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소 바깥에서까지 설계사를 만나려는 고객들은 대체로 인간관계에 목말라 있었고 고양이를 길렀다. 그 유연하고 버릇없는 털북숭이가 물건을 떨어트리거나 업무를 방해한다는 게 주된 이야깃거리였다. 고양이를 다른 방에 넣어두면 되잖아요? 그렇게 되물으면 고객들은 연쇄살인마라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 P73

"촬영에서 이야기한 대로야. 나한테는 사무소 광고가 필요했고 릴리한테는 친구가 필요했던 거지. 서로 좋은 일을한 거야."
"면허 취소는?"
"나쁜 짓을 들키면 벌을 받아야지. 원래 그런 식이잖아." - P74

원하는 게 대체 뭐냐는 질문도 이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인공지능 설계사 직함을 그토록 쉽게 포기하진 않는다고도 했다. 그러게, 내가 바라는 게 뭘까? - P75

자율주행 프로그램이 대부분의 인간보다 유능해진 시대에이런 위험 요소를 남겨두는 건 구태라고밖에는 말할 수가없다. 그런데도 인류가 수동 조작 기능을 잃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영향력과 통제욕에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 P75

시영이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안다. 서른네 해를 살았는데 그 반응이 무슨 뜻인지 모르면 학습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고백에서부터 다시 시작되는 게임은 내가 즐길만한 게 아니고, 나는 이미 시영에게 충분히 좋은 서비스를제공해줬다. 그래서 전략적인 퇴각을 택했을 뿐이다. 내가잘못한 것인가? - P76

. 인간관계를 최종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총점의 평균이 아니라 불합리한 과락 조건이니까. - P76

"그거. 약 꼬박꼬박 먹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정말로."
참, 사소한 이야기지만 단약을 시작했다. 개에게서 메일을 받은 날부터니까, 거의 한 달째다. 혈관에서 약의 흔적이 씻겨 나가는 게 시시각각 느껴진다. - P77

설계사 면허를 발급받으면 협회는 전용 워크스테이션을하나씩 보내준다. 인공지능 설계에 최적화된 고급형 컴퓨터다. 물리적 보안키가 내장되어 있는데 협회의 데이터 라이브러리(데이터 회사들과 제휴를 맺고 있다. 웬만한 건 유료다)에 접근하고 전용 프로그램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게 필요하다. 게다가 보안키 일련번호는 지문처럼 신경 관계망패턴 곳곳에 찍혀 나오기까지 한다. - P78

내 출근이 하루 미뤄질 예정이라고 했다. 다큐멘터리의논조에서부터 다자 계약의 세부 사항까지, 큰 방향을 다시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거였다. - P79

"한 달만이네요. 갑자기 연락이 와서 ・・・ 놀랐어요."
출근의 부작용인지 시영은 바닷가의 카페에서 보았을때보다 안색이 더 나빠져 있었다. 내가 인사치레를 마치자마자 애완 화분 이야기를 꺼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 P80

(전략).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자연스러운 분리정책에 고마워하고 있었다. 이 일대가 400제곱킬로미터 규모의 경제특구로 묶여 있다는 건 기본소득자와 나머지의거주지역이 명확히 나뉜다는 의미였고, 특구 안에서 거의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 P81

(전략). 하지만 서른여덟살의 설계사는 그 호칭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가윤의얼굴에 쾌활한 웃음이 일었다.
(중략).
가윤은 깊게 따지지 않았다. 그냥 쉬는 데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나이가 되어가는 것이다.  - P82

"전채는 글라블락스와 오징어 세비체였습니다. 이제 바질 소스와 올리브유에 절인 건조 토마토를 곁들인 합성육스테이크가…………."
웨이터의 어깨가 허공에 사출하고 있는 홀로그램 입자는 합성육이 55퍼센트의 소고기와 35퍼센트의 돼지고기,
그리고 10퍼센트의 사슴고기로 구성되었으며 등심과 안심의 중간적인 식감이라는 정보를 추가로 알려줬다. - P84

