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게이스케 씨? 빨간도깨비의 정체는 사이다이지 게이스케씨 아닐까요?"
탐정은 그 이름을 듣고도 전혀 웃지 않았다. 오히려 "호오"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뭐야, 당신도 나와 같은 가능성을 고려했나 보군. 뭐, 다카자와 선생의 이야기를 순수하게 해석하면 당연하게 도달할 생각이기는 하지만." - P278

"그럼 지금 여기서 확인해 볼까."
"확인하다니, 게이스케 씨에게 전화하려고요?"
"설마 마사에 씨에게 물어볼 거야. 저택에 게이스케가 있는지 없는지." - P278

"게이스케 씨는요?"
넌지시 라기보다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만큼 대담하게 다카오가 그 이름을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마사에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응? 게이스케?! 여기 없는데. 아직 자기 방에 있는 거 아닐까. 이불을 덮어쓰고 떨고 있으려나. 어쩌면 푹 잠들었을지도 모르지만." - P279

 "어쩌면 게이스케 씨는 이불 속에서 싸늘하게 식어 버렸을지도모릅니다. 빨간도깨비의 독수에 걸려서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는, 아무 근거도 없는 허풍이 마사에한테는 효과적이었다.
(중략).
"가능성은 있겠죠. 애당초 빨간 도깨비가 오직 스님을 해코지하려고 저택에 침입했다고 보기는 힘드니까요." 다카오가 그럴싸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 P280

야노 사야카와 고바야카와 다카오는 왔던 길을 되짚어서 숲을 빠져나왔다. 이윽고 두 사람 앞에 ‘화장‘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특징적인 구체를 본 순간, 사야카는 오늘 밤에 보았던 수상한 인물이 한 명 더 생각났다. - P281

해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 앞에서 사야카는 다리가 얼어붙는 듯한 감각을 맛보았다. 그런 사야카의 등을 떠밀 듯 다카오가 경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자, 생각은 나중에 하고 아무튼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빗물에 양복이 흠뻑 젖었어. 한시라도 빨리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싶다고." - P283

"야노 변호사님. 다행이다. 다들 걱정하고 있었어요."
사이다이지 게이스케였다. 방금까지 그가 빨간도깨비가 아니겠느냐고 의심했던 사야카는 단번에 자신의 착각을 깨달았다. 사야카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그, 그런가요. 걱정을 끼쳐서 죄송...."하고 고개 숙였다. - P284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에, 탐정은 의미심장하게 응했다.
"네....... 게이스케 씨도 무사해서 참 다행입니다.. - P284

4


(전략).
사야카와 다카오가 나타나자 거실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술렁거리는 분위기가 퍼져 나갔다.
그런 가운데 에이코가 소파에서 일어나 안심한 듯 웃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돌아오셨군요. 다카자와 선생님과 스님께 이야기를 듣고 걱정했어요."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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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씨가 백해나를 죽였죠. 우리 그 점에 관해 이야기해봅시다."
나는 질문의 저의를 곰곰이 생각했다. 다큐멘터리에서그 대목을 누락시키기로 한 것은 박사니까, 어떤 식으로든 죄를 물진 않으리라는 계산이 섰다. - P210

"출연 제안을 선뜻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일지 잘 생각해봤죠. 평범한 설계사는 아니라고 판단했어요. 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생각이 더욱 강해졌고요. 그리고 오늘의 대화로 도하 씨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게 됐습니다. 이제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받아내려는 겁니다. 영상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죠? 그 죽음이 어떤 종류의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취미시군요." - P211

"만약 저에게 죄가 있다면, 백해나를 처음 카메라 앞에세운 사람들이나 거기에 열광한 시청자에게도 엇비슷한 죄가 있을 거라고 봐요. 그쪽이 더 클지도 모르고. 저보다 더잘 아시겠지만, 백해나는 관심에 시달리다가 미쳐버린 케이스니까요." - P212

"저보다 잘 아시겠지만, 중증 우울증 환자들은 병세가 호전되면서 일시적으로 사나워지는 경향이 있죠. 무기력증에 억눌려 있던 울분이 수면으로 올라오니까요.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이 상처받는 사례도 많고요. 하지만 그런 부작용 때문에 치료 자체를 막는 상담사는 없지 않나요?" - P212

"그러면 구체적으로 설명해드리죠. 백해나와 릴리의 만남은 납치였고, 그 이후의 관계는 일방적인 학대였어요. 소송을 빌미로 협박하고 옆에 붙들어놨죠. 이런 상황에서도개가 백해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침묵을 지켜야 했단 말인가요? 배려가 필요했다면, 어느 정도의 배려가요? 사실상 희생하고 헌신하기 위해서만 제작되는 지성체들이 있다면 - P213

