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상에서 나던 독특한 냄새, 겨울 공기 속에 차가웠던 유리문, 지요 씨의 따스한 손. 마치 진짜 기억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꿈속에서 지요 씨는 나를 꽤 친근하게대했지만, 현실에서는 어제 처음 만났다. 지요 씨는 그 뒤 어떻게 됐을까. - P347
모래를 파고 있으려니 "잘한다! 잘한다!" 하는 달마 군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는 파도에 실려 앞바다로 떠내려가려 하고있었다. 나는 황급히 달마 군을 붙잡아 모래사장에 내던졌다. 그리고 발굴 작업을 계속했다. 이윽고 모래 밑에서 굵고 긴 막대기 같은 것이 나타났다. 나는 수수께끼의 물체를 힘주어 빼내서 모래사장으로 끌어올렸다.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물체의 끄트머리에 사람 손가락 같은 것이 보였다. "이게 뭐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거대한 석상의 오른팔이었다. - P350
물에 젖은 표면은 빛을 받아 우람한 근육이 당장이라도 움직일 듯이 생기가 느껴졌다. 굵은 팔을 보니 사야마 쇼이치가 생각났다. "귀군의 상상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너도 그렇게 생각해?" "여기는 마술의 바다니까 말이지." "다시 말해 이건 돌이 된 사야마 쇼이치라고?" - P351
"달마 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없어?" "어디 먼 도시에서 마주쳤는지도 모르지." "・・・・・・ 지요 씨를 봤을 때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다음에 만나면 솔직하게 이야기하라고. 마왕의 딸이라고 사양할 필요 없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제일이야." "지요 씨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만날 수 있고말고." - P353
나는 범포와 함께 보관해 놓았던 과즙우유 병을 가져와서땅에 반쯤 묻었다. 비구름이 지나가는 동안 빗물을 받아놓으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수명이 조금은 연장될지도 모른다. "정말 여기까지 와줄까." "그냥 지나간다면 그건 고문이야." 달마 군은 말했다. "망망대해에 비가 내리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어. 이 노틸러스섬에 내려야지." - P354
"안 되겠군." 나는 야자나무 그늘로 도망쳤다. 호우와 폭풍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난파되기 직전의 배 갑판에서 돛대를 부둥켜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번갯불이 주위를 환히 밝히고 천둥이 쳤다. "귀군, 도망쳐!" 달마 군이 황급히 부르짖었다. "곧 벼락이 떨어져!" - P355
밑을 보니 빗물에 씻겨 내려간 흙 밑에서 철판 같은 물체가드러나 있었다. 표면에는 문자 같은 것이 새겨진 것으로 봐서 인공물이 틀림없었다. 나는 땅에 엎드려 철판의 진흙을 닦았다. ‘노틸러스 섬 기관부‘라고 돋을새김으로 쓰인 철제 해치였다. 해치를 열자 녹슨 레버가 나타났다. "이게 뭐지?" "귀군, 레버라는 것은 ‘당기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겠나?" 나는 레버를 당기려고 했지만 녹이 슬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 P356
느닷없이 노틸러스 섬 전체가 위로 솟구치듯 크게 요동쳤다. 잠자던 고래가 갑자기 깨어난 느낌이었다. "귀군, 이것은 섬이 아니로군." 달마 군이 말했다. "배였어." 노틸러스 섬은 그렇게 항해를 시작했다. - P357
"이제야 기운이 난 모양이군." 달마 군이 말했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그나저나 해치에 새겨진 ‘노틸러스 섬 기관부‘라는 명칭이이상했다. ‘노틸러스 섬‘은 그 순간에 생각나서 지은 이름이었다. 내가 이 섬에 표류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이 섬을 ‘노틸러스섬‘이라고 명명한 걸까. - P361
