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집은 의붓아버지가 취직한 목장의 한쪽 끄트머리에있는 손님용 숙소였다. 목장 주인인 미국인 부부는 플로르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들은 그를 ‘시시(애기)‘라고 불렀고, 학교에 다니고 영어를 공부하게도 도와주었다. 의붓아버지는 그들만큼 마음이 넓지 않았다. - P273

 의붓아버지가 정말로 자신에게 손댄다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 P274

이 일로 플로르는 아무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을 거라는 의붓아버지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접근을 받아들일 순 없었다. 플로르는 그가 또 잠자리에 기어들 때를 대비해 베개와 시트 사이에 칼을 숨겨두었다.  - P274

플로르는 그 집에 1년 가까이 머물렀다. 그사이에 어머니에게 연락하여 자신이 머무는 곳을 알렸고, 따로 연락하고 싶었던 사람의 연락처를 물어보았다. 바로 친아버지였다. - P275

이 시골 마을에는 텍사스농업기술대학교가 있었고, 관목과 농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으며, 상업 및 산업 시설이 몇 군데 있었다. 그중 하나는 샌더슨 팜스Sanderson Farms의 닭고기 정육공장이었다. - P275

텍사스주 토박이 저널리스트 로런스 라이트 Lawren Wright는 그의 2018년 저서 《주여 텍사스를 구하소서 God Save Texas》에서 텍사스의 160만 미등록 이주민을 묘사하는 새로운 표현을 제시했다. - P275

(・・・) 그림자 인간들이 제공하는 값싼 노동력이 이 나라를, 특히 국경 주들을 떠받치고 있다. 이들은 노예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유민도 아니다.¹ - P276

 아버지를 따라 브라조스 카운티에 오고 몇 년 후 플로도 그 공장에 지원했다. 지원서에는 본명이 아니라 그가 구한가짜 영주권에 적힌 ‘마리아 가르시아‘라는 이름을 썼다(플로르 마르티네스‘도 본명은 아니다). 회사는 서류를 문제 삼지 않고 즉시 그를 채용했다. 이 공장에는 미등록 이주민이 많았다.  - P276

일을 시작하고 몇 달 후, 회사에서 관리자를 늘릴 계획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관심이 있을 만한 사람, 즉 몇 년 전에 만나 얼마 전에 남편이 된 마누엘에게 알렸다. - P277

혹시라도 이민국에서 나와 서류를 확인하면 문제가 복잡해질 것 같았다. 플로르는 마누엘과 상의한 끝에 공장을 그만두기로 했다. - P277

플로르가 하던 일은 컨베이어벨트, 이른바 ‘해체 라인‘에 걸린 채 회전하는 죽은 닭들에서 분비샘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목 잘린 닭의 행진은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 P277

어느 날 그가 성실하고 쾌활하게 일하는 모습을 눈여겨본 한 손님이 그에게 다른 일자리를 제안했다. 그는 칙필에이 Chick-fil-A 체인점 점주였고, 플로르는 그곳 카운터에서 영어로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영어를 거의 할 줄 몰랐던 플로르는 급하게 영어를 배웠고 그 와중에도 팀장으로, 교대조 조장으로, 지점 매니저로 쭉쭉 승진했다. 유일한 문제는 지점 매니저가 받는 돈이 최저임금보다 약간더 많은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 P278

닭고기 정육공장 해체 라인의 시급은 11~13달러다. 다른 일반 공장보다는 적은 편이었지만, 플로르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그곳이 제일 나았다. - P278

 그러나 그 이후에는 본인의 고통이 너무 심해서 닭을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생닭걸기 라인에서는 한 사람이 1분에 65마리를 벨트에 걸어야 했다.
이 광폭한 속도를 따라가려면 한 손에 한 마리씩, 한 번에 두 마리를 꺼내 벨트에 거는 즉시 몸을 굽히고 다음 두 마리를 꺼내야 했다. - P279

도저히 참지 못한 플로르는 관리자에게 다른 일을 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이번에는 컨베이어벨트 맨 끝에 위치한 포장 라인에서 닭고기를 비닐백에 넣는 일이 주어졌다. - P279

플로르는 늘 통증에 시달렸지만, 몸의 아픔보다도 더욱 고약한 아픔이 있었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통증에 뒤따라오는 언어적, 감정적 홀대였다. 그 어떤 관리자도 그에게 상태가 어떤지묻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꾸짖었다. "일하기가 싫은 모양이지"하고 쏘아붙이는 사람도 있었다. - P280

