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폭로 / 무너져내리는 엄마

언뜻 드러난 장인의 표리부동한 태도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장인을 봐왔지만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내게 숨기는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의심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내가 헛것을 본 것 같지는 않았다.
미치코와의 관계를 알아버린 걸까? - P267

이런 상상도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장인은 흥신소를 통해 미우라의 신변을 계속 조사해왔다. 최근 동정까지 체크했다면 진범으로 추정되는 인물에 관련된 정보를 받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 P268

덜 바빠 보이는 여직원에게 직업별 전화번호부를 갖다달라고 부탁했다. 스미다 나루미가 싫은 내색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들고 왔다.
"고마워."
"타운페이지라고 해요." 약점이라도 잡았다는 듯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한다. "직업별 전화번호부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고요." - P268

내 나이쯤 되면 타운페이지니 헬로페이지* 같은 말은 입이 찢어져도 못 한다. 아무리 광고 회사에서 일하는 몸이지만 일본어로서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라는 게 있다.

*일반인 전화번호부 - P269

입구로 들어가자 이름만 로비인 좁은 공용 통로가 있었다. (중략). 엘리베이터 버튼 옆에 입주한 회사들이 적힌 표지판이있었고, 그 안에 부동산 회사, 수입 대행사 등과 함께 ‘쇼와 종합리서치‘가 있었다. - P270

5층 복도 전부가 ‘쇼와 종합 리서치의 사무실이었다. 나는 얼른 통로 구석으로 몸을 감췄다. 숨을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조사원이 내려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 P271

흠칫하고 재킷에서 손을 뗐다. 이 여자는 내가 미우라를 구타하는 모습을 봤다. 마음이 켕겼다.
여자가 어깻숨을 쉬며 일어났다. 얼굴이 상기돼 있다.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털어낸다. - P272

"어쩔 수 없군. 가까운 데서 밥이나 먹으며 들어보지." - P272

"일단은 조사원이라고 할까요. 아르바이트하고 있어요. 본업은 대학생." 거리낌없는 말투로 자백한다. 이제 와서 시치미떼봐야 소용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학생증 꺼내봐."
"되게 의심 많네요. 하긴 그럴 만도 한가."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 내민다. S대학 학생증이었다. - P273

내 말이 틀렸는지 입이 부루퉁하게 나온다.
"비디오에서 벗는 애들보다는 나을걸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차별이지." 나는 말했다. "최소한 그사람들은 자기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에서 행동하는 거니까. 그리고 그건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아. - P273

"그나저나 왜 이런 일을 하지? 보수가 좋은가?"
"그렇기도 하지만." 자기 말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태도가 한결 누그러졌다. "지금 사회학 연구실에 있으면서 도시론을 전공하고 있어요. 내년에 논문을 쓰기 위한 필드워크라고 하면 너무 멋을 부린 걸까요?" - P274

"그건 표면적인 구실이겠지. 월요일에 내가 미우라의 집에 갔을 때 당신은 마치 정신이 이상한 여자인 척했잖아. 내 정체를알고 관심 끌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런 서툰 연극을 한 거지.
그게 당신이 미우라를 조사하고 있었다는 증거야." - P275

"그건 표면적인 구실이겠지. 월요일에 내가 미우라의 집에 갔을 때 당신은 마치 정신이 이상한 여자인 척했잖아. 내 정체를알고 관심 끌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런 서툰 연극을 한 거지.
그게 당신이 미우라를 조사하고 있었다는 증거야."
제대로 찌른 모양이었다. 여자는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살짝저었다. - P275

"어떻게 내가 당신이 아르바이트하는 곳까지 오게 됐는지 궁금하겠지? 가르쳐주지. 간단해. 장인이 가지고 있던 신상 보고서에 인쇄된 회사 이름을 훔쳐봤어. 전화번호부에서 주소를 알아냈고." - P275