그러나 단팥빵은 쏟아지지 않았고 괜히 허기만 더 졌다. "안 되는 게 없지는 않나 봐." 달마 군이 미안한 듯 말했다. - P362
바위산에서 내려와 레버를 내리자 엔진이 꺼졌다. 그 뒤 노틸러스호는 관성에 의해 전진을 계속해 미지의 섬여울에 올라앉았다. 항해하는 사이에 모래가 대부분 씻겨 사라진 탓에 노틸러스호는 크기가 확 줄었다. 나는 폐선 주민에게도움을 청하기로 하고 달마 군과 석상의 팔을 들었다. "얼씨구, 팔도 들고 가려고?" "이건 사야마의 팔이야. 은인을 버릴 수는 없잖아." - P362
흠칫해서 돌아보자 기괴한 노인이 곡도를 들고 서 있었다. 너덜너덜한 범포를 허리에 두르고 물 빠진 야구모자 밑으로 백발이 축 늘어졌다. 상반신은 물에 잠긴 나무뿌리처럼 허옇고, 갈비뼈가 빨래판처럼 튀어나온 모습이었다. 심상치 않은 서슬에 위험을 느낀 나는 달마 군과 석상의 팔을 바닥에 내려놓고두 손을 들었다. "넌 대체 누구냐. 내 배에서 뭘 하는 거지?" 노인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 P364
노인은 쭈그리고 앉아 석상 뒤에 뒹굴고 있던 달마 군을 집더니 공손하게 받쳐 들고 다양한 각도에서 꼼꼼하게 살펴봤다. 달마 군은 "뭔데?" 하고 부끄러운 듯 중얼거렸다. 한바탕 뜯어본 뒤 노인은 "이건 내가 가지지"라고 말했다. "네가 먹어치운식량 값으로." 나는 놀라서 달마 군을 빼앗았다. "이건 안 됩니다." - P365
구조물 위에 놓인 고물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다소 흠집이 났거나 때는 탔어도 원래 모습이 거의 남아 있는 게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었던 것 같지 않았다. 도기 파편이 있는가 하면 금속 톱니바퀴도 있었다. 재질도 용도도 제각각인데 전체적으로 묘한 맥락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P366
내가 그렇게 부지런히 인양 작업을 벌이는 동안에도 사야마쇼이치의 부서진 석상은 바닷속에 있었다. 작업 틈틈이 옆으로눈길을 주면 미소 띤 사야마 쇼이치의 얼굴이 보였다. 잠수를 되풀이하는 사이에 오후의 태양이 저물었다. - P368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노인이 "자, 마셔"라며 찝찔한 차를 따라 주었다. 그러고는 뭔가가 생각난 것처럼 잔교를 걸어 가버렸다. 그가 사라지기를 기다린 듯 달마 군이 입을 열었다. "군에게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이야." - P369
"무슨 짓이야!" "이런 건 얼마든지 있어." 바다에 뛰어들어 주워올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 구조물 밑바다에는 그 외에도 사야마의 석상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노인 말대로 따르기는 분했지만, 사야마 쇼이치도 팔과 같이있으면 기뻐할지 모른다. 그나저나 ‘얼마든지 있다‘라는 노인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생각해 보면 가엾은 녀석들이거든." - P370
호렌도 주인이 고른 물건을 내가 보트로 나르는 동안, 노인은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돈 계산에 여념이 없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나는 호렌도 주인에게 부탁했다. "저도데려가주실 수 없을까요?" "......댁을?" 주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영감님 조수라며?" "저 사람이 혼자 그렇게 정한 겁니다." - P375
내가 먹은 통조림과 건빵, 물은 자신의 재산이니 ‘값을 얼마로 매기든 자기 자유‘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언제 풀려날지 역시 노인 마음이라는 뜻이 된다. "나더러 노예가 되라는 건가?" "난 네놈한테 생명의 은인이라고." 노인은 내 팔을 붙들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 P376
"지하 감옥의 죄수가 탈주했어. 학파 인간 둘이 쳐들어와서 탈주를 거든 모양이지. 한 명은 총 맞아 죽고 또 한 명은 마왕한테 유배됐거든. 내가 듣기로 유배된 쪽은 ‘네모‘라는 이름의 젊은이라던데." 노인은 헤엄치며 나를 노려봤다. "흥. 어째 수상쩍은 이야기군." "얽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영감님." 호렌도 주인은 말했다. "마왕한테 호되게 당했잖아?" - P377
