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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성에 근거한 관용 옹호론의 문제점은 그것의 호소력과 한 쌍이다. 그것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견해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견해들을 합리적으로 다룰 수 없다면, 동성애자들에게 우호적인법원 판결이라고 해도 동성애자들에 대한 약간의 관용을 얻어내는 데 그치고말 것이다. 동성애자들의 삶을 찬양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올바로 이해하고 충분히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자율권에 의거해서만 이루어지는 법적·정치적 담론은 그러한 이해를 함양시키기 어려워 보인다. - P162

. 결혼 제도와가족 제도조차도 갈수록 자발주의적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그러한 제도들이 가능하게 만드는 인간의 선보다는 그것들이 표현하는 자율적 선택 때문에 그러한 제도들이 높은 평가를 받는 쪽으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중립성의 이상과 그것이 수반하는 자아상은 헌법률에만국한되어 있지 않다. 가족법에서 일어난 최근의 변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들은 미국의 도덕문화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다 일반적 변화들도 반영한다. - P162

언론의 자유에 대한 중립성

정부가 좋음에 관한 경쟁적 견해들에 대해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은미국의 헌법률에서 종교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중립성 원칙은 표현의자유에도 적용된다. 정부가 특정 종교의 믿음을 기타 종교들의 믿음보다 우선시하지 않듯이, 정부는 시민들이 지지하는 다양한 견해들을 다룰 때도 중립을 지켜야 한다. 설사 정부가 공공장소에서 표현의 시간, 장소, 방식에 관해 "내용 중립적인" 제한을 한다고 해도, 그러한 규제는 "표현되는 관점에 대한 공감이나 반감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⁷⁵ - P111

75 Young v. American Mini Theatres, Inc., 427 U.S. 50, 67(1976). - P480

종교와 마찬가지로 표현의 경우에도 중립성의 요구는 지난 수십 년간의발전의 결과이다. 최근에는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헌법적 논쟁이 많지만(대표적인 헌법률 판례집의 경우 전체의 1/4 이상이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것이다⁷⁸), 제1차 세계대전⁷⁹ 때까지만 해도 연방대법원은 표현의 자유를 다룬 적이 거의없었다. - P111

78 Gerald Gunther, Constitutional Law, 11th ed.(Mineola, N.Y.: Foundation Press,
1985)의 전체 1633쪽 가운데 491쪽이 표현의 자유에 관한 것이다.
79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사건들에 대한 논의는 David M.
Rabban, "The First Amendment in Its Forgotten Years", Yale Law Journal,
90(1981), 514-596을 보라. - P480

연방대법원이 표현의 자유에 진지하게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이로부터100년 이상 뒤였다. 1917년에 방첩법Espionage and Sedition Acts이 통과됨으로써 미국의 정치 논쟁에서 시민적 자유가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⁸² - P112

82 Paul L. Murphy, World War I and the Origin of Civil Liberties in the UnitedStates (New York: W. W. Norton, 1979), pp. 30-31 - P480

다시 말해 "높은 가치의 표현과 "낮은가치의 표현을 구분했다. 이러한 "표현의 자유에 관한 이중기준론two-level
"theory of free speech"⁸⁶ 을 가장 뚜렷이 보여준 것은 채플린스키 대 뉴햄프셔 주Chaplinsky v. New Hampshire 사건(1942)이었다. - P113

86 017 Harry Kalven, "Metaphysics of the Law of Obscenity", Supreme Court Review, 1960, p.1

이중기준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 이론 덕분에 연방대법원이 무차별적인 접근법보다 품위 있는 표현을 더 잘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⁹¹
반면에 비판자들은 표현의 범주를 구분하는 것이 연방대법원으로 하여금
"표현 내용과 관련이 있는 가치 판단들, 즉 수정헌법 1조의 기본 이론에 따라연방대법원에게 금지된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반박한다.⁹² - P113

92 Thomas Emerson, The System of Freedom of Expression(New York: Random House,
1970), p. 326.
93 New York Times Co. v. Sullivan, 376 U.S. 254(1964). - P481

연방대법원은 스탠리 대 조지아 주stanley v. Georgia 사건(1969)에서도 음란물의 사적 소유를 보호하면서 "그것들을 제공받을 권리는 정보와 사상의 사회적 가치와 상관없이 자유사회에 기본적인 것이다"⁹⁴라고 주장했다. - P114

94 Stanley v. Georgia, 394 U.S. 557, 564(1969). - P481

내용 중립성의 원칙은 일찍이 에이브럼스 사건에서 홈스가 작성한 반대97의견서에서 그 싹을 찾아볼 수 있지만,⁹⁷ 이 원칙이 처음으로 분명하게 표현된 것은 시카고 시경 대 모슬리 Police Department of the City of Chicago v. Mosley 사건(1972)에서였다. 시카고 시는 노동쟁의와 관련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학교 앞 피켓 시위를 금지했는데, 연방대법원은 그 조례가 표현 내용에 근거해 차별을 하고 있다고 판결했다. - P114

