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오전 11시를 지날 무렵부터 프런트 앞이 붐비기 시작했다. 체크아웃 시간인 정오가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비즈니스 손님 대부분은 좀 더 이른 시간에 체크아웃을 하지만 요즘 같은 시즌에는 관광객이 대부분이다. - P104

우지하라가 호텔 코르테시아요코하마에서 이쪽으로 옮겨 온것은 나오미가 신설된 컨시어지 데스크로 이동한 직후의 일이었다. (중략). 장래 야망은 총지배인이되는 것이라는 소문도 귀에 들어왔다. - P105

프런트 카운터와 마찬가지로 컨시어지 데스크도 점점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 시간대에는 점심 식사를 하려는데 어딘가 추천할 만한 식당이 없느냐는 상담이 많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별일도 아니지만, 대개는 어려운 조건이 붙는다. - P106

 일부러 컨시어지 데스크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그 나름의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컨시어지는 어떤 어려운 희망 사항에도 결코 ‘안 됩니다‘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 P106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데스크에 한 남자가 다가왔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정장을 입었고 마흔 살 전후로 보였다.
"잠깐 실례 좀 할까요?"
나오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무슨 일이신지요."
"1801호실의 구사카베라고 하는데, 부탁할 게 좀 있어서……………."
구사카베라는 이름을 듣고 그 즉시 나오미의 머릿속에서 한자로 변환되었다. 닛타가 얘기했던 게 생각난 것이다. - P109

"이 호텔의 서비스가 일류인지 어떤지는 내 부탁을 어디까지 들어주는가, 라는 것으로 판단하도록 하지요."
닛타가 어쩐지 밉상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구나, 라고 나오미는 생각했다. 상당히 개성이 강한 인물인 것 같다. 하지만 소중한 고객님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 P110

"별거 아니에요.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렸으면 좋겠어요."
(중략).
"네, 잘 알겠습니다. 즉시 레스토랑에 확인해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 P110

"그러시다면 별실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드릴까요? 혹시 빈곳이 없다고 해도 파티션 등을 이용해 다른 고객님들과 칸을 구분해드릴 수 있을 텐데요." 무리한 요구에는 대안을 제시해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구사카베는 손을 내두르며 고개까지 가로저었다.
"그런 좁아터진 곳은 안 되지. 그래서는 내가 계획하는 행사를 할 수 없어요. 더구나 벽 하나로는 다른 손님의 기척을 없앨 수 없잖아요. 파티션 같은 건 더더구나 말도 안 되고." - P111

드라마틱한 프러포즈를 하고 싶으니 도와달라 1년에 몇 번은 컨시어지 데스크에 반드시 날아오는 상담이다. 그런 때를 위해 평소에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궁리해 바로 이거다 싶은 것들을 차곡차곡 저장해두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구사카베에게는 이미 뭔가 계획한 게 있는 모양이었다. - P113

구사카베는 두 팔을 앞으로 쭉 펼쳤다. "우선 우리 테이블에서 레스토랑 출입구까지 레드카펫을 깔아주세요. 폭은 1미터 정도면 되겠지요."
"레드카펫 말씀이시지요." 나오미는 메모를 했다. 레드카펫이라면 연회부에서 빌려 올 수 있다.
그다음에, 라고 구사카베는 말을 이어갔다.
"그 양쪽으로 장미꽃을 주르륵 장식하는 거예요. 반드시 새빨간 장미여야 합니다. 되도록 간격을 두지 말고 촘촘히." - P114

얘기만으로도 듣고 있는 이쪽이 오글거릴 만큼 어설픈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임팩트도 있고, 구사카베를 좋아하는 여자라면 충분히 감격할 것이다. - P115

"어때요? 역시 이 호텔에서는 그런 다이내믹한 이벤트는 안될까요?" 구사카베가 양쪽 눈썹을 꿈틀 치켜들며 말했다. 일류호텔이라는 평가를 듣고 싶다면 이 정도의 희망 사항은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나오미는 딱 잘라 대답했다. - P116

구사카베가 정면 현관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배웅한 뒤, 나오미는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우선은 레스토랑 스태프와의 협의다. 그다음에는 레드카펫과 장미, 오늘은 더 이상 또 다른 번거로운 상담이 들어오지 않기를, 이라고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 P117

10

(전략).
레스토랑 스태프와의 회의도 끝났다. 요리를 내는 타이밍을 조절하는 것이며 피아노 연주, 조명의 조정 등은 비교적 간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구사카베가 그녀에게 주기로 한 108송이의 장미 꽃다발은 미리감치 테이블 뒤편에 숨겨두면 된다.
역시 어려운 것은 ‘장미의 길‘이었다. - P118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는데 한 여자가 데스크로 다가왔다. 30세 전후, 아니, 그보다 조금 더 많을까. 침착한 분위기의 동양적인 미인이었다.
"잠깐 물어볼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공손한 어조로 말을 건네왔다.
(중략).
"어제부터 이 호텔에 구사카베라는 분이 투숙 중이지요? 구사카베 도쿠야라는 분." - P119

"이해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왜냐면 오늘 밤 그와 이곳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으니까요."
이 여자였구나. 나오미는 상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고 싶은 충동을 지그시 억눌렀다. - P120

"다른 고객님의 프라이버시에 관한 질문에는 답해드릴 수 없지만, 저희가 뭔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여자는 잠시 생각해보는 듯이 시선을 떨구었다.  - P121

"어떤 일인지......"
"그의 말에, 그의 프러포즈에, 나는 예스라고 할 수 없다는 거예요."
나오미는 숨을 헉 삼키며 여자를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혹시거절하실 생각?"
네, 라고 그녀는 턱을 끄덕였다. "네, 거절할 생각이에요." - P122

"그의 프러포즈에 나는 노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래서는 소중한 오늘 밤도 뒷맛이 씁쓸한 시간이 되고 말 거예요. 그걸 어떻게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중략).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상의하러 왔어요. 그 사람이 창피해하지 않게, 서로 어색해지지 않게 프러포즈에 노라고 대답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요?" - P125

11

(전략). 서류의 맨 위에는 ‘매스커레이드 나이트 참가자 목록‘이라는 제목이 인쇄되었고 그 아래로 줄줄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잠깐 보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닛타는 서류를 손에 들었다. - P126

"대표자 이외의 참가자 이름은 알 수 없습니까?"
"그것까지는 모르지요." 에가미가 말했다. "거의 전원이 숙박예약 때 이번 파티를 함께 신청했어요. 숙박 예약 자체가 대표자 이름만 적게 되어 있어서 동행한 손님들의 이름까지는 우리 쪽에서 알지 못합니다." - P127

닛타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주었다. "이거 받아둬."
"뭡니까, 이건?"
"새해 카운트다운 파티의 참가자 목록이야. 대표자 이름만 적혀 있는데 그것도 본명인지 어떤지 확실하지는 않아." - P128

"호텔리어끼리는 고객님에 관한 정보를 서로 공유할 필요가 있다, 라고 알려준 사람이 야마기시 씨예요."
"고객님의 프라이버시에 관한 일의 경우에는 별개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래도 야마기시 씨 이외의 다른 직원들에게 모두 다 비밀로 한 건 아니잖아요? 일을 도와줄 스태프들에게는 얘기했을 텐데?"
"네, 맞는 말씀이지만 닛타 씨가 도와주실 일은 없어요." - P130

"그게 걱정이에요. 구사카베 씨는 자신만만한 분이라 거절당한다는 건 요만큼도 머릿속에 없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렇다면 아예 본인에게 미리 말해주면 어떨까요? 당신 거절당할 겁니다, 라고." - P132

