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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처음으로 직접 접촉한 곳은 로드후스라고 불리는 빨간벽돌 건물, 즉 코펜하겐 시청에서 열린 어느 미술 전람회 개막식이었다. 브롬헤드는 소련 사람들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진짜 외교관들과 스파이들이 함께 어울리는 <외교 오찬 클럽>의 단골인 그는 소련 관리 여러 명과 친분이 있었다.  - P81

두 사람은 미술에 대해 더듬더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올레크가 말을 할 때면 엄격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브롬헤드는 이렇게 썼다. - P81

경쟁국의 정보 요원을 포섭하려면 복잡하게 움직여야 했다. 너무 노골적으로 접근하면 올레크가 겁을 먹고 물러날 것이고 그렇다고 너무 은근하게 신호를 보내면 상대가 놓칠 수도 있었다. - P82

 브롬헤드의 예측처럼 올레크는 우호적이지만 접근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사교적으로도, 스포츠에서도, 성적으로도, - P83

한편 제프리 거스콧은 런던에서 소련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그때까지 서방이 포섭한 소련 스파이의 최고 성공 사례인 올레크 펜콥스키를 담당했던 선배 요원 마이크 스토크스와 선빔 문제를 상의했다. (중략). 올레크가 서방에 얼마나 호감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는 <리트머스 시험> 계획이었다. - P83

1973년 11월 2일 저녁, 올레크와 엘레나가 막 식사를 끝냈을 때(전혀 즐겁지 않고, 거의 말이 없는 식사였다), 누가 아파트 문을 크게 두드렸다. 올레크가 문을 열어 보니, 대학을 함께 다닌 체코슬로바키아인 친구 스탄다 카플란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올레크는 놀라서 말을 잃었다가 갑자기 더럭 겁이 났다. - P84

(전략). 솔직한 표정도 쾌활한태도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위스키 잔을 든 손이 아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올레크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카플란이 온 것은 서방의 정보기관이 그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시힘이었다. 그것도 아주 위험한 시험. 5년 전 프라하의 봄이 짓밟힌뒤 그가 전화를 걸고 나서 이제야 이렇게 답변을 듣는 건가? - P84

카플란은체코슬로바키아에서 망명해 프랑스를 거쳐 캐나다까지 가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올레크는 모호한 말을 중얼거렸다. 옐레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 P85

 아내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불안감이 살짝배어 있는 것이 보였다.
올레크는 미행이 없음을 분명히 확인한 뒤 점심 약속에 일부러 늦게 나타났다. 간밤에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카플란은 창가의 테이블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밤보다 더 편안해 보였다.  - P85

올레크는 자신이 평가 대상이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카플란이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극적인 사건들을 회상하는 동안 그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는 소련의 침공이 충격적이있다는 말만 했다. <나는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심연의 가장자리를 걷는 기분이었다.>  - P86

구애할 때는 너무 안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올레크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단순한 구애의 테크닉과는 달랐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사태를 겪은 뒤 자신이 감정을 분출한 것에 서방 정보기관들이 과연 반응을 보일지 줄곧 궁금하긴 했지만, 자신이 그들의 유혹을 원하는지 아직도 천적으로 확신할 수없었다. 자신을 유혹하려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 P86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올레크가 반(反)공산주의 반역자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인물과 뜻밖에 만나게 된 것을 KGB에 보고할 것 같은 낌새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몹시 흥미로웠다. 우리가 듣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거였다. 고르디옙스키는 확실히 극도로 조심하고있었지만, 만약 그가 그 만남을 보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커다란첫발을 떼는 행동이었다. 그가 우리를 상대할 생각이 있음을 티나지 않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우연한 만남을 꾸며 내야 했다.> - P87

영국의 정보 요원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올레크는 서브를 넣기직전이었다. 그는 브롬헤드를 즉시 알아보았다. 트위드 정장에 묵직한 외투를 걸친 그는 텅 빈 스포츠 클럽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누가 봐도 틀림없이 영국인이었다. - P88

카플란이 찾아온 것, 브롬헤드의 집에서 열린 파티, 저 친절한 영국인 관리가 지난 석 달 동안 자신이 참석한 모든 사교 모임에 나타난 것 같다는 사실. KGB는 브롬헤드가 정보 요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는 <외향적인 행동>과 <초대를 받든 받지 않았든 대사관 파티에 나타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이렇게 이른 시각에 인적 드문 배드민턴장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딱 하나였다. MI6가 올레크를 포섭하려 한다는 것. - P89

브롬헤드는 아내의 낡은 자동차를 몰고 스포츠 클럽을 떠나면서상당히 들든 상태였다. 하지만 불안감도 있었다. 올레크가 자신의 접근에 별로 흔들리지 않고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 보인 것이 문제였다. 자신이 근무하는 대사관 근처의 식당을 고른 것도 마음에 걸 그곳이라면 마이크를 숨겨 두고 길 건너편의 대사관으로 대조를 중계할 수 있을 터였다. 소련 관리들이 그 호텔에서 식사할 때가장의 그들 눈에 두 사람의 만남이 발각될 수도 있었다. - P90

