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배를 빌린 지 1시간이 넘었다. 이미 선착장으로 돌아가야하는 시간은 지난 뒤였다. 그렇잖아도 늦게 배를 빌리는 남자에게 보트장 주인은 6시 전까지는 돌아와야 한다고 했다. 금평에 위치한 이 선착장은 산 사이에 있는 터라 해가 빨리 저문다는 이유였다. - P5
남자가 모는 배는 산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 실수는 아니었다. 더 어두컴컴한, 그래서 자신 없는 얼굴이 조금은 가려질 곳으로가고 싶었다. - P5
작은 물건이 강한 존재감으로 그의 손에 걸렸다. 남자는 오늘 여자에게 프러포즈를 할 생각이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하는 거 아냐?"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조심스레 말했다. - P6
조용하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고백할 생각으로 금평 여행을 계획했다. 물론 오늘 그녀와 강 아닌 강을 건널 생각도 했다. 심장이 쿵쿵 뛰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쿵! 배가 크게 흔들렸다. 여자가 얕은 비명을 질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배가 산기슭까지 흘러와 부딪힌 것 같았다. - P6
강바닥 어딘가에 걸린 것 같았다. 머리에서 땀이 흘렀다. "어떻게 해?" 문제가 생긴 것을 눈치챈 여자가 물었다. "괜찮아. 뭐에 걸린 것 같은데 뺄 수 있어."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척하면서 노의 손잡이 부분을 힘껏 눌렀다. 그럴 때마다 배가 출렁거렸다. - P7
그때 남자는 알지 못했다. 그가 생각지 못한 어떤 것이 진실의 수면 위로 떠오르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 P7
남자가 앉은 쪽배 옆에서 뭔가 허연 것이 떠올랐다. 발견한 것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자가 먼저였다. 여자는 시력이 좋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곳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남자도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본 순간, 여자를 향해 보지 말라고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여자의 비명이 더 빨랐다. "꺄아아아악!" - P7
노에 걸려 떠오른 것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물고기들에게 뜯어 먹혀 백골화된 두개골이었다. 그것은 아주 작았다. - P8
아들 선우가 부르는 노래를 녹음한 것이었다. 여섯 살 때여서 그런지 목소리에서 아기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옆에서 웃는 소리는 예원의 것이었다. 앞다리가 쑥, 뒷다리가 쑥, 똥통에 빠져버렸네. 뭐야, 똑바로 안 부를래, 이 녀석! 혼내는 척하는 자신의 목소리에서 행복이 굴렀다. - P9
두 번이나 녹음에 실패했지만 세번째도 마찬가지여서 예원은 선우에게 달려들었다. 아이의 작은 몸을 품에 안고장난스럽게 엉덩이를 두들겨주었다. 선우는 예원의 목에 매달려 까르르 웃음을 토했다. 그때 베란다에서 들어오던 짙은 햇빛까지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벌써 3년이나 된 일이라니, 문득 실감이 나지 않았다. - P10
차는 예원이 주차한 앞줄의 빈자리에 멈춰 섰다. 한 번 뒤로 후진했다가 다시 전진했을 때 차의시동이 꺼졌다. 예원은 차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휴대폰을 들었다. 단축 번호 1번. 통화버튼을 누르자 신호가 갔다. 한손으로 오디오의 볼륨을 줄였다. - P10
발신자를 확인하는 남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예원이 들고 있는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신호가 가고 있었다. 남자가 거칠게 운전석 문을 닫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화면을 옆으로 쓱 밀었다.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 P10
예원은 꽂아두었던 차 키를 비틀었다. 그녀의 낡은 봉고 차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지는 남자를 노려보던 예원은 곧장 정면을 보았다. 사이드브레이크를 내리고, 드라이브를 D에 놓았다. 주저 없이 액셀러레이터를 힘주어 밟았다. - P11
-이선우 군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유류품 확인부탁드립니다. 1시간 30분 전에 전화를 걸어온 남자의 침착한 목소리가 귀를떠나지 않았다.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춰 세운 선준은 바짝 말라 갈라진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들 선우가 사라진지 3년이었다. - P12
경찰도 돈을 요구하는 전화가 없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길을 잃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선우는 엄마 아빠의 휴대폰 번호나 집 주소를 외우고 있었다. 아들의 실종이 3년이나 지속될 줄 그때의 선준은 상상하지도못했다. - P12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느 보육원에 들어온 아이가, 병원에 실려 들어온 어떤 아이가, 지하철역 노숙인들 사이에서 발견된 아이가 선우 같다는 제보는 여러 번 왔었다. 그때마다 선준은한달음에 달려갔다. 하지만 실망이 매번 그를 무릎 꿇렸다. - P13
