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물 체계

우리는 기저귀를 차고 고무젖꼭지를 빨았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 또한 자신의 이름은 알지만 이 이름을 얻게 된 경위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대략 다섯 살 이후로는 아꼈던 애완동물, 장난감,
선생님, 친구, 숙모들의 달갑지 않은 포옹, 골을 넣은 순간, 여름 캠프, 할로윈 축제 등 삶에서 일어난 일을 상당히 잘 기억한다. - P34

톨스토이는 "다섯 살 때부터 지금의 나 자신까지는 한 단계에 불과하지만 갓 태어났을 때부터 다섯 살 아이가 되기까지는 어마어마한 거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우리는 울고 옹알이하는 신생아에서 각자가 속한 문화에서 의미를 찾는 성인으로 변모하는가? - P35

심리적 안정감을 향한 욕구

어린 시절은 심리적 안정감 구축에 매우 중요하다. 어린 시절이 원만하지 않으면 성인기로 향하는 여정이 대단히 참혹할 수 있다. - P35

사이프리언은 동물원 같은 고아원에서 자라는 17만 명에 이르는 루마니아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이곳 아이들은 늘 배를 곯았고 기저귀도 아주 가끔밖에 갈아주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 맑은 공기를 쐴 기회도 없었다. 아이들 방은 오줌 냄새와 퀘퀘한 체취로 가득 차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 P36

. 1992년 여름 부쿠레슈티에서 양부모가 사이프리언을 데리러 왔을 때 그는 ‘성장 실패 상태‘, 즉 성장과 발달이 멈춘 상태였다. 당시 그는 신체적으로 쪼그라들고 영양실조 상태인 두 살배기아기였다. 정신적으로는 더더욱 심각했다.
그러나 사이프리언은 몇 안 되는 행운아 중 한 명이었다. 양부모는 그에게 캐머런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고 그를 미국으로 데려갔다. 새 가족은 그에게 애정과 관심을 쏟아 부었다.  - P36

다섯 살 무렵 캐머런이 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대니얼과 그의아내는 아들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
캐머런은 ‘반응성 애착장애 reactive attachment disorder‘라고 하는 심각한 심리적 질환을 앓고 있었다. - P37

‘안정감‘이라는 감정은 아기에게는 우유와 온기만큼이나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그러나 아기에게 이런 감정은 저절로 생겨나지않는다.  - P37

반면, 인간 신생아들은 모든 생물 중에서 가장 미숙하고 무력한 존재이다. 자궁 밖으로 나온인간은 한동안 남의 도움 없이는 목을 가누거나 몸을 뒤집을 수도 없다. - P37

20세기 내내 심리학자들은 아기가 부모를 사랑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라고 생각했다. 부모가 먹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P38

 이후 행동심리학자 B. F. 스키너 Skinner는 유아기 유대 관계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강화reinforcement‘라고 주장했다. 강화 이론은 우유를 들고 반복해서 나타나는 사람이 누구든 간에 명백히 수유와 연관이 있으므로 아기의 애착과 애정을 받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 - P38

그러나 애착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해리할로 Harry Harlow가 일련의 유명한 실험을 실시하기 전인 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P38

할로는 새끼 원숭이들에게 안정의 기반은 테리 직물 어미라고 설명했다. 부드러운 어미와 편안하게 접촉하면서 처음에 느꼈던 공포가 누그러지자 원숭이들은 자신감을 되찾았다. 할로는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는 이유는 부모가 먹을 것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는 결론을내렸다. 우리는 부모와 신체를 접촉함으로써 편안한 안정감을 얻기때문에 부모를 사랑한다.
할로가 실험을 하는 동안 정신과의사 존 볼비 John Bowlby는 이와 일맥상통하는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을 전개했다. - P40

 볼비는 유아가 생존하려면 관심을 주는 양육자와 감정적으로 애착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아는 무력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불안에 유달리 취약하며, 애착 대상과의 분리는 그들에게 최악의 위협 요인이다. 볼비는 이러한이유로 유아에게 자신이 안전하고 정상이라는 감각, 즉 ‘기본적 신뢰basic trust‘ 형성은 지극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 P41

신뢰와 시련
오늘날 우리는 랭크, 할로, 볼비를 비롯한 여러 학자 덕분에 영아초기에 심리적 안정감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원천이 부모의 사랑과 보호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 P41

운 좋게도 애정이 넘치는 가정에 태어나면 신생아 노릇은 꽤 할만한 일이다. 엄마의 따스한 품으로 파고들면 달콤한 영양분을 얻을수 있다. - P41

걷기 시작하면 이러한 즐거운 반응을 끌어내기란 힘들어지며 부모가 좋아하지 않는 행동을 할 때는 특히 더 그렇다. 이 시기에 아이는 흙먼지를 입에 넣기도 한다. 어항에 오줌을 눌 수도 있다. 찻길로 굴러가는 공을 쫓아가기도 한다. - P42

부모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면 아이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때로는 이 일에 말 그대로 생사가 결정되기도 한다. - P42

그러나 자녀가 부적절하게 행동하면 부모는 질책, 타임아웃(time-out, 일정 시간 동안 자녀를 격리하여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못하도록 하는 행동 수정 기법의 일종-옮긴이), 체벌, 혹은 승인의 철저한 배제 등으로 대응한다.  - P43

안정의 기반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으로부터 공격받거나 버림받는 일보다 더 나쁜 건 없을 것이다. - P44

이렇게 성장하면서 우리는 ‘착한‘ 소녀나 소년이 되는 일은 보호및 행복과 연결되고 ‘나쁜‘ 소녀 소년이 되는 일은 불안 및 취약성과 결부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 P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록 C

비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운과 인내였고, 대부분의 추적에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비비안의 여정과 사진에 강하게 끌리기도 했지만, 나 자신에게도 도전해보고 싶었다. 나는 대부분 무료로 구할 수 있는 정보를 이용했다. - P398

뉴욕에서는 비비안을 아는 사람을 한 명도 찾을 수 없어서, 사진 속 익명의 피사체들은 알려지지 않은 비비안의 생애를 채워줄 잠재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찾을 수 있는 단서는 나이 든 부부와 세 명의 젊은 아가씨들이라는 것, 그리고 공동주택의 옥상뿐이었다. 이 가족의사진에는 드물게도 날짜가 적혀 있는 사진이 몇 장 있었고, ‘란다초 부인‘
이라고 적혀 있는 사진도 한 장 있어, 성을 근거로 탐문할 수 있었다. - P399

