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ken windows
인식의 힘이 비즈니스를 어떻게 움직일까?


5년간 매일 들른 단골 커피전문점에서 당신은 어느 날 문득 페인트칠이 벗겨진 벽을 보고 왜 음식의 위생 상태를 의심하게 되는 것일까? 마사 스튜어트는 부당 내부거래 혐의 때문이 아니라 그 논란을 무마시키는 과정에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녀는 왜 위법 행위까지 하며 논란을 무마시키려 했을까? 정치인들은 그들의 불법적이고 비양심적인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런 혐의를 무마하려다 지지자들을 잃고 만다. - P26

01

깨진 유리창의
숨겨진 힘을 찾아서

빨간불에 길 건너는 사람을 막을 수 없다면 강도도 막을 수 없다. 1982년 출판 당시, 깨진 유리창 이론은 기존의 형사행정학이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혁명적이고 독창적인 개념으로평가되었다 - P27

‘법‘과 ‘질서‘는 다르다. 법을 수호하려면 각자 법을 어기지 않고 살아가면 된다. 매우 간단하다. 그러나 도시와 국가와 기업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 이 같은규칙을 따라야 하며, 각각의 규칙이 똑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 P28

 줄리아니시장과 브래턴 경찰국장은 마음대로 차 유리를 닦고, 낙서를 하고, 무임승차를 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용납할 수 있는 것들과 용납하지 못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지하철에 낙서를 하거나 무임승차를 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뉴욕 시민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 P30

페인트칠이 벗겨진 식당은 음식도 맛이 없다

그렇다면 깨진 유리창 이론을 비즈니스 세계에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을까?
비즈니스에서는 고객의 인식이야말로 기업의 성패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한 번의 실수, 한 명의 불친절한직원, 한 번의 불쾌한 경험 때문에 고객은 당신의 회사에 등을 돌린다. - P31

고객을 유인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긍정적 인식‘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부정적 인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일 역시 중요하다. 깨진 유리창은 갈아 끼우는 것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 - P33

정치인은 왜 이미지 관리에 신경 쓰는가


 (전략).
비즈니스를 운영하면서 작은 부분까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힘들여 얻은 고객의 충성심을 놓치게 된다. - P34

‘살림의 여왕‘ 마사 스튜어트 Martha Stewart 의 경우를 보자.
그녀는 부당 내부거래, 사기, 공공신탁 조작 혐의를 받았지만 유죄 판결을 받지는 않았다. 정작 유죄 판결을 받은 부분은 혐의에 대한 논란을 무마시키려 했던 불법 행위였다. 왜 그녀는 혐의에 대한 논란을 무마시키려 했을까?  - P35

비즈니스에서 과연 깨진 유리창이란 무엇인가? 빛바랜 페인트처럼 물리적인 것들은 비교적 찾아내기 쉽다. 그러나 기업의 정책에 따르지 않거나 고객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현장 직원들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 P36

05

크리스피 크림보다 던킨도너츠에
열광하는 이유 혹은 그 반대


똑같은 제품에 다른 고객이 몰리는 이유


크리스피 크림 Krispy Kreme 도넛과 던킨도너츠Dunkin Donuts도넛의 맛을 구분할 수 있는가? 나는 그럴 수 없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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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누나 유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을 때 구사나기는 커피숍에서 『주간 트라이』 최신호를 읽고 있었다. ‘구아이회‘에 관한기사 제2탄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 P53

‘구아이회‘라고, 너, 들어봤어?"
구사나기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주간지를 내려다보았다.
"응, 알아. 요즘 여러 가지로 화제에 오르는 것 같던데."
자신이 그와 관련된 사건을 담당하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누나 시어머니가 그 종교에 빠졌단 말이야?" - P54

"누나, 둘째를 원해?"
"아니야, 이제 와서 둘째는 무슨. 그런데 있잖아, 너 알아?
‘구아이회‘ 입회금이 자그마치 백만 엔이야. 할머니가 돈을어떻게 쓰건, 그거야 당신 자유지만, 속임수일 게 뻔하잖아."
흠, 하고 구사나기는 한숨을 쉬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설마 할머니를 설득하라는 말은 아니겠지?" - P53

구사나기는 유리에게 부탁받은 얘기를 늘어놓았다. 웃어넘길 줄 알았는데 유가와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실은 지난번에 자네한테 얘기를 들은 후로 내내 마음이찜찜했어. 우리 연구실에서도 ‘아이회‘가 화제에 오르더니학생들끼리도 갑론을박을 벌였거든. 그들을 지도하는 입장에서 무시할 수가 없더군. 그래서 지난주와 이번 주 『주간트라이』를 열심히 읽고 있던 참이야."
"뭐 좀 알아냈어?" - P56

(전략).
명함을 건네는 유가와에게 사토야마 나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다행이군요. 누추하지만 일단 앉으시죠. 커피라도 가져오겠습니다."
"아니에요, 저희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어서 얘기를 듣고싶어요."
사토야마 나미가 필기도구와 녹음기를 꺼냈다. 유가와는난처한 표정으로 구사나기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 P57

"기사는 읽었습니다. 하지만 비유적인 표현이 많아서 참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더군요. 조금 더 객관적인 사실을 알고 싶습니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사토야마 나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 P58

구사나기가 말했다.
"염을 한 번만 받은 게 아닙니까?"
그러자 그녀가 구사나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보란 듯이턱을 쳐들었다.
"교단을 세상에 정확히 알린 데 대한 사례라면서 대사가저를 특별 회원으로 인정해 줬습니다. 그래서 입회금을 면제받고 신자가 되었죠." - P59

"기사에 따르면 무언가 따스한 것에 감싸인 듯한 느낌이었다고 했던데요."
유가와가 말했다.
"맞아요. 아주 잠깐이었지만, 체온이 확 올라가는 느낌을받았어요." - P60

구사나기가 유가와를 바라보았다.
"기공으로 그런 일이 가능해?"
"숙련된 기공사는 손을 향하기만 해도 그 부분이 따뜻해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일설에 따르면 손바닥에서 원적외선이 방출된다고도 하고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대사는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도달했을 거라고 봐요."
"원적외선이라....
유가와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사람을 창문 밖으로 떨어뜨릴 수 없어." - P61

유가와는 "불이라…………." 하고 중얼거리며 팔짱을 끼고는생각에 잠긴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저, 하고 사토야마 나미가 입을 열었을 때였다. 유가와가갑자기 팔짱을 풀더니 구사나기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취조실에서 렌자키 씨에게 염을 받았을 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고 했지?" - P61

"대사에게 그 일에 관해 들었어요. 염을 보내는 시늉만 했을 뿐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런 신성한 행위를 취조실 같은 곳에서 할 수는 없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그 의식은 이 방에서가 아니면 하지 않는다는말이군요."
유가와가 칠판에 그린 평면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정화의 방‘에서만 하는 거죠." - P62

"과학적으로 조사하는 것 말이에요. 우리 편집부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와서 교단에 부탁한 적이 있는데, 곤란하다고 했어요."
"왜죠?"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대사의 염은 상담자의 마음에 작용하는 거라서, 사람의 마음을 과학으로 읽을 수 없는 것처럼 그 힘 역시 측정할 수 있는 것이아니므로 측정하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대요. 게다가 외부인들이 들락거리면 제대로 송념이 되지 않는다고 했어요. 아까 제가 과학적으로 설명해 줄 사람을 찾는다고 말한 이유도직접적인 조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 P63

8

(전략).
그녀는 ‘구아이회‘ 본부에 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 옆에 유가와가 있다.
"소문은 들었지만, 위세가 대단한 것 같군요. 가구도 장식품도 죄다 최고급품이에요."
유가와가 실내를 둘러보며 태평스럽게 말했다. - P64

