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정의의 집
"베스 하미쉬파스" (Beth Hamishpath, 정의의 집). 법정 정리가 큰목소리로 이렇게 외치면서 세 명의 판사가 도착했음을 알렸을 때 우리는 모두 벌떡 일어섰다. 판사들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검은 법복을 입은 채 옆문을 통해 법정으로 들어와 높게 만든 단 제일 앞줄에자리잡았다. - P49

(전략). 이 현상을 달리 설명하자면, 독일계 유대인에 대한 편견보다 더 오랫동안 존재한, 강력한 ‘비타민 P‘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P50

전반적인 재판의 분위기를 주도한 사람은 란다우 판사였다. 또 쇼맨십을 아주 좋아하는 검사의 영향 때문에 재판이 쇼처럼 되는 것을 막는데 란다우 판사가 최선을, 그의 모든 힘을 다했음은 처음부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 P51

이스라엘 수상인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이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납치하여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책‘¹에 대한 그의 역할을 재판하도록 예루살렘 지방법원으로 압송하기로결정했을 때 염두에 뒀던 쇼와 같은 재판을 위해서 이 법정은 분명히 그리 나쁜 장소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의 설계사‘라는 적절한 칭호로 불렸던 벤구리온은 이 소송 절차의 보이지 않는 무대 매니저로 남아 있다.

1) the final solution. 유대인을 집단 학살하여 유대인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 P51

. 정의는 신변 보호를 위해 유리부스 안에 앉아 있는,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의 아들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중요성에 집중한다. (중략). 심판대에 오른것은 그의 행위에 대한 것이지, 유대인의 고통이나 독일 민족 또는 인류, 심지어는 반유대주의나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다. - P52

그리고 벤구리온의 마음이 가는 대로 본다면 정의란 비록 ‘추상적 개념‘에 불과한지 모르겠지만, 결국 모든 권력을 장악한 수상보다 정의가더 엄격한 주인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우스너 씨가 곧 증명해 보이겠지만, 수상의 규칙은 엄격한 것이 아니었다. - P52

심지어 검사는 법정 건물 안에서
‘즉흥적인‘ 감정을 분출하기도 했다(그는 모든 질문에 거짓말로 일관하는 아이히만을 대질신문하는 데 신물이 났던 것이다). 법정에서 자주방청객을 힐끔거리거나, 일상적 허세보다도 더 심한 연극적인 행동을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그는 결국 백악관의 인정을 받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업무를 잘 수행했다"는 칭찬을 받았다.  - P53

 방청객들은 전세계를 대표하는 듯 생각되었는데, 실제로 처음 몇 주간은 방청객들이주로 세계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신문기자와 잡지 작가들이었다. 그들은 뉘른베르크 재판²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끈 광경을 지켜볼 수 있겠지만, 이번 경우는 "유대인의 비극 전체가 주요 관심사가될 것이다."

2)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전범 재판이다. - P53

왜냐하면 "거의 전적으로 유대인 문제에 관여한 사람, 자신의 역할이 유대인을 파멸시키는 것이었던 사람, 이 사악한 정권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이 유대인으로 제한되어있었던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겪은 (물론 미해결로 남아 있지 않은) 모든 것을 법정으로 가져와서 어떤 방식으로든 아이히만과 일어난 사건들을 연결시키기 위한증거를 찾으려는 것은 비논리적이지 않은가? - P54

뉘른베르크 재판 때 아이히만이 심판대에 있었더라면 유대인의 운명이 더 큰 주목을 받았을 거라고 하우스너 씨는 과연 정말 믿었을까? - P54

만일 이 재판의 방청객이 세계이고 이 연극이 유대인이 겪은 고통의거대한 파노라마라고 한다면, 실제는 기대와 목표에 미치지 못했다고할 수 있다. 저널리스트들은 두 주일 이상 진지한 태도로 남아 있지 못했고, 그 이후에는 방청객의 부류가 근본적으로 변했다. 이제 방청객은유대인으로 구성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젊어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중동 및 북아프리카계의 유대인처럼 여기에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던 이들이다.  - P55

방청객 중 젊은이들은 거의 없었고, 유대인과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이스라엘인도 없었다.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슴속 깊이 알고있으며, 그래서 어떤 교훈도 배울 자세도 갖춰져 있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의 결론을 이끌기 위해 이 재판이 필요하지도 않은, 나처럼 유럽에서 이주한 중년과 노년의 ‘생존자‘들이었다. - P56