섬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호렌도 주인 덕분이었다. 노인은 단념하고 잔교로 돌아갔다. 보트가 멀어지면서 잔교에 주저앉은 노인의 모습은 순식간에 작아졌다. - P378
호렌도 주인과 지요 씨는 소곤소곤 무슨 말인가 주고받았다. 그동안 나는 두 사람과 떨어져 혼자 고물을 구경했다. 가게 안은 바다 깊숙한 곳처럼 어둑어둑했다. 새카만 장롱은 바위땅,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도기는 조개껍데기, 매달아 놓은 중국풍 초롱은 열대어 같았다. 전부 인양 작업으로 건져낸 것이라면 그런 인상도 꼭 부자연스럽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P382
"노틸러스 섬에, 인양 작업도." 지요 씨는 중얼거렸다. "창조의 마술을 썼군요." "......그럴 리가요." 창조의 마술은 마왕의 힘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간단히익힐 수 있는 것이라면 학파 남자들이 목숨을 걸면서까지 훔치려고 할 리 없다. - P384
나는 눈앞의 바다를 곤혹스레 쳐다봤다. 그때 마왕의 말이 되살아났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뭐든 있다는 뜻이야. 마술은 거기서 시작된다. - P385
(전략) "그 섬을 ‘신신도 섬‘으로 명명한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선언했다. 얼마 뒤 지요 씨가 크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머뭇머뭇 눈을 뜨자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앞바다에 작은 섬이 떠 있었다. 모래사장으로 둥글게 둘러싸인 작은 섬중앙에 숲이 있어 마치 수프 그릇에 브로콜리를 얹은 것처럼 보였다. 작은 숲에 건물이 파묻혀 있었다. - P385
자신이 창조한 섬에 상륙하는 것은 기묘한 체험이었다. 노를 저어 바다를 건너는 동안에도 섬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반신반의했다. 상륙하려고 하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이윽고 뱃머리가 모래사장에 올라앉는 확실한 감촉에 나는 무심코 "진짜 섬이군" 하고 중얼거렸다. - P386
"이 석상들은 뭐지?" "당신은 아직 인간을 만들지 못해요." 지요 씨는 나를 위로하듯 말했다. "그래서 석상이 되는 거예요."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 학생들도, 혼자 책을 읽는 노인도, 방금 전까지 살아 움직였던 것처럼 보였다. 테이블에는 마시다만 커피가 놓여 있는데 만져보니 아직 따뜻했다. 이 커피집에서는 인간만이 가짜였다. - P387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지요 씨는 조개껍데기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가 종종 하던 말이에요. 가끔 생각나거든요." - P388
"난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요." 지요 씨가 중얼거렸다. "딱한 번 여기서 나가려고 한 적이 있어요. 이런 바다에서 더는 못살겠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태풍에 배가 침몰하고 말았어요." 어느새 창밖에 하얀 것이 춤추고 있었다. "......이게 뭐죠?" "눈입니다." "이것도 당신 마술인가요?" 굉장하네요, 하고 지요 씨는 감탄한 듯 중얼거렸다. - P390
"섬이 가라앉는 걸 지요 씨와 봤습니다." 나는 저 너머에 뜬섬을 보며 말했다. "공포스러운 광경이더군요." "가라앉는 섬이 있으면 떠오르는 섬도 있어." "두렵지 않습니까?" - P392
"댁은 대체 누굴까." "저도 알고 싶군요." "댁은 이 바다 밖에서 왔어. 하지만 학파 인간은 아니지. 그자들은 창조의 마술을 쓸 수 없으니까. 댁이 쓸 수 있다는 걸 알면 꽤나 부러워할걸. 그자들은 그 힘을 갖고 싶어 안달이 났으니까. 그래서 기를 쓰고 마왕의 비밀을 훔치려는 거야." "카드 상자 말입니까?" - P392
