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이의 아영에게도 온유의 분위기는 조금 기이하게 느껴졌다. 학교에서는 ‘더스트 시대를 기억하기‘, 줄여서 ‘기억 수업‘이라고 부르는 특강이 매주 열렸는데, 다른 도시에 살 때는 들어본 적이 없는 수업이었다. - P62

그런데 때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나 실버타운 앞에서
‘공헌자 명단 전면 재조사하라‘ ‘기록 미화 반대한다‘ 같은 문구를 내걸고 시위를 벌였다. 그런 날에 노인들은 언짢은 표정으로창밖을 내다볼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 이희수만이 유유자적 시위 현장을 구경하거나 사람들에게 음료수를 건네고는 주택단지를 지나쳐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 P63

존경과 의심 사이에서, 온유의 노인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는 마치 두 개의 가면을 번갈아 쓰는 듯한, 위태로운 느낌이있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공헌자들을 존경하고, 더스트 시대를 기억하고, 또 그 시대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애쓰는 온유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지만, 돌아서서는 어두운 소문을 실어나르곤 했다. - P64

하지만 다들 이희수에게는 그저 과거를 궁금해할 뿐 험담을하지는 않았다. 이희수는 분명히 더스트 시대를 겪은 세대인데도 어쩐지 더스트와 무관해 보였고, 어딘가 다른 세계에서 뚝떨어진 느낌이 났다.  - P65

창고가 아이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흥미진진한 공간인 것과 달리, 정원은 이상할 정도로 날것의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정원은 잡초들이 아무렇게나 자라도록 내버려둔 것처럼 보였다. - P65

아이들은 이희수의 창고에 환상을 갖고 있었는데, 그곳에 들어가본 아이들은 옛날식 호버카를 개조해서 만든 괴상한 탈것들과 인간형 로봇들을 잔뜩 보고 왔다며 흥분해서 떠벌려댔다.
재건 이후의 엄격한 기술 제한 정책 때문에 일부 연구 도시를 제외하고는 인간형 로봇을 더는 만들지 않았는데도, 이희수는 어디선가 구해 온 부품들로 로봇을 조립한 것 같았다. - P65

이희수와 살갑게 인사를 나누는 또래 아이들을 보면서도, 아영은 자신이 그와 결코 친해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길어야 일 년쯤 있다 이사를 갈 텐데, 아이들이든 어른들이든 먼저 다가가는 것이 망설여졌다.  - P66

어떤 집의 정원이었다. 아영은 정원을 향해 홀린 듯이 걸어갔다. 정원의 흙이 푸른빛을 가득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허공에도 푸른색을 띤 먼지가 흩날렸다. 마치 푸른빛이 정원에 한 겹덧씌워진 듯한 모습으로, 자연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 같은.
으스스하면서도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풍경이었다. - P67

아영을 의자에 앉혀두고 이희수는 정원을 천천히 걸으며 누군가와 통화를 했는데, 수연에게 연락을 한 것 같았다. 아영은안락의자에서 내려가지도 못하고 초조한 기분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다친 무릎보다도 엄마에게 혼이 날까봐 겁이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를 탄 수연이 정원 앞에 도착했다.
"아휴, 고맙습니다. 애가 늦게까지 안 들어와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영아, 대체 어딜 갔던 거야." - P69

그날 이후 아영은 철저히 비밀을 지켰다. 그래도 정원이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해서 해가 진 후 이희수의 집 근처를 지날 때면정원으로 눈이 가곤 했지만, 그날의 기묘한 푸른빛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 P70

그러면 이희수는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아주 맛있게 먹었지. 난 파이를 굽지도 못하거든. 그나저나,
널 괴롭힌다던 못된 녀석들은 마음을 좀 착하게 바꿔먹었는지궁금하구나." - P70

아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식물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날 이후로 이상한 푸른빛이 자꾸 머릿속 한편을 맴돌았다. 혹시 다른 식물들 중에도 그렇게 기이한 빛을 내는 것이 있을까 싶어 유심히 관찰했지만,
그런 것은 오직 이 정원의 식물들뿐이었다. - P71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아침부터 천둥이 쾅쾅 치며온 세상을 뒤흔드는 소리를 내던 날이었다. 수연은 오후에 전화를 받더니 황급히 짐을 챙겼다.
"아영아, 옆 지역 센터가 정전돼서 도움이 필요하대. 엄마가이따 새벽까지는 거기 가 있어야 하는데…………"
- P72

