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빨리 개봉했음 좋겠습니다.

[Mickey7]: 응, 확실해. 너무 깊이 들어왔어. 그리고 바닥에 너무 세게떨어진 것 같아. 솔직히 말하자면, 날 데려가도 결국은 폐기처분하게될 거야.
[BlackHornet]:.....
[BlackHornet]: 알겠어. 네가 선택한 거야. - P16

[BlackHornet]: 죽을 때 말이야, 미키. 네가 파이브처럼 끝나지는않았으면 좋겠어. 무기는 있어?
[Mickey]: 아니. 떨어질 때 버너(본 작품에서 일종의 지향성 에너지무기를 가리킨다-옮긴이)를 잃어버렸어. 솔직히 있었어도 사용했을까싶어. 빨리 끝낼 수는 있었겠지만.......
[BlackHornet]: 그래, 나쁘지 않았을 텐데. 칼은 있어? 쇄빙 도끼는?
[Mickey7]: 아니, 없어. 그런데 쇄빙 도끼로 대체 뭘 할 수 있지? - P17

통신이 가능한 범위의 경계에 멈춰 있는 모양이었다.

[BlackHornet]: 백업은 해 뒀지?
[Mickey7]: 최근 6주 동안은 안 했지.
[BlackHornet]: 왜 업로드를 안 했어?

지금은 그 질문에 대답할 기분이 아니다.

[Mickey7]: 게을러서지, 뭐. - P18

이쯤에서 사고 실험을 한번 해 보기로 하자. 여러분이 잠자리에 들면 잠이 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상상해 보자. 당신은 죽는다. 당신은 죽고 내일 아침부터 다른 사람이 당신의 삶을 대신 산다. 그는 여러분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다. 모든 희망, 꿈, 두려움, 소망을 기억한다. 그는 자신이 당신이라고 생각하고 당신의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전날 밤 잠자리에 들었던 그가 아니다.  - P19

그 모든 죽음의 경험에서 괜찮은 점이 있다면 내가 진짜로 어떤 면에서는 빌어먹을 불멸이라는 것이다. 나는 단순히 미키1이 했던 일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로 살았던 삶을 기억한다. 뭐, 그의 마지막 몇 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 P20

 만약 내가 이 동굴 바닥에 누워 눈을 감고 호흡기를 뗀다면 나는 내일 아침 미키8으로 깨어날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의심이 든다.
나샤와 베르토는 차이를 느낄 수 없을지 모르지만, 이성 너머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P20

역시 수상했다.
하지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동굴 중 하나를 골라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30분쯤 지난 뒤, 나샤에게 가만히 앉아 얼어 죽기만을 기다리진 않을 거라고 말해 둘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샤가알았다면 내가 진짜로 죽기 전까지 베르토가 손실 보고서를 제출하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 P21

나사가 나를 구하러 오겠다고 강력하게 우기지 않은 이유는 내가 심하게 망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가벼운 두통에 시달리면서 손목을 살짝 삔 상태로 일어나 동굴 안을 배회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나샤는 당장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구하러 왔을 것이다. 내가 원하든원하지 않든.
그럴 수는 없었다. 나샤는 지난 9년 동안 나에게 찾아온 유일한 행복이었고, 그녀를 위험에 빠뜨린다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P22

당장은 괜찮지만 땅 위로 올라가는 길을 찾게 된다면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동굴 입구를 덮고 있던 얇은 얼음막을 밟고굴러떨어질 때 바깥 기온이 영하 10도였다. 밤이 되면 기온은영하 30도 이상으로 떨어지고 바람도 그치지 않고 불었다. 나가는 길을 찾는다면 해가 뜰 때까지 안에서 기다리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 P23

동굴 두 개가 교차하는 지점을 지날 때면 소리가 앞에서 나는지 뒤에서 나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반쯤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거기, 팔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 소리의 정체가 서있었다.
녀석은 크리퍼와 생김새가 비슷했다. - P23

맞서야 할까, 아니면 도망쳐야 할까? 어느 쪽도 좋은 선택이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손바닥이 보이도록 양손을 들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녀석이 반응을 보였다. - P24

방어할 틈도 없이 녀석의 턱뼈들이 내 다리 사이와 오른쪽 어깨, 허리를 감싸더니 나를 들어 올렸다. 녀석의 앞발이 내가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았다.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녀석의 목구멍이 리드미컬하게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입속에는 검은 이빨이 겹겹이 나 있고 그 뒤로 뜨거운용광로처럼 생긴 식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았다. 녀석은 나를들어 올리고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P25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헷갈렸지만 우선 녀석과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동굴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동굴 막다른 벽에서 조금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몇 초 후에야 오큘러가 몇 시간 만에 가시광 범위의 광자를 감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26

그 순간, 9살 무렵 미드가르드의 시골 할머니 댁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중략) 나는 양손을 모아 조심스럽게 거미를 들어 올렸고, 뾰족한 다리로 손바닥 여기저기를 훑으며 돌아다니는 거미의 움직임을 느끼며 아래층 현관 밖으로 달려 나갔다. (중략) 거미가 허둥지둥 내 손에서 벗어날때, 마치 내가 자애로운 신이라도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벽에 난 구멍으로 2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눈덮인 돔 기지 지붕이 보였다. 내가 거미였던 셈이다. 나는 거미였고, 동굴 안에 있는 저 녀석이 방금 나를 마당에 풀어 주었다. - P27

하지만 한동안은 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만 알고 있어야 할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 P28

돔에서 반경 100미터는 보안경계선으로 정해져 센서 탑, 회전 버너 포탑, 각종 덫과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여태 우리가 본 커다란 동물이라고는 크리퍼뿐이었고, 그들은 센서가 감지할 수 없는 눈 속으로 이동했기에 이런 장치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그저 관행이겠거니 생각했다. - P28

"그렇지. 밖에서 발견한 거라도 있어?"
있다마다. 중량 우주선만 한 크리퍼를 만났어. 그런데 그 녀석이 내가 돔으로 돌아올 수 있게 동굴 밖까지 데려다줬다고. 지각이 있는 생물이 틀림없어 멋지지? 안 그래?
"아니." 내가 답했다.
"그래, 항상 그렇지 뭐. 마샬이 쓸데없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니까, 그렇지 않아?" - P59

 경비대에 미키8으로 등록한 사람이 아직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베르토가 게으름을 피워 준 덕분에 무척이나 번거로운 절차를 밟지 않고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나에게 이런 상황이 생긴 것 역시 베르토의 게으름 때문이었다. 쉽지 않았겠지만, 어젯밤 베르토가 장비를 갖춰 돌아왔다면 동굴에서 나를 꺼내줄 수도 있었다. - P30

 지금 보니 부러진 것 같지는 않지만, 손목이부어 있고 보라색으로 멍이 들어 있었다. 아마 적어도 몇 주는고생깨나 할 것 같다. 그러고 나면 베르토에게 연락해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고 이야기해야지. 나에게도 내가 살아 돌아왔다고 메시지를 보내야겠다. - P38

나는 두 걸음 안으로 들어서며 방문을 닫았다. 문고리가 딸깍하고 잠기는 소리에 그의 눈이번쩍 뜨였다.
"저기." 내가 말했다.
그는 반쯤 몸을 일으켜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대체 뭐야……………." 나를 발견한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망할, 난 미키8이구나, 그렇지?" 그가 말했다. - P31

2장

익스펜더블이 필요한 사람들은 ‘익스펜더블이 돼라‘고 설득하지 않는다. 대신 불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어쨌든 듣기에는 훨씬 좋다.
내가 멍청하게 그 말에 넘어갔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P32

