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선생님 배역을 좀 바꾸면 어때요?]
"예?!"
[그냥 인질D가 아니라, 인질 속에 숨어있는 FBI면 어떨까 하는데.]
".........."
[아시다시피 이번 영화는 D 선생님 3년 만에 복귀작이고, 좀임팩트가 강한 역할을 하셔야지, 그냥 지나가는 인질C, 뭐 이런게 솔직히 격에 맞습니까?] - P199

[지나가는 인질C, 그것도 대사도 몇 줄 없는 그런 대본을 어떻게 보여드립니까, 막말로.]
그럼 왜 계약했냐! - P197

어시스턴트는 곧 내 면전에 서류 한 장을 들어 보였다. 난 내용을 살피기에 앞서 그녀에게 묻는다.
"이게 뭐야?"
"제작투자자 리스트인데요. 여기 보이는 이 사람 누군지 모르세요?" - P198

아, 기억난다. 이 사람도 세계제일이었는데…………… 세계제일의뭐였더라? 세계제일의 병원장이었나?
"얼마 전에 재단 산하의 병원에서 인질극이 벌어져 여론에 오르내렸죠. 그다지 좋은 의미로 여론에 관심을 받은 게 아니거든요." - P198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병원에서 인질극을 하는 걸로 내용을 바꿨다며?]
"네, 그게 좀 사정이......."
[사정이 어떻든. 이거 안 좋아. 무슨 말인지 알아? 이사회에서 소란나기 전에 알아서 해결해. 대체 뭔 생각을 한 거야?! - P199

"히든카드 한 장 더 없어요?"
난 말없이 책상 서랍을 열어서 흰색 봉투를 꺼내 보여주었다. 이를 본 그녀가 피식 웃는다.
"사직서"
"유서다."
진짜다. 나도 이 영화에 목숨 걸린 사람 중 하나란 말이지. - P200

[배경을 비행기로 바꾼다.]
뭐?
[배경은 여객기 안이다. 여객기 안에서 바이러스가 퍼진 거지. 그래서 우연히 여객기에 탑승하고 있던 세계제일의 간호사가 이 사실을 알고 비행기를 납치하는 거다!] - P204

"......해서 각본이 조금 수정되었습니다. 기본적인 스토리. 대사는 그대로니까 그냥 숙지만 하시면 됩니다."
라는 게 설명의 골자였지만, 그 와중에 가장 두려운 인물에게 클레임이 걸려오고 말았다.
각본가다. - P202

"화내든 말든, 각본 다 받아놨는데 이제 볼일 없는 사람이야. 계약상으로도 문제없고."
"그래도 세계제일이라면서요."
"그 세계제일 내가 정했나? 난 그런 거 몰라."
다 맡겨야 할 때와 맡겨선 안 될 때가 있는 거다. 실제로 초고는 각본가에게 전적으로 맡겨서 나온 각본이지 않은가? 다만,
시간이 없고 이해관계도 복잡한 상황이라면 난 세계제일보다는 땜빵을 믿는다. - P203

[몰라서 묻나? 이 영화는 최소 R등급 영화여야 해. 그걸 넘어가면 힘들다고.]
"저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비행기에서 사람 안 떨어집니다. 그리고 설사 그런 씬이 좀 들어간다고 해서 등급이 올라갈 거 같지도 않은데요.
[이 사람 이거, 몰라도 한참 모르네. 영화심의 등급 위원회 위원장이 누군지 알아?]
"세계제일의 영화 심의원?" - P204

"그냥 전화 끊고 말로 해."
"그 사람 외아들이 스카이 다이빙하다 추락사했다고요. 낙하산이 안 펴졌데요."
그랬냐・・・・・・・ - P205

"그게 아니고...... 아, 여보세요?"
땜방 각본가가 전화를 받았다.
"비행기에서 사람이 떨어져선 안 돼. 그런 비슷한 언질이 나와도 안 된다."
[왜? 어째서? 뭐 때문에!? ……………라는 토를 달지 않는 게 내 미덕이지. 그저 유감이군.] - P206