뉴욕 주 공공사업위원회 New York Public Service Commission가 광고 봉투 안에 컨솔리데이티드 에디슨 사Consolidated Edison Company가 핵발전을 옹호하는 성명서를 집어넣는 것을 금지하자 연방대법원은 그러한 제한은 그 공익사업체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결했다. "주제에 따라 표현을 규제하는정부의 조치는 ‘시간, 장소‘ 상황의 중립성으로부터 내용에 대한 관심 쪽으로 일탈하는 것이다." 공공사업위원회는 소비자에게 정보를 주는 삽입물은허용했지만 정치적 의견을 전달하는 삽입물은 금지했다. 연방대법원에 따르면, 이러한 구별은 내용 중립성의 기준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제한은 "표현의 내용이나 주제에 기초해서는 안 되기"¹⁰¹ 때문이다. - P115

101 Consolidated Edison Company of New York v. Public Service Commission of NewYork, 447 U.S. 530, 536-537(1980). - P481

음란물 규제법 판결로 본 표현의 중립성

정부가 좋음에 관한 견해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가정은 정부가 제한하고자 하는 표현을 연방대법원이 보호하는 사건들에서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의 위력은 연방대법원이 표현에 대한 제한을 지지한 사건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음란물 사건이다.
그동안 연방대법원은 수정헌법 1조에 따라 마지못해 음란물을 보호해왔지만, 최근의 음란물 사건들에서 연방대법원이 전개한 논증는 중립성 가정들이 헌법률에 미치고 있는 강력한 영향을 보여준다. - P116

음란물에 대한 제한들이 도덕적 이유로 정당화되는 한, 그러한 제한들은법이 좋음에 관한 특정한 견해를 표명해서는 안 된다는 자유주의의 원리를훼손한다. 자유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도덕과 부도덕에 대한 판단을 법률의토대로 삼는 것은 부당하다. 그것은 정부가 목적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 P117

 연방대법원은 로스 사건에서는 전통적인 도덕적 이유에 기초해 판결을 내렸다. 즉 음란물은 "그 흠결을 벌충할 만한 사회적 중요성이 전혀 없고, 따라서 완전히 헌법이 보호하는 범위 밖에 있다는것이다.¹⁰⁶ - P117

106 Roth, 354 U.S. at 476. - P482

연방대법원은 파리성인극장  대슬레이튼 Paris Adult Theatre IV. Slaton 사건(1973)*에서, 하드코어 포르노 영화의 상업적 상영을 금지하는 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연방대법원의 의견에는 전통적으로 그러한 제한들의 기초가 되는 도덕적 이유들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반영되어 있었다. 버거연방대법원장은 다수 의견서에서 "상업적 음란물의 범람 방지에 걸려 있는정당한 국익에는 "삶의 질, 전체 공동체의 환경, 대도시 도심의 상업적 분위기 그리고 어쩌면 치안도" 포함된다¹⁰⁷고 주장했다. 그는 음란물과 범죄 간에연관이 있든 없든 간에, "일반적으로 읽고 보고 듣고 행하는 것들은 원하든원치 않든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¹⁰⁸고 덧붙였다.

*지방검사 슬레이튼을 비롯한 조지아 주의 관리들은 파리성인극장과 파리성인극장에서 각기 상영되고 있는 두 편의 음란 영화의 상영 금지를 요청하는 시민 소원을 제기했다. 그런데 두 극장은 각기 상영하는 영화가 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최소 21세 이상 성인만 관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게시해놓고있었다. 1심 판사는 "공중에게 필요한 경고"와 "미성년자의 입장을 막는 합리적인 보호 조치"가 있는 경우에는 음란 영화라도 상영될 수 있다며 조지아 주의 소원을 기각했다. 하지만 조지아 주 법원은 그 영화들이 수정헌법 1조가 보호하는 표현의 자유의 범위 내에 있지 않은 "하드코어" 포르노그래피라는 이유로 1심 판결을 뒤집었다. 이에 피고인 파리성인극장은 이 사건을 연방대법원으로 가지고 갔다. - P118

107 Paris Adult Theatre I v. Slaton, 413 U.S. 49, 57-58(1973).
108 Ibid. at 59. Alexander Bickel, The Public Interest, 22-(Winter 1971), 25-260인용. - P482

버거의 주장은 음란물 규제에 대한 주들의 권리를 옹호하면서도 음란물자체에 대한 도덕적 반대는 인정하기 곤란한 듯한 논조를 띠고 있다. 하지만도덕적 판단을 피하려 한 결과, 버거의 논증은 일관성을 잃고 있다. 음란물거래가 "전체로서의 공동체에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주들의 권한을 허용한다는 것은 공통의 도덕적 기준에 위배되는 것이 공동체에 대한 해악에 포함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다. - P119

만일 도덕적타락이 공동체적 해악에 포함되지 않을 수 있다면, 범죄율과 치안만이 아니라 "사회 기풍까지 거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만일 공동체적 복지가 도덕적 차원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왜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판단이 공동체적복지를 보호할 수 있는 듯이 말하는가? 파리성인극장 사건에서 나타난 버거의 의견은 단지 애매모호함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애매모호함이 도덕적 판단에 대해 괄호 칠 것을 요구하는 압력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 P119