유가와가 "요코다입니다." 하며 명함을 건넸다. 실제로 편집장에게 받아 온 명함이긴 하지만 그 사용처를 편집장에게는 정확히 알려 주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들으면 노발대발할지도 모른다.
"저희 사토야마 씨가 신세를 많이 졌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이번 호도 매진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유가와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대단한 연기다. - P65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유가와가 나섰다.
"실은 요즘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아서 고민이에요. 몸이 무겁고, 머리도 하고요. 게다가 식욕 부진에 불면증까지 있지뭡니까. 그런데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 봤더니 딱히 나쁜 곳이없다는 거예요. 사토야마 씨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대사를 한번 만나보라고 권하더군요."
아하, 하고 마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의 염을 받고 싶다는 말씀이로군요?"
"안 되겠습니까?" - P66

과학적인 조사를 교단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유가와는 자신이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피험자가 되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설사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해도 물리학자가 체험하겠다고 나서면교단 측에서 달가워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러자 유가와는 놀랍게도 자신이 『주간 트라이』 편집장 행세를 하겠다고 했다. - P67

마지마가 미닫이문을 열고 그렇게 말하더니 유가와의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짐은 저희가 맡아 드리겠습니다."
나미가 움찔 놀라며 유가와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들고 있겠습니다."
유가와의 말에 마지마는 고개를 저었다. 미소를 띠고 있지만 눈빛이 날카로웠다.
"‘정화의 방‘에는 불필요한 물건을 들이지 않습니다. 그게규칙이니 모쪼록 양해해 주세요." - P68

가방을 맡긴 후 두 사람은 실내로 들어섰다. 한가운데에 방석이 놓여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간소한 방이었다.
창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저게 ‘구아이의 별‘인가요?"
유가와가 상좌 뒤 벽에 걸려 있는 마크를 보면서 물었다.
맞아요, 하고 나미가 대답했다.
"디자인이 깔끔하군요. 조그맣게 글자가 쓰여 있는데, 뭐라고 쓰여 있는지 좀 봐주겠어요?" - P69

앞쪽 문이 열리고 승복 차림의 렌자키가 들어왔다. 그는 나미에게 묵례한 후 유가와를 바라보며 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평소처럼 ‘구아이의 별‘에 예를 갖춘 뒤 단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때 나미는 단 앞쪽에 대학노트가 세워져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렌자키가 앉아 있는 자리 바로 밑이었다. 당연히 렌자키에게는 보이지 않을 터였다. - P70

유가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마음의 더러움을없애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군요. 오랜 세월에 걸쳐 더러움이 쌓인 터라서요. 저, 입회하겠다는 뜻은 확고합니까?"
"그건 아직요. 일단 체험하고 나서 결정할 생각입니다."
"그래요?"
렌자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의심하고 계시는군요." - P71

(전략).
"그래요? 그럼 다시 한번 해 보죠."
렌자키가 똑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그러자 유가와의 몸이 뒤로 밀려나는 것처럼 움직였다.
"어떠세요?"
이번에는 틀림없이 느꼈겠지, 라고 하듯이 렌자키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유가와는 이번에도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어요. 제가 원래 암시에 쉽게 걸려들지 않습니다." - P72

렌자키가 심각한 표정으로 양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은 채 유가와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유가와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는 그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뭔가 느낀 모양이군요."
렌자키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유가와는 두세 번 고개를 끄덕였다.
"느꼈습니다. 확실히요." - P73

"그러십시오. 자, 그럼."
렌자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괜찮으세요?"
나미가 유가와에게 물었다.
유가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단상으로 다가가 세워 놓았던 노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걸 펼쳐 보며 만족스럽게미소지었다. - P74

9


구사나기를 비롯한 경시청 수사관들이 후지오카와 함께
‘아이회‘ 본부를 압수수색한 것은 오전 9시경이었다. 도량예는 일반 신자도 있었는데 그들은 당혹스러워할 뿐 저항하지 않았다.
강력하게 반발한 쪽은 간부들로, 그들은 수사관이 위층으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엘리베이터를 정지시켰다. - P74

옆방에는 렌자키 시코, 본명 이시모토 가즈오와 아내인 사요코가 함께 있었다. 그들을 방에서 내보낸 후 벽에 붙어 있는 책장을 조사하던 구사나기 일행은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곳에서 금속 장식을 발견했고, 그걸 조작하자 책장이 옆으로 미끄러져 움직였다.
그 안쪽에 숨겨져 있던 것은 서랍장 정도 크기의 장치였다. - P75

10

실험이 있고 일주일 후, 구사나기가 유가와의 연구실을 찾았다. 재차 감사 인사를 하려는 것이었다.
"자네 덕분에 윗사람들이 싱글벙글이야. 고맙네." - P80

구사나기가콧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대로야. 아쉽지만, 나카가미 건으로는 상해치사가고작일 거야. 하지만 놈들의 죄는 그뿐이 아니라네. 명백히 사기죄에 해당하거든. 그래서 수사 2과 녀석들이 아주 신났어. 우리 1과 덕분에 말이야." - P81

"그럼 그자들은 무죄일 수도 있겠군. 주모자는 누구야, 역시 교조인가?"
구사나기가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수족일 뿐이야. 이용당했다고 할까. 주모자는교조의 아내 사요코였어. 애초에 그 여자가 원흉이야." - P82

사요코는 전에 다른 남자와 결혼한 적이 있었다. (중략).
그러나 사요코는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재산을 노리고결혼했을 뿐이다. 실제로 결혼 당시에는 공장의 경영 상태가좋았다.
그런데 장기화한 불황의 여파로 상황이 서서히 나빠졌고가사에 시달리며 돈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생활에 염증을느낀 사요코는 마침내 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 P83

(전략).
하지만 사요코의 남편이 남긴 취급 설명서를 읽어 본 마지마는 "이건 팔릴 만한 물건이 아니야."라며 고개를 저었다.
왜냐고 묻자 산업 기기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작용 기계도 아니고 계측 기기도 아니야. 굳이 말하자면 건강기구랄까." - P84

그래서 새로 끌어들인 사람이 역시 도박 멤버로 알게 된 모리야였다. 모리야는 신비주의를 내세워 돈을 번 경험이 있었다. 종교 법인을 설립하는 루트도 훤히 꿰고 있었다. 셋은 사요코를 중심으로 면밀히 계획을 세웠고 마침내 종교 단체를 세웠다. (중략).
그때 알게 된 사람이 이시모토 가즈오다. 그는 기공사 간판을 내걸고 병을 치료하고 있었다. 효험이 좋다는 평판이 있는 반면 치료 효과가 전혀 없다는 소문도 많았다.
바로 이 남자야, 처음 이시모토를 봤을 때 사요코는 그렇게생각했다. 생김새도 나쁘지 않은 데다 지성미마저 살짝 풍겼다. 퍼포먼스가 뛰어나고,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도취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 P85

이렇게 해서 신흥 교단 ‘구아이회‘를 발족했다. 구아이라는 이름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괴로울 고(苦)와 사랑 애자를 붙여 소리 나는 대로 쓴 것에 불과했다. 교조는 이시모토였지만 교단을 조직하는 일은 사요코가 도맡았다 - P86

그런데 순조롭게 신자를 늘려 가던 교단이 최근 들어 정체기를 맞았다. 입소문만으로 사람을 모으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러던 차에 신자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몇몇 간부가 교단의 자산을 횡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몇몇 간부란 마지마와 모리야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다. - P87

그러나 나카가미를 죽일 작정은 아니었다. 그가 뛰어내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이 사요코와 마지마 등의 주장이었다.