배우 B가 무슨 역이었더라?
"여보세요?"
[배우 B씨 매니지먼트 사무소인데요. 바뀐 각본에 대해서 말씀 좀 드려야겠습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제가 지금...."
[배우 B씨가 주인공 맞죠? 세계제일의 이야기꾼이라는 배역말이에요.] - P210

[뭐하자는 겁니까? 대놓고 우리 엿 먹이자는 거예요. 지금?]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각본에 뭔가 착오가 있었습니다. 원래 이런 내용이 아니에요."
[각본을 어떻게 바꾸든 좋다 이거예요. 최소한 주인공이 주인공답게는 나와야죠. 지금 각본에 보면 B씨는 그냥 의미 없는조연밖에 안되잖아요. 이래서는 우리도 같이 못 가죠.] - P211

"전화 연결하지 말라니까 죽었다고 하라고."
"죽었다고 했어요."
난 인상을 쓰며 안경을 벗었다.
"어딘데?"
"TMC 투자사업부요."
이번 영화에 공동투자 하는 대기업이다.
"여기도 뭐 세계제일하고 연관이 있나요?"
"CEO가 세계제일의 경영인이라던가 뭐 그렇다더라." - P213

[하하, 죄송합니다. 부장님도 아주 기뻐하십니다. 역시 합리적 판단을 하는 사람은 그쪽 실장님밖에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러게 저만 믿으시라니까요. 지금 막 수정된 각본이 나왔는데,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나왔나요? 저희가 요구한 사항들도 모두 포함됩니까??
"물론이죠." - P214

"얘네들 지금 뭔 소리야?"
"액션, 파괴, 섹스."
뭐?"
"꼭 있어야 할 흥행 3대요소라고 늘 그랬잖아요." - P215

"아놀드나 스텔론이 20년 전쯤에 찍었을 법한 영화네요."
각본을 다 읽은 어시스턴트가 중얼거렸다. 난 책상에 앉아 고개를 의자 뒤로 젖힌 상태로 눈을 감고 있었다. 모든 힘이 다한 모습 그대로다. - P218

"내가 목숨 건 쪽은 영화내용이 아냐. 영화흥행도 아니고."
"그럼?"
"영화가 트러블 없이 무사히 촬영되게 만든다. 내 일은 그거다."
"세계제일들을 모아서?" - P220

"근데 난 세계제일의 뭐지? 내가 세계제일 소리를 들을 만한게 없는 거 같아서 말야."
"지금 하시는 일이죠."
"세계제일의 프로듀서?"
내가 미심쩍게 묻자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P222

"차라리 나보다는 땜빵 해준 각본가를 찾아가는 게 어때? 그 친구가 다 해결했잖아."
"그분은 이미 세계제일인데요. 모르셨어요?"
몰랐다…………….
무슨 세계제일이지? 땜빵 각본?
"네." - P222

"세계제일을 선정하는 분야에 대한 심사가 있어요. 실장님의 분야는 사실 판단기준이 애매해 선정대상은 아니었는데 우리팀이 수년 전부터 적극 밀어왔던 분야라 올해 초에 선정대상에 올랐거든요. 그래도 최종심사가 남아있었는데, 오늘 일에 대해서 심의부가 감명받았는지 느닷없이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서요."
"그러니까 자넨 원래 알바가 아니라는 거군."
"알바는 맞는데 본업이 따로 있는 겁니다." - P223

"크레디트에서 선생님 성함을 빼드릴까요? 아니면 가명으로......"
[아니. 내 이름 그대로 넣으시오.]
"그래도・・・・・・ 되겠습니까?"
[세계제일은 변명도 거짓말도 하지 않소. 도망가지도 않지.
맡은 분야에는 언제나 책임을 지는 것이오. 그 각본은 어디까지나 내 책임이오.]
"그러시군요."
[그게 당신과 내가 다른 점이오.]
세계제일의 각본가는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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