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버스 정류장에서 목적지인 칵테일 바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묻는다면, 이 지역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10분 정도면 충분하다는 데에 의견을 모을 것이다. 그러나 내 시점에서 보면 그것은 지나치게 안일하다.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만 가면 되니까 10분‘ 이라는 단순한 계산에 의지해 살아가기에 이 세상은 너무도 많은 불안 요소를 내재하고 있다. - P75
이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했을 때 가까스로 타협할 수 있는안정권은 최소 1시간 이상, 지금 내게 남은 시간은 그보다 30분이나 모자라다. 안달이 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 말이다. - P76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는 것은 그런 생각이었다. 생명의 위현 존재의 위기. 내 인생 존망의 기로, 어느 날 밤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던 엄마가 "심인성협심증이래더라. 애미가 20년 넘게 니년 땅 피는 소리를 지근거리에서 들으며 살다 보니 도저히 제명에 죽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짐싸이년아." 라며 나를 집에서 쫓아냈을 때에도 이 정도로 위기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 P77
같은 영업팀에서 일하는 동료가 팀장님에게 "이번 공휴일에 꼭 출근해야 하나요?" 라고 물었을 때 팀장님이 했던 대답이 이거였다. "나는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오고 안 나오고는 자네 자유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휴일을 즐긴 동료의 일자리는 다음 날 아침에사라졌다. - P79
"넌 사기당할 일은 없어서 좋겠다. 이년아." 우리 엄마가 평생의 애물단지였던 내게 해준 유일한 칭찬이 이거였다. - P80
말이 혀끝에서 떨어져 나온 순간, 나는 그 질문이 치명적인 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다. 평소처럼 부정적인 사고를 거듭해 최악의 사태를 예상했어야 했다. 내가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틈도 없이, 작은 몸집의 누군가는 음성변조기를 사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차별살인마> - P88
전력을 다해 아래쪽 계단으로 뛰었다. 뛰려고 했다. 그러나 걸음을 내딛는 순간 뒤에서 덮쳐온 충격에 의해 눈앞이 크게 뒤집히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 P89
"사람 살려!" 그 소리에 소녀가 움찔 몸을 떨더니 고개를 들었다. 잠이 덜깬 듯한 눈동자는 선했고, 어중간하게 자란 머리는 어딘지 소심한 인상을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 소녀와 그 살인마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지만, 만약을 위해확인 차 물었다. "혹시 무차별살인마 님은 아니시죠?" - P90
아마도, 나는, 감금당했다. 무차별살인마에게 그 이외의 가능성은 없고, 이것이 이미 최악의 가능성이므로 그 이상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 P90
살인마에게 감금당한 나와 같은 장소에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 크게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나와 같은 입장의 피해자거나 살인마와 한패다. 그 사이코에게 협박당해 협력하고 있다는 하이브리드적인 발상도 가능하지만 별 의미는 없을 것 같고 둘 중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이냐면, 당연히 후자다. 주위를 둘러보니 살인마가 지금 당장 여기에 있는 것 같진않은데, 나는 묶여 있고 이 여자애는 안 묶여 있다. 이 차이가 나타내는 사실은 명백하다. - P91
도대체 나는 왜 이런 상황에 처한 걸까. 큰 사건에 휘말리지않기 위해 온갖 진상을 다 떨며 살았는데, 주제넘게 남 일에 오지랖 한 번 펼쳤던 게 그렇게 엄청난 잘못이었단 말인가. 너무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하니 오만 생각이 다 나는 것이었다. - P92
"언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9어딘가 주저하는 듯, 고민한 흔적이 엿보이는 태도였다. 굉장히 소심해 보이는 어조임에도 용기를 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내가 기절해 있는 동안 그녀는 지금부터 자신이 꺼낼 말에 대해 엄청난 고민을 거쳤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도 같이 죽을 거니까요." - P93