"끈질기게 벨을 눌러댔잖아. 외시경으로 당신 얼굴을 봤어."
여자는 깜짝 놀라서 포크를 테이블에 떨어뜨렸다.
"설마, 아저씨가 그 사람?"
"안타깝지만 난 아냐 미우라를 죽인 범인은 따로 있어. 그 사실을 증명하느라 경찰서에 한밤중까지 붙들려 있었지만." - P276

"아냐. 내가 알고 싶은 건 당신이 장인에게 어떤 내용을 보고했느냐는 거야."
"말했잖아요, 조사 내용은 누설할 수 없다고."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하잖아." - P277

"고집이 아니라 이건 비밀 엄수 의무라고 하는 거예요." 말끝이 거칠어졌다.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비밀 엄수 의무고 뭐고 간에 미우라 야스시는 이미 죽었어.‘
"아니에요. 비밀 엄수 의무는 의뢰인을 위한 거예요."
"의뢰인들이 하나같이 추접한 위선자들이라고 아까 당신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 P277

그 순간 주머니에서 무선호출기가 울렸다. 회사였다. 잠시 후퇴해야 할 타이밍인가.
"잠깐 실례하지."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가게 전화를 빌려 SP국으로 걸었다.
"국장님이세요?" 스미다 나루미가 받았다. "지금 전무님께 연결할게요." - P278

"가즈미에게 연락이 왔어. 다카시가 유괴됐다고."
"설마요."
"농담이 아니네. 자세한 이야기는 못 들었지만 죽은 아이의 어머니가 학교에서 다카시를 데려간 모양이야. 아직 둘 다 행방불명이라는군." - P279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학교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후회해봐야 이미 늦었다. 미치코는 다카시를 죽일 생각인지도 모른다.
만 엔짜리 지폐를 계산대에 던지고 거스름돈도 받지 않은 채밖으로 뛰쳐나갔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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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숙한 낚시꾼이라면 낚싯대와 줄을 통해 전해지는 손가락의 떨림만으로도 입질을 느끼게 마련이다. 한스는 기술적으로 낚싯줄을 확 잡아 올린후 조심조심 줄을 감기 시작했다. 단단히 버티던 물고기가 모습을 드러내자 한스는 그것이 로치(잉엇과의 담수어 옮긴이)라는 것을 알았다.  - P45

망둥이를 아주 좋아하는 아버지를 생각하니 한스는 기뻤다. 망둥이는 통통한 몸통에 작은 비늘이 덮여 있고, 두툼한 머리에 우스꽝스러운 흰 수염과 작은 눈이달렸으며, 꼬리가 가늘고 길었다. 원래는 초록색과 갈색 사이의 색을 띠었지만 뭍에 나오면 강철 같은 검푸른 빛으로 변했다. - P45

 빛이 구름에 가득 스며 있으니 눈이 부셔서 오래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구름이 없으면 사람들은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가늠하지 못한다. 푸른 하늘이나 반짝이는 강물이 아니라 몇 조각의 거품같이 하얀, 둥글게 뭉쳐진 범선 같은 정오의 구름 조각을 보면, 사람들은 갑자기 이글거리는 태양을 느끼고 그늘을 찾아가 이마의 땀을 훔쳐내는것이다. - P46

한스는 버들가지에 낚싯줄을 걸쳐 물에 담가두고는 바닥에 앉아 초록빛 강물을 바라보았다. 물고기들이 천천히 올라와 수면 위로 검은 등을 하나둘 내밀기 시작했다. 따뜻함에 이끌려 마법에 걸린 듯 고요히 천천히 움직이는 물고기 무리였다. - P46

얼마나 아름다운가! 흰색, 갈색, 초록색,
은색, 옅은 금색 외에도 여러 빛깔이 움직일 때마다 비늘과 지느러미가 반짝였다.
사방이 고요했다. 다리 위를 지나는 마차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덜컥거리는 물레방아 소리도 이곳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었다.  - P47

