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즐거워라.

소설 읽기의 즐거움

『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천로역정』존 비니언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올리버 트위스트』찰스 디킨스
『제인 에어』 샬럿 브론테
『주홍 글자』 너새니얼 호손
『모비 딕』 허먼 멜빌
『톰 아저씨의 오두막』 해리엇 비처 스토
『마담 보바리』 귀스타브 플로베르
『죄와 벌』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안나 카레니나』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귀향』 토머스 하디
『여인의 초상』 헨리 제임스
『허클베리 핀의 모험』 마크 트웨인
『붉은 무공 훈장』 스티븐 크레인
『암흑의 핵심 』조셉 콘래드
『환락의 집』이디스 워튼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소송』프란츠 카프카
『토박이』 리처드 라이트
『이방인』 알베르 카뮈
『1984』 조지 오웰
『보이지 않는 인간』 램프 엘리슨
『오늘을 잡아라』 숄 벨로
『백년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이탈로 칼비노
『솔로몬의 노래』 토니 모리슨
『화이트 노이즈』 돈 드릴로
『소유』 A.S. 바이어트
『로드』 코맥 매카시 - P87

소설의 첫 문장을 읽는 것은 열린 문틈 너머로 한 줄기 빛을 일별하는 것과 같다. 보이지 않는 방 안에 무엇이 있는가? 독자는 세목들이 전체적으로 제자리를 차지하는 모습을 기대하며 몸을 내민다. 문 바로안쪽의 혼란스러운 무늬는 알고 보면 병풍식 가리개의 가장자리다. - P89

서둘러 열리는 문도 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턱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들과 머릿수건을 쓴 여자들의 무리는 헤스터 프린(너새니얼 호손의『주홍 글자』의 여주인공)이 아기를 팔에 안고 걸어 나오기를 기다리며 보스턴 감옥 주위에 모여 있다. - P89

스티븐 크레인의 『붉은 무공훈장』에서 휴식 중인 군대는 조만간 자리에서 일어나 동요할 것이다. 파란 군복을 입은 병사들은 동료들과 시비가 붙기도 하고 셔츠를 세탁하기도 하고 모닥불 주위에 몸을 웅크리고 모여 있다. 질척거리는 흙탕길은 아침 햇살에 곧 마르기 시작한다. - P90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화자는 자신의 어머니가 언제 죽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양로원에서 보낸 전보는 구체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사실은 주인공의 마음에 한두 차례 파문을 일으킬 뿐이다. 장례식 참석을 준비하는 그의 모습이 간략하게 그려진다. 버스를 놓칠 뻔한 후 겨우 양로원에 도착하고, 관리인의 안내를 받아 어머니의 시신이 안치된 방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굳이 보려 하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 P90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은 훨씬 여유만만하다. 총살형 집행대원들 앞에 대령의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훌쩍 마콘도의 마을로 되돌아가 일상적 삶의 느긋한 무늬를 그린다.  - P90

소설의 긴 역사에서 초기에 해당하는 소설은 문이 거의 대번에 활짝 열린다. 21세기가 가까워 오면서 문들은 닫힌 채로 요지부동이거나 좀더 천천히 뻑뻑하게 열리거나 한 번에 눈곱만큼씩만 열리기 시작한다. 그렇더라도 독자 여러분은 1604년 스페인에서 출간된 최초의 소설 『돈키호테』의 유명한 첫 구절과 훨씬 이후인 1972년 이탈로 칼비노의 이중 액자소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의 첫 구절 사이에서 뜻밖의 닮은 점을 발견할 것이다. - P91

여러분은 이탈로 칼비노의 신작 소설을 막 읽으려는 참이다. 긴장을 풀어라. 집중하라. 다른 모든 생각들을 쫓아 버려라. 여러분 주위의 세상을사라지게 만들어라.¹ - P91

5장 소설 읽기의 즐거움
1. Italo Calvino, William Weaver 옮김, If on a winter‘s night a traveler(New York:Harcourt Brace and Co., 1991), 3쪽. - P768

 오로지 세르반테스와 칼비노만이 책 읽기에 들어서자마자 "이것은 한 권의 책이다. 그저 믿는 칙만 하라. 알겠는가?"라며 독자를 일깨워 준다. - P91

소설이란 관습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관습이란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으레 예상하게 되는 규칙을 말한다. 어떤 관습들은 시각적이다. 분홍색 표지의 문고판에 반쯤 벌거벗은 주인공이 그려진 책 한 권을 집어들면 독자는 "이를 데 없이 더운 7월의 밤에 한 청년이 숙박 중인 에스골목에 자리 잡은 하숙집의 다락방에서 나와 주저하듯 케이 교를 향해 서서히 걸어갔다."²가 아니라 "에반젤린은 늘씬한 종아리 주위에 늘어뜨린 젖빛 모슬린 가운을 쓸어 모으며 계단 꼭대기에 멈춰 서 있다."는 식의 문장을 읽게 되리라는 기대를 갖는다.


2.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의 첫 문장. - P92

제대로 훈련된 독자라면 글쓴이가 관습을 언제나 액면 그대로 사용할 것이라고 추정해서는 안 된다. 독자에게 자기 아버지가 "노팅엄셔에땅을 조금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는 진지하고 신뢰할 만한 화자는 걸리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 P92

『걸리버 여행기』에서 조너선 스위프트는 문학과 여행기의 초기 양식을 이용해 당시 사회 관습을 조롱한다. 하지만 여행기가 무엇인지 선지식이 없다면 스위프트가 꼼꼼하고 검증된 세부 사항을 고의적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음미하지 못할 것이다. - P93

고대에는 산문으로 씌어진 긴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은 18세기 대니얼 디포와 새뮤얼 리처드슨 헨리 필딩의 손을 거쳐 등장하게 되었다. 디포는 여행자 이야기의 관습을빌려서 『로빈슨 크루소』를 만들어 냈다. 리처드슨은 한 명의 인물이 작성한 일련의 편지들로 이뤄진 전통적인 ‘서간체‘ 형식을 사용하여 『파멜라』를 탄생시켰다. - P93

