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 - P957

2.
우린 공원에서 소련 백과사전을 읽고 있었어. 스탈린이 살아 있던 시절에 나온 사전이었지. 너희 어머니가 가지고 계시던 책 말이야. ‘만국의 아버지‘는 다양한 재능을 갖고있었지만, 심지어 위대한 과학자이기도 했던 모양이야. - P358

좋아, 그 일에 관해선 내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거든. 유대인 여자애 두 명이 1960년대에 나온 두꺼운 철학 사전 한 권을 가지고 공원으로 산책을 갔어. 그 사전에는 우스꽝스러운 내용이 많아서, 걔들은 나무 그늘에서그걸 보고 웃으면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지. - P359

3.
가끔은, 학교가 끝나면 우린 그냥 작별 인사를 할 수가없었어. 그래서 노예들이나 입을 것 같던 그 멍청한 교복을 입고 체르니셰우스카야 거리에 있는 나무 아래서있었지. 교복 동복의 갈색은 마치 [빈 칸을 채우시오]. 마치진흙 속 깊숙한 곳에서 초콜릿 스펀지케이크를 파먹고 있는 지렁이들 같았지. - P362

4.
네 열여섯 번째 생일. 내가 준 꽃들, 네 키만 했던가, 어쩌면 더 컸던 것 같네. 끌어안고 깔깔 웃었지. 우리 그때이런 말을 했잖아, 그 꽃들이 "술 취한 올림픽 수영 선수들" 같아 보인다고. 잔인한 낙천주의 - 이런 표현 들어본 적 있니? - P363

6.
가끔은, 학교가 끝나면 우린 그냥 작별 인사를 할 수가 없었어. 아니면 얼른 작별 인사를 하고 잽싸게 집으로 가서 곧바로 서로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지. 너도 계단 한 층을오르고, 나도 계단 한 층을 오르고, ‘제압‘해야 하는 언니는 너한테도 한 명, 나한테도 한 명. - P366

네가 인터넷 여기저기를 뒤져 가며 나를 찾아보고 나서 나한테 전화했던 게 몇 년도였더라? 2003년? 2005년이었나?  - P367

 그 연구자는 내 "감정적 강렬함"의 예를 여러 가지 들면서 그것들이 내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시공간을 드러내 준다고 쓰고 있었어. 내 세번째 책에서 몇 단락을 인용했더라고. 맥 빠지게 주절거린 끔찍한 부분들이었는데, 지금 내가 잘난 척하는걸까? 그런 것 같네. 문득 궁금해진 게 있어. 화가가 자신이 옛날에 그림을 그려 놓은 캔버스를 무심코 보게될 때도 이런 식으로 두 눈이 화끈거릴까. - P370

8.
지금 훑어보고 있는데, 네가 처음 몇 년 동안쓴 편지들은 다 있네. 1990년, 1991년, 1992년 그때 말이야. 그 뒤로는 한 통도 없어. 네가 나한테 편지 쓰는 걸 그만뒀었나 봐? 모든 걸 그만뒀었나? 네가 모든 게 끝났다는결론을 내렸던 때가 그때였니? 난 기억해. 그말. 우리가 가진 거라곤 과거뿐이고 그걸로는충분하지 않아라는 말. - P370

10.
CNN 라이브, 스튜어트 루니가 래리 킹에게

(후략) - P374

11.
우리 4학년 때 담임이었던 라리사 페트로우나 선생님은 나무 뒤에서 담배를 피우곤 했어. 혼자 살았고, 선생님이 숨는 것과 담배를 피우는 것, 숨어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내가 그분에게서 유일하게 흥미롭다고 느낀 점이었어. - P376

 기억나는지 모르겠는데 학교에 찾아와서 내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어 주고 ‘오토‘ 카탈로그 한권을 선물로 줬어 (그때 독일의 패션 브랜드 카탈로그들은 정말 멋졌는데). 난 우리 언니의 웨딩드레스로 만든 치마에 수수한 흰색재킷, 검은색 상의를 입고 있었어. 너희 언니가 걸어 준 진주 목걸이도 하고. - P377

13.
디나 루비나⁶⁹는 이민을 떠난 지 수년 뒤에 모스크바의어느 서점에 잠깐 들렀다. "끔찍한 충격이었어요. 모든책이 이미 쓰인 뒤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전부 출간돼있었어요. 이미 책들이 너무 많아서 뭔가 더 쓸 필요가전혀 없었죠. 무언가를 쓰기로 마음먹으려면 독자를 위해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어요. 물러서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죠." 우리는 같은 날 루비나의 인터뷰를 지켜봤지. 나는 여기 (거기)서, 너는 거기(여기)서.


69Dina Rubina(1953~). 타슈켄트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던 그는 소련에서 작가로 활동하다 1990년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 P379

14.
(전략)
그 부츠를 신은건내 평생을 통틀어 서너 번 정도일 거고 그이상은 절대 아니야! 부츠는 조심스럽게 묶어 놓은 실에 매달린 채로 아직도 창고에 걸려 있어 (그래야 손으로 만든 장식이 들어간몸통에 주름이 생기지 않는다나, 맙소사). - P381

- P382

그다음 날 밤에는 잠이 안 와서 남의 집 부엌에서 (내가 어디서 누구랑 사는지는 기억하지?) 거의 담배 한 갑을 다 피워 없앴지 뭐니(1주일치 일용할 양식이었는데! 젠장!). - P383

15.
난 새로운 삶을 살면서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테고 그들은 (질문을 한다거나 해서) 너에 대해 알게 될 거야. 그때마다 난 깜짝 놀라며 당혹스러워하겠지. ‘도대체 어떻게......?‘ - P384

16.
2008년에 찍은 그 사진들은 내가 지웠어. 네 사진은 기꺼이 잘라 내서 보관하려고 했지만 그건 불길한 행동이잖아. 내가 도저히 못 보겠는 건 내 얼굴이야. 그 무렵의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는 내 얼굴. - P385

18.
(전략)
그 애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난 정말로그런 생각을 해. 5년 동안 금요일마다 그랬지. 나는 술도 마셔 보고, 잠도 자 보고, 일도해 보고, 걷기도 해 봤어. - P388

최악의 요일은 토요일이야. 온갖 두려움과 걱정이 머리 위에서 눈덩이처럼 떨어져 내리거든.  - P389

머릿속에 벽돌처럼 박혀 있는 말이잖아. "고양이는 자기가 먹은 게 누구 고기인지 안다"⁷⁰라는 말이랑 같이. 그리고 어떤 사람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을 "높은 산 속으로" 데려가라는 (V.S. 비소츠키⁷¹의) 말도 있지. - P392

70
러시아 속담. ‘죄를 지은 사람은 다른사람이 고발하지 않아도 양심의 가책때문에 말이나 행동을 통해 스스로의 죄를 드러내게 된다‘는 뜻이다.