이 순간은 정말 근사했다. 이따금 자신이 선발 고사에 합격한 사실, 이 등으로 합격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럴 때면 맨발로 물을 찰박대며 양손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휘파람으로 노래를 불렀다. 사실 한스는 휘파람을 불줄 몰랐다. 그것은 오랜 고민거리로 학교 친구들에게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 - P47

아이들은 한때 한스를 몹시 괴롭혔다. 한스에게는 아우구스트 말고 친구가 없었을뿐더러 아이들의 주먹다짐이나 놀이에 전혀 어울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녀석들은 한스의 뒷모습이나 쳐다봐야 할 것이다.
어리석은 녀석들! 한스는 그 아이들이 너무 혐오스러운 나머지 일순간 입을 일그러뜨렸다. - P48

 4시가 넘자 동급생 친구들 대부분이 소란을 피우며학교에서 재빨리 뛰쳐나왔다.
"야, 기벤트! 너 지금 기분 최고지?"
한스는 편안하게 기지개를 켰다.
"응, 꽤 좋아."
"신학교는 언제 들어가냐?"
"9월이나 되어야 들어가 지금은 방학이고."
한스는 자신을 향한 친구들의 부러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 P49

뒤에서 놀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고 누군가 이런 시도 읊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나도 저럴 수 있다면 좋겠네,
슐체 리자베트처럼!
재는 낮에도 침대에 누워 있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다네.

한스는 그저 웃었다. 그사이 또래 녀석들도 옷을 벗었다. - P50

 아이들은서로 물장난을 치고 뛰어다니고 헤엄쳤으며 물에 누워 있는 친구들에게 물을 뿌리기도 했다. 첨벙거리는 소리와 외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온 강변이 하얗고 축축하고 매끈한 몸들로 가득했다. 한스는 한 시간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고기들의 입질이 다시 시작되는 따뜻한 저녁 시간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 P50

"중등 신학교 입학 선발 고사에 우리 마을은 이번에 단 한 명의 후보 한스 기벤라트를 내보냈다. 기쁘게도 방금 우리는 기벤라트가 이 등으로 합격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한스는 말없이 신문을 접어 주머니에 찔러 넣었지만 내심 펄쩍 뛸 정도로 자랑스러웠다. 만세라도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 P51

강이 굽이쳐 흐르고 좁고 깊숙이 깎여 들어간 계곡에는 일찌감치 어둠이 깃들었다. 다리 아래 강물은 시커멓고 잔잔했으며 아래쪽 물레방아에는 벌써 등불이 켜졌다. - P51

 치즈조각이 다 떨어질 때까지 한스는 작은 잉어 네 마리를 낚아 올렸다. 이 녀석들은 내일 마을 목사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 더운 바람이 계곡 아래쪽으로 불어왔다. 날이 어두워졌지만 하늘에는 아직 빛이 남아 있었다.  - P52

이른 아침부터 한스는 잉어를 챙겨 들고 목사관 문을 두드렸다. 목사가 서재에서 나왔다.
"오, 한스 기벤트! 좋은 아침이구나! 축하한다. 진심으로축하해. 얘야, 그런데 뭘 들고 있는 거냐?"
"물고기를 좀 가져왔어요. 어제 잡은 거예요."
"와, 이것 좀 보게! 고맙구나. 어서 들어오렴."
한스는 익숙한 서재로 들어갔다. 사실 이곳은 목사관 서재처럼 보이지 않았다. 화초 냄새도 담배 냄새도 나지 않았다.  - P52

 일반적인 목사의 서재에서 볼수 있는 가치 있는 소장본들, 이를테면 벵겔, 외팅거, 슈타인호퍼(모두 18세기 독일의 경건주의를 이끈 신학자들이다-옮긴이)는물론, 〈탑의 수탉〉에서 뫼리케(독일 시인이자 목사 에두아르트 뫼리케의 <탑의 수탉>은 교회 탑 위에 있었던 수탉 모양의 풍향계를 노래한 시다-옮긴이)가 아름답게 찬양한 신앙심 깊은 시인들은여기에 없었고, 혹은 많은 현대적 작품들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각종 간행물을 모아둔 서류철, 서서 일하는 작업대와 종이가 널려 있는 커다란 책상이 전체적으로 박식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 P53

