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으십니까?"
경비원이 다가왔습니다.
전시실에 들어온 지 30분 가까이 지난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그동안 저는 내내 그 그림 앞에 서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경비원이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합니다.  - P203

택시를 타고 신신도에 가기로 했습니다.
차 안에서 시라이시 씨에게 전화를 걸어봤습니다. 일요일 정오 지나서 제가 갑자기 전화한 것 기억나시는지요. - P204

제가 아까 겪은 불가사의한 일들을 설명한들 믿어줄 리 없었겠죠.
저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으니까요.
"아뇨, 교토에서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봐서 말입니다."
"전 유리쿠정에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당신은 웃었습니다. - P204

하지만 시라이시 씨는 틀림없이 도쿄에 있었습니다. 구태여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럼 제가 착각한 거군요."
"그럴걸요."
"이거야원, 죄송합니다." - P205

사막의 궁전도 폭풍의 이미지도 모두 시라이시 씨가 인양작업으로 건져낸 것을 되풀이한 것이었습니다. 시라이시 씨의
‘목소리‘가 이야기해 준 것도 제 은밀한 망상에 불과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키 노부오 씨의 <보름달의 마녀>를 발견하고 흥분해서 제 망상이 그런 백일몽을 지어낸 게 아닐까요. - P205

저는 커피를 주문하고 노트를 폈습니다.
보름달의 마녀에게 간다.
지요 씨는 호렌도에서 그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물이 아니라 작품 이야기였을지도 모릅니다. - P206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온갖 것이 서로 연결된다는 말이죠.
이 세계의 온갖 것이 『열대』와 관계있다.
우리는 『열대』 안에 있다. - P206

이마니시 씨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코트를 벗고 제맞은편 자리에 앉았습니다. 커피를 주문하고 나서 그는 "바로 알아보겠더군요"라며 미소 지었습니다. "인상이 지요 씨에게들은 그대로입니다."
"저에 대해 아십니까?"
"당신이 뒤따라 올 거라고 했거든요. 이렇게 금방 따라잡을줄은 몰랐습니다만." - P207

"유감이지만 모릅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래서 호렌도에서 이야기를 듣고 당신에게 연락한 겁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주인에게 들었죠? 지요 씨의 행동은 참으로 불가해했습니다." - P208

"약속 시간에 와봤더니 지요 씨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로 근황을 보고한 뒤 지요 씨는 『열대』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 P208

하지만 『열대』라는 책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어젯밤 전화했을 때 먼저 『열대』에 관해 물었던 겁니다. 덕분에 지요 씨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만." - P209

"사야마는 연구와 관련된 책 외에는 곁에 잘 두지 않는 주의라 말이죠, 바로 팔아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곧잘 내 방에 와서 책을 빌려가곤 했습니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던 터라 책은 다양하게 많이 있었죠. 아동문학에서 사회학책까지 말입니다. 소설도 이것저것 있었군요. 나는 현대문학을못 읽는 사람이라 목가적인 작품들이었답니다. 『로빈슨 크루소』, 『해저 2만 리』, 『보물섬』・・・・・ 하지만 사야마도 그런 책을 좋아해서 내 책꽂이를 종종 칭찬하곤 했습니다. 농담조로 나를
‘도서관장‘이라고 불렀지 뭡니까. 읽은 책에 관해 밤새도록 토론한 적도 있고, 둘이 레코드를 틀어놓고 담배를 피우면서 시간을 보낸 적도 있습니다. 불가사의한 시간이었군요. 그런 시간은 이제 두 번 다시 누리지 못할 테죠." - P211

"사야마 씨는 왜 모습을 감췄을까요."
"나는 모르겠군요."
"뭔가 비밀이 있었을까요."
"비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특히 사야마 같은 인간은 더 그럴 테죠." - P212

이마니시 씨는 한숨을 쉬더니 저를 응시했습니다.
"그나저나 나는 도무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지요 씨를 따라 일부러 교토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 전에 모습을 감춘 사람에 관해 알고 싶어 합니다. 전부 열대라는 소설 때문 아닙니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 싶습니다."
"『열대』라는 소설에 관해 알면 알수록 수수께끼 같은 세계가 확장되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뭐랄까. 이렇게 『열대』에 관해 조사하는 행위 자체가 『열대』의 연장 같습니다."
"꼭 그 책에 홀린 것처럼 들리는군요." - P213

그동안 이마니시 씨는 잠자코 듣고 있었습니다만, 그가 동요한 듯한 순간이 한 번 있었습니다. 제가 ‘보름달의 마녀‘라는 단어를 말했을 때입니다. 하지만 곧바로 동요를 감추고 그 뒤로는 표정이 달라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 P214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가는 데마다 참으로 편리하게 단서가 나타난단 말이죠. 어떻게 그렇게 술술 풀립니까.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당신은 단서를 ‘발견‘한 게 아닙니다. 그야말로 ‘창조‘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 P214

이마니시 씨는 저를 달래듯 말했습니다.
"인간은 원래 해석이라는 이름의 렌즈를 통해 세계를 봅니다. 그런데 그 렌즈가 어떤 이유로 일그러지거나 흠집이 나면 기묘한 세계가 나타나는 거죠. 그건 음모론의 형태를 띨 수도있고 병적인 망상의 형태를 띨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세계를 보는 당사자에게는 그게 현실 그 자체인 겁니다. 당신은 『열대』라는 일그러진 렌즈를 통해 세계를 보고 있습니다. 십중팔구 지요 씨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을테죠." - P215

"보름달의 마녀."
제가 중얼거리자 이마니시 씨는 눈을 치켜떴습니다.
(중략)
역시 이마니시 씨는 감추는 게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질문에 답해 주시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시시한 이야기인데요. 별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꼭 듣고 싶습니다." - P216

사야마 쇼이치가 모습을 감추기 일주일쯤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날 내가 경험한 일은 사야마 쇼이치와도 관계가 없고 『열대』라는 소설과도 관계없습니다. 지요 씨와 나그리고 지요 씨의 아버지인 나가세 에이조 씨와 관련된 이야기죠. 그 점만은 미리 못 박아 두겠습니다. - P217

찾아가보니 부모님은 외출 중이고 지요 씨 혼자 있었습니다.
되레 긴장되더군요.
한 시간 정도 방에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요 씨는 마침책 몇 권을 준비해 놨고, 나도 내 서가에서 책을 골라 가져갔거든요. 도서관장님은 역시 다르네, 라고 하더군요. - P218