하지만 올레크는 단순히 자신의 위장 신분에 맞게 행동했을 뿐이었다. 그도 대사관으로 돌아와 레지덴트인 모길렙치크에게 물었다. 「영국 대사관 사람이 점심을 같이 먹자는데, 어떻게 할까요? 받아들일까요? 」이 질문이 모스크바로 전달된 뒤 곧바로 회색 추기경 드미트리 야쿠신에게서 단호한 답변이 날아왔다. 「받아야지! 적극적으로 굴어. 상대방 정보 요원을 피하지 말고 만나지 못할 이유가 뭔가 공격적인 자세를 취해! 영국은 우리가 아주 큰 관심을 갖고 있는나라야.」 이것이 올레크에게 보험 역할을 했다. 계속 추진해도 좋다는 공식적인 허락이 떨어졌으니, 이제 그는 KGB에 충성심을 의심받을 걱정 없이 MI6와 <인가된 접촉>을 할 수 있었다. - P91

브롬헤드는 자신이 KGB 미끼 작전의 대상이 된 건가 싶었다. 아니면 올레크가 진심으로 그를 포섭하려 하는 걸까? 브롬헤드가 홍미 있는 척하면서, 소련측이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봐야 할까? 한편 올레크 입장에서는 위험이 훨씬 더 컸다. 카플란의 방문에 이어 브롬헤드가 접근한 것이 모두 정교한 계획의 일부일 수 있었다. - P91

<나는 식당 안의 사람들을 모두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우리 사무실에 사진으로 정리되어 있는 소련 대사관 직원 중 한 명이라도 그자리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모두 아무것도 모르는 덴마크인이거나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관광객인 것 같았다. 나는 올레크가 정말로 올지 궁금해하면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올레크는 약속 시간에 정확히 식당으로 들어왔다. - P92

. KGB가 해외에 많은 요원을 배치한 것이 이상하다고 브롬헤드가 말했을 때, 올레크는 <애매모호한> 반응을 보였다.
올레크는 주로 덴마크어를 사용했고, 브롬레드는 덴마크어 독일어러시아어가 어지러이 뒤섞인 말로 대답했다. 이 감당 안마에 올려크는 웃음을 터뜨렸다. <악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 웃음이었다 - P93

그런데도 브롬헤드는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상태로 식당을 나섰다. 올레크는 자신이 KGB에 어느 정도 진실을 숨기고 있음을 암시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자신이 사냥감이 아니라 사냥꾼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딱 들어맞았다. 브롬헤드는 M16 본부에 메모를 보냈다. <지금까지 일이 너무 쉬워서 걱정스럽다는 뜻과 그가나를 포섭하고 싶어서 친절하게 구는 것 같다는 짐작을 강조했다.>-1 - P93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그 <엉망진창>이 효과를 발휘했다. 올레크는 브롬헤드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없이 몇 주가 흐르자 처음에는걱정했다가, 그다음에는 당황했다가, 그다음에는 상당히 화가 났다가. 마지막에는 이상하게 안도했다. 그 휴지기가 그에게는 곰곰이생각해 볼 시간이 되었다. 만약 이것이 미끼 작전이었다면, MI6가훨씬 더 빠르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 P94

1974년 10월 1일, 그 키 큰 영국인이 새벽빛을 받으며 배드민턴 코트에 다시 나타나 또다시 만남을 제의했다. 브롬헤드가 내놓은이유는 자신이 IRA⁷를 상대하는 작전을 위해 위장 요원으로 북아일랜드에 곧 재배치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몇 달 뒤 떠날 예정이라고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않기로 했다.>

7 북아일랜드를 포함한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가톨릭계 무장조직- - P95

<주문한 술이 나온 뒤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당신은 KGB죠 당신이 KGB의 모든 부서 중에서도 가장 비밀스럽고, 전 세계의불법 스파이들을 담당하는 제1주요부의 라인 N에서 일했다는 것을알고 있습니다.>
올레크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 P96

브롬헤드는 계속 밀어붙였다. 「말해 보세요. 당신 부서에서 PR라인 부관이 누굽니까? 정치 정보 수집과 간첩 관리의 책임자 말입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올레크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납니다.」 - P96

첫 만남 이후 올레크는 상사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보고서도제출했다. 하지만 이번 만남에는 재가를 받지 않았다. 브롬헤드와접촉했는데도 그 사실을 비밀로 했다는 것을 KGB에 들킨다면 그는끝장이었다. 지금 이 만남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M16에 알림으로써 그는 자신이 이쪽 편으로 돌아섰음을 분명히 밝히고 그들의 손에 자신의 목숨을 맡겼다. 완전히 선을 넘어왔다. - P97