71
Vladimir SemyonovichVysotsky (1938~1980). 음악가이자작가, 배우. 체제 친화적이지 않은 작품 활동을 하면서 동료 예술가 및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 P392

소금의 중량에 대한 얘길 다시 이어가 볼게. 내게 필요한 소금은 딱 한알이야. 그거면 돼 (확실히 몇몇 사람들은 남들보다 빨리, 금방 파악할 수 있거든). 그런데 만약 B가 집에 와서 "나 방금 어떤 상점 점원하고 친해졌어"라고 행복하게 선언한다면(그 애들은 서로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텐데 말이야), 그럴 때 나는 그 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을까?  - P394

21.
 PP우크라이나에 대한 SMM⁷⁴은 다음과같은 사항들에 관한 최신 정보를 매일 제공한다. 정전 위반 행위/포격 상황 및 민간인사상자/병기 철수 상황 / 안전지대에 배치된 무장 전투 차량과 대공 병기/물 공급 중단 상황 / 지뢰 및 지뢰 위험 신호, 부비트랩과 UXO⁷⁵에 관한 정보.
인터넷에서 무료로 읽어볼 수 있다.
아무런 승인 절차도 필요 없다.

74
특별 감시 임무Special MonitoringMission의 약자. 유럽 안보 협력기구는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분쟁이 본격화한 2014년에 이 특별 감시단을파견했다. 감시단은 러시아의 침공이 본격화한 2022년 3월에 철수했으며,
업데이트 역시 중단되었다.

75
Unexploded ordnance의 약자.
불발탄을 뜻한다. - P398

어젯밤에는 친구네 집에서 잤어. 친구가 멀리갈 일이 있었는데 아들들을 봐 줄 사람이없었거든. 밤중에 끔찍한 폭풍이 시작됐어.
천둥도 쳤고 번개가 수직으로 내리꽂히더라.  - P399

22.

10세 이하 어린이 축구팀들의 축구 경기가 로드 보호지역⁷⁶에서 열렸어. "난 인간 방패다!" - 이건 센터백을 맡고 있던 내 아들이 특정인을 염두에 두지는 않고 한말이야.

76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보호지역 Reserve은 공원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로드 보호 지역 역시지역민들을 위한 공원에 해당하는 장소다. 이 표현은 앞선 21번 챕터가 선보이는 안전 구역 개념과 기묘한 방식으로 공명한다. - P400

23.
(전략). 우리가 만나기 전에 네가 문자를 보냈어.
"생일 축하해. 다시는 만나지 말자." 생일에 관해서라면 우린 전에도 그랬던 적이 있잖아, 아닌가? - P402

2005년 이전의 네 편지랑 사진들 전부를 잃어버렸어. 이사를 하다가 사진 앨범들이 든 가방 하나가 없어져 버렸거든. - P403

24.
자말라의 <1944>, 534점.⁷⁷ 혹시 너도 보고 있니?


77

2016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우크라이나 대표 자말라가 우승한 일을 가리킨다. <1944>의 가사는1940년대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크림 타타르족을 강제 이주시킨 일을배경으로 하고 있다. - P404

26.
75년 전부터 -75년은 우리 어머니의 나이,
우리 어머니의 평생과 같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지, 얼마나 많은 포위 공격이 더 발생했는지 너한테 말할 필요는 없을 거야. 그런데 그 일들은 아직도 그자리에 머무르고 있어.  - P408

유튜브에 있는 관련 영상은 다 봤어. 거기에사로잡혀 버렸어. 정신적으로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말이야. 그 여러 영상 중 하나에서는 사람들이 땅에 떨어져 얼어붙은 참새를 두고 싸우고 있었어.  - P409

27.
(전략)
네가 떠나던 날...... 내 열여섯 번째 생일…네가 내게 준 노란 장미 꽃다발………… 우린 그장미 가운데 한 송이를 가르시나에 있던 아파트의 네가 살던 동 입구 옆 눈밭에 기념으로 꽂아 놓았지. - P412

(전략)
 그러다 어떤 사람이 날 플랫폼으로 다시데려갔고, 우리 셋은 결국 너희 집에 가서 네가 날 위해 남기고 간 그레벤스치코프⁷⁸의 음반들과 ‘꼬마 과학자의 화학 실험실‘ 세트를 챙겼지.

78
Boris Grebenshchikov(1953~).
1972년에 결성한 록/포크 밴드아쿠아리움Aquarium을 통해 소련시절부터 활동해 온 러시아 음악가.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음악 활동을해온 그는 현대 러시아 밴드 음악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 P413

28.
그날 다른 사람들은 전혀 기억이 안 나. 그냥 너랑 나 둘만 있었을 수는 없다는 거 아는데.
"이민이란 내장이 튀어나와 길 위에 펼쳐지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할복자살 같은 거죠." 우리는 같은 날디나 루비나의 인터뷰를 본다. 너는/나는 거기 (여기)서. - P418

29.
우리는 절친한 친구였다. 나는 우리 얘기를 썼다. 이렇게. "죽지 않아 줘서 고마워. 하지만 이건 개인적인 편지속에서 오직 너에게만 하는 말이야." - P419

32.
우리가 만나기 전에 너는 말했지. "우리 다시는 서로 만나지 말자. 그럴 필요 없잖아. 의미도 없고." 난 말했어.
"나한테 한 시간만 내줘." 그건 한 시간이라는 뜻이 아니었어. 네 삶의 남은 시간 전부라는 뜻이었지. - P422