아영이 신기한 눈으로 로봇을 바라보자 이희수가 말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인간형 로봇을 자주 썼거든. 가정용 청소로봇 하나에도 인간처럼 이름을 붙여주었어. 하지만 지금은 인간을 닮지 않도록 만드는 게 규율이지. 더스트 시대에 무기로 개조된 인간형 로봇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이 많으니까. 이름까지불러주며 애지중지하던 녀석들이 내 목덜미에 칼을 박아왔으니,
배신감이라도 느낀 건지 뭔지. 아무튼 집단적인 트라우마가 되긴 했지." - P74

이희수는 가볍게 웃으며 문간의 로봇을 가리켰다.
"사실 저 녀석도 생활 보조용으로 출시된 아주 친근한 로봇이었는데, 나중에는 다들 개조해서 무기를 들고 다니게 만들었지.
그때는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의 구분이 없었어.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위험해졌고, 돔 시티를 지키기 위해서 기계란 기계는 전부 동원되었으니까." - P75

"할머니는 타운의 어른들이 위선자라고 말했지만, 어른들만그런 건 아니에요. 아이들도 다 조금씩 비겁하거든요. 여기 아이들은 제가 내년이면 여길 떠난다는 걸 알아서 저를 더 쉽게 괴롭혀요. 도와주는 애들도 없고요. 정작 그러면서 타운 어른들에 대한 비난은 잘 거들죠. 그래서 전 사람은 누구나, 모두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위치에 따라 좋은 사람인 척할 뿐이라고요." - P76

이희수는 잠시 침묵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놀랍게도, 나도 완전히 같은 생각이다."
"정말요?"
"나도 어느 순간 깨달았지. 싫은 놈들이 망해버려야지, 세계가 다 망할 필요는 없다고. 그때부터 나는 오래 살아서, 절대 망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단다. 그 대신 싫은 놈들이 망하는 꼴을 꼭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 P77

"돔 바깥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었어요?"
아영이 알기로, 더스트는 인간의 몸에 아주 치명적인 독으로작용해서 돔으로 덮이지 않은 지역에서는 어떤 생명체는 결코살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희수의 대답은 모호했다. - P78

"식물들은 아주 잘 짜인 기계 같단다. 나도 예전에는 그걸 몰랐지. 나에게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그걸 알려준 녀석이 있었거든."
창밖은 비바람으로 밤새도록 요란했지만 아영은 악몽을 꾸지않았다. 대신 무성히 자란 풀들에 뒤덮인 돔 마을이 등장하는 꿈을 꾸었다. - P79

(전략)
"지금도 그분과 연락이 닿나요? 여기서 일하는 걸 아시면 정말 기뻐하실 것 같아요."
"어, 그게. 이희수 씨는......"
아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자라면서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마음에 깊이 박혀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왔다.
"이희수 씨는 갑자기 사라지셨어요. 어디론가 훌쩍, 그냥 가버리셨어요. 지금은 어디 계신지도 몰라요. 살아 계신지, 이미 돌아가셨는지도요 연락을 해볼 수가 없었어요." - P80

"가자, 아영아. 이희수 씨는 괜찮을 거야. 돌아오시면 아영이가많이 보고 싶어하니까 한번 연락해달라고 동네 사람들한테도 말해놨어."
호버카를 세워둔 수연이 독촉했다. 아영은 마지막으로 뒤돌아보았다. 잊지 않도록 이희수의 집과 정원을 눈에 담고 싶었다.
하지만 어쩐지 이 장면이 기억 속에서 점차 희미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 P81

아영이 대학 연구소에서 인턴을 마칠 무렵, 국립생물자원관소속이었던 더스트생태 부서가 부설 연구소로 독립한다는 소식을 누군가 공유해준 칼럼을 읽고 알았다. 더스트생태학에 대한 투자를 무용한 과거사에 매달리는 인력 낭비와 전시 행정이라고 비판하는 칼럼이었다. 지나간 것에 집착하는, 당장 중요한 현실의 문제는 돌아보지 않는 한심한 행태. 그 문장을 읽는순간 아영은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오랫동안 원해왔던 일이라고생각했다. - P82

행성은 너무나 빠르게 변화했고, 생물들은 부지런히 그것을따라잡았다. 아영은 그 과감함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았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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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입력: 악마의 식물에 대해 궁금한게 있어]


(후략) - P84

(전략)

[스트레인저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확인]

여기, 읽어봐. 한참 전에 올라온 글이지만 네가 좋아할 만한이야기라고 확신해.

[링크로 연결할까요?]

[접속]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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