형사라고 하기에는 눈빛이 서글서글했다. 그는 조금 굳은 얼굴로 선준을 향해다가왔다. "이선준 씨?" 선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진우가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면서 명함을 건넸다. 경위였다. 요즘 형사들은 명함도 있구나, (생략) - P14
선준을 앉혀두고 박진우는 정수기로 갔다. 돌아온 그는 선준에게 종이컵을 내밀었다. 맑은 물이 들어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들어 마셨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 P14
적막한 사무실은 컴퓨터 팬 돌아가는 소리까지도 들릴 듯했다. 형사로 보이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앞에 놓인 컴퓨터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선준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했고,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 P15
"뼈의 발육이나 치아 상태로 5에서 6세 정도로 판단됐습니다만, 육안으로 확인이 어려워 국과수로 넘겼습니다. 유전자 검사를 해야 하는데, 오랫동안 강에 잠겨 있었던 터라 현재 상태로는 유전자가 채취될지 불투명하다고 하네요. 다행히 유류품이 있었고, 실종자들을 검색하는 과정에서 선생님께서 신고하신 실종 당시 선우의 소지품과 비슷한 듯하여 연락을 드린 겁니다." - P15
선우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생기자 선준은 취미를 만들라 권했고, 예원이 찾아낸 것은 나무 공예였다. 그때 예원은 나무로 십자가 목걸이 두 개를 만들어 왔다. 하나는 선준의 차 룸미러에 걸어주었고, 하나는 달라고 떼쓰는 선우에게 주었다. - P16
선준은 울지 않았다. "유전자 검사 결과는 언제 나옵니까?" 목걸이가 자신의 아이가 차고 있었던 것이 맞다, 아니다를 말하지 않는 심정을 박진우는 이해한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선준을쳐다보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서 유전자를 채취하는 데만도 최소 일주일 이상 걸립니다." - P16
"유전자검사 결과가 나온 다음에 다시 연락을 주십시오." 대답 없이 박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걸이는 실종된 이선우의 것이 맞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선준이 쓰러지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을 것이었다. - P17
"연락을 주실 때는 꼭 저한테 주십시오. 이번에 연락하신 번호로요. 아내한테 전화하시면 안됩니다." 실종 신고를 할 때 보호자의 언락처로 자신과 예원의 연락처를모두 등록시켰다. 이번 연락도 그것을 보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다음 통보만큼은 예원이 아니라 자신이 받아야 했다. 아니다, 선우는 죽지 않았다. - P17
박진우를 뒤로 하고 경찰서를 나왔다. 차에 올라타자 몸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는 기진해진 몸을 핸들에 기댔다. 긴 한숨이입에서 터져 나왔다. 일주일. - P18
하지만 그의 걱정은 기우였다. 그는 예원의 눈치를 보느라 애쓰지도, 목걸이에 대해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을 밀어내느라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에게 걸려 온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예원이 선우 실종 사건의 담당 형사 차를 고의로 부숴 유치장에 감금됐다는 전화였다. - P18
영인 경찰서 주차장 안쪽으로 승용차 한 대가 빠르게 들어와 파열음을 내며 멈춰 섰다. 시동을 끄자마자 선준은 다급히 내렸다. 본관 안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기던 그가 우뚝 멈춰 섰다. 왼쪽 옆으로 엉망이 된 흰색 승용차가 레커차에 끌려 나가고 있었다. 차량의 후미가 완전히 찌그러져 있었다. 사람이 탔다면 다치고도 남았을 상태였다. - P19
1층에 있는 형사과로 들어갔다. "열어, 얼라고! 이거 안 일어?" 철창을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새된 고함이 들렸다. 예원의 목소리였다. 형사과의 몇 명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고, 아예 귀를 틀어막은 사람도 보였다. - P19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양 형사를 보았다. 이미 선준의 연락처 정도는 알고 있는 양 형사를 향해 명함을 내밀었다. "차 수리하시고, 비용이랑∙∙∙∙∙∙ 합의금, 연락 주세요." 기가 막힌다는 듯 양 형사가 하! 숨을 크게 뱉었다. "지금 현행범으로 잡히고 합의를 하자고요? 형사랑?" 그때 유치장 쪽에서 깡깡거리는 소리가 났다. 예원이 가방으로있는 힘껏 유치장을 두드리고 있었다. - P20
양 형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유치장을 보며 소리쳤다. "아줌마! 공무집행방해, 재물손괴 살인미수에∙∙∙∙∙∙ 어, 그래! 협박까지 추가야!" "그럼 넌 도둑이야! 밥도둑! 이 새끼들아!" 양 형사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선준에게로 돌렸다. - P21