"뭔가 찾아냈습니까?"
아니, 그게 말이지, 라고 노세는 그리 탐탁지 않다는 목소리를냈다.
"우선 과거 1년 치를 조사해달라고 했는데, 이번 사건과 연결될 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은 모양이야. 젊은 여성이 살해된 사건이 몇 건 있었지만 공통된 키워드가 없다는 거야." - P133

"아니, 생각해볼수록 나는 닛타 씨의 가설이 맞는 듯한 느낌이들어. 어쨌든 좀 더 달라붙어서 뛰어볼 생각이야. 아 참, 그리고 그 레지던트 말인데, 오늘 저녁에도 만나러 갈 거야. 이번에는 죄다 털어놓게 할 테니까 두고 봐." - P135

12

구사카베 도쿠야가 호텔로 돌아온 것은 오후 7시를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컨시어지 데스크로 다가온 그는 "어떻게 됐어요?"
라고 나오미에게 물었다.
"지시하신 대로 진행 중입니다. 레스토랑 직원들은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니까 구사카베 님은 직원이 안내하는 자리에 앉아주시면 되겠습니다." - P137

"뭔가 좋은 방법이 있나요?" 가노 다에코가 물었다.
나오미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했어요. 그 결과, 공연히 말을 빙빙 돌리거나 말끝을 흐리지 말고, 거절은 거절대로 좋은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가노 다에코의 얼굴이 흐려졌다. "분명하게 말해버리라는 건가요?" - P138

"어려울 거 없어요. 똑같은 이벤트를 준비하는 거예요."
"똑같은 이벤트를?" 가노 다에코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표정이었다.
네, 라고 나오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구사카베고객님과 똑같은 것, 즉 ‘길‘이에요." - P139

13

(전략).
"사실은......." 닛타는 작은 소리로 구가에게 말했다. "수사 회의보다 프렌치 레스토랑 쪽이 너무 궁금해요. 지금쯤 일이 어떻게 되었나 하고."
아하, 하고 구가가 입을 헤벌린 채 컨시어지 데스크 쪽으로 시선을 내달렸다.
"그 얘기, 나도 들었어요. 레스토랑에서 화려한 프러포즈를 계획한 고객이 있다면서요?" - P140

 "고객님에 관한 정보 공유가 아니라 그저 가십거리 삼아 이야기꽃을 피우다니."
"엇, 실례. 이 정도만 해두죠." 구가는 쓴웃음을 지으며 사과한 뒤, 사무실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급히 사라졌다. - P141

아, 하고 여자는 입을 살짝 벌리더니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고개를 끄덕였다.
"나카네 신이치로예요. 미안합니다. 예약한 본인은 나중에 올 예정이라 나한테 먼저 체크인을 하라고 했어요." 허스키하고 섹시한 목소리였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부터 1월 1일까지 3박, 두 분, 객실은 코너 스위트룸으로, 틀림없으십니까?" - P142

원래는 예약자의 이름을 적어야 하지만 성씨가 일치하기 때문에 딱히 문제는 없었다. 우지하라도 다시 적어달라고 하는 일 없이 고맙습니다, 라고 받아 들었다.
"나카네 고객님, 결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용카드입니까 아니면 현금이십니까."
우지하라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마 신용카드일 거예요." - P143

"나카네 고객님, 복사해 신용카드는 실제 결제하실 때 사용하는 카드가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지금 뭔가 신용카드를 갖고 계시다면 그것으로도 가능합니다."
"내 카드여도 괜찮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 P144

우지하라가 카드키를 준비하는 동안, 닛타는 슬쩍 신용카드 복사본을 확인했다. 그곳에 찍혀 있는 이름은 〈MIDORI MAKIMURA>라고 되어 있었다. - P144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호텔에 숙박한다고 해도 별문제는 없어요. 그런데도 굳이 똑같은 성씨를 써넣은 것은 뭔가 켕기는 일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P145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고객님은 우리 호텔의 귀중한 손님이에요. 남의 눈에 띄면 좋지 않으니까 레스토랑은 이용하기가 힘들어요. 필연적으로 냉장고 이용과 룸서비스가 많아집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이익률이 아주 높아요." - P145

14

(전략).
"노세 씨의 성의 얘기 말인가요? 그게 어떤 식으로 힌트가 됐지?"
"그건 직접 보면 알아요. 아, 하지만 잘될지 어떨지, 자신이 없네요. 어쩌면 나중에 구사카베 씨가 항의를 할지도 모르겠어요."
"와아, 이거 점점 더 궁금해지는데요."
닛타가 호기심의 눈빛을 보였을 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 P147

오오키는 석연치 않은 기색이었지만 굳이 되묻는 일 없이 "입구 쪽의 조명을 낮춰서 안이 상당히 어두워 조심해요"라면서 문을 열었다.
오오키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아닌 게 아니라 어둠침침했다.
하지만 바닥에 레드카펫이 깔리고 양쪽으로 꽃 장식이 줄줄이놓여 있는 것은 알아보았다.
2꽃을 본 닛타가 뭔가 말하려는 낌새를 보이자마자 나오미가 급히 집게손가락을 입에 대며 제지했다. - P148

아직 식사가 이어지고 있을터인 유일한 테이블은 창가에 놓인 1.5미터 정도 높이의 칸막이 때문에 나오미의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 바로 앞쪽까지 레드카펫이 깔렸고 꽃 장식도 진열이 끝나가고 있었다. 스태프들의 움직임에는 한 치의 낭비도 없었다. - P149

"빨간장미의 꽃말을 알고 있어?" 구사카베가 물었다.
"장미의 꽃말은...... 사랑?"
가노 다에코의 대답에 구사카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이 장미 꽃다발은 좀 더 특별해, 108송이야. 이 숫자일 때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어. 혹시 모른다면 지금 바로검색해봤으면 좋겠는데." - P151

가노 다에코는 반지와 구사카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반지 쪽으로 손을 내미는 일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략).
"우리가 앞으로 걸어갈 길은 유감스럽지만 장미의 길이 아니에요. 열정적인 사랑의 길이 아니랍니다." - P152

엇, 하고 구사카베가 놀란 소리를 올렸다.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허리를 숙여 장식된 꽃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장미가 아니잖아."
"그래요." 가노 다에코는 말했다. "장미가 아니라 스위트피요." - P152

 가노 다에코가 말했다. "실은 오늘 밤에 당신이 프러포즈를 할 거라고 짐작했어요. (중략). 그 말을 듣고 전적으로 공감했어요. 이거라면 당신의 진심 어린 프러포즈에 나름대로 성실한 대답이 될 것 같아서." - P153

"스위트피의 꽃말을 알고 있어요?"
(중략).
"이별, 이라는 게 있는데."
"새 출발, 이란 것도 있죠. 그리고 우아한 추억, 이라는 것도." - P153

구사카베는 촘촘히 놓인 스위트피 꽃장식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팽팽히 당겨졌던 표정이 온화하게 풀리더니 그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얄궂은 일이네. <메모리>라는 노래에 이 스위트피의 길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점점 드니까 말이야." - P154

15

(전략).
"오늘 오후 4시경에 경비실 방범 카메라 담당 형사에게서 묘한 움직임을 보이는 남자가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정면 현관으로 들어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에 올라가 행사 일정이 없는 연회실이며 대기실을 살펴봤다고 합니다. (후략)." - P155

"다만 도리어 질문을 받은 게 있었습니다."
"어떤 질문을?"
"코르테시아도쿄 호텔에서는 항상 경찰이 감시하고 수상쩍은 사람은 검문을 하느냐고 묻더라고요‘
이나가키의 한쪽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오늘은 우연히 이렇게 된 거라고 답했습니다." - P156