역사는 반복된다 - P145

오늘 아침, 이라기보다는 얼마 전의 어느 날 아침, 나와 같은 열차 칸에 탄 두 명의 남자가 고개를 든다. 50대 남자 두 명인데 실크로 된 것 같은 수수한 스타일의 넥타이를 맸다. 교통 단속 카메라가 터질 때처럼 황급한 깨달음이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고, 곧 그들은 다음 역이름이 방송으로 나오기도 전에 서로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웃고 있다. 이게 얼마 만이야?  - P146

쉿.
내 앞에 놓여 있는 건 시간이다. 시간은 강물이아니다. 시간은 기차에서 만난, 몸에 와 닿는 서류 가방을 느끼며 서로를 끌어안는 두 명의 낯선 사람이다. - P147

나는 그 아이들이 교외에서 일어난 불가사의한 범죄의 목격자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냥 법학을 공부하는, 현장 학습을 나와 지루해하는 학생들일 뿐이었다. - P147

오전 내내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별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음주 운전 재범 판결을 받은 남자 다음으로는 의류 브랜드 ‘엘우드‘의 매장 관리자가 나오는데, 시험관 아기 시술이 잘되지 않아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여자다. 이어서 옷을 잘 차려입은 소말리족 남자가 역시 옷을 잘 차려입은 소말리어 통역사와 같이 나온다. 남자는 안전벨트 미착용으로 기소되었다. - P149

"내가 저지를수 없겠다고 생각되는 범죄 같은 건 없다." 괴테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내 관심사다Homo sum: humani nil a me alienumputo." 이것은 고대 로마의 극작가 테렌티우스가 한 말이다. "동화 같은 결말은 없어요." - P149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이니까요." - P150

1주일 전, 나는 그 카페에서 부치안 판사 옐레나 포포비치를 만났다. 그때 그는 치안판사가 된 지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이해하게 된게 있다고 말했다. 바로 자기 앞에 출두하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니라 그저 위기에 처한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처한 ‘위기‘ 속에는 희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 P150

집에 오는 길, 반쯤 빈 오후 열차 칸에는 웃음을 쏟아 내는 사람도, 옛 친구의 무릎 위로 쓰러지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혼자였다. 가방을 들고, 재킷을 입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가지고, 이리저리 헤매는 눈빛으로, 울리지 않는 커다란 휴대 전화를 두 손으로 꾹꾹 누르면서. - P151

걱정이라고는 없던 순수한 아이가 빛나는 두 눈을 지닌 청년이 되고, 그러고는 곧바로 누군가의 부모가 되고, 그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두 눈도 마찬가지로 금세 빛나게 된다. 그다음 장면에 등장하는 그들은 앞서 나온 인물과 같은 사람이지만, 그 두 눈은 흐려져 있고, 머리칼은 희끗희끗해졌고, 몸은 뚱뚱해지거나 말라 있다. - P151

아무리 허술한 감독이 만들었다 해도,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허구라 해도, 삶에서 죽음까지를 3분 안에 보여 주는 이런 영상을 보는 일, 그러니까 에어 매트리스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듯 인간의 삶으로부터 빨려 나가는 시간을 쳐다보는 일에는 어딘가 참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 P151

오랫동안 나는 그런 경험이 왜 고통스러운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이해하게 되었다. 그건 시간 때문이었다. 시간은 모든 것을 괜찮게 만들어 준다. - P152

반복되는 상황 속에는 감지할수 없을 만큼 미세한 차이가 존재하며, 그 차이들은 똑같이 반복되는 일들을 때로는 빌어먹을 것들로 느껴지게 만들고, 또 때로는 고마운 것들로 느껴지게 만든다. - P152

일어나기, 머리빗기, 빵 굽기, 태양이 하늘로 솟아오르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기. 수없이 흘러가는 계절들. 온화하게 반복되는 매일의 활동 속에는 보이지 않는 그물이던져져 있고, 그 그물은 사람들을 떠받치고 보호한다.
왜냐하면 반복되는 것들―들뢰즈가 말한 바에 따르면
"바꿀 수도 대체할 수도 없는 특이성들"은 결코 똑같을 때가 없기 때문이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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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암컷 신화

바람둥이 암컷에 대한불편한 발견 - P106

암새의 90퍼센트는 비밀리에 바람을 피운다. 커플을 이룬 새의 새끼 4분의 3이다른 둥지 수새의 친자임이 밝혀졌을 때 학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암컷이 진심으로 원했을 리 없어. 진화적으로 여자는 신중하고 소극적이라고!" - P101

 나는 사자 전문가인 루딕 지퍼트Ludwig Sief.
ert[와 함께 마사이 마라 국립공원에 있었다. 지퍼트는 오디오를 이용해 사자의 의사소통을 해독하는 시범을 보여주고 있었다. - P103

지퍼트는 이 사자들을 알고 있었다. 수컷 둘은 형제이고 암컷은 아마 발정기 상태로 둘 중 하나와 어울리던 중일 거라고 했다.
암사자가 제 짝을 버리고 우리가 낸 소리 근처에 남은 이유는 포효의 당사자와 정사를 원했기 때문이다. 사자의 여자친구를 빼앗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암사자가 다른수컷과의 밀회를 위해 자고 있는 파트너한테서 슬금슬금 멀어지는 일은 드물지 않게 목격된다.¹ - P104

3장 조작된 암컷 신화

1 P. Dee Boersma and Emily M. Davies,
Why Lionesses Copulate with Morethan One Male‘ in The American Natu-ralist, 123: 5 (1984), pp. 594-611 - P459

동물학과 학생이었을 때 나는 성적 방종이 생식세포에 명시된 수컷의 생물학적 책무라고 배웠다. 이형접합Anisogamy-암수배우체 크기의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말. 그리스어로 ‘같지않음‘과 ‘결혼‘이라는 뜻이다-은 암수를 정의할 뿐 아니라 그들의행동까지 결정한다고 여겨진다. 정자는 작고 양이 많지만 난자는크기가 크고 수가 제한된다. 그래서 수컷은 방종하고 암컷은 까다롭고 정숙하다는 말이다. - P105

조작된 정절과학의 눈으로도 암컷이 항상 병적으로 정숙한 것은 아니었다. 동물학의 탄생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집에서 기르던 암탉이신중하게 선택한 한 마리 수탉 대신 여러 수놈과 관계를 맺는 게일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⁴ - P106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에서 요약된 다윈의 성선택 이론은수컷이 ‘더 강한 성적 열망을 지녔고 ‘암컷 앞에서 끈기 있게 자신의 매력을 보여주기 위해‘⁶ 서로 다툰다고 말함으로써 밀스 앤드분에서 출간한 듯한 로맨스 소설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 P106