"그들의 주장이 부자연스럽기는 하지만, 그 주장을 뒤집기도어려워."
구사나기가 말했다. - P88

"흐음, 지금까지 들은 바로는 단순한 배후 인물로 만족할만한 여자가 아닌 것 같은데."
"본인은 스스로를 배후 인물이라고 여기지 않았어. 프로듀서라고 여겼지."
그 말을 하면서 구사나기는 새삼 사요코의 얼굴을 머릿속에떠올렸다.
재미있었어요, 희대의 악녀는 얄미울 정도로 태연스럽게말했다. - P89

"그자는 믿고 있었어. 자신의 힘으로 신자들을 구원해 왔다고 말이야. 그래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자수할 의사를 밝혔던 모양이야. 자신이 죽였다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사요코 일당은 그의 그런 믿음을 이용하기로 했지. 교조가 자수하면 선전 효과가 한층 높아질 거라고 생각한 거야. 어차피 유죄 판결이 내려지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했으니까. 간수 말로는 이시모토가 구치소에 있는 내내 명상을 하더래. 그 모습이 연기로 보이지는 않았다는군."
구사나기의 얘기를 듣고 난 유가와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안경을 밀어 올렸다. - P91

구사나기가 물었다. 유가와는 티켓 앞면을 구사나기 쪽으로 돌렸다.
"전국 점 페스티벌이래."
"점?"
(중략).
"어유, 답답하긴・・・・・・ 미안해. 그냥 버리게."
"버리긴 왜 버려? 잘 맞힌다잖아. 이거 흥미진진한걸. 고맙다고 전해 줘."
유가와는 티켓을 흰 가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P92

4장

휘다


1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10월 들어서는 날씨가 영 신통치 않다. 이게 가을장마라는 건가, 하고 남자가 중얼거렸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휴대 전화가 울렸다. 남자는쭛, 혀를 차고서 손으로 더듬거려 전화기를 찾아 쥐었다. - P265

"언제까지 있을 건데?"
아내는 음, 하며 잠시 생각하다가 "내일 돌아올 예정이긴 하지만 어쩌면 하루 더 묵을지도 몰라. 장례식 뒷정리도 거들어야 하니까."라고 대답했다.
"그걸 꼭 당신이 해야 해?"
지하주차장 입구가 보였다. 몇 번 온 적이 있어서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 - P266

통화를 마친 남자는 휴대 전화기를 조수석으로 휙 던졌다. 여자는 참 태평해서 좋겠어, 하고 생각했다. 남자는 머릿속에 어떻게 하면 한 푼이라도 더 벌까 하는 생각뿐인데. 오늘만 해도 원래는 쉬는 날이었는데 동료가 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자신이 불려 나왔다. 물론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특별수당을 외면할 만큼 형편이 넉넉지 않다. - P267

2

이 정도 크기라면 기계식 주차장에 들어가기 어렵겠는걸.
구사나기가 은색 차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유럽산 세단이다. 전체 길이가 5미터도 넘는 데다 차폭도 1미터 80센티미터 이상이다. 그렇다면 평면 주차 공간에 세울 수밖에 없는데, 안타깝게도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특권층의 권력을 이용했다. 이건가." - P268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그게......"
구사나기는 눈꼬리 옆을 긁적거렸다.
"아직은 뭐라고 말하기 힘듭니다. 단, 피해자가 이 장소에차를 세운 게 우연은 아닌 것 같아요. 다시 말해서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의 계획적인 범행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 좋아.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자네들은서로 돌아와 피해자의 남편이 곧 도착한다니까." - P269

"그야 그렇겠지. 다만 야나기사와 선수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아마 뛰지도 못했을걸."
"그래요?"
(중략).
"그럴 때 부인이 이런 일을 당했으니..... 타이밍이 너무나쁘네요" - P270

스포츠 센터 주차장에 여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는신고가 들어온 것은 오늘 오후 5시 30분경 신고한 사람은 주차장 경비원이다.
119에도 신고가 들어가 구급대원이 달려왔다. 여자는 운전석 문 옆에 쓰러져 있었다. 원피스 위에 얇은 코트를 걸쳤는데, 그 코트의 등쪽이 절반 가까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구급대원이 여자의 사망을 확인했을 무렵 관할 서 경찰관이 도착했다. - P271

이름은 야나기사와다에코 이 스포츠 센터의 VIP 회원이었다. 이날 방문한 목적은 피부 관리를 받는 것으로, 사전에 예약되어 있었다. 그럴 경우 지하 주차장 특별 구역에 주차하게 한다는 것이 피부 관리실 담당자의 설명이다.
스포츠 센터 데이터베이스에 야나기사와 다에코의 개인정보가 일부 들어 있었다. 그녀는 가족 회원이고, 남편이 프로 야구팀 도쿄 엔젤스의 야나기사와 다다마사 선수라는 사실도 그 정보에 의해 밝혀졌다. - P272

"그 피부관리실 말인데요, 부인이 그곳에 다닌다는 사실을 아는사람이 많습니까?"
글쎄요, 하면서 야나기사와가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무한테도 말한 기억이 없지만그 사람은 적어도 친구들한테는 말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 P273

"자동차 조수석에 있던 물건입니다. 백화점 쇼핑백에 담겨있었어요."
야나기사와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처음 봅니다."
"누군가에게 선물하려고 한 게 아닐까 싶은데, 그런 얘기를 부인께 들은 적은요?"
"없습니다." - P274

차가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야나기사와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었다. ‘빈소‘라든가 ‘장례식‘ 등등의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통화 도중 야나기사와가 저, 하고 말을 건넸다.
"시신을 언제쯤 돌려보내 주실 거죠?"
구사나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일러야 내일 저녁 무렵일 겁니다. 부검을 해야 하니까요."라고 대답했다.
"......그렇군요." - P275

3

범인은 사건 발생 닷새 만에 체포되었다. 27세 남자로, 다니던 회사에서 며칠 전 해고당했다고 한다. 회사 비품을 멋대로 가져다가 인터넷에서 판매한 사실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어떻게 하면 돈을 마련할 수 있을까 궁리한 끝에 주차 중인 차량을 털기로 한 그는 전에 경비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 고급 스포츠 센터 주차장을 떠올렸다. - P276

남자는 옆에 있던 차 뒤에 몸을 숨기고 외제 차가 후진해서주차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차에 탄 사람은 여자 혼자였다.
차림새가 고급스럽다는건 밖에서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유리창을 깰 필요가없지 않은가. 차에서 내리는 여자를 덮쳐서 기절시키면 그만이다. 지갑을 지녔을 테니 전당포에 갈 필요도 없다.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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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음모주의를 약화하는 것으로 보이며,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사람의 42퍼센트는 음모론적 성향을 가지는 반면 대학원 학위를 가진 사람은 22퍼센트에 머문다.²⁹ 그럼에도 석사나 박사학위를 가진 미국인 5명 중 1명 이상은 음모를 믿는다는 것은 여기서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 P68

329 Uscinski and Parent, American Conspiracy Theories, 83.

통제력 상실과 환상 패턴 감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심리학자 제니퍼 휘트슨Jennifer Whitson과 애덤 갤린스키 Adam Galinsky는 사람들이 어떻게 무작위성을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지, 그대신에 어떻게 자신이 지각하는 패턴에 행위자를 귀속하는지 탐구했다.³² - P69

32 Jennifer A. Whitson and Adam D. Galinsky, "Lacking Control Increases Illusory PatternPerception," Science 322, no. 5898 (October 1, 2008), 115-117. - P367

두 번째 실험에서 휘트슨과 갤린스키는 피험자에게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었거나 통제할 수 없었던 경험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했다. 그런 다음 피험자는 등장인물이 자신의 아이디어가 통과될지를 결정하는 회의가 열리기 전에 발을 동동 구르는 것 같은, 연관성 없고 미신적인 행동으로 성공 또는 실패가 결정되는 시나리오를 읽었다. - P70