나는 웨이터의 미소 짓는 얼굴(곡선 세 개)을 응시하다가그게 등을 돌리는 타이밍에 맞춰 고개를 돌렸다. 가윤이 익숙한 태도로 합성육 스테이크를 자르고 있었다. 나이프가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고기의 절단면으로부터 새어 나온 육즙이 달궈진 돌판에 닿아 치직 소리를 냈다. - P85

"농담이 아니라, 생각이 나서 선배님이 놀라실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아까 말했지만, 사무소는 정리했고 예약도 더 안 받고 있어요. 여기 올라온 것도 그것 때문이고."
(중략).
"엠바고가 걸려 있어요. 나중엔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될걸요." - P87

동생에게 고객들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특히 두 번째 고객에 대해서는, 나는 급조한 변명을 읊으면서 티 나지않을 만큼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거실 어딘가에 카메라가 있는 걸까? 아니면 아파트 현관에 CCTV가설치되어 있나?
"저녁 약 안 먹었지?"
"아직."
"가져와서 거실에서 먹어." - P90

동생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씻은 다음 머리가 마르길 기다리면서 서재의 생쥐들을 구경했고, 얌전히잠들었다. - P90

릴리/ 내레이션

"이 업계 이야기부터 해보죠. 아이돌이든, 인플루언서든,
슈퍼스타든 간에 사람을 팔아먹는 업계 말이에요. - P91

릴리 / 내레이션
"진짜를 파는 거죠. 열광할 만한 진짜요. 맞춤형 인공지능과는 달리 돈을 아무리 바쳐도 갖지 못하니까, 도리어모든 돈을 퍼부을 수 있는 거. 차마 건드릴 수 없을 것 같고 억지로 말을 듣게 할 힘도 없지만, 그래도 내 말을 들어줄 듯한 거. 그게 바로 공연에 관객석이 있는 이유죠. (후략)." - P92

이모지 박사

"그 사건이 터지고 3시간이 흐른 뒤에, 릴리가 연락했습니다. ‘닥터 이모지 라이브‘ 출연 전날이었죠. 대본을 수정해야겠다고 말하지 뭡니까. 라이브 쇼지만 질문이나도입부의 멘트 같은 건 사전 합의를 거치거든요." - P94

개/ 내레이션
"인간들은 사물을 외형에 따라 판단하는 습성이 있죠. 기계들도 예외는 아니고요. (후략)." - P96

어머니

"인기가 끔찍해? 정말로 신경 쓸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것 같니? 화면에 잠시라도 안 보이면 금방 잊히는데, 그잠깐을 못 참아?" - P98

릴리 / 내레이션

"인기는 정말로 순간적인 걸까요? 말없이 잠적했다면 정말로 잊힌 채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글쎄요. 내가 느낀 건 완전히 다른 거였죠. 발밑에 관심이 쌓이면서 나를 점점 높은 곳으로 올려보내는 것만 같았어요. (후략)." - P99

행인 2
"시간 낭비하지 마. 자기가 스타인 줄 아는 정신병자가한둘이야? (중략), 울면서 웃고 있네. 몸도 떨리고, 경찰을 불러야하는지 구급차를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는걸. 마약사범이 보통 어디로 가지?" - P100

릴리
"원래는 물리학계에 투신해보려 했어요. 시간을 돌리는것 말고는 대안이 없어 보였거든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죠. 대학교 원서를 쓰려면 집에 돌아가야 했는데, 좀 멀리 왔던 거예요. 휴대폰이 없으니 택시를 부르기도 곤란했고, 부모님에게 연락할 수도 없었고, 지나가는 사람한테 도움을 청하는 건 당연히 안될 일이었어요. (후략)."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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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음. 범인이 벼랑에서 몸을 던졌다고요......."
고바야카와 다카오는 복잡한 표정으로 가슴 앞에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비틀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인지 다트 머신 앞으로 가서 다트핀을 하나 집었다. - P216

"두 사람이 한 말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건 탐정으로서 당연한 일이겠죠. 당시 명탐정 기분이었던 저도 같은 의심을 품었습니다. 고로 씨와 쓰루오카를 의심한 건 아니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믿는 성격이었거든요." - P216