사실, 그들이 나에게 뭘 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익스펜더블 자리를 차지하려면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조종사도 아니고, 의료진도 아니었다. 유전학자나 식물학자, 우주생물학자도 아니었다. 우주선의 말단 직원조차도 못됐다. 쓸 만한 기술이 전혀 없었지만 나는 진심으로 미드가르드를 벗어나고 싶었고,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했다. 우리가 정착한 후 200년 만에 처음으로 우주선이 발사될 예정이었고,
그 우주선에 타려면 익스펜더블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 P33

하지만 그웬의 장황한 설명을 다 듣고도 이해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으니, 상륙거점에서는 위험하거나 치명적인 임무가 정말 많이 생겨나고, 내가 그런 임무에 정말 자주불려 가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 P34

하지만 실제로는 별의별 일이 다 생겼다. 치명적인 방사능에 노출되어야 하는 임무를 비롯한 여러 작업은 기계보다 인간의몸이 훨씬 더 오랫동안 견딜 수 있었고, 기계로는 할 수 없는의학 실험과 관련된 임무도 있었다. 게다가 상륙거점에서는 익스펜더블이 기계보다 교체하기 훨씬 쉬웠다.  - P34

그웬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여전히 이 임무를 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요?"
나는 자신감 있어 보이려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런 것 같은데요."
그웬은 계속 나를 뚫어져라 보았고 나는 이마에 땀방울이맺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P35

(중략), 그녀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당신, 정신이 아예 안드로메다로 가 버린 겁니까?"
그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아니요,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요."
"내 이야기를 듣기는 했나요? 당신이 맞닥뜨릴지 모를 끔찍한 일들 말이에요." - P35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제가 방사능에 피폭될 수도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리며 진이 빠진채로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을 거잖아요. 자살할 수도 있지 않나요? 약을 먹고 눈을 감고 새롭게 태어나면 되니까요. 그러려고 백업이란 걸 하는 게 아닌가요?"
"네, 그렇게 생각하겠죠. 하지만 실제로 익스펜더블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나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웬이 더 이상은 말을 하지 않으려 해서 내가 물었다. "뭘 안 한다는 거죠?" - P36

"반스 씨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죠. 대체 무엇 때문에 이 임무를 맡으려고 하나요?"
그녀는 팔꿈치를 책상에 올리고 모은 두 손 위로 턱을 고였다.
"그러니까 제가 한두 번쯤 죽더라도 어차피 저는 불멸의 존재 아닌가요?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녀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한숨 소리가 더컸다. "그래요. 당신이 멍청한 건 알겠군요. 차별은 하지 않는게 우리 방침이지만, 이 경우 문제는 개척지 탐사에서 익스펜더블 미션이 실제로도 대단히 중요한 임무라는 거예요. (후략) - P37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 임무에 몇 명이나 지원했는지 알아요?"
"어, 아니요."
"맞혀 봐요. 이번 탐사 임무에 지원한 사람은 수만 명이었어요. 관심을 보인 조종사만 600명이 있었고요. 조종사를 몇 명이나 뽑는지 알아요?"
(중략)
그녀가 말했다. "두 명이요. 두 명을 뽑는 자리에 600명이 지원했어요. 주말에 취미 삼아 비행기를 몰아 본 사람들도 아니에요. 600명이 저마다 엄청난 경력을 자랑한다고요. (후략)." - P38

마리코 베리건이 누군지는 몰랐지만, 물리학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인간인 듯했다.
그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또한 마이코 베리건이 개자식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이야기와는 관련이 없지만. - P39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다시 익스펜더블 이야기로 돌아가면 말이죠, 지원자가 몇 명이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그 자리를 맡겠다고 자원한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당신이 저 문으로 걸어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는 이 자리를 채울 누군가를 징집할 권한을 의회에 요청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어요. 적성 검사 점수를 보면 당신이 완전히 멍청이는 아닌 것 같군요. 당신이 하는 일이 그러니까………… 역사가라고요?" - P39

그웬은 약 5초쯤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젓더니 한숨을 쉬었다.
"어떤 경우에도 지금 당신이 지원한 이 자리는 취미가 될 수없어요. 분명 하나의 임무이고, 맡게 된다면 절대 중도에 포기할 수 없어요. 반스 씨, 이 행성에서 이 임무에 자원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 P40

"이 임무에 자원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징발까지 고려했다면서 제가 이 임무를 맡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이유가 뭐죠?"
그녀는 다시 태블릿으로 시선을 내리며 답했다.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반스 씨. 아마도 당신이 꽤 착한 사람처럼 보였나 보죠. 나는 이 임무를 쓰레기 같은 인간한테 맡기고 싶었거든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블릿을 책상에 내려놓고는 악수를 청했다.
"뭐 어쩌겠어요. 당신이 이 일을 맡게 되었네요. 승선을 환영합니다." - P41

그웬이 내게 물어야 했으나 묻지 않은 질문이 있다. 나는 대체 미드가르드의 무엇이 그토록 싫었길래 내장이 녹아내릴 수도 있는 임무를 맡으려고 했을까? - P41

미드가르드 사람 중에 돈 문제를 겪는 사람은 없다.
미드가르드도 유니언에 속한 다른 모든 행성처럼 실질적으로 거의 모든 산업과 농경업이 자동화되어 있고 정부는 수확물을 인구수로 나누어 배급한다. 미드가르드는 어떤 면으로 보나거의 천국이나 마찬가지다. - P43

하지만 미드가르드에는 별볼 일 없는 학문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웬이 아주 친절하게지적했듯 역사를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큘러를 한 번 깜박이면, 또는 태블릿을 몇 번만 두드리면 필요한 정보는 무엇이든 알 수 있었다. - P43

내게 주어지는 생활비는 먹고 살기에 충분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아침, 문득 내가 발코니 밖으로 몸을 던진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을 텐데. - P44

그는 나를 뚫어져라 보고는 수건질을 계속했다. "나도 알아,
멍청아 네가 재생 탱크에서 깨어나던 날을 나도 기억한다고.
식스나 파이브, 스리까지 싹 다 기억한다고. 네 기억이 곧 내 기억이니까."
"전부는 아니야. 한 달 이상 업로드를 안 했거든."
"아주 잘하는 짓이다. 고마워서 어쩌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걱정하지 마. 네가 놓치기 아까울 만큼 좋은 일은 없었으니까." - P46

그는 다시 침대에 걸터앉아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검은 머리가 아직 뻣뻣하고 반들거렸지만 적어도 이젠 가닥가닥떨어지기는 했다. 하지만 수세미로 두세 번쯤 박박 문질러 닦아 내기 전까지는 여전히 떡이 져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제 어쩌지?"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 역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다 말고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뭐가?" 그가 말했다. - P47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분노가 서리기 시작했다. "세븐,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왜 이래,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너도 잘 알잖아. 우리 둘중 하나는 없어져야 해." - P48

처음 착륙했을 때 배급량은 기본적으로 하루 1400킬로칼로리였고, 지방을 뺀 체중과 작업 일정에 따라 추가되었다. 지금까지 두 차례 배급량을 줄였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수경재배탱크에서 거의 아무것도 기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중략)
말하자면, 유니언에서 여러 명의 내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극도로 금기시하지 않더라도 중복된 익스펜더블까지 먹일 만큼 식량이 충분하지 않다는 얘기다. - P49