서가에는 에이조 씨의 일과 관련된 화학 서적 외에 문학, 철학, 역사 서적 등도 많았습니다. 그런 책들에 관해 한바탕 이야기를 한 다음 지요 씨가 꺼내든 것은 『천일야화』 번역서였습니다. 어렸을 때 서재에 몰래 들어와서 읽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나도 제목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읽어볼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책이었습니다. - P219

서재에 들어갔을 때부터 신경이 쓰였습니다만, 서재 남쪽에묘한 중 2층의 ‘곁방‘이 있었습니다. 넓이는 아마 겨우 한 평정도 될 겁니다. 작은 계단식 사다리를 이용해서 드나들고, 결방밑 공간은 창고처럼 쓰는 듯했습니다. - P220

분명히 죄책감도 있었습니다만, 그때 내 마음에 파고든 건 뭐라 말할 수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시금 보니 ‘방 안의 방‘이 영 기묘한 겁니다. - P220

방 안을 들여다보니 지요 씨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어쩐지 그 방에 사는 요정 같더군요. 나까지 들어갈 공간은 없어서 사다리 중간에 선 채 상반신만 숙여 방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몇 개 있는 선반에는 낡은 노트며 책, 옛날 물건들이 대충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게 『천일야화』 사본인가?"
지요 씨는 흰 종이로 싼 책을 보여주었습니다. - P221

 지요 씨의 체온과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괜찮을까."
"응, 괜찮아. 열어 봐."
지요 씨가 재촉하듯 말했습니다.
그때 서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돌아보니 에이조 씨가 서재에 서서 미소 짓고 있는 겁니다. - P222

이윽고 내려온 에이조 씨는 신기하다는 듯이 우리를 보며소파에 앉으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허락 없이 서재에 들어온 것을 사죄했습니다.
"저 때문이에요."
지요 씨가 면목 없다는 듯 중얼거렸습니다.
하지만 에이조 씨는 우리를 탓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있습니다. "뭐 재미있는 게 나왔나?"라고 하는 겁니다. - P223

이윽고 에이조 씨는 정신이 든 사람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옛날이야기를 하나 할까."
"옛날이야기요?"
"예전에 내가 만주에 있었다는 건 너도 알겠지."
지요 씨는 "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년쯤 전 일이지." - P224

(전략). 그러는 동안에도 소련군 군용기가 매일 날아와 동정을 살피고 있었으니, 언제 공격이 시작돼서 옥쇄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차츰 마음이 마비돼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약해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패전 소식을 들었다.
나는 동료 몇 명과 함께 귀대했다. 호텔을 향해 만주 벌판을 달려가는 유개화차를 타고 가며 곳곳에 펼쳐지는 수수밭, 그속에 동그마니 자리하는 만주인 촌락, 흙탕물 같은 하천, 지평선에 지는 태양, 저녁 하늘에 먹구름처럼 소용돌이치는 까마귀대군을 봤다. - P226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문득 뒤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회색 옷을입은 소련군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잘 모르겠다. 민가의 산울타리와 담장이 복잡하게 이어지는 뒷골목으로 도망치다가 어느새 동료들과도 헤어지고 말았다.
그 기묘한 남자를 만난 건 바로 그때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
옆길에서 태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P227

남자는 "헤헤" 하고 웃었다.
하세가와 겐이치와의 첫 만남이었다.
내가 분칸톤으로 갈 생각이라고 하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말했다. - P228

하세가와는 벌판을 걸으며 명랑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전에 만테쓰(남만주 철도주식회사)의 직원이었다고 했다. 오지에서 근무하다가 싫어져서 퇴직하고 호텐에서 다다미 상점을 운영하는 친척을 만나러 왔다가 패전을 맞았다고 설명했다. - P228

이윽고 하세가와가 걸으면서 시 같은 것을 읊는 소리가 들렸다.
비밀이 있으면 밝히지 말라.
남에게 말하면 비밀은어느새 비밀의 향기도 없을 것이다.
자기 가슴 속에 감추지 못한비밀을 어찌해서남의 가슴이 지켜주겠는가.
하세가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언덕을 기어 올라갔을때, 그 너머 초지에 더없이 불가사의한 것이 보였다. - P229

망연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하세가와가 속삭였다.
"저게 보이는군요?"
"저게 뭡니까?"
"보름달의 마녀입니다."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까?"
"나를 줄곧 따라왔거든요." 하세가와가 말했다. - P229

그렇게 말없이 어스름 속을 나아갔다. 나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지만 달의 불가사의한 빛이 눈에 아로새겨져 지워지지않았다. ‘보름달의 마녀‘라니, 뭘까. 이 세상 것 같지 않다. 혹시나는 이미 죽은 걸까. - P230

거기까지 이야기한 뒤 이마니시 씨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36년 전 교토를 발판으로 만주로까지 도약한 이야기는 거기에서 갑자기 중단된 겁니다. 느닷없이 허공에 내던져진 기분이었습니다. - P230

그는 이마에 손을 올리며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이마니시 씨?"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서재에 몰래 들어갔던 것도, 에이조 씨가 이야기한 만주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기억조차 떠올려 본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날 만주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나서 에이조 씨는 말했습니다. 그 카드상자에는 마녀가 산다고."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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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안 돌아갈 때면, 못 쓴 책을 읽는다.
말도 안 될 정도의 헛소리도 좋고 하지만 이 책은 겉보기에는 그럴듯 한 논리가 있는데 좀 더 들어가 교차검증을 한다면 이 논리구조의 허술함이 발견된다.