따라서 이 재판은 결코 연극이 되지는 않았지만, 벤구리온이 처음에염두에 두었던 쇼, 즉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 이스라엘인과 아랍인, 간단히 말해 전 세계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교훈‘을 담은 쇼는이루어졌다. 바로 이 쇼에서 얻은 교훈은 교훈 받을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했다. 왜 이스라엘이 피고를 납치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재판 시작 전에 벤구리온이 작성한 많은 글에서 이 교훈들은 개괄되었다. - P57

 벤구리온이 속한 노동당³의 기관지인 「다바르」 (Davar)는 "유럽의 600만 유대인의 학살에 대해 나치독일만 책임 있는 것이 아님을 세계 여론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는 것이다"고 표현했다. 벤구리온 자신의 말로 하자면, "우리는 세계만방이 알기를 원하며, 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외지의유대인은 정신적 업적과 윤리적 노력과 메시아적 염원을 가지고 4000년을 내려온 유대교를 세계가 어떻게 항상 적대적으로 대해 왔는지, 어떻게 유대인이 변질되어 양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될 정도가 되었는지.
그리고 이스라엘인이 독립전쟁과 수에즈 운하 사건, 그리고 불안정한이스라엘 국경에서 거의 매일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해왔던 것처럼 어떻게 유대인 국가의 수립이 유대인으로 하여금 반격을 가능하게 할 수있었는지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3) 이스라엘어로 노동당은 마파이 (Mapai)이며 1930년에 창립된 이스라엘 노동자당으로서 1965년까지는 다비드 벤구리온이 주도했다. 1968년에 이 당은 다른 두 사회주의 정당과 제휴하여 이스라엘 노동당을 창설했는데, 초기에는 레비 에쉬콜이 주도하다가 나중에는 골다 메이르(Golda Meir)가 주도했다. - P58

어디에나 반유대주의적 요소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그들의 확신이 드레퓌스 사건 이래 시온주의 운동 진영의 가장 유력한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는 또한 달리 설명되지않는 초기 단계의 나치 정권에 대한 독일 유대인 공동체의 협상적 태도를 설명해 주는 원인이기도 했다. - P59

이스라엘 영웅주의와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송 지점에 정시에 도착하고, 제 발로 처형장까지 걸어가며, 자신의 무덤을 파고, 옷을 벗어 가지런히 쌓아놓고, 총살당하기 위해 나란히 눕게 한) 복종적순응성을 대비시키는 것은 좋은 지적처럼 보였다. 이것이 가치 있다고생각한 검사는 증인들마다 "왜 당신은 저항하지 않았습니까?" "왜 당신은 기차에 탔습니까?" "1만 5000명의 사람이 거기에 서 있었고 수백 명의 간수들만 당신과 마주하고 있는데 왜 당신은 폭동을 일으키거나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았습니까?"라고 질문하면서 이 점을 정교하게 다듬어 갔다. - P60

법정에서는 이 잔인하고도 어리석은 질문에 대한 어떤 대답도 얻을수 없었지만, 만일 1941년 암스테르담에 있던 자신이 살던 구 유대인거주 지역에서 독일 비밀경찰 파견대에 공격을 감행한 네덜란드 유대인의 운명에 대해 상상력을 동원하여 잠시 동안 생각해본다면, 사람들은 쉽게 해답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 P61

한 가지 점에서 이 재판에 대한 벤구리온의 기대가 전적으로 허물어지지는 않았다. 즉 이 재판은 다른 나치스와 전범자들을 색출하는 중요한 방편이 되었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그들 수백 명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아랍 국가들의 경우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전쟁 기간 중 나치스와 회교법 최고고문(the Grand Mufti)과의 관계는 비밀이 아니었다. 최고고문은 근동지역 나름의 ‘최종 해결책을 수행하도록 나치스가 도와줄 것이라 기대했다. - P62

그 결과는 놀라웠다. 아이히만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7개월 후에(재판이 시작되기 4개월 전) 루돌프 회스(Rudolf Höss)의 뒤를 이어아우슈비츠의 지휘관이 된 리하르트 베어(Richard Baer)를 마침내 체포할 수 있었다. 곧이어 이른바 아이히만 사단의 구성원들 대부분(오스트리아에서 화가로 살아가던 프란츠 노박, 서독에서 변호사로 자리잡은 오토 훈셰 박사, 약제사가 된 헤르만 크루마이, 루마니아의 전 ‘유대인 고문‘이었던 구스타프 리히터, 그리고 암스테르담에서 같은 지위에있었던 빌리 죄프)이 체포되었다. - P64