나는 잠깐 생각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사야마 쇼이치는 그런 식으로 말했다. "아닙니까?" "그건 마법의 지팡이가 아니라 그냥 이 세계의 그릇인 거야. 이 바다, 군도, 거기 사는 우리 같은 인간들 모두 마술에 의해나무 상자 안에서 만들어졌어. 이 세계가 카드 상자 안에 있으니 카드 상자 자체는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셈이지. 그런 걸 어떻게 훔치겠어?" - P393
"하지만 전 제 눈으로 봤는데요." "수평선은 눈에 보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존재하나?" - P393
주인은 일어나 어두운 바다 저편에 시선을 주었다. "포대지기를 만났을 테지?" "도서관장 말입니까?" "그 사람은 학파 남자의 꾐에 넘어가서 바다 밖으로 나가려고 한 적이 있어. 이 세계가 가짜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서마술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한 거겠지. 하지만 폭풍에 배가 침몰됐어. 그래서 그 사람은 지금도 학파 남자들을 원망해." - P394
마왕은 내가 오기를 기다린 양 미소를 지으며 카드 상자를 내밀었다. 황갈색 나무 상자에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세계의 중심에는 수수께끼가 있다." 마왕은 비밀을 털어놓듯 속삭였다. "그게 ‘마술의 원천인 것이다." - P396
"저 영감님, 좋지 않은 일을 꾸미고 있어." 달마 군이 소곤거렸다. "영감님 말에 넘어가면 안 돼, 귀군." "그런다고 얌전히 물러나겠어?" "그건 모르지. 어쨌거나 해적이니까." 그나저나 내가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나는그 노인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없는데. 더욱이 무인도에서 외롭게 살고 있던 노인이 어떻게 하룻밤새에 다른 해적들과 훌륭한 배를 손에 넣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 해적선은 ‘노틸러스호‘라는 것이다. - P398
나는 바깥으로 나가 날이 밝아오는 아침 바다를 바라봤다. 부서진 다리 잔해가 떠다니고 있었다. 그 너머로는 그저 아무것도 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수로가 지나는 동네도, 아케이드 상점가도 없었다. 어젯밤까지 분명히 그곳에 있었던 거리도 사람도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 정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젯밤 호렌도 주인이 한 말이 생각났다. 이 바다에 있는 삼라만상은 모조리 가짜야. - P40
망망대해에 작은 섬 몇 개가 떠 있었다. "무슨 생각 해요?" "마왕은 어떤 기분일까요. 수많은 섬과 사람들을 만들어 냈다가 그걸 또 침몰시킵니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 하는 일이라해도 저는 못 견딜 것 같습니다." "아버지 기분 같은 건 아무도 알 수 없어요." - P402
지요 씨는 어째서 이런 곳에 왔을까. "지요 씨." "조용히 말하지 말아요." 지요 씨는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안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을 보고 있으려니 어둠속에서 떠오르듯 사람이 나타났다. - P403
할머니는 앞장서서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미술관은 나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먼 옛날부터 이곳에있었답니다." 할머니는 걸으면서 이야기했다. "마왕이 군도를 만들기 시작했을 무렵부터죠. 지금까지 수많은 섬이 태어나고또 수많은 섬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 섬만은 내내 이곳에 있으면서 그림을 지켜왔습니다. 아주 긴긴 세월 동안." - P404
이윽고 어두운 터널 같은 긴 복도가 나왔다. 창문은 하나도없었다. 낡은 마룻바닥이 안쪽으로 이어지고 막다른 곳에 좌우로 열리는 문이 어렴풋이 보였다. 마치 괴물을 가둬둔 듯한 사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저기가 봉인된 전시실이랍니다." 할머니는 그렇게만 말하고 돌아서려 했다. 지요 씨가 "잠깐만요" 하고 그녀를 불러 세웠다. "당신은 같이 안가나요?" "아가씨 같은 용기는 없으니까요." - P405