"우리끼리 말싸움해 봐야 소용없어. 타협할 수 있는 문제가아니라고." 결국 그가 입을 열었다.
물론 에잇의 말이 맞는다. 누군가 양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식당에서 계산서를 누가 먼저 낚아채느냐 같은 문제와는 달랐다. 사이좋게 차례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 P50

내가 말했다. "잘 들어 방법이 생각날 거야. 난 옷 좀 갈아입고 씻을게. 넌 3층 화학 샤워장에 가서 보존액 찌꺼기를 씻어내. 그리고 30분 뒤에 사이클러 앞에서 만나자" - P51

 잠시 눈을 붙이려는 찰나, 조용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들어와" 내가 말했다.
문이 휙 열렸다. 베르토가 머리를 들이밀고 방 안을 살피더니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 P52

"그래? 식스가 죽었을 때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그는 다시 나를 보았다. "그럴 수도 잘 모르겠네. 그게 중요한가?"
"응. 중요한 것 같은데. 너는 조종사 아냐? 최후를 맞을 때 끝까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가 뭐야?"
베로토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답했다. "무엇 때문에 죽음에이르게 됐는지 알리는 것." - P53

베르토가 말했다. "식스랑 세븐 모두 같은 이유였어. 크리퍼떼에 당했지."
"그랬구나, 그런 일이 어디에서 일어났고 나는 뭘 하고 있었는데?"
베르토가 한숨을 쉬었다. "너는 마샬이 내린 왜 해야 하는지 모를 명령에 따라 순찰 중이었지. 마샬은 지난 몇 달 동안 너에게 돔 근처 크레바스를 파악하고 크리퍼가 있는지 정찰하는 임무를 맡겼어.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지만, 마샬은 그 임무에 굉장히 집착하는 것 같았어." - P54

"웅, 일이 잘못됐어. 내가 세븐을 거의 내려 주자마자 별안간 놈들이 쌓인 눈 더미에서 튀어나왔어. 스무 마리, 아니 서른마리는 됐을거야. 내가 바로 위에서 날고 있었지만 구조 장비를 내려 주기도 전에 세븐은 갈기갈기 찢겨 버렸어."
죽어 가는 나를 내버려 두고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마음은 이해했다.
(중략)
베르토가 식스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했을까? - P55

나는 당연히 사령부에 보고서를 제출하러 갈 마음이 없었다. 우선 에잇과 이야기를 마쳐야 했다.
"알잖아. 사실 나 아직도 정신이 덜 깼어. 먼저 가서 아침 먹어. 나는 낮잠 좀 잘게. 그러고 일어나서 경비대에 등록한 다음에 사령부에 보고하러 가자."
베르토는 나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뭔가 낌새가 이상한 걸 눈치챈 것 같았다. - P56

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기운이 흘렀다. 이런 게 불길한 예감일까?
베르토가 말했다. "저기, 너 괜찮은 거야?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오른손으로 눈을 비비며 여태 왼손을 이불 밖으로 꺼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베르토가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다. - P57

물론 지금 상황은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우선 다른 미키들은 자기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 죽게될 확률은 에잇이 내 등에 칼을 꽂지 않는 이상, 50대 50이다.
그게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확실히 아는 데서 오는 평화가 있다. 내가 오늘 아침에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망에도, 불안에도 먹잇감이 되어 준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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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벙싱보건에서의 감금의 문제.
이용표

. 즉, 노동을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이른바 가치 없는 빈민(undeserving poor)에대한 억압기제로서 정신장애인 감금을 설명한다.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외형적으로 노동을 거부하거나 회피하려는 사람으로 보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 P12

 즉, 정신장애에 관한 질병적 관점이 득세하는 19세기 이후의 정신장애인 감금은 노역장에뿌리를 둔 것이다. 의학은 감금 장소의 명칭을 노역장에서 정신병원 혹은 요양원으로 바꾼 채 감금을 이어나갔다.  - P12

Hudson (2016)은 정신장애인의 탈시설은 1950년에 시작되어 현재진행형인 추세이지만 21세기의 시점에서 보편적인 현상은아니라고 하였다. - P13

일제 강점기에는 총독부의원에서 총독부에 정신병자감치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건의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이부영, 1994).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정신장애인의 감금과 관련된 최초의 공적 문서이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 정신장애인 감금은 오히려 1980년대 이후확대되었다. 특히 정신보건법 제정 이후에는 매우 가파른 속도로정신병상이 증가하였다. - P13

단순히 진화론적 관점에서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낙관론적 전망을 대입시키기 어렵게 만든다. 즉, 정신약물과 같은 의료과학의 발전이 정신장애인의 감금을 해소하는 것은 아니라는것이다. - P13

2. 몸에 대한 감금의 의미
1) 감금의 대상으로서의 몸

몸에 대한 감금은 보호를 이유로 하거나 처벌의 한 방법이다.
서양 근대철학에서 인간의 본질은 정신이며 몸은 단지 정신에의해 작동되는 기계였다. 이러한 사유에서 몸의 감금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있다.  - P14

즉, 감금은 신체적 억압을 통하여 정신적인 고통을 가중시킨다. 그 이유가 보호이든 처벌이든 상관이 없다. 주디 챔버린은 정신장애 당사자운동의 교본이 되고있는 저서 『우리 스스로(On my own)』에서 자신을 장기입원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Chamberlin, 1977). - P15

난 나에 대한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처럼 느껴졌다. 장기구금케어라는 그 의사의 말은 내 머리 속에서 불길하게 메아리쳤다.
내가 언제 여기를 나갈 수 있을까? (중략). 난 그것을 부셨고 그중 한조각으로 내 팔을 베기 시작했다. (중략). 난 격리실로 보내졌다. 내가 단지 그들에게 날 강제로 입원시킬 또 하나의 추가적인 이유를 제공하는 것뿐임을 이번엔 빠르게 깨달았다. - P15

그러나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경험으로는 감금은 감금일 뿐이다. 적어도 당사자의 자기결정이 결여된 감금은 보호와 치료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 P16

2) ‘몸‘에 관한 철학적 담론과 감금의 의미

그에 있어서 몸은
‘큰 이성‘이고 의식이란 ‘작은 이성‘에 불과하다. 즉, 니체가 몸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의식이나 이성 중심의 철학에서 벗어나 의식, 감정, 의지의 역동적 복합체로서 인간이 철학의 대상으로 서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 P16

몸의 감금은 그릇에 대한 압류에 불과하다. 몸의 하찮은 것이며 그릇에 담긴 이성 혹은 자아가 본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릇에 대한 압류가 이성에 미치는 영향은 과소평가된다. 니체는 이성중심주의의 이러한 세계인식의 틀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니체에게 삶이란 몸의 텍스트이며, 몸은 의식, 정서, 의지의 통합체이다(김정현,
2019). - P17

둘째, 몸의 담론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대항담론이다. 이성중심의 철학에 내포된 인간중심주의는 자연성의 억압과 관련되어 있다. 즉, 이성을 가진 인간은 우월한 존재이며 자연에 대한 억압을 통해 문명 발전의 기치를 내세운다. - P17

과학기술의 ‘몰아세움‘은 인간이 기술과 기계의 노예로 전락해 가면서도 스스로를기술의 지배자라고 착각하게 만들고, 실제 진리의 발현을 차단하면서도 진리로 위장하고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중략) 더욱이 이성중심주의는 과학에 의해 인식되고 대상화될 수 있는 것들만 존재로서 인식한다. 이를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대상화‘라는 말로 요약한다. - P18