어렸을 적에는 좋은 책만 읽으라고 했지만, 좋은 책은 으레 재미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재미도 있고 또 비판적인 사고를 키우기에 좋은 책이다. 일단 이 책 덕분에 데이비드 버스의 ‘진화심리학‘를 사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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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차고 우아한 십자형 둥근 천장으로 덮인 성직자 식당과 이어서 기도실, 회의실, 평신도 식당, 수도원장 사택이 있고, 사택 옆으로는 두 채의 교회 건물이 웅장하게 서 있었다. 이육중하고 오래된 건축물 주변은 그림 같은 담장과 돌출된 창과 문, 물레방아와 집들이 화환처럼 밝고 아늑하게 둘러싸고있었다. 넓고 고요한 텅 빈 앞마당에는 나무 그림자만 흔들리며 잠을 자고 있었다.  - P72

 구릉과 숲 속에 감춰진 채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이 멋진 수도원에 말이다. 이곳에 모여든 젊은이들은 마음을 휘젓는 도시와 가족의 삶을 떠남으로써 일상의 나쁜 것들과 격리되었다. 그리하여 수년간 다른 과목들과 더불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공부를 진정한 삶의 목표로 삼고, 젊은 영혼의 욕망들은 가라앉힌 채 이상적인 학문의 즐거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 P72

신학생들의 생활비와 학비를 지원하는 재단은 지원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훗날 언제든 이 학교 출신임을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정신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교묘하고도 확실한 방식의 낙인이었다. - P73

벽장이 이어져 있는 거대한 회랑에 상자와 바구니 들이 이리저리 늘어져 있었다. 공동 침실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서 부모들과 함께온 소년들이 잡다한 물건을 꺼내고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두 각자의 번호가 매겨진 옷장을 받았고, 이후 공부하게 될 생활관에도 책장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 P73

아버지들은 미소 띤 얼굴로 짐 정리를 도와주는 것 같다가도 자꾸만 시계를 확인하고 지루해하며 밖으로 빠져나갈 기회를 노렸다. 반면에 어머니들은 자식의 모든 것을 정성껏 챙겨주었다. - P74

"새로 산 셔츠는 특히 조심히 다뤄라. 3마르크 50페니나 주고 샀으니까."
"빨래는 한 달에 한 번씩 기차로 보내렴. 필요하면 우편으로도 부치고, 검은 모자는 일요일에만 쓰도록 해라."
뚱뚱하고 푸근해 보이는 어느 어머니는 높은 상자에 앉아 아들에게 바늘과 실로 단추 다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 P74

대부분의 다른 소년들은 정반대 모습을 보였다. 그저 멀뚱히서서 분주히 움직이는 어머니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쩌면 다시 집으로 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 P75

기벤트도 아들이 짐 푸는 것을 도왔다. 능숙하고 민첩하게 일을 해치워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끝낸 그는 얼마 동안 한스와 기숙사 주변을 돌며 어찌할 줄 모르고 지루해했다. - P75

그때 근처에 있던 목사가 아버지의 말에 웃음 짓자 한스는 부끄러워서 아버지를 한쪽으로 이끌었다.
"그래, 가족의 명예를 높여주겠다고 말해주겠니? 선생님들 말씀도 잘 들을거지?"
"예, 그럼요." 한스가 대답했다.
아버지는 말을 마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곧 다시 지루해하기 시작했다. - P76

한스는 멍하니 미래의 학우들을 살펴보았다. 소년들의 소지품은 모양과 개수가 전부 비슷했지만 시골 출신과 도시 출신, 부잣집 자식과 가난한 집자식을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물론 부유한 가정에서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의 자부심이나깊은 통찰력으로, 또는 아이의 재능에 따라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 P76

학생들 중 5분의 1 정도가 안경을 쓰고 있었다. 가냘프고 귀공자 같은 슈투트가르트 출신 마마보이는 단단하고 질 좋은 중절모를 쓰고 꽤나 고상하게 행동했다. - P77

마울브론 신학교의 건물이나 규율은 겉으로 볼 때 슈바벤적인 느낌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수도원 시절부터 남아 있는 라틴어 명칭이나 새로 써 붙인 고전적인 이름표들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학생들에게 배정된 방 이름은 ‘포럼‘, ‘헬라스‘,
‘아테네‘,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였다. 가장 작고 멀리 떨어져 있는 방은 ‘게르마니아‘였는데, 이 이름에는 게르만족이 처한 현실을 가능하면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유토피아처럼 만들고자 하는 뜻이 담긴 것 같았다. - P78

학생들은 천장에 달린 커다란 석유 램프의 붉은빛 아래서 옷을 갈아입었다. 10시 15분이 되자 조교가 불을 껐다. 일렬로 된 잠자리에는 두 침대당 하나씩 침대 사이에 옷을 걸 수 있는 작은 의자가 있었고, 기둥에 매달린 밧줄에 아침 기상을 알리는 종이 걸려 있었다. - P78

한스는 전혀 집이 그립지 않았지만 집에 있는 자신의 작고 조용한 방만큼은 아쉬웠다. 잘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것들과 많은 새 친구들이 은근히 두려웠다. 아직 자정이 되지 않았는데 침실에는 아무도 깨어 있지 않았다. - P79

 다음날 작은 예배당에서 엄숙한 입학식이 열렸다. 교사들이 프록코트를 걸치고 서 있었고 교장이 인사말을 했다. 걱정이 가득한학생들은 구부정히 의자에 앉아 틈틈이 뒤쪽 멀리 앉아 있는부모들을 훔쳐보곤 했다. 어머니들은 사려 깊게 미소 지으며 아들들을 바라보았고, 당당한 자세로 교장의 인사말을 듣는 아버지들은 진지하고 단호해 보였다. - P80

학생들에게는 부모와 작별해야 하는 상황이 더 심각하고 현실적인 문제였다. 부모들은 걸어서, 혹은 역마차로,
또는 급히 다른 수단을 마련해 자식들을 남겨두고 떠나갔다. - P80

 호기심 깃든 눈으로 친구들을 바라보다가 말을 걸어 고향이 어디인지, 어느 학교 출신인지 물어보았고, 함께 진땀 흘리며 통과한 주 정부 선발 고사를 주제 삼아 떠들기 시작했다. - P81

알프스 출신으로 소도시 시장 아들인 카를 하멜은 친해지려면 꽤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하멜은 자꾸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고 괜히 무심한 척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 P81

 하멜만큼 복잡하진 않았지만 눈에 띄는 인물은 슈바르츠발트의 좋은 가문 출신인 헤르만 하일너였다. 입학 첫날부터 전교생은 그가 시인이며 문예가라는 사실을 알았다.  - P81

헬라스 방에서 가장 유별난 인물은 에밀 루치우스였다. 창백한 금발에 키가 작고 비밀이 많은 이소년은 늙은 농부처럼 집요하고 부지런했으며 감정을 별로 나타내지 않았다. 체구와 생김새는 비교적 어렸지만 아이처럼 보이기는커녕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어른의 분위기를 풍겼다.  - P82

이 조용한 괴짜의 속임수가 들통난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루치우스가 교활한 구두쇠이자 이기주의자라는 걸 모두가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파렴치한 성격조차 너무 완벽하여 동급생들은 일종의 존경심을 보이거나 모른 척해주기도 했다. - P82