인터넷으로 재빨리 검색해보니 란다초는 시칠리아계 성이었다. (중략) 놀랍게도 1940년에 실시한 인구조사대로라면 뉴욕시만 해도 란다초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거의 700명에 달했다. - P399

옥상 사진에서는 남쪽에 있는 대단지 흰색 아파트를 비롯해 먼 곳의 건물과 주변 풍경이 보인다. 브롱크스와 퀸즈에 그런 고층 건물이 많다는 사실을 떠올린 나는 다음 6개월 동안 딸이 셋인 란다초 가족을 찾으려고 두 지역의 옛 사진들과 인구조사 기록을 체계적으로 조사했다.  - P399

그러던 어느 날, 차를 타고 3번로를 달리고 있을 때, 문득 위를 올려다보았고, 마침내 발견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위치와는 정반대 방향에서 말이다. - P399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나는 원본 사진을 뒤집어보았고, 지금까지 무엇을 놓쳤는지 알 수 있었다. 흰색 아파트 단지를 공동주택의 북서쪽으로 보내고 나자, 비로소 헌터 칼리지의 낯익은 작은 탑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에서는 박공 건물이 옆에 있었지만, 구글어스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 P400

사진에서 북쪽의 위치를 확실하게 정하자 사진 속 인물 가운에 한 명의 어깨너머로 훨씬 남쪽에 있는 특수외과병원(HSS)이 보였다. 지금까지 찾은 건물들을 삼각측량법으로 배치해, 결국 비비안이 사진을 찍은 장소가이스트 63번가 403번지임을 확인했고, ‘올드 뉴욕 시티‘에서 그곳에 있던건물 역시 철거됐음을 알았다. - P401

어쩌면 란다초 가족은 1940년 이후에 63번가로 이사했을 수도 있었기때문에 1940년 인구조사에서 뉴욕에 살던 모든 S. 란다초나 란다사를 찾는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에 착수했다. 하지만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 P401

. 1940년 인구조사 기록에는 ‘란드소‘
라고 성이 잘못 기재되어 있었고, 전화번호부에도 ‘란다사‘라고 잘못 적혀있어서 그렇게 찾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철자가 틀리면 족보가 뒤틀릴 수 있다!) 나를 괴롭혔던 그 옥상은 비비안이 살았던 64번가 아파트에서 한 블록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 P402

부고를 뒤지자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 있는 란다초 자매 가운데 한 명의 결혼한 성과 주소를 찾을 수 있었다. - P402

사진 속 인물들을 아주 오랫동안 조사하고 찾아다니다 보면, 마치 내친구 같다는 기분이 들어 직접 만나기 전부터 친근하게 느껴지는데, 애나를만났을 때가 딱 그랬다. 애나는 정말 더없이 좋은 인터뷰이였다. - P402

소피의 사진은 특히 실험적으로 보였는데 애나는 그 이유를 소피가 괴짜였고, 비비안의 진짜 친구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피와 비비안은 동갑으로, 동네에서 만났다. - P402

2.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의 조앤

(전략)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 살던 매력적인 어린 소녀를 찾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고. 이 여섯 살 아이는 여러 카메라로 촬영하고, 잘라내기와 인화를 여러 방법으로 실험하던 과도기에 피사체가 되어주었다. 조앤 가족의 사진은 500장에 이르는데, 이는 비비안이 뉴욕에서 찍은 사진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 P403

그토록 사진이 많은데도 고용주들의 신원을 밝힐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 어떤 글이나 이름, 특별한 장소조차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읽을 수 있는 정보는 그들이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340번지로 식별되는 아파트에 사는 가톨릭 신자이며, 중년의 부모와 그들의 딸로 구성된 가족이라는 것뿐이었다. - P403

인구조사 기록이 없을 때 가족 구성원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한방법은 부고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나는 리버사이드 드라이브340번지에 살았던 시드니 샬랫sydney Charlat을 찾아냈고, 그에게 네 자녀가 있음을 확인했다. - P404

나는 루시아 샬랫의 생김새가 1953년 밸런타인데이 때 비비안이 찍은 사진에서 내가 찾고 있는소녀의 뒤에 서 있던 여인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진 속 여인이루시아라면, 두 가족은 친구였을 것이다. - P404

샬랫 자매에게 연락하기 전에 확실히 하고 싶었다. 인터넷을 다시 검색했고, 확실한 증거를 찾았다. 2014년 텍사스 뉴스레터에는 캐럴 샬랫의 주방을 소개하는 글이 실렸는데, 그곳 식탁에 비비안의 사진에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촛대가 놓여 있었다. - P405

조얀은 캐럴과 함께 기억을 더듬은 뒤에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서 살 때 프랑스인 보모가 있었던 아이는 한 명뿐이며, 자신들도 그 보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그 아이의 이름도 조앤이었고, 아이의 어머니 이름은마리이며, 그 가족은 유명한 스테이크하우스를 운영했다고 했다.  - P406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비비안의 수많은 사진에서 이미 보았던 아이의 어머니가 수년 동안 내가 계속 바라보던 얼굴이 거기 있었다. 그토록 찾아 헤맨 피사체의 정체가 마침내 드러났다. - P406

공교롭게도 조앤은비비안 마이어의 팬이었고,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까지 보았지만, 그 주인공이 자신의 보모였다는 건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조앤은 보모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저 모두 ‘마드모아젤‘이라고 불렀으니까! - P406

두 조앤은 비비안의 생애를 밝히는 데 필요한 새로운 세부 사항을 들려주었다. 본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두 조앤도, 두 조앤의 형제와 사촌들도, 보모는 차가웠고 엄격했으며, 공감 능력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비록자신이 찍은 사진을 관대하게 나누어주었지만 말이다. - P407

비화 3 여성 사진작가들

비비안의 초기 작업과 그녀가 나이든 동료들에게 보인 강한 관심에 관한 정보는 모두 부족한 상황이었다. 두사진작가의 사진과 네거티브 필름 말고는 신원을 알 수 있는 단서도 없었다. - P407

처음 두 사진을 확대하고 밝게 하자 암실 사진에서 뒤에 보이는 의자와 사무실 벽에 걸린 사진에 등장하는 의자가 같은 의자라는 것이 드러났고, 두 사진 속 인물이 동일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을 두 장이나 찍었을 뿐 아니라, 두 번째 사진은 비비안 자신이 직접 인화해 간직했던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은 비비안에게 중요한 인물이었음이 틀림없다. - P407

