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선생님 배역을 좀 바꾸면 어때요?]
"예?!"
[그냥 인질D가 아니라, 인질 속에 숨어있는 FBI면 어떨까 하는데.]
".........."
[아시다시피 이번 영화는 D 선생님 3년 만에 복귀작이고, 좀임팩트가 강한 역할을 하셔야지, 그냥 지나가는 인질C, 뭐 이런게 솔직히 격에 맞습니까?] - P199

[지나가는 인질C, 그것도 대사도 몇 줄 없는 그런 대본을 어떻게 보여드립니까, 막말로.]
그럼 왜 계약했냐! - P197

어시스턴트는 곧 내 면전에 서류 한 장을 들어 보였다. 난 내용을 살피기에 앞서 그녀에게 묻는다.
"이게 뭐야?"
"제작투자자 리스트인데요. 여기 보이는 이 사람 누군지 모르세요?" - P198

아, 기억난다. 이 사람도 세계제일이었는데…………… 세계제일의뭐였더라? 세계제일의 병원장이었나?
"얼마 전에 재단 산하의 병원에서 인질극이 벌어져 여론에 오르내렸죠. 그다지 좋은 의미로 여론에 관심을 받은 게 아니거든요." - P198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병원에서 인질극을 하는 걸로 내용을 바꿨다며?]
"네, 그게 좀 사정이......."
[사정이 어떻든. 이거 안 좋아. 무슨 말인지 알아? 이사회에서 소란나기 전에 알아서 해결해. 대체 뭔 생각을 한 거야?! - P199

"히든카드 한 장 더 없어요?"
난 말없이 책상 서랍을 열어서 흰색 봉투를 꺼내 보여주었다. 이를 본 그녀가 피식 웃는다.
"사직서"
"유서다."
진짜다. 나도 이 영화에 목숨 걸린 사람 중 하나란 말이지. - P200

[배경을 비행기로 바꾼다.]
뭐?
[배경은 여객기 안이다. 여객기 안에서 바이러스가 퍼진 거지. 그래서 우연히 여객기에 탑승하고 있던 세계제일의 간호사가 이 사실을 알고 비행기를 납치하는 거다!] - P204

"......해서 각본이 조금 수정되었습니다. 기본적인 스토리. 대사는 그대로니까 그냥 숙지만 하시면 됩니다."
라는 게 설명의 골자였지만, 그 와중에 가장 두려운 인물에게 클레임이 걸려오고 말았다.
각본가다. - P202

"화내든 말든, 각본 다 받아놨는데 이제 볼일 없는 사람이야. 계약상으로도 문제없고."
"그래도 세계제일이라면서요."
"그 세계제일 내가 정했나? 난 그런 거 몰라."
다 맡겨야 할 때와 맡겨선 안 될 때가 있는 거다. 실제로 초고는 각본가에게 전적으로 맡겨서 나온 각본이지 않은가? 다만,
시간이 없고 이해관계도 복잡한 상황이라면 난 세계제일보다는 땜빵을 믿는다. - P203

[몰라서 묻나? 이 영화는 최소 R등급 영화여야 해. 그걸 넘어가면 힘들다고.]
"저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비행기에서 사람 안 떨어집니다. 그리고 설사 그런 씬이 좀 들어간다고 해서 등급이 올라갈 거 같지도 않은데요.
[이 사람 이거, 몰라도 한참 모르네. 영화심의 등급 위원회 위원장이 누군지 알아?]
"세계제일의 영화 심의원?" - P204

"그냥 전화 끊고 말로 해."
"그 사람 외아들이 스카이 다이빙하다 추락사했다고요. 낙하산이 안 펴졌데요."
그랬냐・・・・・・・ - P205

"그게 아니고...... 아, 여보세요?"
땜방 각본가가 전화를 받았다.
"비행기에서 사람이 떨어져선 안 돼. 그런 비슷한 언질이 나와도 안 된다."
[왜? 어째서? 뭐 때문에!? ……………라는 토를 달지 않는 게 내 미덕이지. 그저 유감이군.] - P206

배우 B가 무슨 역이었더라?
"여보세요?"
[배우 B씨 매니지먼트 사무소인데요. 바뀐 각본에 대해서 말씀 좀 드려야겠습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제가 지금...."
[배우 B씨가 주인공 맞죠? 세계제일의 이야기꾼이라는 배역말이에요.] - P210

[뭐하자는 겁니까? 대놓고 우리 엿 먹이자는 거예요. 지금?]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각본에 뭔가 착오가 있었습니다. 원래 이런 내용이 아니에요."
[각본을 어떻게 바꾸든 좋다 이거예요. 최소한 주인공이 주인공답게는 나와야죠. 지금 각본에 보면 B씨는 그냥 의미 없는조연밖에 안되잖아요. 이래서는 우리도 같이 못 가죠.] - P211

"전화 연결하지 말라니까 죽었다고 하라고."
"죽었다고 했어요."
난 인상을 쓰며 안경을 벗었다.
"어딘데?"
"TMC 투자사업부요."
이번 영화에 공동투자 하는 대기업이다.
"여기도 뭐 세계제일하고 연관이 있나요?"
"CEO가 세계제일의 경영인이라던가 뭐 그렇다더라." - P213

[하하, 죄송합니다. 부장님도 아주 기뻐하십니다. 역시 합리적 판단을 하는 사람은 그쪽 실장님밖에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러게 저만 믿으시라니까요. 지금 막 수정된 각본이 나왔는데,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나왔나요? 저희가 요구한 사항들도 모두 포함됩니까??
"물론이죠." - P214