그는 항상 세면장에 가장 일찍 아니면 가장 늦게 나타났다. 다른 학생들의 수건과 비누를 사용해 자기 물건을 아끼려는 수작이었다. 수건은 거의 2주 이상 깨끗한 채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규정상 일주일마다 수건을 바꾸어야 했고, 월요일마다 수석 조교가 이를 검사했다. 그래서 루치우스도 월요일이면 깨끗한 수건을 자신의 번호가 적힌 수건걸이에 걸어놓았다. - P83

젊은 사람들은 여덟 시간을 자고 나면 대개 엄청난 허기를 느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치우스는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설탕 조각을 먹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설탕을 원하는 친구에게 1페니를 받고 두 조각을 내주었고, 공책 한 권과설탕 스물다섯 조각을 교환하기도 했다. - P83

 여기서도 그는 현명하게도, 정신적 소유가 오로지 상대적인 가치로 발생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미리 기초를 쌓아두어야 나중에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과목들에 집중했고, 나머지 과목은 중간 성적에 만족하는 것이었다. - P84

그래서 매일 저녁 다른 아이들이 모두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취미를 즐길 때에도 루치우스는 책상에서 공부를 했다. - P84

. 하지만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루치우스도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수도원에서 제공하는 수업은 모두 무료였기 때문에 바이올린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딱히 전에 배운 적이 있거나 음감이 있거나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 데다 음악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면서 말이다! - P84

루치우스가 바이올린을 배우겠다며 찾아오자 음악 교사 하스는 기겁했다. 음악 시간을 통해 이미 루치우스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루치우스의 노래는 학생들에게 큰 재미를 주었지만 교사인 하스에게는 깊은 절망을 안겨주었다. - P85

루치우스는 매주 두 번 바이올린 교습을 받고 매일 30분씩 연습했다. 루치우스가 연습을 시작하자마자 같은 방 친구들은 그에게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무자비하게 긁어대는 그 소리를 다시는 듣고싶지 않다고 말했다. - P85

그럼에도 바이올린 실력이 늘지 않자 지친 음악 교사는 심란한 얼굴로 루치우스에게 심한 말을 해버렸다. 그러자 루치우스는 더 애타게 연습에 매달렸다. 그동안은 자기만족에 빠진 장사꾼이었던 그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주름이 생겨났다. - P85

진전 없는 몇 달 후 결국 루치우스도 지칠 대로 지쳐서 조용히 음악을 포기하고 말았다. - P86

한스 기벤라트는 놀라움의 눈으로 하멜을 지켜보면서도 착하고 말 없는 룸메이트로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한스는 성실했으며 루치우스만큼이나 열심히 공부했다. 다른룸메이트들은 그런 모습에 감탄했지만 하일너는 예외였다. - P86

. 그들은 자신들을 대하는 교사들의 존대가 어색하면서도 그런 대우에 걸맞도록 올바르게 행동하고 학문적으로 더 진지해지려고 노력했다. - P86

 그러나 때로는 그런 가식을 뚫고 진짜 모습인 어린아이 같은 기질이 튀어나와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럴 때면 기숙사에 쿵쾅대는 발소리와 거친 욕설이 울려 퍼졌다. - P87

첫 만남의 수줍음을 떨쳐내고 서로 탐색하고 어울리면서 마음 맞는 아이들끼리 한데 뭉치는 것이었다. (중략) 고향이 같거나 출신 학교가 같다고 해서 뭉치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은 완전히 새로운 친구들과 가까워졌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채우려는 내면의 충동에 따라 도시 아이들은 시골 아이들과 알프스 지역 아이들은 저지대 아이들과 친해졌다.  - P87

한번은 카를 하멜이 분명하고 열정적인 태도로 우정의손길을 건넸는데 한스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를 피하고 말았다. 그 후 하멜은 곧 스파르타 방의 친구와 친해졌기 때문에 한스는 혼자가 되었다. - P88

 카를 하멜은 적당한 친구가 아니었지만, 만일 다른 친구가 다가와 한스를 강하게 끌어당겼더라면 기꺼이 따라갔을 것이다. 한스는 그저 수줍은 소녀처럼 앉아서 자신보다 강하고 용기 있는 누군가가 자신을 데리러와주길, 자신의 마음을 빼앗고 행복하게 해주기만을 기다렸다. - P88

감수성이 남다른 헤르만 하일너도 마음 맞는 친구를 얻으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날마다 외출 시간이면 혼자 숲을 돌아다녔다. 특히 숲 속에 있는 호수를 좋아했다. - P89

한스는 작은 수문의 판자 다리에 앉아 무릎 위에노트를 얹은 채 잘 깎은 연필을 입에 물고 생각에 잠겨 있는 어린 시인을 발견했다. 그의 옆에는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한스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 하일너? 뭐하고 있어?" - P89

"여기 앉아봐!"
한스는 하일너 옆으로 다가가 판자 위에 앉고 두 다리를 수면 위로 흔들었다. - P90

하일녀가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저런 구름이었다면!"
"그럼 어떡할 건데?"
"그러면 우리는 저 하늘에서 숲과 마을과 도시와 주들 위로아름다운 배처럼 항해를 할 텐데. 배를 본 적 있니?"
"아니, 없어. 하일너 너는?" - P90

떠올렸다. 하일너가 이어서 말했다.
"그래, 지금과는 달랐어. 여기서 누가 그런 걸 알겠어? 전부지루한 녀석들, 위선자들뿐이야! 그저 지칠 때까지 공부하고 자신을 혹사시키지. 히브리어 알파벳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있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너도 똑같아."
한스는 침묵했다. 하일너라는 친구는 정말 신기한 녀석이었다. 몽상가에다 시인이었다. - P91

하일너는 계속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런데 《오디세이아》가 무슨 요리책도 아닌데, 한시간 동안 두 구절만 붙들고 앉아서 단어마다 구역질 나도록 되새김질하고 탐구한단 말이야. (후략)." - P92

한스는 오후 내내 하일너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하일너는 대체 어떤 녀석일까? 한스가 아는 고민거리나 소원 같은 것은 하일너에게 찾아볼 수 없었다. - P93