예나 지금이나 학자들이 새로운 가죽 부대 때문에 낡은 포도주를 등한시하는 반면, 예술가들은 겉보기에 잘못돼 보이는 많은 것을 태연하게 고수하며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안겨주었다. 이것은 비평과 창작, 학문과 예술 사이에 항상 존재해온 불평등한 싸움이었다. - P54

한스는 처음으로 작업대와 창문 사이에 있는 작은 가죽소파에 앉았다. 목사는 지나칠 정도로 친절했다. 그는 매우 친근하게 신학교에 대해, 그곳의 생활과 공부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네가 그곳에서 경험하게 될 가장 새롭고 중요한 일은 바로 신약성서의 그리스어를 배우는 거란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라서 배우는 것도 많고 얻는 기쁨도 크단다. 처음에는 언어를 배우는 데 고생할 수도 있어. 아테네식 그리스어가 아니라 전혀 다르고 완전히 새로운 정신이 만들어낸 언어 세계거든." - P54

한스는 즐거운 마음으로 목사관을 나와 숲 쪽으로 이어진 낙엽송 길을 따라 걸었다. 약간의 불안감은 이미 사라졌고, 생각하면 할수록 목사와 함께 공부하기로 한 것이 잘한 일처럼 여겨졌다. 신학교에 들어가 학우들보다 앞서려면 더 치열하고 집요하게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 P55

여전히 방학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혼자밖에없는 이 아침 시간, 숲 속 산책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문비나무들이 줄지어 서서 기둥을 이루고 초록빛 아치형으로 천장을 덮은 푸르른 회랑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 P56

 사실 한스는 뤼첼러 씨 농장이나 크로쿠스 초원까지 이어진 긴 산책길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끼 위에 누워 월귤을 따 먹으면서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피곤한지 알 수 없었다. 전에는 서너 시간 산책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 P57

가는 길에 한스는 구둣방 주인 플라이크를 보았다. 그는 작업실 창문 앞에 다리가 세 개 달린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얘야, 어딜 가니? 요즘은 도통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구나!"
플라이크가 소리쳤다.
"목사님께 가는 길이에요."
"아직도? 시험은 끝났잖니."
"네, 이번엔 다른 일이 있어서요. 신약성경을 배우려고요. 사실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쓰였지만 제가 그동안 배운 것과는 완전히 다른 그리스어라서요. 지금 그걸 배우러 가는 거예요." - P57

플라이크가 나지막이 말했다. "여태까진 시험 때문에 잠자코 있었지만 이제는 정말 말해주어야 할 것 같구나. 네가 꼭 알아야 하는 게 있는데 목사님은 무신론자란다. 목사님은 너에게 성경이 잘못되었고 거짓이라고 말하며 널 속일지 몰라. 목사님과 함께 신약성경을 읽는다면 결국 너도 모르게 믿음을 잃어버리고 말거야." - P58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해요? 전 이미 목사님과 공부하기로 약속했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물론 가야지. 다만 목사님이 성경에 대해 사람이 만들어낸 거라고 하거나, 거짓이라거나, 성령에서 온 게 아니라거나, 그런 말을 한다면 나를 찾아오렴. 자세히 알려줄게. 그렇게 하겠니?" - P58

마을 목사가 아직 집에 오지 않아서 한스는 서재에서 기다려야 했다. 금박을 입힌 책 제목들을 보고 있자니 구둣방 주인의말이 생각났다. 이전에도 그런 식으로 마을 목사와 새로운 교리를 좇는 신학자들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제 자기 자신이 이런 이야기에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처음으로 긴장감과 호기심이 느껴졌다. - P59