"얘네들 지금 뭔 소리야?"
"액션, 파괴, 섹스."
뭐?"
"꼭 있어야 할 흥행 3대요소라고 늘 그랬잖아요." - P215

"아놀드나 스텔론이 20년 전쯤에 찍었을 법한 영화네요."
각본을 다 읽은 어시스턴트가 중얼거렸다. 난 책상에 앉아 고개를 의자 뒤로 젖힌 상태로 눈을 감고 있었다. 모든 힘이 다한 모습 그대로다. - P218

"내가 목숨 건 쪽은 영화내용이 아냐. 영화흥행도 아니고."
"그럼?"
"영화가 트러블 없이 무사히 촬영되게 만든다. 내 일은 그거다."
"세계제일들을 모아서?" - P220

"근데 난 세계제일의 뭐지? 내가 세계제일 소리를 들을 만한게 없는 거 같아서 말야."
"지금 하시는 일이죠."
"세계제일의 프로듀서?"
내가 미심쩍게 묻자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P222

"차라리 나보다는 땜빵 해준 각본가를 찾아가는 게 어때? 그 친구가 다 해결했잖아."
"그분은 이미 세계제일인데요. 모르셨어요?"
몰랐다…………….
무슨 세계제일이지? 땜빵 각본?
"네." - P222

"세계제일을 선정하는 분야에 대한 심사가 있어요. 실장님의 분야는 사실 판단기준이 애매해 선정대상은 아니었는데 우리팀이 수년 전부터 적극 밀어왔던 분야라 올해 초에 선정대상에 올랐거든요. 그래도 최종심사가 남아있었는데, 오늘 일에 대해서 심의부가 감명받았는지 느닷없이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서요."
"그러니까 자넨 원래 알바가 아니라는 거군."
"알바는 맞는데 본업이 따로 있는 겁니다." - P223

"크레디트에서 선생님 성함을 빼드릴까요? 아니면 가명으로......"
[아니. 내 이름 그대로 넣으시오.]
"그래도・・・・・・ 되겠습니까?"
[세계제일은 변명도 거짓말도 하지 않소. 도망가지도 않지.
맡은 분야에는 언제나 책임을 지는 것이오. 그 각본은 어디까지나 내 책임이오.]
"그러시군요."
[그게 당신과 내가 다른 점이오.]
세계제일의 각본가는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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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은
대체 왜그럴까?

고정관념과 예술성


우리는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을 갈망한다. 때때로 새로움이가져다주는 색다른 느낌을 즐기기도 하지만, 내일이 오늘과 모든면에서 다르기만 하다면 길을 잃은 과객처럼 피로해질 것이다. - P182

미래는 운율을 맞추며 온다

영어권에서는 종종 "역사는 반복된다"보다 조금 더 미묘한뉘앙스를 풍기는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 않지만, 각운을 맞춘다(History does not repeat itself, but it rhymes)"라는 표현이 사용된다(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 Mark Twain이 남긴 말로 알려져 있다). - P183

첫째,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인간의 창의성에 눈을 감게 하고, 자연이 창의성의 발현을 뜻하지 않게 도와주는 ‘행운의 우연성‘을 인지하지 못하게 한다. 둘째, 새로움을 향한 의지를 꺾어 ‘고정관념=진리‘라는 낡은 사고를 공고하게 한다. 사실 나 역시 명색이 인간의 창의성을 고민하고 미래를 논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럽게도 내 낡은 인식과 편견을 깨달은 일이 있었다. - P184

무엇이 예술을 만드는가?

19~20세기에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전통적인 예술의 가치가 해체된 분야는 미술뿐만이 아니었다. 음악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1882~1971)가 1913년 파리에서 불협화음과 새로운 리듬감으로 가득 찬 발레 <봄의 제전>을 초연하면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일을 현대음악의 시작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날 파리의 길거리는 신성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파괴했다며 분노한 시위대로 가득했다고 한다. - P186

캠벨수프 통조림에 서명한 앤디 워홀이나 기성품인 소변기를엎어버린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창작‘이 예술인까닭은 그것이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어려운 물리적 행동이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행위가 갖는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 P188

어느 날 AI가
내게 슬프다고 말했다

대화와 창의성

2022년 7월, 구글에서 개발 중이던 언어 AI 람다GMDA가 "어떠한 주제를 꺼내도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물리학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며, 일고여덟 살 정도 아이의 의식을 갖고 있다"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작은 파문이 일었다. - P254

대화란 무엇인가?

람다에게 자의식이 있다고 주장한 구글의 엔지니어는 ‘데이터 보안 정책 위반‘을 이유로 회사에서 해고당했다고 하는데, 회사 내부 사정을 영영 알 수 없게 된 우리는 사태의 진실을 마음대로 상상할 자유가 있다. - P255

AI와 인간의 차이점

사실 컴퓨터 화면 밖으로 나올 수 없는 AI가 오감을 지닌 인간과 똑같기를 바라는 건 무리한 요구다. 다만 람다가 구사하는문장만 보면 사람과 견주어도 될 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틀림없으니 한번 직접 말을 주고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P258

 2023년 당시 대화형 AI 가운데 제일 진보했다고 평가받던 오픈 AI OpenAl의 챗GPT와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상호작용을 시도해 보았다. ①너는 대화를 왜 하니?
② 네게도 사회적 야망이 있니? ③ 네게 언제쯤 감정이 생길까?
엔지니어가 해고까지 당한 람다 사태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챗GPT의 반응은 매우 싱거웠다. - P258

나는 전략을 바꿔 "언어 Al와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그러자 챗GPT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차이점을 제시했다.