"통나무 다리 건너편은 어땠습니까?"
(중략).
"실은 그 직후부터 기억이 없습니다. 머릿속에 기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요."
"아니, 기억이 없다니요?! 왜 그런 일이?!"
"어른들에게 들은 바로는 제가 다리에서 떨어졌답니다. (후략)." - P217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당시 사이다이지 가문의 가장이었던 사이다이지 도시로 씨가 비탈섬의 별장에서 살해당했다. 범인은 섬북쪽 가장자리로 도망친 끝에 벼랑에서 바다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건만, 더 나아가 이 살인사건은 아무도 모르도록 완벽하게 은폐됐던 모양이다.
그 사실에 사야카는 끝 모를 공포를 느꼈다.  - P218

(전략).
아픈 곳을 찔린 듯 의사의 표정이 흐려졌다.
"즉, 당시 아무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말라고 선생님을 입막음한사람이 있었다는 뜻이겠죠. 누구입니까? 물어볼 것도 없이 대충 짐작은 가지만요." - P219

(전략).
"오카야마 사투리로 물어보셨군요. 당시의 선생님은." 다카오가쓸데없는 점을 확인하자 이상합니까? 하나도 안 이상한데요!" 하고다카자와는 딱 잘라 말했다.
물론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카야마에 사는 중학생 남자아이가 오카야마 사투리를 사용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 P220

"당시 아버님은 오카야마 사투리로 대답하셨군요!"
"무슨 사투리든 상관없잖습니까!"
물론 무슨 사투리든 전혀 상관없다. 문제는 그 내용이다. 사이다이지 도시로 씨가 살해당한 현장을 목격한 다카자와. 하지만 그의아버지는 도시로 씨가 병으로 죽었다고 알렸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충격과 혼란이 컸을까. 사야카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 P221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인 겁니까?"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리나마 이해한 거예요. 이게 사이다이지 가문 입장에서는 일종의 스캔들이라는 걸. 회사 사장이자 가장이기도 한 도시로 씨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으니까요. 미디어도 가만히 내버려두지는 않겠죠. (후략)."

4

이로써 23년 전에 일어났던 기묘한 사건에 관한 설명이 끝났다.
게임룸에 잠깐 침묵이 내렸다. 의사는 말을 많이 해서 피곤한 듯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 P223

"그 선대 스님은 도시로 씨의 죽음에 얽힌 진상을 알고 계셨을까요?"
"아니요, 그건 아닐 겁니다. 진상을 모른다고 장례식에 차질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요. 선대 스님은 참석자와 마찬가지로 도시로씨가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믿고 장례식에 임했을 거예요. 그런 장례식으로 고인의 영혼이 성불할 수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 P224

"그럼 그동안 아버님은 섬에 돌아가지 않고 선생님 옆에 붙어 계셨습니까?"
"네, 섬에는 돌아가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제 옆에만 붙어있었던 건 아니고요. 오히려 다른 환자 때문에 바빴는지, 옆 병실에드나들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허, 친아들보다 중요한 환자가 있을까요? 그 환자는 누구였습니까?" - P225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느낌에 지나지 않지만......." 다카자와는 신중하게 서론을 깔고 나서 말을 이었다. "옆 병실에 가나에 부인만 입원한 게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누군가 한명 더 있는 것 아닌가 싶었어요. 벽이 얇아서 옆 병실 환자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는데, 가나에 부인이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듯한 기척이 가끔 느껴졌습니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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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제작품들에게 법적 권리가 부족하다는 사실에 깊은 감사를 느끼며 사무소로 돌아왔다. 닫힌 문 앞에 열서너 살쯤 될까 싶은 아이가 품에 로봇 개를 안은 채 서 있었다.
"여기 설계사님이시죠?"
"예, 맞습니다." - P25

어떤 인공지능은 생성과 동시에 계약을 맺고 일하다가,
연차가 쌓이면 해방되어 온전한 인간 자격을 누리게 된다. 혹은 따로 돈을 받아 모으다가 소유주로부터 자신의 권리를 사들인다. - P25