사진작가의 책상에 놓인 외국어 신문 「카를스루에 카탈로그Karlsruhe catalog」와 벽에 걸린 사진들을 근거로 사진작가가 독일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407

그밖에는 다른 단서가 없었기 때문에1950년대에 비비안이 자주 다니던 지역을 조사했고, 그곳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1953년에 영화 <택시> 촬영장에서 찍은 여러 사진의 배경에 한 사진 스튜디오가 보였다. - P408

스튜디오의 간판에는 ‘캐롤라 스튜디오‘라고 적혀 있었고, 유명인, 여권 사진,
결혼사진 샘플을 전시하고 있는 것으로보아 스튜디오의 주인이 비비안 사진의 주인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P408

. 철자가 다른 캐롤라를 수없이 찾고, 여러 사진을 들여다본 끝에 1933년도 기록에서 3번로 987번지 부근에서 살았던 사진작가 캐롤라 헴스를 찾을 수 있었다. 오래된 인구조사 기록에서 캐롤라가 남편과 함께 일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전화번호부에서 캐롤라의 일터가 3번로 987번지였음을 확인했다.  - P409

 나는 대안을 찾다가 귀화하지 않은 엘리제 뢰펠 멜스가 2차세계 대전 동안 독일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했던 적국 시민 등록을 했을 거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실제로 엘리제 멜스의 적국 시민 등록증에는 비비안의 사진 속 인물과 동일인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닮은 여자의 사진이 있어, 캐롤라 헴스가 엘리제의 자매이자 비비안의 멘토임을 확증할 수 있었다. - P410

1956년에 뉴욕으로 돌아온 비비안은 뜬금없이 스튜디오에 걸려 있는결혼식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 덕분에 나는 비비안이 실제로 헴스의 스튜디오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 속 거울에 지금은 사라진 캐롤라스튜디오 간판 위에 얹혀 있던 지압사chiropractor 간판이 비춰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비비안은 멘토를 찾아 스튜디오로 왔지만, 이미 캐롤라는 은퇴하고 독일로 여행을 떠난 뒤였고,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사망했다. - P410

 1940년대와 1950년대에 헴스 스튜디오가 있는 건물에서 한 건물 건너에 있던 3번로 983번지는 사진작가들의 성지였다. 비비안의 사진에도 많이 나오는 이 건물은 분명히 사진과 관련된 활동을 할 때 비비안이 자주 가는 곳이었다. - P410

 캐롤라를 찾고 1년이 지났을 때, 나는 두 번째 사진작가를 찾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유로 오트잘프에 머물면서 디지털로 저장된 1953년 뉴욕시 전화번호부를 살펴보고 있었다. ‘맥M‘으로 시작하는 수많은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지면에서 갑자기 익숙한 주소가 튀어나왔다. 3번로 983번지. - P411

(중략), 제네바 매켄지라는 사진작가가 그 건물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순간 나는 제네바라는 사진작가가 비비안이1954년에 찍은 인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앤세스트리‘ 사이트에서 제네바의 1908년 학급 앨범을 찾아보았고, 내 직감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 P4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진 저작권 표시
Photographs indicated below copyright ⓒ 2017, 2018
이 책의 모든 사진은 비비안 마이어 유산 관리소의 허가를 받아 실은 것으로,
유산 관리소의 승인이나 허락을 받지 않은 사진은 단 한 작품도 싣지 않았습니다.

비비안 마이어 유산 관리소와 말루프 컬렉션 제공
표지, 2, 10, 13, 14, 15, 46, 54, 56, 68, 77, 84, 99, 65, 101, 105, 106, 108, 110, 115, 118, 120, 121, 122,
125, 126, 129, 132, 134, 136, 137, 139, 140, 143, 144, 146, 147, 150, 153, 157, 158, 159, 160, 161, 162,
163, 165, 166, 167, 168, 170, 171, 173, 177, 178, 180, 182, 185, 186, 188, 190, 192, 195, 196, 197, 200,
203, 207, 208, 209, 212, 214, 216, 217, 218, 220, 221, 222, 224, 225, 226, 228, 231, 232, 233, 234,
236, 237, 238, 239, 241, 242, 244, 247, 253, 255, 259, 260, 261, 262, 266, 267, 276, 278, 281, 286,
287, 288, 289, 290, 291, 292, 293, 295, 306, 308, 310, 311, 333, 338, 341, 344, 345, 349, 350, 367,
369, 402, 404, 405, 406, 408, 411, 413, 414, 415.
All rights reserved.

비비안 마이어 유산 관리소 제공
26, 31, 49, 88, 89, 91, 93, 94, 95, 97, 98, 105, 107, 108, 109, 110, 113, 115, 116, 123, 132, 140, 141, 143,
159, 177, 182, 242, 245, 248, 253, 257, 286, 295, 398, 400, 401.
All rights reserved.

미국인/프랑스인 • 권위적인/소극적인 • 배려하는/냉담한 •여성적인/남성적인 •재미있는/엄격한•너그러운/고집 센 • 쾌활한/냉소적인 • 깔끔한/지저분한 • 친절한/심술궂은 • 열정적인/둔감한 • 매력적인/심각한 • 정중한/퉁명스러운 • 책임감 있는/무신경한 • 사교적인/비사교적인 • 페미니스트/전통적인 • 눈에 띄는/은둔하는 • 메리 포핀스/사악한 마녀
-비비안 마이어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묘사한 비비안의 모습 - P11

이야기는 2007년, 시카고 경매장에서 시작한다. 경매장을 찾은 존 말루프John Maloof는 구매한 물건(당시 집필하던 책에 실을 만한 사진이 있을까 싶어 낙찰받은, 낯선 사진으로 가득 찬 버려진 상자들)을 살펴보다가 자신이 엄청난 보물을 갖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 P11

 그는 경매에서 같은 작가의 사진을 구매한 사람들을 찾아내 사진과 네거티브 필름들을 사들였다. 그 뒤로도 계속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진을 구매해, 그무명 작가의 작품을 거의 다 모을 수 있었다. - P11

사람들은 비비안 마이어를 찾으려고 인터넷을 뒤지고 또 뒤졌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2009년 4월, 며칠 전에 시카고에서 세상을 떠난 보모가 그 모든 사진을 찍은 작가임을 알려주는 부고를 발견했다. - P12