‘환상 패턴 지각(내가 패턴이라고 부르는 것)‘을 ‘일련의 무작위또는 무관한 자극들 사이에서 일관되고 의미 있는 상호 관계를 식별하는 것(거짓 상관관계를 인식하고, 상상의 인물을 보고, 미신적 의식을형성하고, 음모 믿음을 받아들이는 경향)‘으로 정의할 경우, 휘트슨과갤린스키의 다음과 같은 논제는 입증된다. "개인이 객관적으로 통제감을 얻을 수 없을 때는 지각적으로 통제감을 얻으려고 노력한다."³⁵ - P71

35 Whitson and Galinsky, "Lacking Control." - P367

환상의 상관관계와 환상 패턴 감지라는 더 넓은 문제에 관해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마지막 실험에서 휘트슨과 갤린스키는 한 그룹의 피험자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숙고하고 긍정하도록 요청하여 통제감을 부여했는데 이는 학습된 무력감, 부조화, 기타 혐오스러운 심리 상태를 줄인다고 입증된 기법이다(다른 그룹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가치에 대해 숙고하게 했고 통제 그룹은 아무것도 긍정하지 않게 했다). - P72

휘트슨과 갤린스키의 논문이 발표된 이후 불안과 통제력 상실이 음모론적 인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많은 논쟁이 이어졌다. 2020년 아나 스토야노프Ana Stojanov와 자민 할버슈타트Jamin Halberstadt의 통제력 상실과 음모 믿음에 대한 메타 분석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작은 효과는 있었지만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 P72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불안, 소외감, 거부감, 통제력 상실감이 음모주의의 요인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프린스턴대학교의 한 연구에 참여한 피험자들은 자신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쓴 다음, 다른 두 사람이 그 설명을 판단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 후 같은 소그룹에 속한 두 사람에게 글을 공유했다. 자신이 쓴 글이 거부당했다는 말을 들은 피험자는 음모와 관련된 시나리오를 더 믿는 경향이 있었다.⁴⁰ - P73

40 Daniel Sullivan, Mark J. Landau, and Zachary K. Rothschild, "An Existential Functionof Enemyship: Evidence That People Attribute Influence to Personal and PoliticalEnemies to Compensate for Threats to Control,"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Psychology 98, no. 3 (2010), 434-449. - P367

문화적 불안감이 음모론적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2018년미국인 3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가치가 약화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많은 주요 사건의 배후에는 소수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행동이 있다"와 같은 음모론적 진술에 동의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⁴² - P74

42 Jan-Willem van Prooijen, The Psychology of Conspiracy Theories (London: Routledge, 2018), - P367

2015년 네덜란드에서 수행된 한 연구에서 연구자는 피험자를 (1) 무력하고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는 그룹, (2)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는 그룹, (3)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대조군의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 그런 다음 피험자에게 프로젝트 예산에서 돈을 훔치려는 시의회의 음모에 관한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무력하고 통제 불능하다고 느끼는 피험자는 음모론을 믿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⁴³ - P74

43 vanProoijen, Psychology of Conspiracy Theories, 54-55. - P367

음모론이 지닌 매력의 마지막 요소는 엔터테인먼트 가치에 있다. - P74

"무서운 영화나 추리 소설과 마찬가지로음모론은 일반적으로 미스터리, 의심되는 위험, 완전히 이해하지못하는 미지의 힘을 포함하는 극적인 서사를 포함한다"라고 얀-빌렘 반 프로이옌과 그의 동료들은 썼다.⁴⁵ "아울러 이러한 특징은 음모론에 대한 학습을 매혹적이고 감정적인 경험으로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음모론에는 잠재적인 오락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며 우리는 오락적 가치를 사람들이 특정 서사를 재미있고 흥분되며 눈을 사로잡는 것으로 평가하는 정도에 따라 정의한다." - P75

45 Jan-Willem van Prooijen, Joline Ligthart, Sabine Rosema, and Yang Xu, "TheEntertainment Value of Conspiracy Theories," British Journal of Psychology, July 14, 2021.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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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알을 섬긴 죄

Transgression


(전략). 문서를 스캔해 보관하듯 복사본을 만들어 머릿속에 넣었고, 스무 해 전의 모습과 비교했다. 여전히 돌처럼 견고한 인상이었다. 바위라기엔 이목구비가 갸름하고 조약돌이라기에는 날카로운 느낌이 강했다. 특유의 아우라 덕분인지 특색 없는 검은색 티셔츠와 면 반바지마저도 이채롭게 느껴졌다. - P57

"오랜만이다."
"으응."
반사적으로 대답한 우혁은 변성기가 지나도 한참이나 지난 목소리에 새삼스럽게 놀랐고, 자신이 더 이상 열다섯 살이 아니라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꼈다. 서른네 살짜리 보조강사의 존재가 이 극적인 재회를 누추한 것으로 전락시키고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 P58

오늘 낮에도 소년을 떠올리며 자위했다.
우혁은 그간의 방종을 고백해야 할지 고민했다. 긁어 부스럼일 가능성과 용서받을 가능성을 계량할 방법이 없었다. 감동적인 재회는 원래부터 글러먹었으니 이젠 자위가 아니라 실전을 시도해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 P59

"너, 똑바로 살지 않았어. 그렇지?"
뒤에 질문을 붙이고는 있지만 퍽 단정적인 말투였다. 경멸에 가까운 체념도 섞인 듯했다. (중략).
"미안해."
"기대하지도 않아. 뭘 기대하고 살린 게 아니야. 죽으나 사나 죄다 마찬가지야." - P59

"그러니까 넌・・・・・・ 재림 예수가 맞는 거지? 방송에서 나온것처럼?"
그때까지도 컴퓨터 화면은 <교주를 죽여라>를 재생하고 있었다. (중략). 소년은 화면을 힐끔 보더니 마뜩잖다는 표정으로 창을 닫아버렸다.
"방송은 엉터리니 잊어라. 내가 일전에 예수 역할을 뒤집어썼다는 거. 덕분에 날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까지만 사실이야. 나는 그저…………… 산에서 지내. 벌써 오래됐어." - P60

"북한을 통과해서 중국으로 간다는 거지."
"거기까지 따라오라고 하진 않으니 염려 말아. 너는 빌딩숲벗어날 때까지만 날 태워주고, 그다음부터는 내가 걸어서 가는 거야. 나는 한국 땅에는 더 못 있겠어. 성가신 인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들어서는 지리산이든 태백산이든 천지사방이 등산객으로 한가득이야"
이런 대사를 영화관 스피커가 아니라 소년의 입으로 직접듣고 있다는 사실이 짜릿한 경악으로 다가왔다. 그것도 한밤중의 직장에서 우혁은 한숨짓던 김 형의 얼굴을 떠올리면서상식적으로 처신하려 노력했지만, 이 상황에서 상식을 고수하는 인간은 일상을 종교처럼 떠받드는 유형일 거라고도 생각했다. - P61

소년이 대뜸 채무상환을 요구하더라도 거절할 명분이 없다는 사실, 거절하고 싶지조차 않다는 사실, 다만 지금의 선택에 여전히 공장제 낫 이상의 가치가 없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이 우혁을 괴롭혔다. 서른네 살은 현실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나이였다. 그에게는 특히 전력투구가 필요했다. - P63

우혁은 김형이 안겨준 기회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도박을가르친 입장에서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그건 엄연한 자선이자 후원이었다. 그 너그러움이 광신도들에게 습격당할 위험까지 아우를 리가 없었다. - P63