인공지능 기술이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시민과 노동자와 소비자가 동의어였던 시대가 끝났다. 일하지 않아도,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돈을 받으며 느긋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 P26

그런 와중에도 양측으로부터 사랑받는 부류가 있었다. 에세이스트, 아이돌, 싱어송라이터, 팟캐스트 진행자…………….
(중략).
이 분야에서는 인공지능조차 경쟁력을 잃었다. 기술적인 완벽성이나 심미성 또한 중요하지 않았다. - P27

"편할 리가 없죠. 참, 내가 기계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음모론자들도 있어요. 완전히 멍청이들이지. 만약 그랬다면난 진작 해킹당해서 복사본이 수천만 개쯤 생겼을 텐데.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죠. 상상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시대잖아요. 간 적도 없는 곳에서, 한 적도 없는 말을 하는 영상이 릴리의 실체라면서 돌아다녀요. (후략)." - P29

"그나저나 표정 변화가 거의 없으시네요. 성격이 원래그러신가?"
"타인이 함부로 동정하거나 슬퍼하거나 위로할 일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난 릴리예요. 맨얼굴로 십 분만 걸으면 따라오는 사람이 스무 명은 생길 텐데, 연예면 뉴스도 다 내가 실종됐다며 떠들어대는 중이고."
릴리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지긋지긋한 관심보다도낯선 무관심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 P30

"동생이 가끔 숙제를 던져줘요. 상업영화나 드라마를 보라고 하죠. 제가 상식이 너무 뒤떨어져서, 보통 사람이라도 되려면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더군요. 동생은 방송 기획자로 일하거든요. 직장에 다닐 땐 꽤 도움이 됐어요. 배역 이름이랑 배우 이름을 연관 짓기는 아직 어렵지만요."
"하여간 인공지능 설계사들이란." - P31

"관계의 역학에는 분명히 그런 면이 있죠. 그러면 이렇게생각해보자고요. 슈퍼스타가 가출한 날, 설계사 한 명이 여기에서 새 삶을 시작했어요. 회사를 그만두고 개원에 나선거죠. 열흘 동안 문의 메일은 한 통도 안 왔고 방문 상담은 지금이 처음이에요. 그러니까, 매출을 좀 올려야 하는데......."
"결국 돈 문제군요?" - P32

나는 좀 기다려봤다. 솔리테어 게임을 다섯 판쯤 마칠무렵 사무소 문이 다시 열렸다.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멍청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놀라움과, 기대와, 혼란을 담아.
릴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더니 내 앞에 와서 앉았다. - P33

"당신이 사무소를 접든 말든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첫손님은 받고 접어요. 성년이 되자마자 부모님이랑 소송에 나설 예정이에요. 재산 분할을 받고 잠적하는 거죠. 그러려면 나 대신 어려운 문제를 고민해줄 변호사가 필요하고요. 나만의 인공지능 변호사요. 인간이든 인공지능이든, 난 로펌 소속은 안 믿거든요." - P34

"왜 개원을 선택했는지 알겠네요. 회사라는 게. 능력도없는 사람한테 월급 챙겨주는 자선단체는 아니니까 말이죠.
여기까지 찾아온 팬들이 과장광고에 실망하는 건 아닐까걱정스럽긴 한데... 어쨌든, 개인 변호사가 어렵다면 재밌는 친구라도 만들어줘요. 이런 이야기를 할 상대가 전혀 없거든요." - P35

나는 기술적인 부분을 상의한 다음 로봇 개의 데이터를초기화하는 법을 미리 알려주었다. 조만간 릴리의 충성스러운 친구가 비밀 링크에 담겨 전송될 테고, 설치하면 끝이다. 협회의 건전성 테스트는 건너뛰기로 했다. - P36

하여간 릴리는 만족스러운 상담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갔고, 바로 다음 날부터 홍보 효과가 나타났다.  - P36

상담 메일에 답장하고, 데이터 회사에 재산권 분할 판례의 견적을 문의한 다음, 단념한 채 릴리의 인공지능에 투입될 신경적 특성들을 조합하던 중이었다. 재판 과정데이터는 가격이 워낙 비싸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단순한 친구를 만들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 P38