너무나도 담담하게, 마치 저항할 수 없도록 사지가 붙들려 다가오는 운명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무기력한말투였다. 소녀는 잠시 후 이렇게 덧붙였다. "무차별살인마가 저를 죽이겠다고 했으니까요." No.1 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죽인다고 한 이상 죽이지 않으면 거짓말이 된다. - P94
"아, 저, 00시에 있는 XX 아파트에 …." "거기, 5층짜리?" "네・・・・・・ 그 아파트 5층에 살아요." 어머나, 이런 우연이 다 있나. 거긴 내가 어제 갔다가 무차별살인마를 만난 바로 그 아파트인데! "잡혀온 건 언제고?" "사나흘쯤・・・・・・ 됐어요. 혼자서 목욕탕에 있었는데, 문을 안잠가놨었는지." 소녀는 날짜 감각이 애매한 모양이었다. - P95
"내가 네 입장이었으면 아마 지금쯤 미쳤을걸. 사나흘이나여기 있었다며, 안 무서워?" "집에 있으나 여기 있으나 다를 게 없으니까요. 학교 안 가도되니까 마음도 편하고..…...." 소녀는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학교 안 가도 되니까 마음이편하다니, 그런 게 이유가 되나. 음, 되는군. - P96
보험설계사 일을 하다 보면 온갖 종류의 인간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중 가장 무서운 인종은 바로 말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나처럼 사회적 물리적인 힘을 갖지 못한 약자를대할 때 그들은 한없이 강해진다. 심지어 환급금이 자기 예상과 다르다는 이유로(분명히 처음 계약할 때 설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집까지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그때마다 생명의 위협을 느껴 몇 번이나 이사를 했는지 모른다. - P97
나 죽으면 어떻게 되려나. 보험금은 엄마한테 갈 테지. 꽤 큰금액이니까 앞으로 몸 상해가며 일할 필요는 없으리라. 음, 다음 주에 상담이 잡혀 있는 고객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보험의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일제히 가입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뭐해? 내 실적 오르는 것도 아닌데. 하긴 죽는 마당에 실적 따위가 뭔 소용이 있겠느냐마는. 그러고 보면 우리 회사 생명보험도 가입했었는데, 팀장이 내가 죽으면서까지 회사에 누를 끼쳤다고 툴툴거릴 걸 생각하니 짜증이 치밀었다. - P97
그래도 만에 하나를 대비해 성인용 데이터가든 폴더를 전부 숨김 설정 해둔 건 다행이었네. 문제의 소지없는 건전하고 개인적인 성생활이었다고 자부하지만 보는사람에 따라서는 또 다른 거니까. …………헉 그런데 보이는 것과 용량이 다른 걸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큰일인데, 누구에게든 간에 성적 취향 같은 게 알려지는 건 정말로 사양하고 싶다. - P98
오른손을 당기자 수갑이 쩔그럭댄다. 침대와 단단히 묶여 있어 일정 이상 움직일 수가 없다. 침대를 박살낼 도구도 없고 침대째로 들고 나갈 힘도 없으므로, 풀려나려면 열쇠가 필요하지만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 P98
아니, 뭘 하는지는 대충 보면 안다. 사이코는 커터칼을 들고바리바리 싸들고 온 신문을 뒤져가며 기사를 잘라내고 있고, 소녀는 옆에서 잘라낸 기사들을 일자별로 정리하고 있다. 방금 또 순서를 헷갈려서 사이코에게 구박을 받긴 했지만. "그거 뭐야?" <포트폴리오> - P103
성별이 모호한 외모 가벼운 반팔 후드 집업, 머리에는 후드를 쓰고 입에는 마스크를 끼고, 마스크 안쪽에는 아마도 음성변조기가 붙어 있는 듯하다. 편집증적인 면모를 보이는 작은 몸집의 사이코, 그 정체는 무차별살인마 - P104
근데 네 커터칼을 왜 무차별살인마가 갖고 있는 거니....…마음에 드셨던 걸까요…………. 목욕탕에 있던 저를 죽이러 들어왔을 때 빼앗아간 이후로 계속 들고 다니시는 것 같아요." 자기와 취향이 맞아서 조금 기뻐하는 듯한 얼굴로 소녀가 말했다. 저런 사이코와 죽이 맞았다고 좋아할 정도로 이 애의 인생에는 온기가 없었던 걸까 싶어 슬픈 기분이 들었다. - P105
"깜짝 놀랐어요. 그동안 저희 집을 찾아오는 사람은 기껏해야 방문 판매원 정도밖에 없었으니까…………. 누구시냐고 물으니 무차별살인마라며, 저를 죽일 거라고 하셨죠." "농담 같은 전개군." 그걸 나도 당했지만, 소녀는 애매하게 웃었다. - P105
"음, 이것저것 물어보셨어요. 좋아하는 게 뭔지, 갖고 싶은건 없는지. 어제는 할머니 사진을 가져다주시기도 했고.……………. 어젯밤의 빌어먹을 만남은 그것 때문이었군…………. 근데 무차별살인마가 그런 잔심부름을 왜 하고 있지? 거기다 자기가 죽일 여자애의 취향 같은 건 알아서 뭐하려고? 그것도 포트폴리오에 쓰냐? 소녀는 살포시 웃으며 한마디를 더했다. "생각보다 상냥하신 분인 것 같아요・・・・・・ . 그렇죠?"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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