힘든 시절을 통해 습득한 구둣방 주인의 완강함과 엄격함을 한스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플라이크는 똑똑한 사람이지만 단순하고 편협한 면이 있었고 지나친 경건주의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조롱당했다. 그는 교회형제들 모임에서 다른 형제들의 엄격한 재판장 노릇을 했고,
권위 있는 성경 해설가 역할도 했으며, 마을을 돌면서 사람들을 전도하기도 했다. - P59

. 그는 한스에게 누가복음의 그리스어 본문을 쥐여주고 읽어보게 했다. 이전의 라틴어 수업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목사와 한스는 몇 문장을 읽고 단어마다 꼼꼼하게 번역을 했다. - P60

한스는 사전과 문법책을 빌려 와 저녁 시간 동안 한참을 더 공부했다. 새삼 얼마나 많은 연구와 지식의 산을 넘어야 진정한 학문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지 깨달았다. - P60

며칠 동안 한스는 이 새로운 공부의 재미에 푹 빠져 지냈다.
저녁이면 으레 목사관을 찾아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정한 학문이란 더 아름답고 더 어려우며, 그만큼 배울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다.  - P60

이제 그는 읽는데 15분 이상 걸렸던 크세노폰의 가장 어려운 문장도 놀이하듯 읽어낼 수 있었다. 사전도거의 필요 없었다. 더 깊어진 이해력으로 어려운 문단 전체를빠르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한껏 고조된 학업 열정과 지식에 대한 목마름이 드높은 자신감과 만나서 이미 자신은 지식과 가능성의 고지를 바라보는 자기만의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61

그런 한편, 자신이 또래들보다 얼마나 앞서 있는지, 담임교사와 교장이 얼마나 자신을 존중하고 심지어 경탄하는 눈으로 바라보는지 생각하면 거만함이 솟구치기도 했다. - P61

교사가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와 의무는 어린 소년들의 야만적인 힘과 타고난 욕심을 제어해 뿌리부터뽑아내고, 그 대신에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점잖고 절제된이상을 심어주는 일이다. 만일 학교의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보라!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는 시민 혹은 부지런한 관리가 아니라 무분별한 소란을 일으키는 개혁가나 생산성 없이 꿈만 꾸는 몽상가가 되었을 것이다. - P62

마치 낯선 산맥에서 터져 나온 물줄기와 같고, 길도 이정표도 없는 원시림과같다. 그런 원시림을 정비하기 위해서는 가지를 쳐내고 풀을 베며 강제로 생장을 조절해주어야 하듯이 학교 또한 자연적인 인간을 깨부수고 규제하고 제압해야 한다. - P62

기벤라트의 아들이 얼마나 멋지게 성장했는지 보라! 한스는 마음대로 뛰어다니거나 노는 일을 일찌감치 멈추었고, 수업 시간에 멍청하게 잡담하는 법도 전혀 없었다. 토끼 키우기 같은 소꿉장난이나 골치 아픈 낚시 취미도 그만두었다. - P63

"벌써 찾아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찾아뵐 때 좋은 물고기를잡아다 드리고 싶었거든요."
한스가 사과의 말을 했다.
"물고기? 무슨 물고기 말이냐?"
"그러니까 잉어나 뭐 그런 거요."
"아하, 요즘 다시 낚시하러 다니니?"
"네, 많이 하진 않지만요. 아버지께서 허락해주셨어요."
"그렇구나. 그래, 재미있니?"
"네, 그럼요." - P63

"잘 들어라, 한스" 교장이 말했다. "내 말은 말이다, 내 오랜경험으로 보건대 뛰어난 시험 성적을 거두고 나서 갑자기 실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이 많다는 거야. 신학교에 들어가면 새로운과목을 많이 공부해야 하는데, 방학 동안 예습해서 가는 학생들이 꼭 있는 법이지. 시험 성적이 별로인 애들이 특히 더 그렇단다. 그런 애들은 성적이 좋다고 방학을 헛되이 보낸 친구들을 제치고 어느새 정상의 자리를 차지해버리지." - P64