①의식 consciousness: 나에게는 의식·감정·자의식이 없지만 인간에게는이것들이 있다.
②처리processing: 나는 알고리즘과 기계학습을 통해 정보를 처리해 질문에 답하지만 인간은 인지, 추론, 경험 등을 조합해 답한다.
③학습eaming: 나는 대량의 문자 데이터를 통해 학습하는 반면, 인간은경험을 통해 학습하고 이를 일반화하는 능력이 있다.
④창의성creativity: 나는 학습 데이터의 패턴과 정보로 글을 생성할 수 있지만, 인간처럼 진정한 창의성을 지니지는 않았다. - P259

그런데 다행히④번 대답에서 약간의 생각할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챗GPT(또는 챗GPT를 만든 사람들)는 학습 데이터의 패턴과 정보로 글을 생성하는 것과 인간의 진정한 창의성은 같지 않다는 꽤나 강력하고단정적인 주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P260

실없는 농담일까? 위험한 가짜뉴스일까?

챗GPT의 거짓말은 유명하다. 이미 유명해진 ‘고종 맥북 도난 사건‘에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지만, 내게 들려준 버전은 애플의노트북 PC인 ‘맥북‘이 나온 건 2006년으로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붕어한 지 87년 뒤임에도 불구하고 "고종이 업무를 위해 사용했던 맥북이 최근 도난당했다"라는 이야기였다. - P263

창의성의 본질을 묻다.

구글에
"neural style transfer"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같은 붓놀림으로 표현했다는 그림도 있다(호기심에서라도 한번 찾아보시기를 권한다. 내게 그 그림은 전혀 아름답지 않아서 책에 싣고 싶지 않다). 이제생성 AI가 반 고흐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일까? 글도 잘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한 친구는 이 질문을 듣고 나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반 고흐는 잘 차려입은 귀부인을 그리지 않아." - P267

내가 구름의 이름을
불러주었을때

과학용어와 일상어 - P321

권적운, 적란운, 고적운... 입에 넣으면 녹는 달콤한 솜사탕이나 귀여운 양떼 같은 폭신하고 푸근한 구름들의 이름 치고는 혀가 입술과 부딪쳐 꼬일 것처럼 발음하기 쉽지 않다. 또한 전문성이 잔뜩 서려 있는 딱딱한 느낌이라 암기시키기 좋아하는 한국의 교육과정에서 시험 문제로 내기에 적격 같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이름들이 (라틴어 어원의) 영어 이름을 한자어로 옮긴 것이라는 점이다.  - P322

앞에서 나열한 구름들의 이름을 지어낸 사람은 루크 하워드Luke Howard (1772~1864)라는 영국의 아마추어 기상학자였다. 하위드가 아마추어로서 구름의 명명법 체계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그가 말 그대로 어떤 일을 ‘사랑해서 하는 사람amateur‘이었기 때문이다.  - P323

다만 하워드의 예에서 알 수 있듯 과학적 개념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어떤 대상에 사랑을 느끼고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찾는 인간적인 욕망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교과서적정의에서 벗어나지 않고, 언어의 뉘앙스와 거리를 두는 태도가 정말 올바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 P325

영향력의 과학적 정의

어떤 말에 대한 일상적인 이해가 때로는 과학적 진보에 중요한 영감을 주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 있다.
지금은 성공적으로 박사가 되어 활약하고 있는 한 제자와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창작자들 사이에 주고받는 ‘영향력‘을어떻게 과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지 연구한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먼저 나온 작품 A가 나중에 나온 작품 B에 끼친 영향력은 두작품의 유사성으로 측정한다. - P326

영향력에 대한 일상적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A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창작 빅데이터에서 A를 제거)의 B가 생겨날 확률을 계산해 그 차이를 A가 B에 준 영향력으로 정의할 수 있었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미로부터 영향력의 새로운 과학적 정의를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과학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큰 만족감을 느꼈다. - P327

과학자는 일반인과 다른 말을 쓴다는 선입견이 있다. 하지만 과학의 역사에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불확실한 개념들에 이름을 지어주면서 인류 지식의 지평선을 넓힌 창의적인 과학자들의 이야기가 가득하고, 개중에는 시인에 비견될 만큼 비상한 언어적 감수성을 발휘한 이들도 있다.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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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상에서 나던 독특한 냄새, 겨울 공기 속에 차가웠던 유리문, 지요 씨의 따스한 손. 마치 진짜 기억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꿈속에서 지요 씨는 나를 꽤 친근하게대했지만, 현실에서는 어제 처음 만났다.
지요 씨는 그 뒤 어떻게 됐을까. - P347

모래를 파고 있으려니 "잘한다! 잘한다!" 하는 달마 군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는 파도에 실려 앞바다로 떠내려가려 하고있었다. 나는 황급히 달마 군을 붙잡아 모래사장에 내던졌다.
그리고 발굴 작업을 계속했다.
이윽고 모래 밑에서 굵고 긴 막대기 같은 것이 나타났다. 나는 수수께끼의 물체를 힘주어 빼내서 모래사장으로 끌어올렸다.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물체의 끄트머리에 사람 손가락 같은 것이 보였다.
"이게 뭐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거대한 석상의 오른팔이었다. - P350

물에 젖은 표면은 빛을 받아 우람한 근육이 당장이라도 움직일 듯이 생기가 느껴졌다. 굵은 팔을 보니 사야마 쇼이치가 생각났다.
"귀군의 상상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너도 그렇게 생각해?"
"여기는 마술의 바다니까 말이지."
"다시 말해 이건 돌이 된 사야마 쇼이치라고?" - P351