1986년에 연방대법원은 비슷한 이유를 들어 또 다른 구역 지정 조례를 지지했다. 렌퀴스트 연방대법관에 따르면, "성인극장의 설치를 제한하는 워싱턴 주 렌턴 시의 조례는 "성인 극장들‘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의 내용이 아니라 그 극장들이 주변 지역에 미치는 부수적 효과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부수적 효과에는 범죄 예방, 소매업 보호, 부동산 가치의 유지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이 도시 주민과 상업 지구의 질과 도시 생활의 질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 등이 포함되었다. - P120

이 사건들에서 볼 수 있듯이, "부차적 효과" 에 대한 "도덕적으로 중립적인판단만으로는 음란물과 포르노그래피를 제한하는 법률을 정당화하기 어렵다. 놀라운 것은 그런데도 연방대법원은 그 법률들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도덕적 고려들을 괄호 치고자 대단히 애썼다는 사실이다. - P121

중립을 지키려는 열망

정부가 좋은 삶이라는 문제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현대 정치사상에 특유한 것이다. 고대의 정치 이론은 정치의 목적이 시민들의 덕이나도덕적 탁월성을 함양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모든 결사체는 선을 추구하며 폴리스polis 혹은 정치적 결사체는 가장 포괄적인 최고의 선을 추구한다고 썼다. - P20

고대의 견해와 달리 자유주의적 정치 이론은 정치 생활을 최상의 목적이나 시민들의 도덕적 탁월성과 관련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정치이론은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견해를 고취시키는 것이 아니라 관용, 공정한절차, 가치 선택의 자유라는 개인권의 존중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어려운문제를 초래한다. 최고의 인간적 선을 바탕으로 자유주의적 이상들을 옹호하지 않는다면, 자유주의적 이상들의 도덕적 토대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 P21

관용과 자유와 공정성도 가치이다. 어떠한 가치도 옹호될 수 없다면 그러한 가치들도 옹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모든 가치가 단지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자유주의적 가치들을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상대주의에 근거해 자유주의를옹호하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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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정의의 집
"베스 하미쉬파스" (Beth Hamishpath, 정의의 집). 법정 정리가 큰목소리로 이렇게 외치면서 세 명의 판사가 도착했음을 알렸을 때 우리는 모두 벌떡 일어섰다. 판사들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검은 법복을 입은 채 옆문을 통해 법정으로 들어와 높게 만든 단 제일 앞줄에자리잡았다. - P49

(전략). 이 현상을 달리 설명하자면, 독일계 유대인에 대한 편견보다 더 오랫동안 존재한, 강력한 ‘비타민 P‘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P50

전반적인 재판의 분위기를 주도한 사람은 란다우 판사였다. 또 쇼맨십을 아주 좋아하는 검사의 영향 때문에 재판이 쇼처럼 되는 것을 막는데 란다우 판사가 최선을, 그의 모든 힘을 다했음은 처음부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 P51

이스라엘 수상인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이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납치하여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책‘¹에 대한 그의 역할을 재판하도록 예루살렘 지방법원으로 압송하기로결정했을 때 염두에 뒀던 쇼와 같은 재판을 위해서 이 법정은 분명히 그리 나쁜 장소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의 설계사‘라는 적절한 칭호로 불렸던 벤구리온은 이 소송 절차의 보이지 않는 무대 매니저로 남아 있다.

1) the final solution. 유대인을 집단 학살하여 유대인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 P51

. 정의는 신변 보호를 위해 유리부스 안에 앉아 있는,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의 아들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중요성에 집중한다. (중략). 심판대에 오른것은 그의 행위에 대한 것이지, 유대인의 고통이나 독일 민족 또는 인류, 심지어는 반유대주의나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다. - P52

그리고 벤구리온의 마음이 가는 대로 본다면 정의란 비록 ‘추상적 개념‘에 불과한지 모르겠지만, 결국 모든 권력을 장악한 수상보다 정의가더 엄격한 주인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우스너 씨가 곧 증명해 보이겠지만, 수상의 규칙은 엄격한 것이 아니었다. - P52

심지어 검사는 법정 건물 안에서
‘즉흥적인‘ 감정을 분출하기도 했다(그는 모든 질문에 거짓말로 일관하는 아이히만을 대질신문하는 데 신물이 났던 것이다). 법정에서 자주방청객을 힐끔거리거나, 일상적 허세보다도 더 심한 연극적인 행동을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그는 결국 백악관의 인정을 받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업무를 잘 수행했다"는 칭찬을 받았다.  - P53

 방청객들은 전세계를 대표하는 듯 생각되었는데, 실제로 처음 몇 주간은 방청객들이주로 세계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신문기자와 잡지 작가들이었다. 그들은 뉘른베르크 재판²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끈 광경을 지켜볼 수 있겠지만, 이번 경우는 "유대인의 비극 전체가 주요 관심사가될 것이다."

