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아는 마드레날린(마감 + 아드레날린)에 취한 채 강철의 연금술사』에 관한 생각을 빠르게 늘어놓는다.
"선악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잖아. 그 점이 너무 좋아. 등가교환이라는 개념도 가혹하고 멋져. 연금술을 아무리 연마해도 신체를 만드는 건 호락호락하지 않은 거야. 무슨 일이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게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 사실 글쓰기도 그래. 대가를 치르지 않고선 어떤 이야기도 완성할 수가 없으니까......" - P130

슬아는 호전적인 편은 아니지만 꾸준히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복희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삼십대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전성기인 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무할 정도로단숨에 패배하자 슬아는 자신이 무언가 놓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를테면 팔씨름에 관한 중요한 요령들 말이다. - P136

"강해지고 싶어.…………!"
슬아가 소년만화 같은 대사를 말한다. 사실 슬아는 유년기 내내 소년만화를 많이 봤다. 딸보다 아들이 많은 집안에서 자라서다. 하지만 오늘날 슬아의 적은 아들들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낳은 여자와의 재대결을 목전에 두고 있다. - P139

그간 슬아의 다양한 친구들이 낮잠 출판사를 방문해왔다. 예술하는 친구들도 왕왕 있었다. 복희가 보기에 예술하는 애들은촬영을 한답시고 이상한 짓을 많이 했다. 작년에 왔던 또다른 촬영팀은 슬아를 주인공으로 한 초현실주의 포스터를 찍겠다며옥상 위에서 대형 송풍기를 틀고 이면지 삼백 장을 날렸다. 하늘로 속절없이 날아가는 이면지를 보며 복희는 생각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여?‘ 충청도에서 유년을 보낸 그는 어이없는 일 앞에서 충청도 말투로 사고한다. 그날 복희는 날아간 종이를 죄다 수거해오는 일에 동참했다. 예술이 뭔지 도통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종이를 주웠다. - P144

예술하던 아가씨들은 장비를 내려놓고 식탁에 모인다. 먹음직스러운 카레우동과 제철 샐러드와 표고버섯 만두와 세 종류의 김치로 식탁은 꽉 찼다. 촬영팀과 슬아가 군침을 삼키며 앉는다. - P146

자정 무렵 슬아에게 문자메시지가 도착한다. 다운의 메시지다.
"오랜만에 누군가의 엄마가 차려준 밥상을 보고 눈물이 차올랐어. 부엌에 가서 너무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럼 눈물이 흐를 것 같아서 그냥 잘 먹겠습니다. 인사만 했어. 어무니한테 꼭 전해줘 너무 맛있었구 행복했다구." - P147

"모든 게 잘못되어가고 있어요."
그게 미란이가 말문을 여는 방식이다. 실제로 모든 게 잘못되어가고 있지는 않지만 미란이는 자신의 생애를 늘 그렇게 실감하는 듯하다. - P150

복희는 "먹고 싶다잖아~" 하면서 떡볶이 떡을 꺼낸다. 냄비물도 바로 올리고 양념도 푼다. 슬아가 미란이에게 가르치듯 말한다.
"여기 식당 아니야. 출판사야" - P152

"일하느라 몸을 못 풀었어. 요가하면서 들을게."
미란이는 그런 슬아가 익숙하므로 맘 편히 넋두리를 이어간다.
"내 사랑방식이 부담스러웠나봐 난 앞으로도 이렇게 쭉 외롭겠지. 혼자서 늙어 죽게 될 거야.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채로…………" - P152

"네가 그렇게 혼자야? 그럼 지금 떡볶이는 누가 해주고 있는데?"
부엌에서 복희가 살갑게 소리친다.
"좀만 기다려. 거의 다 됐어~"
매콤달콤한 떡볶이 냄새가 집안을 채우고 있다. - P153

"미란아, 늦었어. 이제 그만 떠들고 목욕이나 해."
슬아는 욕조에 물을 받으러 간다. 말 많은 친구는 더운물에 집어넣는 게 상책이다. - P154

"또 새로운 사랑을 하게될 거야."
미란이는 욕조 안에서 비관적으로 예언한다.
"그리고 또 실연당하겠지......"
슬아는 미란이의 자조가 지겹고 웃기다. - P155

미란이 옆모습을 한참 보다가 슬아는 말한다.
"누구를 만나느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
"뭔데."
"일단 자기 자신이랑 사이좋게 지내야 해." - P155

인쇄 감리란 책을 찍기 직전인쇄소에서 테스트 인쇄를 해보며 문제가 없는지 체크하는 과정이다. - P158

막상 인쇄해보면 컴퓨터로 보던 파일과는 다른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인쇄기의 상태, 기장님의 실력, 종이 재질, 혹은 습도와 온도에 따라 색이 미세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의도하던바로 그 톤의 책을 찍기 위해서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감리를봐야 한다. 낮잠 출판사 대표 슬아가 감리 보는 날에 바짝 긴장하는 것은 그래서다. - P159

 이를테면 1983년에 셀카봉을 만든 일본의 우에다 히로시 상, 카메라 회사 직원이었던 그는사람들이 여행하면서 스스로 자기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기계를 설계했으나 주변인들로부터 비웃음만 샀다. "아니 누가 혼자돌아다니면서 자기 사진을 찍어?" 지지해주는 사람 하나 없었어도 그는 꿋꿋하게 셀카봉에 관한 특허를 받아놓았다. 안타깝게도 해당 특허는 2003년에 소멸한다. 셀카봉의 전성시대가 열린것은 2010년대부터다. - P160

"기장님! 이게 지금 너무 쨍한 레몬색인데! 좀더 상아색에 가까워져야 하거든요! 채도를 조금 내려주실 수 있을까요!"
소음 속에서 기장님은 탐탁지 않다는 얼굴로 인쇄기를 재설정한다. 슬아의 요청이 추상적인 탓이다. 슬아는 가방에서 노트북과 색상견본표를 꺼낸다. 데이터의 노랑과 견본표의 노랑과인쇄된 표지의 노랑이 어떻게 다른지를 공유하기 위해서다. - P161

"폴 발레리가 그랬어요."
복희는 폴 발레리가 누군지 모르지만 묻는다.
"뭐라고 했는데요?"
"작품을 완성할 수는 없대요. 단지 어느 시점에서 포기하는 것뿐이래요…………"
모든 작품이 체력과 시간과 돈 등의 한계로 어느 순간 작가가 포기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면 슬아의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복희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다. - P163

그러나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책들도 있다. 결코 그래서는안 되지만 그런 일이 간혹 생기고야 마는데 ・・・・・・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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