모토미야의 대답에 이나가키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칫솔과 면도기를 입수하려는 것은 DNA 감정에 가장 적합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이번 피해자 이즈미 하루나는 임신 중이었다. 태아와의 친자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면 결정적인 단서가 될터였다. - P157

하지만 이건에 관해서는 호텔 측의 협조는 일절 얻을 수 없었다. 무단으로 고객의 DNA를 조사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하우스키핑에 입회한 수사원이 몰래 회수해 오는 방법을 써보려고 했던 것인데, 모토미야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것도 여의치 않을 것 같았다. - P1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바사키 군, 교육위원회에서 지정했던 ‘바람직하지 않은 도서‘를 관장실에 가져다주지 않겠나. 대출 중이 아닌 책은 예비본까지 모두."
부관장이 시바사키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그날의 폐관시각이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 P148

아직 40세 남짓인 관장대리보다 열 살 이상은 젊을 텐데, 그 말투는 어리석은 부하를 대하는 것 같았다.
"헤에, 이런 시간에 행정관계자가 오다니 드문 일이네요."
각종 행정위원회가 도서관을 방문하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방문 시간은 대체로 오후다. 폐관시각인 19시에 가까운 늦은시간에 방문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 P149

지정된 도서를 관장실로 가져다주고 폐관시각을 맞았을 때였다. 관내에 비상벨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급박한 관내방송이울렸다.
「경계 중인 경비로부터 연락, 양화특무기관이 당관을 포위중! 전원 신속히 경계태세로 들어가도록! 관내에 남아 있는 이용자는 즉시 밖으로 나가주십시오!』
시바사키가 실무를 맡게 된 뒤로 처음 있는 양화특무기관의습격이었다. - P149

"서고 봉쇄하겠습니다!"
한 사람이 외치며 지하 서고로 뛰어갔다. - P150

피난할 곳은 2층의 방호실이었다. 교전 규정에서 방호실은 공격하지 않기로 정해져 있다.
이미 현관과 뒷문에서 각자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총격 소리가 안팎에서 울린다. 그 때문에 전관에 방탄유리를 사용했지만 그래도 관내를 이동하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 P151

비상벨에 다다른 시바사키는 인터폰을 들었다. 관내방송으로 회선을 잇는다.
"업무부로부터, 적의 목표는 관장실입니다!"
그 말만 외치자마자 인터폰을 끊고 시바사키는 이번에야말로 방호실로 피난했다. - P152

비상소집으로 달려가고 있던 이쿠는 흠칫하며 관내방송 스피커를 올려다보았다. 시바사키의 목소리다. 무슨 소리인지 생각하기 전에 먼저 몸이 움직였다. - P152

"시바사키가 관장실이라고 했어!"
"무슨 바보 같은.. 도서관원인 일사와 도조 이정의 지시 중 어느 쪽이 우선이야!"
"이 경우는 시바사키야! 그 녀석은 이럴 때에 의미 없는 말을하지 않는다고, 절대로!"
"근거가 없잖아!"
"나는 시바사키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어, 그게 근거야!" - P153

양화대원 가운데 등짐을 짊어진 한 사람이 위로 도망쳤다. 도망친 한 사람을 쫓아야 할까, 남은 양화대원의 뒤를 쳐야 할까.
『테즈카, 카사하라! 거기에 있나!』 - P154

날이 저물어가는 가운데, 철책에서 지면을 내려다보자 등짐은거의 바로 아래쪽 뒤뜰, 수풀 속에 떨어진 듯했다. 테즈카가 무선으로 도조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회수를 요청했다.
그때 난간에 총탄이 튀었다. 지상에서 날아온 공격이었다. 황급히 엎드려 살피자 충격이 그치고, 지상에 배치되어 있던 양화부대가 등짐을 회수하러 오는 기척이 났다. 도조가 회수하기엔 시간이 맞지 않았다. - P155

이쿠가 외치자 테즈카는 흠칫했지만 곧 반박했다.
"너 따위에게 걱정을 들을 이유는 없어, 내가 간다! 여자를 표적으로 삼도록 내버려둘까봐!"
"적당히 좀 해, 뭐든 네가 1등이어야 마음이 풀리겠어?! 적재적소는 궁핍한 군대의 기본이라고!" - P156

관내에서 낯익은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출입구에서방위원이 뒤뜰로 뛰쳐나와 반격이 시작되었다.
격렬한 충격은 단시간에 종식되어, 양화특무기관은 목표달성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 P157

이쿠는 도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도조 교관님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습니다."
"너란 녀석은..!"
"잠깐, 어째서?! 엄청 진지하게 사과했는데?!"
진지한 사죄가 도리어 화를 부르는 바람에 잔소리는 대단히길어졌다. 사후처리를 하는 대원들이 쿡쿡 웃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이쿠는 우울해져서 몸을 움츠렸다. - P158

다른 대원이 부르자 자리를 뜨면서 도조는 지시를 남겼다.
"도서를 열람실로 돌려놔. 업무부가 사후처리를 시작했을 거다. 그 김에 시바사키에게 말해줘.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까."
경고의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 P159

"뭐야, 그 부루퉁한 얼굴은. 아직 뭐 불만 있어?"
옥상에서 윽박질렀던 게 마음에 안 들었나 생각하면서 묻자테즈카가 갑자기 멈춰 섰다.
"제안하겠는데."
(중략).
"너, 나랑 사귀지 않을래?"
"........하?" - P160

3 도서관은 이용자의 비밀을 지킨다

(전략).
『지금 텔레비전 볼 수 있나? 어디든 좋으니까 민영방송 뉴스 봐둬라.』
갑작스런 명령이라 이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영방송이라는 지정도 수수께끼다.
"민영방송요? NHK가 아니라?"
『이 경우에는 떠들기 좋아하는 방송국이 좋아.』 - P162

돌아온 시바사키가 주전자 콘센트를 꽂으며 보온으로 설정했다.
"어쩐 일이야? 돌아오자마자 네가 텔레비전을 켜고."
"왠지 모르겠는데, 도조 교관님이 전화해서 봐두래."
"뭣, 교관님이 전화했어?! 나한테 해주지!"
시바사키는 대체 어디까지 진심인 걸까. - P166

시바사키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과연, 봐두라는 게 이거구나."
고교생 대상의 바람직하지 않은 도서‘로 교육위원회의 목록에 올라 있는 책으로, 전투 뒤의 확인 작업에서 미디어 양화위원회의 검열대상에도 들어 있다는 사실이 판명된 호러 작품이다. 검열사유는 ‘지나친 잔혹묘사‘다. - P164

"미디어 작품이 범죄를 조장한다면 남자는 어리든 늙었든 죄다 성범죄자 예비군이야, AV니 에로책이니 조교물이니 능욕물이니, 성범죄 지망의 온퍼레이드잖아. 미디어를 흉내 내서 범죄가 일어난다면 제일 먼저 여자한테 총기 휴대를 허가해야 할걸." - P164

하지만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검열을 정당화하는 움직임이 높아지기 때문에 도서관이나 미디어 관계자로서는 골치가 아파진다.
"하지만 이 뉴스가 방송된 날에 교육위원회가 검열을 하러 들이닥치다니 타이밍이 너무 좋은데? 문제도서와 소년의 장서가 일치한다는 점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 같고." - P165

아무리 도서관법 제4장에 내부감사규정이 없다고 해도, 양화위원회의 검열에 도서관이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었다면 도서관의 이념과 신용을 뒤흔드는 커다란 문제가 된다. 관장대리의 관여가 입증되면 칸토 도서대의 의사를 걸쳐 인사변경도 가능하지만, 현재로서는 모르는 척 묵인하고 넘어갈 듯하다. - P167