바로 개별적인 인간의 내면적 인생에 대한 성찰이다. 18세기 이전에는 산문으로 씌어진 긴 이야기란 한 나라의 이야기를하거나 하나의 관념을 설명하거나 스펜서의 『요정 여왕』에 나오는 것처럼 일련의 미덕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건등이 연달아 뒤죽박죽 일어나고 평면적인 인물들로 넘쳐나는 서양 장기판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 P94

한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세르반테스는 외로운 천재였다. 디포와 필딩, 리처드슨은 새로운 종류의 문학으로 꽃핀 하나의 문학 운동을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한 인물의 내면적 인생을 탐험하는 산문 서사다. - P94

 로망스는 현대의 연속극과 대체로 비슷하다.
18세기 비평가의 말을 빌리면 로망스는 "그럴듯하지 않거나 불가능한 상황에 처한 "찬미받는 지명인사와 관련되어 있다. 로망스는 가볍고 도피적이어서 여성에게 적합한 읽을거리였다. (여성의 두뇌는 ‘진정한 인생‘과 맞붙어 싸우는 데 이르지 못했으며, 그래서 여성이 환상물을 읽는 것도 당연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 P94

반면 소설가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 소설들은 낮익은 상황에 처한 진짜 인간들을 다루었다. 새뮤얼 존슨이 1750년에 썼듯이 소설가들은 "세상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에 의해서만 변화하고 다양해지는 인간, 인류와 교류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진짜 발견될수 있는 열정과 자질, 그 열정과 자질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는 진짜 인생의 상황을 보여 주려"³했다.


3. Samuel Johnson, "On Fiction", Rambler 제 4호 (1750년 3월 31일 자) - P94

18세기의 지식인들은 오늘날 유기농식품 마니아들이 정제설탕의 위험성을 떠들어퍼뜨리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독자를 타락시키는 소설의 영향력에 대해서 탄식했다. 목사들은 소설 읽기가 매춘과 간통에다 지진의 증가를가져올 것이라고 대중에게 경고했다.(1789년 런던의 한 주교가 한 말이다.) - P95

청교도주의뿐만 아니라 각 개인이 자기 자신을 부와 여가를 추구하는 사회의 수준을 통해 상승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도록 부추기는 자본주의에 의해서도 개인적 자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자아는 더는 고정되어 이동할 수 없고, 태어날 때 정해져 평생 절대 바뀌지 않는 책임을 부과하는 봉건 체계의 일부가 아니었다. 자아는 자유로웠다. - P95

소설가들은 개인을 찬양했다. 고통받지만 열정적인 샬럿 브론테의 여주인공들이 그랬고, 자신들을 보호해 주면서 동시에 방해하는 사회의 규제를 받는 제인 오스틴의 여주인공들이 그했으며, 간통을 하고 고통받는 너새니얼 호손의 목사가 그랬다. 그리고대중은 소설을 돈을 주고 사서 읽었다. - P96

결국 모든 사람들이 읽는 책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진정한 가치가 있을 수 없다. (이것을 오프라 효과라고 부르자) - P96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대중적인 독서를 하는 대부분 여성중 중산층 여성은 소설책을 살 만한 돈과 읽을 만한 여유가 있었지만 좀더 엄격하고 남성다운 ‘고전‘을 감상하는 데 필수적인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몰랐다는 데 있었다. 학자인 찰스 램이 비꼬았듯이 소설이란 "여성 독서 인구 전체를 위한 옹색한 지적 진미"였다.(램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어린이용으로 개작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 P96

고딕 소설의 여주인공들은 폐허가 된 성당에서 고대의 주술과 미쳐버린 아내들로부터, 그리고 햇빛과 거울을 피해다니는 신비스러운 귀족 남성들로부터 위협을 받는다. 이런 인물로 설정되어 폭넓은 인기를 얻은 자로, 앤 래드클리프가 쓴 『우돌포의 신비』의주인공 에밀리를 들 수 있다. - P97

하지만 대부분의 본격 문학 작가들은 현실적인 이야기에 대한 선호도 때문에 환상적인 요소들을 배제했다. 소설은 사회적인 양심도 계발시켰다. 찰스 디킨스와 그에 비견할 만한 미국 작가 해리엇 비치 스토는 이야기를 통해서, 약자의 뼛골을 뽑아 부를 구축한 시장 경제의 부당함에 일침을 가하고자 했다. - P97

소설 장르의 초기 작가들은 자신이 쓴 이야기의 허구성을 거리낌없이 지적했다. (세르반테스는 독자에게 말한다. "나는 이 책이 두뇌의 산물이길,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영리한 것이 되기를 바라곤 했다.") 하지만 이후의 소설가들은 이런 식으로 서사에 끼어드는 것을 피했다. - P98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철학은 소설가를 일종의 과학자로 변모시켰다. 소설가는 장면을 선택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모든 세부 사항을 과학자처럼 기록했다. 따라서 리얼리즘 소설들은 분량이 상당히 긴 경향을보였다. 리얼리즘의 아버지인 프랑스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시골마을에 사는 실제 인물의 초상을 그리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상상 속 세계의 지도와 설계도를 그렸다. - P98

 차츰 리얼리즘 소설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헨리 제임스의 등장인물은 낭만적인 레더스타킹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숲에서 인디언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은 호손이 만들어 낸 고통에 빠진 목사처럼 불가해한 낙인으로 곪아 가지도 않고 죄의식으로 죽어가지도 않는다. 대신 그들은 직장 생활을 하며 천정이 높은 먼지 쌓인 방에서 악다구니하듯 먹고살고 ‘평범한‘ 세상 사람들처럼 남부끄럽지는 않지만 대단한 전율은 없는 남자와 결혼한다.⁵ - P99

5. 리얼리즘은 영미 소설의 주요 운동 가운데 하나다. George J. Becker는 지난 1949년Modern Language Quarterly 에 게재한 논문 "Realism: An Essay in Definition"("리얼리즘‘을 정의하려는 첫 번째 시도 가운데 하나)에서 리얼리즘이 다음과 관련된다고 제시한다.
1) 관찰과 문헌을 통한 세부 묘사.
 2) 예외적인 경험이 아니라 평범한 경험을 그리려는 시도 
3) "인간 본성이나 경험에 대한 주관적이거나 이상적인 관점이 아니라 예술가가 성취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객관적일 것." 이 주제를 다룬 자세한 내용은 다음 두 편의 비평을참조하기 바란다. 