한스가 일 년간 해도못할 만큼의 농담을 하루 동안 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우울했으며 자신의 슬픔을 마치 제삼자의 일인 양 비범하고 훌륭한 것으로 여기며 즐기곤 했다. 그날 저녁 하일너는 룸메이트들에게 자신의 숨길 수 없는 유별난 본성을 내보이고 말았다. - P93

다른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빈정거리면서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침내 하르트너가 하일너 앞에 서서 말했다.
"야, 하일너, 창피하지도 않냐?"
울던 녀석은 방금 막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천천히 주변을둘러보았다.
"창피하다고? 너희들 앞에서?" 그러고는 큰 소리로 경멸하듯이 말했다. "절대 아니야, 이 자식들아!" - P95

한스가 가까이 다가가 창문 곁에 섰는데도 하일너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잠긴 목소리로 내뱉었다.
"뭔데?"
"나야." 한스가 소심하게 대답했다.
"무슨 일인데?"
"아무 일도 아니야." - P95

"잠깐만." 하일너는 일부러 장난스러운 투로 말했다. "진심이 아니었어."
두 소년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쩌면 그 순간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상대의 소년다운 고운 얼굴 뒤에 자기만의 고유한 특성을 지닌 인생과 자기만의 방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 영혼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상상해보았다. - P96

젊은 학생들은 점점 공동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들은 서로 잘 알게 되었고, 각자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지고 평가도 했으며, 많은 우정 관계가 생겨났다. - P97

홀로 다니는 학생은 몇 명뿐이었다. 그중에는 음악을 향한탐욕스러운 열정에 한창 빠져 있던 루치우스도 있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정 관계도 있었다. 헤르만 하일너와한스 기벤라트의 관계가 바로 경박한 학생과 성실한 학생, 시인과 공부벌레라는 가장 부조화한 우정이었다. - P97

하지만 학생들은 모두 각자의 우정을 나누며 자기들끼리 지냈기 때문에 이 둘의 우정에 참견하는 사람은 없었다. 학생들은 이러한 개인적인 관심과 경험에 대해서는 물론 학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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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폭로 / 무너져내리는 엄마

언뜻 드러난 장인의 표리부동한 태도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장인을 봐왔지만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내게 숨기는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의심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내가 헛것을 본 것 같지는 않았다.
미치코와의 관계를 알아버린 걸까? - P267

이런 상상도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장인은 흥신소를 통해 미우라의 신변을 계속 조사해왔다. 최근 동정까지 체크했다면 진범으로 추정되는 인물에 관련된 정보를 받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 P268

덜 바빠 보이는 여직원에게 직업별 전화번호부를 갖다달라고 부탁했다. 스미다 나루미가 싫은 내색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들고 왔다.
"고마워."
"타운페이지라고 해요." 약점이라도 잡았다는 듯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한다. "직업별 전화번호부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고요." - P268

내 나이쯤 되면 타운페이지니 헬로페이지* 같은 말은 입이 찢어져도 못 한다. 아무리 광고 회사에서 일하는 몸이지만 일본어로서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라는 게 있다.

*일반인 전화번호부 - P269

입구로 들어가자 이름만 로비인 좁은 공용 통로가 있었다. (중략). 엘리베이터 버튼 옆에 입주한 회사들이 적힌 표지판이있었고, 그 안에 부동산 회사, 수입 대행사 등과 함께 ‘쇼와 종합리서치‘가 있었다. - P270

5층 복도 전부가 ‘쇼와 종합 리서치의 사무실이었다. 나는 얼른 통로 구석으로 몸을 감췄다. 숨을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조사원이 내려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 P271

흠칫하고 재킷에서 손을 뗐다. 이 여자는 내가 미우라를 구타하는 모습을 봤다. 마음이 켕겼다.
여자가 어깻숨을 쉬며 일어났다. 얼굴이 상기돼 있다.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털어낸다. - P272

"어쩔 수 없군. 가까운 데서 밥이나 먹으며 들어보지." - P272

"일단은 조사원이라고 할까요. 아르바이트하고 있어요. 본업은 대학생." 거리낌없는 말투로 자백한다. 이제 와서 시치미떼봐야 소용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학생증 꺼내봐."
"되게 의심 많네요. 하긴 그럴 만도 한가."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 내민다. S대학 학생증이었다. - P273

내 말이 틀렸는지 입이 부루퉁하게 나온다.
"비디오에서 벗는 애들보다는 나을걸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차별이지." 나는 말했다. "최소한 그사람들은 자기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에서 행동하는 거니까. 그리고 그건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아. - P273

"그나저나 왜 이런 일을 하지? 보수가 좋은가?"
"그렇기도 하지만." 자기 말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태도가 한결 누그러졌다. "지금 사회학 연구실에 있으면서 도시론을 전공하고 있어요. 내년에 논문을 쓰기 위한 필드워크라고 하면 너무 멋을 부린 걸까요?" - P274

"그건 표면적인 구실이겠지. 월요일에 내가 미우라의 집에 갔을 때 당신은 마치 정신이 이상한 여자인 척했잖아. 내 정체를알고 관심 끌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런 서툰 연극을 한 거지.
그게 당신이 미우라를 조사하고 있었다는 증거야." - P275

"그건 표면적인 구실이겠지. 월요일에 내가 미우라의 집에 갔을 때 당신은 마치 정신이 이상한 여자인 척했잖아. 내 정체를알고 관심 끌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런 서툰 연극을 한 거지.
그게 당신이 미우라를 조사하고 있었다는 증거야."
제대로 찌른 모양이었다. 여자는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살짝저었다. - P275

"어떻게 내가 당신이 아르바이트하는 곳까지 오게 됐는지 궁금하겠지? 가르쳐주지. 간단해. 장인이 가지고 있던 신상 보고서에 인쇄된 회사 이름을 훔쳐봤어. 전화번호부에서 주소를 알아냈고." - P275

"끈질기게 벨을 눌러댔잖아. 외시경으로 당신 얼굴을 봤어."
여자는 깜짝 놀라서 포크를 테이블에 떨어뜨렸다.
"설마, 아저씨가 그 사람?"
"안타깝지만 난 아냐 미우라를 죽인 범인은 따로 있어. 그 사실을 증명하느라 경찰서에 한밤중까지 붙들려 있었지만." - P276

"아냐. 내가 알고 싶은 건 당신이 장인에게 어떤 내용을 보고했느냐는 거야."
"말했잖아요, 조사 내용은 누설할 수 없다고."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하잖아." - P277