"뭐야, 그게... 테즈카가 괴롭히는 새로운 수단이야?"
우와, 개그말고도 다른 해석이 있었다. - P168

확실히 연애 감정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그쪽이 납득할 만하다. - P169

빈축을 사기 쉬운 입장이란 뭐든 잘 해내서 그런가 싶었더니 그게 아니었다.
"어머, 몰랐어? 그 녀석 아버지가 도서관협회 회장이야." - P169

"아무튼 그만큼 처신을 잘 하고 딱 부러지는 녀석이 너한테만은 그렇게 털을 곤두세우는 걸 보면 역시 동기 중에서 너를 엄청나게 의식하고 있단 뜻이지."
"그런 천성적인 엘리트에게 원한을 살 만한 기억은 없다구!" - P170

네 성격이 나쁜 것도 말이야, 이 말은 속으로만 덧붙인다.
"거기에서 뭘 어떻게 하면 나랑 사귀자는 말이 나오는 건데?"
"음. 그건 미움이 어느새 사랑으로……."
"진심이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두뇌파의 간판 내려버릴까?"
"남의 연애사정을 내가 어떻게 알아." - P171

"그보다 사귄다는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거야?"
그 물음은 완전히 이쿠의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아니, 진심으로 사귀고 싶다는 말이라면 검토할 여지는 있잖아? 머리가 굳었다면 사귈 때에도 성실할 테고, 외모도 근사하고 키도 너보다 크잖아. 사귀면 의외로 괜찮을지도 모르는데." - P172

 연애에 익숙하지 않은만큼 자신이 여러 가지로 환상에 젖어 있다는 점은 자각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고3 때에 만났던 도서대원을 하필이면 도조 앞에서 왕자님이라고 불러버릴 리가 없었다.
"너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 질문도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 P173

연수 과정은 서고 업무를 마치고 열람실 업무로 바뀌어 있었다.
업무부의 조례보다 먼저 이루어지는 반내 조례 때, 이쿠 쪽은 테즈카와 얼굴을 마주치는 바람에 상당히 어색해했지만 테즈카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어제 사귀자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의심스러워질 만큼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였다. - P174

"죄송합니다. 단말기 조작을 좀 봐주셨으면 하는데요."
(중략).
장서를 분류하고 있던 도조는 손놀림을 멈추고 이쿠가 쓰고있던 단말기까지 와주었다.
"(중략).
"그게, 실수해서 타관에 요청서를 보내서요."
아아, 대답한 도조는 도중에 고개를 기울였다. - P175

"한 번 듣고 익히지 못하면 테즈카에게 물어보라고 했잖아"
어, 하고 몸을 사리는 기척이 느껴졌는지 도조가 얼굴을 찌푸렸다. 또 싸웠냐, 너희들, 하고 질린 듯이 중얼거리더니 테즈카를 불렀다.
"아니, 잠깐...!"
엉겁결에 이쿠는 도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도조가 놀란 듯이 돌아본다. - P176

"사귀자고 그랬대요."
서고에 내려가던 도중에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계단 위에는 시바사키가 있었다. 안쪽 난간에 팔꿈치를 걸치고 몸을 내민 채 생긋 웃으며 도조를 내려다보고 있다.
"테즈카가 카사하라에게." - P177

문득 도조는 이쿠에게 붙잡혔던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긴소매와이셔츠에는 세게 붙잡힌 흔적이 주름으로 남아 있다. 의자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을 떠올리자, 매달리려 하는 손을 뿌리쳐버린 듯한 꺼림칙한 기분이 문득 솟아올랐다. 평소처럼 싸웠으리라고 생각했기에 적당히 좀 하라는 의미도 포함해 테즈카에게 넘겼지만 만일 알고 있었더라면-. - P178

휠체어에 앉은 신사는 남자의 부하에게 빙긋 웃었다.
"옛날에 다리를 한쪽 잃었다오. 걷는 게 좀 불편해서 그러니 이해해주시오."
부하는 이 남자가 다리를 잃은 경위를 직접적으로는 모르는 세대였다.
칸토 도서기지사령관, 이나미네 카즈이치는 소파 다리가 하나 빠져 있는-아니, 빼놓은 공간에 특별주문한 듯한 자동식 휠체어를 넣어두었다. - P180

이나미네의 물음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고 남자도 고개를끄덕였다.
"이미 아실 테지만, 예의 연쇄 무차별살인사건 수사본부에서왔습니다." - P181

"소년은 체포된 뒤 계속해서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소재가 필요합니다. 소년은 도서관을 곧잘이용했던 듯하니 독서 경향에서 뭔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범행에는 전문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종류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전문서를 소년이 혹시 빌렸더라면 검찰 측의 판단근거로・・・ " - P182

"쇼와의 무차별생화학 테러 때에는 국립국회도서관에서 이용자 정보를 제공했다고 하던데요."
그것은 쇼와 마지막 해였던 그 해에 마치 장례식에 맞추기라도 한 듯한 타이밍으로 어느 광신적인 단체가 국제조약으로 금지되어 있는 신경가스를 사용해 테러를 일으켰던 사건이었다. - P183

"도서관법 제32조에는 그 반성도 담겨 있습니다."
도서관은 이용자의 비밀을 지킨다. 당시에는 ‘도서관의 자유에 관한 선언‘이라는 일본도서관협회에서 채택된 선언의 제3항이었다. 이 장제가 입법화되어 도서관법 제32조가 되었다. - P183

"하지만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용의자는 미성년자라고는 해도 중대하고 잔인한 범죄를 저질렀고, 국민의 분노하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도서관의 협력은 높이 평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이러한 잔인한 사건에서 범인이 미성년자이니까 죄가 줄어든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한 시민으로서 제가 협력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수사에도 협력할 테지요. 그러나 동시에, 도서관이 스스로 세운 법을 굽히면서까지 수사에 협력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 P184

"하지만 용의자는 사람을 셋이나 죽였어요. 인도적으로도 협력은 타당한...."
"범죄자를 두고 법을 지킬 필요는 없다, 그렇게 말씀하시는겁니까?"
핵심을 찌른 이나미네가 살짝 웃었다. - P1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Intro

세 살 터울의 동생은 생쥐를 닮았다. 키는 150센티미터가 겨우 넘지만 지치는 법이 없고, 까맣고 동그란 눈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다양한 각도에서 반짝인다. - P11

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나와 동생이 가족이라는 사실을놀라워했다. 나는 180센티미터가 넘고, 대체로 생각에 잠겨 있고, 사람을 대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상대의 용건을파악한 다음 머릿속의 매뉴얼에 따라 행동하는 게 고작이다. - P12

. 나는 개인 사무소를 갖춘 인공지능 설계사고, 동생은 가끔 내 집에 들러서 생쥐 우리를 살핀다. (중략). 우리는 잘 지낸다. 당신이 알아야 할 사실은 그것뿐이다. - P13

01



(전략).
시영은 화분에 설치된 인공지능의 설정을 바꾸기 위해 내 사무소에 들렀다. 화분에게 짜증을 자주 냈는데, 그래서인지 태도가 이상해졌다는 거였다. - P17

상담이 계속되면서 나는 화분의 설계보다도 시영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었다. - P18

나는 캐묻지도 않았고 훈계를 읊지도 않았다. 서글픈 느낌을 담아 웃기만 하면 사람은 거기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발견하기 마련이다. 시영은 내가 아주 사려 깊다고,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에 안달 난 사람들과는 완전히다르다고 말했다. - P19

"혹시 제가 너무 무례했나요? 사생활에 간섭해서? 하지만・・・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의미 있는 선물이잖아요."
시영이 수백 가지의 질문이 얽힌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네, 좋았죠. 좋았어요. 완벽했어요. 하지만 이럴 거면 왜 오신 건가요? 지금까지 식사약속은 모두 거절하셨잖아요."
"내일이면 떠나시니까,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하려 했어요. 사람 사이의 예의니까요." - P21