 관리자를 무서워하는 일부 여성 노동자는 작업복 안에 바지를 한 겹 더 입고 정 급할 땐 선 채로 오줌을 쌌다. 그보다 더한 괴롭힘도 경험하고 이겨낸 플로르는 아무도 무섭지 않았기에 정 급할 땐 허락 없이 화장실에 갔다. - P280

2018년 내가 플로르 마르티네스를 처음 만난 곳은 벽돌로 지어진 교회를 마주 보는 ‘과달루페 성모회관‘이라는 브라이언의주민 시설이었다. 이날 이곳에서는 가금류 도축 노동자의 권리를 교육하는 세미나가 열렸다. - P281

사람들은 쉬는 시간이면 바깥에 옹기종기 모여서 세미나 주최 측이 준비한 가정식 플라우타와 타말레를 먹으며 스페인어로 담소를 나누었다. - P281

남편 마누엘이 관리자라는 사실도 얄궂게 작용했다. - P280

 관리자가 그 윗사람들에게 받는 압박에 비하면 플로르가 느끼는 압박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회의에 들어가면 왜 일선 인력을 더 세게 압박하지 못하느냐고 추궁당한다고 했다. - P281

미국에서는 1990년대 닭고기가 콜레스테롤이 적다는 장점을 내세워 소고기 대용 식품으로 자리매김한 이후 닭고기 정육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상했다. 닭고기 소비량이 급증하면서 앨버트빌 같은 지역에 새 일자리가 생겨났는데 그 자리는 주로 멕시코계와 과테말라 이주민이 차지했다. - P282

앨라배마주의 유력 정치가 중에도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한 사람인 연방 상원의원 제프 세션스는 이주민에대해 강경한 입장을 내세웠고, 특히 앨라배마주 가금류 산업의 노동자 구성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세션스의 친한 친구이자 반이주민 단체 넘버스유에스에이 Mumber5U34의 창립자인 로이 벡Roy Beck은 <디스 아메리칸 라이프>에서 세션스가 "이주민 문제를 자신의 간판 사안으로 만든 데는 앨라배마주 가금류 공장 관련 경험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 P282

 다만 어느 정도는 이주민 때문에 본토인에겐 매력이 떨어지는 일자리가 된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앨버트빌에서든 다른 어디에서든 닭고기 공장 일은 ‘이주민 노동‘
이 되었고, 그 결과 이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의 임금과 협상력에 이주노동자가 하방 압력으로 작용하여 일의 위상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 P283

다만 어느 정도는 이주민 때문에 본토인에겐 매력이 떨어지는 일자리가 된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앨버트빌에서든 다른 어디에서든 닭고기 공장 일은 ‘이주민 노동‘
이 되었고, 그 결과 이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사의 임금과 협상력에 이주노동자가 하방 압력으로 작용하여 일의 위상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 P283

 <디스 아메리칸 라이프>의 해당 회차가 방송된 2017년에 그의 시급은 11.95달러로, 인플레이션이 제대로 반영되었다면 받았을 금액의 거의 절반 수준이었다. 2002년가금류 도축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제조업 전체 평균 임금보다24퍼센트 적었다. 2020년에는 그 차이가 40퍼센트로 벌어졌다.  - P283

 그러나 실제로는 적은 임금에도 일하고 싶어하는 이주민의 공급 증가가 업계의 부담을 덜어주었다(회사 측이 노조에 가입하지 않고 불평도 거의 하지 않는 절박한 이주노동자를 선호한다는 사실은 팻 같은 본토인도 감지하고 있었다). - P284

 "이주자를 고용할 수 있는 한고용주는 더러운 일을 개선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 그리하여 미국인은 더러운 일에 점점 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³ - P284

3 Philip Martin, "The Missing Bridge: How Immigrant Networks KeepAmericans out of Dirty Jobs," Population and Environment 14, no. 6(1993): p.539. - P478

물론 진보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이주노동자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이 보기에 이주노동자는 다른 모든 사람이 하지 않으려는 힘들고 보람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 P284

 일단 가축을 공장식으로 사육하고 도축하는 산업에는 동물 학대, 호르몬제 · 항생제 남용, 환경오염 등 진보주의자가 혐오하는 많은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2009)에서 작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Jomathan Safran Poer는 공장에서 생산한 고기를 "고문당한 살‘이라고 표현했다.⁵ - P285