그는 정신병리학이 정신적인 모든 것을 대상으로 표상하고 기획하려 한다고 경고하였는데,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측정가능한것, 사물 혹은 생화학적 진행 등으로 환원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김재철, 2015).  - P18

3) 몸의 사회적 의미와 감음의 문제

근대 이전 사화에서 몸은 정신에 복속된 도구로서 여겨졌다. 몸에 대한 규율은 실제적으로 정신을 훈육하는 것이었으며, 정신 수련은 몸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한 감금도 몸을 통하여 정신을 온전하게 만들기 위한 시도였다.  - P20

정신의핫응 사회적 통제 및 억압의 도구가 되었다 (중략) 정신장애의 진단은 단지 치료의 필요성을 의미하는 문제를 넘어 사회적 의미를 가진다. 진단을 받은 사람들은 정신병자라는 낙인이 부여된다. 낙인은 외부적으로 무능력하고 자신의 신상이나 재산에 관한 판단능력이 부족하며 위험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사회적 견제나 배제를 가져온다. - P21

최근 DSM-5에서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ttention-deficit/hyperactivity disorder: ADHD)의 필수진단항목이 줄어 아동의 행동이 의료적 문제가 되는 경우가 더욱 늘어날 것이다. 또한 애도기간 동안 주요우울장애를 진단할 수 없다는 배제기준이 삭제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일정기간 나타날 수 있는 우울도 질병이 될 수 있다. - P21

그러나 푸코는 정신의학적체계라는 것은 역경 속에 있는 사람에 대한 연민보다도 감시와사회적 통제에 더욱 가깝다고 주장한다. 즉, 정신의학적 진단기준은 실재한다기보다 권력의 필요에 따라 창조된 지식체계일 수있음을 시사한다(오생근, 1990). - P22

토마스 사스도 정신보건의 실천에 관한 자유의지모델을 제시하면서 환자와 의사는 계약적으로동등한 관계이며 치료라는 명목으로 정신장애인에 대한 사회적통제를 강압하는 의료권력을 소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Menzies, LeFrancois, & Reaume, 2013). - P22

정신장애의 치료에서 강압적 방법의 사용은 정신의학의 지식과 기술에 의하여 정당화된다. 인권적 쟁점에 되고 있는 정신장애인에 대한 강제입원은 몸의 감금상태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다.  - P22

첫째, 정신장애인은 자신의 병에 대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어 자발적으로 치료받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통념이다. 둘째,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병적 상태가 심각해지면 강제적으로 격리하지 않을 경우 자신은 물론 타인들에게 위해를 가할 우려가 높다는 사회적 인식이다.  - P23

즉,
합리적 판단을 위한 정신능력의 문제는 UN장애인권리협약상의 의사결정지원과 같은 ‘정당한 편의 제공의 문제이지 강압치료의 정당화와는 관련되지 않는다.  - P23

Swanson 등(2015)의 총기폭력사건과 정신질환과의 관계에 관한 역학조사를 검토한 결과 정신장애인은 모두 위험하다는것은 근거가 없으며 대다수는 위험하지 않으며 정신장애와 공격성은 관계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오히려 정신장애인은 가해자이기보다 폭력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Desmarais et al., 2013). - P23

3. 우리아라 정신보건과 감금의 역사
1) 1980년 이전

조선시대까지 정신장애인에 대한 공식적 감금제도나 기구가발견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기록으로는 정신병자는 근처에 있는 백성에게 돌보도록 하거나 난폭한 경우 동임에게 맡기도록하였다. - P24

조선총독부의원 제 3회 연보(1914)에 따르면, 입원환자의 2/3 이상이 길거리에서 경찰에의해 의원으로 이송되었는데 정신장애인의 관리와 치료를 위해 조선총독부에 ‘정신병자감치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이부영, 1994). 이 기록이 정신장애인의 공식적 감금제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 P25

다만 1917년 제정된 ‘행여병인구호자금관리규칙‘에 의해 설치된구호소에는 다수의 정신장애인이 다수 구호를 받았다는 기록이있다. 이 시기에 정신장애인의 수용보호는 공식적으로 제도화되지는 않았으며 방임상태에서 신체적 질병이 중한 경우 구호소에서 보호를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 P25

 1957년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전국의 정신병환자는 1만여 명으로 추산되나 수용치료가 가능한 인원은 약 250명에 불과하다고 당시 보건사회부의 관계자가 밝히고 있다.  - P25

 1980년대 이전까지는 성인불구시설과 부랑인시설이 주된 정신장애인의 수용보호기관이었는데, 이 시설에는 다양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수용보호되었다. 수용보호인원을 보면성인불구시설은 1963년 16개소 4,615명에서 1979년 30개소 5,226명으로 수용자가 조금 증가하였다. 그런데 1979년 정부의통일주체국민회의 보고에 따르면, 30개소 중 22개 시설에 4천 명정도의 정신장애인이 수용되어 있다고 하였다(곽병은 외, 2004). - P26

이 시기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본다면, 1979년까지 우리나라의정신병상은 2,000병상에 미치지 못했으며, 성인불구시설이나 부랑아시설은 치료적 기능이 제한적인 상태에서 약 5천 명의 정신장애인을 수용보호하고 있었다.  - P26

2) 1980년대: 정신보건벚 시행 이전

이 시설은 별도의 근거법이 없이 사회복지사업법의 사회복지사업의 범주에 정신질환자의 사회복귀에 관한 사업을 추가함으로써 제도화되었다. 이러한 제도적 변화는 1990년까지 정신요양시설의 급속한 팽창을 가져왔다. 1982년 26개소 5,420명이던 수용자수는 1990년 74개소 17,432명으로 단기간에 3배 이상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요양시설 수용자 증가는 감금의 서막에 불과하였다. - P27

 올림픽을 목전에 둔 1987년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수용자 1명이 직원의 구타로 사망하고 35명이 시설에서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우리 사회가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처우했는지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 P28

한 예로 1984년 9월 당시 14살이던 박○○씨는 집을 나와 부산 용두산공원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때 한 승합차에서 사람들이 내려 신분증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미성년자여서 주민등록증이 없다고 하니, 그를 차 안으로밀어넣어 형제복지원으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 P28

3) 정신보건법 시대: 1997년 이후

다음의 <표 1-1>은 2001년부터 정신건강복지법시행 직전 해인 2016년까지 정신의료기관 및 정신요양시설 입원/입소자수의 입원유형별 분포이다. 이 기간 동안 입원유형별 변화를 살펴보면, 2001년부터 2007년까지는 자의입원이 전체 입원으로 10%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 P29

다음의 <표 1-2>는 정신보건시설 입원. 입소자 재원기간(중앙값) 변화추이를 보여준다. (중략). 특히, 정신요양시설의 장기입소문제가 심각하다.  - P30

<표 1-3>은 연도별 정신병상 수 현황을 나타낸다. (중략) 2016년 정신병상의 전체 구성비를 살펴보면,
사립정신병원이 43.4%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병원정신과 25.5%, 정신요양시설 14.0% 순으로 나타났다. - P31

과도한 강제입원이 행해졌던 정신보건법 시대에는 그에 따른 인권적 문제가 다양하게 발생하였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진정사건에는 정신의료기관 입원자들의 진정이 가장 많았다. - P33