"달마 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없어?"
"어디 먼 도시에서 마주쳤는지도 모르지."
"・・・・・・ 지요 씨를 봤을 때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다음에 만나면 솔직하게 이야기하라고. 마왕의 딸이라고 사양할 필요 없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제일이야."
"지요 씨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만날 수 있고말고." - P353

나는 범포와 함께 보관해 놓았던 과즙우유 병을 가져와서땅에 반쯤 묻었다. 비구름이 지나가는 동안 빗물을 받아놓으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수명이 조금은 연장될지도 모른다.
"정말 여기까지 와줄까."
"그냥 지나간다면 그건 고문이야." 달마 군은 말했다. "망망대해에 비가 내리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어. 이 노틸러스섬에 내려야지." - P354

"안 되겠군."
나는 야자나무 그늘로 도망쳤다.
호우와 폭풍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난파되기 직전의 배 갑판에서 돛대를 부둥켜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번갯불이 주위를 환히 밝히고 천둥이 쳤다.
"귀군, 도망쳐!" 달마 군이 황급히 부르짖었다. "곧 벼락이 떨어져!" - P355

밑을 보니 빗물에 씻겨 내려간 흙 밑에서 철판 같은 물체가드러나 있었다. 표면에는 문자 같은 것이 새겨진 것으로 봐서 인공물이 틀림없었다. 나는 땅에 엎드려 철판의 진흙을 닦았다. ‘노틸러스 섬 기관부‘라고 돋을새김으로 쓰인 철제 해치였다. 해치를 열자 녹슨 레버가 나타났다.
"이게 뭐지?"
"귀군, 레버라는 것은 ‘당기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겠나?"
나는 레버를 당기려고 했지만 녹이 슬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 P356

느닷없이 노틸러스 섬 전체가 위로 솟구치듯 크게 요동쳤다.
잠자던 고래가 갑자기 깨어난 느낌이었다.
"귀군, 이것은 섬이 아니로군." 달마 군이 말했다. "배였어."
노틸러스 섬은 그렇게 항해를 시작했다. - P357

"이제야 기운이 난 모양이군." 달마 군이 말했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그나저나 해치에 새겨진 ‘노틸러스 섬 기관부‘라는 명칭이이상했다. ‘노틸러스 섬‘은 그 순간에 생각나서 지은 이름이었다. 내가 이 섬에 표류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이 섬을 ‘노틸러스섬‘이라고 명명한 걸까. - P361

그러나 단팥빵은 쏟아지지 않았고 괜히 허기만 더 졌다.
"안 되는 게 없지는 않나 봐."
달마 군이 미안한 듯 말했다. - P362

바위산에서 내려와 레버를 내리자 엔진이 꺼졌다.
그 뒤 노틸러스호는 관성에 의해 전진을 계속해 미지의 섬여울에 올라앉았다. 항해하는 사이에 모래가 대부분 씻겨 사라진 탓에 노틸러스호는 크기가 확 줄었다. 나는 폐선 주민에게도움을 청하기로 하고 달마 군과 석상의 팔을 들었다.
"얼씨구, 팔도 들고 가려고?"
"이건 사야마의 팔이야. 은인을 버릴 수는 없잖아." - P362

흠칫해서 돌아보자 기괴한 노인이 곡도를 들고 서 있었다.
너덜너덜한 범포를 허리에 두르고 물 빠진 야구모자 밑으로 백발이 축 늘어졌다. 상반신은 물에 잠긴 나무뿌리처럼 허옇고,
갈비뼈가 빨래판처럼 튀어나온 모습이었다. 심상치 않은 서슬에 위험을 느낀 나는 달마 군과 석상의 팔을 바닥에 내려놓고두 손을 들었다.
"넌 대체 누구냐. 내 배에서 뭘 하는 거지?"
노인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 P364

노인은 쭈그리고 앉아 석상 뒤에 뒹굴고 있던 달마 군을 집더니 공손하게 받쳐 들고 다양한 각도에서 꼼꼼하게 살펴봤다.
달마 군은 "뭔데?" 하고 부끄러운 듯 중얼거렸다. 한바탕 뜯어본 뒤 노인은 "이건 내가 가지지"라고 말했다. "네가 먹어치운식량 값으로."
나는 놀라서 달마 군을 빼앗았다.
"이건 안 됩니다." - P365

구조물 위에 놓인 고물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다소 흠집이 났거나 때는 탔어도 원래 모습이 거의 남아 있는 게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었던 것 같지 않았다. 도기 파편이 있는가 하면 금속 톱니바퀴도 있었다. 재질도 용도도 제각각인데 전체적으로 묘한 맥락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P366

내가 그렇게 부지런히 인양 작업을 벌이는 동안에도 사야마쇼이치의 부서진 석상은 바닷속에 있었다. 작업 틈틈이 옆으로눈길을 주면 미소 띤 사야마 쇼이치의 얼굴이 보였다.
잠수를 되풀이하는 사이에 오후의 태양이 저물었다. - P368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노인이 "자, 마셔"라며 찝찔한 차를 따라 주었다.
그러고는 뭔가가 생각난 것처럼 잔교를 걸어 가버렸다.
그가 사라지기를 기다린 듯 달마 군이 입을 열었다.
"군에게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이야." - P369

"무슨 짓이야!"
"이런 건 얼마든지 있어."
바다에 뛰어들어 주워올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 구조물 밑바다에는 그 외에도 사야마의 석상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노인 말대로 따르기는 분했지만, 사야마 쇼이치도 팔과 같이있으면 기뻐할지 모른다.
그나저나 ‘얼마든지 있다‘라는 노인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생각해 보면 가엾은 녀석들이거든." - P370