6 ibid., p. 256 - P460

 성역할의 불변성에 대해 다윈은 모두 정자와 난자의 본질적인 차이로 귀결되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정자는 이동성이있지만 난자는 제자리를 지키며, 그것이 ‘적극적인‘ 남성성과 ‘소극적인‘ 여성성의 기초가 된다고 했다.⁸ - P107

8 Zuleyma Tang-Martínez, ‘RethinkingBateman‘s Principles: Challenging Per-sistent Myths of Sexually Reluctant Fe-males and Promiscuous Males‘ in Jour-nal of Sex Research (2016), pp. 1-282223 - P460

다윈의 성선택 이론은 이런 발상들과 일치했다. 그럼에도 자연선택보다 훨씬 심한 논란을 불러왔다. 2장에서 보았듯이 ‘암컷의 선택‘이 아킬레스건이었다.  - P107

베이트먼은 수컷은 열정적이고 암컷은 수줍음이 많다는 다윈의 ‘일반 원칙⁹을 확인하기 위해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그는 다윈이 제시한 젠더화된 성역할은 실험으로 뒷받침되지 못하고 오로지관찰에만 기반을 두었기에 이 위인이 "성의 차이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쩔쩔맸다."¹⁰라고 지적한 바 있다. - P108

9
Darwin, The Descent of Man, p. 257

10 A. J. Bateman, ‘Intrasexual Selection inDrosophila in Heredity, 2 (1948), pp.
349-68 - P460

베이트먼은 각각 다른 신체 돌연변이를 지닌 초파리 수컷3~5마리와 같은 수의 암컷을 유리 용기에 넣고 그대로 두었다. 그곳은 ‘털북숭이 날개‘, ‘강모‘, ‘이상소두(일명 눈이 없는 작은 머리)‘
같은 기괴한 이름이 붙은 돌연변이 초파리들에게 제공된 일종의<러브 아일랜드>였다. - P108

베이트먼의 기괴한 짝짓기 파티는 다소 섬뜩하긴 했으나 친자 검사나 게놈 해독 이전 시대에 유전을 공부할 수 있는 훌륭한방법이었다. 덕분에 그는 초파리의 짝짓기 과정을 직접 관찰하지 않고도 누가 누구를 수정시켰는지 추정할 수 있었다.  - P109

베이트먼은 64번의 실험 결과를 두고 두 개의 그래프를 그렸다. 생식 적합성(예: 자손의 수)을 짝짓기 횟수에 대해 나타낸 그래프였다. 두 그래프 중에서 첫 번째 그래프는 이제 전 세계 동물학교과서에 수백만 번 이상 실린 전설이 되었다. - P109

잘 알려진 ‘베이트먼의 경사도Bateman‘s gradient‘는 수컷에게 경쟁이란 종마가 되느냐 숫총각으로 남느냐의 여부를 가리는 과정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암컷은 생식적 결과물에 별 차이가 없었다.
베이트먼의 결과에 따르면, 번식에 가장 성공한 초파리 수컷은 가장 성공한 암컷보다 자손을 세 배 가까이 많이 생산했다. 또한 수컷의 경우 전체의 5분의 1이 전혀 자손을 낳지 못한 반면 자손을낳지 못한 암컷은 4퍼센트에 불과했다. - P110

 그는 성역할의 이분법, 즉 수컷의 ‘무분별한 열망‘과 암컷의 ‘까다로운 수동성¹¹‘ 이 동물계 전체에서 일반적인 규범이라고주장했다. 베이트먼은 "일부일처를 따르는 종(예: 인간)에서 조차이런 성별 간 차이의 법칙이 적용될 수 있다."라고 결론지었다. - P110

11 A. J. Bateman, ‘Intrasexual Selection inDrosophila in Heredity, 2 (1948), pp.
349-68

베이트먼은 "일부일처를 따르는 종(예: 인간)에서조차이런 성별 간 차이의 법칙이 적용될 수 있다."¹²라고 결론지었다. - P110

12 A. J. Bateman, ‘Intrasexual Selection inDrosophila in Heredity, 2 (1948), pp.
349-68 - P460

하지만 그렇게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으니, 24년 뒤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Trivers 라는 하버드대학교동물학자가 베이트먼의 실험을 1만 1,000번 이상 인용된 가장 영향력 있는 생물학 논문으로 지정한 것이다.  - P111

트리버스의 논문은 마침 사회생물학(현재는 행동생태학으로도 알려졌다. 동물의 행동에 초점을 맞춘 진화생물학의 새로운 분야이다.)이 탄생할 무렵 출판되어 그 탄탄한 토대가 되었다. 베이트먼의경사도와 함께 ‘빼는 여성과 들이대는 남성‘¹³과 같은 장제를 실은 교과서가 생물핫도의 성경이 되었다. - P111

13 Margo Wilson and Martin Daly, Sex,
Evolution and Behaviour (Thompson/Duxbury Press, 1978) - P460

《플레이보이》잡지에서 찬양한 취지가 인간 행동을 진화로설명한 진화심리학에서 계속해서 되살아났다. 앨프리드 킨제이 ALfred Kinsey에서 『욕망의 진화』의 저자 데이비드 M. 버스David M. Buss까지 과학자들은 이런 행동이 이형접합으로 규정된 동물계의 짝짓기 전략을 닮았다는 가정하에 남성의 난잡함에 초점을 맞춰왔다. - P112

어떤 이들은 심지어 강간, 혼외정사, 가정 폭력 같은 최악의 행동까지도 진화적으로 적응된 형질이라고 정당화했다.¹⁵ - P112

15 Craig Palmer and Randy Thornhill,
A Natural History of Rape (MIT Press,
2000) - P460

바람피우느라 바쁜 새들

붉은날개검은새 Agelaius phoeniceus는 북아메리카 농부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이다. 매년 봄이면 진홍색·황금색 견장으로 어깨를 장식하고 날개에 검은색 윤기가 차르르 흐르는 새가 밀밭에 내려와이 나라를 대표하는 곡물을 쪼아 먹는다. 1960년대에 농부들의 반응은 단순했다. 보이는 족족 쏴버린 것이다. - P113

