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 - P957
2. 우린 공원에서 소련 백과사전을 읽고 있었어. 스탈린이 살아 있던 시절에 나온 사전이었지. 너희 어머니가 가지고 계시던 책 말이야. ‘만국의 아버지‘는 다양한 재능을 갖고있었지만, 심지어 위대한 과학자이기도 했던 모양이야. - P358
좋아, 그 일에 관해선 내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거든. 유대인 여자애 두 명이 1960년대에 나온 두꺼운 철학 사전 한 권을 가지고 공원으로 산책을 갔어. 그 사전에는 우스꽝스러운 내용이 많아서, 걔들은 나무 그늘에서그걸 보고 웃으면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지. - P359
3. 가끔은, 학교가 끝나면 우린 그냥 작별 인사를 할 수가없었어. 그래서 노예들이나 입을 것 같던 그 멍청한 교복을 입고 체르니셰우스카야 거리에 있는 나무 아래서있었지. 교복 동복의 갈색은 마치 [빈 칸을 채우시오]. 마치진흙 속 깊숙한 곳에서 초콜릿 스펀지케이크를 파먹고 있는 지렁이들 같았지. - P362
4. 네 열여섯 번째 생일. 내가 준 꽃들, 네 키만 했던가, 어쩌면 더 컸던 것 같네. 끌어안고 깔깔 웃었지. 우리 그때이런 말을 했잖아, 그 꽃들이 "술 취한 올림픽 수영 선수들" 같아 보인다고. 잔인한 낙천주의 - 이런 표현 들어본 적 있니? - P363
6. 가끔은, 학교가 끝나면 우린 그냥 작별 인사를 할 수가 없었어. 아니면 얼른 작별 인사를 하고 잽싸게 집으로 가서 곧바로 서로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지. 너도 계단 한 층을오르고, 나도 계단 한 층을 오르고, ‘제압‘해야 하는 언니는 너한테도 한 명, 나한테도 한 명. - P366
네가 인터넷 여기저기를 뒤져 가며 나를 찾아보고 나서 나한테 전화했던 게 몇 년도였더라? 2003년? 2005년이었나? - P367
그 연구자는 내 "감정적 강렬함"의 예를 여러 가지 들면서 그것들이 내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시공간을 드러내 준다고 쓰고 있었어. 내 세번째 책에서 몇 단락을 인용했더라고. 맥 빠지게 주절거린 끔찍한 부분들이었는데, 지금 내가 잘난 척하는걸까? 그런 것 같네. 문득 궁금해진 게 있어. 화가가 자신이 옛날에 그림을 그려 놓은 캔버스를 무심코 보게될 때도 이런 식으로 두 눈이 화끈거릴까. - P370
8. 지금 훑어보고 있는데, 네가 처음 몇 년 동안쓴 편지들은 다 있네. 1990년, 1991년, 1992년 그때 말이야. 그 뒤로는 한 통도 없어. 네가 나한테 편지 쓰는 걸 그만뒀었나 봐? 모든 걸 그만뒀었나? 네가 모든 게 끝났다는결론을 내렸던 때가 그때였니? 난 기억해. 그말. 우리가 가진 거라곤 과거뿐이고 그걸로는충분하지 않아라는 말. - P370
10. CNN 라이브, 스튜어트 루니가 래리 킹에게
(후략) - P374
11. 우리 4학년 때 담임이었던 라리사 페트로우나 선생님은 나무 뒤에서 담배를 피우곤 했어. 혼자 살았고, 선생님이 숨는 것과 담배를 피우는 것, 숨어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내가 그분에게서 유일하게 흥미롭다고 느낀 점이었어. - P376
기억나는지 모르겠는데 학교에 찾아와서 내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어 주고 ‘오토‘ 카탈로그 한권을 선물로 줬어 (그때 독일의 패션 브랜드 카탈로그들은 정말 멋졌는데). 난 우리 언니의 웨딩드레스로 만든 치마에 수수한 흰색재킷, 검은색 상의를 입고 있었어. 너희 언니가 걸어 준 진주 목걸이도 하고. - P377
13. 디나 루비나⁶⁹는 이민을 떠난 지 수년 뒤에 모스크바의어느 서점에 잠깐 들렀다. "끔찍한 충격이었어요. 모든책이 이미 쓰인 뒤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전부 출간돼있었어요. 이미 책들이 너무 많아서 뭔가 더 쓸 필요가전혀 없었죠. 무언가를 쓰기로 마음먹으려면 독자를 위해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어요. 물러서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죠." 우리는 같은 날 루비나의 인터뷰를 지켜봤지. 나는 여기 (거기)서, 너는 거기(여기)서.