5 Jonathan Safran Foer, Eating Animals (New York: Little, Brown, 2009), p.143. - P478

공장에서 생산한 고기를 먹는 것은 이 고문에 가담하는 것이라는 이 책의 메시지는 건강과 생태계에 관심을 갖고 전통적인 농가에서 생산한 유기농 고기를 소비하거나 채식을 선택하는, 점점늘고 있는 소비자층에 반향을 일으켰다. - P285

 또 KFC가 "올해의 우수 공급업체"로 선정한 어느 시설에서는 "닭을 걷어차고 짓밟고 벽에 내던지고 눈에 씹는담배를 뱉었다."⁶ 이런 글에는 사람이 동물을 죽이는 일을 하면 사악한 고문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 P286

6 위의 책, p.182.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송은주 옮김 (민음사, 2011)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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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의 힘이 한순간에 빠져나갔다. 무릎에 팔을 대고 이마를 묻었다. 눈을 깊게 감자 예원이 떨어지던 순간이 선연히 감은 눈 안에서 재생되었다. - P99

아파트에서 이불을 털다가 떨어지는 일은 가끔 있는 일이라며 이송되어 오는 동안 구급대원이 말했다. 검사 결과, 팔의 찢긴 부위는 꿰매야 할 정도로 상처가 깊었지만 걱정했던 골절은 없었다.  - P99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
선준은 머릿속에 밀려 들어오는 생각을 멈추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불안증과 충동조절장애를 앓고 있는 예원이라 하더라도 그런 짓을 벌였을까. - P100

거기까지 생각한 선준의 움직임이 느닷없이 멈추었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P100

‘로운이!‘
선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로운이 혼자 집에 남아 있을터였다. 아니, 그것조차 확신할 수 없어서 불길했다. - P101

"로운아?"
거실에 불을 켰다. 로운은 거실에 없었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선우의 방은 닫힌 채였다. - P102

온 방 안은 아이가 접어놓은 종이 개구리로 가득했다. 로운은 그 한가운데에 가만히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온 빛에 눈이 부실 텐데도 움찔거리거나 잔뜩 구긴 얼굴을 들지도않았다.  - P103

그의 발에 종이 개구리가 밀렸다. 그제야 아이는 움직이는 종이 개구리를 따라 시선을 들었다. 그러고는 어느덧 자신의 가까이에 온 선준의 발이 무슨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 P103

그러고도 돌아오지않는 예원을 기다리며 꼼짝 않고 있었던 것이다. 요양원에서 엄마가 오길 기다리던 때처럼 선준은 로운의 앞에 주저앉았다. 그의 무릎에 노란색 개구리가 깔렸다. 로운의 눈이 그쪽으로 향했다.  - P104

선준은 떨리는 두 손으로 로운의 뺨을 감쌌다. 데려온 것도 예원이었고, 아이를 이대로 보낼 수 없다고 했던 것도 예원이었지만, 자신 역시 그것에 동조했다.  - P104

내 아이가 중요해 다른 아이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던 거야.
선준은 로운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로운이 큰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보았다. - P104

"이젠 제가 필요 없어요?"
돌연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런 거 아니야, 로운아."
선준이 로운의 손을 잡았다. 로운의 손은 놀랄 정도로 차가웠다. - P105

"로운아, 아저씨가 미안해 널 이렇게 혼자 두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줌마." - P105

"아줌마한테 갈래! 아줌마 아줌마!"
로운이 벌떡 일어서려 했다. 반사적으로 선준은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 힘이 강했는지 몰라도 로운의 작은 발이 미끄러지면서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아니면 스스로 넘어진 걸지도 모른다.
왜 그랬는지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 P106

그때였다. 아주 찰나의 순간 로운의 몸이 움직임을 멈췄다. 동시에 로운이 손목을 입으로 가져갔다. 작은 입이 어두운 공간을 드러내며 벌어졌다. 자해였다.
"안돼!" - P106

이렇게 되기까지 아이가 겪은 외로움은 그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외로움을 두사람이 이용하려 했다.
"미안하다 미안해."
"아줌마한테 갈래."
무슨 말을 해도 로운은 같은 말을 반복할 터였다. - P107

일단은 예원의 병원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지금쯤이면 처치가 끝났을 것이다. 아이를 예원과 만나게 해준 다음 내일 아침 일찍 요양원으로 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선준은 아이를 안고 일어나려 했다. 그것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도.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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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보는 책.