그들의 죄상을 밝히는 증거가 수년전에 책이나 잡지 기사로 발표되었지만, 이들 중 그 누구도 가명으로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종전 이후 처음으로 모든 독일 신문들이 대량학살범인 나치 전범들에 대한 기사들로 가득 찼다(아이히만이 체포된 때인 1960년 5월 이후 오직 한 건의 일급 살인죄만이 기소되었고,
다른 모든 범죄는 살인의 경우, 20년으로 정해진 기소기한이 지나 말소되었다).  - P64

새로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는 나치 정권에서 대단히 활약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독일 법정에서 이미 나치스의 혐의를 벗었다. 1946년 뉘른베르크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그중 한 사람으로 힘러의 수석 개인비서였던 나치 친위대 장성 카를 볼프는 바르샤바에서 동부의 학살 중심지인 트레블링카로 ‘지금까지 2주일 동안 매일 5000명의 선민들⁹을 운반해 왔다‘는 소식을 ‘각졀한 기쁨를 가지고‘ 반겼다고 한다. - P64

9) 유대인을 지칭한다. - P65

비록 아데나워 행정부가 입법부에서 140명 이상의 판사와 검사를 제거하고 더불어 단순히 일상적인 타협적 자세를 가졌던 많은 경찰 간부를 제거하도록, 또 서독 연방 대법원 검사장인 볼프강 임머바르 프렝켈을 그의 중간 이름과는 달리¹¹ 그의 나치스 전력에 관한 질문에 대해 솔직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면하도록 압력을 받기는 했지만, 이제는 사태가 달라질 희망이 거의 없다

11) 그의 중간 이름 Immerwahr는 ‘항상 진실한‘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 P66

 이 문제에 대한 바우어의 정서는 한 사람의 독일계 유대인의 정서에 불과했을 뿐, 독일의 여론은 여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의 신청은본에서 거부되었고,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지지를 전혀 받지도 못했다. 예루살렘에 보내진 서독 정부의 참관인이 표명한 범인 양도 포기의 또 다른 이유는 독일이 사형제도를 폐지했으며, 따라서 아이히만이 응당받아야 할 형량을 받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P67

물론 독일에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할 때 초래될 가장 큰 정치적 위험은, 얀센이 지적한것처럼 범죄 의도(mens rea)가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을 수있다는 점일 것이다).

* 『라이니셔 메르쿠어』 (Rheinischer Merkur), 1961. 8. 11. - P67

이 문제는 또 다른 보다 미묘한, 그러나 정치적으로 보다 적실한 측면이 있다. 전범들과 살인자들을 그들의 은신처로부터 색출하는 것과그들이 공적 영역에서 유능하고 활약을 많이 한다는 것(자신의 경력을히틀러 통치 하에서 꽃피운 수많은 사람들을 연방 및 주 행정부에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관공서에서 만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 P68

(전략), 이와 같은 고도로폭발적인 문제(나치 당원의 수준을 넘어 거의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할수 있는 공범성)를 건드리는 것은 조심스럽게 피했다(재판 전에는 아이히만이 ‘수백 명의 유능한 서독 정부 요인들을 자신의 공범자로 지목했다는 소문이 폭넓게 퍼졌는데,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 하우스너 씨는 연설 서두에서 ‘폭력배나 지하 요원이 아닌 아이히만의 ‘범죄공모자‘에 대해 언급했고, ‘유대인을 멸종시키려고 결심한 위원회에 속한 그들, 즉 의사와 변호사, 학자, 은행가, 경제학자 등을 우리가 만나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 P68

왜냐하면 무엇을 하도록 ‘결심한 위원회‘란 존재하지도 않았고, ‘학위를 가진 고위 법관들이 결코 유대인의 멸절을 결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단지 히틀러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단계들을 계획하기 위해 모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단 한 경우가 법정의 주목을 끌었다.  - P69

왜냐하면 이 기소사건과 관련된 한 재판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역사였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재판의 심판대에 서 있는 것은 한 개인이 아니고 나치 정부도 아니며 바로 역사 전체에 나타나는 반유대주의이다."
이것은 벤구리온이 설정한 기조였고, 이를 하우스너 씨는 충실하게 따랐다. - P69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그리고 내[여호와]가 너희들을 지나면서, 너희들이 너희 자신의 피로 더럽혀진 것을 보았을때, 내가 너희에게 너희 피 가운데에서 살아나라라고 말했다‘는 『에스겔서』¹³의 구절을 인용했는데, 이 말은 ‘이 민족이 역사상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줄곧 직면해 왔던 명령‘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그것은 나쁜 역사와 값싼 수사법에 의한 것이었다. 더욱 나쁜 점은 그것이 아이히만을 재판에 회부한 것과 분명히 상치된다는 것이다. - P70