69Dina Rubina(1953~). 타슈켄트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던 그는 소련에서 작가로 활동하다 1990년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 P379
14. (전략) 그 부츠를 신은건내 평생을 통틀어 서너 번 정도일 거고 그이상은 절대 아니야! 부츠는 조심스럽게 묶어 놓은 실에 매달린 채로 아직도 창고에 걸려 있어 (그래야 손으로 만든 장식이 들어간몸통에 주름이 생기지 않는다나, 맙소사). - P381
그다음 날 밤에는 잠이 안 와서 남의 집 부엌에서 (내가 어디서 누구랑 사는지는 기억하지?) 거의 담배 한 갑을 다 피워 없앴지 뭐니(1주일치 일용할 양식이었는데! 젠장!). - P383
15. 난 새로운 삶을 살면서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테고 그들은 (질문을 한다거나 해서) 너에 대해 알게 될 거야. 그때마다 난 깜짝 놀라며 당혹스러워하겠지. ‘도대체 어떻게......?‘ - P384
16. 2008년에 찍은 그 사진들은 내가 지웠어. 네 사진은 기꺼이 잘라 내서 보관하려고 했지만 그건 불길한 행동이잖아. 내가 도저히 못 보겠는 건 내 얼굴이야. 그 무렵의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는 내 얼굴. - P385
18. (전략) 그 애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난 정말로그런 생각을 해. 5년 동안 금요일마다 그랬지. 나는 술도 마셔 보고, 잠도 자 보고, 일도해 보고, 걷기도 해 봤어. - P388
최악의 요일은 토요일이야. 온갖 두려움과 걱정이 머리 위에서 눈덩이처럼 떨어져 내리거든. - P389
머릿속에 벽돌처럼 박혀 있는 말이잖아. "고양이는 자기가 먹은 게 누구 고기인지 안다"⁷⁰라는 말이랑 같이. 그리고 어떤 사람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을 "높은 산 속으로" 데려가라는 (V.S. 비소츠키⁷¹의) 말도 있지. - P392
70 러시아 속담. ‘죄를 지은 사람은 다른사람이 고발하지 않아도 양심의 가책때문에 말이나 행동을 통해 스스로의 죄를 드러내게 된다‘는 뜻이다.
71 Vladimir SemyonovichVysotsky (1938~1980). 음악가이자작가, 배우. 체제 친화적이지 않은 작품 활동을 하면서 동료 예술가 및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 P392
소금의 중량에 대한 얘길 다시 이어가 볼게. 내게 필요한 소금은 딱 한알이야. 그거면 돼 (확실히 몇몇 사람들은 남들보다 빨리, 금방 파악할 수 있거든). 그런데 만약 B가 집에 와서 "나 방금 어떤 상점 점원하고 친해졌어"라고 행복하게 선언한다면(그 애들은 서로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텐데 말이야), 그럴 때 나는 그 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을까? - P394
21. PP우크라이나에 대한 SMM⁷⁴은 다음과같은 사항들에 관한 최신 정보를 매일 제공한다. 정전 위반 행위/포격 상황 및 민간인사상자/병기 철수 상황 / 안전지대에 배치된 무장 전투 차량과 대공 병기/물 공급 중단 상황 / 지뢰 및 지뢰 위험 신호, 부비트랩과 UXO⁷⁵에 관한 정보. 인터넷에서 무료로 읽어볼 수 있다. 아무런 승인 절차도 필요 없다.
74 특별 감시 임무Special MonitoringMission의 약자. 유럽 안보 협력기구는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분쟁이 본격화한 2014년에 이 특별 감시단을파견했다. 감시단은 러시아의 침공이 본격화한 2022년 3월에 철수했으며, 업데이트 역시 중단되었다.