그는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구속하세요. 법정에서 보겠네요." 선준은 주머니에서 잘 접힌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어 양 형사의 책상 앞에 놓았다. 양형사의 고개가 그쪽으로 기울어졌다. 영인대학병원 정신과에서 발행한 정신병원 입원 소견서였다. - P21
전에 없을 정도로 조심스러운 의사의 말을 들은 것이 불과 이틀 전이었다. 그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지만, 소견서를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도 알지 못했다. - P22
양 형사가 거칠게 유치장의 문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차의 수리비를 주는 선에서 합의하기로 한 뒤였다. 예원이 벌인 일이 위법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그에게도 딸이 있었다. - P22
3년이 지난 지금 자신이 담당 형사라는 것은 명목뿐이었고, 수사팀도 없는 상황이었다. 일정 주기로 경찰이 뿌리는 실종 어린이 찾기 전단지에 선우의 이름이 올라가는 것이 전부였고, 양 형사에게는선우 외에도 많은 사건들이 떨어졌다. - P23
철창의 문을 열어주자 예원이 그를 노려보며 바깥으로 나왔다.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아주 당당한 태도였다. 선준은 예원이 나오는 것을 보고 아무 말 없이 홱 돌아 나갔다. 예원은 그런선준을 따라 나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또 무슨 짓을 벌일까 싶어 양 형사가 움찔했다. - P23
그는 양 형사와 게시판 사이에 서더니 전단지를 떼어내려 팔을 뻗었다. 양 형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폐지 마!" 신입 형사가 불에 댄 듯 놀라 전단지에서 손을 뗐다. 양 형사는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누굴 죽일라고." 전단지를 뗀 것을 알면 이번에는 차를 박는 수준에서 끝내지 않을 것이었다. 어쩌면 이번엔 그의 얼굴을 죄 뜯어놓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P24
"나 입원 안해." 선준이 눈을 치켜떴다. 예원은 고집스럽게 입술을 앙다물고 선준을 노려보았다. 선준은 양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입원 안 하면? 이번에는 무슨 짓을 저지를 건데?" "입원하면? 우리 선우 찾는 전단지는 누가 돌리고 실종자 모임에는 누가 나가? 우리 선우는 누가 찾냐고?" "내가 찾아! 내가!" - P25
뭐라고 해야 할까. 뭐라고. "그럼 이혼하는 수밖에는 없어." 순간 예원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예원은 이혼을 원하지않았다. 다시 되돌아올 선우를 기다리는 것은 온전한 가정이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혼이 그녀에게 협박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 - P26
예원의 입원이 결정된 곳은 희망 정신요양원이었다. S 시큐리티의 고객사라서 원장과는 안면이 있었다. 영인대학병원 정신과의 입원 소견서를 들고 찾아간 선준에게 희망 정신요양원 민서진이 도움을 주기로 했다. - P27
걱정하지 마, 선우 찾는 일은 내가 계속할게. 그 말이 목구멍 언저리에서 서성거렸다. 어차피 돌아올 것은 원망뿐임을 알고 있어서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 P27
알았다는 듯 심명훈이 경비실로 돌아가 버튼을 하나 누르자 육중한 철문이 천천히 양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완전히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선준은 차를 안으로 몰았다. 예원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세상을 격리라도 하듯 눈앞에서 철문이 거친 비명을 지르며 닫혔다. - P28
예원은 자신이 환자라는 것이 잘 실감 나지 않았다. 반면 선준은 가지고 온 짐을 벌써 옷장에 정리해 넣고 있었다. 예원의 눈에는 한시라도 빨리 떨어지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럼 정리하고 계세요. 생활에 필요한 사항은 조금 이따 간호선생이 와서 설명할 겁니다." - P25
"이걸로 갈아입으시면 됩니다." 간호부장이 옆에 선 간호사에게서 환자복을 건네받아 예원에게 내밀었다. 예원은 오늘도 선우의 사진이 박힌 티셔츠를 입고있었다. 예원은 그가 내민 환자복의 바지만 받았다. "이것만 입을게요." "규정입니다. 입으세요." - P29
"환자복으로 입으셔야 해요." "놔!" 예원이 거칠게 간호사의 손을 밀쳤다. 밀쳐진 간호사의 손이철제 침대 난간에 부딪혔다. 간호부장은 굳은 얼굴로 두 사람의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그가 짧게 말했다. - P30
안에는 선우의 사진이 프린트된 티셔츠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중에 한장을 꺼내입었다. 세 명의 환자가 막다른 길에 몰린 가젤처럼 몸을 떨며 지켜보고 있었다. 예원은 그들을 향해 턱을 치켜들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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