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C
비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운과 인내였고, 대부분의 추적에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비비안의 여정과 사진에 강하게 끌리기도 했지만, 나 자신에게도 도전해보고 싶었다. 나는 대부분 무료로 구할 수 있는 정보를 이용했다. - P398
뉴욕에서는 비비안을 아는 사람을 한 명도 찾을 수 없어서, 사진 속 익명의 피사체들은 알려지지 않은 비비안의 생애를 채워줄 잠재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찾을 수 있는 단서는 나이 든 부부와 세 명의 젊은 아가씨들이라는 것, 그리고 공동주택의 옥상뿐이었다. 이 가족의사진에는 드물게도 날짜가 적혀 있는 사진이 몇 장 있었고, ‘란다초 부인‘ 이라고 적혀 있는 사진도 한 장 있어, 성을 근거로 탐문할 수 있었다. - P399
인터넷으로 재빨리 검색해보니 란다초는 시칠리아계 성이었다. (중략) 놀랍게도 1940년에 실시한 인구조사대로라면 뉴욕시만 해도 란다초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거의 700명에 달했다. - P399
옥상 사진에서는 남쪽에 있는 대단지 흰색 아파트를 비롯해 먼 곳의 건물과 주변 풍경이 보인다. 브롱크스와 퀸즈에 그런 고층 건물이 많다는 사실을 떠올린 나는 다음 6개월 동안 딸이 셋인 란다초 가족을 찾으려고 두 지역의 옛 사진들과 인구조사 기록을 체계적으로 조사했다. - P399
그러던 어느 날, 차를 타고 3번로를 달리고 있을 때, 문득 위를 올려다보았고, 마침내 발견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위치와는 정반대 방향에서 말이다. - P399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나는 원본 사진을 뒤집어보았고, 지금까지 무엇을 놓쳤는지 알 수 있었다. 흰색 아파트 단지를 공동주택의 북서쪽으로 보내고 나자, 비로소 헌터 칼리지의 낯익은 작은 탑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에서는 박공 건물이 옆에 있었지만, 구글어스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 P400
사진에서 북쪽의 위치를 확실하게 정하자 사진 속 인물 가운에 한 명의 어깨너머로 훨씬 남쪽에 있는 특수외과병원(HSS)이 보였다. 지금까지 찾은 건물들을 삼각측량법으로 배치해, 결국 비비안이 사진을 찍은 장소가이스트 63번가 403번지임을 확인했고, ‘올드 뉴욕 시티‘에서 그곳에 있던건물 역시 철거됐음을 알았다. - P401
어쩌면 란다초 가족은 1940년 이후에 63번가로 이사했을 수도 있었기때문에 1940년 인구조사에서 뉴욕에 살던 모든 S. 란다초나 란다사를 찾는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에 착수했다. 하지만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 P401
. 1940년 인구조사 기록에는 ‘란드소‘ 라고 성이 잘못 기재되어 있었고, 전화번호부에도 ‘란다사‘라고 잘못 적혀있어서 그렇게 찾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철자가 틀리면 족보가 뒤틀릴 수 있다!) 나를 괴롭혔던 그 옥상은 비비안이 살았던 64번가 아파트에서 한 블록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 P402
부고를 뒤지자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 있는 란다초 자매 가운데 한 명의 결혼한 성과 주소를 찾을 수 있었다. - P402
사진 속 인물들을 아주 오랫동안 조사하고 찾아다니다 보면, 마치 내친구 같다는 기분이 들어 직접 만나기 전부터 친근하게 느껴지는데, 애나를만났을 때가 딱 그랬다. 애나는 정말 더없이 좋은 인터뷰이였다. - P402
소피의 사진은 특히 실험적으로 보였는데 애나는 그 이유를 소피가 괴짜였고, 비비안의 진짜 친구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피와 비비안은 동갑으로, 동네에서 만났다. - P402
2.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의 조앤
(전략)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 살던 매력적인 어린 소녀를 찾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고. 이 여섯 살 아이는 여러 카메라로 촬영하고, 잘라내기와 인화를 여러 방법으로 실험하던 과도기에 피사체가 되어주었다. 조앤 가족의 사진은 500장에 이르는데, 이는 비비안이 뉴욕에서 찍은 사진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 P403
그토록 사진이 많은데도 고용주들의 신원을 밝힐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 어떤 글이나 이름, 특별한 장소조차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읽을 수 있는 정보는 그들이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340번지로 식별되는 아파트에 사는 가톨릭 신자이며, 중년의 부모와 그들의 딸로 구성된 가족이라는 것뿐이었다. - P403
인구조사 기록이 없을 때 가족 구성원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한방법은 부고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나는 리버사이드 드라이브340번지에 살았던 시드니 샬랫sydney Charlat을 찾아냈고, 그에게 네 자녀가 있음을 확인했다. - P404
나는 루시아 샬랫의 생김새가 1953년 밸런타인데이 때 비비안이 찍은 사진에서 내가 찾고 있는소녀의 뒤에 서 있던 여인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진 속 여인이루시아라면, 두 가족은 친구였을 것이다. - P404
샬랫 자매에게 연락하기 전에 확실히 하고 싶었다. 인터넷을 다시 검색했고, 확실한 증거를 찾았다. 2014년 텍사스 뉴스레터에는 캐럴 샬랫의 주방을 소개하는 글이 실렸는데, 그곳 식탁에 비비안의 사진에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촛대가 놓여 있었다. - P405