벤구리온의 의도와 원고 측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심판대 위에는 한 개인, 살과 피를 가진 한 인간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만일 벤구리온이 "아이히만에 대해 어떤 판결이 내려질 것인가에 대해 염려하지않았다면", 그것은 판결을 내려야 하는 예루살렘 법정이 홀로 감당해야할 책무일 것이다. - P71

제8장

법을 준수하는 시민의 의무


이처럼 아이히만이 본디오 빌라도처럼 느낄 수 있었던 기회는 많았지만, 달이 가고 해가 가면서 그는 무엇이든 느낄 필요를 상실하게 되었다. 일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고, 이것이 총통의 명령에 기초한 이땅의 새로운 법이었다. 그가 행한 모든 일은 그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인식한 만큼 행동한 것이었다. 그는 경찰과 법정에서 계속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의무를 준수했다. - P209

본질에 있어서나 의도에 있어서 병사들이 명백히 범죄적인 명령을 수행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이상으로 이 문제 전체와 연관된 것이있는가에 대한 아이히만의 애매한 생각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경찰심문이 진행될 때였다. 이때 그는 갑자기 자기가 전 생애에 걸쳐 칸트의 도덕 교훈, 특히 칸트의 의무에 대한 정의에 따라 살아왔다는 것을아주 강조하며 선언하듯 말했다.  - P210

그가 법정에서 지적하지 못한 것은 이제 그 자신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처럼이 같은 ‘국가에 의해 합법화된 범죄의 시대‘에는 칸트의 정식이 더 이상 적용 가능하지 않으므로 기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왜곡하여 읽었던 것이다.  - P210

 칸트의 철학에서 그 원천은 실천이성이었다. 아이히만이 말하는칸트의 가정적 사용에서 그 원천은 총통의 의지였다. 최종 해결책의 수행에서 보인 끔찍이 공들인 철저함(보통 관찰자들에게 전형적으로 독일적이라고, 또는 완벽한 관료의 전형이라고 보인 철저함)의 대부분은사실상 독일에서는 아주 일반화된 이상한 관념, 즉 법을 준수한다는 것은 단순히 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자기가 따르는 법의 제정자인 것처럼행위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상한 관념으로 그 근원이 추적될 수 있다.
그래서 의무의 부름을 넘어서 나아가는 것이라야 충분하다는 신념이 나온 것이다. - P211

 이러한 불일치는 여전히 그를 다소불편하게 만들어 공개 심문 때 여기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는 공공연히 변명조가 되어 자신의 상관에게 "자기의 죄를 고백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살인적 의무의 수행에 대한 이러한 비타협적인 태도가 판사의 눈에는 그 무엇보다도 더 그의 죄를 확정짓는 것으로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아이히만의 눈에는 이것이 분명히 그를 정당화시키는 것이며,
이는 그가 남겨놓은 양심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을 한때 침묵시켰던 것이기도 했다. - P212

아이히만에게 다가온 마지막 양심의 위기는 1944년 3월에 있었던 형가리로 가는 임무와 함께 시작 되었는데, 이때는 붉은군대가 카파치아산맥을 지나 헝가리 국경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헝가리는 1941년에히틀러 편에 서서 전쟁에 참전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웃하고있는 나라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얼마간의 영토를 더 얻으려는 속셈 때문이었다. - P213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듯이, 헝가리로 새로 들어온 이 30만 명의 유대인의 안전은 망명을 제공하려는 헝가리의 열성 덕분이 아니라 이 한정된 수의 사람들을 위해 별도 행동을 취하는 것을 독일이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1942년 독일 외무성의 압력으로 헝가리는 모든 유대인 망명자들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독일 우방국의 진실성에 대한 시금석이 전쟁의 승리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가에 달려 있지 않고 ‘유대인 문제의 해결‘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을 독일 외무성은 항상 명확히 했다. - P214

이 나라를 점령하기 전 한 유명한 인터뷰에서 그는 호르티에게 ‘헝가리는 아직도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필요한 조치들을 도입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고, 그에게 "유대인을 학살하지 못하도록" 임무를 부여했다. - P215