Lionel Trilling, "Reality in America", The Liberal Imagination (NewYork: Anchor Books, 1957)과 Erich Auerbach, Mimesis: The Representation of Realityin Western Literature (Princeton, N. 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3) 참조. - P768

 오늘날에도 스릴러, 과학 소설, 환상 소설, 종교 소설에 이르기까지 ‘비범한 사건을 그리는 이야기들은 지적으로 국외자 취급을 받고 진지한 비평적인 찬사를 받을 가치가 없는 ‘대중‘ 장르로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리얼리즘은 그 지류들을 만들어 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카프카는 물리적인 묘사보다 심리적인 묘사에 좀 더 주력한 ‘심리적 리얼리즘‘을 완성했다
- P99

헨리 제임스의 형인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 사고의 무질서하지만 자연스러운 흐름을 묘사하기 위해서 1900년에 ‘의식의 흐름‘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다.
콘래드부터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까지 이러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의식의 흐름‘은 물리적인 풍경에 대한 세부적인 묘사와 심리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지닌 글쓰기 방식이다. - P99

이런 과정이 너무 지나치면 초기 리얼리즘에서 발견되는 연못과황야에 대한 늘어지는 세부 묘사와 마찬가지로 싫증날 수도 있다. 하지반 20세기 초반의 작가들은 의식의 흐름 기법에 매혹되었다. 포크너의소설 속 인물들은 다른 수단을 통해서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경우가 드물며, 제임스 조이스는 『율리시즈』에서 널리 알려진 대로 원서로 45쪽에 당하는 밀도 있는 의식의 흐름을 만들어 냈다.(『율리시즈』는 언제나 현대 양서 목록에 포함되지만 읽어 내기가 무자비한 정도이니 이 책에서는 목록에서 제외했다.) - P100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섰다. 세부 사항에 대한 주의 깊은 목록 작성을 포함하는 리얼리즘 양식은 우리 주위에 아직도 남아 있다. 돈 드릴로는 『화이트 노이즈』에서, 창문에 기댄 화자가 창밖으로 보이는 대학생들이 첫 수업에 들어서는 모습을 묘사하며 소설을 시작한다. - P101

소설의 바탕에 깔린 사상은 리얼리즘 전성기 이후로 바뀌었다. 소설은 일반적으로 ‘모더니티‘를 거쳐서 ‘포스트모더니티‘로 이동했다고 간주된다. 이 두 가지 용어를 정의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티가 등장하기 전까지 누구도 모더니티라는 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포스트모더니티란 그저 ‘모더니티의 뒤를 잇는‘ 것이란 의미이기 때문이다. - P102

 예를 들어 비평가 제임스 블룸은 모더니즘이 "밀도와 특유의 모호함. 그리고 스스로가 중재자이자 중재받고 있다는 소설가 자신의 저지에 대한 이해와 관련이 있다고 정의했는데, 이 내용은 우리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⁶ 다른 대부분의 정의와 마찬가지로 명료하지 않다.


6. James Bloom, Left Letters (New York : Columbia University Press, 1922), 7p - P102

빅토리아 시대인들은 삶이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모더니스트들은 ‘실제 인생‘이 사실상 이해를 넘어선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실제 인생‘은 혼돈스럽고 무계획적이며 아무런 길잡이도 없다.
모더니스트의 ‘과학적인 문체‘는 혼란스러우며 소설을 어떠한 결론으로 깔끔하게 이끌어 가기를 거부하고 있다. - P102

하지만 모더니스트들은 이야기를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다. 모더니즘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측면 가운데 하나가 속물근성이었다. 모더니스트들은 대중을 불신했고 교육받은 소수의 엘리트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에즈라 파운드와 같은 몇몇 탁월한 모더니스트들은 파시즘을 지지하며 민주주의를 냉소했다. 이들은 특히 ‘대중 소설‘에 대해 격분했다. - P103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가를 책 판매의 불가피함에 매달린 ‘노예‘라고 탄식했다. 그녀는 "플롯도 없고 희극도 아니고 비극도 아니며 사랑에 대한 관심도 없고 수용될 만한 문체로 비극적 결말을 맺지도 않는 자유로울 수 있는 소설을 열망했다. E. M. 포스터는 "아 저런, 그렇지, 소설은 이야기를 하는거지."라고 말했지만 그가 진심으로 바랐던 것은 문학 시장이 "그토록 지급한 격세유전의 형식인 이야기"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었다. 포스터와 울프 모두 나중에 꽤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으니, 결국 시장에서 명백한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 P103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10대 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게 말한다. "누가 너를 대장으로 만들어 줬어?" 그리고 E. M.
포스터에게 말한다. "누가 당신을 소설의 권위자로 만들었지? 죽은 백인 남자인 당신을 당신이?") 포스트모더니즘은 진정한 인생의 진실을 안다고 하는 모더니즘의 주장을 거부한다. - P104

『돈키호테』와 『천로역정』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만난개인적 자아는 장애물을 헤치고 사회의 위선에 맞서 승리를 구가하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 P104