"고집이 아니라 이건 비밀 엄수 의무라고 하는 거예요." 말끝이 거칠어졌다.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비밀 엄수 의무고 뭐고 간에 미우라 야스시는 이미 죽었어.‘
"아니에요. 비밀 엄수 의무는 의뢰인을 위한 거예요."
"의뢰인들이 하나같이 추접한 위선자들이라고 아까 당신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 P277

그 순간 주머니에서 무선호출기가 울렸다. 회사였다. 잠시 후퇴해야 할 타이밍인가.
"잠깐 실례하지."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가게 전화를 빌려 SP국으로 걸었다.
"국장님이세요?" 스미다 나루미가 받았다. "지금 전무님께 연결할게요." - P278

"가즈미에게 연락이 왔어. 다카시가 유괴됐다고."
"설마요."
"농담이 아니네. 자세한 이야기는 못 들었지만 죽은 아이의 어머니가 학교에서 다카시를 데려간 모양이야. 아직 둘 다 행방불명이라는군." - P279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학교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후회해봐야 이미 늦었다. 미치코는 다카시를 죽일 생각인지도 모른다.
만 엔짜리 지폐를 계산대에 던지고 거스름돈도 받지 않은 채밖으로 뛰쳐나갔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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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숙한 낚시꾼이라면 낚싯대와 줄을 통해 전해지는 손가락의 떨림만으로도 입질을 느끼게 마련이다. 한스는 기술적으로 낚싯줄을 확 잡아 올린후 조심조심 줄을 감기 시작했다. 단단히 버티던 물고기가 모습을 드러내자 한스는 그것이 로치(잉엇과의 담수어 옮긴이)라는 것을 알았다.  - P45

망둥이를 아주 좋아하는 아버지를 생각하니 한스는 기뻤다. 망둥이는 통통한 몸통에 작은 비늘이 덮여 있고, 두툼한 머리에 우스꽝스러운 흰 수염과 작은 눈이달렸으며, 꼬리가 가늘고 길었다. 원래는 초록색과 갈색 사이의 색을 띠었지만 뭍에 나오면 강철 같은 검푸른 빛으로 변했다. - P45

 빛이 구름에 가득 스며 있으니 눈이 부셔서 오래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구름이 없으면 사람들은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가늠하지 못한다. 푸른 하늘이나 반짝이는 강물이 아니라 몇 조각의 거품같이 하얀, 둥글게 뭉쳐진 범선 같은 정오의 구름 조각을 보면, 사람들은 갑자기 이글거리는 태양을 느끼고 그늘을 찾아가 이마의 땀을 훔쳐내는것이다. - P46

한스는 버들가지에 낚싯줄을 걸쳐 물에 담가두고는 바닥에 앉아 초록빛 강물을 바라보았다. 물고기들이 천천히 올라와 수면 위로 검은 등을 하나둘 내밀기 시작했다. 따뜻함에 이끌려 마법에 걸린 듯 고요히 천천히 움직이는 물고기 무리였다. - P46

얼마나 아름다운가! 흰색, 갈색, 초록색,
은색, 옅은 금색 외에도 여러 빛깔이 움직일 때마다 비늘과 지느러미가 반짝였다.
사방이 고요했다. 다리 위를 지나는 마차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덜컥거리는 물레방아 소리도 이곳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었다.  - P47

이 순간은 정말 근사했다. 이따금 자신이 선발 고사에 합격한 사실, 이 등으로 합격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럴 때면 맨발로 물을 찰박대며 양손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휘파람으로 노래를 불렀다. 사실 한스는 휘파람을 불줄 몰랐다. 그것은 오랜 고민거리로 학교 친구들에게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 - P47

아이들은 한때 한스를 몹시 괴롭혔다. 한스에게는 아우구스트 말고 친구가 없었을뿐더러 아이들의 주먹다짐이나 놀이에 전혀 어울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녀석들은 한스의 뒷모습이나 쳐다봐야 할 것이다.
어리석은 녀석들! 한스는 그 아이들이 너무 혐오스러운 나머지 일순간 입을 일그러뜨렸다. - P48

 4시가 넘자 동급생 친구들 대부분이 소란을 피우며학교에서 재빨리 뛰쳐나왔다.
"야, 기벤트! 너 지금 기분 최고지?"
한스는 편안하게 기지개를 켰다.
"응, 꽤 좋아."
"신학교는 언제 들어가냐?"
"9월이나 되어야 들어가 지금은 방학이고."
한스는 자신을 향한 친구들의 부러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 P49

뒤에서 놀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고 누군가 이런 시도 읊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나도 저럴 수 있다면 좋겠네,
슐체 리자베트처럼!
재는 낮에도 침대에 누워 있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다네.

한스는 그저 웃었다. 그사이 또래 녀석들도 옷을 벗었다. - P50

 아이들은서로 물장난을 치고 뛰어다니고 헤엄쳤으며 물에 누워 있는 친구들에게 물을 뿌리기도 했다. 첨벙거리는 소리와 외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온 강변이 하얗고 축축하고 매끈한 몸들로 가득했다. 한스는 한 시간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고기들의 입질이 다시 시작되는 따뜻한 저녁 시간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 P50

"중등 신학교 입학 선발 고사에 우리 마을은 이번에 단 한 명의 후보 한스 기벤라트를 내보냈다. 기쁘게도 방금 우리는 기벤라트가 이 등으로 합격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한스는 말없이 신문을 접어 주머니에 찔러 넣었지만 내심 펄쩍 뛸 정도로 자랑스러웠다. 만세라도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 P51

강이 굽이쳐 흐르고 좁고 깊숙이 깎여 들어간 계곡에는 일찌감치 어둠이 깃들었다. 다리 아래 강물은 시커멓고 잔잔했으며 아래쪽 물레방아에는 벌써 등불이 켜졌다. - P51

 치즈조각이 다 떨어질 때까지 한스는 작은 잉어 네 마리를 낚아 올렸다. 이 녀석들은 내일 마을 목사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 더운 바람이 계곡 아래쪽으로 불어왔다. 날이 어두워졌지만 하늘에는 아직 빛이 남아 있었다.  - P52

이른 아침부터 한스는 잉어를 챙겨 들고 목사관 문을 두드렸다. 목사가 서재에서 나왔다.
"오, 한스 기벤트! 좋은 아침이구나! 축하한다. 진심으로축하해. 얘야, 그런데 뭘 들고 있는 거냐?"
"물고기를 좀 가져왔어요. 어제 잡은 거예요."
"와, 이것 좀 보게! 고맙구나. 어서 들어오렴."
한스는 익숙한 서재로 들어갔다. 사실 이곳은 목사관 서재처럼 보이지 않았다. 화초 냄새도 담배 냄새도 나지 않았다.  - P52