지요 씨는 내 팔을 붙들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잘 들어요. 마왕이라고 처음부터 그런 힘을 갖고 있었던 건아니에요. 과거에 이 해역은 ‘보름달의 마녀‘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사람에게서 마술을 전수받은 거예요. 마왕이 보름달의 마녀를 죽이고 이 바다를 빼앗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난 그런 말은 믿지 않았어요. 지금도 마녀는 이해역 어딘가에 있다,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 생각했죠." - P406
그곳은 크고 황량한 전시실이었다. 한쪽 벽에 늘어선 기름한 창에는 커튼도 없어 야자나무가선 모래사장과 푸른 바다가 보였다. 장식이라곤 바닥에 깐 커다란 페르시아 양탄자뿐이었다. 정면 벽에 큰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 P408
"지요 씨, 잠깐 보시겠습니까." 나는 캔버스를 가리켰다. "큰대자 같은데요." "큰 대자라고요?" 지요 씨가 뛰어왔다. 눈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고잔 무카에비‘네요." - P410
"우리는 꼭 마녀를 만나게 될 거예요."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말했다. "당신의 마술이 우리를 구해줄 거예요." 나는 지요 씨 곁에 서서 바다를 응시했다. 내가 정말 이 사람의 바람을 이루어 줄 수 있을까. - P411
"갑시다. 지요 씨." 우리는 잔교를 향해 모래사장을 가로질렀다. "고잔 해역은 ‘무풍대‘로 둘러싸여 있어요." "무풍대라고요?" "아주 고요한 바다인데, 바람도 거의 불지 않고 새로운 섬이 생겨나는 일도 없커코. 시간이 멈춘 듯한 곳이랍니다." - P411
그들은 우리를 앞바다에 뜬 해적선으로 데려갔다. 나는 지요 씨와 떨어져 휑한 선실로 들여보내졌다. 조명이라곤 천장널 틈으로 새어드는 희미한 빛뿐이었다. 어둠 속을 둘러보니 벽 근처에 놓인 나무 통 옆에 한 남자가 주저앉아 있었다. 나를 데려온 학파 남자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친구가 생겼어, 도서관장." 고개를 들어 나를 본 도서관장은 놀란 듯 말했다. "자네가 왜 이런 곳에 있지?" - P414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도서관장은 일어나서 불안스레 천장을 바라봤다. "어제까지 그 영감은 쓸모없는 늙은이였어. 과거에 이 바다를 휘젓고 다닌 해적이었다는 것만이 자랑이라 말이지. 진지하게 상대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고. 그런 사람이 오늘아침부터 해적선을 끌고 이 바다를 휘젓고 있어." "포대 섬을 습격할 줄이야." - P415
후텁지근한 선실에 침묵이 흘러 배가 삐걱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이윽고 도서관장이 입을 열었다. "지요 씨는 꿈을 꾸고 있어." "꿈이라뇨?" - P416
도서관장은 그곳에서 세계의 끝을 봤다고 말했다. "이 바다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우주 같은 밤이 펼쳐져있을 뿐이고, 그곳의 어둠에서 학파 남자들이라는 괴물이 태어나는 거야.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마왕이 마술로 만들어 낸 존재고 마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어. 하지만 마왕은 마술로 바다를 둘러싼 무시무시한 어둠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고도 있어. 나는 그 사실을 알고 몽상을 버린 거야. 바다 밖으로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몽상을 말이지." 도서관장은 슬프게 한숨을 쉬었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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