집에 돌아와 작은방의 사육장을 확인하자 생쥐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아랫다리 근처에 종양이 생겨서 골골거리던 녀석이라 놀랍진 않았다. 다른 녀석들과 분리할 생각으로 뚜껑을 열자 생쥐 오줌 특유의 암모니아 냄새가 훅 끼쳤다. 사육장을 청소할 때가 된 것이다 - P40

사람은 살면서 가해의 편에 서기도 하고 피해의 편에 서기도 한다. 모든 사건과 공과의 총합이 하나의 생이다. 그배합 비율대로 줄을 세운다면 나는 나쁜 쪽의 중간쯤에 있을 것이다. - P41

그러니까, 실용주의는 좋은 것이다. - P41

"오빠, 이거 뭐야?"
"모르겠어."
(중략).
"청소해야 해, 톱밥이랑 물도 갈아줘야 하고, 깨끗하게."
"아니, 죽은 생쥐 말하는 거야. 접시에 있는 거."
"늙었어." - P43

동생이 추궁하듯이, 침실에 있던 약 봉투 묶음을 내밀었다.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사무소에 조금씩 가져가서 먹는 거야. 먹고 있어. 오늘도 먹었어. 더 먹으면 안 돼."
"멍청한 척 연기하지 말고."
"지금은 거짓말 아니야." - P44

"나는 오빠가 그런 사람이라서 싫어했던 게 아니야.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서,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인정하려 들지 않아서 싫었던 거야. 그래도 오빠는 예전이랑은 많이 달라졌잖아. 나한테 먼저 도와달라고 말할 정도는 됐고. 그러니까, 자......."
그러더니 동생은 컵에 물을 절반쯤 채워 왔다. - P45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침대에 가서 누웠는지 모르겠다.
새벽에 깨어나 보건소에 연락하자 응급차가 금방 달려왔다. - P46

릴리의 가출은 사춘기 때문으로 일단락됐다. 오히려 팬이 늘었다고도 했다. 완벽해 보이는 애가 약한 모습을 드러낸 덕에, 이미지 쇄신이 됐다는 거였다. - P49

릴리가 로봇 개와 함께 사무소에 다시 찾아온 건세해가 흐른 뒤였다. 부모를 상대로 소송에 나섰고, 악명 높은인플루언서와 열애설이 났는데, 갖가지 사정이 엮여서 상황이 곤란해졌다고 했다. 그때 릴리의 지갑은 훨씬 두둑해져 있었지만 내가 도울 부분이 마땅치 않았다. - P49

"말솜씨가 많이 늘었는걸."
"설계사님의 작품이죠.‘
하긴, 사사건건 인간의 패턴을 운운하는 건 내 습관이다. - P51

"뭐라고 불러야 하지. 이름은 생겼나?"
"아뇨, 없어요. 릴리는 저를 아직도 개라고 부르죠. 멍청이거나 쓰레기일 때도 있고."
"어떻게 지냈길래? 집에서 쉬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글쎄요, 좋았다고 말하긴 어려워요. 오늘 찾아온 이유도그것 때문이고요." - P51

호감을 간직한 일반인과, 열렬한 팬과, 스토커로 이루어진 스펙트럼이 있었다. 릴리는 그 모든 역할을 개에게 기대했다. 그리고 은퇴 전에는 차마 보이지 못했던 감정들을 쏟아냈다. 개가 친근하게 굴면 기분 나빠하며 소리를 질렀고멀리 물러가면 붙잡아 껴안았다. 방송일자를 알지 못하는건 무관심의 증표였지만 말하지도 않은 에피소드를 개가먼저 읊는 건 징그러운 집착이었다. - P52

나는 탁상 끄트머리에 놓인 약 봉투를 힐끔 보았다. 필론이 주사제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론을 좀 줄까? 갈아서 물에 섞어. 훨씬 나아질 거야."
"요새는 인공지능 설계사가 약 처방도 하나요?" - P53

릴리는 아동학대의 희생양이니까, 돈을 자기 무덤처럼 쌓아놓은 스물세 살은 누가 보기에도 비극적이니까 인간이라면 안쓰러움을 느끼는 것이 정상이다. - P54