브롬헤드의 보고를 받은 런던의 M16 간부들이 잉글랜드 남해안에 있는 포츠머스 근처의 나폴레옹 시대 요새인 포트 몽크턴의 비밀 훈련 기지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밤 10시에 한자리에 모인 그들은 브롬헤드의 보고서를 살펴보고 행동 방향을 결정할 예정이었다. <이것이 도발일 수 있다는 의문이 몇 번이나 제기되었다.>  - P98

3주 뒤 브롬헤드와 고르디옙스키는 거의 손님이 없는 어두운 술집에서 만났다. 두 사람 모두 오는 길에 세심하게 드라이클리닝을했고, 둘 다 <블랙>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사무적이었지만 원활하지는 못했다. 언어 장벽이 심각한 장애가 되었다. 영국과 소련의 두스파이는 이미 관계를 정립했지만, 서로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 P98

브롬헤드는 올레크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항상 미소 짓는 얼굴의 이 소련 KGB 요원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이 정말 별로 없다는생각을 했다. MI6와 협력하기 위해 목숨을 걸 각오까지 되어 있는듯한 그는 겉으로 보기에 침착한 것 같았다. 돈 이야기는 단 한 번도나오지 않았다. 올레크 본인의 안전이나 가족의 안전에 대한 말도 망명히고 싶다는 말노 역시 나오지 않았다. - P100

브롬헤드는 다음 날 아침 MI6의 런던 본부에 도착했을 때에도여전히 이런 의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 P101

MI6의 상사들은 낙관적이었다. 선빔이 획기적인 사례가 될지도모른다는 것이었다. 올레크는 진짜인 것 같았지만, 브롬헤드는 확신하지 못했다. 올레크는 아직 유용한 정보를 단 하나도 내놓지 않았다.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았다. - P101

올레크의 새로운 담당자인 필립 호킨스는 가짜 여권으로 런던에서 날아왔다. 「만나 보면 마음에 들 겁니다.」 브롬헤드는 호킨스에대해 올레크에게 이렇게 말해 두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나는 확실히 그가 싫었다. 내 생각에 그는 끝내주는 새끼였다.> 이건 정확한 말도 아니고 공정한 평가도 아니었다. - P102

브롬헤드는 진지한 얼굴로 올레크와 악수하며 이렇게 나서 줘서고맙다고 말하고, 행운을 빌어 주었다. 차를 몰고 그곳을 떠나면서그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올레크에게 감탄하고 그를 좋아했기 때문에 아쉬웠고, 이것이 KGB의 음모일 수 있다는 의심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불안했으며, 이제 자신은 이 일에서 손을 놓게 되었다는사실에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 P102

참조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의 포섭 과정은 리처드 브롬헤드의 미출간 회고록 『거울의 황무지Wilderness of Mirrors』(T. S. 엘리엇의 시 「게론티온Gerontion」의 구절에서 따온 제목이다)에 묘사되어 있다. - P103

4

초록 잉크와 마이크로필름


사람은 왜 스파이가 되는가? 안락한 가정과 친구,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하고 위험하고 어스름한 비밀의 세계에 뛰어드는 이유가 무엇인가? 특히 한 나라의 정보국에서 일하던 사람이 상대국을 위해 일하기로 마음을 바꾸는 이유가 무엇인가? - P105

어떤 사람들은 이념, 정치, 애국심 때문에 스파이가 되지만 탐욕 때문에 행동으로 나서는 사람이놀라울 정도로 많다. 경제적 보상의 매력이 그 정도다. 반면 섹스,
협박, 오만, 복수심, 실망감 때문에 첩보의 세계로 끌려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다. 비밀스러운 세계에서 맛볼 수 있는 동지 의식과 자신이 남보다 앞서 있다는 독특한 느낌이 동기가 되기도 한다. 용감하고 원칙을 지키는 스파이가 있는가 하면, 욕심 많고 비겁한 스파이도 있다. - P106

 KGB는 사람이 첩자가 되는 네 가지 주요 동기를 오래전부터 MICE라고 불렀다. 돈money, 이념 ideology, 강압 coercion, 자존심 ego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약이다.
하지만 낭만이라는 요소도 있다. 별도의 비밀스러운 인생을 살기회. 어떤 사람들은 몽상 때문에 스파이가 된다. 전직 MI6 요원이자 언론인인 맬컴 머거리지는 이렇게 썼다. <내 경험상, 정보 요원은 기자보다 훨씬 더 큰 거짓말쟁이다.>²

2 Malcolm Muggeridge, Chronicles of Wasted Time (London: Collins, 1973). - P106

다른 나라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나라를 염탐하겠다는 결정은 보통 스파이가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외부 세상과 내면세계가 충돌할때 우러나온다. 이 내면세계에 대해 스파이 자신은 인식하지 못할수도 있다.  - P107