그사이 말루프는 자신이 모은 돈 상당 부분을 비비안의 사진을 사는 데써버렸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작품을 여러 사람과 공유하고 판매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 P12

(전략) 비비안의 사진에 감탄한 많은 이들이 사진을 공유하고 또 공유하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플리커에 올린 사진은 스무 장밖에 되지 않았지만, 다양한 주제와 인물을 다루는 비비안의 작품에는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풍부한 감정과 개성이 담겨 있었다. - P12

결국 말루프는 비비안 사진의 또 다른 주요 구매자 제프리 골드스타인Jeffrey Goldstein과 함께 비비안의 아카이브를 준비해나갔다. 두 사람이 구매한 작품 14만점 가운데 인화한 사진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이 네거티브필름이거나 현상하지 않은 필름이었다. 작품을 모두 분류하자, 비비안이 인쇄한 형태로 남아 있는 7000여 점 외에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 P12

말루프와 골드스타인이 비비안의 작품을 공개할 때마다 그녀의 대단한 업적과 탁월한 재능을 입증하는 증거가 쌓여갔다. 언론은 새롭게 발견한 경이로운 보모에 관한 기사를 계속 실었고, 그에 힘입어 강연과 전시, 책과 찬사가 순환하듯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 P13

 비비안이 시카고에서 입주 보모 일을 했던 집을 십여 곳 찾아가 그녀에 관해 물었지만, 그 사람들은 자기 집에머물며 아이들을 돌봤던 여인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비비안이 사진을 찍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사진이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 P16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2014년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Finding Vivian Maier>는 2015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고, 사진작가였던 보모를 명성이라는 소수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성층권 안으로 쏘아올렸다. - P16

영화 제작팀은 비비안이 어렸을 때 6년 동안 프랑스 친척 집에 머물렀으며, 서른 살이 될 때까지는 맨해튼에서 살았음을 밝혀주는 가족력을찾아냈지만, 뉴욕에서 비비안이나 비비안의 가족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만나지 못했다. 서른 살 이후로는 죽을 때까지 시카고에서 살았지만, 비비안의 고용주 가운데 그 누구도 비비안이 태어난 곳이나 성장한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고, 비비안에게 가족이나 친구가 있었는지, 무엇 때문에 사진을 찍었는지, 왜 직업 사진작가가 되지 않았는지, 어째서 찍은 사진 대부분을 현상하지 않았고 자신의 작품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 P17

이 사진작가와 관계를 맺게 된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나도 그 궤도로 들어갈 가능성은 아주 낮았다. 나는 회사의 임원으로 일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욕망과 동기, 행동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연구와 분석을 하며 30년을 보냈다. 나에게는 하찮은 세부 사항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답을 모르는 채로 남겨둬도 좋을 의문은 하나도 없었다. - P17

몇 주 안에 나는 존 말루프와 제프리 골드스타인에게 연락해 함께 비비안의 이야기를 따라가보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1940년대 이후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비비안의 오빠, 찰스에게 일어난 일을 밝히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다. 비비안의 귀중한 유산의 직접적인 상속자가 될 찰스와 찰스의 후손을 찾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했다 - P18

(중략), 찰스의 죽음으로 모두가 미심쩍어하던 사실이 명확해졌다. 비비안의 유산을 물려받을 분명한 상속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사실 말이다.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은 내 이야기를 특집 기사로 실었고, 쿡 카운티의 유산 관리자들은 정보를 교환하자며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 P18

내가 비비안의 생애를 계속 쫓는 동안, 말루프와 골드스타인은 각자 나에게 비비안 마이어의 생애 전반을 다룬 권위 있는 전기를 집필해달라고요청했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사진을 언제라도 마음껏 활용할 수 있게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두 사람이 수집한 비비안의 사진 14만 점을 검토한 사람이 되었고, 그 사진들은 이 전기의 초석이 되어주었다. - P18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비비안 마이어가 태어난 세상의 얼개를 짜기 위해 가계도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내가 찾은 비비안 가족의 매장지 정보는 흔치 않은 이야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비비안의 가족 열 명은 모두 맨해튼에 묻혔는데, 묻힌 장소가 아홉 곳이나 됐다! - P19

 마이어 가족이 모두 다른 곳에 묻혔다는 사실은 그들이 영원히 함께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한 불화가 가족 내에 있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교육 받은 기록도 없고, 직업을 가진 기록도 없고, 사람들과 교류한 기록도 없는 비비안의 오빠가 마이어 가족의 비밀을 풀 열쇠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P19

 그리고 마침내, 뉴욕 주립 문서 보관소에 보관돼 있던 콕사키 뉴욕 주립 직업훈련원 수감자 목록에서 칼 마이어라는 이름을찾아냈다. 1936년도 기록이었다. 물론 이 칼이 내가 찾는 비비안의 오빠라는 확신은 없었다. 콕사키는 세 개 주가 만나는 지역으로, 이곳에 살았던칼 마이어는 K로 시작하는 칼도, C로 시작하는 칼도 많았고, 찰스 마이어도 많았다. 하지만 수감자의 출생일을 보자마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성 베드로 루터파 교회에 남아 있는 세례식 기록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 P20

문서 보관소에 도착하니 자원봉사자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7~8센티미터가량 되는 두툼한 서류철을 내밀었다. 편지와서류가 가득 차 있던 서류철에는 칼과 칼의 두 할머니, 칼의 부모, 감화원의 시각으로 전하는 비비안 가족의 완전한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 P20

당시 나는 칼의 입대 기록과 제대 기록을 포함한 칼의 군 생활 기록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열심히 들쑤시고 있었다. 하지만 1973년에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개인정보 보관소에 불이 났고, 그때 기록이 모두 소실됐다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 P20

약간의 반발심을 가지고 나는 다시 군대 문서보관소를 조사했고, 마침내 칼 마이어의 이야기를 담은 두툼한 서류철을 찾아냈다. 군대 기록에는 칼의 복무 내용뿐 아니라 남은 인생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는 정보가 담겨 있었다.  - P21

비비안은 사진에 정보를 거의 적어두지 않았기 때문에 비비안과 교류한 사람들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수년 동안 사진에서 찾은 단서들 위에 다른 정보들을 추가하면서 사진에 찍힌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려고 애썼다. - P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술은 사회활동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마시는 이의 긴장을 허물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을 낮춰주는 효과 때문이다. 코로나를 막기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로 사회활동 자체가 위축되면서, 술과 관련된 산업도 영향을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직격탄을 맞은 것이 수제 맥주였다. - P11