현실이라는 개념에는 정말로 다양한 층위가 겹쳐 있다.
10년 전이라면, 내가 스물네 살이면 좋았을 텐데......
혹은 어엿한 직장인이라도 되었더라면..
이 일의 여파로 인해 학원에서 쫓겨날 가능성이 두려워지는 한편, 자신이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었더라면 결심이 훨씬 쉬웠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P64

"뭐든 해줄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만, 원하는 게 있으면말해봐라. 함부로 떠들어대지만 않는다면 나는 상관없어."
"이를테면 어떤......?"
"소원은 네가 생각해내야지. 가족 건강이라도 살펴줄까?
혹은 돈 나올 구석을 봐줄 수도 있고."
우혁의 가족이라면 부모님뿐이었다. 두 분 다 정정한 편이었지만 연세가 있는 만큼 어디든 삐걱거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 P65

"여기로 온 건 절반만 우연이라고 하자. 나는 세상 돌아가는 꼴을 알아. 복권 번호를 알아맞힐 수준은 아니래도,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나를 얼마나 믿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대강 보이는 거다. 내일도 마찬가지야. 이 건물로 들어가야 해서 여기로 도망친 거고, 3층으로 빠져나와야 해서 3층으로 온 거다."
"또?"
"이대로면 넌 지옥에 가게 돼." - P66

첫째로는 이 구도가 리바이어던이 신을 집어삼키는 아이러니를 기묘한 방식으로 재현한다고 느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자신의 불균등한 지적 역량 때문이었다.
어째서 나는 정치철학과 신학을 아는데 정신 차리고 사는법은 모르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 정신의 유구한 신비였다.
하여간 결심이 섰다. - P67

"그때 목숨값으로 낫 하나 가져오라고 했잖아. 어디에 쓴거야?"
"잡풀과 덩굴 베는 용도로 썼지."
"그리고?"
"잘 쓰다가 녹슬어서 버렸다."
소년은 간이침대에 눕자마자 곧장 잠들었고, 우혁은 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묵상에 잠겼다. - P67

그런데 예수가 잠을 자던가? 예수는 사람의 몸을 지녔으므로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도깨비라면 어떤가?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은? 한편 내가 떨어질 지옥은 게헨나인가 한랭지옥인가 타르타로스인가?
그런 것들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지옥을 택함으로써 생명의 빚을 청산하게 되었다는 사실, 소년이 자신 앞에 있다는 사실이 빛나는 해방감을 안겨다 줄 뿐이었다. - P68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 김 형에게서 통화가 가능하냐며 답신이 왔다. 예상한 반응이었고 욕먹을 각오까지 미리 해두었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닥쳐오니 숨이 턱 막혔다. - P68

"넌 강의도 뛰는 놈이 설명하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냐?"
"형, 내일 얼굴 보고 설명할게요. 통화로 하기엔 진짜 애매한 사안이라서 소란 피울 친구 아니에요. 그냥 자리만 차지하다가 갈 거예요. 그것만 해결되면 다음 달, 다다음 달 월급안 받아도 돼요. 1년은 보너스 생각도 안 하고 최저 시급으로 일할 수 있어." - P69

"그걸 지금 믿으라는 거냐"
"그래서 설명 못 했어요."
"난 너한테 도박 가르친 걸 맨날 후회해."
"예."
"학원에 너 데려온 건 후회하지 않게 해라."
"죄송합니다." - P70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더 하겠냐."
스피커가 긴긴 한숨을 토해냈다.
"늦었다. 오늘은 일단 자고, 내일 얼굴 보면서 이야기하자."
김형은 정말이지 상식적이고 선량한 사람이다이에서는세상 사람 모두가 상식적이고 선량한데 자신만 이 꼴이라서 우혁은 조금 울었다.
울면 문제가 해결되나? - P71

"인쇄소는 서울에도 있는데 왜 하필 파주에 맡겼대냐?"
"인터넷 최저가 업체로 골라서 그렇죠, 뭐. 원래 파주에 인쇄소가 많기도 하고요."
"그 원장이라는 인간은 자기 차가 없어?"
"원장님은 강의하시고 파주는 잡일하는 머슴이 다녀와야죠. 대뜸 자기 차 맡기기도 애매하고요. 저야 일 시작한 지겨우 한 달 차인데"
"인쇄소에서 퀵으로 바로 쏘면 될 것을." - P72

"길게 말할 것 없고, 휴대폰에 은행 앱 깔아놨지. 열어봐라. 이체 내역을 보자."
그제야 우혁은 아버지가 떨떠름한 반응을 보인 이유를 깨달았다. 당신께서 걱정하는 것은 주먹구구식 학원 운영이나 아들의 운전 실력이 아니었다. 도박중독에 시달리는 아들놈이 월급을 허랑방탕하게 날린 다음 급전을 위해 차를 끌고나갈 가능성이었다. 비록 제도권 금융은 타인 명의 자동차로 담보대출을 잡아줄 만큼 허술하지 않았지만, 제도 바깥에서는 모든 게 가능했다. - P73

"내일 파주 가는 거 말이다. 내가 운전해도 되냐?"
"아버지 연세도 있으신데 아들놈 일로 고생시켜야 되겠습
"니까."
"우혁아, 아버지로서 진솔하게 이야기하마."
"예."
"나는 널 안 믿는다."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죄송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도 무슨 일인지 솔직히 털어놓아봐라." - P74

신갈IC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갔다가 내일 일정을 떠올리며방향을 틀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4시가 넘어 있었다. (중략). 그 기원이 무색하게도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학원의 일상이 우혁을 덮쳤다.
"최 선생, 일찍 나왔네요?"
"아, 예. 좋은 아침입니다박 선생은 고개를 까닥이더니 곧장 본론을 꺼냈다.
"어제 애들 답안 첨삭해놓고 간 거 2차로 한번 봤어요. 잘하셨던데,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너무 원론적, 형식적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강의에서 강조했던 풀이 전략 위주로 꼼꼼히 살펴봐주시면 좋지 않을까, 저는 그런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강의는 제가 하다 보니." - P76

"그나저나 어제 원장님이랑 무슨 일 있었어요? 최 선생 오면 바로 2번 강의실로 보내라던데, 분위기가 심상찮아 보여서."
"상의할 부분이 있어서요. 그럼 잠깐 가보겠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잘해요."
이건 분명 격려라기보다는 엄포였다. 원장 끈으로 들어왔다는 걸 피차 아는데, 그 끈마저 헐거워지면 당신 입지가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 P77

"최우혁 이 새끼야, 왜 이렇게 늦었어!"
"아직 9시도 안 됐는데요. 오전 타임 강의하는 것도 아니고10시까지만 오면......."
"너 설마 새벽에 그래놓고 정시 출근할 생각이었냐?"
"죄송합니다."
김형은 강의실 중간의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앉았고, 소년은 바로 뒷자리에 멀뚱히 자리 잡고 있었다. - P78

