많았어. 거기서는 내가 승윤이 형 포지션이었어. 진짜야. 그래서 더 돌아가고 싶은 건데……. (후략)." - P135

나는 내가 다른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어땠을지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 P135

"예전에 내가 승윤이 형한테 고소 먹을 뻔했잖아."
예전에는 한국이 싫고 잘해 보라며 등만 떠미는 부모님도 싫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했다. 집에 틀어박혀 컴퓨터만 하는 동안 화나는 마음을 인터넷에 풀었다는 거였다.  - P136

속으로 오래도록 다듬어 온 고민 같아서, 듣는 나도 양심이 찔렸다. PC방 엘리베이터 앞에서 승윤의 어머니를 들먹인 일은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비열한 짓이었다. - P137

 이왕 기회가 닿았으니 요한에게 고해성사라도 해볼까?
하지만 승윤에게 사과하지 않는다면 자기 위안에 불과했고, 요한은 승윤의 집안 사정을 모를 거였다. - P137

‘예전에, 나 신경써준 거 알아. 고마워. 이거 진심이야."
요한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우물거렸다. - P138

"존엄이라든지 자존감 같은 거 있잖아. 위클래스 같은 데서는 싫은 건 싫다고 말해야 한다고, 자기 자신이 소중하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쉽게 말하지만 사실은 그게 전혀 아니라는 거 너도 알 거야. (후략)." - P139

"세상 분위기라는 게 바로 바뀌긴 어렵지. (중략).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무슨 일을 하든 자기 밥만 잘 벌어먹고 살면 부끄러울 거 하나 없다더라." - P140

 나는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뭐 준비하는 거야?"
(중략).
"사실 그게 좀 그래서…………."
"응? 혹시 범죄는 아니지?"
요한은 화들짝 놀라서 손사래 쳤다. - P141

따로 공부한다는 게, 기술이나 자격증이 아니라 타갈로그어였던 건가? - P142

"차라리 영어 부업을 찾아봐라. 너 영어는 잘하잖아."
"요새 간단한 번역은 인공 지능이 다 해 줘서, 부업이 하나도 없대. 프로 번역가들도 일감 끊기는 수준이라잖아. 하지만 인공 지능은 상하차를 대신해 줄 수 없죠. 최후의 승리자는 상하차다." - P143

예전에, 요한에게 가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해 주려고 했던적이 있었다. 그때도 녀석은 필리핀으로 돌아가기 위해 돈을 벌고 싶어 했고, 엄마는 오래 일할 주방 보조 한 명을 구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둘을 연결해 주면 딱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한은 길게 고민하지도 않고 거절했다. - P144

가게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진지한 토론에 착수했다. 주제는 이랬다. 공부를 못하고 전문 기술도 없는 사람이 일자리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생각에는 운전면허부터 따야 했다. - P144

집게차란 ‘너클 크레인(Knuckle Crane)‘ 차량의 별명인데, 거대한 인형 뽑기 기계 팔이 추가된 트럭이다. 기계 팔로 산업 폐기물과 대형 쓰레기 들을 그러모아서 트레일러에 담고, 처리장과 고물상을 오가는 게 집게차 기사들의 일이다. - P146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냥 말해 버렸다.
"승윤이 형한테 들었어. 그 형 아버지가 재활용 업체 운영하시잖아. 청죽면 쪽에 있는 거."
"어, 잠깐만, 나이스 타이밍. 저번부터 궁금했는데 김주현 얼굴 보기가 하도 어려워서, 이제 겨우 물어보네 둘이 싸웠지?"
"알고 있었네?" - P146

"생각해 보니 지금 타이밍이 되게 절묘하네. 안 그래도 거기 배달 가는 중이었는데."
"거기? 거기가 어딘데?"
"청죽면에 있는 그거. 사람들이 여기서 많이 주문하는데, 몰랐어? 배달 가면 가끔 사장님 계시는데, 내 얼굴도 아셔. 저번엔 승윤이 친구 왔냐고 하시더라."
놀라우면서도 놀랍지 않은 소식이었다. - P147

애들인데 사장님도 좋게 봐 주시겠지.
고등학생의 비열한 점은, 자기 좋을 때는 어른이고 찔리는 구석이 있을 때는 애 행세를 할 수 있는 나이라는 거다. - P148