헝가리의 헌병대 본부는 필요한 모든 일을 하는 데 아주 열정적이었고, 헝가리 내무성의 정치 (유대인) 문제를 담당하는 새로운 국무장관은 ‘유대인 문제에 아주 정통한 사람이었으며, 따라서아이히만이 자유로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친구가되었다. 모든 것은 그가 이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반복한 말처럼 꿈처럼‘ 흘러갔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자신의 명령과 자기의 새로운 친구들의 희망 사이에 약간의 사소한 차이점들을 어려움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말이다. - P215

어려움은 다른 부분에서 나타났다. 이 세 사람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자신들이 ‘유대인 문제 해결을 도와주라는 명문화된 명령을 받지 못했다. 이 세 사람은 각각 다른 집단에 속해 있었고 따라서 다른 명령 계통에 서 있었다. - P216

바이스 사건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고, 아이히만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사태가 상당히 악화되어가고 있었다. 베허는 타고난 사업가여서, 아이히만이 겨우 조직과 행정의 막대한 업무만을 본 곳에서 베허는 거의 무제한의 돈을 벌 가능성을 보았다. - P218

베허가 카스트너와 맺은 거래는 기업 실력자들과의 복잡한 협상보다 훨씬 단순한 것이었다. 협상은 구출될 유대인 각각에 대해 생명값을 정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 값을 놓고 상당히 옥신각신했고, 어느 순간에는아이히만도 예비 토론의 일부에 가담한 것 같다. - P219

처음에 아이히만은 게임에 참여하여 새로운 규칙에 따라 게임을 하려고 시도했다. 그것은 그가 환상적인 ‘핏값으로 물건 사기‘ 협상(망해가는 독일 군대를 위해 1만 대의 트럭당 100만 명의 유대인)에 관여했을 때의 일이었다. 이 일은 분명 그가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 P220

아이히만은 결코 이러한 ‘온건파‘에 가담하지 않았다. - P220

그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보내는 데 상당히 유능했지만, 그는 그 문제에 대해 자신의 기존의 ‘언어‘ 없이 적절한 태도로설명할 능력이 없었다. 그는 피고 측 변호인과는 달리 마구 말을 해댔다. 아이히만에 대한 변호인들의 사회적 우월감은 여러 차례 보였다.
(세르바티우스의 보조인 디터 베흐텐브루흐 박사는 법정 밖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 P221

힘러가 ‘온건하게 되었을 때 그의 명령에 대해 아이히만은 가능한만큼, 적어도 그가 직속상관에 의해 ‘비호‘받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사보타주했다. "아이히만이 어떻게 감히 힘러의 명령에 대해 고의적인 방해를 할 수 있었는가?"라고 카스트너가 비슬리케니에게 한 차례 물었다. 이 경우는 1944년 가을에 있었던 도보 이동을 막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 대답은 "그는 아마 어떤 전보를 내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뭘러와 칼텐브루너가 그를 비호했음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 P221

그 알리바이는 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그는 체코슬로바키아로 인도되어 프라하에서 재판을 받고 처벌받았는데, 그곳에는 아무런 연줄도 없었고 또 자구책 마련에 사용할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증인들은 이것을 계획한 사람이 아이히만의 부하가운데 한 사람인 롤프 귄터라고 주장했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 게토를손대지 않은 채 두어야 한다는 아이히만의 문서 명령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P222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사실상 세부사항을 알 필요가 없었는데, 그러한 세부사항들을 알았더라면 그의 입장이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검사가 대법원 심리에서 강조한 것처럼, 히틀러가 트럭을 얻기 위해 유대인을 교환하는 협상에 대해 칼텐브루너로부터 들었을 때 "히틀러의 눈에는 힘러의 권위가 완전히 손상되었다." 힘러의최근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한 것이 분명한 히틀러는 힘러가 아우슈비츠에서 학살을 완전히 중지시키기 겨우 몇 주일 전에야 호르티 편으로 최후통첩을 보내 힘러에게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을 없애는 조치들을 헝가리 정부를 통해 지체됨이 없이 수행하라"고 말하도록 했다. - P223

아이히만은 친위대 제국지휘관 겸 독일 경찰 수장이 이끄는 ‘온건파‘
에 대항한 싸움에서 패했다. 이 패배의 최초의 징후는 1945년 1월에 나타났는데, 이때 상급대대 지휘관 쿠르트 베허가 대령으로 승진했는데,
이 계급은 아이히만이 전쟁기간 내내 꿈꾸던 것이었다. (그의 신분에는더 이상의 고위직이 가능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반은 진실이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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