75 Unexploded ordnance의 약자. 불발탄을 뜻한다. - P398
어젯밤에는 친구네 집에서 잤어. 친구가 멀리갈 일이 있었는데 아들들을 봐 줄 사람이없었거든. 밤중에 끔찍한 폭풍이 시작됐어. 천둥도 쳤고 번개가 수직으로 내리꽂히더라. - P399
22.
10세 이하 어린이 축구팀들의 축구 경기가 로드 보호지역⁷⁶에서 열렸어. "난 인간 방패다!" - 이건 센터백을 맡고 있던 내 아들이 특정인을 염두에 두지는 않고 한말이야.
76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보호지역 Reserve은 공원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로드 보호 지역 역시지역민들을 위한 공원에 해당하는 장소다. 이 표현은 앞선 21번 챕터가 선보이는 안전 구역 개념과 기묘한 방식으로 공명한다. - P400
23. (전략). 우리가 만나기 전에 네가 문자를 보냈어. "생일 축하해. 다시는 만나지 말자." 생일에 관해서라면 우린 전에도 그랬던 적이 있잖아, 아닌가? - P402
2005년 이전의 네 편지랑 사진들 전부를 잃어버렸어. 이사를 하다가 사진 앨범들이 든 가방 하나가 없어져 버렸거든. - P403
24. 자말라의 <1944>, 534점.⁷⁷ 혹시 너도 보고 있니?
77
2016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우크라이나 대표 자말라가 우승한 일을 가리킨다. <1944>의 가사는1940년대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크림 타타르족을 강제 이주시킨 일을배경으로 하고 있다. - P404
26. 75년 전부터 -75년은 우리 어머니의 나이, 우리 어머니의 평생과 같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지, 얼마나 많은 포위 공격이 더 발생했는지 너한테 말할 필요는 없을 거야. 그런데 그 일들은 아직도 그자리에 머무르고 있어. - P408
유튜브에 있는 관련 영상은 다 봤어. 거기에사로잡혀 버렸어. 정신적으로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말이야. 그 여러 영상 중 하나에서는 사람들이 땅에 떨어져 얼어붙은 참새를 두고 싸우고 있었어. - P409
27. (전략) 네가 떠나던 날...... 내 열여섯 번째 생일…네가 내게 준 노란 장미 꽃다발………… 우린 그장미 가운데 한 송이를 가르시나에 있던 아파트의 네가 살던 동 입구 옆 눈밭에 기념으로 꽂아 놓았지. - P412
(전략) 그러다 어떤 사람이 날 플랫폼으로 다시데려갔고, 우리 셋은 결국 너희 집에 가서 네가 날 위해 남기고 간 그레벤스치코프⁷⁸의 음반들과 ‘꼬마 과학자의 화학 실험실‘ 세트를 챙겼지.