2)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전범 재판이다. - P53

왜냐하면 "거의 전적으로 유대인 문제에 관여한 사람, 자신의 역할이 유대인을 파멸시키는 것이었던 사람, 이 사악한 정권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이 유대인으로 제한되어있었던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겪은 (물론 미해결로 남아 있지 않은) 모든 것을 법정으로 가져와서 어떤 방식으로든 아이히만과 일어난 사건들을 연결시키기 위한증거를 찾으려는 것은 비논리적이지 않은가? - P54

뉘른베르크 재판 때 아이히만이 심판대에 있었더라면 유대인의 운명이 더 큰 주목을 받았을 거라고 하우스너 씨는 과연 정말 믿었을까? - P54

만일 이 재판의 방청객이 세계이고 이 연극이 유대인이 겪은 고통의거대한 파노라마라고 한다면, 실제는 기대와 목표에 미치지 못했다고할 수 있다. 저널리스트들은 두 주일 이상 진지한 태도로 남아 있지 못했고, 그 이후에는 방청객의 부류가 근본적으로 변했다. 이제 방청객은유대인으로 구성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젊어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중동 및 북아프리카계의 유대인처럼 여기에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던 이들이다.  - P55

방청객 중 젊은이들은 거의 없었고, 유대인과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이스라엘인도 없었다.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슴속 깊이 알고있으며, 그래서 어떤 교훈도 배울 자세도 갖춰져 있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의 결론을 이끌기 위해 이 재판이 필요하지도 않은, 나처럼 유럽에서 이주한 중년과 노년의 ‘생존자‘들이었다. - P56

따라서 이 재판은 결코 연극이 되지는 않았지만, 벤구리온이 처음에염두에 두었던 쇼, 즉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 이스라엘인과 아랍인, 간단히 말해 전 세계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교훈‘을 담은 쇼는이루어졌다. 바로 이 쇼에서 얻은 교훈은 교훈 받을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했다. 왜 이스라엘이 피고를 납치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재판 시작 전에 벤구리온이 작성한 많은 글에서 이 교훈들은 개괄되었다. - P57

 벤구리온이 속한 노동당³의 기관지인 「다바르」 (Davar)는 "유럽의 600만 유대인의 학살에 대해 나치독일만 책임 있는 것이 아님을 세계 여론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는 것이다"고 표현했다. 벤구리온 자신의 말로 하자면, "우리는 세계만방이 알기를 원하며, 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외지의유대인은 정신적 업적과 윤리적 노력과 메시아적 염원을 가지고 4000년을 내려온 유대교를 세계가 어떻게 항상 적대적으로 대해 왔는지, 어떻게 유대인이 변질되어 양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될 정도가 되었는지.
그리고 이스라엘인이 독립전쟁과 수에즈 운하 사건, 그리고 불안정한이스라엘 국경에서 거의 매일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해왔던 것처럼 어떻게 유대인 국가의 수립이 유대인으로 하여금 반격을 가능하게 할 수있었는지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3) 이스라엘어로 노동당은 마파이 (Mapai)이며 1930년에 창립된 이스라엘 노동자당으로서 1965년까지는 다비드 벤구리온이 주도했다. 1968년에 이 당은 다른 두 사회주의 정당과 제휴하여 이스라엘 노동당을 창설했는데, 초기에는 레비 에쉬콜이 주도하다가 나중에는 골다 메이르(Golda Meir)가 주도했다. - P58

어디에나 반유대주의적 요소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그들의 확신이 드레퓌스 사건 이래 시온주의 운동 진영의 가장 유력한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는 또한 달리 설명되지않는 초기 단계의 나치 정권에 대한 독일 유대인 공동체의 협상적 태도를 설명해 주는 원인이기도 했다. - P59

이스라엘 영웅주의와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송 지점에 정시에 도착하고, 제 발로 처형장까지 걸어가며, 자신의 무덤을 파고, 옷을 벗어 가지런히 쌓아놓고, 총살당하기 위해 나란히 눕게 한) 복종적순응성을 대비시키는 것은 좋은 지적처럼 보였다. 이것이 가치 있다고생각한 검사는 증인들마다 "왜 당신은 저항하지 않았습니까?" "왜 당신은 기차에 탔습니까?" "1만 5000명의 사람이 거기에 서 있었고 수백 명의 간수들만 당신과 마주하고 있는데 왜 당신은 폭동을 일으키거나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았습니까?"라고 질문하면서 이 점을 정교하게 다듬어 갔다. - P60

법정에서는 이 잔인하고도 어리석은 질문에 대한 어떤 대답도 얻을수 없었지만, 만일 1941년 암스테르담에 있던 자신이 살던 구 유대인거주 지역에서 독일 비밀경찰 파견대에 공격을 감행한 네덜란드 유대인의 운명에 대해 상상력을 동원하여 잠시 동안 생각해본다면, 사람들은 쉽게 해답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 P61

한 가지 점에서 이 재판에 대한 벤구리온의 기대가 전적으로 허물어지지는 않았다. 즉 이 재판은 다른 나치스와 전범자들을 색출하는 중요한 방편이 되었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그들 수백 명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아랍 국가들의 경우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전쟁 기간 중 나치스와 회교법 최고고문(the Grand Mufti)과의 관계는 비밀이 아니었다. 최고고문은 근동지역 나름의 ‘최종 해결책을 수행하도록 나치스가 도와줄 것이라 기대했다. - P62

그 결과는 놀라웠다. 아이히만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7개월 후에(재판이 시작되기 4개월 전) 루돌프 회스(Rudolf Höss)의 뒤를 이어아우슈비츠의 지휘관이 된 리하르트 베어(Richard Baer)를 마침내 체포할 수 있었다. 곧이어 이른바 아이히만 사단의 구성원들 대부분(오스트리아에서 화가로 살아가던 프란츠 노박, 서독에서 변호사로 자리잡은 오토 훈셰 박사, 약제사가 된 헤르만 크루마이, 루마니아의 전 ‘유대인 고문‘이었던 구스타프 리히터, 그리고 암스테르담에서 같은 지위에있었던 빌리 죄프)이 체포되었다. - P64