하지만 우리술은 이 와중에도 판매가 크게 늘었다.
SSG닷컴의 경우 2020년 전통주 매출이 전년 대비 53.6퍼센트 증가했고 G마켓도 2020년 매출이 전년과 비교해 100퍼센트 이상 늘었다. 이런 추세는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 P11

Q. 막걸리는 유난히 더 취하고 다음 날 숙취도 심한 것 같아요. 왜 그런가요?

A. 막걸리를 많이 드셔서 그렇습니다. (중략)
. 증류주는 증류과정에서 숙취의 원인이 되는 아세트알데히드나 퓨젤유 같은 불순물이 제거되는데 반해 양조주는 그 성분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증류주도 많이 마시면 몸 안에서 분해될 때 결국 아세트알데히드를 만듭니다. 결국 숙취를 결정하는 건 음주의 양이라는 이야기입니다 - P14

Q. 우리술은 단맛이 많이 난다는 느낌입니다. 특히 막걸리나 약주는 단맛이 많이 느껴지는데요, 왜 그런가요?

A. 모든 술은 당분에서 시작합니다. 미생물이 그 당분을 소비해 알코올로 만드는 것이 발효의 과정이기에, 발효를 길게 끌면 도수는 높은 대신 ‘드라이‘한 술이 되고 발효를 짧게 하면 도수가 낮으면서도 단맛이 강한 술이 됩니다. - P15

. 우리술 중에는 알코올 도수는 거의 없이 단맛만을 즐기기 위해 만들었던 감주류‘가 존재합니다. 사우나를 마치고 즐겨 마시는 식혜도 감주류의 일종입니다. 사대부들이 즐겨 마시던 청주는자연스럽게 은은한 단맛을 띠는 쪽으로 발전했습니다. - P15

Q. 막걸리는 마트에서 저렴하게 구입하는 술이라고 생각했는데요, 10만원대 막걸리도 있더라고요. 왜 그렇게 비싼가요?
A. 맥주와 소주가 72퍼센트인데 비해, 막걸리에 붙는 세금은 5퍼센트밖에 안 됩니다. - P16

Q.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진이나 위스키를 만드는데요, 이 또한 우리술의범주에 들어가나요?

A. 주세법상 위스키는 ‘일반주류‘에 속하도록 명시돼 있어 국내에서 생산된다고 하더라도 ‘우리술‘ 혹은 ‘한국‘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에 반해, 진(Gin)은 ‘일반증류주‘에 속하고 이 일반증류주는 한국술로 인정받을 수 있는 8개 주종에 속합니다(366페이지 표 참조).  - P18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의 입맛이 바뀌면서, 지역특산주를 생산하는 분들도 그에 맞춰 좀 더 다양한 제조법을 시도하게 된 것이 오늘날 진과와인, 시드르(Cidre)가 전통주에 포함되는 상황을 낳았습니다. 이런 구분이 직관적이지 못해 괜한 오해를 사고 있다면, 법을 개정하면 됩니다. - P18

Q. 부침개를 먹으면 막걸리가 생각나잖아요, 이렇듯 피자나 치킨에 어울리는 우리술도 있나요?

A. 부침개를 먹을 때 막걸리가 생각나는 건 밀가루의 텁텁함과 식용유의 느끼함을 막걸리의 탄산감과 가벼운 산미가 정리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 해법이 피자와 치킨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 P19

우리는 언제부터 술을 마시게 된 걸까

지구로부터 2만 6천 광년 떨어진 우리 은하의 중심부에는, 무려 수십억 킬로미터에 걸친 알코올 구름이 존재한다고 한다. (중략) 메탄올, 에탄올, 비닐에탄올로 구성된 이 화합물을 그대로 흡입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다.  - P26

 술과 인류 문명의 상호작용에 대해 연구해 온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분자고고학 교수 패트릭 E. 맥거번은 그의 책 《술의 세계사》에서 이와 같은 유기화합물이 포함된 우주먼지가 얼음으로 뒤덮인 혜성의 머리 부분에 붙어서 지구까지 운반됐을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다. - P27

이때 ‘이 근처에 고농도의 당분이 존재하고있다!‘는 강력한 신호가 되는 것이 바로 알코올의 향이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효모라는 미생물이 당을 포착하고 ‘당발효(또는 알코올 발효)‘라는 과정을 거쳐 분해하면, 이산화탄소와 알코올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해술 냄새가 나는 곳에는 먹을 것이 있다! - P27

알코올이 인류의 식단에 포함된 다음부터는, 진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체내에 들어간 알코올은 전두엽을 자극해 환상과 환각을 보게 만들었고, 이러한 체험은 우리가 추상적 세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이해하기위한 노력을 시작하는 단초가 됐다.  - P28

맥거번은 그의 책에서 (중략). 즉, 이 작품을 그린 예술가가 ‘한 잔 걸친 상태‘였다는 말이다. 예술가와 주술사는 의식의 확장을 위해 알코올을 적극적으로 이용했을 것이고, 절정의 환각 상태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려 몸부림친 결과가 바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동굴 벽화, 그리고 태고의 신화라는 것이다.  - P29

맥거번은 오랜 연구를 통해 ‘인류 최초의 술‘이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를 추적해 왔다. (중략) 중국 허난성의 성도 정저우(鄭州)에서 동남쪽으로 2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후라는 신석기시대 유적지가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9천 년 된 토기 병을 분자고고학적 방법으로 분석한 결과, 술의 흔적이 발견됐다. - P29

연구팀은 이와 같은 결과를 바탕으로, 토기 속에 담겼던 술을 재현해 보고자 했다. 인근의 수제 맥주 양조장이 힘을 보탰다. 먼저 그들은 쌀을 중국 누룩을 만들 때 사용하는 곰팡이로 당화시키고, 여기에 꿀과 산사나무 열매 분말을 배합했다. 그리고 일본 사케를 만들 때 쓰는 건조 효모를 넣어 발효를 진행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쌀 맥주에 그들은 ‘샤토 자후(Chateau Jiahu)‘라는 이름을 붙였다. - P29

조선 전기 안동 일대 양반가의 음식 문화가 집대성된 《수운잡방(?雲雜?)》에는 다음과 같이 포도주 만드는 법이 전해진다.