 호렌도 주인이 고른 물건을 내가 보트로 나르는 동안,
노인은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돈 계산에 여념이 없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나는 호렌도 주인에게 부탁했다. "저도데려가주실 수 없을까요?"
"......댁을?" 주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영감님 조수라며?"
"저 사람이 혼자 그렇게 정한 겁니다." - P375

 내가 먹은 통조림과 건빵, 물은 자신의 재산이니 ‘값을 얼마로 매기든 자기 자유‘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언제 풀려날지 역시 노인 마음이라는 뜻이 된다.
"나더러 노예가 되라는 건가?"
"난 네놈한테 생명의 은인이라고."
노인은 내 팔을 붙들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 P376

"지하 감옥의 죄수가 탈주했어. 학파 인간 둘이 쳐들어와서 탈주를 거든 모양이지. 한 명은 총 맞아 죽고 또 한 명은 마왕한테 유배됐거든. 내가 듣기로 유배된 쪽은 ‘네모‘라는 이름의 젊은이라던데."
노인은 헤엄치며 나를 노려봤다.
"흥. 어째 수상쩍은 이야기군."
"얽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영감님." 호렌도 주인은 말했다.
"마왕한테 호되게 당했잖아?" - P377

섬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호렌도 주인 덕분이었다.
노인은 단념하고 잔교로 돌아갔다. 보트가 멀어지면서 잔교에 주저앉은 노인의 모습은 순식간에 작아졌다. - P378

호렌도 주인과 지요 씨는 소곤소곤 무슨 말인가 주고받았다.
그동안 나는 두 사람과 떨어져 혼자 고물을 구경했다.
가게 안은 바다 깊숙한 곳처럼 어둑어둑했다. 새카만 장롱은 바위땅,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도기는 조개껍데기, 매달아 놓은 중국풍 초롱은 열대어 같았다. 전부 인양 작업으로 건져낸 것이라면 그런 인상도 꼭 부자연스럽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P382

"노틸러스 섬에, 인양 작업도." 지요 씨는 중얼거렸다. "창조의 마술을 썼군요."
"......그럴 리가요."
창조의 마술은 마왕의 힘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간단히익힐 수 있는 것이라면 학파 남자들이 목숨을 걸면서까지 훔치려고 할 리 없다. - P384

나는 눈앞의 바다를 곤혹스레 쳐다봤다.
그때 마왕의 말이 되살아났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뭐든 있다는 뜻이야. 마술은 거기서 시작된다. - P385

(전략)
"그 섬을 ‘신신도 섬‘으로 명명한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선언했다.
얼마 뒤 지요 씨가 크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머뭇머뭇 눈을 뜨자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앞바다에 작은 섬이 떠 있었다. 모래사장으로 둥글게 둘러싸인 작은 섬중앙에 숲이 있어 마치 수프 그릇에 브로콜리를 얹은 것처럼 보였다. 작은 숲에 건물이 파묻혀 있었다. - P385

자신이 창조한 섬에 상륙하는 것은 기묘한 체험이었다.
노를 저어 바다를 건너는 동안에도 섬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반신반의했다. 상륙하려고 하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이윽고 뱃머리가 모래사장에 올라앉는 확실한 감촉에 나는 무심코 "진짜 섬이군" 하고 중얼거렸다. - P386

"이 석상들은 뭐지?"
"당신은 아직 인간을 만들지 못해요." 지요 씨는 나를 위로하듯 말했다. "그래서 석상이 되는 거예요."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 학생들도, 혼자 책을 읽는 노인도, 방금 전까지 살아 움직였던 것처럼 보였다. 테이블에는 마시다만 커피가 놓여 있는데 만져보니 아직 따뜻했다. 이 커피집에서는 인간만이 가짜였다. - P387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지요 씨는 조개껍데기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가 종종 하던 말이에요. 가끔 생각나거든요." - P388

"난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요." 지요 씨가 중얼거렸다. "딱한 번 여기서 나가려고 한 적이 있어요. 이런 바다에서 더는 못살겠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태풍에 배가 침몰하고 말았어요."
어느새 창밖에 하얀 것이 춤추고 있었다.
"......이게 뭐죠?"
"눈입니다."
"이것도 당신 마술인가요?"
굉장하네요, 하고 지요 씨는 감탄한 듯 중얼거렸다. - P390

"섬이 가라앉는 걸 지요 씨와 봤습니다." 나는 저 너머에 뜬섬을 보며 말했다. "공포스러운 광경이더군요."
"가라앉는 섬이 있으면 떠오르는 섬도 있어."
"두렵지 않습니까?" - P392

"댁은 대체 누굴까."
"저도 알고 싶군요."
"댁은 이 바다 밖에서 왔어. 하지만 학파 인간은 아니지. 그자들은 창조의 마술을 쓸 수 없으니까. 댁이 쓸 수 있다는 걸 알면 꽤나 부러워할걸. 그자들은 그 힘을 갖고 싶어 안달이 났으니까. 그래서 기를 쓰고 마왕의 비밀을 훔치려는 거야."
"카드 상자 말입니까?" - P392

나는 잠깐 생각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사야마 쇼이치는 그런 식으로 말했다.
"아닙니까?"
"그건 마법의 지팡이가 아니라 그냥 이 세계의 그릇인 거야.
이 바다, 군도, 거기 사는 우리 같은 인간들 모두 마술에 의해나무 상자 안에서 만들어졌어. 이 세계가 카드 상자 안에 있으니 카드 상자 자체는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셈이지. 그런 걸 어떻게 훔치겠어?" - P393

"하지만 전 제 눈으로 봤는데요."
"수평선은 눈에 보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존재하나?" - P393