올레크 고르디옙스키를 MI6의 품으로 밀어낸 외부적인 요소는 정치와 이념이었다. - P107

 교조적인 주장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세계에서 자란 그는 일단 이념을 거부한 뒤에는 개종자 특유의 열성적인 태도로 그 이념을 공격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그의 아버지와 형이 공산주의에 헌신한 그 깊이만큼 공산주의에 깊이반대하게 된 그의 생각은 두 번 다시 바뀌지 않았다. - P108

모든 스파이에게는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필요하다. 첩보 활동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요소 중 하나(그리고 첩보 활동에 관한 중요한 믿음 중 하나)는 스파이와 그의 상관, 정보원과 담당관사이의 감정적인 유대감이다. 스파이는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며 비밀스러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느낌을 원한다. 자신이 소중하고 신뢰받는 존재라는 느낌과 보람을 원한다. - P109

고르디옙스키는 영국에서 온 새로운 담당관 필립 호킨스에게서 여러 가지 감정이 뻗어 나오는 것을 느꼈지만, 그중에 애정은 없었다.
괴짜 같고 원기 왕성한 브롬헤드는 <지독히 영국적인> 모습 덕분에 고르디옙스키의 마음을 얻었다. - P109

호킨스는 전쟁 중에 독일인 포로들의 심문을 맡았다. 그 뒤로는체코와 소련 관련 일들을 여러 해 동안 담당했다. 그가 관리한 사람들 중에는 망명자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KGB 내부의 스파이를 직접 담당한 경험이 있다는점이었다. - P110

호킨스는 고르디옙스키를 자리에 앉히고, 법정에서 교차 신문을 하듯이 대화를 시작했다.
「당신의 레지덴트는 누굽니까? 지부에 KGB 요원이 몇 명이죠?」
고르디옙스키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 자신이 환영과 찬사와 축하를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상대는 새로 포섭한 협력자가 아니라 적포로를 대하듯이 으름장을 놓으며 그를 심문하고 있었다.
<심문이 한동안 이어졌는데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르디옙스키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것이 영국 정보기관의 진정한 정신일 리 없어.」 - P111

심문이 잠시 멈췄다. 고르디옙스키는 한 손을 들고 선언하듯 말했다. 영국 정보기관을 위해 일하겠지만, 반드시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첫째, 나는 KGB 지부의 동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싶지 않습니다. 둘째, 비밀스러운 사진 촬영이나 녹음은 싫습니다. 셋째, 돈 얘기는 하지 마세요. 내가 서방을 위해 일하려는 것은 이득이 아니라 이념적인 확신 때문입니다.」 - P111

그가 경제적 보상을 거부한다고 미리 선언한 것은 두 번째 조건보다도 더 걱정스러웠다. 정보원에게 선물이나 돈을 자꾸 안겨 주어야 한다는 것은 첩보 세계의 자명한 원칙이다. 물론 지나친 경제적 보상으로 정보원의 욕심을 부추기거나 의심을 살 만큼 헤픈 씀씀이를 초래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래도 돈을 안겨 주면 정보원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끼게 되며, 일을 한 만큼 보상이 지급된다는원칙이 확립된다.

호킨스는 마지막으로 긴급 전화번호와 비밀 잉크, 긴급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런던 주소를 고르디옙스키에게 건넸다.
두 사람 모두 불만스러운 기분으로 안가를 나섰다. 스파이와 담당관의 첫 만남은 즐겁지 않았다.
하지만 웃음기 없고 무뚝뚝한 호킨스를 담당관으로 임명한 것이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결과를 낳았다. 그는 프로였고, 고르디옙스키도 프로였다. - P113

처음에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만남이 이루어졌으나 점차 긴장이 풀렸고,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대단한 성과를 거뒀다. 뾰족뾰족한 의심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서서히 대단히 능률적인 관계로 발전했다. - P114

MI6 본부의 고위 간부들은 곧 고르디옙스키의 진심을 믿게 되었다. 거스콧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선빔은 진짜였다. 그는 공정하고정직했다.>
고르디옙스키가 불법 스파이를 담당하는 S부, 즉 그가 정치 부서로 옮기기 전에 10년 동안 근무했던 부서의 활동을 아주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하자 그들의 믿음은 더욱더 강해졌다. - P114

외교 행낭은 대사관들이 주재국의 간섭 없이 안전하게 정보를 보내고 받을 때 사용하는 수단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즉 수색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 P115

 어느 날 호킨스가 고르디옙스키에게그가 설명한 불법 스파이 시스템을 독일어로 정리한 보고서를 검토해달라고 부탁했다. 고르디옙스키는 감탄했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된 것을 보니 호킨스는 독일어 속기의달인인 것 같았다. M16가 아파트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을 것이라는깨달음은 나중에야 찾아왔다. 그는 자신도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약속이 깨졌다며 소란을 피우지 않기로 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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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틀에 박한 나를
틀 밖으로
끄집어내는 법