그들의 죄상을 밝히는 증거가 수년전에 책이나 잡지 기사로 발표되었지만, 이들 중 그 누구도 가명으로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종전 이후 처음으로 모든 독일 신문들이 대량학살범인 나치 전범들에 대한 기사들로 가득 찼다(아이히만이 체포된 때인 1960년 5월 이후 오직 한 건의 일급 살인죄만이 기소되었고,
다른 모든 범죄는 살인의 경우, 20년으로 정해진 기소기한이 지나 말소되었다).  - P64

새로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는 나치 정권에서 대단히 활약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독일 법정에서 이미 나치스의 혐의를 벗었다. 1946년 뉘른베르크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그중 한 사람으로 힘러의 수석 개인비서였던 나치 친위대 장성 카를 볼프는 바르샤바에서 동부의 학살 중심지인 트레블링카로 ‘지금까지 2주일 동안 매일 5000명의 선민들⁹을 운반해 왔다‘는 소식을 ‘각졀한 기쁨를 가지고‘ 반겼다고 한다. - P64

9) 유대인을 지칭한다. - P65

비록 아데나워 행정부가 입법부에서 140명 이상의 판사와 검사를 제거하고 더불어 단순히 일상적인 타협적 자세를 가졌던 많은 경찰 간부를 제거하도록, 또 서독 연방 대법원 검사장인 볼프강 임머바르 프렝켈을 그의 중간 이름과는 달리¹¹ 그의 나치스 전력에 관한 질문에 대해 솔직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면하도록 압력을 받기는 했지만, 이제는 사태가 달라질 희망이 거의 없다

11) 그의 중간 이름 Immerwahr는 ‘항상 진실한‘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 P66

 이 문제에 대한 바우어의 정서는 한 사람의 독일계 유대인의 정서에 불과했을 뿐, 독일의 여론은 여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의 신청은본에서 거부되었고,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지지를 전혀 받지도 못했다. 예루살렘에 보내진 서독 정부의 참관인이 표명한 범인 양도 포기의 또 다른 이유는 독일이 사형제도를 폐지했으며, 따라서 아이히만이 응당받아야 할 형량을 받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P67

물론 독일에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할 때 초래될 가장 큰 정치적 위험은, 얀센이 지적한것처럼 범죄 의도(mens rea)가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을 수있다는 점일 것이다).

* 『라이니셔 메르쿠어』 (Rheinischer Merkur), 1961. 8. 11. - P67

이 문제는 또 다른 보다 미묘한, 그러나 정치적으로 보다 적실한 측면이 있다. 전범들과 살인자들을 그들의 은신처로부터 색출하는 것과그들이 공적 영역에서 유능하고 활약을 많이 한다는 것(자신의 경력을히틀러 통치 하에서 꽃피운 수많은 사람들을 연방 및 주 행정부에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관공서에서 만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 P68

(전략), 이와 같은 고도로폭발적인 문제(나치 당원의 수준을 넘어 거의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할수 있는 공범성)를 건드리는 것은 조심스럽게 피했다(재판 전에는 아이히만이 ‘수백 명의 유능한 서독 정부 요인들을 자신의 공범자로 지목했다는 소문이 폭넓게 퍼졌는데,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 하우스너 씨는 연설 서두에서 ‘폭력배나 지하 요원이 아닌 아이히만의 ‘범죄공모자‘에 대해 언급했고, ‘유대인을 멸종시키려고 결심한 위원회에 속한 그들, 즉 의사와 변호사, 학자, 은행가, 경제학자 등을 우리가 만나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 P68

왜냐하면 무엇을 하도록 ‘결심한 위원회‘란 존재하지도 않았고, ‘학위를 가진 고위 법관들이 결코 유대인의 멸절을 결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단지 히틀러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단계들을 계획하기 위해 모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단 한 경우가 법정의 주목을 끌었다.  - P69

왜냐하면 이 기소사건과 관련된 한 재판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역사였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재판의 심판대에 서 있는 것은 한 개인이 아니고 나치 정부도 아니며 바로 역사 전체에 나타나는 반유대주의이다."
이것은 벤구리온이 설정한 기조였고, 이를 하우스너 씨는 충실하게 따랐다. - P69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그리고 내[여호와]가 너희들을 지나면서, 너희들이 너희 자신의 피로 더럽혀진 것을 보았을때, 내가 너희에게 너희 피 가운데에서 살아나라라고 말했다‘는 『에스겔서』¹³의 구절을 인용했는데, 이 말은 ‘이 민족이 역사상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줄곧 직면해 왔던 명령‘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그것은 나쁜 역사와 값싼 수사법에 의한 것이었다. 더욱 나쁜 점은 그것이 아이히만을 재판에 회부한 것과 분명히 상치된다는 것이다. - P70

벤구리온의 의도와 원고 측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심판대 위에는 한 개인, 살과 피를 가진 한 인간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만일 벤구리온이 "아이히만에 대해 어떤 판결이 내려질 것인가에 대해 염려하지않았다면", 그것은 판결을 내려야 하는 예루살렘 법정이 홀로 감당해야할 책무일 것이다. - P71