"됐어요. 더 듣고 싶지 않아요. 선생님은 저랑 완전히 달라요."
시영은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또다시 실수했다는생각에 속이 메스꺼워졌다. (중략). 하지만 완벽한 성공이 완벽한 실패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다. - P22

내 마음속에는 끝나지 않는 채점표가 있다. 도덕적이었는지, 부도덕했는지. 이타적이었는지, 이기적이었는지. 온화했는지, 성급했는지, 공손했는지, 무례했는지. 상대를 만족시켰는지, 실망시켰는지…………. 총점을 최대한 높게 유지하려는 노력은 나를 그럭저럭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고, 남을 해치지 않는 데에 도움을 준다. - P22

인간들은 자연을 아끼는 척하면서도 사나운 구석은 악착같이 정복하려 들거나 다만 외면해버린다. 그러고는 자연의 목록에 보기 좋고 예쁜 것만을 남긴다. 건물을 휩쓰는해일은 재해고, 무더위는 이상기후고, 고요하게 반짝거리는 바다만 자연이 되는 식이다. - P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들어가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한 BIT의 등장

우리는 모두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본능과 공통의 충성심을 바탕으로 집단을 형성하고 유지하려는 우리의 특성, 동기, 문화는 여러 의미에서 곧 인류의 역사다. 인간에게 이러한 사회적 특성이 없었다면 사회 또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 P4

21세기,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사회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에 따라 다양한 사회적 범주social category 혹은 집단에 속할 수 있고,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수단도 가지게 되었다. - P4

그러나 타인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자 하는 우리의 본능은 우리를 긍정적이지 못한 방향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중략). 이는 2007~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의 징후였다. - P5

금융 위기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다수의 전문가와 학자들은 선진 서구권에서는 뱅크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태도를 고수했다. 단순히 법률이나 역사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즉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통적인 경제사상에 입각한 믿음이었다. - P6

행동경제학 분야는 학계에서 이미 크게 인정을 받았지만(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 교수는 아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와 1979년 함께 발표한 전망 이론Prospect theory으로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대중의 인식이나 정책 입안자들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하지만 2008년 출판된 리처드 탈러Richard Thaler와 캐스선스타인 Cass Sunstein의 책 《넛지Nudge》와 금융 위기는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 P7

지난 몇 년간, 세계 각국의 정부는 탈러와 선스타인(그리고이들의 추종자들)의 자문에 귀를 기울여왔으며, 소위 ‘넛지 유닛(Nudge Unit, 더 나은 시민의 선택을 지지함으로써 공공복지를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이라 불리는 단체가 속속 등장했다. - P8

2010년 이루어진 BIT의 출범은 두 가지 이유에서 획기적이었다. 첫째, BIT는 사람들의 실제적 사고방식에 대한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더욱 현실적인 개인의 행동 모델을 정계에 소개했다. 둘째, 이론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데이터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다. - P8

대공황, 넛지, 그리고 경제학에서 말하는 행동적 혁명behavioral revolution은 대부분 인간의 인지적 실패, 즉 행동 편향behavioral bias이라 불리는 인간의 뇌가 가진 단점이자 인간의 행동을 유도하는 속임수에 중점을 두고 있다. - P9

행동경제학의 혁명으로 소셜 네트워크의 파급 효과에 대한인식이 재고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효과는 또 다른 혁신으로 인해 증폭되었다. - P10

우리의 의사 결정에 사회적 본능과 소셜 네트워크가 미치는 영향이 증가하면서 기술 기업이나 정치인들을 포함한 대부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를 이용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 P10

(전략).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지만 부정적인 사실에만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사람들은 안전과 존중, 행복을 제공하는 사회적 집단의 힘을 너무 쉽게 망각한다. - P12

이 책의 첫 번째 파트에서는 서로 다른 사회적 집단에 속한사람들 사이의 상호 작용, 더 나아가 ‘우리‘라는 분류에 속한 사람들 사이의 상호 작용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 P13

이 질문에 관해서는 책의 두 번째 파트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또한, 리처드 탈러와 캐스 선스타인의 저서 《넛지》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선택 설계social choice architecture에 관해 소개할 것이다. - P14

 우리는 집단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행동을 규범으로 이해하지만, 이 규범에 대해 종종 잘못된 인식을 지니기도 한다. 때문에, 긍정적인 규범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부정적인 규범에 대한 정보를 줄임으로써 긍정적인 행동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 - P15

(전략). 넛지의 한계는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만약 집단과 구성원 간의 관계가 약화되었다면, 사회적넛지는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 P16

책의 마지막 파트에서는 사회적 자본에 영향을 미치는 세가지 유형의 개입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 P16

이 책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소속감과 신뢰를 고양하고, 차별과 복종은 줄어드는 사회에 대한 로드맵을 그리는 것이다. - P17

사회적 본능은 우리를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기도 하고, 나쁜방향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환경에 가해지는 작은 변화조차도 이러한 방향성에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이해하기를 바란다. - P17

2부

사회를 조종하는
넛지의 힘


모든 것에 꼬리표를 붙일 수는 있으나,
모두에게 꼬리표를 붙일 수는 없다.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The Age of Innocence, Edith Wharton)

4장 스스로를 포장하는 사람들

(전략).
이는 사람들을 더 힘 있고 대의적인 민주주의라는 강력한가치로 유도하기 위해 사용되는 공유 정체성shared identity의 한 예이다.
실제로, 사회적 정체성 이론가들은 공동의 사회적 집단이라는 인식이 사회적 영향력과 조직의 기초라고 주장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다른 사람과 집단 소속감을 공유한다고 인식할 때, 사람들은 공유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그 사람과 의견이 일치하기를 기대한다 - P100

집단 동일화group identification의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스스로를 특정 집단으로 분류한다. 사회 정체성 이론socialidentity theory에서는 이러한 분류가 합의된 것이기를 요구한다. (후략).

2. 스스로를 이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점차 가까워지고 있으며, 공통점도 많아지고 있다고 여기기 시작한다.

3. 우리는 우리의 집단을 다른 집단에 비해 특별하게, 더 좋게, 더 바람직하게 만드는 것들을 강조함으로써 속해 있는 집단을 ‘긍정적으로 차별화하고자 한다. (후략). - P101

이상적인 구성원 되기

흔히 한 개인의 사회적 집단이 쉽게 정해진다고 생각할 수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성별, 인종, 국적, 섹슈얼리티, 나이와같은 명백한 특징에 근거하여 사회적 집단에 가입한다. - P102

이러한 예는 ‘정체성 부각identity salience‘이라는 개념을 끌어낸다. 이는 특정 상황에서 어떤 정체성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지를 의미한다. - P104

이러한 과정들의 밑바탕에는 집단의 ‘이상적인 구성원에 관한 지속적인 탐구와 절충이 있다. 집단의 이상적인 모습은 구성원들에게 모범이 되는 특성이나 행동의 집합체이다. 즉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그리고 ‘우리를 차별화하는 것은 무엇인가다. - P105

우리가 속해 있는 집단은 우리의 행동에 단순한 대화 이상의 영향을 미친다. 비록 이 분야의 연구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지만, 특정 행동이 그들의 확립된 사회적 집단 또는 그들이 속하고싶은 집단의 모습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았다. - P108

•소속감과 차별성 사이의 줄다리기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머릿속을 떠다니는 많은 집단 정체성group identity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특정 집단과 동일시하는 정도가 어떻게 변화하는가라는 흥미롭고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중략).
초기의 연구에서 집단 동일화의 강도는 주로 자존감과 연관된다고 제시했다. 즉 자신에 대해 더 좋은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집단과 더 많이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 P110