공부란 기존 언어에 길든 타성과 관습에서 벗어나 오염된 현실을 다르게 바라보며 새로운 언어로 재해석하는 과정이다. 주어진 환경에서 ‘코드‘로 굳어진 언어 사용방식과 의미를 해체해보고나의 방식으로 언어적 의미를 재정의해보는 노력이기도 하다. - P297

아이러니와 유머는 기존 언어의 코드를 전복하거나 일부러 어긋나게 함으로써언어적으로 오염된 현실에 묶여 살던 나를 해방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⁷¹ - P297

71. 여기서 제시하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활용한 언어적 코드 해체작업은 지바 마사야의《공부의 철학>에서 빌려왔다.

아이러니 찾기와
유머를 활용하라

첫 번째인 아이러니 찾기는 이제껏 사용해온 언어적 가정이나 근거를 의심하고,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던 의견에 의문을제기하며 깊이 파고드는 방법이다. - P298

이처럼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을 파고들어 의문을 던지고, 당연함에 시비를 거는 것이 아이러니 찾기다. 이처럼 아이러니 찾기는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언어적 행동에 반기를 들어 저항함으로써 대화를 새로운 국면으로 끌고 간다. - P298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에 따르면 "아이러니스트(ironist)‘는 언어적 필터로 오염된 현실에 갇혀 사는 자신을 두려워한다.⁷² - P299

72. 리처드 로티(지음), 김동식(옮김),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1996), 민음사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이전과 다르게 변화시켜나가는 아이러니스트는, 끊임없는 재서술(redescription)로 자아를 창조한다. - P299

두 번째 방법은 유머다. 유머는 언어적 상처를 만들어 기존 언어의 문법을 전복한다. 아이러니가 근거를 의심하고 언어적 코드 자체를 전복하는 것이라면, 유머는 기존 언어의 관점이나 시각을 바꿔 언어코드에서 어긋나려고 애쓰는 방법이다. - P300

유머는 하나의 주제에서 폭넓게 가지를 뻗어가며 눈들게만든다. 아이러니 찾기가 기존 문법을 곁들게 만드는 전략이라면, 유머는 기존 문법을 비틀어 다른 가능성의 문을 열어젖힌다 - P300

따라서 유머를 활용하면 불륜에 대한 관점이 수평적으로 다양해진다. 유머와 달리 아이러니 찾기는 수직적으로 깊이 파고들어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한다. - P300

 <공부의 철학>을 쓴 일본 철학자 지바 마사야는 언어습득이란 환경코드에 세뇌당하는 일이라고 했다. "환경코드는 주어진 환경에서 옳다고 믿는 신념체계나 가치판단 기준이다. 이렇게 하면 되고 저렇게 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나 신념체계같은 것이다.  - P301

하나의 단어를 붙잡으면
하나의 우주가 열린다

사고는 내가 당한 일이지만, 사건은 내가 의도적으로 일으킨일이다. 사건 속에는 말 못 할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을 읽어내면 사건의 전후좌우 배경과 전모를 밝힐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단어역시 의미와 의도를 읽어내야 정확한 뜻을 알 수 있다. - P302

우리가 언어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똑같은 단어지만 다른 의미로 쓰이는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단어를 잡으면 그 단어가 꿈꾸는 우주를 품을 수 있다. - P302

사랑이나 행복 같은 보편적인 개념도 내가 실제로 무엇을 보고 느끼며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인식되고 구현된다. - P303

내 경험으로 내 몸으로 느낀 의미는 다르다. 불륜이나 출생의 비밀 같은 똑같은 소제의 드라마가 매번 다른 이유는 스토리가 펼쳐지는상황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낳는 반복이 반복되는 것이다. - P303

농담과 진담 사이,
상담이 필요하다


모든 발언은 언제나 맥락을 배경으로 태어난다. 어떤 맥락에서 그런 발언을 했는지 알면 발언자의 진의가 파악된다. 똑같은콘텐츠(contents)도 맥락(context)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소통(communication)에 치명적인(critical) 위기(crisis)가 온다. 발언자의 진의와 관계없이 구설에 오르기도 한다. - P306

생각해보면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은 서로 다르지 않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질문이 많아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밥은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비 오는 날 우산을 갖고 출근했는지등 하루 종일 질문한다. 그만큼 온통 관심이 그에게 쏠려 있기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이 식으면 질문이 없어진다. - P307

가끔 농담으로 던진 화두가 청중을 무시하는 욕설로 오해된다. 왜 그런 불상사가 생길까 고민해보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어릴 때부터 "놀고 자빠졌네.", "지금 장난하냐?" 같은 말을 비난이나 위협의 말로 듣고 자랐다. - P308