"나는 믿기로 했다. 이유는 일단 두 가지야."
"예."
"첫째, 난 네 돌발 행동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를 내봤자 너는 계속 죄송하다고만 할 테고, 그러면 나는 더 화가 날 거야. 나도 이제 슬슬 혈압 관리를 해야 할 나이인데. 그래서 민사소송을 걸 일만 아니면 바람이 부는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은 바람이 갑자기 지랄맞게 불고 번개도 치는구나…………"
"예....."
"둘째, 나는 어젯밤에 네 연락을 받고 이 자식이 드디어 미쳤나 싶었다. 혹은 텔레그램에서 불법 알바 받아서 하느라 거짓말을 늘어놓는 거거나 아침 되자마자 학원으로 달려왔더니 진짜로 남자애가 앉아 있더라. 도깨비인지 고등학생인지보자 싶어서 임진왜란도 직접 구경하셨냐 물어봤더니 자기는 그런 건 잘 모른다. 그러면 뭘 아느냐. 나는 예전에 중국을거쳐 한국으로 왔다. 그 전에는 유럽과 중동을 돌아다녔는데그때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보았으며 피오레의 요아킴과도 알고 지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이게 역사책을읽고 소설을 쓰는 건지, 실화인지 분간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인터넷에서 아무 라틴어 문구나 찾아서 읽어보라고 시켰지. 읽더라. 그냥 다 읽어."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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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본문에서 인용되거나 간접적으로 참조된 성경 구절은 기본적으로 개역개정 역본을 따른다. 그러나 조강현이 극을 이끌어나가는 초점자로 기능하는 구간에서는 개역개정 대신 공동번역 역본이 사용되었다. 각종 고유명사에 대한 표기법 차이 역시 위의 기준을따르나(가령 조강현의 내적 독백에서는 예레미야의 아버지가 ‘힐기야‘가 아닌 ‘힐키야‘로 칭해진다), 성경과 무관한 고유명사(텔레비전, 포클레인 등)의 경우 표준국어대사전을 따른다. 작중인물들의 나이 표기는 만 나이를 따른다.

#1

탕아
The prodigal


"요새 어쩌고 사냐?"
김 형이 그렇게 물었을 때, 우혁은 반가움과 반감을 동시에느꼈다. 가족에게도 변변한 충고를 듣지 못한 세월이 여러 해였고 그는 이제 서른넷이었다. 직업은 없었다. 아직 만회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가끔은 돌아오지 못할 탕아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두려워졌다.
"말도 마세요, 대책 없죠."
"너 좆같이 사는 거 아니까 사정을 자세히 읊어보라고." - P11

"저번에 통화로 말한 게 다예요. 여기저기 다니다가 본가돌아온 지 세 달쯤 됐어요. 기운이 영 없어서 쉬고 있는데,
되는대로 일자리 구하고 개인 회생 알아보려고요. 은행 빚은다 합쳐서 얼마인지 기억이 잘 안 나긴 하는데. 일단 휴대폰명의부터 살린 다음, 새마을금고 가서 통장 새로 만들어야해요. 원래 계좌는 싹 압류 들어와서 묶였거든요."
"지금까지 연락은 어떻게 했어?"
"방에 누워만 있으려니까 심심해서 말 걸어봤죠."
"아니, 자기 명의 휴대폰도 없는 놈이 연락을 어떻게 했냐고, 방법을 묻잖아." - P12

"엄마가 회선 뚫어줬죠, 뭐....... 소액결제깡 하지 말라고 선불폰으로......"
"나한테도 돈 빌리려고 나온 거 아니지? 준희가 너 이름 듣고 펄펄 뛰더라. 한 삼백 떼였다던데." - P13

"형이 그렇게 말하면 화날 것 같은데."
우혁은 얼굴을 찌푸렸다. 부모님 대하기 구스러운 것과별개로 제삼자가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을 건 뭐란 말인가. 그것도 오래간만에 얼굴 한번 보자며 불러놓고. 게다가 그가이렇게 된 데에는 김 형의 지분이 상당했다. - P13

"그러니까 그 또라이 기질이라는 게…………. 됐다. 하던 이야기나 하자."
김형의 사정은 이랬다. 운영 중인 학원이 발 넓은 학부모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탄 덕분에 한 명을 더 뽑아야 한다는거였다. 다만 일손이 달리는 분야가 다종다양한 까닭에, 무엇이든 시키면 할 수 있는 제너럴리스트가 필요하다고 했다.
"짧게 줄이면 총무 겸 조교 할 사람이 필요하다, 이거 아니에요?"
"야, 총무는 절대 아니지. 너한테 돈 만지는 일 시킬 생각없다." - P14

"과외 다 끊고 게임만 한 지 몇 년 됐죠. 국어 문항 납품이야 부업인데, 4문항 한 세트 작업해봐야 기껏 몇십 받아요. 노트북 전당포에 넘기고 통장까지 막힌 다음에는 일 자체를못 하는 중이고 사교육 판은 거의 모른다 봐야죠. 2, 3년만쉬고 와도 판세가 확 바뀌어 있는데……………."
"하여간 전임강사 시키려는 거 아니야. 조교 업무랑 행정처리 주로 하면서 겸사겸사 땜빵만 맡으면 돼. 강사랑 성향안 맞으니까 다른 학원 알아보겠습니다 하는 학생들 있잖아. 그런 애들 서넛 모아서 수업 진행하고, 그게 또 적성에 맞으면 타임 수 늘리고, 너도 제대로 된 회사 취직하긴 글러먹었는데 세후 이백오십 받으면서 시작하면 노난 거 아니냐." - P15

"어차피 데카르트든 플라톤이든 고등학생 상대로 떠들 정도로는 알고 있지 않냐. 인문논술이 수학 같은 과목도 아니고, 머리 잘 굴러가고 글 잘 쓰면 끝이지. 정 안 되면 뒷방에서 첨삭하고 잡무나 맡아."
"아버지가 접때 나더러 그러던데요. 눈빛이 다 죽은 게 귀신 같다고."
"아니야, 너 놀고먹느라 때깔이 괜찮아. 딕션도 멀쩡하고.
면도한 다음 피부 관리 가볍게 하고, 옷만 사람처럼 입으면돼. 도박도 끊었다면서." - P16

"지금부터 준비 시작해서, 내달 초에 시범강의 한번 해라.
일단 바로 삼십 보내줄 테니까 머리 자르고 옷 사입어 깔끔하게 너 나이가 얼마인데 그 이상한 반팔 후드 티에 청바지......."
"현금 아니면 못 받아요. 그냥 엄마 카드 쓸게요." - P17

(전략). 학계의 최신 견해니, 발산적 사고니 하는 말로 치장했지만 경쟁자를 견제하려는 속내가 뻔히 보였다. 한편 국어 실전 모의고사 출제 이력이 거슬리는지 국어 강사도 떨떠름한 표정을 짓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나머지 한 명과 학부모 출신 상담실장이 뜨뜻미지근한 지지를 보내준 덕분에 낙하산은 무탈히 착륙했다. - P18

물론 시범강의는 10라운드짜리 경기의 첫 판에 불과했다. 직설적으로 대화가 오가진 않았으나 정체성을 확실히 하라는 요구가 살갗으로 느껴졌다. 경쟁자인지, 머슴인지. 학원장의 학교 후배라는 포지션마저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 P18

무엇보다도 계약서를 잘못 썼다. 이백오십을 모두 월급으로 퉁친 탓에, 스페어로 맡은 수강생이 늘어나더라도 득 될게 없었던 것이다. 역할마저 애매모호한지라 강사들이 떠맡기는 잡무를 거절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김 형이 선심 쓰듯 성과급을 들먹이긴 했으나 속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진퇴양난이었다. - P19

우혁은 일단 준희에게 100만 원을 송금하면서 사과 메시지를 보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날려버릴 돈의 총액을 한껏 낮추고 싶었던 것이다. 생각난 김에 다른 친구들에게도자잘한 빚을 갚았더니 딱 30만 원이 남았다. 운만 따르면 열배, 스무 배도 될 수 있는 금액이었다. - P20

거의 밤을 지새우다시피 한 다음 가까스로 출근했다. 사무실에는 서면 첨삭을 기다리는 논술 답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논제는 작년도 Y대학교 논술고사 기출 문항을 변형한 것으로, 세 개의 국어 제시문과 한 개의 영어 제시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P20