포스트모더니즘 소설가들은 독창적인 이야기를 쓰려고 시도하지않았다. 왜냐하면 ‘독창적인‘이라는 말은 사회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창조적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사회에 대해서, 출생 이후부터 인간을 형성하는 정보의 홍수에 대해서 썼다. - P105

포스트모더니즘은 존 버니언의 설교만큼이나 무거운 교훈이 될 수도 있으며, 『화이트 노이즈』는 청교도식의 우화적인 인물만큼이나 가차없이 자신의 요점을 주입시킨다. (돈 드릴로가 이후에 쓴 좀 더 방대한 소실『지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진실‘이라는 관념을 거부하는 세인들을 위해서 결론을 외치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크다. - P105

문학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은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활기를 일부 잃어버리기 시작했지만 이를 대체할 만한 단일한 ‘운동‘은 없었다.(이런 것들은 시간이 흘러 되돌아보면 더 쉽게 눈에 띄는 법이다.) - P106

이런 기법을 메타픽션이라고 한다. 진짜인 척하는 가짜 세계를 창조하지 않고, 메타픽션은 솔직하게 이것이 이야기일 뿐이라고 인정한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턱 위로 발걸음을 뗄 때 작가는 우리 뒤에 서서 이렇게 외친다. "여러분이 어디서 왔는지 잊지마세요!" 칼비노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 P106

소설의 존재가 탄생시킨 초기 몇 년간의 긴장, 즉 진짜와 허구적인것, 환상과 실재, 소설과 로망스 사이의 긴장은 드디어 그렇게 진정되기 시작했다. 환상적인 사건들이 다시 한번 가능해지고 그것을 이용하는 소설들은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자신만의 이름표를 갖게 되었다. 심지어 플롯은 사소하긴 하지만 복귀하기까지 했다. - P106

장르가 처음 생기고 400년이 흐르면서 소설 쓰는 직업은 이미 성장을 마쳤다. 그래서 메타픽션 최고의 소설가들은 이야기꾼이나 심지어로망스 작가라는 호칭을 즐겁게 받아들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리얼리즘과 그에 관련된 형식들이 부과하는억압을 헐겁게 해 주고 리얼리스트와 자연주의자들의 시대에 빼앗겼던 상상력에 일부나마 힘을 되찾아 주었다. - P107

소설 제대로 읽는 법

1단계: 문법 단계 독서

소설을 처음으로 통독할 때 아주 간단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야 한다.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후에 그들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 P107

제목과 표지, 차례를 본다. 

독서 일기장과 연필을 가까이 두고 제목이 있는 지면과 뒤표지를 훑어본다. 책에 저자나 역자의 약력이 있다면그것 역시 읽는다.
저자나 역자가 쓰지 않은 서문은 넘긴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읽으면 자신만의 생각을 가질 기회를 갖기도전에 그 책에 대한 해석을 지니게 될 것이다. - P108

등장인물의 목록을 만든다.
 독서 일기장의 제목 바로 아래나 비어있는 왼쪽 면 정도에 등장인물의 이름과 지위, 다른 인물과의 관계에 대한 목록을 작성하고 싶을 것이다. 특히 러시아소설에서 한 인물의 이름이 두 개나 그 이상이라면 목록을 작성한 덕분에 인물들을 착실하게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 P109

각 장의 주요 사건을 간략하게 적는다.

 각 장을 끝낼 때마다 독서일기장에다가 한두 문장으로 주요 사건을 묘사해 본다. 그 문장들은 플롯의 세부적인 요약이 아니라 기억 촉발제가 되어야 한다. 각 장을 주요사건 하나로 제한해 본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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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다.
오랫동안 쉬기에 한가위 명절이 시작되기 전에 책을 많이 빌렸다.
책이 상당히 읽기 쉽다.





벌써 배를 빌린 지 1시간이 넘었다. 이미 선착장으로 돌아가야하는 시간은 지난 뒤였다. 그렇잖아도 늦게 배를 빌리는 남자에게 보트장 주인은 6시 전까지는 돌아와야 한다고 했다. 금평에 위치한 이 선착장은 산 사이에 있는 터라 해가 빨리 저문다는 이유였다. - P5

남자가 모는 배는 산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 실수는 아니었다.
더 어두컴컴한, 그래서 자신 없는 얼굴이 조금은 가려질 곳으로가고 싶었다. - P5

 작은 물건이 강한 존재감으로 그의 손에 걸렸다.
남자는 오늘 여자에게 프러포즈를 할 생각이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하는 거 아냐?"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조심스레 말했다.  - P6

조용하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고백할 생각으로 금평 여행을 계획했다. 물론 오늘 그녀와 강 아닌 강을 건널 생각도 했다. 심장이 쿵쿵 뛰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쿵!
배가 크게 흔들렸다. 여자가 얕은 비명을 질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배가 산기슭까지 흘러와 부딪힌 것 같았다. - P6

강바닥 어딘가에 걸린 것 같았다. 머리에서 땀이 흘렀다.
"어떻게 해?"
문제가 생긴 것을 눈치챈 여자가 물었다.
"괜찮아. 뭐에 걸린 것 같은데 뺄 수 있어."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척하면서 노의 손잡이 부분을 힘껏 눌렀다. 그럴 때마다 배가 출렁거렸다. - P7

그때 남자는 알지 못했다. 그가 생각지 못한 어떤 것이 진실의 수면 위로 떠오르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 P7

남자가 앉은 쪽배 옆에서 뭔가 허연 것이 떠올랐다. 발견한 것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자가 먼저였다. 여자는 시력이 좋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곳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남자도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본 순간, 여자를 향해 보지 말라고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여자의 비명이 더 빨랐다.
"꺄아아아악!" - P7

노에 걸려 떠오른 것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물고기들에게 뜯어 먹혀 백골화된 두개골이었다.
그것은 아주 작았다. - P8