 일반적인 목사의 서재에서 볼수 있는 가치 있는 소장본들, 이를테면 벵겔, 외팅거, 슈타인호퍼(모두 18세기 독일의 경건주의를 이끈 신학자들이다-옮긴이)는물론, 〈탑의 수탉〉에서 뫼리케(독일 시인이자 목사 에두아르트 뫼리케의 <탑의 수탉>은 교회 탑 위에 있었던 수탉 모양의 풍향계를 노래한 시다-옮긴이)가 아름답게 찬양한 신앙심 깊은 시인들은여기에 없었고, 혹은 많은 현대적 작품들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각종 간행물을 모아둔 서류철, 서서 일하는 작업대와 종이가 널려 있는 커다란 책상이 전체적으로 박식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 P53

예나 지금이나 학자들이 새로운 가죽 부대 때문에 낡은 포도주를 등한시하는 반면, 예술가들은 겉보기에 잘못돼 보이는 많은 것을 태연하게 고수하며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안겨주었다. 이것은 비평과 창작, 학문과 예술 사이에 항상 존재해온 불평등한 싸움이었다. - P54

한스는 처음으로 작업대와 창문 사이에 있는 작은 가죽소파에 앉았다. 목사는 지나칠 정도로 친절했다. 그는 매우 친근하게 신학교에 대해, 그곳의 생활과 공부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네가 그곳에서 경험하게 될 가장 새롭고 중요한 일은 바로 신약성서의 그리스어를 배우는 거란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라서 배우는 것도 많고 얻는 기쁨도 크단다. 처음에는 언어를 배우는 데 고생할 수도 있어. 아테네식 그리스어가 아니라 전혀 다르고 완전히 새로운 정신이 만들어낸 언어 세계거든." - P54

한스는 즐거운 마음으로 목사관을 나와 숲 쪽으로 이어진 낙엽송 길을 따라 걸었다. 약간의 불안감은 이미 사라졌고, 생각하면 할수록 목사와 함께 공부하기로 한 것이 잘한 일처럼 여겨졌다. 신학교에 들어가 학우들보다 앞서려면 더 치열하고 집요하게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 P55

여전히 방학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혼자밖에없는 이 아침 시간, 숲 속 산책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문비나무들이 줄지어 서서 기둥을 이루고 초록빛 아치형으로 천장을 덮은 푸르른 회랑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 P56

 사실 한스는 뤼첼러 씨 농장이나 크로쿠스 초원까지 이어진 긴 산책길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끼 위에 누워 월귤을 따 먹으면서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피곤한지 알 수 없었다. 전에는 서너 시간 산책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 P57

가는 길에 한스는 구둣방 주인 플라이크를 보았다. 그는 작업실 창문 앞에 다리가 세 개 달린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얘야, 어딜 가니? 요즘은 도통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구나!"
플라이크가 소리쳤다.
"목사님께 가는 길이에요."
"아직도? 시험은 끝났잖니."
"네, 이번엔 다른 일이 있어서요. 신약성경을 배우려고요. 사실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쓰였지만 제가 그동안 배운 것과는 완전히 다른 그리스어라서요. 지금 그걸 배우러 가는 거예요." - P57

플라이크가 나지막이 말했다. "여태까진 시험 때문에 잠자코 있었지만 이제는 정말 말해주어야 할 것 같구나. 네가 꼭 알아야 하는 게 있는데 목사님은 무신론자란다. 목사님은 너에게 성경이 잘못되었고 거짓이라고 말하며 널 속일지 몰라. 목사님과 함께 신약성경을 읽는다면 결국 너도 모르게 믿음을 잃어버리고 말거야." - P58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해요? 전 이미 목사님과 공부하기로 약속했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물론 가야지. 다만 목사님이 성경에 대해 사람이 만들어낸 거라고 하거나, 거짓이라거나, 성령에서 온 게 아니라거나, 그런 말을 한다면 나를 찾아오렴. 자세히 알려줄게. 그렇게 하겠니?" - P58

마을 목사가 아직 집에 오지 않아서 한스는 서재에서 기다려야 했다. 금박을 입힌 책 제목들을 보고 있자니 구둣방 주인의말이 생각났다. 이전에도 그런 식으로 마을 목사와 새로운 교리를 좇는 신학자들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제 자기 자신이 이런 이야기에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처음으로 긴장감과 호기심이 느껴졌다. - P59

힘든 시절을 통해 습득한 구둣방 주인의 완강함과 엄격함을 한스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플라이크는 똑똑한 사람이지만 단순하고 편협한 면이 있었고 지나친 경건주의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조롱당했다. 그는 교회형제들 모임에서 다른 형제들의 엄격한 재판장 노릇을 했고,
권위 있는 성경 해설가 역할도 했으며, 마을을 돌면서 사람들을 전도하기도 했다. - P59

. 그는 한스에게 누가복음의 그리스어 본문을 쥐여주고 읽어보게 했다. 이전의 라틴어 수업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목사와 한스는 몇 문장을 읽고 단어마다 꼼꼼하게 번역을 했다. - P60

한스는 사전과 문법책을 빌려 와 저녁 시간 동안 한참을 더 공부했다. 새삼 얼마나 많은 연구와 지식의 산을 넘어야 진정한 학문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지 깨달았다. - P60

며칠 동안 한스는 이 새로운 공부의 재미에 푹 빠져 지냈다.
저녁이면 으레 목사관을 찾아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정한 학문이란 더 아름답고 더 어려우며, 그만큼 배울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다.  - P60

이제 그는 읽는데 15분 이상 걸렸던 크세노폰의 가장 어려운 문장도 놀이하듯 읽어낼 수 있었다. 사전도거의 필요 없었다. 더 깊어진 이해력으로 어려운 문단 전체를빠르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한껏 고조된 학업 열정과 지식에 대한 목마름이 드높은 자신감과 만나서 이미 자신은 지식과 가능성의 고지를 바라보는 자기만의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61

그런 한편, 자신이 또래들보다 얼마나 앞서 있는지, 담임교사와 교장이 얼마나 자신을 존중하고 심지어 경탄하는 눈으로 바라보는지 생각하면 거만함이 솟구치기도 했다. - P61