첨삭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프리셀 게임을 최고 난도로 시작했다. 30분이 걸려 한 판을 겨우 깼더니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새끼...... 아니, 최 선생. 직장에서 게임을 하면 돼, 안
"돼?"
"프리셀인데요."
우혁은 심드렁하니 내뱉었다. 김 형은 상체를 그려 우혁의 목을 조르듯 끌어안더니 귓전에 속삭였다.
"프리셀이든 뭐든 카드 가지고 노는 꼴 한 번만 더 걸려봐가만 안 둬"
"다음 달 보너스 제대로 안 챙겨주면 바로 관두고 필리핀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 P21

김형은 점심시간마다 우혁을 끌고 다녔다.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일단은 여름방학 시즌인지라 점심시간을 끼고 오전타임에 강의하는 강사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우혁은 목요일 오후 타임 강의를 빼면 계속 사무실에 있었으므로,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기 편했다. 물론 특별 관리를 하겠다는 의도 역시 있을 것이다. - P22

"보너스 안 줄 거면 강사들 단도리나 쳐요. 내가 자기네 파이 먹으러 들어온 줄 아는 것 같아."
"페이가 비율제라서 그렇지, 뭐. 담당 학생 하나 줄면 이삼십이 턱턱 까이니까. 나도 계속 달래고는 있는데 어쩌겠냐."
"그냥 사정 오픈하지 그래요. 재활 훈련하러 온 거지 정규강의 가져갈 일 없다고. 난 오픈해도 괜찮은데." - P22

우혁은 마음에 담아뒀던 불만을 차례대로 털어놓았다. 논술을 맡은 박 선생은 초면에 그렇게나 시비를 걸어놓고 이제는 수업 연구 초안을 떠넘기다시피 한다는 것, 다른 강사들도 이것저것 시키는데 거절할 명분이 마땅치 않다 보니 일거리가 한없이 쌓인다는 것, 집에서 준비해 오는 것까지 합하면 근무 시간이 하루에 서너 시간쯤 되리라는 것. - P23

"잠 부족한 게 눈에 보여서 그런다. 어제는 월급도 들어갔고."
"어젯밤에 재발할 뻔한 건 사실인데, 참느라 못 잔 거예요,
참느라. 나도 노력 많이 해요."
김형은 상체를 슬쩍 뒤로 빼더니 우혁을 꼼꼼히 뜯어봤다. 의심스러운 피의자를 취조하는 형사 같았다. 그는 김형의 자세가 바로 잡히고서야 겨우 안심했다. - P24

"서울대 나온 양반이 하는 정신과인데, 가서 잠이 안 온다고하면 졸피뎀이랑 자낙스에 다른 거 몇 개 섞어서 줘 기다리는 시간만 빼면 처방전 받아서 나오는 데에 30초쯤 걸릴걸."
"진짜 자판기네."
김 형은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병원에 얽힌 가십을 주절거렸다. (중략). 뒷소문에 따르면 입시 컨설턴트 몇몇과 친하게 지내면서, ‘공부 잘하는 약‘을 찾아다니는 학부모들을 병원으로 끌어들인다고도 했다. - P25

여기는 병원과 약국이 학원만큼이나 많은 이상한 동네였다. 하나의 외계 행성이었다. 역삼중학교에서 시작되어 휘문고등학교로 끝나는 선분을 지름 삼는 원이 지층과 맨틀을이루고, 그 안쪽 은마니 래미안 대치팰리스니 하는 아파트에서 쏟아지는 인간들의 에너지가 내핵과 같은 열기로 끓어오르는 곳. - P25

"그러면 생명이라는 것도 사실은 종류가 다른 게 맞죠? 국어에서 100점을 맞아도 수학은 9등급일 수 있는 것처럼, 어느 관점에서는 살아 있지만 달리 보면 아예 속에서부터 죽어있을 수 있다거나 하는……………."
"그것까지도 너무 당연한 소리지." - P27

 2415번 초록색 지선 버스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듯 정지한 자동차들의 패턴은 심리 치료용 만다라 그림을 연상시켰다. 으스러지듯 꺾여 올라간 자동차 보닛이 곧시작될 공연을 예고하듯 번쩍거렸고,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창 파편들 역시 햇빛을 이리저리 난반사함으로써 조명을 더했다.
"야, 아까 그 소리가 이거였구나. 난리 났다."
"난리 났네요."
김형이 헛웃음 섞인 감탄을 터뜨리자 우혁도 따라 했다.
"이게 다 얼마짜리 사고나 기본이 아우디에 벤츠, 제네시스……………. 저기 마세라티도 있네."
"여기 스쿨존 아니에요? 일부러 갖다 박아도 이러긴 어렵겠다." - P28

학원가 한복판에 펼쳐진 다중 추돌 사고 현장은 잘못 편집된 영화의 한 대목처럼 맥락이 결여되어 있었다. 하늘에서거대한 손이 내려와 망가진 자동차들을 집어 올리고 교통 흐름을 복구하더라도 그러려니 할 듯했다. - P29

하여간 이 지긋지긋한 감각. 지긋지긋하도록 반가운 감각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한 심호흡은 언제부터인가 헐떡임으로 변해 있었다. 어깨를 떨던 우혁은 단단한 게 발치를 건드리는 것을 깨닫고 아래를 보았다. 뜯겨 나온 전조등덩어리가 참수당한 머리통처럼 나동그라져 있었다. 이것마저 반가웠다. - P30

"먼저 가서 아무거나 시켜줘요. 화장실 좀 다녀오게..."
우혁은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학원 빌딩으로 뛰어 들어갔다. 막 입구에서 나오던 학생들이 흠칫 놀라 물러섰고, 숨길마음도 없는 듯 종알거렸다. 저 사람 웃는 거 이상하지 않아? 못 들은 척 비상계단 문을 열고 있으려니 진득한 시선이 등줄기를 쿡쿡 찔러댔다. - P31

우혁은 계곡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던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며 사정했다.
그제야 몸의 떨림이 멎으며 현실이 전류처럼 등줄기를 휩쓸었다. 이곳이 서울의 중심부이자, 한국에서 가장 번화한 학원가이자 자신의 일터라는 현실. 김 형은 중국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중이고, 아까 마주쳤던 학생들은 형의 학원에다녔고, 사무실로 돌아가면 첨삭을 기다리는 논술 답지들이 있을 터였다. 주제가 뭐였더라? 자기실현적 예언? 이 모든 우연이 공교롭게만 느껴졌으며 이래서야 멀쩡히 살기 어렵겠다는 건조한 판단마저 미래를 견인하는 듯했다. 흔적을 치운 뒤 손을 씻고 있으려니 눈알이 뜨뜻해졌다 - P33

광양 옥룡면에는 호남정맥 제일봉인 백운산이 있으며 거기에서 뻗어 나오는 물줄기 중 가장 길고 굵은 것은 광양만에까지 닿는다. (중략). 즉 땅도 물도 인간의 소유가 아니지만 계곡은 아케이드형 상가에 딸린 캠핑장처럼 쓰인다. - P33

 물밑 바위틈에 어색하게 끼어든 수박도, 찌그러진 사이다 캔도, 고기 굽는 연기도, 소란스러운 웃음소리도 모두 사라지고 나면 여기에는 어떤 광경이 펼쳐져 있을까. - P34

30분가량 걸어 도착한 계곡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지금여기의 바윗돌과 저 위의 구름이, 땅과 물과 하늘이 하나로 접붙어 내달렸다. 계곡 전체가 발을 구르며 허공을 향해 서서 가고 있었다. - P34

열다섯 살의 소년은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상태로 상류를향해 걸음을 옮겼다. 빗줄기가 워낙 거센 탓에 우비를 걸쳤는데도 바짓단 밑으로 물이 줄줄 샜다. 가끔은 앞을 똑바로 바라보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텅 빈계곡은 매구간이 새롭게 느껴졌으며 모든 잎사귀와 뿌리줄기들은 눈가에 제각기 다른 빛을 남겼다. - P35