제8장

법을 준수하는 시민의 의무


이처럼 아이히만이 본디오 빌라도처럼 느낄 수 있었던 기회는 많았지만, 달이 가고 해가 가면서 그는 무엇이든 느낄 필요를 상실하게 되었다. 일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고, 이것이 총통의 명령에 기초한 이땅의 새로운 법이었다. 그가 행한 모든 일은 그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인식한 만큼 행동한 것이었다. 그는 경찰과 법정에서 계속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의무를 준수했다. - P209

본질에 있어서나 의도에 있어서 병사들이 명백히 범죄적인 명령을 수행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이상으로 이 문제 전체와 연관된 것이있는가에 대한 아이히만의 애매한 생각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경찰심문이 진행될 때였다. 이때 그는 갑자기 자기가 전 생애에 걸쳐 칸트의 도덕 교훈, 특히 칸트의 의무에 대한 정의에 따라 살아왔다는 것을아주 강조하며 선언하듯 말했다.  - P210

그가 법정에서 지적하지 못한 것은 이제 그 자신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처럼이 같은 ‘국가에 의해 합법화된 범죄의 시대‘에는 칸트의 정식이 더 이상 적용 가능하지 않으므로 기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왜곡하여 읽었던 것이다.  - P210

 칸트의 철학에서 그 원천은 실천이성이었다. 아이히만이 말하는칸트의 가정적 사용에서 그 원천은 총통의 의지였다. 최종 해결책의 수행에서 보인 끔찍이 공들인 철저함(보통 관찰자들에게 전형적으로 독일적이라고, 또는 완벽한 관료의 전형이라고 보인 철저함)의 대부분은사실상 독일에서는 아주 일반화된 이상한 관념, 즉 법을 준수한다는 것은 단순히 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자기가 따르는 법의 제정자인 것처럼행위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상한 관념으로 그 근원이 추적될 수 있다.
그래서 의무의 부름을 넘어서 나아가는 것이라야 충분하다는 신념이 나온 것이다. - P211

 이러한 불일치는 여전히 그를 다소불편하게 만들어 공개 심문 때 여기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는 공공연히 변명조가 되어 자신의 상관에게 "자기의 죄를 고백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살인적 의무의 수행에 대한 이러한 비타협적인 태도가 판사의 눈에는 그 무엇보다도 더 그의 죄를 확정짓는 것으로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아이히만의 눈에는 이것이 분명히 그를 정당화시키는 것이며,
이는 그가 남겨놓은 양심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을 한때 침묵시켰던 것이기도 했다. - P212

아이히만에게 다가온 마지막 양심의 위기는 1944년 3월에 있었던 형가리로 가는 임무와 함께 시작 되었는데, 이때는 붉은군대가 카파치아산맥을 지나 헝가리 국경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헝가리는 1941년에히틀러 편에 서서 전쟁에 참전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웃하고있는 나라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얼마간의 영토를 더 얻으려는 속셈 때문이었다. - P213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듯이, 헝가리로 새로 들어온 이 30만 명의 유대인의 안전은 망명을 제공하려는 헝가리의 열성 덕분이 아니라 이 한정된 수의 사람들을 위해 별도 행동을 취하는 것을 독일이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1942년 독일 외무성의 압력으로 헝가리는 모든 유대인 망명자들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독일 우방국의 진실성에 대한 시금석이 전쟁의 승리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가에 달려 있지 않고 ‘유대인 문제의 해결‘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을 독일 외무성은 항상 명확히 했다. - P214

이 나라를 점령하기 전 한 유명한 인터뷰에서 그는 호르티에게 ‘헝가리는 아직도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필요한 조치들을 도입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고, 그에게 "유대인을 학살하지 못하도록" 임무를 부여했다. - P215

헝가리의 헌병대 본부는 필요한 모든 일을 하는 데 아주 열정적이었고, 헝가리 내무성의 정치 (유대인) 문제를 담당하는 새로운 국무장관은 ‘유대인 문제에 아주 정통한 사람이었으며, 따라서아이히만이 자유로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친구가되었다. 모든 것은 그가 이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반복한 말처럼 꿈처럼‘ 흘러갔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자신의 명령과 자기의 새로운 친구들의 희망 사이에 약간의 사소한 차이점들을 어려움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말이다. - P215

어려움은 다른 부분에서 나타났다. 이 세 사람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자신들이 ‘유대인 문제 해결을 도와주라는 명문화된 명령을 받지 못했다. 이 세 사람은 각각 다른 집단에 속해 있었고 따라서 다른 명령 계통에 서 있었다. - P216

바이스 사건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고, 아이히만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사태가 상당히 악화되어가고 있었다. 베허는 타고난 사업가여서, 아이히만이 겨우 조직과 행정의 막대한 업무만을 본 곳에서 베허는 거의 무제한의 돈을 벌 가능성을 보았다. - P218

베허가 카스트너와 맺은 거래는 기업 실력자들과의 복잡한 협상보다 훨씬 단순한 것이었다. 협상은 구출될 유대인 각각에 대해 생명값을 정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 값을 놓고 상당히 옥신각신했고, 어느 순간에는아이히만도 예비 토론의 일부에 가담한 것 같다. - P219