사실 우리가 정말 추구하는 것은 ‘최적 차별성optimal distinctiveness‘이라 불리는 개념이다. 인간이 특정 사회적 정체성에 대해 동일시하는 정도는 그 집단이 소속감과 타당성에 대한 욕구와 차별성과 개성에 대한 욕구 사이에서 얼마나 균형을잘 맞추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 P111

무엇이 우리를 특정한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정도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또 다른 힌트는 BIT와 킹스칼리지 런던 King‘s College London이 함께한 연구에 있다. 해당 연구는 킹스칼리지 신입생들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수행되었다.
(중략).
한편, 이 설문 조사에서 저소득층 학생들이 킹스칼리지 런던의 모든 것‘을 최우선으로 동일시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저소득층 학생들은 대학의 상징적 가치와 학창 시절 친구들에 비교해 최상위권 대학에 다니는 것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더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학생들이 학과 과정 동료들과 강한 대인 관계를 맺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이에 대해 11장에서 더 살펴볼 것이다). - P113

직장은 일련의 단계적인 정체성 집단을제공하여 ‘전형적인‘ 노동자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고, 다른 집단과 비교하도록 유도한다. 사람들은 조직 전체, 지점이나 현장, 업무 집단, 규율이나 지위와 관련된 사회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으며, 이러한 정체성은 일하는 동안 서로 중첩되고 상호작용한다. 이것이 공동의 목적(또는 조직 내의 다른 영업 부서나 스포츠의 상대 팀과 같은 공동의 라이벌)이 조직의 단결을 위해 중요한 이유이다. - P115

사회 정체성 이론: 편견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

지난 1장에서 증가하는 정치적 정체성political identity의 일치를 살펴보았다. (중략). 한 조사에 따르면, 자신이 속한 다양한 사회적 집단을 비슷하거나 심지어 겹치는것으로 여기는 응답자들은 집단의 규범을 위반한 다른 사람들을 처벌하고 다른 집단을 차별할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밝혀졌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 P115

하지만 점차 분열되는 사회, 혹은 집단에 대해 무엇을 할 수있을까? 집단이 서로 충돌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개발된사회 정체성 이론이 집단이 어떻게 조화롭게 살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을까?
집단 간의 갈등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만큼 피할 수 없는 인간사회의 특징으로 여겨졌지만, 사회 정체성 이론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는 비교적 새로운 분야이다. - P116

또한, 만약 우리가 타인에게서 편협한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그들에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특히 그들이 우리의 사회적 집단에 속해 있다면 말이다. - P117

다른 집단 구성원들과 교류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일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사람들은 어느 집단과의 관계가 깊고 조화로워질 때까지는 그 집단 사람들과 더 교류하고자 하며, 다른 집단 사람들과는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 P118

(전략). 소셜 미디어는 이러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페이스북 거품 Facebook bubble‘ 안으로 넣어두고 자신과 반대되는 사회적 집단이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절대 마주치지 않을 수있다. - P119

특정한 심리 활동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적 집단 밖의 사람들 간에 거리를 두려는 경향을 줄일 수 있다는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 - P119

상대방의 관점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는 ‘조망수용 Perspective-taking‘ 역시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 관념을 줄이는 흥미로운 방법이다. - P121

타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고정 관념은 우리가 속한 사회적 집단 내에 떠다니는 정보에 의해 형성된다. (중략). 앞서 이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는 집단의 자연스러운 부분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른 집단과 차별화하고, 그들보다 더 정정당당하거나 의욕적이라고 느끼기를 원한다. - P122

이 장에서 우리는 사회적 집단의 형성에 대해 알아보았다. 집단 구성원들은 ‘이상적인 구성원의 기준을 수정하며 지속적으로 집단에 참여하고, 구성원들이 이러한 정형화된 모습과 닮기를 기대한다. (중략).
이제 우리는 정보나 기대가 집단에서 어떻게 흘러가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이에 사람들의 사회적 특성 중 가장 좋은 면을 끌어내려면 팀이나 직장, 정책을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 P1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전자를 사유로 노력하지 않거나 혹은 그러한 것을 정당화 한다는 생각은 의외로 오래되었다는 것을 깨닳았다.

서문-좋은 시대와 나쁜 시대를
투영하는 거울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공화국의 시민은 교육을 받고, 제각기의 장점에 따라 통치자, 보조자, 그리고 직공의 세 계급으로 배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서열이 지켜지고 시민들이 자기에게 부여된 지위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안정된 사회가 이루어진다. - P63

이 책은 플라톤 설화의 과학판(scientific version)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주장 일반을 생물학적 결정론(biological determinism)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 P65

결정론자들은 흔히 과학이 사회와 정치의 오염에서 자유로운 객관적지식이라는 전통적 권위에 호소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펴왔다. - P65

칼 C. 브리검 (Carl C. Brigham)은 이른바 선천적인 지능을 측정할 수있다는 테스트에서 낮은 점수를 얻은 남유럽과 동유럽의 이민자들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 자신의 지적 능력을 유지하거나 높이기 위해 취해야 할 방법은 정치적 편의주의가 아니라 과학에 의해 명령되어야 한다(1923)." - P66

이처럼 생물학적 결정론이 권력을 쥔 집단에게 명백한 유용성을 갖기때문에 앞에서 인용한 부정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적 결정론 역시 정치적 맥락에서 발생한 것이 아닌지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 P66

상당히 오래 전에 콩도르세 (Condorcet)는 훨씬 간결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자연 자체를 정치적 불평등이라는 죄의 공범자로 만들었다."
이 책은 결정론자들의 주장에서 나타나는 과학적인 약점과 그 정치적맥락을 밝히려는 것이다 - P67

과학은 인간이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배태된(socially embedded) 활동이다.* - P67

 하지만 나는 일부 과학사가 그룹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과대확장(overextension)에 대해서는 동조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적 변화가 사회적 맥락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진리는 그 문화적 가정을 제외하면 무의미한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에 과학은 영원한 답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 역시 현역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동료들의 생각을 공유한다. - P68

그러나 숱한 과학적 주제에 관한 역사는 두 개의 주된 이유 때문에 실제로는 이러한 사실에 제약받지 않았다. 첫째, 일부 주제에는 엄청난 사회적 중요성이 부여되었지만, 신뢰할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사실과 그 사회적 영향의 비율이 극히 낮을 때, 과학적 태도의 역사는 사회적 변화의 간접적인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둘째, 상당수의 적절한 답이 사회적 선호(選好)를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제한적 방식으로만 과학자들에 의해 정식화된다. - P69

과학은 그 기묘한 변증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과학은 자기를 둘러싼문화 속에서 배태됨에도, 자신을 키워낸 가정 자체를 문제삼거나 때로는 뒤엎기까지 하는 막강한 소작인인 셈이다. - P70

생물학적 결정론은 한 사람이 한 권의 저서에서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큰 주제이다. - P70

이 대목에서 두 번째 오류에 대해 살펴보자. 그것은 ‘서열화(ranking)‘
이다. 사람들에게는 복잡한 변이를 점차 상승하는 단계로 질서 있게 늘어세우려는 버릇이 있다. 진보와 이런 점진주의는 서양사상에 가장 깊이스며든 은유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러브조이(Lovejoy)의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of being)*에 관한 고전적 에세이 (1936)나, 진보의 개념에 대한 버리(Bury)의 유명한 논문 (1920)을 참조하라. 