아들 선우가 부르는 노래를 녹음한 것이었다. 여섯 살 때여서 그런지 목소리에서 아기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옆에서 웃는 소리는 예원의 것이었다.
앞다리가 쑥, 뒷다리가 쑥, 똥통에 빠져버렸네.
뭐야, 똑바로 안 부를래, 이 녀석!
혼내는 척하는 자신의 목소리에서 행복이 굴렀다. - P9

두 번이나 녹음에 실패했지만 세번째도 마찬가지여서 예원은 선우에게 달려들었다. 아이의 작은 몸을 품에 안고장난스럽게 엉덩이를 두들겨주었다. 선우는 예원의 목에 매달려 까르르 웃음을 토했다. 그때 베란다에서 들어오던 짙은 햇빛까지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벌써 3년이나 된 일이라니, 문득 실감이 나지 않았다. - P10

차는 예원이 주차한 앞줄의 빈자리에 멈춰 섰다. 한 번 뒤로 후진했다가 다시 전진했을 때 차의시동이 꺼졌다.
예원은 차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휴대폰을 들었다. 단축 번호 1번. 통화버튼을 누르자 신호가 갔다. 한손으로 오디오의 볼륨을 줄였다. - P10

 발신자를 확인하는 남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예원이 들고 있는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신호가 가고 있었다.
남자가 거칠게 운전석 문을 닫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화면을 옆으로 쓱 밀었다.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 P10

예원은 꽂아두었던 차 키를 비틀었다. 그녀의 낡은 봉고 차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지는 남자를 노려보던 예원은 곧장 정면을 보았다. 사이드브레이크를 내리고, 드라이브를 D에 놓았다.
주저 없이 액셀러레이터를 힘주어 밟았다. - P11

-이선우 군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유류품 확인부탁드립니다.
1시간 30분 전에 전화를 걸어온 남자의 침착한 목소리가 귀를떠나지 않았다.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춰 세운 선준은 바짝 말라 갈라진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들 선우가 사라진지 3년이었다. - P12

경찰도 돈을 요구하는 전화가 없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길을 잃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선우는 엄마 아빠의 휴대폰 번호나 집 주소를 외우고 있었다. 아들의 실종이 3년이나 지속될 줄 그때의 선준은 상상하지도못했다. - P12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느 보육원에 들어온 아이가, 병원에 실려 들어온 어떤 아이가, 지하철역 노숙인들 사이에서 발견된 아이가 선우 같다는 제보는 여러 번 왔었다. 그때마다 선준은한달음에 달려갔다. 하지만 실망이 매번 그를 무릎 꿇렸다. - P13

형사라고 하기에는 눈빛이 서글서글했다. 그는 조금 굳은 얼굴로 선준을 향해다가왔다.
"이선준 씨?"
선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진우가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면서 명함을 건넸다. 경위였다. 요즘 형사들은 명함도 있구나, (생략) - P14

선준을 앉혀두고 박진우는 정수기로 갔다. 돌아온 그는 선준에게 종이컵을 내밀었다. 맑은 물이 들어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들어 마셨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 P14

 적막한 사무실은 컴퓨터 팬 돌아가는 소리까지도 들릴 듯했다. 형사로 보이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앞에 놓인 컴퓨터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선준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했고,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 P15

"뼈의 발육이나 치아 상태로 5에서 6세 정도로 판단됐습니다만, 육안으로 확인이 어려워 국과수로 넘겼습니다. 유전자 검사를 해야 하는데, 오랫동안 강에 잠겨 있었던 터라 현재 상태로는 유전자가 채취될지 불투명하다고 하네요. 다행히 유류품이 있었고, 실종자들을 검색하는 과정에서 선생님께서 신고하신 실종 당시 선우의 소지품과 비슷한 듯하여 연락을 드린 겁니다." - P15

선우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생기자 선준은 취미를 만들라 권했고, 예원이 찾아낸 것은 나무 공예였다. 그때 예원은 나무로 십자가 목걸이 두 개를 만들어 왔다. 하나는 선준의 차 룸미러에 걸어주었고, 하나는 달라고 떼쓰는 선우에게 주었다.  - P16

선준은 울지 않았다.
"유전자 검사 결과는 언제 나옵니까?"
목걸이가 자신의 아이가 차고 있었던 것이 맞다, 아니다를 말하지 않는 심정을 박진우는 이해한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선준을쳐다보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서 유전자를 채취하는 데만도 최소 일주일 이상 걸립니다." - P16

"유전자검사 결과가 나온 다음에 다시 연락을 주십시오."
대답 없이 박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걸이는 실종된 이선우의 것이 맞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선준이 쓰러지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을 것이었다. - P17

"연락을 주실 때는 꼭 저한테 주십시오. 이번에 연락하신 번호로요. 아내한테 전화하시면 안됩니다."
실종 신고를 할 때 보호자의 언락처로 자신과 예원의 연락처를모두 등록시켰다. 이번 연락도 그것을 보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다음 통보만큼은 예원이 아니라 자신이 받아야 했다. 아니다, 선우는 죽지 않았다. - P17

박진우를 뒤로 하고 경찰서를 나왔다. 차에 올라타자 몸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는 기진해진 몸을 핸들에 기댔다. 긴 한숨이입에서 터져 나왔다.
일주일. - P18

하지만 그의 걱정은 기우였다. 그는 예원의 눈치를 보느라 애쓰지도, 목걸이에 대해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을 밀어내느라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에게 걸려 온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예원이 선우 실종 사건의 담당 형사 차를 고의로 부숴 유치장에 감금됐다는 전화였다. - P18

영인 경찰서 주차장 안쪽으로 승용차 한 대가 빠르게 들어와 파열음을 내며 멈춰 섰다. 시동을 끄자마자 선준은 다급히 내렸다.
본관 안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기던 그가 우뚝 멈춰 섰다. 왼쪽 옆으로 엉망이 된 흰색 승용차가 레커차에 끌려 나가고 있었다. 차량의 후미가 완전히 찌그러져 있었다. 사람이 탔다면 다치고도 남았을 상태였다. - P19

