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바알을 섬긴 죄
Transgression
(전략). 문서를 스캔해 보관하듯 복사본을 만들어 머릿속에 넣었고, 스무 해 전의 모습과 비교했다. 여전히 돌처럼 견고한 인상이었다. 바위라기엔 이목구비가 갸름하고 조약돌이라기에는 날카로운 느낌이 강했다. 특유의 아우라 덕분인지 특색 없는 검은색 티셔츠와 면 반바지마저도 이채롭게 느껴졌다. - P57
"오랜만이다." "으응." 반사적으로 대답한 우혁은 변성기가 지나도 한참이나 지난 목소리에 새삼스럽게 놀랐고, 자신이 더 이상 열다섯 살이 아니라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꼈다. 서른네 살짜리 보조강사의 존재가 이 극적인 재회를 누추한 것으로 전락시키고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 P58
오늘 낮에도 소년을 떠올리며 자위했다. 우혁은 그간의 방종을 고백해야 할지 고민했다. 긁어 부스럼일 가능성과 용서받을 가능성을 계량할 방법이 없었다. 감동적인 재회는 원래부터 글러먹었으니 이젠 자위가 아니라 실전을 시도해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 P59
"너, 똑바로 살지 않았어. 그렇지?" 뒤에 질문을 붙이고는 있지만 퍽 단정적인 말투였다. 경멸에 가까운 체념도 섞인 듯했다. (중략). "미안해." "기대하지도 않아. 뭘 기대하고 살린 게 아니야. 죽으나 사나 죄다 마찬가지야." - P59
"그러니까 넌・・・・・・ 재림 예수가 맞는 거지? 방송에서 나온것처럼?" 그때까지도 컴퓨터 화면은 <교주를 죽여라>를 재생하고 있었다. (중략). 소년은 화면을 힐끔 보더니 마뜩잖다는 표정으로 창을 닫아버렸다. "방송은 엉터리니 잊어라. 내가 일전에 예수 역할을 뒤집어썼다는 거. 덕분에 날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까지만 사실이야. 나는 그저…………… 산에서 지내. 벌써 오래됐어." - P60
"북한을 통과해서 중국으로 간다는 거지." "거기까지 따라오라고 하진 않으니 염려 말아. 너는 빌딩숲벗어날 때까지만 날 태워주고, 그다음부터는 내가 걸어서 가는 거야. 나는 한국 땅에는 더 못 있겠어. 성가신 인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들어서는 지리산이든 태백산이든 천지사방이 등산객으로 한가득이야" 이런 대사를 영화관 스피커가 아니라 소년의 입으로 직접듣고 있다는 사실이 짜릿한 경악으로 다가왔다. 그것도 한밤중의 직장에서 우혁은 한숨짓던 김 형의 얼굴을 떠올리면서상식적으로 처신하려 노력했지만, 이 상황에서 상식을 고수하는 인간은 일상을 종교처럼 떠받드는 유형일 거라고도 생각했다. - P61
소년이 대뜸 채무상환을 요구하더라도 거절할 명분이 없다는 사실, 거절하고 싶지조차 않다는 사실, 다만 지금의 선택에 여전히 공장제 낫 이상의 가치가 없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이 우혁을 괴롭혔다. 서른네 살은 현실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나이였다. 그에게는 특히 전력투구가 필요했다. - P63
우혁은 김형이 안겨준 기회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도박을가르친 입장에서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그건 엄연한 자선이자 후원이었다. 그 너그러움이 광신도들에게 습격당할 위험까지 아우를 리가 없었다. - P63
현실이라는 개념에는 정말로 다양한 층위가 겹쳐 있다. 10년 전이라면, 내가 스물네 살이면 좋았을 텐데...... 혹은 어엿한 직장인이라도 되었더라면.. 이 일의 여파로 인해 학원에서 쫓겨날 가능성이 두려워지는 한편, 자신이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었더라면 결심이 훨씬 쉬웠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P64