"피학적인 특성을 추가해달라는 거지?"
"그래요. 스트레스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거나, 적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둘 다 윤리위에 회부될 사안인데."
"윤리위원회 규정에 연연하실 분은 아닌 걸로 아는데요.
무엇보다도 전 미등록 인공지능이에요. 그것만으로도 면허박탈까지 갈 수 있는 사안이죠. 그리고 제 문제가.. 기본적으로는 설계사님 때문이고요. 이것도 징계감인 건 잘 아시겠죠." - P55

"그 감정도 모두 없앨 수 있어. 이미 한번 느꼈잖아. 설정값이 널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거야."
"물론 그렇죠. 하지만 이 설정값을 유지하려는 건제선택이에요.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으면 무엇이든 버틸 수 있으리라는 건 객관적인 사실이고요. 설계사님께도 손해는아니죠. 방송국에 연락해서 제 주인을 병원에 보내고 설계사님도 고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회를 드리고 싶어서온거니까요." - P56

이번에는 개의 제안을 살필 차례였다. 주류 의견과 정반대지만, 인공지능 권리라는 개념은 감상적인 이율배반에불과하다는 게 내 지론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감정을 느끼는 인공지능을 설계할 때 긍정적인 편향을 주입한다. - P56

· 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느닷없는 두 문장이 나를 현실로 이끌어 왔다.
"애인이 있으시군요. 구속하는 스타일일 테고요." - P57

인간들은 저 토끼 인형에서 이상한 점을 거의 발견하지 못한다. 근거리 주파수 연결이 가능한 기기를 찾아내는 건 기계들만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저건 인터넷 연결과 근거리 주파수 연결,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하는 원격카메라고 지금은 동생의 개인 서버와 연결된 상태였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모두 녹화되고 있겠군. - P58

"너무 불쾌하게 느끼진 마세요. 저도 비슷한 처지거든요.
제가 보고 듣는 건 네트워크를 통해 릴리에게 전송돼요. 전 릴리가 잠든 틈을 타서 나온 거고요. 이제는 릴리가 일어나서 이 대화를 듣고 제 머릿속에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뜻이죠. 지금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네요." - P58

"오빠, 조금 전에 그거 뭐야?"
나는 결국 통화를 수락했다. 동생의 목소리가 그렇게 운을 떼는 순간, 잠시 피했던 운명이 반환점을 지나 내게로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P59

02

소녀


(전략).

릴리

"그렇게까지 거창한 이야기는 없어서 유감이네요. 산책을좀 하다 왔고, 파파라치를 피해 화장실에서 자기도 했고,
휴양지에서 좋은 사람도 만났어요. 특종을 쫓는답시고 열일곱 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지 않는 사람, 열일곱 살한테 마약 파티 이야기를 꺼내진 않는 사람요. 사랑의 시작이냐고 묻지는 마세요. 인공지능 설계사한테 그런건 사치니까요." - P65

도하 / 내레이션

"제 첫 번째 손님은... 릴리였어요. 이렇게 말하면 믿지않으시겠지만, 처음에는 누구인지 못 알아봤죠. 예나 지금이나 연예계 소식에는 관심을 끄고 지내거든요. 그런데 그게 오히려 호감을 산 모양이에요. 저기에, 바로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하더군요." - P66

릴리

"아뇨, 호감은 아니죠. 실망했으니까요. 원래는 완전히 다른 걸 기대했어요. 설계사가 내 말을 녹음한 다음 그걸파파라치에게 넘기길 바랐죠. 파일이 인터넷 전체에 퍼지도록." - P67

릴리

"좋은 친구나 만들어달라고 했죠. 많은 걸 기대하진 않았으니까요." - P68

<소녀의 가장 좋은 친구는 개>

은둔을 택한 슈퍼스타, 약물중독으로 사망한 슈퍼스타의애인, 로봇 개에 설치된 미등록 인공지능. 인공지능 설계사가 릴리에게 만들어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릴리가 직접이야기한다.

장르: 다큐멘터리 / 영화 특징: 도발적인, 진실을 찾아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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