조얀은 캐럴과 함께 기억을 더듬은 뒤에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서 살 때 프랑스인 보모가 있었던 아이는 한 명뿐이며, 자신들도 그 보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그 아이의 이름도 조앤이었고, 아이의 어머니 이름은마리이며, 그 가족은 유명한 스테이크하우스를 운영했다고 했다. - P406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비비안의 수많은 사진에서 이미 보았던 아이의 어머니가 수년 동안 내가 계속 바라보던 얼굴이 거기 있었다. 그토록 찾아 헤맨 피사체의 정체가 마침내 드러났다. - P406
공교롭게도 조앤은비비안 마이어의 팬이었고,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까지 보았지만, 그 주인공이 자신의 보모였다는 건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조앤은 보모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저 모두 ‘마드모아젤‘이라고 불렀으니까! - P406
두 조앤은 비비안의 생애를 밝히는 데 필요한 새로운 세부 사항을 들려주었다. 본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두 조앤도, 두 조앤의 형제와 사촌들도, 보모는 차가웠고 엄격했으며, 공감 능력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비록자신이 찍은 사진을 관대하게 나누어주었지만 말이다. - P407
비화 3 여성 사진작가들
비비안의 초기 작업과 그녀가 나이든 동료들에게 보인 강한 관심에 관한 정보는 모두 부족한 상황이었다. 두사진작가의 사진과 네거티브 필름 말고는 신원을 알 수 있는 단서도 없었다. - P407
처음 두 사진을 확대하고 밝게 하자 암실 사진에서 뒤에 보이는 의자와 사무실 벽에 걸린 사진에 등장하는 의자가 같은 의자라는 것이 드러났고, 두 사진 속 인물이 동일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을 두 장이나 찍었을 뿐 아니라, 두 번째 사진은 비비안 자신이 직접 인화해 간직했던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은 비비안에게 중요한 인물이었음이 틀림없다. - P407
사진작가의 책상에 놓인 외국어 신문 「카를스루에 카탈로그Karlsruhe catalog」와 벽에 걸린 사진들을 근거로 사진작가가 독일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407
그밖에는 다른 단서가 없었기 때문에1950년대에 비비안이 자주 다니던 지역을 조사했고, 그곳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1953년에 영화 <택시> 촬영장에서 찍은 여러 사진의 배경에 한 사진 스튜디오가 보였다. - P408
스튜디오의 간판에는 ‘캐롤라 스튜디오‘라고 적혀 있었고, 유명인, 여권 사진, 결혼사진 샘플을 전시하고 있는 것으로보아 스튜디오의 주인이 비비안 사진의 주인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P408
. 철자가 다른 캐롤라를 수없이 찾고, 여러 사진을 들여다본 끝에 1933년도 기록에서 3번로 987번지 부근에서 살았던 사진작가 캐롤라 헴스를 찾을 수 있었다. 오래된 인구조사 기록에서 캐롤라가 남편과 함께 일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전화번호부에서 캐롤라의 일터가 3번로 987번지였음을 확인했다. - P409
나는 대안을 찾다가 귀화하지 않은 엘리제 뢰펠 멜스가 2차세계 대전 동안 독일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했던 적국 시민 등록을 했을 거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실제로 엘리제 멜스의 적국 시민 등록증에는 비비안의 사진 속 인물과 동일인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닮은 여자의 사진이 있어, 캐롤라 헴스가 엘리제의 자매이자 비비안의 멘토임을 확증할 수 있었다. - P410
1956년에 뉴욕으로 돌아온 비비안은 뜬금없이 스튜디오에 걸려 있는결혼식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 덕분에 나는 비비안이 실제로 헴스의 스튜디오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 속 거울에 지금은 사라진 캐롤라스튜디오 간판 위에 얹혀 있던 지압사chiropractor 간판이 비춰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비비안은 멘토를 찾아 스튜디오로 왔지만, 이미 캐롤라는 은퇴하고 독일로 여행을 떠난 뒤였고,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사망했다. - P410
1940년대와 1950년대에 헴스 스튜디오가 있는 건물에서 한 건물 건너에 있던 3번로 983번지는 사진작가들의 성지였다. 비비안의 사진에도 많이 나오는 이 건물은 분명히 사진과 관련된 활동을 할 때 비비안이 자주 가는 곳이었다. - P410
캐롤라를 찾고 1년이 지났을 때, 나는 두 번째 사진작가를 찾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유로 오트잘프에 머물면서 디지털로 저장된 1953년 뉴욕시 전화번호부를 살펴보고 있었다. ‘맥M‘으로 시작하는 수많은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지면에서 갑자기 익숙한 주소가 튀어나왔다. 3번로 983번지. - P411
(중략), 제네바 매켄지라는 사진작가가 그 건물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순간 나는 제네바라는 사진작가가 비비안이1954년에 찍은 인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앤세스트리‘ 사이트에서 제네바의 1908년 학급 앨범을 찾아보았고, 내 직감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 P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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