*옮긴이 가장 하등한 것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자연계의 모든 생명이 연속적인 하나의 사슬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으로, 생명을 연속적인 위계로 이해하는 사고의 뿌리에 해당한다. - P71

 정량화란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수로 지능을 측정하는 방법이다.** 이 책은 하나의실체로 지능을 추상화하고, 뇌 속에 그 위치를 부여하고, 개인별 수치로정량화하고, 더욱이 억압받고 불리한 위치에 처한 집단들이-인종, 계급, 성별-선천적으로 열등하며 그들의 낮은 사회적 지위가 당연하다는것을 찾아내기 위해 사람들을 하나의 가치 체계 아래 서열화하는 데 이 수치가 이용된 문제를 다룰 것이다.


**피터 메다워 (Peter Medawar, 1977, p13)는 복잡한 양에 단일한 수치를 부여하려는 갈망에 대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례를 제시했다. 예컨대 인구통계학자가 인구 동향의 원인을 ‘생식력‘이라는 단일한 척도에서 구하려고 하거나 토양학자가 토양의 성질을 하나의수치로 추상화하려는 열망 등이 그런 경우이다. - P72

지능이 (또는 최소한 그것에 해당하는 중요한 부분이) 단일하고, 선천적이며, 유전가능하고, 측정가능한 실체라고 가정할 때, 두개계측학이 19세기를 대표했다면 지능 테스트는 20세기를 대표했다. - P73

나는 과학자나 역사가들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사용해, 관습에 사로잡히지 않고 이러한 과제를 다루려고 시도했다. - P74

나는 두개계측학과 지능 테스트의 고전적 자료들을 다시 분석하는 데초점을 맞추었다. 그외에도 결실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있겠지만,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에는 힘이 부치고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분석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 P74

(전략).
야간의 주택침입자를 모두 탄산가스로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 우생학자W. D. 맥킴(W. D. McKim) 박사의 사례(1900)를 비롯해서, 19세기 말미국 여행길에 아일랜드인 한 사람이 흑인 한 사람씩을 죽이고 그 죄로교수형을 당하면 인종문제는 말끔히 해결된다는 쓸데없는 조언을 했던영국의 한 교수의 사례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다.*



*역시 너무 중요해서 제외할 수 없는 비교적 최근의 사례로는 의심쩍은 행동을 변호하는데 생물학적 결정론을 들먹인 자칭 야구철학자인 빌리 (Bill Lee)를 들 수 있다. 그는 빈볼을 정당화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뉴욕타임스」 1976년 7월 24일자). "나는 대학에서 세력권의 명령(Territorial Imperative)』이라는 책을 읽었다. 남자는 항상 거리에 있는 그 무엇보다 주인의 집(home)을 강력하게 방어해야 한다. 나의 세력권은 타자에게서 멀리 떨어져있다. 만약 타자가 그곳에서 나와 공을 치려 한다면, 나는 공을 그에게 가깝게 붙여 던지지않을 수 없다." - P76

나는 생물학적 결정론의 최근 부활 상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생물학적 결정론의 개별 주장은 일반적으로 수명이 무척 짧기 때문에 그런 주장에 대한 반론은 잡지나 신문 기사 정도로 족할 것이다. (중략). IQ 100 이하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단종(斷種)을 하면 보상금을 준다는 쇼클리(Shockley)의 제안이나 XYY 대논쟁, 또는 도시폭동을 폭도의 신경증으로 설명하려는 시도 등이 그런 예에 해당한다. - P78

사람은 이 세계를 단 한 차례 지날 뿐이다. 비극 중에서도 생명의 성장을 저지하는 것만큼 비참한 비극은 없다. 불공평함 역시 내부에 있다고 잘못 인식되어 외부에서 부과한 제한 때문에 노력하거나 희망을 가질 기최조차 부정되는 것만큼 심각한 불공평함은 없다. - P78

5장

미국의 발명품, IQ


미국의 발명품, IQ


비네의 원칙 딱지를 붙이지 마라비네. 두개계측에 손을 대다소르본 대학의 심리학실험실 실장이었던 알프레드 비네(1857-1911)는 지능측정 방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 P253

그는 이후 3년 동안 두개계측에 대한 아홉 편의 논문을 1895년에 자신이 창간한 잡지인 『심리학 연보(L‘Année psychologique)』에 발표했다.
그러나 이 작업이 끝날 무렵 그의 확신은 흔들리고 있었다. 초등학생의 머리에 대한 다섯 편의 연구는 그가 가지고 있던 신념을 무너뜨렸다. - P254

비네가 차이를 발견했지만 그것은 주목받을 만큼 크지 않았고, 우수한학생이 더 큰 평균신장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1.401 대 1.378미터). 대부분의 측정값은 우수한 학생에게 유리했지만, 우수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의 평균적인 차이는 몇 밀리미터에 불과했다. - P254

비네는 자신의 피암시성(suggestibility)-무의식적 편향에 의한 집착또는 ‘객관적인‘ 정량적 자료가 선입관에 이끌려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경향성-에 대한 비범한 연구를 통해 스스로에 대한 회의에 박차를 가했다. 이것은 이 책의 기본적 주제에 해당하는 실험이다. - P255

만약 모든 과학자가 이처럼 자신을 솔직하게 검증했다면 상황은 훨씬 나아질 수 있었을 것이다. 비네는 이렇게 썼다(1900, p.324). "나는 나자신에 대해 관찰한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작정이다. 다음에 기술한세부사항은 대부분의 저자들이 발표하지 않은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 P255

결국 비네는 패배의 구렁텅이에서 작고 불안한 승리를 건져올린 셈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표본을 다시 조사해서, 각 집단의 최고값과 최저값에 해당하는 다섯 명의 학생을 분리하고 중간에 해당되는 모든 표본을 배제했다. 양극단의 차이는 훨씬 크고, 더 일관적이었다. - P256

비네 척도와 IQ의 탄생

비네는 1904년에 다시 지능 측정에 도전했는데, 과거의 좌절을 기억하고 다른 방법으로 전환했다. 그는 자신이 두개계측의 ‘의학적‘ 접근방식이라고 불렀던 기존의 방법과 롬브로소의 해부학적 낙인 연구를 포기하고, 대신 ‘심리학적 방법을 채택했다. - P257

1904년에 비네는 교육부장관으로부터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연구를 위임받았다. 그것은 보통 학급에서 학습성적이 떨어지는 학생들을 식별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으로, 일종의 특별교육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 P257

과거의 테스트와 달리 비네의 척도는 다양한 활동들의 뒤범벅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능력에 대한 테스트를 충분히 혼합하면, 아이들의 일반적인 능력을 단일한 점수로 추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P257

비네는 191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척도의 세 가지 버전을 발표했다. 1905년의 최초 버전에서는 단지 난이도 순서로 과제들을 배열했고, 1908년의 버전은 오늘날 이른바 IQ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는 기준을 확립했다. 비네는 각각의 과제에 특정 연령수준을 지정해서, 보통 정도의능력을 가진 아이들이 그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최저연령을 정했다. - P258

 1912년에 독일의 심리학자 W.슈테른(W. Sterm)은 정신연령과 생활연령의 차가 아니라 정신연령을 생활연령으로 나눈 값*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 지능지수(intelligence quotient), 즉 IQ가 탄생했다.