"뭐든 해줄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만, 원하는 게 있으면말해봐라. 함부로 떠들어대지만 않는다면 나는 상관없어." "이를테면 어떤......?" "소원은 네가 생각해내야지. 가족 건강이라도 살펴줄까? 혹은 돈 나올 구석을 봐줄 수도 있고." 우혁의 가족이라면 부모님뿐이었다. 두 분 다 정정한 편이었지만 연세가 있는 만큼 어디든 삐걱거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 P65
"여기로 온 건 절반만 우연이라고 하자. 나는 세상 돌아가는 꼴을 알아. 복권 번호를 알아맞힐 수준은 아니래도,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나를 얼마나 믿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대강 보이는 거다. 내일도 마찬가지야. 이 건물로 들어가야 해서 여기로 도망친 거고, 3층으로 빠져나와야 해서 3층으로 온 거다." "또?" "이대로면 넌 지옥에 가게 돼." - P66
첫째로는 이 구도가 리바이어던이 신을 집어삼키는 아이러니를 기묘한 방식으로 재현한다고 느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자신의 불균등한 지적 역량 때문이었다. 어째서 나는 정치철학과 신학을 아는데 정신 차리고 사는법은 모르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 정신의 유구한 신비였다. 하여간 결심이 섰다. - P67
"그때 목숨값으로 낫 하나 가져오라고 했잖아. 어디에 쓴거야?" "잡풀과 덩굴 베는 용도로 썼지." "그리고?" "잘 쓰다가 녹슬어서 버렸다." 소년은 간이침대에 눕자마자 곧장 잠들었고, 우혁은 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묵상에 잠겼다. - P67
그런데 예수가 잠을 자던가? 예수는 사람의 몸을 지녔으므로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도깨비라면 어떤가?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은? 한편 내가 떨어질 지옥은 게헨나인가 한랭지옥인가 타르타로스인가? 그런 것들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지옥을 택함으로써 생명의 빚을 청산하게 되었다는 사실, 소년이 자신 앞에 있다는 사실이 빛나는 해방감을 안겨다 줄 뿐이었다. - P68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 김 형에게서 통화가 가능하냐며 답신이 왔다. 예상한 반응이었고 욕먹을 각오까지 미리 해두었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닥쳐오니 숨이 턱 막혔다. - P68
"넌 강의도 뛰는 놈이 설명하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냐?" "형, 내일 얼굴 보고 설명할게요. 통화로 하기엔 진짜 애매한 사안이라서 소란 피울 친구 아니에요. 그냥 자리만 차지하다가 갈 거예요. 그것만 해결되면 다음 달, 다다음 달 월급안 받아도 돼요. 1년은 보너스 생각도 안 하고 최저 시급으로 일할 수 있어." - P69
"그걸 지금 믿으라는 거냐" "그래서 설명 못 했어요." "난 너한테 도박 가르친 걸 맨날 후회해." "예." "학원에 너 데려온 건 후회하지 않게 해라." "죄송합니다." - P70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더 하겠냐." 스피커가 긴긴 한숨을 토해냈다. "늦었다. 오늘은 일단 자고, 내일 얼굴 보면서 이야기하자." 김형은 정말이지 상식적이고 선량한 사람이다이에서는세상 사람 모두가 상식적이고 선량한데 자신만 이 꼴이라서 우혁은 조금 울었다. 울면 문제가 해결되나? - P71
"인쇄소는 서울에도 있는데 왜 하필 파주에 맡겼대냐?" "인터넷 최저가 업체로 골라서 그렇죠, 뭐. 원래 파주에 인쇄소가 많기도 하고요." "그 원장이라는 인간은 자기 차가 없어?" "원장님은 강의하시고 파주는 잡일하는 머슴이 다녀와야죠. 대뜸 자기 차 맡기기도 애매하고요. 저야 일 시작한 지겨우 한 달 차인데" "인쇄소에서 퀵으로 바로 쏘면 될 것을." - P72
"길게 말할 것 없고, 휴대폰에 은행 앱 깔아놨지. 열어봐라. 이체 내역을 보자." 그제야 우혁은 아버지가 떨떠름한 반응을 보인 이유를 깨달았다. 당신께서 걱정하는 것은 주먹구구식 학원 운영이나 아들의 운전 실력이 아니었다. 도박중독에 시달리는 아들놈이 월급을 허랑방탕하게 날린 다음 급전을 위해 차를 끌고나갈 가능성이었다. 비록 제도권 금융은 타인 명의 자동차로 담보대출을 잡아줄 만큼 허술하지 않았지만, 제도 바깥에서는 모든 게 가능했다. - P73