플로르 마르티네스는 어린 시절 멕시코 중북부 산루이포토시주에서 전기도, 물도 들어오지 않는 작은 벽돌집에서 조부모와 함께살았다. 집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있었지만 그들은 가난했다. - P271

그때까지 할머니가 자기 어머니인 줄로만 알았던 플로르는 깜짝 놀랐다. "아니, 아니야." 할머니가 설명하기를, 플로르의 임마는 출산 후 곧바로 다른 소도시에 있는 부잣집에 입주 가정부로 들어가는 바람에 자기가 낳은 아이를 잠깐도 돌보지 못했다고 했다. - P272

험한 삶이었지만 플로르는 낙담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행운이 찾아올 거라고 믿었다. 이러한 낙천적인 성격은 삶의 다음 단계에서 검증되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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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드라이브 마이 카 : PET 풀슬립 아웃박스 한정판 (2disc) - 스페셜북(36p)+엽서세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니시지마 히데토시 외 출연 / 아이브엔터테인먼트 / 2022년 11월
평점 :
품절


이걸 예전에 작성했었나, 마지막 연극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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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나는 소크라테스 생각을 많이해. 소크라테스가 말했지.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고 육체가 망가지면 영혼은 감옥에서 벗어난다고. 그런데 나는 그와는 반대로 파고들었어.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말처럼, 내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머리카락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았어.  - P62

내가 내 삶은 다 기프트라고 했었지? 내가 산 물건도 따져보면 다 글을 써서 산 거야. 내 물건 중에서 글과 관계없는게 하나도 없어. 글 쓰는 걸 기프트로 받았고, 글을 통해 또 세상으로부터 수많은 선물을 나는 받았네.  - P62

실토하지 않을 수 없군. 글이 안 써지는 거야. 내가 암에 걸리고마지막이 되고, 그러면 ‘메멘토 모리‘를 감각화하는 기가 막힌 글이나올 것이다. ∙∙∙∙∙ 절실한 얘기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안 돼.
당황스럽더군. 그래서 기도했지. - P63

왜 용기가 필요한 줄 아나? 인간은 차마 맨정신으로는 자기의 몸뚱이와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는 거야. - P63

내 모든 지식, 모든 생각을 가루로 만들어버리더군. 다 지워버렸어. 암세포는 내 몸의 지우개였어. 내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모든것의 지우개였어. 지우개로 지워놓으면 내가 뭘 쓰나? 공백이야. - P63

그래서 한밤중에 녹음을 해봤어. 아침에 깨어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들어보면 웃기지도않는 얘기야. 고통 속에서 절실하게 얘기했는데, 대낮에 해 뜨고 보면 형편없는 거야. 유행가도 있잖나. 밤에 쓴 편지는 부치지 말라고. - P64

게다가 지금처럼 이어령 선생님에게 작은 지혜라도 얻어가려고 시간을 내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서는데, 매주 화요일 나는 그분을 찾아뵙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니! - P66

지우개로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지. 작고 아름다운 것들, 요즘엔 그런 것들로 공백을 채워나가고 있어. 세 줄로 된 글. 3행시라고나 할까. 가령 사람이 발톱을 깎는 모습을 상상해보게. - P67

요즘엔 아프니까 밤낮 몸무게를 재거든. 시간에도 무게가 있어.
매일 가벼워지거든. 옛날에는 무거워지는 걸 걱정했는데, 지금은 매일 가벼워지는 게 걱정이야. 디지털 저울은 액정에 숫자 나오면끝이지만, 옛날 체중계는 동그랗게 얼굴이 달려 있었어. - P68

만년필 볼펜 같은 거 처음 쓸 때 시험 삼아 아무 글자나 써보잖아. 그때 뭐라고 쓸 것 같나. 시인이고 소설가고 거창한 말 쓸거같지? 삶의 무게, 시간의 절정・・・・・・ 이런 것?
아니야. 볼펜 안 나올 때 써보라고 해봐. 대한민국, 출생 주소, 이런거 써, 사람, 도로, 신발・・・・・・ 이런 일상어 쓴다고. 절대로 심각한 내용 쓰지 않네. 한 방울도 그래. - P69

과거엔 부고가 우편 전보로 날아왔어. 5일 동안 장례를 치렀으니까. 돌아보면 인간이 죽음과 함께 살았던 때가 생명의 시대였네. 길거리에서 거적에 덮인 시체를 보고, 방에서 할아버지가 죽고 장례 치르는 것을 어린 손자가 보았지. - P70

"한때 뉴욕 거리에 시체 안치소가 들어서고 시신을 실은 냉동력이 즐비했습니다. 서늘한 광경이었어요."
"비로소 지구의 인간들이 생명이 뭐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거야 오늘 있던 사람이 내일 없어질 수도 있구나. 요즘은 젊은 사람들, 아니 어린아이들도 생명을 하찮게 말할 때가 많아. 야단 한번쳐도 ‘누가 낳아달랬어? 공연히 낳아서 고생만 시키잖아‘ 쏘아붙이기 일쑤지." - P71