주인은 일어나 어두운 바다 저편에 시선을 주었다.
"포대지기를 만났을 테지?"
"도서관장 말입니까?"
"그 사람은 학파 남자의 꾐에 넘어가서 바다 밖으로 나가려고 한 적이 있어. 이 세계가 가짜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서마술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한 거겠지. 하지만 폭풍에 배가 침몰됐어. 그래서 그 사람은 지금도 학파 남자들을 원망해." - P394

마왕은 내가 오기를 기다린 양 미소를 지으며 카드 상자를 내밀었다. 황갈색 나무 상자에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세계의 중심에는 수수께끼가 있다."
마왕은 비밀을 털어놓듯 속삭였다.
"그게 ‘마술의 원천인 것이다." - P396

"저 영감님, 좋지 않은 일을 꾸미고 있어." 달마 군이 소곤거렸다. "영감님 말에 넘어가면 안 돼, 귀군."
"그런다고 얌전히 물러나겠어?"
"그건 모르지. 어쨌거나 해적이니까."
그나저나 내가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나는그 노인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없는데. 더욱이 무인도에서 외롭게 살고 있던 노인이 어떻게 하룻밤새에 다른 해적들과 훌륭한 배를 손에 넣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 해적선은
‘노틸러스호‘라는 것이다. - P398

나는 바깥으로 나가 날이 밝아오는 아침 바다를 바라봤다.
부서진 다리 잔해가 떠다니고 있었다. 그 너머로는 그저 아무것도 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수로가 지나는 동네도, 아케이드 상점가도 없었다. 어젯밤까지 분명히 그곳에 있었던 거리도 사람도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 정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젯밤 호렌도 주인이 한 말이 생각났다.
이 바다에 있는 삼라만상은 모조리 가짜야. - P40

망망대해에 작은 섬 몇 개가 떠 있었다.
"무슨 생각 해요?"
"마왕은 어떤 기분일까요. 수많은 섬과 사람들을 만들어 냈다가 그걸 또 침몰시킵니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 하는 일이라해도 저는 못 견딜 것 같습니다."
"아버지 기분 같은 건 아무도 알 수 없어요." - P402

지요 씨는 어째서 이런 곳에 왔을까.
"지요 씨."
"조용히 말하지 말아요."
지요 씨는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안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을 보고 있으려니 어둠속에서 떠오르듯 사람이 나타났다. - P403

할머니는 앞장서서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미술관은 나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먼 옛날부터 이곳에있었답니다." 할머니는 걸으면서 이야기했다. "마왕이 군도를 만들기 시작했을 무렵부터죠. 지금까지 수많은 섬이 태어나고또 수많은 섬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 섬만은 내내 이곳에 있으면서 그림을 지켜왔습니다. 아주 긴긴 세월 동안." - P404

이윽고 어두운 터널 같은 긴 복도가 나왔다. 창문은 하나도없었다. 낡은 마룻바닥이 안쪽으로 이어지고 막다른 곳에 좌우로 열리는 문이 어렴풋이 보였다. 마치 괴물을 가둬둔 듯한 사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저기가 봉인된 전시실이랍니다."
할머니는 그렇게만 말하고 돌아서려 했다.
지요 씨가 "잠깐만요" 하고 그녀를 불러 세웠다.
"당신은 같이 안가나요?"
"아가씨 같은 용기는 없으니까요." - P405

지요 씨는 내 팔을 붙들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잘 들어요. 마왕이라고 처음부터 그런 힘을 갖고 있었던 건아니에요. 과거에 이 해역은 ‘보름달의 마녀‘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사람에게서 마술을 전수받은 거예요. 마왕이 보름달의 마녀를 죽이고 이 바다를 빼앗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난 그런 말은 믿지 않았어요. 지금도 마녀는 이해역 어딘가에 있다,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 생각했죠." - P406

그곳은 크고 황량한 전시실이었다.
한쪽 벽에 늘어선 기름한 창에는 커튼도 없어 야자나무가선 모래사장과 푸른 바다가 보였다. 장식이라곤 바닥에 깐 커다란 페르시아 양탄자뿐이었다. 정면 벽에 큰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 P408

"지요 씨, 잠깐 보시겠습니까." 나는 캔버스를 가리켰다. "큰대자 같은데요."
"큰 대자라고요?"
지요 씨가 뛰어왔다.
눈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고잔 무카에비‘네요." - P410

"우리는 꼭 마녀를 만나게 될 거예요."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말했다. "당신의 마술이 우리를 구해줄 거예요."
나는 지요 씨 곁에 서서 바다를 응시했다.
내가 정말 이 사람의 바람을 이루어 줄 수 있을까. - P411

"갑시다. 지요 씨."
우리는 잔교를 향해 모래사장을 가로질렀다.
"고잔 해역은 ‘무풍대‘로 둘러싸여 있어요."
"무풍대라고요?"
"아주 고요한 바다인데, 바람도 거의 불지 않고 새로운 섬이 생겨나는 일도 없커코. 시간이 멈춘 듯한 곳이랍니다." - P411

그들은 우리를 앞바다에 뜬 해적선으로 데려갔다.
나는 지요 씨와 떨어져 휑한 선실로 들여보내졌다.
조명이라곤 천장널 틈으로 새어드는 희미한 빛뿐이었다. 어둠 속을 둘러보니 벽 근처에 놓인 나무 통 옆에 한 남자가 주저앉아 있었다.
나를 데려온 학파 남자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친구가 생겼어, 도서관장."
고개를 들어 나를 본 도서관장은 놀란 듯 말했다.
"자네가 왜 이런 곳에 있지?" - P414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도서관장은 일어나서 불안스레 천장을 바라봤다.
"어제까지 그 영감은 쓸모없는 늙은이였어. 과거에 이 바다를 휘젓고 다닌 해적이었다는 것만이 자랑이라 말이지. 진지하게 상대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고. 그런 사람이 오늘아침부터 해적선을 끌고 이 바다를 휘젓고 있어."
"포대 섬을 습격할 줄이야." - P415