그 사건 중에는 가족 내의 종교적 갈등이 발생하자 배우자를 강제입원시킨 사례와 재산분쟁 때문에 가족을 강제로 입원시킨 사례가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졌으며, 정신보건법상의 강제입원조항의 문제점이 사회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정신보건법상의 강제입원조항은 2016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일치판결을 받았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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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너에게는 모세5경보다 신약성경이 더온화하고 밝고 마음에 와 닿았다. 신약성경은 언어가 오래되지않아 깊고 풍부한 맛은 덜했지만, 젊고 열정적이며 이상을 꿈꾸는 정신으로 가득했다.
또한 《오디세이아》가 있었다. 그 시구들은 아름답고 격정적인 울림으로 강하고 균형 있게 흘렀다. 시구 속에서 물의 요정의 하얗고 둥글둥글한 팔이 지금은 사라진 견고하고 행복했던 인생들의 소식과 생각을 건져 올려주었다. - P99

원래 한스에게 저녁은 공부에 매진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저녁이면 곧잘 공부에 질린 하일너가 찾아와 책을 빼앗고 함께하기를 원했다. 한스는 친구를 좋아했지만 나중에는 하일너가 저녁마다 찾아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어느 것도놓치지 않기 위해 의무적인 학습 시간에 두 배 더 집중하고 더많이 공부했다. - P100

친구에게는 간혹 착한 한스가 단지 편안한 장난감, 이를테면애완 고양이처럼 여겨졌다. 한스 자신도 그렇게 느낄 때가 있었다. 하지만 하일너는 한스를 진심으로 필요로 했고 그래서 한스에게 매달렸다. 하일너에게는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며 자신을 칭찬해주는 사람, 믿음직한 친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 P101

한스는 하일너의 이런 병적인 우울함은 단지 과도하고 비이성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지, 자신이 신뢰하고 진정 감탄하는 친구의 실제 본성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일너가 자작시를 낭송하거나 시의 이상에 대해 말하거나 실러와 셰익스피어의 독백을 과장된 몸짓과 함께 열정적으로 재현할 때면,
한스는 마치 친구가 자신에게는 없는 마법의 능력으로 허공에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 P103

하일너는 교장의 서재 문 앞까지 와서 간신히 루치우스를 따라잡았다. 루치우스는 이미 노크를 하고 문을 열던 마지막 순간에 예고받은 대로 한 방 걷어채었다. 그리고미처 문을 닫을 새도 없이 권력자의 가장 신성한 공간으로 폭탄처럼 튕겨 들어갔다.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다음 날 아침 교장은 젊은이의 탈선에 관한 설교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루치우스는 교장의 말뜻을 음미하며 박수갈채를 보냈고, 하일너는독방에 갇히는 무거운 벌을 받게 되었다. - P105

하일너는 창백한 얼굴로 서서 반항의 눈빛으로 교장을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속으로 그를 대단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연설이 끝나고 복도로 우르르 나갈 때는 무슨 나병 환자라도 되는 양 하일너를 피하고 홀로 내버려 두었다. - P105

한스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결국 친구로서의 의무와 학생으로서의 의무가 벌이는 싸움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한스의 목표는 성공하는 것, 높은 시험 점수를 받는 것, 뛰어난 성과를 올리는 것이지, 낭만적이거나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 P106

하일너는 조용하지만 반항적으로 고개를 높이 쳐들고 거만한 표정을 짓고 다녔다.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공책을 펴고시를 적는 일이 많아졌다. 공책 표지를 감싼 검은색 방수포 위에는 ‘어느 수도사의 노래‘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다. - P107

연주곡 <고요한 밤>은 루치우스의 손가락을 거쳐 괴로운 탄식 소리로 들렸고, 신음과 고통이 가득한 수난의 노래가 되었다. 루치우스는 두 번이나 다시 시작했다. 멜로디를 사정없이 찢고 쪼개면서 발로 박자를 맞추는 모습이 마치 혹한의 날씨에 일하는 나무꾼 같았다.
교장은 분노로 창백해진 음악 교사를 향해 흐뭇하게 고개를끄덕여 보였다. - P108

"괜찮아요, 루치우스 군." 교장이 입을 열었다. "노력하는 모습에 우리 모두 고맙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계속 노력해주세요.Per aspera ad astra(시련을 거쳐야 성공하리라)!" - P109

하일너만이 혼자 서서 침묵늘 지키고 있었다. 마침내 기차가 오자 하일너는 학우들이 다 탈때까지 기다렸다가 홀로 아무도 없는 칸에 올라탔다. 다음 역에서 기차를 갈아타면서 한스는 하일너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 P110

한스는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즐겨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노래와 파티의 흥겨움이 없었고, 어머니가 없었으며, 크리스마스 트리도 없었다. 아버지 또한 파티를 즐길 줄 몰랐다. 그러나 아들이 자랑스러웠던 나머지 이번만은 선물을 사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 P110

강은 꽁꽁 얼어붙어서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스는 거의 하루 종일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새 양복에 초록색 신학생 모자를 쓴 그는고향 동창들에게 부러움을 받는 더 높은 세계에 서 있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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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내게 사인을 해달라고 들이대던 팬들과 이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건 이 사람 또한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사람만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아니다.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는 인간은 내 주위에 이 사람을 포함해 일곱 명이나 된다. 남자 넷 여자 셋. 실제로 조금 전까지 이 집에 있었던 자도 나를 죽이려다가 실패했다. - P16

오늘 밤 나를 죽일 인간으로 그 일곱 명 중 누구를 선택하든 상관없었다. 내가 이 사람을 최종적인 살인자로 선택한 건 그저 잠깐의 변덕 같은 것이다. - P16

몸을 돌렸지만, 누군가는 내가 쳐다보는 것도 알지 못한 채죽은 물고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윽고 내 눈길을 깨달은 모양이지만 그 후에도 얼굴 대신 스웨터에 눈길이 가 있었다.
물고기와 꼭 닮은 파란색과 흰색의 굵은 줄무늬 스웨터였기 때문이다. 이것도 나의 소소한 계산이다. - P17

머릿속 한 귀퉁이에서는여태껏 자신을 괴롭혀온 여자가 죽는 모습을 상상하고 내게 들키지 않게 은밀한 미소를 지었을 게 틀림없다. 그리고 죄 없는 물고기가 아니라 이 여자가 죽었어야 한다고 아쉬워했을 것이다. - P18

"청산가리는 일반인이라면 쉽게 구할 수 없지만 의사라면다르잖아. 그래도 설마 살해하려고 할 만큼 나를 미워했다니, 전혀 생각도 못 했지 뭐야." - P18

"이미 결론이 났는데도 오늘 저녁에 또 불쑥 찾아온 거야.
얼굴이 음울한 게 뭔가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손톱 끝으로 빈 약봉지를 집어 전등 불에 비췄다. 내 시선은 밀랍 종이를 통해 붉은 어둠과 그 가장자리에 걸린 누군가의왼쪽 눈을 찬찬히 관찰했다.
"어머, 지문이 찍혀 있네? 경찰에 신고해버릴까. 미수에 그쳤어도 살인 사건이 날 뻔했잖아. 이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체포될걸." - P19

"이 술잔을 요만큼만 당겨서 내 입에 넣었다면 나는 벌써죽었겠지? 너무 끔찍해."
생각난 대로 내뱉은 그 두 가지 말에 누군가는 아무 반응도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만 태연한 척하는 것이다. 무표정한 눈의 뒤쪽에서는 분명 변화가 일어났다. - P20

재빨리 그다음 덫을 치기 위해 일부러 진한 한숨을 내쉬
"아무튼 바보 같은 사람이라니까. 의사인 데다 나이가 마흔다섯 살이나 됐으면 조금 더 머리를 썼어야지. 이건 뭐, 길에서충동적으로 생판 타인을 죽이는 열대여섯 살 어린애나 똑같지 뭐야." - P20