자기 호주머니 속에 덮여 있던 유리그릇 같던 죽음을 발견한 거야. 주머니에 유리그릇 넣고 다녀봐. 깨질 것 같아서 불안하지? 그게 죽음이라네. - P72

"한국인은 함께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하죠."
"얼마나 강했으면,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사과 다섯 개중 두 개를 먹으면 몇 개가 남지?‘ 했더니 학생이 ‘두 개요!‘ 하더래. 이 녀석아, 다섯 개에서 두개 먹으면 세 개가 남지 왜 두 개냐?‘ 했더니 답변이 걸작이야. ‘에이,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먹는 게 남는 거랬어요.‘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게 남는 거라는 거야. 배던 시절의 슬픈 유머지.
(후략) - P73

"한솥밥을 먹는다는 말에는 엄청난 결속력이 있거든. 서양도 마찬가지야. 회사를 컴퍼니company라고 하는데, com 이 함께고 pany가 빵이야. 회사라는 말도 결국 한솥밥을 먹는 공동체라는 뜻이지." - P74

"나는 말일세. 오히려 스마트폰 보며 혼밥하는 장면보다 스마트폰이 양복 주머니에서 툭 불거져 나온 모습에서 직장인들의 ‘고독의 덩어리‘를 봐. 남자들 호주머니를 보게. 스마트폰을 넣어서 축처져 있지. 축 처진 양복 호주머니를 볼때마다, 나는 남자들이 참애잔해, 그 울퉁불퉁한 고독, 숨겨도 숨길 수 없는 고독 때문에 여자들은 핸드백 들고 다녀서 모르지." - P74

선생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짐작했겠지만 나는 이런 작은 이야기들을 좋아한다네." - P75

몇년전 나는 운을 읽는 변호사라는 책을 쓴 일본의 변호사 니시나카 쓰토무 선생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50년간 1만 명의 의뢰인의 삶을 분석한 이 ‘운의 현자‘는 ‘운을 하늘의 사랑과 귀여움을 받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 P78

"궁금합니다. 선생님은 당신이 생각하기에 운 좋은 인생을 사셨나요?"
"내 인생이 운이 좋다 나쁘다. 그런 평가를 해본 적은 없네." - P79

"그렇다면 운을 시험하는 제비뽑기 같은 건 어떤가요?"
"지금까지 팔십 평생 살면서, 심지 뽑아서 하는 일은 한 번도 된 일이 없어. 여럿 중에 무작위로 뽑는 것에 징크스가 있거든. 어릴때는 고무 신발이 귀해서 나무 게다를 신고 다녔어. 시골 학교에서 한 번씩 신발 배급을 하면 개수가 모자라 제비뽑기를 했거든. 그때마다 번번이 헛것을 뽑았지. 그래서 그 부분에서는 단념을 했지. - P79

 그런데 전화가 귀하니까 정부에서 일반 전화를 뽑기를 해서 준 거야. 지붕 하나에 벽으로 두 집을분리하는 ‘나가야 연립주택에 살았는데, 그런 집이라도, 전화 한 대 놓으니 세상 다 가진 것 같았어 - P80

지금은 은수저, 금수저로 서로를 가르지만, 6·25 직후는 다 피난민이었고 평등하게 가난했던 시절이었어. 집 가진 사람도 폭격 맞아 하루아침에 거리에 나앉았고, 고아들이 지천이었네. 운 좋은 놈이 어딨어? 다 불행했지. - P80

"배급 시절의 풍경이죠. 한정된 자원을 나눠갖던 시절의 ‘웃픈‘ 이야기입니다." - P81

있지. 뽑기로 정하면 공평한 것 같아도 재수 없는 사람은 항상 소외되는 거야.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해도 밤낮 지는 사람이 있어.
주사위를 굴려도 매번 재수 없게 건너뛰는 사람이 있다고. 확률상으로만 보면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래. 카지노에 가도 잃는 사람은꼭 잃어. 속임수가 없더라도 따는 사람이 있고 잃는 사람이 있지. - P81

"운은 하늘의 사랑과 귀여움을 받는 것이라고 했나? 그 생각이 궁극적으로는 운명론이라네."
"운명론이라고요? 결국 인간의 행운과 불운은 예정된 프로그램대로 흘러간다는 그 운명론이요?"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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