교사가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와 의무는 어린 소년들의 야만적인 힘과 타고난 욕심을 제어해 뿌리부터뽑아내고, 그 대신에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점잖고 절제된이상을 심어주는 일이다. 만일 학교의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보라!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는 시민 혹은 부지런한 관리가 아니라 무분별한 소란을 일으키는 개혁가나 생산성 없이 꿈만 꾸는 몽상가가 되었을 것이다. - P62

마치 낯선 산맥에서 터져 나온 물줄기와 같고, 길도 이정표도 없는 원시림과같다. 그런 원시림을 정비하기 위해서는 가지를 쳐내고 풀을 베며 강제로 생장을 조절해주어야 하듯이 학교 또한 자연적인 인간을 깨부수고 규제하고 제압해야 한다. - P62

기벤라트의 아들이 얼마나 멋지게 성장했는지 보라! 한스는 마음대로 뛰어다니거나 노는 일을 일찌감치 멈추었고, 수업 시간에 멍청하게 잡담하는 법도 전혀 없었다. 토끼 키우기 같은 소꿉장난이나 골치 아픈 낚시 취미도 그만두었다. - P63

"벌써 찾아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찾아뵐 때 좋은 물고기를잡아다 드리고 싶었거든요."
한스가 사과의 말을 했다.
"물고기? 무슨 물고기 말이냐?"
"그러니까 잉어나 뭐 그런 거요."
"아하, 요즘 다시 낚시하러 다니니?"
"네, 많이 하진 않지만요. 아버지께서 허락해주셨어요."
"그렇구나. 그래, 재미있니?"
"네, 그럼요." - P63

"잘 들어라, 한스" 교장이 말했다. "내 말은 말이다, 내 오랜경험으로 보건대 뛰어난 시험 성적을 거두고 나서 갑자기 실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이 많다는 거야. 신학교에 들어가면 새로운과목을 많이 공부해야 하는데, 방학 동안 예습해서 가는 학생들이 꼭 있는 법이지. 시험 성적이 별로인 애들이 특히 더 그렇단다. 그런 애들은 성적이 좋다고 방학을 헛되이 보낸 친구들을 제치고 어느새 정상의 자리를 차지해버리지." - P64

"그래서 말이다. 네가 방학 동안 약간이라도 예습을 했으면 좋겠구나. 물론 지나치지 않게 말이다. 너는 지금 충분히 쉬어야 하고 그럴 권리가 있거든. 내 생각에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면 적당할 것 같다. 계속 놀다 보면 감을 잃게 되고 나중에 제자리로 돌아가는 데도 몇 주가 걸릴지도 모르거든. 네 생각은 어떠니?" - P64

당연히 이런 새로운 세계도 만나볼 준비가 되어 있었던 한스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험난한 여정이 하나더 남아 있었다. 교장은 헛기침을 하고 친절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네가 수학에도 몇 시간을 할애했으면 좋겠구나. 네가 수학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썩 잘하는 과목도 아니잖니. 신학교에 가면 대수와 기하를 배울 텐데 어느정도 예습을 해두는 게 좋을 거야." - P65

대수는 한스가 아무리 열심을 내봐도 흥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가장 뜨거운 오후 시간에 수영 대신 수학 교사의 후덥지근한 방까지 걸어가야 했다. 모기가 날아다니는 탁한 공기를마시며 무거운 머리와 메마른 목소리로 a 더하기 b, a 빼기 b따위를 읽어야 하는 것도 곤욕이었다. 그러다 보면 공기 중의무언가가 한스를 무기력하게 짓눌렀고, 때로는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을 만큼 안 좋은 날도 있었다.  - P66

교장과 함께하는 공부는 그보다 좀 더 활기가 넘쳤다. 물론 마을 목사는 신약성경의 낡아빠진 그리스어에서도 호메로스의 젊고 생생한언어에서 느낄 수 없는 훨씬 매력적이고 웅장한 감동을 발견해내는 능력이 있었다. - P66

방학 마지막 주가 되자 갑자기 교장과 마을 목사가 유난히 부드럽고 상냥해졌다. 그들은 산책하라고 소년을 내보내며 수업을 접었다. 상쾌하고 활기찬 기분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면서 말이다. - P67

 한스는 자신이 왜 한때 그렇게 여름방학을 고대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는 오히려 방학이 끝나는 게 기뻤다. 신학교에서 완전히새로운 배움과 삶을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낚시에는 별의미를 못 느껴서 물고기도 거의 남지 못했다. - P67

한스는 겸연쩍게 구둣방 주인의 거칠고 넓적한 오른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래, 잘되어 가니?" 플라이크가 물었다. "목사님께는 열심히 배웠니?"
"네, 매일 찾아가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뭘 배웠는데?"
"주로 그리스어를 배웠고 이런저런 걸 배웠어요."
"그래서 나에게는 한 번도 오고 싶지 않았니?"
"오고 싶었어요, 플라이크 아저씨. 하지만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매일 한 시간은 목사님께, 두 시간은 교장 선생님께, 일주일에 네 번은 수학 선생님께 가야 했거든요." - P68

"이건 정말 미친 짓이다, 한스. 게다가 죄악이야. 네 나이엔 바깥바람을 충분히 쐬고 움직이며 제대로 쉬어줘야 해. 대체방학이 왜 있단 말이니? 분명히 방구석에 처박혀서 공부나 하라고 있는 건 아니잖니. 넌 지금 뼈랑 가죽밖에 없구나!" - P68

"성경에 대해 모욕적인 말을 하진 않았니?"
"아니요. 전혀요."
"다행이구나. 분명히 말해두지만 영혼이 해를 입는 것보다몸이 열 번 망가지는 게 차라리 낫단다. 네가 되려고 하는 목사라는 직업은 멋지지만 힘든 일이야. 그런 일을 하려면 네 또래젊은이들과는 달라야 해. 아마 한스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언젠가 영혼을 돕고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지. 난 진심으로 그렇게되길 바라며 널 위해 기도할 거다." - P69

플라이크의 엄숙한 기도와 고상한 말투를 듣자 소년은 왠지당혹스럽고 겸연쩍었다. 목사도 작별 인사를 하면서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떠날 준비를 하고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니 며칠이순식간에 지나갔다. 침구와 겉옷, 속옷과 책들은 이미 한 상자보내두었고 이제 여행 가방을 쌌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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