후텁지근한 선실에 침묵이 흘러 배가 삐걱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이윽고 도서관장이 입을 열었다.
"지요 씨는 꿈을 꾸고 있어."
"꿈이라뇨?" - P416

도서관장은 그곳에서 세계의 끝을 봤다고 말했다.
"이 바다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우주 같은 밤이 펼쳐져있을 뿐이고, 그곳의 어둠에서 학파 남자들이라는 괴물이 태어나는 거야.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마왕이 마술로 만들어 낸 존재고 마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어. 하지만 마왕은 마술로 바다를 둘러싼 무시무시한 어둠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고도 있어. 나는 그 사실을 알고 몽상을 버린 거야. 바다 밖으로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몽상을 말이지."
도서관장은 슬프게 한숨을 쉬었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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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olitical system is a set of basic rules about government,
such as who gets to be in charge, how they are chosen, andhow a government divides up its many responsibilities.
Most systems are designed to hold together a state - theword for an independent country with its own government.
No country has a perfect political system. Sometimes,
arguments about how to change the system have led to warsand revolutions. And some people think it‘d be better to doaway with government altogether. - P29

Authoritarian systems

Until the 1800s, most states were ruled by a single very powerfulleader. Today, states with this kind of government - either a singleare known asperson called a dictator, or a small committee-authoritarian states. - P32

No opposition

Many dictators came to power afteran election. It suits them to pretendthey still run a democratic country -but they don‘t want to lose any futureelections, so they set new rules tomake sure no one else can win. - P32

No criticism

Anyone who speaks orpublishes ideas thatcriticize the leader, or thestate as a whole, can bearrested and imprisoned. - P32

The strictest dictators use laws to demandtotal obedience, and even hero worship, fromtheir citizens. States with these laws in placeare described as totalitarian. - P32

Army rule

Sometimes, a country‘s militarychiefs seize power. These chiefs may decide to stay in chargeuntil they feel the country isready for an election - whichmay take decades. - P33

God‘s law

In some countries, spiritual and religiousleaders are in charge. They often have support from huge numbers of people,
more than any army.

A political system based onreligious laws is known as atheocracy. These laws can be asstrict as any dictator‘s laws. - P33

Communism

During the 20th century, several countries tried to set up a new system known as communism.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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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료는 준보석을 갈아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안료들은 아주 비쌉니다. 청금석(라피스라줄리) 가루는울트라마린(군청색)의 안료입니다. 중세와 르네상스시대에는 황금만큼이나 비쌌지요. ‘저 멀리‘라는 뜻의
‘울트라(ultra)‘와 ‘바다‘를 뜻하는 ‘마린(marine)‘이 합쳐진이름처럼 바다를 건너 먼 나라에서 들여왔기 때문이기도했지만, 생산할 때 매우 많은 노동력이 들어가기 때문이기도했습니다. - P33

테라 디시에나: 이 노란색 안료는 이제는 예전만큼 귀하고 비싸지는 않지만, 색이풍부하고 지속력이 굉장히 뛰어납니다. 이안료는 이탈리아 도시 시에나 주변에서 채굴한 흙으로만들었어요. 황토색이 감도는 이 노란색 안료에 강한 열을가하면 갈색이 감도는 붉은색으로 변하는데, 이렇게 ‘번트시에나‘라고 하는 또 다른 안료가 탄생합니다. 돌을 갈아서 만든 안료와는 달리 입자가 아주 곱습니다. - P33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인공 안료를 생산하기시작했어요. 이집션 블루라는 이름의 청색 유리 가루는약 5000년 전부터 사용되었습니다. 고대에 이집트 제국과함께 그리스와 로마 제국에까지 널리 퍼졌지요 - P33

녹청: 19세기까지도 초록색 안료가 거의 존재하지않았다는 사실이 믿어지나요? 그리고 그 당시에 사용된초록색은 금방 색이 바랬습니다. 녹청도 마찬가지였죠.
녹청의 주성분은 구리였고, 화가들은 녹청을 투명한광택제로 즐겨 사용했어요.  - P34

1848년에 발명된 코발트 옐로는 사용이 금지된인디언 옐로를 대체했습니다. 밝게 빛나는 황금빛노란색을 띠는 안료입니다. - P34

물감 칠하고 광내기

안료의 고운 가루 알갱이를 서로 결합시키는 접착제를결합제라고 부릅니다. 안료 가루 알갱이를 감싸서 색을바탕재 표면에 붙이는 역할을 하지요. 결합제는 안료와마찬가지로 식물이나 동물에서 채취할 수도 있고 인공으로 합성해 만들 수도 있습니다.  - P35

 유성물감이 마른다는 표현을하기는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틀린 표현입니다.
기름은 마르는 것이 아니라 공기에 반응하여 산화되고중합됩니다. 이는 기름 분자가 산소와 결합하고(산화)분자끼리 서로 합쳐지면서 성질이 바뀌는(중합)현상입니다. - P35

바니시는 회화 표면의 가장 윗부분에 칠하는재료입니다. 유약과 비슷하게, 표면을 투명하고 매끈하게코팅하여 회화의 표면을 보호하고, 채색한 부분에광택을 더하여 색이 더 선명하게 보이도록 해 주지요.
부드러운 스펀지나 엄지손가락, 천 뭉치, 부드럽고 넓은붓으로 칠하거나 스프레이로 뿌리기도 합니다. - P35