"아니, 여기 집 안 곳곳에 그 사람의 지문이 남아 있잖아.
문짝만이 아니야. 이 테이블에도, 유리잔에도, 브랜디 술병에도,
그리고 저쪽 테이블과 재떨이에도 찍혀 있을걸."
나는 조금 떨어진 백목 테이블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 P21

"알리바이?" 나는 깔깔깔 웃었다. "당신, 그거 몰랐어? 내가내일부터 십오일 일정으로 파리에 가잖아. 이 집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건 가사도우미뿐인데 그 여자는 이달 말에나 올 거야. 십오일 동안 내가 보이지 않아도 설마 살해되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는 얘기야. 사체는 11월 30일에나 발견되겠지. 그러면 경찰에서도 내가 며칠 몇 시에 살해되었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게돼. 사망 추정 일시가 확실하지 않은 범죄인데 알리바이를 준비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는 거 아닌가? 그 사람도 내가 십오일 동안 여행을 떠난다는 거, 다 알고 있어." - P22

"게다가 그 사람, 오늘이 며칠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어. 나한테 배신당한 충격으로 신경증에 걸린 듯한 기미였거든. 이번 달부터 병원도 쉬고 하루 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대."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알리바이라면, 아마 그걸 써먹을 거야."

"맞아, 나를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안성맞춤의 알리바이가 될 만한 게 있어. 간단하지만 틀림없이 잘 먹힐 거야. 하긴그러려면 오늘 밤 안에 내가 살해되어야 해... 어때, 알려줄까?"
(중략)
"싫어, 그걸 알려주면 당신이 정말로 나를 죽일 수도 있잖아. 그 의사만이 아니라 당신도 나를 죽이고 싶어 했지?"
"죽이다니, 말도 안 돼…."
누군가는 다급하게 취소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 P23

"좋아, 그렇다면 알려줄게. 너무 웃기는 방법이거든."
나는 술을 꿀꺽 마시고 취해서 입이 가벼워진 척하며 빠른 말투로 주워섬겼다. 이미 완전히 외워버린 얘기를 연기가 서툰 배우가 입 끝으로만 대사를 읽듯이 줄줄 쏟아내며 나는 오로지 벽시계 소리만 듣고 있었다. - P24

죽음이 초침 소리와 함께 드디어 내게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일곱 명 중 누구여도 상관없는 한 명, 그 사람에게 의기양양하게 알리바이 조작 방법을 알려주면서, 지난 오년 사이의 또 하루, 저주스러운 기념일이 생각났다. 어느 날, 쇼가 끝나고 무대 뒤편으로 팬이라면서 한 여자가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단둘이 남았을 때, 웃는 얼굴 그대로 내게말했다.
"너, 성형수술 했지?" - P25

나는 실제로도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아직 나를 죽일 생각은 없겠지. 나한테 그만큼 앙갚음을 당하면서도 당신은 소심해서 그런 짓을 시도할 용기도 없거든. 근데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들으면 달라질걸? 아마 진짜로 죽이고 싶어질 거야."
그리고 다시 변덕이 도진 척하며 문득 웃음을 지워버렸다. - P28

봉투에서 일곱 장의 종이를 꺼내 툭 던져주자 누군가는가로채듯이 집어 들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갈 때마다 눈빛은 경악과 공포의 빛이 진해져 갔다. 덥지도 않은데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 이마에 배어난 진땀을 나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았다. 이 미소는 다른 어떤 표정보다도 나를 뼛속까지악에 물든 잔인한 여자로 보이게 할 것이다. - P29

봉투에는 매주 160만부의 판매 부수를 자랑하는 주간지의 편집부 주소와 ‘오자와 유지‘라는 기자 이름이 적혀 있다. 신랄한 글솜씨와 스캔들을 낱낱이 파헤치는 기사로 그쪽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이다. 그자의 이름을 물론 이 사람도 알고 있다. - P30

있어?"
"협박이라고?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돈 같은 걸 요구한 적이
"대체 왜...."
왜 이런 지독한 짓을 하는가, 왜 이렇게 나를 증오하는 것인가….
누군가는 지겹지도 않은지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영원히 답을 찾을 수 없는 수수께끼에 오로지 주문呪文처럼 ‘왜‘라는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듯이. - P31

이자는 그리 쉽게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망설임 없이 타인의 목숨까지 희생시킬 인간이다. 나는 이 사람의 그런 쩨쩨한 이기주의에 내기를 걸었다.
"어떻게 하면 되겠니...."
누군가의 입에서 신음처럼 말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하면 봐줄 거야? 그 편지만 보내지 않으면 뭐든 다 할게."
돈이 필요하다면 전 재산을 내줄 거고, 뭐든 원하는 대로해줄게... - P33

몇 초의 침묵 끝에 나는 먹이를 던져주었다.
"오늘 밤 안으로 나를 죽이면 돼."
물론 깔깔 웃으며 곧바로 그 말을 취소했다. - P34

이 밤의 정적 속에 언제까지고 길게 꼬리를 끌었다. 이윽고 누군가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나는 사람을 죽이지는 못해. 모든 걸 뻔히 꿰뚫어 보고 있구나."
체념한 듯한 서글픈 눈빛을 슬쩍 내게로 흘렸다. 힘없는 목소리는 내 동정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 P36

"맞아, 포기하는 게 좋아. 당신도 드디어 모든 걸 내려놓기로 결심한 모양이네. 이제 나하고 똑같아졌어. 건배라도 할까?"
누군가가 손에 든 잔에 내 잔을 쟁그랑 맞부딪쳤다. - P36

얼음을 넣자 잔의 술이 부쩍 늘어났다. 마치 유리잔에 눈금이라도 그려진 것처럼 세 번째 잔의 독약 섞인 술의 높이와 똑같았다. 이 사람은 마침내 결심하고 독약이 든 잔과 내 잔을 바꿔치기할 작정인 것이다.
마지막 장난기가 발동해서 나는 한 마디 덧붙였다.
"아니, 가득 따라줘야지." - P37

깍지를 끼고 얌전히 무릎 위에 놓인 누군가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며 지금 내가 몇 마디 던지면 이 사람이 어떤 얼굴을 할지 상상해보았다.
"당신, 나를 죽이려고 하지? 근데 실은 살해당하려고 전부내가 꾸민 거야."
또다시 어설픈 농담을 한다면서 못마땅한 얼굴을 할까. 나는 또한 그 손에 내 손을 얹는 장면을 상상했다. 우리의 관계는 공범과 비슷해서 서로 손도 맞잡곤 했으니까. 하지만 우욱 구토감이 몰려와 목을 비볐다. - P38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대체 누구야, 이런 시간에?"
나는 짜증을 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몇 번이나 휘청거리며사이드보드 옆 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  - P39

그런 말과 함께 수화기를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다시 비틀비틀 돌아와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 의사야. 어쩌면 저렇게 치근덕거리는지 모르겠어. 이런끔찍한 짓을 했으면서 뭘 용서해달래 ? 술에 엄청 취했나 봐. 집에 가서 또 퍼마신 모양이지. 그야 술을 들이켜고 싶은 기분도 이해는 되지만." - P39

누군가는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바보같이아직도 그 의사의 알리바이를 걱정하고 있다. 내 사체가 발견되는건 십오일 뒤라서 부검을 통해서는 정확히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알아낼 수 없는데도 게다가 내가 이 사람에게 알려준 알리바이 조작 방법은 사망 추정 시각이 확실하지 않다는 조건 아래 비로소 성립하는 것인데도. - P40