처음에 아이히만은 게임에 참여하여 새로운 규칙에 따라 게임을 하려고 시도했다. 그것은 그가 환상적인 ‘핏값으로 물건 사기‘ 협상(망해가는 독일 군대를 위해 1만 대의 트럭당 100만 명의 유대인)에 관여했을 때의 일이었다. 이 일은 분명 그가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 P220

아이히만은 결코 이러한 ‘온건파‘에 가담하지 않았다. - P220

그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보내는 데 상당히 유능했지만, 그는 그 문제에 대해 자신의 기존의 ‘언어‘ 없이 적절한 태도로설명할 능력이 없었다. 그는 피고 측 변호인과는 달리 마구 말을 해댔다. 아이히만에 대한 변호인들의 사회적 우월감은 여러 차례 보였다.
(세르바티우스의 보조인 디터 베흐텐브루흐 박사는 법정 밖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 P221

힘러가 ‘온건하게 되었을 때 그의 명령에 대해 아이히만은 가능한만큼, 적어도 그가 직속상관에 의해 ‘비호‘받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사보타주했다. "아이히만이 어떻게 감히 힘러의 명령에 대해 고의적인 방해를 할 수 있었는가?"라고 카스트너가 비슬리케니에게 한 차례 물었다. 이 경우는 1944년 가을에 있었던 도보 이동을 막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 대답은 "그는 아마 어떤 전보를 내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뭘러와 칼텐브루너가 그를 비호했음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 P221

그 알리바이는 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그는 체코슬로바키아로 인도되어 프라하에서 재판을 받고 처벌받았는데, 그곳에는 아무런 연줄도 없었고 또 자구책 마련에 사용할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증인들은 이것을 계획한 사람이 아이히만의 부하가운데 한 사람인 롤프 귄터라고 주장했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 게토를손대지 않은 채 두어야 한다는 아이히만의 문서 명령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P222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사실상 세부사항을 알 필요가 없었는데, 그러한 세부사항들을 알았더라면 그의 입장이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검사가 대법원 심리에서 강조한 것처럼, 히틀러가 트럭을 얻기 위해 유대인을 교환하는 협상에 대해 칼텐브루너로부터 들었을 때 "히틀러의 눈에는 힘러의 권위가 완전히 손상되었다." 힘러의최근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한 것이 분명한 히틀러는 힘러가 아우슈비츠에서 학살을 완전히 중지시키기 겨우 몇 주일 전에야 호르티 편으로 최후통첩을 보내 힘러에게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을 없애는 조치들을 헝가리 정부를 통해 지체됨이 없이 수행하라"고 말하도록 했다. - P223

아이히만은 친위대 제국지휘관 겸 독일 경찰 수장이 이끄는 ‘온건파‘
에 대항한 싸움에서 패했다. 이 패배의 최초의 징후는 1945년 1월에 나타났는데, 이때 상급대대 지휘관 쿠르트 베허가 대령으로 승진했는데,
이 계급은 아이히만이 전쟁기간 내내 꿈꾸던 것이었다. (그의 신분에는더 이상의 고위직이 가능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반은 진실이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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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기하학

I. 지금까지 나는 여러 번 반복하여 기하학의 원리는 경험적 사실이 아니며, 특히 유클리드의 공준은 실험에 의해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미 제시된 근거들이 내게는 아무리 확실해 보여도 많은 지성에게깊이 뿌리내린 잘못된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계속 강조해야 한다고 믿는다. - P94

III. 기하학과 천문학

질문은 다른 방식으로도 던져졌다. 만일 로바체프스키기하학이 참이라면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별의 시차는 유한해지고, 리만기하학이 참이라면 음수가 된다. 이는 경험을 통해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은 결과이며,
사람들은 천문학적 관측을 통해 세 가지 기하학 중 어떤 것을 채용할지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 P95

내게 이러한 물음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내 생각에 이것은 누구라도 분명 터무니없다고 여길 다음의 사항과 똑같은 것이다. 미터와 센티미터로는 나타낼 수 있지만 트와즈toise,
피에pied, 푸스pouce로는 측정할 수 없는 길이가 존재하여, 실험을 통해이러한 길이의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1트와즈는 6피에로 분할된다는 가설을 직접 반박할 수 있을까? - P96

이 논의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자. 나는 직선이 유클리드공간에서어떤 두 가지 속성을 가진다고 가정하고 이를 A와 B라 부르겠다. 비유클리드공간에서 이 직선은 아직 속성 A를 갖고 있지만, 더 이상 속성 B는 갖지 않는다고 하고, 끝으로 유클리드공간에서든 비유클리드공간에서든 직선만 유일하게 속성 A를 가진다고 하자. - P96

하지만 이런 일은 없다. 속성 A처럼 직선을 인지하고 다른 모든 선과 구별하게 해 주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있는 속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P96

우리는 어려움을 조금 뒤로 물러나게 했을 뿐이다.
사실 조금 전 내가 언급한 속성은 오직 직선만의 속성이 아니라 직선과 거리의 속성이다. 이것이 절대적 기준으로 이용되려면, 직선 이외의선과 거리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직선 이외의 선과 거리 이외의양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는 참이 아니다. - P97