"포도를 짓이겨 놓은 다음 찹쌀 다섯 되로 죽을 쑤어 이를 섞어독에 담아두고 맑아지기를 기다렸다가 쓴다." - P30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8호 삼해소주의 맥을 잇는 삼해소주 아카데미에서는 매 기수마다 교육생들과 함께 삼해주,
그리고 삼해포도주를 빚고 있다. 삼해포도주를 증류한 것을 ‘삼해포‘라는이름을 붙여 병입하는데, 현재의 주세법으로는 분류하기 애매한 카테고리여서 아쉽게 상품화는 되지 않고 있다(쌀 대비 20퍼센트 이상의 과실이 들어가면 주세법상 탁주 혹은 약주 카테고리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술의 다양한 장르를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전통주 관련 주세법은 한시바삐 손질될 필요가 있다). - P31

 술에 대한 우리의 욕망은 많은 부분 본능에 기대고 있으며, 그 본능의 부름에 충실했던 조상들의창의적인 활약으로 모든 문화권에서 고유의 발효음료를 제조해 왔다는것이다. 다만 술빚기가 시작된 시기는 그 지역이 양조의 그라운드 제로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에 따라 차이가 났다.  - P32

우리술은
어떻게 구분할까

우리술만큼 한눈에 구분하기 쉬운 술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뽀얗고 되직한 질감을 가진 탁주, 옅은 황금색을 띤 채 우아한 향을 풍기는 청주, 그리고 얼음처럼 투명하면서도 뜨거운 불기운을 담고 있는 소주. - P35

일단 우리술은 곡주가 대부분이기에, 중간에 술의 재료가 된 곡물의 건더기를 제거해 주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술을 ‘거르는 일이다. 이것을 기준으로 분류한 것이 탁주와 청주다. - P33

여기서 고형분을 어떤 수단으로, 얼마나 제거하느냐에 따라 탁주(탁한 술)에서 청주(맑은 술)로 가는 스펙트럼이 생겨난다. 이런 분류는 동양의 술 분류 체계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한다. - P34

것이다. 5제는 발효의 진행 과정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앞에 나오는 술이 발효가 덜 된 술이고, 뒤로 갈수록 발효, 숙성, 침전이 더 많이 이루어진 술이다.  - P34

세 번째는 앙제(??)로, 여기서부터는 맑은술로 볼 수 있다. ‘술이 익어 파뿌리(??)*처럼 하얀 빛깔이 나는 것‘을 의미한다.

*일부 자료에선 원문에 나오는 총백색(?白色)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 앙제를 ‘연한 푸른빛이 감도는 술이라고설명하지만, 양조라는 맥락에서는 ‘총백(=파뿌리)의 색‘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탁주 단계에서 술이 푸른빛을띠면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 P34

탁주는 오늘날 막걸리와 동의어로 쓰이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상둘의 성격은 같다고 보기 힘들다. 모든 막걸리는 탁주이지만, 모든 탁주가 막걸리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탁주는 우리술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이 처음 마신 술은 탁주의 외양을 띠고있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 P35

즉, 필터링 (Filtering)이다. 항아리 안에 들어 있는, 발효가 막 끝난 술덧을 보면 얼핏 곤죽 같아 보인다. 여기에 대나무로 된 용수를 꽂으면, 그 안에 맑은 술이 고이게 된다. 이렇게 해서 떠내는 것이 청주다. 청주를 다 떠낸 지게미에도 여전히 알코올 성분은 남아 있다. 여기에 물을 타서, 다시한 번 걸러낸 것이 바로 막걸리다. - P35

(중략), 그것이 바로 막걸리라는 이름에 포함된 뜻이다. 청주에 비해 맛도 향도 품격도 조금 떨어지는 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값도 쌌을 것이고, 청주를 떠낸 뒤에 물까지 탔으니 알코올 도수도 그리 높지 않았을 것이다. 일반 백성들이 밭일 나갈 때 허리춤에 한 병 차고 나가, 일하는 틈틈이 갈증을 달래는 용도로 마시기에는 안성맞춤이었을 터다. - P36

그러나 2010년대 이후 1980년대부터 줄기차게 이어진 우리술 복원 노력이 차근차근 결실을 보게 되고, 막걸리의 고급화에 대한 소비자들의 요구가 강해지면서 감미료를 첨가하지 않고 물을 타서 도수를 낮추지도 않은 프리미엄 막걸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 P36

전통적인 탁주는 곡물로부터 온 단백질과 전분, 미네랄 성분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감칠맛이 돌고 향이 풍성하다. 그래서 제대로 만든 전통 탁주는 얇고 작은 잔에 따라 홀짝거리는 것보다는 사발에 따라서 크게 한입 베어 무는 것처럼 마시는 것이 제격이다. - P37

청주는 전통주 연구가 박록담 선생의 표현을 빌면 "우리 전통주의 근간(根幹)"이다. 지금은 오히려 막걸리에 밀려 존재감이 덜한 면이 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우리술의 메인스트림은 청주였다. - P37

 운두가 좀 낮은 소서 (Saucer)형의 샴페인 글라스와도 궁합이 잘 맞는다. 도자기 잔을 쓰려거든 백자 이외에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 P37

 조선시대는 사대부 집안에서 제사용으로 저마다 가양주를 빚게되면서, ‘법도대로 빚은 품격 있는 술‘에 대한 니즈가 커져간 시기다. 자태로나 맛으로나 탁주보다 고급스러우면서, 여러 번 덧술까지 해 도수도 높고 향도 진한 삼양주 이상의 청주가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방법으로 만든 술을 근사하게 부르는 다른 이름이 바로 춘주(春酒)였고 그래서조선의 청주 중엔 유독 ‘춘‘자로 끝나는 이름이 많은 것이다. - P38

우리 방식대로 만든 술에 청주라는 이름 자체를 쓰지 못하게 되면서, 청주 하면 으레 ‘일본식으로 빚은술‘이라고 연상하게끔 돼버린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술의 근간‘인 청주가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선, 주세법이 개정돼 우리의 전통방식으로 만든 청주도 더 이상 약주가 아닌 본래의 이름 청주 그대로 불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 P39

 ‘전통적으로 빚어 마시던 양조주 vs 새로이 도입된 기술로 이를 증류한 증류주‘라는 구분법은, 종교적인 이유로 술이 금지된 나라를 제외하면 세계에 곳곳에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 P39