"그래서 말이다. 네가 방학 동안 약간이라도 예습을 했으면 좋겠구나. 물론 지나치지 않게 말이다. 너는 지금 충분히 쉬어야 하고 그럴 권리가 있거든. 내 생각에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면 적당할 것 같다. 계속 놀다 보면 감을 잃게 되고 나중에 제자리로 돌아가는 데도 몇 주가 걸릴지도 모르거든. 네 생각은 어떠니?" - P64

당연히 이런 새로운 세계도 만나볼 준비가 되어 있었던 한스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험난한 여정이 하나더 남아 있었다. 교장은 헛기침을 하고 친절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네가 수학에도 몇 시간을 할애했으면 좋겠구나. 네가 수학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썩 잘하는 과목도 아니잖니. 신학교에 가면 대수와 기하를 배울 텐데 어느정도 예습을 해두는 게 좋을 거야." - P65

대수는 한스가 아무리 열심을 내봐도 흥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가장 뜨거운 오후 시간에 수영 대신 수학 교사의 후덥지근한 방까지 걸어가야 했다. 모기가 날아다니는 탁한 공기를마시며 무거운 머리와 메마른 목소리로 a 더하기 b, a 빼기 b따위를 읽어야 하는 것도 곤욕이었다. 그러다 보면 공기 중의무언가가 한스를 무기력하게 짓눌렀고, 때로는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을 만큼 안 좋은 날도 있었다.  - P66

교장과 함께하는 공부는 그보다 좀 더 활기가 넘쳤다. 물론 마을 목사는 신약성경의 낡아빠진 그리스어에서도 호메로스의 젊고 생생한언어에서 느낄 수 없는 훨씬 매력적이고 웅장한 감동을 발견해내는 능력이 있었다. - P66

방학 마지막 주가 되자 갑자기 교장과 마을 목사가 유난히 부드럽고 상냥해졌다. 그들은 산책하라고 소년을 내보내며 수업을 접었다. 상쾌하고 활기찬 기분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면서 말이다. - P67

 한스는 자신이 왜 한때 그렇게 여름방학을 고대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는 오히려 방학이 끝나는 게 기뻤다. 신학교에서 완전히새로운 배움과 삶을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낚시에는 별의미를 못 느껴서 물고기도 거의 남지 못했다. - P67

한스는 겸연쩍게 구둣방 주인의 거칠고 넓적한 오른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래, 잘되어 가니?" 플라이크가 물었다. "목사님께는 열심히 배웠니?"
"네, 매일 찾아가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뭘 배웠는데?"
"주로 그리스어를 배웠고 이런저런 걸 배웠어요."
"그래서 나에게는 한 번도 오고 싶지 않았니?"
"오고 싶었어요, 플라이크 아저씨. 하지만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매일 한 시간은 목사님께, 두 시간은 교장 선생님께, 일주일에 네 번은 수학 선생님께 가야 했거든요." - P68

"이건 정말 미친 짓이다, 한스. 게다가 죄악이야. 네 나이엔 바깥바람을 충분히 쐬고 움직이며 제대로 쉬어줘야 해. 대체방학이 왜 있단 말이니? 분명히 방구석에 처박혀서 공부나 하라고 있는 건 아니잖니. 넌 지금 뼈랑 가죽밖에 없구나!" - P68

"성경에 대해 모욕적인 말을 하진 않았니?"
"아니요. 전혀요."
"다행이구나. 분명히 말해두지만 영혼이 해를 입는 것보다몸이 열 번 망가지는 게 차라리 낫단다. 네가 되려고 하는 목사라는 직업은 멋지지만 힘든 일이야. 그런 일을 하려면 네 또래젊은이들과는 달라야 해. 아마 한스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언젠가 영혼을 돕고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지. 난 진심으로 그렇게되길 바라며 널 위해 기도할 거다." - P69