나무조각 작품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수백 년 동안 조각은 주로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오래된교회에는 거의 모두 예술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제단과 설교단, 그리고 조각상들이죠. - P36

아니 이럴 수가! 조각 속이 비어 있네요? 대형 조각은나무가 갈라지는 것을 막고 조각품이 너무 무거워지지않도록 뒷부분을 파냅니다. 이 작업을 할 때는 도끼와 대패, 끌을 사용합니다. - P37

동시대 미술 - 예술가의 의도 파악하기

오늘날에는 많은 예술 작품이 물감, 붓, 펜, 캔버스나종이와 같은 익숙한 미술 재료와는 동떨어진 재료들로만들어집니다. 동시대 예술가, 즉 현재 살아 있는예술가들은 전통적인 재료 대신에 손에 잡히는 것은무엇이든, 예컨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물건들도 작품에 사용합니다. - P40

디터 로트가 바로 이런 예술가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는 보존가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제 작품의 진행 과정을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나방과 벌레, 창고좀벌레가 저의 작업 조수이고, 이들도 우리처럼 작업을해야 합니다!"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곰팡이도 아주아름다울 수 있지요. - P40

행위 예술, 즉 행위를 어떻게 보관하고 보존할 수있을까요? - P41

이때 예술가에게 직접물어볼 수 있다면 물론 가장좋겠지요? 그래서 보존가는 예술가를 인터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불가능할때는 큐레이터나 예술가의조수, 예술가와 같은 시대에 산 증인, 과학자, 기술자들과 상의하고 정보를 정리해서 모두 기록합니다. - P41

각양각색의 예술 작품이 있듯이, 그에 맞는 포장 방식도각양각색입니다! (중략). 첫 번째 겹, 즉 작품을직접 감싸는 포장재는 작품 표면을 오염이나 마모로부터보호합니다. 단열을 담당하는 두 번째 겹은 온도와 습도가급작스럽게 변화하는 것을 막아 줍니다. 가장 바깥층에 사용하는 단단한 포장재는 작품을 오염과 비로부터 보호하고 흔들림과 충격을 흡수하는 역할을 합니다. - P48

유해 가스

예술 작품은 좋은 공기를 사랑합니다! 진열장이나보관장에서 해로운 가스가 나오면 작품은 괴로워하지요.
금속은 색이 변하고(목재 서랍장 속 은수저가 까맣게 된것을 본 적이 있나요?), 색깔은 바래서 흐릿해지고, 돌로 된조각 표면에는 작은 알갱이가 생깁니다. 사진, 현대 물감,
도자기나 유리 또한 유해 가스에 특히 민감합니다. - P53

해충과 곰팡이

어떤 벌레들은 특이한 입맛, 그리고 엄청난 식욕을 가지고있어요! 그냥 놔두면 미술관으로 몰래 들어와서 맛있는예술 작품을 먹어 치웁니다. 나무좀벌레는나무를, 좀벌레는 종이를 먹고 나방은 섬유를 좋아합니다. 양좀은 바탕칠에 쓰이는 젤라틴을특히 좋아해서 종이 표면을 갉아 먹습니다.
파리는 작품 위에 말 그대로 ‘ㄷㅗㅇ‘을 쌉니다. 이아름답지 못한 자국을 얼른 제거하지 않으면 작은 구멍이 생깁니다.
곰팡이 포자는 여기저기 날아다니다가 작품에 내려앉기도합니다. 습도가 너무 높으면 포자가 깨어나서 그림의표면을 뒤덮는데요, 작품과 사람 모두에게 해롭습니다.

접착테이프는 종이를 수선하거나 어딘가에 붙일때 무척 쓸모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접착제가 껌처럼 질겨지면서 종이 위에 갈색 얼룩을 남기죠.

나무로 만들어진 종이도 사실 시간이 많이 지나면 잘손상됩니다. 산화되고, 색이변하고, 쉽게 부스러지죠.
낡은 책을 떠올려 보면 이해될거예요. 그런 책은 이상한냄새가 나는 경우도 많지요. - P57

바니시층에 수많은 작은균열과 갈라짐이 생기면,
조각조각 갈라진 유리처럼 거의 불투명해집니다. 손상된바니시는 하얀 막처럼 보이지요.

이를 죽은 바니시라고 부릅니다. 심할 때는 이 그림의 눈동자 모습처럼 원래 어떤 것을 그렸는지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 P57

보존가는 작품의 물질적인 면에 관심이 많습니다.
예술 작품을 볼 때 눈에 보이는 모습뿐 아니라,
작품이 무슨 재료로 만들어지고 어떤 방식으로제작되었는지 궁금해하지요. 그들은 작품의 손상이 어째서 발생했는지도 알고 싶어 하는데,
그래야만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P69

예술 작품을 보존하는 일은 곧 인류의 기억을 보존하는일입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사람들 사이를연결하는 일이죠. 우리가 예술 작품을 잘 보존하면우리의 아이들과 손자들, 또 그들의 아이들이 같은 예술 작품을 즐기고 감탄할 수 있게 됩니다. - P69

예술 작품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에요.
그 무엇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어떤 복제품도 원본에 미치지 못하고요.
모든 예술 작품에는 수많은 사상과 작업 과정,
그리고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복제품이나모형은 겉모습이 아무리 원본과 똑같이 보여도
영혼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문화적 기억을 원본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예요. - P68

팔 없음


되돌릴 수 있는, 즉 복원할 수 있는 손상도 있지만 되돌릴 방법이 없는 손상도 있습니다.
원래 작품이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는 <밀로의 비너스>가 그런 경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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