*나누기가 더 적합한 이유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절대적인 값이 아니라 상대적인 값이고, 정신연령과 생활연령 사이의 차의 크기이기 때문이다. 정신연령 2세와 생활연령 4세 사이의 2년의 차는 정신연령 14세와 생활연령 16세의 차인 2년보다 훨씬 큰 결함을 나타낼수 있다. 비네의 뺄셈 방법은 두 사례에 같은 결과를 주지만, 슈테른의 IQ 측정법에 의하면처음 사례는 50. 두 번째 사례는 88이 된다(슈테른은 실제 지수에 100을 곱해서 소수점을없앴다). - P258

지능에 대한 비네의 일반적인 접근방식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척도에서 가장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측면은 그것이 실천적이고 경험적인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 P259

(전략).
비네가 이처럼 신중한 자세를 취한 데에는 그만한 사회적 동기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실용적인 고안물이 하나의 실체로 물화(物化)될 경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식별하기 위한 지침이 아니라 오히려 지울수 없는 낙인으로 왜곡되어 악용될 가능성을 크게 두려워했다.  - P260

비네는 IQ를 선천적인 지능으로 인정하는 것은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IQ를 정신적 가치에 따라 모든 학생을 서열화하는 일반적인 장치로사용하는 것도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척도를 오직 교육부장관으로부터 위임받은 한정된 목적에 활용하기 위해서만 고안한 것이었다.  - P261

그러나 비네는 한 가지에 대해서만큼은 확신을 품었다. 그것은 낮은학업 성적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만든 척도의 목적이 제한을가하기 위한 딱지붙이기가 아니라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식별이라는 점이다. - P262

엄밀한 유전적 결정론자와 그 반대자와의 차이는 일부 풍자만화가 시사하듯이, 아이들의 성적이 모두 선천적이라거나 또는 전적으로 환경과 학습의 영향을 받는다는 확신이 아니다. - P262

비네는 "한번 바보는 영원한 바보(quand on est béte, c‘est pourlongtemps)"라는 모토를 맹렬하게 공격했고, 지능이 낮은 학생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교사들에 대해 "학생을 동정하거나 존중하지 않으며,
그들의 면전에서 이런 아이는 전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 선천적으로 무능하고 (.....)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한다. - P264

비네의 테스트에 의해 식별된 아이들은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힐 때 상이 아니라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인 것이다. 비네는 확고한 교육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 대부분은 실행에 옮겨졌다. - P264

비네의 정신적 교정학이라는 흥미로운 프로그램에는 그가 학문적 주계를 배우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한 의지, 주의력, 단련을 지적 능력으로 전환시켜 개선하기 위해 고안된 일련의 육체적 훈련이 포함되어있다. - P265

미국에서 왜곡된 비네의 의도
요약하자면, 비네는 자신의 테스트를 이용하기 전에 염두에 두어야 할 세 가지 기본 원리를 강조했다. 그러나 훗날 그의 충고는 미국의 유전적 결정론자들에 의해 모두 무시되었다. - P266

1. 수치는 실용적인 고안물이며, 어떠한 지능이론도 뒷받침하지 않는다. 이 수치는 천성적이거나 항구적인 그 무엇도 규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수치로 ‘지능‘ 또는 그밖의 어떤 물화된 실체의 척도를 측정하는것을 원하지 않는다.

2. 이 척도는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미한 지체아들이나 학습불능아들을 식별하기 위한 조잡하고 경험적인 지침이다. 이 척도는 정상적인 아이들을 서열화하기 위한 고안물이 아니다.

3. 도움이 필요하다고 확인된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의 원인이 무엇이든, 특별한 훈련을 통해 개선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중점이 두어져야 한다. 낮은 득점이 아이들의 선천적 무능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비네의 이 원칙들이 지켜지고 그의 테스트가 원래의 의도로 이용되었다면, 우리는 금세기 가장 큰 과학의 악용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 P266

지능 테스트의 오용은 테스트 그 자체의 발상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아니다. 이 잘못된 사용은 주로 사회적 서열화와 차별을 유지할 목적으로 테스트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열광적으로(또는 그런 것처럼 보이는) 신봉된 두 가지 오류에서 기인한다. 그것은 물화(物化)와 유전적 결정론이다. - P267

유전적 결정론의 오류는 이 기본적 사실에서 기인한 두 가지 잘못된 함축 속에 들어 있다.
1. ‘유전성‘을 ‘피할 수 없는‘ 것과 동일시하는 가정. 생물학자에게 유전성이란 유전적 전달의 결과로 가계를 통해 그 특성이나 경향이 전해지는 것이다.
(중략).
 IQ가 상당부분 ‘유전성‘이라는 주장은 질적으로 향상된 교육을 통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능‘이라고 부르는 것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신념과 모순되지 않는다. 부분적으로 유전된 낮은 IQ는 적절한 교육에 의해 크게 개선될 수 있다. (후략). - P268

2. 집단 내 유전과 집단간 유전의 혼동, 유전적 결정론의 중요한 정치적 영향은 테스트 점수가 유전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확장에서 발생한다. (중략). 마찬가지로 IQ도 집단내에서 유전성이 높을 수는 있다. 하지만 미국의 백인과 흑인 IQ의 평균적인 차이는 흑인들이 생활환경에서 겪는 불리함의 기록에 불과할 수도있다는 사실을 배제할 수는 없다. - P269

알프레드 비네는 이러한 오류를 피하기 위해 세 가지 원칙을 고수했다.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비네의 의도를 왜곡해서 IQ의 유전적 결정이론을 발명했다. 그들은 비네의 점수를 물화함으로써, 그것이 지능이라고 불리는 실체에 대한 측정값이라고 생각했다. - P269

이 장에서는 미국의 선구적인 유전적 결정론자들인 세 사람의 주요 연구를 분석하겠다. H. H. 고더드(H. H. Goddard)는 비네 척도를 미국에도입해 그 점수를 선천적 지능으로 물화했다. L. M. 터먼(L. M. Terman)은 스탠퍼드-비네 척도(Stanford-Binet scale)를 개발해서 IQ 점수에 의해 직업을 할당하는 합리적인 사회를 꿈꾸었다. R. M. 여크스(R. M.
Yerkes)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육군을 설득해 175만 명의 군인을 테스트해서 유전적 결정론자의 주장을 정당화했고, 1924년에는 열등한 유전자를 가진 나라에서 오는 이민자 수를 낮게 억제하는 이민제한법(Immigration Restriction Act)을 이끌어냈다. - P270

사진을 조작한 고더드-정신박약아의 위협

멘델 유전자로서의 지능
고더드, 노둔魯鈍식별하다

이제 정신박약(feeble-mindedness)을 결정하고, 지능지수 (intelligence quotient)이론을 완성하는 과제가 누군가에게 남겨졌다.
-H.H. 고더드, 1917, 터먼(1916)에 대한 논평 중에서

분류학은 항상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는 주제이다. 이 세계가 질서정연한 작은 패키지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지능장애에 대한 분류는 20세기 초에 건강한 논쟁을 일으켰다. 분류된 세 종류 중에서 두 범주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 P271

(전략).
그러면 ‘고도 지능장애자(high-grade defective)‘라는 모호하고 좀더위협적인 영역에 속하는 사람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훈련에 의해 사회활동을 할 수 있으며, 병리(理)와 정상 사이에 걸쳐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분류체계를 위협하는 부류다. - P271

분류학자들은 흔히 새로운 명칭을 고안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착각한다. 뉴저지주에 있는 정신박약 소년소녀를 위한 비네랜드 특수학교(Vineland Training School for Feeble-Minded Girls and Boys)의 정력적이고 개혁적인 지도자였던 H. H. 고더드 역시 이런 결정적인 잘못을 범했다. 그는 ‘고도 지능장애자‘를 위한 명칭을 고안했다. - P275

고더드는 비네 척도를 미국에 처음 보급시켰다. 그는 비네의 논문을 영어로 번역해서 비네 테스트를 실시했고, 그 테스트를 널리 이용하도록 열심히 권장했다. - P272

비네는 그의 점수가 ‘지능‘을 결정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를 거부했고, 다만 도움을 원하는 사람들을 식별하는 도구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고더드는 그 점수를 단일하고 선천적인 실체의 척도라고 생각했다. - P2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