(전랴략). 따라서 미 정부 과학자들은 다소 파격적이기는 하지만 매년 봄에 벌어지는 집단 살상에 대한 좀 더 인도적인 해결책으로 수컷의 정관수술을 제안했다. - P114

. 테니스공보다 조금 더 무거운 새를 대상으로하기에는 쉽지 않은 수술이었다. 수술받은 새들은 마취에서 깨어난 다음 원래 살던 곳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빠르게 회복했으며눈에 띄는 부작용은 없었다.¹⁶ - P114

16 Olin Bray, James J. Kennelly and Jo-seph L. Guarino, ‘Fertility of Eggs Pro-duced on Territories of VasectomizedRed-Winged Blackbirds‘ in The WilsonBulletin, 87:2 (1975), pp. 187-95 - P460

그런데 얼마 뒤에 조사해보니 정관수술을 받은 수컷의 영역에서 낳은 알의 69퍼센트가 새끼를 까는 유정란이지 않은가. 이런놀랍고도 실망스러운 결과는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가장 가능성 있는 가정은 까다롭던 수술이 아니나 다를까 실패했다는 것이다. - P114

다음으로 과학자들은 암컷이 불임수술 전에 수컷에게 받았던 정자를 보관했다가 나중에 수정에 사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 P115

그렇다면 남은 설명은 한 가지였다. 암컷이 제 영역 밖에서거세되지 않은 수컷과 정사를 한 것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나리오였다. 1970년대 인간 세계에서는 성 혁명이 한창이었는지 몰라도 명금류 암컷은 아직 그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다. "모든 참새목 아과(명금류)의 10분의 9(93퍼센트)가 대개 일부일처를 따른다."
권위 있는 조류학자 데이비드 랙 David Lack이 1968년에 쓴 말이다. "‘일처다부제‘*인 좋은 알려진 바 없다."¹⁷

* 용어를 왜곡하지 말자. 복혼polygamy은 어느 성이든 하나 이상의 배우자가 있는 짝짓기패턴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한편 일처다부polyandry는 암컷이 하나 이상의 배우자와 짝짓기하는 특정 형태의 복혼을 말한다. 단어를 풀어서 해석하면 뜻을 기억하기 쉽다. poly‘는 그리스어로 ‘많다‘는 뜻이고 ‘andr‘는 ‘남성‘이라는 뜻이다. 일부다처polygyny는 수컷이 여러 명의 암컷 배우자가 있는 복혼 형태이다. 여기에서도 그리스어가 적용된다. ‘gyne‘는 여성을 뜻한다. 그렇다면 암컷이 하나의 짝만 있는 일부제monandry라는 말도있을 수 있다. 곧 보겠지만 그 용어는 그렇게 많이 쓰일 일이 없다. - P115

17 David Lack, Ecological Adaptations forBreeding in Birds (Methuen, 1968) - P460

붉은날개검은새와 같은 몇몇 다처다부의 예를 제외하고 명금류는 오랫동안 일부일처제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그 이유는 이해하기 쉽다. 새들이 대부분 쌍으로 번식한다는 것은 전문가가 아닌 아마추어 탐조가들도 쉽게 아는 사실이다. - P116

. 모리스는 빅토리아 시대의 열성적인 조류학자이자 새에 관한 유명한 책을 쓴 작가로 사람들에게 ‘소박하고 가정적인‘ 유럽종다리 Prunella modularis¹⁹의 수수한 생활방식을 따르도록 격려했다.
이 선량한 목사는 실은 자기가 여성 신자로 하여금 가정을 꾸리기전에 밖으로 나가 연인을 찾고 두 마리 수컷과 250회 이상 짝짓기하도록 종용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 P116

19Reverend F. O. Morris, A History ofBirds (1856) - P460

"다윈이 암컷은 배우자가 하나뿐이라고 했기 때문에 한 세기동안 다들 그렇게 믿어왔어요." 버키드가 말했다. "일부일처가 아닌 게 뻔한데도 사람들은 착오이거나 암컷의 호르몬이 불균형해진 탓에 일어난 일시적 현상이라고 변명하기 급급했지요. 불편한것들은 모조리 카펫 밑에 쓸어 넣고 덮어버린 겁니다." - P117

이제는 암새의 90퍼센트가 일상적으로 다수의 수컷과 교미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 결과 한 둥지에 있는 알의 아비가 모두 다를 수 있다.²¹ - P117

21Marlene Zuk and Leigh Simmons, Sex-ual Selection: A Very Short Introduction(Oxford University Press, 2018), p. 29 - P460

암새는 아주 비밀리에 바람을 피운다. 이들의 이중생활은 동물학자들이 법의학 DNA 지문 분석을 사용해 알의 친자를 확인하고서야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런 신기술을 활용해 명금류 암컷의 정절을 조사한 첫 번째 인물은 퍼트리샤 고와티 Patricia Gowaty다. - P118

"그들은 암컷이 절대 순진하지 않다는 걸 상상도 못했어요.
‘다른 짝을 찾아다닐 리가 없어. 그러니까 그건・・・・・・ 죄악이잖아!‘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있었죠." - P119

한번은 미국 조류협회 회의에서 어느 유명한 남성 동물행동학 교수가 고와티의 연구에 나온 파랑지빠귀는 ‘강간당한‘게 분명하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고와티의 말이, 그건 애초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명금류 수컷은 음경이 없다.  - P119

"명금류는 #미투 운동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고와티의 말이다. "암컷의 협조 없이는 물리적으로 수정이 불가능하거든요."
그 후로 10년 동안 조류 친자 연구의 광풍이 불면서 더는 무시할 수 없는 증거들이 해일처럼 쏟아졌다. - P119

 심지어 팀버키드 같은 조류학자도 암새가 강제적인 혼외정사로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으며,²⁴ 어떻게 암새가 수새를 꼬드겨 한 배우자하고만 짝짓게 하는지를 두고 논쟁했다.
"파고들면 들수록 이해할 수 없는 희한한 청교도적 발상"이라고 매사추세츠주 마운트홀리오크대학교 생물과학 교수인 수전 스미스Susan Smith가 썼다.²⁵ - P120

