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 이후부터 왜인지 손이 안 간다.
소설은 예전에 좋아했지만, 지금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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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선 서재로 올라간다. 멀어지는 슬아를 향해 복희가 소리친다. "나도 삼십대 땐 로즈 시절이었어~" 슬아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정한다. "리즈 시절이겠지∙∙∙∙∙복희는 헷갈리는 얼굴로 생각에 잠긴다. "그게 그거 아닌가?" "전혀 달라." - P111
서재에서 아는 분주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답장 메일을 쓰는 모양이다. 복희는 태평하게 서재를 둘러본다. "작가라 그런지 확실히..…딸의 책장 앞에서 그가 중얼거린다. "책이 많네......" - P113
"난 약간 그런 스타일인 것 같아. 외향적이면서도…… 내향적인 스타일." 슬아가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시니컬하게 묻는다. "안 그런 사람도 있어?" 슬아의 시니컬과 상관없이 복희는 하고 싶은 얘기를 맘껏 한다. "사람들이랑 잘 어울리면서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그런 스타일 있잖아." - P114
일주일 뒤부터 복희는 훌라 교실에 다니기 시작한다. 하와이에서 훌라춤을 배워온 여자가 가르치는 곳이다. 첫 수업을 다녀온 복희가 이렇게 푸념했다. 오십대는 나밖에 없더라. 다 젊고 예배." 슬아가 원고 마감을 하며 대답한다. "걔네들도 나중에 늙을 거야." 복희는 약간 풀이 죽었지만 오늘 배운 동작을 되새기며 연습한다. - P115
"선생님이 또 뭐라고 했냐면……… 훌라에서 틀린 건 없대. 그냥 모두에게 각자의 훌라가 있는 거래." 복희는 그 말에 감명을 받은 듯하다. 그래서인지 설거지를 하다가도 엉덩이를 씰룩거리고 샤워를 하다가도 손을 흐느적거린다. - P116
떠나기 전에 취미생활비를 지원해주는 가녀장에게 인사를 건넨다. "다녀오겠습니다. 대표님." 슬아가 복희를 본다. 머리엔 꽃을 단 엄마가 치마를 펄럭이며현관을 나선다. 어쩐지 만개한 사람 같다. "로즈 시절이네." 슬아가 중얼거린다. 복희가 총총 멀어진다. 그의 전성기가 지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든다. - P117
토요일과 일요일은 낮잠 출판사 휴무일이다. 서점들도 주말에는 출판사와의 거래를 쉬어간다. 그렇다고 주말이 한가롭지는않다. 슬아는 신문 칼럼을 마감해야 한다. 평일에 미처 쓰지 못한원고가 얄짤없이 그를 기다린다. - P118
웅이의 두번째 직업은 트럭 일이다. 1톤 트럭에 온갖 물건을싣고 전국을 누빈다. 그가 싣고 달리는 물건들은 무엇인가? 행사용품들이다. 웅이는 이벤트 장비 렌털 업자로서 일한다. 웬만한 행사에 필요한 모든 장비가 웅이의 트럭에 실려 있다. 천막, 테이블, 의자, 앰프, 체육대회용품, 발전기, 온풍기, 전기릴선・・ - P119
웅이는 모든 과정을 꼼꼼하고 조리 있게 설명하는 사장님이었다. 양팔에 재밌는 문신을 새긴 아저씨이기도 했다. 철이는 자신보다 서른 살쯤 많은 어른에게 골똘히 일을 배웠다. 웅이 옆조수석에 앉아 사사로운 대화를 나누는 게 철이의 주말 일과였다. 그리 길지 않은 생애 동안 그는 앞으로 뭐하고 살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런 질문에 곧장 대답하는 애들이 철이로서는 늘 신기했다. - P120
"이런 걸 언제 다 배우셨어요?" 전기난로를 뚝딱 수리하는 웅이를 보며 철이가 물었다. "살다보니까 알게 됐어." - P121
주말마다 그들은 낮잠 출판사 마당에서 만나고 헤어진다. 웅이의 트럭을 주차하는 자리다. 상하차를 얼추 마치면 복희가 현관문을 열고 소리친다. 저녁 먹고 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철이는 이 시간을 좋아한다. 복희 밥은 맛있다. 만약 복희가 차린 식당이 동네에 있다면 그는 이틀에 한 번씩 거기서 밥을 사 먹었을 것이다. - P121
철이는 슬아를 몇 번안 만나봤지만 오늘이 가장 초췌해 보인다는 것만은 알겠다. 맨처음 출판사에 왔을 때 어른들이 슬아에게 존댓말을 써서 놀랐다. 웅이가 자신의 사장님은 아라고 소개했다. 철이의 사장님은 웅이니까, 아는 사장님의 사장님인 셈이다. 철이는 슬아를아직 뭐라고 부를지 못 정했다. 일곱 살 정도 많은데 슬아 누나라고 불러야 할지 사장님이라고 불러야 할지 헷갈린다. - P122
"뭐 쓸지 생각 안 나면 어떡해요?" 슬아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대답한다. "대체로 그래…할말이 없어진 철이가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괴롭겠다……… 대박………" 슬아는 허공을 보며 중얼거린다. "무슨 일을 해도 괴로운 건 마찬가진데....." - P123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면서 독서는 더이상 필수가 아니게 되었다. 군대에선 하도 무료해서 병영도서관에 꽂힌 하루키 소설을 펼쳐봤는데 뭔가 청승맞았던 기억이난다. 하루키가 달리기에 대해 쓴 산문집은 그나마 재밌었다. 하지만 철이라면 달리기에 대해 쓰기보다는 그 시간에 천변을 한바퀴라도 더 뜀박질하기를 택할 것이다. - P124
"철이는 평소에 뭐하고 지내?" 복희가 묻고 철이가 대답한다. "계절마다 다른데……" "어떻게 달라?" "여름에는 물놀이 안전요원으로 일하고요." "수영장에서?" "바다랑 계곡에도 나가요." "그렇구나~ 라이프가이 자격증 있나보네." 옆에서 듣던 웅이가 정정해준다. "라이프가드겠지." 복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간다. "응, 그거~" 철이가 웃음을 참고 덧붙인다. "수상인명구조 자격증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따놨어요."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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