조금 더 마시려다가 마음이 바뀐 척하며 술잔을 테이블에내려놓고 나는 말했다.
"어째 써늘하네. 침실에서 담요 한 장만 갖다줄래? 아, 아냐, 내가 갈게. 서랍 안쪽에 있어서."
비틀거리며 침실에 들어가 문을 살짝 닫았다. 2센티미터쯤틈을 남기고, 침실은 썰렁한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 P41

실용적인 목적뿐인 낙타색의 군데군데 얼룩진 담요가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의상이라는 것은 아무도 알지못했다. 이제 곧 나는 조금 더 어울리는 의상을 몸에 두르게 될것이다. 다시 한번 재떨이 이쪽편의 술잔에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연극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진지하게 유리잔 바닥으로 시선이 내달렸다.
흠집이 없었다.
술잔을 바꾼 것이다. - P42

 누군가는 이제 더이상 얼굴빛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줄곧 유지해온 평정심은 완전히 사라지고, 이제 더 이상 못 마신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홍, 내가 입을 댄 것은 못 마시겠다? 그래, 이제 그만 가봐. 나도 이것만 마시고 잘 거니까..."
내뱉듯이 말하고 술잔을 손에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비틀비틀 침실로 향했다.  - P43

일초, 술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침실 문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이 초.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를 들으며 복수라는 말을 떠올렸다. 삼초. 정적 속에서 나는 기다렸다. 사초, 오로지 기다리고또 기다렸다. 오초, 뱃속에 흘러든 모래가 돌연 뻘건 용암이 되어 목구멍으로 솟구쳤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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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묘사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생각나게 만든다.








마키 씨는 가는 도중에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지요 씨가 찾아온 건 나흘 전이에요."
그날 저물녘에 한 품위 있는 부인이 시조의 야나기 화랑에찾아왔다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우미노 지요‘라고 밝히면서 교토 시립 미술관에서 <보름달의 마녀>를 보고 왔다고 했답니다. - P250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이야기가 나오면서야나기 씨가 도서실 이야기를 꺼내신 거예요. 지요 씨는 무척 흥미를 느끼신 것 같았어요. 잠깐 생각하더니 ‘지금 보러 가면안 될까요?‘라고 묻더군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놀랐지만,
시간이 별로 없다고 하시는 데다 야나기 씨도 허락해 주셔서저는 일찍 퇴근해 지요 씨를 작업실로 안내해 드리기로 했어요.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고 말이죠." - P251

작업실로 가는 택시 안에서 지요 씨는 "『열대』라는 소설을아나요?" 하고 마키 씨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사야마 쇼이치라는 사람이 쓴 소설인데요. 할아버님께 들은적 없나요?" - P251

그 말에 마키 씨는 놀랐습니다. <보름달의 마녀>는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작품이었습니다. 당시의 자료는 남아 있지 않았거니와, 그림의 제재와 도서실의 책을 통해 『천일야화』에서 촉발됐을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 P252

"그래요, 거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지요 씨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 합니다.
『열대』는 『천일야화』의 이본이니까." - P252

. 작업 테이블과 이젤이 드문드문 놓여 있을 뿐 다른 가구는 없었고, 벽 가까이 상자와 액자가 쌓여 있었습니다. 화백이 작업했던 당시의 모습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마니시 씨와제가 전기난로를 쬐는 동안 마키 씨는 벽 앞의 상자에서 손전등을 꺼냈습니다.
"가실까요, 할아버지 도서실은 이 뒤에 있어요."
작업실 뒤는 어둠에 잠겨 있었습니다. - P253

마키 씨가 불을 켜자 천장의 전등에 불이 들어왔습니다.
외관과는 달리 아주 편안해 보이는 방이었습니다. 바닥에는페르시아 양탄자를 깔았고 일인용 갈색 소파와 원형 사이드 테이블이 놓여 있고 창가에는 책꽂이와 고풍스러운 레코드플레이어가 있었습니다. 쥘 베른의 『해저 2만리』에 등장하는 잠수함 노틸러스호의 도서실이 생각났습니다. - P254

"이 도서실에 있는 책은 아버지 서재에 있었던 거예요. 아마 마키 선생님이 인수하셨겠죠."
나가세 에이조 씨의 장서.
당연히 마키 씨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요. 내가 외국에 가 있는 동안 아버지가 장서를 처분하고는 경위를 이야기하지 않은 채로 돌아가셨으니까요…………. 설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너무 반가워요." - P255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연 순간, 바닷바람 같은 냄새가 나더군요. 왠지 모르게 오싹해서 서둘러 스위치를 켰더니불은 아무 문제 없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지요 씨가 없었어요."
이마니시 씨가 의심스레 중얼거렸습니다.
"잠겨 있던 방에서 사라졌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저도 여우에 홀린기분이었어요.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없었으니까요." - P256

"이 도서실엔 마물이 살고 있다."
제가 중얼거리자 이마니시 씨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습니다.
"마물이 지요 씨를 잡아먹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저희는 마물의 정체를 모르니까요."
마키 씨는 소파에 앉아 팔걸이에 턱을 괴었습니다. - P257

우리는 분담해서 도서실 구석구석을 살펴봤습니다. 테이블과 소파를 이동하고 양탄자를 들추고 책꽂이의 책을 빼봤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비밀의 문 같은 건 없었습니다. 창문에는쇠창살이 있으니 그쪽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 P257

"......도서실의 문이 닫힌다."
"네?"
"저를 잠깐 여기 혼자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카드에 쓰인 대로 도서실 문을 닫고 지요 씨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 보자고 생각한 겁니다. - P258

"마물이 나타나 저를 잡아먹을까 봐 그러십니까?"
제가 농담조로 말하자 이마니시 씨는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런 일은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 P258

조만간 마키 씨도 어딘가에서 『열대』를 만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이마니시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대』의 책장을 넘긴 그들 앞에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지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그들만의 『열대』인 겁니다.
"당신의 『열대』는 당신만의 것입니다."
저는 마키 씨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도서실 문을 닫았습니다. - P259

쓰여 있던 내용을 다시 한번 읽어봤습니다. 그곳에는 제가 교토에서 경험한 일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마지막 카드의 마지막 줄은 ‘대단원‘. 그게 끝입니다.
대단원은 연극이나 영화, 소설 등의 결말을 의미하고, 특히
‘모든 게 잘 마무리 된다‘라는 해피엔드를 가리킵니다. - P260

『열대』는 『천일야화』의 이본이니까.
지요 씨는 마키 씨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때 소박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천일야화』는 어떻게 끝이 날까. - P260

마치 천일야화』 안에 또 하나의 『천일야화』가 존재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안의 『천일야화』 안에도 또 하나의 『천일야화』가 존재하고, 또 그 안에도....... 그런 망상이 머릿속에 떠올라 바닥을 알 수 없는 구멍을 들여다본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그때 문득 전등이 깜박였습니다.
저는 숨죽이고 긴장했습니다. - P263

램프 불빛이 흡사 스포트라이트처럼 테이블 위에 있는 노트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늘 저와 함께 있었던 노트. 거기에는 『열대』와 관련된 온갖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P264

그 순간 저는 제가 무인도 모래사장에 서서 광대한 바다를 앞에 둔 듯한 착각을 맛봤습니다.
"눈을 감아요. 마음속으로 그려봐요."
지요 씨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곳에 펼쳐진 것은 상상의 세계, 『열대』의 세계였습니다. - P264