플라이크의 엄숙한 기도와 고상한 말투를 듣자 소년은 왠지당혹스럽고 겸연쩍었다. 목사도 작별 인사를 하면서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떠날 준비를 하고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니 며칠이순식간에 지나갔다. 침구와 겉옷, 속옷과 책들은 이미 한 상자보내두었고 이제 여행 가방을 쌌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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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멜로는 수학자들이 자신의 증명을 비판하는 것을 의식하여 새로운 ‘공리적 집합론‘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1908년에7개의 공리로 이루어진 공리계를 발표한다. 이 7개의 공리 중에는 선택공리도 포함된다. - P263

튜링머신과 계산 가능성

튜링은 헝가리 출신의 또 다른 천재 수학자 요한 폰 노이만Johann von Neumann, 1903~1957과 함께 컴퓨터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컴퓨터과학에 필요한 이론적 배경을 설립하는 데 공헌했고,
폰 노이만은 최초의 컴퓨터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육군의 에니악ENIAC, 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and Computer의 개발에 공헌했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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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가에는 흰 꽃을 피운 독미나리 비슷한 풀들이 사람 키만큼 무성하게 자라 있었는데 우산모양의 꽃잎은 언제나 작은 딱정벌레들로 뒤덮여 있었다. 속이빈 그 줄기는 잘라서 피리나 파이프를 만들 수 있었다. 숲 가장자리에 길게 늘어선 멀레인은 솜털과 노란 꽃을 달고 위엄 있게 눈길을 끌었다. - P42

마을은 이맘때 시골 분위기가 완연했다. 건초를 실은 수레들이 길가에 서 있고 건초 냄새와 연장 다듬는 소리가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어서 두 채의 공장 건물만 아니었다면 영락없는 농촌의 모습이었다. 방학 첫날, 한스는 늙은 하녀 안나가 일어나지도 않은 이른 아침부터 부엌에 내려와 커피를 기다렸다. - P43

차창이 활짝 열려 있었고 승객은 별로 없었다. 증기와 연기로 이루어진 긴 깃발이신나게 펄럭였다. 한스는 눈으로 기차를 따라가면서 하얀 연기가 소용돌이치다가 곧 햇살이 내리쬐는 맑은 아침 공기 속으로흩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모든 것을 얼마나 오랫동안 보지 못하고 지냈단 말인가!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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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현대 논리학

20세기가 막 시작되던 때, 새로운 논리학을 향한 세간의 관심은 뜨거웠다. 힐베르트가 1900년에 제시한 23개의 문제 가운데1. 2번 문제와 러셀의 패러독스(1903년)는 당시의 웬만한 지식인은 다 알 정도로 유명했다. - P253

수학자들은 이 새로운 논리학을 수학기초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해서 수학 내에서는 수학기초론과 논리학이 같은 의미를가진 말로 받아들여진다. 한동안은 집합론도 이들과 같은 의미로인식되다가 논리학 내에서 증명론proof theory, 모델론model theory 등이 등장하고 컴퓨터과학이 발전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계산이론theory of computation이 등장하면서 집합론은 논리학의 여러 분야 중한 분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 P254

위대한 논리학자 타르스키

 하지만 괴델에 못지않은 업적을 남긴 논리학자가 한 명 더 있었으니 바로 알프레트 타르스키 1901-1983 다. 그에 대해서는 앞서 바나흐타르스키 패러독스를 이야기할 때 소개했는데, 여기서는 그가 논리학에서 이룩한 업적에 대해 조금더 이야기해보자. - P255

 그의 지도교수는 자연연역체계natural deduction system 이론의 중심에 있던얀 루카시에비치 Jan Lukasiewicz, 1878~1956다. - P255

그는 지도교수 루카시에비치의 조수로 근무했지만 월급이 너무 적어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며 살았는데, 그곳에서 부인마리아를 만난다.  - P255

그는 애국심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1939년에 하버드대학교의 초청으로 강의하러 갔을 때, 독일의 나치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한다. - P256