농담으로 던진 말을 상대방이 진담으로 받을 때 생기는 부담감을 해소하는 방안은 무엇일까? 이해와 오해 사이에 존재하는거리를 어떻게 줄일까?  - P309

핵심은 ‘공감대 형성‘이다. 강사가 직접 경험한 것이라 해도 청중은 처음 듣는 낯선 경험이다. - P310

12

창의는
연결이다
-연상 사전

창의성은 사물과 사물을 연결하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 - P200

그러니 창의성이 발휘되려면 우선 재료가 될가지 이상의 무언가를 내면에 축적해야 한다. 내면의 데이터베이스에 계급가 풍부하게 쌓여 있는 사람은 그만큼 다양한 연결이 가능하다. - P201

철판과
보름달


모든 생각은 연상이다. ‘아파트‘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가수 윤수일의 노래 ‘아파트‘가 떠오를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평수, 위치, 시세 등이 연상될 것이다. 머릿속에 연상되는 이미지나 개념이 바로 그 단어에 관한 그 사람의 생각이다. - P202

어느 순간 구체적으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돌파력 혹은 불굴의 의지로 작동한다. 체험적상상을 이렇게 붙이고 저렇게 합치는 순간, 내면에서 위대한 창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 P203

시인의 상상력은 책상에서 나오지 않는다. 춥고 배고팠던 기억, 힘들고 아팠던 추억,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 서린 지난 체험에서 시적 영감이 나온다.  - P204

고() 신영복 교수는 한 사람의 사고 수준, 사상의 깊이와 넓이는 특정 단어와 관련해서 그 사람이 품고 있는 연상세계를 보편할 수 있다‘는 말로 나에게 지적 충격을 주었다. - P204

‘시간의 점‘은
체험의 총량

한 사람의 생각은 그가 살아오면서 보고 느끼고 경험하면서 깨달은 체험적 지혜의 역사적 산물이다. 그래서 바꾸기가 쉽지않다. 생각은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생각을 바꾸는 것은 삶을 바꾸는 것이다. - P205

지금의 생각은 과거의 생각과 연결된 상상이고, 모든 생각은 기존의 생각과 연결되어 생겨난 연상일 뿐이다. - P205

그런데 과거의 기억은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기억은 몸에 각인된 각양각색의 체험적 얼룩과 무늬다. - P207

책에서 배울 수 없는 이런 ‘시간의 점‘이야말로 창작의 원료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추억은 얼마든지 아름다운 무늬로 재생된다. 지난 시절의 기억이 구체적으로 떠오른다면, 그만큼 강렬한 추억이라는 의미다. - P207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바뀌는 순간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바뀌는 순간은 언제일까? 고유명사에 한 개인의 체험적 사연이 반영될 때다. 그 순간 누구나 만날 수있는 국어사전의 보통명사가 아니라 나의 특수한 체험적 추억이 스며든 고유한 개념이 된다. - P208

연상사전을 작성하는 방법은, 한 가지 개념에 대해 연상되는단어나 이미지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인생의 시기별로 작성해보는 것이다. 다시 ‘아파트‘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 P209

또 연상의 세계가 비슷한 사람끼리는 소통도 잘 된다. 소통이잘 안 되는 이유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는데도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 P210

글이 왜 안 써질까? 소통이 왜 안 될까?가 궁금하다면 내 안의연상사전을 열어보자. 연상의 깊이와 너비를 다시 점검하고 틀에 박힌 언어에서 벗어나야 한다. - P211

프롤로그

당신 언어의 레벨이
당신 인생의 레벨이다.

이탈리아의 작가 이탈로 칼비노는 "성공이란 절묘한 언어 표현에 달려 있다. 그것은 종종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영감에서 나올 수도 있지만, 대개는 적확한 말, 그러니까 한 단어도 바꿀 수없는 문장, 즉 소리와 개념의 가장 효과적인 결합으로 얻어진(・・・) 간결하면서도 집중된 잊을 수 없는 문장을 찾는 참을성 있는 탐구 끝에 얻어진다."고 했다.¹ - P11

심오하지만 단순한, 단순하지만 깊이 있는 인생의 지혜가 담긴 명언은, 적확한 개념으로 이루어진 문장건축으로 완성된다.
단순함은 치열함의 산물이고, 복잡함은 나태함이 만든다. - P12

생각의 쓸모는 언어의 다름이 결정하고 언어의 다름은 사람의 다름을 결정한다. 내가 특정 단어를 모르면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세계도 당연히 모른다. - P12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

만약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각한 바를 표현할수 없다. 생각한 바를 표현할 수 없으면 세상에 드러낼 수 없다. - P13

01. 메리언 울프(지음), 전병근(옮김), 《다시, 책으로》 (2019), 어크로스
02.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지음), 이영철(옮김), <논리-철학 논고》 (2006), 책세상

언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에서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The limits ofmy language are the limits of my worlds)."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 P14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방법