1층에 있는 형사과로 들어갔다.
"열어, 얼라고! 이거 안 일어?"
철창을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새된 고함이 들렸다. 예원의 목소리였다. 형사과의 몇 명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고, 아예 귀를 틀어막은 사람도 보였다. - P19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양 형사를 보았다. 이미 선준의 연락처 정도는 알고 있는 양 형사를 향해 명함을 내밀었다.
"차 수리하시고, 비용이랑∙∙∙∙∙∙ 합의금, 연락 주세요."
기가 막힌다는 듯 양 형사가 하! 숨을 크게 뱉었다.
"지금 현행범으로 잡히고 합의를 하자고요? 형사랑?"
그때 유치장 쪽에서 깡깡거리는 소리가 났다. 예원이 가방으로있는 힘껏 유치장을 두드리고 있었다. - P20

양 형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유치장을 보며 소리쳤다.
"아줌마! 공무집행방해, 재물손괴 살인미수에∙∙∙∙∙∙ 어, 그래!
협박까지 추가야!"
"그럼 넌 도둑이야! 밥도둑! 이 새끼들아!"
양 형사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선준에게로 돌렸다. - P21

그는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구속하세요. 법정에서 보겠네요."
선준은 주머니에서 잘 접힌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어 양 형사의 책상 앞에 놓았다. 양형사의 고개가 그쪽으로 기울어졌다. 영인대학병원 정신과에서 발행한 정신병원 입원 소견서였다. - P21

전에 없을 정도로 조심스러운 의사의 말을 들은 것이 불과 이틀 전이었다. 그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지만, 소견서를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도 알지 못했다. - P22

양 형사가 거칠게 유치장의 문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차의 수리비를 주는 선에서 합의하기로 한 뒤였다. 예원이 벌인 일이 위법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그에게도 딸이 있었다. - P22

3년이 지난 지금 자신이 담당 형사라는 것은 명목뿐이었고, 수사팀도 없는 상황이었다. 일정 주기로 경찰이 뿌리는 실종 어린이 찾기 전단지에 선우의 이름이 올라가는 것이 전부였고, 양 형사에게는선우 외에도 많은 사건들이 떨어졌다. - P23

철창의 문을 열어주자 예원이 그를 노려보며 바깥으로 나왔다.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아주 당당한 태도였다. 선준은 예원이 나오는 것을 보고 아무 말 없이 홱 돌아 나갔다. 예원은 그런선준을 따라 나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또 무슨 짓을 벌일까 싶어 양 형사가 움찔했다. - P23

그는 양 형사와 게시판 사이에 서더니 전단지를 떼어내려 팔을 뻗었다. 양 형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폐지 마!"
신입 형사가 불에 댄 듯 놀라 전단지에서 손을 뗐다. 양 형사는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누굴 죽일라고."
전단지를 뗀 것을 알면 이번에는 차를 박는 수준에서 끝내지 않을 것이었다. 어쩌면 이번엔 그의 얼굴을 죄 뜯어놓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P24

"나 입원 안해."
선준이 눈을 치켜떴다. 예원은 고집스럽게 입술을 앙다물고 선준을 노려보았다. 선준은 양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입원 안 하면? 이번에는 무슨 짓을 저지를 건데?"
"입원하면? 우리 선우 찾는 전단지는 누가 돌리고 실종자 모임에는 누가 나가? 우리 선우는 누가 찾냐고?"
"내가 찾아! 내가!" - P25

뭐라고 해야 할까. 뭐라고.
"그럼 이혼하는 수밖에는 없어."
순간 예원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예원은 이혼을 원하지않았다. 다시 되돌아올 선우를 기다리는 것은 온전한 가정이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혼이 그녀에게 협박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 - P26

예원의 입원이 결정된 곳은 희망 정신요양원이었다. S 시큐리티의 고객사라서 원장과는 안면이 있었다. 영인대학병원 정신과의 입원 소견서를 들고 찾아간 선준에게 희망 정신요양원 민서진이 도움을 주기로 했다. - P27

걱정하지 마, 선우 찾는 일은 내가 계속할게.
그 말이 목구멍 언저리에서 서성거렸다. 어차피 돌아올 것은 원망뿐임을 알고 있어서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 P27

알았다는 듯 심명훈이 경비실로 돌아가 버튼을 하나 누르자 육중한 철문이 천천히 양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완전히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선준은 차를 안으로 몰았다.
예원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세상을 격리라도 하듯 눈앞에서 철문이 거친 비명을 지르며 닫혔다. - P28

예원은 자신이 환자라는 것이 잘 실감 나지 않았다. 반면 선준은 가지고 온 짐을 벌써 옷장에 정리해 넣고 있었다. 예원의 눈에는 한시라도 빨리 떨어지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럼 정리하고 계세요. 생활에 필요한 사항은 조금 이따 간호선생이 와서 설명할 겁니다." - P25

"이걸로 갈아입으시면 됩니다."
간호부장이 옆에 선 간호사에게서 환자복을 건네받아 예원에게 내밀었다. 예원은 오늘도 선우의 사진이 박힌 티셔츠를 입고있었다. 예원은 그가 내민 환자복의 바지만 받았다.
"이것만 입을게요."
"규정입니다. 입으세요." - P29

"환자복으로 입으셔야 해요."
"놔!"
예원이 거칠게 간호사의 손을 밀쳤다. 밀쳐진 간호사의 손이철제 침대 난간에 부딪혔다. 간호부장은 굳은 얼굴로 두 사람의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그가 짧게 말했다. - P30