24 Tim Birkhead and J. D. Biggins, ‘Re-productive Synchrony and Extra-pairCopulation in Birds‘ in Ethology, 74(1986), pp. 320-34

25 Susan M. Smith, ‘Extra-pair Copula-tions in Blackcapped Chickadees: TheRole of the Female in Behaviour, 107: - P460

"암새는 유독 가임기에 소음을 많이 냅니다." 스터치버리가내게 말했다. "그렇다면 아주 어리석거나 적극적인 참가자 둘 중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두건솔새 암컷은 동네의 섹시한 수새를 물색하려고 제 영역을 떠나지만 그런 행동은 가임기일 때만 보인다. - P121

스터치버리는 암새가 자기의 성적 운명과 알의 친부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았다. 하지만 이 선구적인 논문을 출판하기까지 무척 애를 먹었다. "심사위원들이 자꾸 요점이 어긋났다고 지적하는 거예요." 스터치버리의 말이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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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주인장이불빛에 잔을 비춰 보며 말했다. "숙박계에는 개인적인 용무로 여행 중인 상인이라고 기입했더군요. 하지만 상인은아닙니다. 실성한 연금술사, 마법사, 발명가...... 뭐든 가능하지만 상인만은 절대 아니에요." - P52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가 아는 위조지폐범이 있는데, 그 작자는 신분증을 요구받을 때면 꼭 그렇게 행동하더군요." 내가 대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주인장이 만족스러운 듯 대답했다.
"그분의 돈은 위조지폐가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정신 나간 백만장자군요." - P53

"오, 듀 바른스토크르 씨는 모제스 씨와는 완전히 다른경우죠. 그분은 벌써 13년째 매년 이곳을 찾아오시거든요.
그분이 처음에 이곳을 찾으셨을 때만 해도 이 호텔은 평범하게 샬라시*라고 불렸어요. 듀 바른스토크르 씨는 제가담근 술을 몹시 좋아하시죠. 그런데 모제스 씨는 늘 거나하게 취해 계시지만 머무르는 동안 제게서 술을 받아 간 적이한 번도 없어요." - P54

"당신은 철학자군요, 알레크."
"그래요, 페테르, 나는 철학자지요. 나는 시인이자 철학자이자 엔지니어입니다. 혹시 내가 만든 영구기관들을보셨습니까?"
"아뇨. 작동합니까?" - P55

"통통하니 귀여운 아가씨군." 나는 저도 모르게 불쑥중얼거렸다. 벌써 술이 석 잔째인 탓도 있었다. 주인장이사람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기는 하죠." 그가 인정했다.
"심지어 듀 바른스토크르 씨도 참지 못하고 어제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지 뭡니까. 우리의 물리학자도 예외가 아니고요....... - P56

"뭐라고요? 폭력을 휘둘러요?"
"보아하니 채찍 같더군요. 모제스에게 채찍이 있거든요. 사냥용 긴 채찍. 그걸 보자마자 이런 의문이 들더군요.
대체 모제스 씨에게 왜 사냥용 채찍이 필요할까? 경위님은대답을 아시겠습니까?" - P57

"시모네 씨죠, 누구겠습니까. 설마 이 이름을 한 번도 못들어 보신 건가요?"
"못 들었는데요." 내가 대답했다. "서류 위조에 연루된적이라도 있는 사람인가요?"
주인장이 나를 나무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과학계의 국가적인 영웅을 몰라서야 쓰겠습니까." 그가 엄하게 말했다. - P58

그런데 그가 입을 다물었고 나는 벽난로 방에서 누군가의 기척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기척이 느껴진 곳을 힐끔보았다. 그곳에는 듀 바른스토크르 씨의 죽은 형제가 남긴유일한 혈육이 와 있었다. - P59

"실은 겁이 나요." 브륜이 말했다. "누군가 내 방 손잡이를 만지작거렸어요."
"이런, 이런 내가 대꾸했다. "자네 삼촌이셨겠지."
"아니에요." 브륜이 반박했다. "삼촌은 주무시고 계세요. 바닥에 책을 떨어트리고 입을 떡 벌리고 누워 계시다고요. 문득 삼촌이 돌아가신 것 같았어요......" - P60

"젠장, 알레크." 내가 말했다. "당신은 이 호텔의 주인입니까? 아닙니까? 카이사에게 이 가여운 아가씨와 함께밤을 보내라고 왜 지시하지 않는 겁니까?" - P60

나를 본 남자는 가지런하고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살짝 미소를 짓더니 듣기 좋은 바리톤 음성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올라프 안드바라포르스입니다. 편하게 올라프라고부르세요."
나도 내 소개를 했다. 문이 다시 활짝 열리고 주인장이여행용 가방 두 개를 들고 들어왔고 뒤이어 눈만 내놓은 채온몸을 감싼 자그마한 남자가 호텔로 들어왔다.  - P62

덩치가 작은 남자는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된 면상과경찰에 대해 계속 떠들면서 사무실로 따라 들어갔고, 바이킹 올라프는 나지막하게 한마디 했다. "구두쇠구먼......"
그러더니 자신을 맞이하러 온 군중을 기대하기라도 한 듯한 모습으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까 그 사람은 누굽니까?" 내가 물었다. - P63

올라프는 내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특별히 시선을 끄는 것은 없었다. 다만, 벽난로 방과 모제스 부부가 머무르고 있는 객실 복도의 입구에 쳐 놓은 두툼한 커튼이 살짝 흔들렸다.
아마도 외풍 탓이겠지. - P63

제4장

아침이 되자 눈보라가 잦아들었다. 동틀 무렵에 일어나 보니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포트와인 석 잔 탓에 좀처럼 가시지 않는 숙취를 쫓아 보려고 속옷 차림으로 호텔 밖으로 뛰어나가 갓 쌓인 보송보송한 눈을 온몸에 문지르며 "으어" 소리를 질러 댔다. - P64

나는 방으로 돌아가 옷을 입고 문을 열쇠로 잠근 후계단을 훌쩍훌쩍 뛰어내려 뷔페로 갔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흥분한 기색의 카이사가 벌써 주방의 뜨거운 불가에서 바삐 요리를 하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 P64

강까지 왕복 10킬로미터가 약간 넘는 거리를 스키로달린 후 요기를 하려고 돌아오니 호텔은 이미 부산스러웠다. 모두 밖으로 나와 해를 쬐는 중이었다. - P65