천박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생각의 높이가 낮고 인격이무너져 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도 없다. 생각과느낌은 모두 언어를 매개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 P15

요즘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생각 좀 해보자."다. 다른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여 비교하고 분석해서 따져보는 전두엽 기능이 마비된 상태다. 실제로 현대인의 뇌는 몰입하고 생각하는 기능을 상실하는 중이라는 연구결과도 많다. - P16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내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를 보면 된다. 내 인생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수준을 보면 된다. - P17

박용후의 퍼스텍티브

언어는 인생입니다

저에게는 기자 때 생긴 버릇 하나가 있습니다. 책을 읽거나 글을쓰다가 의미가 모호한 단어를 만나면 꼭 사전을 찾아봅니다. 익숙한 단어도 가끔 낯설게 느껴질 때면 사전을 찾아 다시 확인합니다.
몇 분 뒤 흔들렸던 생각이 명쾌하게 머릿속에 정리되곤 합니다. - P72

 이것이 습관이 되면 내 의사를 정확히 표현해 옮기는 데도 타인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내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소통의 명쾌함은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고 자라납니다. - P73

사람이 동물과 다른,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 ‘언어‘입니다. 말과 글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그 생각나눔을 통해 지식도 자라고 관계도 만들어집니다. - P73

. 인간이라는 단어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을 인간(人間)이라고도 부릅니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것을 말하지만 담긴 뜻은 다릅니다. ‘사람‘에는 ‘산다‘, ‘살아간다‘는 뜻이 담겼다고도 하고, ‘살아가는 것을 안다(앎)‘는 뜻이 담겼다고도 해석합니다. - P74

그런데 사람 사이에는 언어가 존재합니다. "생각이나 사상, 관념은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언어의 외피를 입을 때 비로소 존재 안으로 들어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사학, 즉 ‘레토릭(thetoric)‘을 설명한 말이죠. - P74

 언어를 통해 관계를 만들기도 하고, 남의 지식을 이해하기도 하며, 남을 설득하기도 하고, 내 생각을 미래에 남길 수도 있으니까요. 살아가면서 필요한 앎도, 사람 사이의 관계도 모두 언어에 의해 좌우됩니다. 언어에 대한 앎이 곧 사람에 대한 앎입니다. 또 언어에 대한 앎이 지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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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그녀의 환상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소녀시절에당했던 근친상간으로 인해 그녀는, 세상의 관점에서는 굴욕을 느꼈지만 환상의 세계에서는 고양된 기분이 될 수 있었다.  - P246

흔히 그러하듯, 그녀는 치료를 받는 동안 악마의 모습을 나에게 뒤집어씌웠다. 따라서 나는 자동적으로 죽음의 위협을 받게된 것이었다. 그녀를 정상적인 인간적 존재가 되도록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 P246

그후 나는 정신병 환자의 고통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그들의 내적 체험의 의미있는 현상들을 알게되었기 때문이었다. - P247

꿈의 분석

나는 자주 나의 정신치료법이나 분석방법에 관해 질문을 받는다. 그 질문에 나는 분명한 답변을 할 수는 없다. 치료법은 각각의 사례에 따라 다르다. - P248

사람들이 문헌에서 환자의 저항에 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있어 환자에게 뭔가 강요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치료는 환자로부터 자연스럽게 진전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 P248

물론 의사는 소위 ‘방법‘에 관하여 알고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그는 규격화된 일정한 방식에 매이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론적인 전제는 다만 조심스럽게 적용되어야 한다. 오늘은 그 전제가 타당할지 모르나 아마도 내일은 다른 전제들이 그럴지도 모른다. - P249

결정적인 것은 내가 인간으로서 또 다른 한 인간과 대면하고있다는 점이다. 분석은 일종의 대화이며 여기에 당사자 두 사람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분석가와 환자는 서로 마주보고 앉게된다. 의사도 무언가 할 말이 있고 환자도 마찬가지다. - P249

정신치료에서는 어떤 방법의 적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정신의학 연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P249

마음은 정말 신체보다도 더욱 복잡하고 접근하기 어렵다. 마음은 이를테면 세계의 절반으로, 우리가 그것을 의식할 때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단순히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 정신과의사는 전체 세계에 관여해야 한다. - P250

물론 이른바 ‘작은 정신치료‘라는 것도 있긴 하지만, 본래의 분석에서는 환자와 의사 모두 그 전인격이 대상이 된다. 의사가 자기 자신을 바치지 않고는 치료할 수 없는 사례들이 많이 있다. 치료에서 중요한 고비를 맞았을 때, 결정적인 것은 의사가 자기 자신을 드라마의 한 부분으로 보느냐 아니면 스스로를 자기 권위로씌워버리느냐 하는 것이다. - P251

우리는 의식으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이 이 상황을 어떻게 체험하고 있는가?" 하고 항상 자문해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꿈을이해하도록 노력하고 세심한 데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자기자신을 환자와 마찬가지로 관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정에따라서는 치료 전체가 빗나갈 수도 있다. - P252