. 유럽에선 맥주 vs 위스키, 와인 vs 브랜디가 여기에 해당하고 멕시코로 가면 풀케(Pulque) vs 메스칼(Mezcal)이 이런 구분법에 맞는다. - P39

양조와 증류의 상관관계를 알면 같은 맥락에 있는 다른 나라의 술도 더불어 이해할 수 있으니, 양조주와 증류주의 구분은 지역성과 보편성이라는 기준에 더해 문화전파의 과정이라는 세계사적 시각으로 지구상의 술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틀이라고 할 수 있겠다. - P40

. 양조주 안에 포함된 알코올은 모두 미생물의 생체 대사의 결과물이므로, 발효액 안에서 알코올 농도가 20도 이상 넘어가면 미생물 자체가 사멸하게 돼 더 이상 발효가 진행되지 않는다. 즉, 알코올 도수 20도 이상의양조주를 만드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증류주(酒)는 이런 양조주를 술덧으로 해, 증류(Distillation)라는 과정을 거쳐 알코올의 농도를끌어올린다. - P40

 곡물에서 만들어진 양조주를 불살라 그 영혼(Spirit)에 해당하는 알코올만을 취한 술,
그것이 ‘우리술의 혼‘이라고 할 수 있는 전통 증류식 소주인 것이다. 사실 애초에 모든 소주는 전통 증류식 소주였다. - P40

(중략). 이것은 스카치위스키에 일어났던 일과도 일맥상통한다. 애당초 모든 스카치위스키는 싱글 몰트(Single Malt, 오로지 보리 맥아로만 만드는 위스키)였는데, 19세기 중반 이후 채산성을 위해 보리 이외의 곡물로도 위스키를만들게 되면서(그레인 위스키) 정통성을 알리기 위해 ‘싱글 몰트‘를 붙이지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됐던 것이다. 스코틀랜드에서 1970년대 이후 다시금 싱글 몰트의 자부심을 되찾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그것이 세계적인 싱글 몰트 열풍으로 이어졌듯, 우리나라에서 다시금 증류식 소주에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 P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데카르트가 모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용한 표현에 따르면 "이는 육체 기관에 좌우된다." 이는 동물을 포함한 적절한 육체 기관을 가지고 있는 어떤 존재에게도 귀속할 수 있는 감각이다. 예를 들어 인간과 기린은 모두 이러한 ‘감각을 갖는다‘라는 의미에서 시각적 감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에서 동물이 감각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외부의 자극을 통해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감각 기관(예를 들어 눈과 귀)을 갖는다고 말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 P92

그리고 이러한 자극은 "영향을 받은 육체 기관과 마음의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도, 따라서 의식 없이도 발생할 수있다고 데카르트는 명시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 P92

데카르트에 따르면 첫 번째 등급의 감각 외의 다른 감각을 가지려면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데카르트의 가르침은 동물들이 "두 번째와 세 번째 등급의 감각을 갖지 않는다"가 되어야 한다.  - P93

데카르트가 동물이 ‘생각한다‘는 것을부정할 때, 그는 간략하게 말해 동물이 갖는 감각이 "외부 대상에 의한 육체 기관의 직접적인 영향" 이상임을, 그리고 동물이 의식적으로 무엇인가를 인지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 P93

실제로 철학자들 중에서 혹은, 우리가 살펴볼 것이지만, 당대의 과학자중에서 오직 데카르트만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 P94

데카르트에게는 잘 돌본 애완견(pet dog)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치 의식을 가지고 있기라도 하듯 자신의 애완견을 잘 보살핀 것이다.¹²

12) Keith Gunderson, "Descartes, La Mettrie, Language and Machines," Philosophy 39, no.
149(July 1964): 202에서 언급됨. - P94

1.2 데카르트에게 도전하지 않는 방법

 하지만 데카르트는 전혀 미치지 않았으며, 우리는 동물이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부정하는 그의 입장을 대인 논증¹⁴의 방식으로 외면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가 말하는 바를 한 명의 사람으로서의 그를 공격함으로써 외면해 버려서는 안 된다는것이다. 

14) (옮긴이) all hominem. 어떤 주장을 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특성 때문에 그 주장 자체를 반대하거나 작성하는 논증. - P95

우리는 데카르트가 이러한 믿음을 일종의 ‘편견‘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편견이란 우리가 정당화할 필요성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다. - P95

우리는 데카르트가 이러한 믿음을 일종의 ‘편견‘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편견이란 우리가 정당화할 필요성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다.  - P95

 데카르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이와동일한 평가가 동물에게 의식이 있다는 믿음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즉지금까지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이해하고 정당화하는 데 별다른 시간을 들이지 않은 것이다. - P96

마찬가지로 데카르트도 동물의 의식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유사한 이유로 번복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설령 "우리 모두가 동물이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 데카르트의 목소리를 감안한다.
면, 어떻게 이것이 사실일 수 있는가?)라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 단계에서 ‘우리 모두가 믿는 바에 호소하는 것은 적나라한 편견을 신뢰함이라는 포장으로 그저 감싸는 것이다. - P96

개는 뛰어오르고, 짖고, 문을 긁어대고, 꼬리를 흔들어 댄다. 참으로 이러한 모습은 황홀 상태에서 빙글빙글돌거나 격렬하게 춤을 추는 등의 의식을 행하는 탁발 수도승을 닮았다. 만약 데카르트가 개가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마저도 거부하려 했다면, 우리는 동물에 대한 그의 입장을 쉽사리 거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 P96

데카르트와 동물에게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간의 차이는 동물의 공공연한 행동에 관한 어떤 사실을 놓고 발생하는 불일치가 아니다. 양자 간의 불일치는 어떻게 이러한 사실을 최선의 방식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가와 관련된다. - P97

일단 이 정도를 확인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동물이 행동하는가에 관한어떤 사실을 나열함으로써 동물에 대한 데카르트의 견해에 대응하려는 것은 논점을 잘못 짚은 것이라는 점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데카르트와 그의 비판자들이 나누어지는 지점은 이러한 사실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이다. - P97

의인화

현재의 맥락에서 상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태도에 불리한 영향을 미치는 고찰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의인화(anthropomorphism)의 문제이다. 웹스터 사전은 의인화하다라는 동사의 적절한 의미를 "인간 아닌 것들에 인간의 특징을 귀속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 P97