78 Boris Grebenshchikov(1953~). 1972년에 결성한 록/포크 밴드아쿠아리움Aquarium을 통해 소련시절부터 활동해 온 러시아 음악가.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음악 활동을해온 그는 현대 러시아 밴드 음악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 P413
28. 그날 다른 사람들은 전혀 기억이 안 나. 그냥 너랑 나 둘만 있었을 수는 없다는 거 아는데. "이민이란 내장이 튀어나와 길 위에 펼쳐지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할복자살 같은 거죠." 우리는 같은 날디나 루비나의 인터뷰를 본다. 너는/나는 거기 (여기)서. - P418
29. 우리는 절친한 친구였다. 나는 우리 얘기를 썼다. 이렇게. "죽지 않아 줘서 고마워. 하지만 이건 개인적인 편지속에서 오직 너에게만 하는 말이야." - P419
32. 우리가 만나기 전에 너는 말했지. "우리 다시는 서로 만나지 말자. 그럴 필요 없잖아. 의미도 없고." 난 말했어. "나한테 한 시간만 내줘." 그건 한 시간이라는 뜻이 아니었어. 네 삶의 남은 시간 전부라는 뜻이었지. - P422
오늘 아침, 이라기보다는 얼마 전의 어느 날 아침, 나와 같은 열차 칸에 탄 두 명의 남자가 고개를 든다. 50대 남자 두 명인데 실크로 된 것 같은 수수한 스타일의 넥타이를 맸다. 교통 단속 카메라가 터질 때처럼 황급한 깨달음이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고, 곧 그들은 다음 역이름이 방송으로 나오기도 전에 서로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웃고 있다. 이게 얼마 만이야? - P146
쉿. 내 앞에 놓여 있는 건 시간이다. 시간은 강물이아니다. 시간은 기차에서 만난, 몸에 와 닿는 서류 가방을 느끼며 서로를 끌어안는 두 명의 낯선 사람이다. - P147
나는 그 아이들이 교외에서 일어난 불가사의한 범죄의 목격자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냥 법학을 공부하는, 현장 학습을 나와 지루해하는 학생들일 뿐이었다. - P147
오전 내내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별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음주 운전 재범 판결을 받은 남자 다음으로는 의류 브랜드 ‘엘우드‘의 매장 관리자가 나오는데, 시험관 아기 시술이 잘되지 않아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여자다. 이어서 옷을 잘 차려입은 소말리족 남자가 역시 옷을 잘 차려입은 소말리어 통역사와 같이 나온다. 남자는 안전벨트 미착용으로 기소되었다. - P149
"내가 저지를수 없겠다고 생각되는 범죄 같은 건 없다." 괴테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내 관심사다Homo sum: humani nil a me alienumputo." 이것은 고대 로마의 극작가 테렌티우스가 한 말이다. "동화 같은 결말은 없어요." - P149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이니까요." - P150
1주일 전, 나는 그 카페에서 부치안 판사 옐레나 포포비치를 만났다. 그때 그는 치안판사가 된 지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이해하게 된게 있다고 말했다. 바로 자기 앞에 출두하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니라 그저 위기에 처한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처한 ‘위기‘ 속에는 희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 P150
집에 오는 길, 반쯤 빈 오후 열차 칸에는 웃음을 쏟아 내는 사람도, 옛 친구의 무릎 위로 쓰러지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혼자였다. 가방을 들고, 재킷을 입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가지고, 이리저리 헤매는 눈빛으로, 울리지 않는 커다란 휴대 전화를 두 손으로 꾹꾹 누르면서. - P151
걱정이라고는 없던 순수한 아이가 빛나는 두 눈을 지닌 청년이 되고, 그러고는 곧바로 누군가의 부모가 되고, 그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두 눈도 마찬가지로 금세 빛나게 된다. 그다음 장면에 등장하는 그들은 앞서 나온 인물과 같은 사람이지만, 그 두 눈은 흐려져 있고, 머리칼은 희끗희끗해졌고, 몸은 뚱뚱해지거나 말라 있다. - P151
아무리 허술한 감독이 만들었다 해도,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허구라 해도, 삶에서 죽음까지를 3분 안에 보여 주는 이런 영상을 보는 일, 그러니까 에어 매트리스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듯 인간의 삶으로부터 빨려 나가는 시간을 쳐다보는 일에는 어딘가 참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 P151
오랫동안 나는 그런 경험이 왜 고통스러운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이해하게 되었다. 그건 시간 때문이었다. 시간은 모든 것을 괜찮게 만들어 준다. - P152
반복되는 상황 속에는 감지할수 없을 만큼 미세한 차이가 존재하며, 그 차이들은 똑같이 반복되는 일들을 때로는 빌어먹을 것들로 느껴지게 만들고, 또 때로는 고마운 것들로 느껴지게 만든다. - P152
일어나기, 머리빗기, 빵 굽기, 태양이 하늘로 솟아오르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기. 수없이 흘러가는 계절들. 온화하게 반복되는 매일의 활동 속에는 보이지 않는 그물이던져져 있고, 그 그물은 사람들을 떠받치고 보호한다. 왜냐하면 반복되는 것들―들뢰즈가 말한 바에 따르면 "바꿀 수도 대체할 수도 없는 특이성들"은 결코 똑같을 때가 없기 때문이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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