"내일 파주 가는 거 말이다. 내가 운전해도 되냐?" "아버지 연세도 있으신데 아들놈 일로 고생시켜야 되겠습 "니까." "우혁아, 아버지로서 진솔하게 이야기하마." "예." "나는 널 안 믿는다."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죄송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도 무슨 일인지 솔직히 털어놓아봐라." - P74
신갈IC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갔다가 내일 일정을 떠올리며방향을 틀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4시가 넘어 있었다. (중략). 그 기원이 무색하게도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학원의 일상이 우혁을 덮쳤다. "최 선생, 일찍 나왔네요?" "아, 예. 좋은 아침입니다박 선생은 고개를 까닥이더니 곧장 본론을 꺼냈다. "어제 애들 답안 첨삭해놓고 간 거 2차로 한번 봤어요. 잘하셨던데,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너무 원론적, 형식적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강의에서 강조했던 풀이 전략 위주로 꼼꼼히 살펴봐주시면 좋지 않을까, 저는 그런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강의는 제가 하다 보니." - P76
"그나저나 어제 원장님이랑 무슨 일 있었어요? 최 선생 오면 바로 2번 강의실로 보내라던데, 분위기가 심상찮아 보여서." "상의할 부분이 있어서요. 그럼 잠깐 가보겠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잘해요." 이건 분명 격려라기보다는 엄포였다. 원장 끈으로 들어왔다는 걸 피차 아는데, 그 끈마저 헐거워지면 당신 입지가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 P77
"최우혁 이 새끼야, 왜 이렇게 늦었어!" "아직 9시도 안 됐는데요. 오전 타임 강의하는 것도 아니고10시까지만 오면......." "너 설마 새벽에 그래놓고 정시 출근할 생각이었냐?" "죄송합니다." 김형은 강의실 중간의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앉았고, 소년은 바로 뒷자리에 멀뚱히 자리 잡고 있었다. - P78
"나는 믿기로 했다. 이유는 일단 두 가지야." "예." "첫째, 난 네 돌발 행동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를 내봤자 너는 계속 죄송하다고만 할 테고, 그러면 나는 더 화가 날 거야. 나도 이제 슬슬 혈압 관리를 해야 할 나이인데. 그래서 민사소송을 걸 일만 아니면 바람이 부는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은 바람이 갑자기 지랄맞게 불고 번개도 치는구나…………" "예....." "둘째, 나는 어젯밤에 네 연락을 받고 이 자식이 드디어 미쳤나 싶었다. 혹은 텔레그램에서 불법 알바 받아서 하느라 거짓말을 늘어놓는 거거나 아침 되자마자 학원으로 달려왔더니 진짜로 남자애가 앉아 있더라. 도깨비인지 고등학생인지보자 싶어서 임진왜란도 직접 구경하셨냐 물어봤더니 자기는 그런 건 잘 모른다. 그러면 뭘 아느냐. 나는 예전에 중국을거쳐 한국으로 왔다. 그 전에는 유럽과 중동을 돌아다녔는데그때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보았으며 피오레의 요아킴과도 알고 지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이게 역사책을읽고 소설을 쓰는 건지, 실화인지 분간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인터넷에서 아무 라틴어 문구나 찾아서 읽어보라고 시켰지. 읽더라. 그냥 다 읽어." - P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