그가 1933년에 발표한 ‘정의불가능 정리 Undefinability Theorem‘는수학기초론에서 또 다른 중요한 정리이자 제약을 가져오게 된결과다. 그 정리는 간단히 말해서 "산술적 진리는 산술 내에서는 정의될 수 없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 P256

20년 전쯤에 나는 우연히 타르스키가 1936년에 쓴 논리학 책『연역 과학의 논리 및 방법론 입문 Introduction to Logic and Methodology of Deductive Sciences』(1995, Dover Ed.)을 샀다. - P256

현대의 수리논리학(수학기초론)에는 집합론과 더불어 중요한축을 차지하고 있는 모델론(모형이론이라고도 한다)이라는 분야가있는데, 1930년대에 타르스키가 이 이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모델론은 추상대수학이나 집합론 등의 모형을 이루는 구조를 연구하는 분야다. - P257

모델론과 대비되는 분야가 증명론인데, 증명론과 모델론은 각각 논리적 언어로서 통사론syntactics과 의미론semantics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 P257

 즉, 군group,
체 field, 그래프 graph 등 현대 수학에서 사용하는 수학적 구조물이 모두 다 모델이다. 모델론에서는 이런 것들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 P257

ZF 공리계와 선택공리

현재 집합론(수학기초론)에서 주로 채택하는 공리계axiomatic system는 체르멜로 · 프렝켈 공리계Zermelo-Fraenkel system이고, 약자로ZF 공리계라고 부른다. 원래 체르멜로·프렝켈 공리계에는 선택공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공리가 워낙 중요한 논란거리인데다가 아주 독립적인 공리여서 보통은 선택공리를 포함한 공리계를 ZFC 공리계라 부르고, 포함하지 않는 공리계를 ZF 공리계라고 부른다. - P258

당시 수학의 중심지 괴팅겐대학교에는 이미 새로운 집합론에 관한 연구가 대세였다. 그 대학에서 강사를 하던 체르멜로도서서히 집합론의 세계로 빠져든다. 당시 최고의 대학에서, 다들살아남고자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황에서 전공 분야를 바꾸어가며 연구한 것만 보아도 그가 보통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P259

모든 집합은 정렬순서를 갖는다.
Every set has a well-ordering/Every set can be well-ordered. - P260

정렬순서 정리가 유명해진 이유는 그 결과가 직관적으로 그럴법하지 않은 데다 그 증명에 선택공리가 쓰이는 바람에 선택공리를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논란이 크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중략). 결국 선택공리는 20세기 논리학(수학기초론)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가 되어버렸다. - P260

선택공리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다시 이어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제 정렬순서 정리에 관해 설명해보자. 두 가지 개념, 순서관계order relation‘와 ‘정렬순서‘의 의미를 알면 된다. - P261

그런데 순서를 정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므로, 순서를 정하는방법을 정하는 것을 "순서관계를 준다"라고 표현한다. - P261

이제 정렬순서에 대해 알아보자. 어떤 순서집합 X에 대하여, X의 모든 공집합이 아닌 부분집합nonempty subset이 가장 작은 원소the smallest element를 가지면, 이 집합의 순서관계를 정렬순서라고 부른다. - P262

이제 다시 체르멜로의 정렬순서 정리로 돌아가보자. 만일 이정리가 맞는다면 실수 집합 R도 어떤 정렬순서를 가져야 하는데,
그런 순서관계를 찾기도 어렵고 그런 정렬순서가 존재할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이 정리가 맞는다고 증명되자 수학자들이 그렇게 놀란 것이다. - P262

사실은 나중에 밝혀지지만 선택공리는 (ZF 공리계 내에서) 체르멜로의 정렬순서 정리와 동치이다. 수십 년에 걸쳐 많은 수학자가 선택공리와 동치인 명제 수십 개를 발견한다. 그런 명제 중에는 초른의 보조정리Zorn‘s Lemma와 같이 수학의 여러 방면에 매우 유용한 정리도 있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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