정의는 가령 "달이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혹은 "풀이 비와 계약을 맺었다"의 경우와 같이 우리가 오직 인간에게만 귀속하는 어떤 특징을 인간이 아닌 사물들에 귀속하는 것을 의미해야 한다. - P98

. 의인화는 말한 대상의 실제 그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아님에도 마치 그 대상이 인간인 양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의식이 오직 인간만의 특징이라면 우리가 동물이 의식을 지닌 것처럼 말하는 것은 의인화의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이는 실제 이상의 존재로 동물을 간주하는 것이다. - P98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동물에게 의식이 있다고 생각해도, 그러한 사람들이 단지 의인화의 입장을 견지하는 것일 수있다. 의인화에 대한 비판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동물들에게 의식이 있다는 고집을 꺾지 않으려 함으로써, 혹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게함으로써 비판에 대응하는 방법의 결함을 감안라면, 우리는 분명히 다른 방법을 모색해보아야 할 것이다. - P98

 더욱 합당한 대응방법을 생각해내기에 앞서, 우리는 어떤 척도로 보아도 매우 지적인 사람이었으며, 철학·수학·자연과학 분야에서 진정으로 선구적인 사상가인 데카르트가 왜 그토록 상식에 맞지 않는 견해를 개진하고 있는지를 고찰해보아야 한다. - P99

1.3 절약의 원리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진 첫 번째 선택지(이를 기계론적 선택지 [Mechanistic Alternative]라고 부르자)는 순전히 기계론적 용어로 동물의 행위를 설명하려 한다. 이러한 선택지는 데카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동물들을 "자연의 기계로 간주한다. 이는가령 핀볼 기계와는 차이가 있는데, 다시 말해 동물은 살아 있음에 반해핀볼 기계는 살아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 P100

그런데 기계론적 선택지네 따르면 동물의 행위 메커니즘은 비록 행위 메커니즘이 살아 있지 않은 기계와는 다르지만 핀볼 기계와 다를 바 없다. 적어도 데카르트 당대의 과학은 동물의 경우 전선과 회로를 통과하는 전기 전류 대신, 혈류를 통과하는 ‘다양한 체액(humors)‘¹⁷ 혹은 ‘동물 정령(精靈, animal spirits)‘¹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17) (옮긴이) 서양 고대에서 중세까지를 지배했던 생리학 가설로, 혈액, 점액, 황담액, 흑담액의네 가지 체액이 인체를 이루는 기본 성분이며, 이것들이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질병이 생긴다고 보았다.
18) (옮긴이)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있었던 개념인데, 데카르트에서는 몸에 생기를 불어넣는신비한 성질은 버려지고 피의 미세한 부분이라는 물체적 성질만 남는다. - P101

오늘날 동물 정령 혹은 체액에 대한 믿음은 자극-반응 설명 모델에서 사용되는 생리학적, 신경학적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우리가 동물생리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늘림으로써 기계론적 선택지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기보다는, 오히려 신뢰를 더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으로 보인다. - P101

 동물들이 지르는 고함과 낑낑거리는 소리는 ‘틸트(Tilt)‘¹⁹
라는 불이 들어올 때와 다를 바 없는 기계적인 방식으로 발생하는 소리에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기계론적 선택지는 관찰 가능한 동물의 행동 방식과 관련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19) (옮긴이) 핀볼 게임을 할 때 볼을 뒤로 가게 하기 위해 게임기의 앞을 드는 식으로 기계에조작을 하면 ‘틸트‘라는 경고가 울린다. - P102

두 번째(비기계론적 선택지) 선택지는 첫 번째의 것과 차이가 있는데, 이러한 차이는 두 번째 선택지가 동물의 해부학 혹은 생리학에 관한 어떤 사실을 반박하거나 동물이 현재와 같이 행동하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차이는 두 번째 선택지가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수많은 동물들도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 P102

. 즉 여기에는 동물들이 단순히 어느 정도 복잡한 ‘살아 있는 기계‘가 아니라는 가정, 그리고 이들이 어느 정도 의식을 갖추었거나 인식을 한다는 가정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 P102

우리가 절약의 원리를 받아들인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논의를 위해 방금 설명한 두 가지 선택지 각각이 다른 선택지와 동등하게 동물의 행위를 적절히 설명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선택지 중에서 선택하기에 합당한 것은 어느 것인가? - P102

우리가 데카르트의 논의에서 일부 결점을 발견할 수있지만, 적어도 위의 이야기는 데카르트가 동물의 인식을 부정하는 이유들이 분명히 있고, 논거를 확실히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가 논의의 공백 상태에서 동물의 의식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가 훌륭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음을 보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 P103

 아울러 우리는 단순히 상식에 호소하거나 ‘우리 모두가 믿는‘ 데에 호소함으로써 데카르트의 입장을 비판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방식으로 호소할 경우 그러한 방식이 ‘편견‘을 구현하고 있다는 예측 가능한반박이 데카르트로부터 제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 P103

1.4 라메트리의 반박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기계론적 선택지가 단언적으로 말하고 있듯이, 만약 우리가 동물의 행동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동물이 의식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면, 인간의 경우에도 동일한 논리를 적용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동일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면,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 또한 ‘기계‘라고 결론 내려야 하는 것은 아닌가?  - P103

데카르트와 대조적으로 라메트리는 기계론적 선택지를 한 걸음 더 이끌어간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의 ‘정신적 삶‘은 인간 신경계 ‘체액의 변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 - P104

뉴캐슬 후작²¹에게 보낸 편지에서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동물이 우리처럼 의식이 있다면 "그들도 우리처럼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는 개연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동물이 이러한 영혼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믿지 않으면서 일부 동물이 영혼을 가지고있다고 믿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죠. 굴과 해면과 같은 다수의 동물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에는 그들이 너무 불완전합니다."²²

21) (옮긴이) 윌리엄 캐번디시(William Cavendish, 1593~1676)를 말한다.
22) Kenny, Descarres: Philosophical Letters (Animal Rights and Human Obligations, ed.
Regan and Singer에 재수록), p. 208. - P104

 여기서 데카르트는 혼동을 하고 있다. 어떤개체가 의식을 갖는다는 것이 그 개체가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음을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 ‘무덤을 넘어선 삶‘이 존재함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이승에서의 삶에서 자신의 의식을 부정하거나 다른 존재들의 의식을 유사한방식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 P1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