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소 바깥에서까지 설계사를 만나려는 고객들은 대체로 인간관계에 목말라 있었고 고양이를 길렀다. 그 유연하고 버릇없는 털북숭이가 물건을 떨어트리거나 업무를 방해한다는 게 주된 이야깃거리였다. 고양이를 다른 방에 넣어두면 되잖아요? 그렇게 되물으면 고객들은 연쇄살인마라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 P73
"촬영에서 이야기한 대로야. 나한테는 사무소 광고가 필요했고 릴리한테는 친구가 필요했던 거지. 서로 좋은 일을한 거야." "면허 취소는?" "나쁜 짓을 들키면 벌을 받아야지. 원래 그런 식이잖아." - P74
원하는 게 대체 뭐냐는 질문도 이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인공지능 설계사 직함을 그토록 쉽게 포기하진 않는다고도 했다. 그러게, 내가 바라는 게 뭘까? - P75
자율주행 프로그램이 대부분의 인간보다 유능해진 시대에이런 위험 요소를 남겨두는 건 구태라고밖에는 말할 수가없다. 그런데도 인류가 수동 조작 기능을 잃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영향력과 통제욕에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 P75
시영이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안다. 서른네 해를 살았는데 그 반응이 무슨 뜻인지 모르면 학습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고백에서부터 다시 시작되는 게임은 내가 즐길만한 게 아니고, 나는 이미 시영에게 충분히 좋은 서비스를제공해줬다. 그래서 전략적인 퇴각을 택했을 뿐이다. 내가잘못한 것인가? - P76
. 인간관계를 최종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총점의 평균이 아니라 불합리한 과락 조건이니까. - P76
"그거. 약 꼬박꼬박 먹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정말로." 참, 사소한 이야기지만 단약을 시작했다. 개에게서 메일을 받은 날부터니까, 거의 한 달째다. 혈관에서 약의 흔적이 씻겨 나가는 게 시시각각 느껴진다. - P77
설계사 면허를 발급받으면 협회는 전용 워크스테이션을하나씩 보내준다. 인공지능 설계에 최적화된 고급형 컴퓨터다. 물리적 보안키가 내장되어 있는데 협회의 데이터 라이브러리(데이터 회사들과 제휴를 맺고 있다. 웬만한 건 유료다)에 접근하고 전용 프로그램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게 필요하다. 게다가 보안키 일련번호는 지문처럼 신경 관계망패턴 곳곳에 찍혀 나오기까지 한다. - P78
내 출근이 하루 미뤄질 예정이라고 했다. 다큐멘터리의논조에서부터 다자 계약의 세부 사항까지, 큰 방향을 다시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거였다. - P79
"한 달만이네요. 갑자기 연락이 와서 ・・・ 놀랐어요." 출근의 부작용인지 시영은 바닷가의 카페에서 보았을때보다 안색이 더 나빠져 있었다. 내가 인사치레를 마치자마자 애완 화분 이야기를 꺼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 P80
(전략).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자연스러운 분리정책에 고마워하고 있었다. 이 일대가 400제곱킬로미터 규모의 경제특구로 묶여 있다는 건 기본소득자와 나머지의거주지역이 명확히 나뉜다는 의미였고, 특구 안에서 거의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 P81
(전략). 하지만 서른여덟살의 설계사는 그 호칭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가윤의얼굴에 쾌활한 웃음이 일었다. (중략). 가윤은 깊게 따지지 않았다. 그냥 쉬는 데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나이가 되어가는 것이다. - P82
"전채는 글라블락스와 오징어 세비체였습니다. 이제 바질 소스와 올리브유에 절인 건조 토마토를 곁들인 합성육스테이크가…………." 웨이터의 어깨가 허공에 사출하고 있는 홀로그램 입자는 합성육이 55퍼센트의 소고기와 35퍼센트의 돼지고기, 그리고 10퍼센트의 사슴고기로 구성되었으며 등심과 안심의 중간적인 식감이라는 정보를 추가로 알려줬다. - P84
나는 웨이터의 미소 짓는 얼굴(곡선 세 개)을 응시하다가그게 등을 돌리는 타이밍에 맞춰 고개를 돌렸다. 가윤이 익숙한 태도로 합성육 스테이크를 자르고 있었다. 나이프가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고기의 절단면으로부터 새어 나온 육즙이 달궈진 돌판에 닿아 치직 소리를 냈다. - P85
"농담이 아니라, 생각이 나서 선배님이 놀라실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아까 말했지만, 사무소는 정리했고 예약도 더 안 받고 있어요. 여기 올라온 것도 그것 때문이고." (중략). "엠바고가 걸려 있어요. 나중엔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될걸요." - P87
동생에게 고객들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특히 두 번째 고객에 대해서는, 나는 급조한 변명을 읊으면서 티 나지않을 만큼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거실 어딘가에 카메라가 있는 걸까? 아니면 아파트 현관에 CCTV가설치되어 있나? "저녁 약 안 먹었지?" "아직." "가져와서 거실에서 먹어." - P90
동생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씻은 다음 머리가 마르길 기다리면서 서재의 생쥐들을 구경했고, 얌전히잠들었다. - P90
릴리/ 내레이션
"이 업계 이야기부터 해보죠. 아이돌이든, 인플루언서든, 슈퍼스타든 간에 사람을 팔아먹는 업계 말이에요. - P91
릴리 / 내레이션 "진짜를 파는 거죠. 열광할 만한 진짜요. 맞춤형 인공지능과는 달리 돈을 아무리 바쳐도 갖지 못하니까, 도리어모든 돈을 퍼부을 수 있는 거. 차마 건드릴 수 없을 것 같고 억지로 말을 듣게 할 힘도 없지만, 그래도 내 말을 들어줄 듯한 거. 그게 바로 공연에 관객석이 있는 이유죠. (후략)." - P92
이모지 박사
"그 사건이 터지고 3시간이 흐른 뒤에, 릴리가 연락했습니다. ‘닥터 이모지 라이브‘ 출연 전날이었죠. 대본을 수정해야겠다고 말하지 뭡니까. 라이브 쇼지만 질문이나도입부의 멘트 같은 건 사전 합의를 거치거든요." - P94
개/ 내레이션 "인간들은 사물을 외형에 따라 판단하는 습성이 있죠. 기계들도 예외는 아니고요. (후략)." - P96
어머니
"인기가 끔찍해? 정말로 신경 쓸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것 같니? 화면에 잠시라도 안 보이면 금방 잊히는데, 그잠깐을 못 참아?" - P98
릴리 / 내레이션
"인기는 정말로 순간적인 걸까요? 말없이 잠적했다면 정말로 잊힌 채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글쎄요. 내가 느낀 건 완전히 다른 거였죠. 발밑에 관심이 쌓이면서 나를 점점 높은 곳으로 올려보내는 것만 같았어요. (후략)." - P99
행인 2 "시간 낭비하지 마. 자기가 스타인 줄 아는 정신병자가한둘이야? (중략), 울면서 웃고 있네. 몸도 떨리고, 경찰을 불러야하는지 구급차를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는걸. 마약사범이 보통 어디로 가지?" - P100
릴리 "원래는 물리학계에 투신해보려 했어요. 시간을 돌리는것 말고는 대안이 없어 보였거든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죠. 대학교 원서를 쓰려면 집에 돌아가야 했는데, 좀 멀리 왔던 거예요. 휴대폰이 없으니 택시를 부르기도 곤란했고, 부모님에게 연락할 수도 없었고, 지나가는 사람한테 도움을 청하는 건 당연히 안될 일이었어요. (후략)."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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