(전략).
그런 식으로 끝마치고 보니 기도라기보다는 다짐 같은 게 됐다.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제게 이정엽 사장님을 만나 뵐 용기와 승윤이 형에게 사과할 용기를 주십시오. 딱 제가 잘못한 부분까지만요. - P151

기도가 무색하게도 나는 고물상에 들어가지 못했다. 승윤 어머니께 전해 듣기로는 이정엽 사장님께서는 초지일관 "싸우면서 자라는 거지 뭐." 하는 태도를 고수하셨다는데, 그 호쾌함이 뜻밖의 불안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 P151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입장을 솔직히 밝혔을 때 승윤의 반응이 어떨지는 전혀 계산이 안 됐다.
"안 들어갈 거야?"
"어. 사장님 만나도 나왔다고는 하지 마." - P152

저 안에서는 아직도 누군가가 일하고 있는가 보다. 그 사람의 발밑에는 예전에 승윤이 자랑했던 그 먼지들이 내려앉아 있을까? 먼지처럼 곱게 갈린 금과 은과 구리가…………. 나는 마대자루 더미를 힐끔 봤고, 거기 담긴 고철들이 금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  - P153

"주현이, 오랜만이다!"
"아,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중략).
"그래, 그 부분은 잘 생각했다. 나한테 죄송할 게 아니라 싸운 녀석들끼리 화해를 해야지. 타라!" - P154

사장님은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말이다, 꿈이 돈보다 중요하다는 말은 안 해. 나부터가 돈만지고 사는 사람이고, 인간은 돈이 없으면 비루해지고 비겁해지기가 너무 쉽거든. (중략). 무슨 말인지 아나?" - P155

"그런데 꿈을 아예 버리고 돈만 쫓으면 말이야, 인간이 영 볼품이 없어져. 그래서 그거는 네가 균형을 잘 잡아야 하는 거야. (후략)." - P155

"셋이서 승윤이 얘기를 했구먼?"
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형이랑 싸운 건 제 잘못도 있긴 한데요......." - P156

나는 사장님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동남아 사람들의 성실성을 칭찬할 때 내심 언짢아졌던 순간을 기억했다. 추측건대 사장님은 여전히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테고, 연장 근무와 초과 근무가 요즘 사람들한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를터였다.  - P156

나는 그 사실에 감사했고, 사장님이 지금껏 베푼 호의에 다시금 고마워했지만, (중략).
승윤 생각이 났다. 나는 승윤과 진짜 결판을 내러 가고 있었다. - P157

"저번 일 관련해서 사과하러 왔어."
"사과하긴 뭘 사과해, 그때 이미 할 말 다 해 놓은 새끼가 지금도 별로 안 미안하지?"
"미안한 부분은 미안하고, 안 미안한 부분은 안 미안하고 그렇지."
"어, 바로 이런 태도, 미안한 부분은 뭔데?" - P157

"싸우다가 형 엄마 들먹인 거랑, 게임할 때 일부러 욕먹이게 플레이한 거. 그거 두 개. 그중에서도 특히 앞에 거.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
승윤은 나를 빤히 노려보기만 했다. 이런 식의 사과는 받고 싶지 않아서, 자신도 사과하지 않으려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미안하지 않은 걸 미안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 P158

"됐다, 인마. 나도 6월 모의고사 얘기는 화가 나서, 감정이 격해져서 툭 튀어나온 소리지 니가 진짜로 그걸 계산해서 들이받은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 넌 어차피 계산을 해도 실행할 능력이 안되는 놈 아니냐. (후략)." - P159

"여기서 딱 끝내고, 다 묻고, 쌤쌤인 셈 치자. 완전 리셋하는거야."
"어."
"그러면 수능 잘 쳐라."
"형도 수능 잘 쳐라." - P159

승윤은 내게 아직도 그 일을 기억하느냐고 물었지만, 사실은 승윤이야말로 더 오래 기억했을 것이다. 기억은 정말로 이상한 작업이다. 현재의 시선으로 과거를 곧장 바라보고, 거기에서 본 것들로 다시 미래를 만들어 나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 P160

아니, 나는 사장님처럼 나이 들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이 될까…………….
먼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아직 나라서, 그냥 집까지 쭉 달렸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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