안에는 선우의 사진이 프린트된 티셔츠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중에 한장을 꺼내입었다. 세 명의 환자가 막다른 길에 몰린 가젤처럼 몸을 떨며 지켜보고 있었다. 예원은 그들을 향해 턱을 치켜들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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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M(근대 건축 국제 회의)은 1956년 드브로브니크에서 열린 10차 회의로 그 막을 내리고, 그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모였던 건축가들의 그룹인 팀텐에 그 주도권을 넘겨준다. 이것은 발전인가? 아니면 전환인가? 1964년부터 1966년까지 계획된르 코르뷔지에의 베니스 병원은 그가 그 이전까지 설계한 어떤 건물과도 다른 형식을 갖는다. 갑자기 이런 전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 P52

이것은 뉴턴이 ‘자신이 거인의 어깨 위에 서있어서, 멀리 볼 수 있었다‘는 말처럼, 팀텐이 근대건축의 어깨 위에서, 근대 건축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보기를 바랬던 코르뷔지에의 격려였는지도 모른다. 팀텐은 근대 건축의 어깨 위에 올라서는 발전임과 동시에 또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전환이었다. 그것은 어떤 전환이었을까? - P52

CIAM 10차 회의

팀텐은 앨리슨 스미슨(Alison Smithson), 피터스미슨(Peter Smithson), 알도 반 아이크(Aldo van Eyke), 바케마(Jappa Bakema), 조르쥬 칸딜리스(George Candilis), 새드 유즈(Shad Woods)를 구성원으로 하는 10번째 CIAM을 준비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이들은 CIAM의 아테네 헌장(1943)으로 대표되는 근대 도시론에 위기를 느끼고, 이와는 다른 도시론의 체계를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 P53

팀텐은 기능적, 합리적 도시가 더 이상 사회적, 문화적 요구를 반영하기 어렵고,
조닝에 의해 발생하는 근린주구의 문제, 변화와 성장의 문제, 기존의 도시 조직과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를 보이는 점을 지적하였다. - P53

선형적 순환(circulation linéaire)을 가지는 골든 레인 아파트 계획안(1952)에서 앨리슨과 피터 스미슨은 건물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로서의 순환의 중요성을 나타낸다. 칸딜리스, 조식, 우즈는 프랑크프르트 뢰머베르그(Römerberg de Francfort) 도심계획안(1963)과 베를린자유대학 계획안(1965)에서 더욱 명확하게 형태의 사유에서 관계와 구조의 사유로의 전환을 실행하고 있다. - P55

CIAM의 구성원들이 도시 속에서의 건물 배치에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성격을 선호한 반면, 팀텐의 구성원들은 도시 건축의 군집적이고 응집(agglomération)적성격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이런 군집적 성격은 CIAM의 근대 도시 계획들에서는완전히 잊혀졌던 것이었다. 팀텐 구성원들은 건물, 거리, 공공 공간 사이의 관계가 보존되어 있는 중세 도시나 아랍 도시들의 군집적 도시적 성격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러한 성격들을 매트-빌딩(mat-building)이라는 형식 안에서 현대적으로 되찾아보려고 하였다. - P55

전환: 기하학적 구성에서 위상적 연산으로, 형태에서 관계와 구조로

그러면 이들의 전환을 어떤 의미로 읽어낼 수 있을까? CIAM이 도시를 기하학적구성의 대상으로 생각한 반면, 팀텐은 위상학적이고 관계적인 연산의 대상으로 여겼다고 말할 수 있다. CIAM이 형태에 대한 사유에 머물러 있었다면, 팀텐은 구조와 관계에 대한 사유에로의 전환을 시도했다고 말할 수 있다. 1950년대 초중반에야기된 CIAM과 팀텐의 대립은, 근대 건축에서 현대 건축으로의 전환은 물론 형태적 사고와 구조적 사고로의 전환, 기하학적 구성의 사고에서 위상학적 연산의 사고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¹ - P56

물론 현대 건축 이전에도 관계에 대한 개념이 있었지만, 관계(relation)와 비율(rapport)에 대한 근대적 입장은 현대적인 관점과는 다르다. 근대적 관계가 정확한관계라면, 현대적 관계는 유연한 관계, 형태로부터 자유로운 순수 관계, 관계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 P59

 말레비치, 엘리치스키, 타틀린 등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오장팡, 코르뷔지에의 순수파, 모홀리-나기, 클레 등의 바우하우스, 로스 등의 빈(Wien)학파 등의 여러 아방가르드들은 점, 선, 면, 볼륨들이 만들어내는 거리, 비례, 리듬,
동적 균형, 운동, 형식에 대한 실험들을 펼쳐놓았다. 건축 이외의 분야에서의 추상회화, 순수시, 실험 영화, 무조 음악 등이 그런 예이다. - P59

이런 실험들은 고전주의 낭만주의에서 강요되었던 이야기 (narrative)와 내용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형식 자체를 다루는 순수한 수학과 같아지는 듯했다.


2 ‘관계‘라는 말을 나타내는 프랑스어는 rapport와 relation이 있다. rapport는 주로 비율적인 관계를,
relation은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어떤 것과 어떤 것의 연결관계를 말한다. 들뢰즈는 rapport를 잠재적인 차원에서의 관계로, relation을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관계로 사용한다. rapport를 비율이라는단어로 번역하면,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3사실 이들의 운동이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로 대표되는 논리실증주의나 힐버트의 형식주의 수학과 관련을 갖고 있다. 20세기 초는 기계적인 미학뿐 아니라, 수학적 형식의 순수성에 대한환상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시대였다.