모든 치료자는 제3자에 의해 점검을 받아야 한다. 그럼으로써다른 관점도 가지게 된다. 교황 자신도 고해신부를 두고 있다. 나는 분석가들에게 늘 이렇게 충고한다. "고해신부 역할을 해줄 아버지 같은 사람이나 어머니 같은 사람을 가지도록 하시오!" - P253

어떤 사람이 신경증에 걸려 있다면 분석과정을 거쳐야 한다는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 사람이 ‘정상‘이라면 분석을 받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소위 정상성에 대해 놀랄 만한 체험을 했음을 확신있게 말할 수 있다. - P254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대하여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서는, 특히 환자 편에서 전이가 일어난다든지 의사와 환자 간에 다소 무의식적인 동일시가 일어날 때에는 때때로 심령심리학적 성질을 지닌 현상이 야기될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을 자주 경험하는 편이다. 특히 인상깊었던 한 사례는 내가 심인성 우울증을 치료해준 환자의 경우였다. - P259

아내의 태도는 환자에게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큰 부담이 되었다. 그런 압박으로 결혼 1년 만에 그는 다시 우울증에 빠져버렸다. 나는 그럴 가능성을 예상하고 그에게 우울한 기분을 느끼는즉시 나에게 연락하라고 말해두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않았다. - P260

새벽 2시쯤막 잠이 든 것 같은데, 바로 그때에 나는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누군가 방 안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확실히 들었다. 문이 급하게 열린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즉시 불을 켜고 살펴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누가 잘못알고 문을 열었나 싶어 복도도 조사해보았다. 그러나 복도는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이상하군, 누군가 방으로 들어왔는데!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일어난 일을 돌이켜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다. - P260

무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다른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었다.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다. 이 사례에서는 나의 무의식이 내 환자의 상태를 알고 있었던 셈이다. - P261

나의 환자들은 대부분 신자가 아니라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길 잃은 양들이 나를 찾아왔다. 오늘날에도 신자는 교회에서 상징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미사나 세례, 그리스도 본받기, 그리고 다른 많은 체험을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 P264

주로신경증 환자에게 이것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한 사례에서 우리는 결여된 부분을 채워주는 상징들을 무의식이 자율적으로 가져오는지 그렇지 않은지 관찰하는 일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 - P265

나는 그러한 사례를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대하여》라는 저서에서 기술한 적이 있다. - P265

(전략).

나는 그가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 그 공포를 건너뛰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환자가 자기 자신의 길을 감으로써 스스로 책임지기를 원치 않는다면 나는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 일상적인 저항에 지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진부한 가정에 동의할 용의는 없다. 저항은 특히 완강할 때 주의할 필요가 있다. - P266

내적 체험의 모험, 즉 영적인 모험은 많은 사람에게는 친숙하지않다. 정신적인 실재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파문에 해당한다. ‘초자연적‘ 이거나 적어도 ‘역사적으로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경우는 어떠한가? 이러한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흔히 사람들은 갑자기 정신에 대해 예기치않은 깊은 경멸을 나타낸다. - P267

오늘날 정신치료에서 의사 또는 정신치료자는 환자나 환자의감정과 이를테면 ‘함께 가야 한다‘는 요청을 받고 있다. 나는 이것이 항상 옳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많은 경우 의사 편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요구될 때도 있다. - P267

오늘날 소위 신경증 환자들 가운데는 이전 시대라면 신경증,
즉 자기 자신과의 분열을 겪지 않았을 사람이 적지 않다. 그들이신화에 의해 조상들의 세계와 여전히 관련을 맺고 있고, 그리하여 단지 바깥에서 보는 자연이 아닌 실제로 체험하는 자연과 연결되어 있는 그러한 시대와 환경에서 살았다면, 그들은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를 면했을 것이다. 문

우리 시대에 이와 같이 마음의 분열로 희생된 자들은 단지 ‘스스로 택한 신경증 환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표면적인 증상은 자아와 무의식 사이에 벌어져 있는 틈이 메워지는 순간 사라진다. 이러한 분열을 자신에게서 깊이 느끼고 있는 의사는 무의식의 심적 과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심리학자가 빠지기 쉬운 자아팽창의 전형적인 위급상황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경험한 바로는,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들 외에 가장 어렵고 배은망덕한 환자는 소위 지식인들이다. 그들이야말로 한쪽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손이 전혀 모른다

몇몇 피분석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나의 제자가 되었으며 내 생각을 세상에 소개하고 지지해주었다. 그들 중에는 수십 년 동안우정을 보여준 사람들도 있다.

나의 환자들과 피분석자들은 나를 인간적 삶의 진실에 가까이다가가도록 하여, 그것에 관한 본질적인 것들을 체험하지 않을수 없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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