(전략). 그가 정말 스키를 잘 탄다는 사실을 깨닫자 어쩐지 속이 상했다. 평평한 지붕 위에서는 우아한 모피망토 차림의 모제스 부인과 어제와 같은 상의를 입고 어김없이 한 손에 잔을 든 모제스 씨, 주인장이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주인장은 그 두 사람에게 무슨 이야기를 건네는 중이었다. - P66

몇십 년 전에도 나는 이런 경주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는 기술 수준이 부케팔로스 같은 오토바이를생산할 정도로 발전하지도 않았고 나 또한 더 강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약 3분 후 호텔의 정문 계단으로 돌아와있었다. 내 상태가 영 심상치 않아 보인 모양이었다. - P67

모두에게 버림받고 잊힌 나는 아직 훌훌 털고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변덕스러운 사람들은 이미 새로운 우상의 등장을 환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운명의 여신은 누가 백설 같은 피부의 눈의 신인지, 누가 늙다리 경찰인지에 무심하다. - P68

모제스 부인의 비명에 이어 버럭 화를 내는 사람들의목소리가 와글와글 쏟아졌다. 그러나 나는 호텔로 들어갔다. 나는 생겨 먹기를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픈 사람이 아니라 정의를 사랑할 뿐이다. 만사에 말이다. - P68

모제스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루 드 샤넬에있는 저택에는 욕조가 두 개인데, 하나는 금이고 다른 하나는 아마도 백금인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이 이야기에 무슨 대꾸를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는 동안 부인은 다른 곳을 찾으러 가보겠다고 했다. - P69

나는 "아니요, 못 봤습니다만"이라고 대답하며 소박한 만족감을 음미했다. 그러자 듀 바른스토크르가 그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더니 내가양손을 맞잡고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차자 사람 좋은 주인장이 개가 제멋대로 날뛰도록 방치한다고 덧붙이며바로 그저께도 렐이 차고에서 모제스 부인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고 알려 주었다.  - P70

샤워장에서는 여전히 물소리가 들렸고 이제 흥얼거리는 소리 대신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 P70

"오래 기다리셨나요?" 올라프가 물었다.
"네, 한참 전부터요." 듀 바른스토크르가 대답했다.
힌쿠스가 느닷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더니 어깨로 올라프를 툭 치고 홀로 가 버렸다.
"잠깐만요." 내가 말했다. "혹시 오늘 아침에 누가 또도착했습니까?"
"이분들뿐이었습니다만." 듀 바른스토크르가 대답했다. - P71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에요!" 듀 바른스토크르가 흥분하며 소리쳤다. "우리는 이곳에 서서 최소 15분간 기다렸어요. 그렇지요. 경위님?"
"내 침대에 누가 또 누워 있었어요." 위에서 브륜이 알렸다. "그리고 수건이 전부 축축해요.‘ - P72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여러분!"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 남자의 라디오입니다. 여러분. 그리고 이것이 그 남자의 점퍼죠."
47.
"아, 대체 누구......" 올라프가 조용하게 말을 시작했
"그 남자죠. 죽은 남자."
"나는 누구 순서인지 물어보려던 참인데요?" 아까와마찬가지로 차분하게 올라프가 말했다. - P73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사람들은 홀에서 방금 일어난일에 대해 설왕설래하는 중이었다. 역시나 새로운 이야기는 나오지 않아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계단을 오를 때 여전히 난간에서 몸을 쑥 내밀고 있는 브륜을지나갔다. "미친 호텔이에요!" 브륜이 도전적인 태도로 내게 말했다. 나는 묵묵히 곧장 내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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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의 아영에게도 온유의 분위기는 조금 기이하게 느껴졌다. 학교에서는 ‘더스트 시대를 기억하기‘, 줄여서 ‘기억 수업‘이라고 부르는 특강이 매주 열렸는데, 다른 도시에 살 때는 들어본 적이 없는 수업이었다. - P62

그런데 때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나 실버타운 앞에서
‘공헌자 명단 전면 재조사하라‘ ‘기록 미화 반대한다‘ 같은 문구를 내걸고 시위를 벌였다. 그런 날에 노인들은 언짢은 표정으로창밖을 내다볼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 이희수만이 유유자적 시위 현장을 구경하거나 사람들에게 음료수를 건네고는 주택단지를 지나쳐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 P63

존경과 의심 사이에서, 온유의 노인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는 마치 두 개의 가면을 번갈아 쓰는 듯한, 위태로운 느낌이있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공헌자들을 존경하고, 더스트 시대를 기억하고, 또 그 시대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애쓰는 온유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지만, 돌아서서는 어두운 소문을 실어나르곤 했다. - P64

하지만 다들 이희수에게는 그저 과거를 궁금해할 뿐 험담을하지는 않았다. 이희수는 분명히 더스트 시대를 겪은 세대인데도 어쩐지 더스트와 무관해 보였고, 어딘가 다른 세계에서 뚝떨어진 느낌이 났다.  - P65

창고가 아이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흥미진진한 공간인 것과 달리, 정원은 이상할 정도로 날것의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정원은 잡초들이 아무렇게나 자라도록 내버려둔 것처럼 보였다. - P65

아이들은 이희수의 창고에 환상을 갖고 있었는데, 그곳에 들어가본 아이들은 옛날식 호버카를 개조해서 만든 괴상한 탈것들과 인간형 로봇들을 잔뜩 보고 왔다며 흥분해서 떠벌려댔다.
재건 이후의 엄격한 기술 제한 정책 때문에 일부 연구 도시를 제외하고는 인간형 로봇을 더는 만들지 않았는데도, 이희수는 어디선가 구해 온 부품들로 로봇을 조립한 것 같았다. - P65

이희수와 살갑게 인사를 나누는 또래 아이들을 보면서도, 아영은 자신이 그와 결코 친해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길어야 일 년쯤 있다 이사를 갈 텐데, 아이들이든 어른들이든 먼저 다가가는 것이 망설여졌다.  - P66

어떤 집의 정원이었다. 아영은 정원을 향해 홀린 듯이 걸어갔다. 정원의 흙이 푸른빛을 가득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허공에도 푸른색을 띤 먼지가 흩날렸다. 마치 푸른빛이 정원에 한 겹덧씌워진 듯한 모습으로, 자연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 같은.
으스스하면서도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풍경이었다. - P67