우혁은 아직도,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최후의 한 발짝을내디뎠는지 헤아려보곤 했다.
그 동작은 건방진 장난일 수 있었다. 괜히 아무 아파트에나 들어가서 낯선 집의 벨을 누른 후 층계참에 숨어 위기를 모면하듯이, 왼발을 불쑥 내밀었다가 되돌림으로써 일상의 견고함을 재확인하려던 것일지도 몰랐다.  - P36

(전략).
이내 물줄기가 피를 닦아내며 눈앞을 밝혀주었다. 굵기가동전만 한 나뭇가지가 보였다. 한쪽 끝은 바위틈에, 다른 쪽끝은 우혁의 시야 한쪽 가장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물줄기가계속 쏟아져 내려왔지만 이상하게도 시야는 같은 자리에 고정된 느낌이었다. 운 좋게 널찍한 바위에 떨어진 걸까?  - P37

 긴 머리카락을 등줄기까지 길러 묶은 소년이었다. 눈 밑이 깊숙이 들어간 데다 뺨도 홀쭉한 탓에 해를 등지고 서면 얼굴에 그림자가 강하게 지는 타입이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눈동자만큼은 선명한 빛을 발했다. 티셔츠와 반바지는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웠고 한쪽 손에 들린 손도끼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마른 몸에, 키는 170센티미터도 되지 않을 듯했지만 이상하게도 다부진 느낌이었다.  - P38

"야, 도망칠 필요 없으니 가만있어. 몇 가지만 묻고 보내줄거야."
소년은 호구조사라도 하듯 우혁의 신상명세를 거듭 물었다. 나이는 몇 살인지, 여기에 사는지 잠깐 놀러 왔는지, 놀러왔다면 친척 집이 근처에 있는지, 근처에 있다면 어디인지, 서울로 올라가는 건 언제인지, 어쩌다가 계곡물에 휘말렸는지, 혹시 삶에 고민이 많았는지, 죽으려 했는데 괜히 살아남았다 싶어서 후회되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 계획인지. - P39

"다시 볼 생각 말아. 네가 얼씬거리고 있으면 가까이도 안갈 테니."
"여기 근처에 살아? 아니면 산에서?"
"네가 알 문제 아니야."
"나는 아까…………… 죽었다가 살아난 게 맞지?"
"알아서 생각해."
"고마워." - P40

 소년은 짧게 침묵하더니고개를 홱 돌려 우혁을 바라보았다.
"너 이거 확실히 알아둬. 이번에는 변덕 한번 부려준 거야. 내가 먹고 자는 곳에서 어린놈이 죽으면 재수 없어서. 다음에는 일부러 와서 나자빠져도 도울 일 없어." - P40

"만약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넌 정말로 죽어. 약속해."
산을 완전히 내려왔을 때 소년은 그렇게 말했고 우혁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대체로 지켜졌다. 그는 마을 푯돌 앞에 목숨값을 바친 후 그대로 물러났고, 지금까지 어디 있었느냐며 호들갑을 떠는 가족들 앞에서는 침묵을 지켰다. - P41

충족되지 않는 갈망은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므로, 이따금소년을 향한 고마움이 기우뚱하며 원망으로 변하려 했다. 염치 있는 인간이 되려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 P42

도박중독자라서?
사실은 도박이 아니라 스릴에 중독되어 있어서?
죽음을 경험한 후 되살아나서?
평생 갈 경험을 남들과 나눌 수 없어서?
소년이 말하기를, 남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우혁은 죽으리라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허다했기 때문에 다시 죽는 상황쯤은 큰일도 아닌 듯 느껴졌다.  - P43

"그런데 너 게이는 아니지?"
김형은 그가 게이는 아니니까 괜찮다고 믿으려는 것처럼,
혹은 차라리 커밍아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것처럼 물었다. (중략). 우혁은 자신이 신입생 시절 철학 동아리와 퀴어 동아리 중에서 고민했음을 알려줄까 고민했다. 당시는 김 형에게 도박을 배우기 전이었으므로, 소년을 떠올리며 자위하는 것이 성애적 충동 때문이라 믿을 수 있었다. - P43

"가능성이야 있겠지만, 게이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사안은아니죠, 아무래도."
그날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며칠이 지나 김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인사말도 없이 본론이 시작됐다.
"아까 자는데 꿈에 네가 나오더라."
"나와서 뭐 했는데요?"
"날 전기톱으로 토막 내서 죽였어. 아무 이유도 없이, 얌전히 있다가 그냥"
"그런 거 안 해요. 할 생각 전혀 없어요." - P44

"형, 진짜 솔직히 말해서, 나한테 전기톱이 있어서 누군가를 잘라야 한다면...... 내 왼쪽 다리를 자르고 싶어요. 쓸려 내려갔을 때 그 부분은 심하게 다치지 않았던 것 같거든...... 그래서, 그것만 한 번 더 잘라내면 완전히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다른 사람한테는 정말 아무 관심도 없어."
중얼거림은 대답으로 시작되었지만 정신 차려보니 혼잣말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혁은 후회했다. - P45

"다 식는다. 밥이나 먹어라."
점심 메뉴는 평범했고 뉴스는 대체로 나빴다. 타국의 전쟁과, 한국이 참전할 수도 있는 전쟁과 정치적 내전에 휘말린 대국(大國)들의 소식이 죽 이어지더니 비극의 규모가 확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비극이었다. 가계 부채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고도 했고 어느 역 앞에서 칼부림 사건이 났다고도 했다. - P46

부활을 위해 산 제물을 바치려는 사이비 종교 이야기였다. 제목은 ‘교주를 죽여라. 새천년파라 불리는 집단이었는데, 생수를 1000만 원에 팔아먹거나 교주를 위해 환락궁을차리는 부류와 비교하면 행태가 묘했다. 상업화된 음악 시장에 혜성처럼 등장한 익스트림 메탈 뮤지션이라고나  할까. - P47

방송 화면에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따온 구절이 나타나더니 새천년파 출신 폭로자와의 인터뷰가 뒤이었다. 새천년파는 그들의 교주가 재림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저버리고 도망쳤기 때문에 구원이 한정 없이 미뤄지는 중이라고 믿었다. - P47

우혁은 PD들의 기획력에 내심 감탄했고,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탐사 보도 방송을 상상했다. 그러자 김이 확 새서 밥이나 먹기로 했다. 주인장도 방송 내용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채널을 되돌렸다. 마뜩잖은 식사를 마친 후, 우혁은 학원 교무실 한구석의 간이침대에서 잠을 청했다. - P48

방송사 홈페이지에서 <교주를 죽여라>를 잠깐 보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온라인 카지노 사이트를찾아 들어갔다. 기분 나쁜 일과 그냥 나쁜 일이 있다면, 차라리 후자를 택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돈을 걸고 잃는 일에조차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점심으로 최고급 스테이크를 만끽한 사람이 저녁의 콘비프 통조림에 만족하겠느냔 말이다 - P49

우혁은 엉뚱한 생각에 실실 웃었다.
그는 신비 체험을 한 것치고는 강경한 유물론자이자 실증주의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로 부활을 겪어본 사람에게 세간의 이야기들은 엉터리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 P50

 그는 곧장 교무실로 들어가는 대신 학원 복도를 멍하니 배회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묵상이 길어지기도 전에 불청객이 불쑥 나타났다. 경찰복을 차려입은 2인조가 유리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욕하며 문을 열었다.
"여기 강사분 되십니까?"
"강사는 아니고 강사 비슷한 건데요."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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