저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펜을 들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그때 거대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습니다. - P265

제 4장, 눈에 보이지 않는 군도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내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주위는 어둠에 싸여 있고 파도가밀려왔다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상황을 파악할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 P269

나는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며 일어나서 뺨에 묻은 모래를 털어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여기는 어디지?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실마리를 찾아 입고 있던 옷가지를 살펴봤지만, 입은 것이라곤 가죽점퍼와 셔츠, 바지뿐 주머니에는 지갑조차 없었다.  - P261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멍하니 있는데 앞바다에 기이한것이 나타났다.
소리도 없이 미끄러져 가는 작은 2량 열차였다. 모래사장에서 기껏해야 이백 미터쯤 떨어져 있어 동틀녘의 바다 위에 비치는 차창 불빛이 선명하게 보였다. 왠지 모르게 향수가 느껴지는 정경이었다.  - P271

나는 바다를 왼쪽에 두고 홀로 모래사장을 걸었다.
열차는 대체 뭐였을까. 그 정도로 똑똑히 보였는데 환영일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열차가 보이지 않자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혹시 꿈을 꾸고 있나? - P272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인가.
보이는 곳이라곤 굽이지며 뻗어가는 하얀 모래사장뿐이었다. 왼편은 수평선까지 아무것도 없는 광대한 바다, 오른편은정체를 알 수 없는 열대의 숲이었다.
아무리 모래사장에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해안을 벗어나 숲속에 발을 들여놓을 용기는 없었다. - P272

 나는 안으로 들어가 봤다.
바다를 내다보는 유리창 앞의 작은 나무 책상에 낡은 수첩과공구, 쌍안경이 놓여 있었다.
나는 땀을 닦으며 지저분한 창문으로 밖을 내다봤다.
녹색을 띤 파란 바다와 길게 뻗은 잔교가 보였다. 배가 한 척도 없다는 게 묘하게 느껴졌다. - P273

나는 쌍안경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잔교 끝까지 걸어가 앞바다를 봤다.
작은 섬이 있었다.
그런데 그 섬이 매우 기묘했다.
파도에 삼켜질 것처럼 얄팍해서는 모래사장이 거의 대부분인데 야자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묘한것은 야자나무 그늘에 빨간 콜라 자동판매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 P274

나는 잔교에 주저앉아 바다를 향해 다리를 늘어뜨렸다. 맑은 바닷물 속에서 바닷말이 흔들리고 물고기가 헤엄쳤다.
"이거야 원. 이제 살았군."
나는 안도하며 남자를 기다렸다.
그게 ‘학파의 남자‘ 사야마 쇼이치와의 첫만남이었다. - P274

그는 잔교에 보트를 매며 물었다.
"댁은 어디서 온 거지?"
"그건......."
(중략)
"말할 수 없나?"
"저도 모르거든요." - P273

"기억나는 게 아무것도 없나?"
"정신이 들었더니 저기 모래사장에 쓰러져 있었는데요." 나는 바위땅 쪽을 가리켰다. "그보다 더 전 일은 아무것도 생각이안 납니다."
"어젯밤에 폭풍이 불었지."
"난파된 걸까요." - P276

"여기는 섬입니까?"
"아, 그것도 모르는군. 여기는 섬이야. 자세한 설명은 ‘관측소‘로 돌아가서 해주기로 하고…………. 그나저나 난 사야마 쇼이치라고 해. 도와주는 대신 댁은 내 조수가 되어 줘야겠어."
"・・・・・・ 조수라고요?" - P276

"네모 군, 설마 마왕의 자객은 아니겠지?"
바닷바람이 그의 뻣뻣한 곱슬머리를 날렸다.
"......마왕? 자객?"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자 사야마는 긴장이 풀린 것처럼 웃었다.
"아니겠지. 자객치곤 너무 얼이 빠졌으니까." - P277

"언제부터 이 섬에 있었죠?"
내가 묻자 사야마는 풀줄기를 씹으며 이야기했다.
"그게 언제였더라. 이젠 모르겠군. 이런 섬에서 혼자 살다 보면 모든 게 모호해지거든. 이 부근은 우기도 없고, 애초에 계절의 변화란 게 거의 없어. 하루하루가 판에 박힌 것처럼 지나가 정말로 오늘 다음엔 ‘내일‘이 오나 혹시 오늘 다음에 ‘어제‘가오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고." - P278

후미에서 산꼭대기의 관측소까지 30분 정도 걸렸다.
"어이구, 겨우 다 왔네."
사야마는 기쁜 듯이 말했다.
숲을 베어 인공적으로 만든 듯한 초지 안쪽에 사야마 쇼이치가 말하는 관측소가 있었다. 꽤 그럴싸한 건물이었다.  - P279

건물 입구에는 좌우로 열리는 커다란 자동문이 있고, 문 위에 박힌 금속 플레이트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어째 수수께끼 같은 말이군요."
"의미심장하지. 이 관측소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저기 있었던 거야." - P279

 오래된 탐정 사무소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법한 게 있는가 하면미래의 우주 정거장에 있을 법한 것도 있었다. 전부 제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놓여 있었다.
"왜 의자가 이렇게 많죠?"
"사람에게는 저마다 앉아야 할 의자가 있으니까."
사야마는 로비를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갔다. - P280

 아까 사야마를 만난 후미와 잔교가 보였다. 앞바다에는 자동판매기가 있는 작은 섬이떠 있었다. 그 밖에 보이는 것이라곤 울창한 밀림과 섬 하나 없는 바다 그리고 파란 하늘뿐이었다.
작은 섬이지? 두 시간이면 해안을 따라서 한 바퀴 돌 수 있어, 해안선을 조사하는 것도 내 일이라서." - P281

"자기가 어디에 있는 건지 궁금하겠지. 정확한 위치를 알려줄 순 없지만 이 섬은 대략 북위 28도에 위치하고 있어. 적도바로 밑은 아니지만 해류의 영향도 있어서 기후 면에서는 열대라 해도 될 테지. 1년 내내 기온이 섭씨 15도 밑으로 내려가는일은 없어. 아까도 말했다시피 우기다운 우기는 없지만 가끔씩맹렬한 스콜이나 폭풍이 올 때가 있어. 어젯밤 폭풍은 꼭 세계의 종말 같았지. 아주 무시무시했어." 
나는 폭풍을 만난 배를 상상해 봤다. - P282

"자네는 얼마 동안 여기 관측소에서 살게 될 거야. 죄수가 아니니까 일이 없을 땐 마음대로 지내도 돼. 관측소 안을 자유롭게 다녀도 되고. 하지만 밤에는 밖으로 나가지 말아줘. 위험하니까."
"맹수라도 나옵니까?"
"그런 거지."
"주의하죠." - P284

"본 적 있는 여자야?"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실제로 기억에 없었다.
"그런 것치곤 꽤나 열심히 쳐다보던데. 반했군?"
"설마요."
"감출 것 없어. 자네 기분은 잘 아니까."
나는 사진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사야마는 "그냥 갖고 있어"라고 했다. - P285

창가에 작은 책상과 전기스탠드가 있었다.
스탠드를 켜자 어두운 창에 내 얼굴이 비쳤다.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지저분한 셔츠를 입고 수염이 꺼칠하게 자랐다. 이게 정말 나일까. 낯선 타인으로만 보이는데.
너는 대체 누구지?
나는 오랫동안 그 모습을 응시했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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