아영을 의자에 앉혀두고 이희수는 정원을 천천히 걸으며 누군가와 통화를 했는데, 수연에게 연락을 한 것 같았다. 아영은안락의자에서 내려가지도 못하고 초조한 기분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다친 무릎보다도 엄마에게 혼이 날까봐 겁이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를 탄 수연이 정원 앞에 도착했다.
"아휴, 고맙습니다. 애가 늦게까지 안 들어와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영아, 대체 어딜 갔던 거야." - P69

그날 이후 아영은 철저히 비밀을 지켰다. 그래도 정원이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해서 해가 진 후 이희수의 집 근처를 지날 때면정원으로 눈이 가곤 했지만, 그날의 기묘한 푸른빛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 P70

그러면 이희수는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아주 맛있게 먹었지. 난 파이를 굽지도 못하거든. 그나저나,
널 괴롭힌다던 못된 녀석들은 마음을 좀 착하게 바꿔먹었는지궁금하구나." - P70

아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식물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날 이후로 이상한 푸른빛이 자꾸 머릿속 한편을 맴돌았다. 혹시 다른 식물들 중에도 그렇게 기이한 빛을 내는 것이 있을까 싶어 유심히 관찰했지만,
그런 것은 오직 이 정원의 식물들뿐이었다. - P71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아침부터 천둥이 쾅쾅 치며온 세상을 뒤흔드는 소리를 내던 날이었다. 수연은 오후에 전화를 받더니 황급히 짐을 챙겼다.
"아영아, 옆 지역 센터가 정전돼서 도움이 필요하대. 엄마가이따 새벽까지는 거기 가 있어야 하는데…………"
- P72

아영이 신기한 눈으로 로봇을 바라보자 이희수가 말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인간형 로봇을 자주 썼거든. 가정용 청소로봇 하나에도 인간처럼 이름을 붙여주었어. 하지만 지금은 인간을 닮지 않도록 만드는 게 규율이지. 더스트 시대에 무기로 개조된 인간형 로봇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이 많으니까. 이름까지불러주며 애지중지하던 녀석들이 내 목덜미에 칼을 박아왔으니,
배신감이라도 느낀 건지 뭔지. 아무튼 집단적인 트라우마가 되긴 했지." - P74

이희수는 가볍게 웃으며 문간의 로봇을 가리켰다.
"사실 저 녀석도 생활 보조용으로 출시된 아주 친근한 로봇이었는데, 나중에는 다들 개조해서 무기를 들고 다니게 만들었지.
그때는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의 구분이 없었어.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위험해졌고, 돔 시티를 지키기 위해서 기계란 기계는 전부 동원되었으니까." - P75

"할머니는 타운의 어른들이 위선자라고 말했지만, 어른들만그런 건 아니에요. 아이들도 다 조금씩 비겁하거든요. 여기 아이들은 제가 내년이면 여길 떠난다는 걸 알아서 저를 더 쉽게 괴롭혀요. 도와주는 애들도 없고요. 정작 그러면서 타운 어른들에 대한 비난은 잘 거들죠. 그래서 전 사람은 누구나, 모두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위치에 따라 좋은 사람인 척할 뿐이라고요." - P76

이희수는 잠시 침묵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놀랍게도, 나도 완전히 같은 생각이다."
"정말요?"
"나도 어느 순간 깨달았지. 싫은 놈들이 망해버려야지, 세계가 다 망할 필요는 없다고. 그때부터 나는 오래 살아서, 절대 망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단다. 그 대신 싫은 놈들이 망하는 꼴을 꼭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 P77

"돔 바깥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었어요?"
아영이 알기로, 더스트는 인간의 몸에 아주 치명적인 독으로작용해서 돔으로 덮이지 않은 지역에서는 어떤 생명체는 결코살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희수의 대답은 모호했다. - P78

"식물들은 아주 잘 짜인 기계 같단다. 나도 예전에는 그걸 몰랐지. 나에게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그걸 알려준 녀석이 있었거든."
창밖은 비바람으로 밤새도록 요란했지만 아영은 악몽을 꾸지않았다. 대신 무성히 자란 풀들에 뒤덮인 돔 마을이 등장하는 꿈을 꾸었다. - P79

(전략)
"지금도 그분과 연락이 닿나요? 여기서 일하는 걸 아시면 정말 기뻐하실 것 같아요."
"어, 그게. 이희수 씨는......"
아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자라면서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마음에 깊이 박혀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왔다.
"이희수 씨는 갑자기 사라지셨어요. 어디론가 훌쩍, 그냥 가버리셨어요. 지금은 어디 계신지도 몰라요. 살아 계신지, 이미 돌아가셨는지도요 연락을 해볼 수가 없었어요." - P80

"가자, 아영아. 이희수 씨는 괜찮을 거야. 돌아오시면 아영이가많이 보고 싶어하니까 한번 연락해달라고 동네 사람들한테도 말해놨어."
호버카를 세워둔 수연이 독촉했다. 아영은 마지막으로 뒤돌아보았다. 잊지 않도록 이희수의 집과 정원을 눈에 담고 싶었다.
하지만 어쩐지 이 장면이 기억 속에서 점차 희미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 P81

아영이 대학 연구소에서 인턴을 마칠 무렵, 국립생물자원관소속이었던 더스트생태 부서가 부설 연구소로 독립한다는 소식을 누군가 공유해준 칼럼을 읽고 알았다. 더스트생태학에 대한 투자를 무용한 과거사에 매달리는 인력 낭비와 전시 행정이라고 비판하는 칼럼이었다. 지나간 것에 집착하는, 당장 중요한 현실의 문제는 돌아보지 않는 한심한 행태. 그 문장을 읽는순간 아영은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오랫동안 원해왔던 일이라고생각했다. - P82

행성은 너무나 빠르게 변화했고, 생물들은 부지런히 그것을따라잡았다. 아영은 그 과감함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았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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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입력: 악마의 식물에 대해 궁금한게 있어]


(후략) - P84

(전략)

[스트레인저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확인]

여기, 읽어봐. 한참 전에 올라온 글이지만 네가 좋아할 만한이야기라고 확신해.

[링크로 연결할까요?]

[접속]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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