다시 말해 임의의 한 순간에 물체의 상태와 서로 간의 거리는 오직 초기순간일 때의 동일 물체의 상태와 서로 간 거리에만 의존하고, 시스템의 초기절대위치와 초기절대방위에는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 이를 축약해서 상대성의 법칙이라 하자. - P98

이는 공연한 걱정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상대성의 법칙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려면 우주 전체에 적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우주의 일부만 고려한다면, 그리고 만일 이 부분의 절대적 위치가 변한다면 우주의 다른 물체들까지의 거리 역시 변하고, 따라서 고려되고있는 우주의 일부에 이 물체들이 끼치는 영향이 증가하거나 감소하여 거기서 일어나는 현상의 법칙을 변경할 것이기 때문이다. - P99

따라서 상대성의 법칙은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다.
임의의 한 순간에 우리의 도구를 통해 읽어 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최초의 순간에 동일한 도구를 통해 읽어 낼 수 있었던 것에만 의존할 것이다. - P99

임의의 한 순간 물체의 상태 및 서로 간 거리와, 같은 순간 이 거리들이 변하는 속도는 오직 최초의 순간 물체의 상태 및 서로 간 거리와, 최초의 순간 이 거리들이 변하는 속도에 의존하겠지만, 시스템의 최초 절대위치나 절대방위에도, 그 최초의 순간 이 위치와 방위가 변하는 속도에도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기술된 법칙은 적어도 일반적으로 해석되는 경험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 P100

철학자라면 충격을 받겠지만, 물리학자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실이 거기에 있다.
뉴턴이 이 사실로부터 절대공간의 존재를 결론지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이러한 견해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3부에서 설명하겠다. 지금으로서는 이러한 곤란에 빠지고 싶지는 않다. - P101

VI.
경험적 사실을 통해 우리는 물체 사이의 관계만 알 수 있다. 어떠한 실험도 물체와 공간 사이의 관계, 혹은 공간의 서로 다른 부분 간의 관계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아니, 대상으로 할 수도 없다. - P101

VII.
만일 실험이 물체를 대상으로 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물체의 기하학적속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먼저, 물체의 기하학적 속성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나는 물체와 공간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속성은물체 사이의 관계만 대상으로 하는 실험을 통해서는 접근할 수 없다. 이것만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속성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있다. - P102

이는 미리 공간의 형식이나 계량적 속성에 대한 어떠한 개념을 갖고있지 않아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결코 ‘물체의 기하학적 속성‘
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실험이 수행된 물체가 로바체프스키의 군과 동일한 구조를 지닌 군에 의해(즉, 로바체프스키기하학에서의 고체와 동일한 법칙에 따라) 운동한다면, 이러한 확인은 불가능할 것이다. - P104

첫 번째 검증 전체는 공간이 유클리드적임을 입증하는 경험을 구성하고, 두 번째 검증은 공간이 비유클리드적임을 입증하는 경험을 구성한다고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실 두 번째 검증 과정이 가능하도록 운동하는 물체를 상상(말 그대로 상상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제일 먼저 찾아온 기계공이 수고할 마음과 지불할 돈만 있다면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간은 비유클리드적이라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 P105

보론

VIII.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는 미묘하고 긴 설명을 요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해야겠지만, 여기서는 내가 『형이상학과 도덕』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과 『일원론자』 The Monist에 발표한 것을 요약하는 데 그칠 것이다. 공간이삼차원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 P106

이 계열들 가운데 그 자체만으로 외적 변화를 보상할 수 있는 것들을구별하여 ‘이동‘이라 했다. 서로 매우 근접한 두 이동은 구별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이동의 집합은 물리적 연속의 특징을 보여 준다. - P107

공간의 점이란 무엇인가? 누구나 안다고 믿지만 이는 착각이다. 공간에서의 한 점을 표상하려 할 때, 우리가 보는 것은 흰 종이에 찍힌 검은 반점, 검은 칠판에 묻은 분필의 반점, 즉 항상 어떤 물체[대상]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 P107

실제로 대상이 멀어져도 망막의 동일한 점에 상이 맺힐 수 있다. 시각은 그렇다고, 대상은 계속 동일한 점에 있다고 대답하지만, 촉각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방금 전까지 손가락으로 만지고 있던 대상을 이제 더 이상 만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P108

그러면 우리가 그처럼 구별한 변화들 중 하나로부터 차례로 도출되는 모든 자세를 같은 부류에 포함시키자. 같은 부류의 모든 자세는 공간의 동일한 점에 대응되고, 각각의 부류에는 하나의 점이, 각각의 점에는하나의 부류가 대응될 것이다. - P109

선조로부터의 경험

설령 개별적 경험으로써 기하학이 창시되지 못했을지라도 선조로부터의 경험으로써는 이와 다를 것이라고 흔히들 말해 왔다. 그런데 이는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유클리드의 공준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우리의 선조들은 할 수 있었다는 의미일까? 가당치 않다. 우리의 지성은 자연선택에 의해 외적 세계의 조건에 적응해 왔고, 인간이라는 종에 가장 유리한, 다시 말해 가장 편리한 기하학을 채택했다는 의미다. 이는 기하학이 참인 것이 아니라 유리한 것이라는 우리의 결론과 완전히 일치한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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