몬드리안이 표방하는 것처럼, 근대 예술과 근대 건축에서 관계의개념은 "정확한 관계(relation exacte)"로 고려된다. 형태들이, 다른 형태들과의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고려되고 파악된다 할지라도, 비례 (proportion), 리듬, 동적 균형, 운동감과 같은 개념들은 거리와 크기라는 기하학적인 관계 속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그들이 사유했던 관계는 형태를 통해서 사유되는 관계처럼 보인다. 그들의 관계에대한 개념은 위상학적인 개념보다는 기하학적 개념에 더욱 근접한다. - P60

근대건축은, 도시론적 차원에서도 역시 비슷한 사유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테네 헌장(Charte d‘Athène)으로 대표되는 CIAM의 근대 도시론은 독립된 건물들의 구성에 머물러 있고 그 건물들 사이와 그 사이의 관계들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생각되어진다 하더라도 형태 다음일뿐 관계 자체가 출발점은 아닌 듯하다.⁵ - P60

형태로 관계를 사유한다고 반론한다면,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형태를 통하지 않고서도 사유될 수 있는 관계 그 자체, 순수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잊지말아야 한다. 들뢰즈적인 용어로 말하면, 관계 자체를 사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기관 없는 신체 (Corps sans organes)로 나아가는 것이고, 지각불가능한 것이 되는 것(devenir-imperceptible)⁶일 것이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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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레이성 때문에 구매를 걱정했던 책!
도서관에 있어서 빌렸습니다.
모든 것을 다 푼 것은 아니고 문제 두 개를 풀었습니다만, 일단 문장으로 읽는 것보다 관찰력을 더 요구하는 점이 좋으면서도 싫은 점이라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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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학자들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다음 사실을 천명해 왔다. 우리시대의 문화는 활자 이후의 문화이다. 책은 시대에 뒤떨어진 소통형식이다. 아직까지는 책과 잡지, 신문에 담겨 있는 정보의 홍수가 곧 인공지능에 의해 분류되고 멀티미디어 형태로 제공될 것이다. 지루한 인쇄물은더는 없을 것이다. - P35

 독서를 하면 지혜가 자란다. 혹은 모티머 애들러의 말처럼 "계몽된다." 『독서의 기술』에서 애들러가 밝힌 대로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무언가 그러하다는 사실을 그저 아는 것이다. 계몽된다는 것은 그뿐 아니라 도대체 문제가 무엇인가를아는 것이다." 정보를 얻는 것은 사실을 수집하는 것인 데 반해 계몽된다는 것은 하나의 생각(정의나 자비, 인간의 자유)을 이해하고 지금까지 모아온 사실을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그 생각을 사용하는 것이다. - P36

 어느 신문 이야기란이나 《타임》이나 CNN의
‘헤드라인 뉴스‘ 아침 방송이나 웹사이트 등 어디에서 이 사실을 수집하든 정보 내용에 결정적인 변화를 주지 않는다. 다만 매체에 따라 사실에대한 경험이 경미하게 바뀔 수는 있다. - P36

 이렇듯 극단적인 행동을 유발한 사상은 식빵을 씹으며 한 장의 사진이나 자극적인 신문 머리기사를 훑어보는 것망으로는 명료파게 파악될 수 없다. - P36

만약 실제로 책을 읽는 데 문제가 있다면 『일리아드』를 펼치기 전에 보충 학습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속독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독서를 좌절시키는 원인이 진짜 물리적인 어려움 때문인지 정보 수집하듯 깨달음을 쉽게 얻을 수 없어서인지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봐야 한다. - P37

다음 구절을 읽기 전에 시계의 초침을 보고 지금 시각을 확인하기바란다.

의외의 장소에서 처음 읽었던 책이라면 정독했든 건성으로 넘겼든 그 매력이 어김없이 유지되는 법이다. 그래서 해즐릿은 자신이 "클랜골른의 이판에서 셰리 한 병과 식은 닭 요리를 앞에 두고 『신 엘로이즈』를 들고 앉아 있던 날이 1798년 4월 10일이었다는 사실을 줄곧 기억했다. 롱펠로 교수가 대학에서 훌륭한 프랑스어 문제를 훈련하는 방법으로 발자크의『상어 가죽』을 읽으라고 조언했던 것을 내가 기억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10여 년 후에 강연 차 떠난 여행에서 그 책을 읽으면서 하룻밤 반나절을앉아 있던 끝에 문득 그 사실을 기억해 냈다. 반면 아조레스 군도로 향하는 첫 여정 줃에 범선 위에서 처음으로 휘트먼의 『풀잎』을 만났던 것처럼, 아주 우연히 때로 절망적일 정도로 부벙적인 조건에서 어떤 책과 만났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풀잎』이라는 책은 뭍에서조차 경미한 욕지기를 불러 일으킨다.¹ - P38

이 구절을 읽는 데 1분이 걸리지 않는다면 본격적인 산문을 읽는데 적절한 속도로 이미 독서에 몰입하고 있는 것이다. 낯선 단어가 열 개정도에 그친다면 당신의 어휘력은 이른바 수학 능력을 갖춘 수준에 이른것이고, 문외한인 지성인을 위해 씌어진 어떤 읽을거리라도 읽어낼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 P38

이 짤막한 구절을 읽는 데 1분이 넘게 걸리고 모르는 단어가 열개 이상이면, 여러분의 실제 물리적인 독서법을 재검토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이 장 끝부분에 있는 ‘독서의 두 번째 단계는 속독 연습과 어휘 공부다‘
참조.) 아니면 어떠한 보충 학습도 필요가 없다. - P38

‘하지만 나는 읽는 속도가 너무 느려요. 양서 목록을 독파하다가죽어 버릴 거라고요!‘ 독서는 죽을 때까지 지속해야 할 하나의 과정이다. - P38

속독이 좋은 독서라는 생각은 비유하자면 컴퓨터 제조업자들이 개간한 자갈밭 농경지에서 자라난 20 세기식 잡초와 같다. 커크패트릭 세일이 달변으로 지적했듯이, 어느 기술에든 고유한 내적 윤리 체계가 있는 법이다. 증기 기술은 크기를 미덕으로 만들었다. 컴퓨터화한세계에서는 빠를수록 좋고 속도가 최고의 미덕이다.³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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