"하지만 도하 씨야말로 창조자 노릇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 P214

"전 제대로 된 이유를 붙이지 못할 일은 거의 안 해요.
들키더라도 항변할 여지를 남겨두고요. 열네 살 이후로는줄곧 그랬어요. 그게 제가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죠."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진담이에요.‘ - P215

도르시아의 스테이크에도 대규모 콘서트의 분위기에도 설계사 면허 취득에도 들뜨지 않는삶이 어떤 것인지, 아무 기대도 가망도 없는 기분이 무엇인지 다들 모른다. 그 사람들은 불화에 이끌리는 기분도 모른다. 모르니까 내가 세상을 느끼고 겪는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해주지 않는다. - P216

그제야 나는 눈앞의 존재가 미디어 공룡 그 자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릴리가 미디어 산업을, 시청자들을 비웃고 경멸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백해나에게는 평생토록 겪은 악몽의연장선일 것이다. 게다가 박사는 개의 기억까지 누락시킨 상태였다.
- P217

"그나저나 저도 하나만 여쭤보고 싶은데요. 개의 기억을 삭제하라고 지시하셨는데, 이건 박사님의 이미지 때문이죠?"
"나는 기계고, 미디어는 산업이고, 이미지는 마케팅입니다. 기계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인간에게 보여줄 필요는없어요. 그게 제작진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편집하기전에 지워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죠." - P218

나는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 릴리의 이야기에기반해 얼개만을 짜놓았을 때 개의 기억을 지웠다. - P218

"현존하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우선합니다."
박사는 그렇게만 답했다. 감정형 인공지능을 설계할 때가장 먼저 주입하는 대원칙이었다.

- P218

개는 백해나를 좋아한 적이 없었고, 초기화를 바라지도않았고, 하고 싶은 말도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세 개의질문만을 던져서 스크린에 일관적인 패턴이 나타나게끔 했다. 그게 개와 나의 거짓말이다. - P219

(전략) 개의 본심을 철저한 무위로 돌려 모욕하는 일이었다. 릴리는 그날의 기억을 그대로 보여줄 수 없다면 차라리 낭만적인 거짓말로 바꿔버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큐멘터리가 릴리의 복수라고도 느꼈다. - P219

. 죽은 사람의 이름, 챙길 사람이 없어진 이름만이 텅 비어서 누구든 쥐고 흔들 수 있는 깃발처럼 나부낀다. 그게 최종적인 패배인지 완벽한 해방인지 나는 모른다. 인간이 죽음과 파멸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면서도 계속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이유만을 겨우 짐작할 뿐이다.
내가 얽매인 굴레도 결국엔 그것이다. - P220

04

소녀의 개


실컷 떠들어놓고 보니 12시가 넘어가 있었다. 돌아가면새벽일 것이다. 박사는 나를 홀로 좌석에 태워 동생의 아파트로 보냈다. 나는 로드스터에 올라타자마자 테이블에서 감초 막대를 하나 더 꺼내어 씹기 시작했고, 그러는 동안에도 대화는 계속되었다. - P223

"동생이 그걸 듣고 화를 좀 냈으면 좋겠어요."
나는 보석함을 열어 내용물을 보여주듯 수줍은 미소를머금었다. 조금은 기쁘게, 조금은 부끄럽게 반응을 기다리는데 멈춘 창밖으로 아파트가 보였다. 도착한 것이다. - P224

절단과 봉합을 마치고 왼손에 철심까지 박은 후 사나흘은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진 채 누워만 있었다. 도대체박사가 왜 동생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질문을 곱씹으면서 분노를 삭이다 보면 신경통이 그 순간의 황홀처럼 절단면을 치고 올라왔고, 되살아나는 기억 사이에서 한참을 헤맨 뒤에는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 P225

콘크리트 벽으로 만들어진 무인도에서, 나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소식을 접하면 탓할 상대부터 찾는 게 인간의 습성이지만 이번에는 문제가 어려웠다. - P227

"열흘 뒤,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긴 해. 대중 여론이라는것도 있고."
대중 여론, 이라는 말은 고객들의 간증을 포함했다. 다큐멘터리가 공개된 직후에는 비난 여론이 심했는데(쿠키 영상에 얽힌 논란까지 포함해서) 시영의 게시글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역전됐던 것이다. - P228

문제가 생긴 건 식사를 모두 마친 다음이었다. 실물 초대장에 이상한 점이 발견되어서 잠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박사가 직접 보내준 거라고 대답해도 웨이터들은(물론박사와 똑같이 생겼다) 막무가내였다. - P229

"박사님의 윤리 판단기가 사람 다리를 으깨도 된다고 하던가요?"
"나는 의무론에 더해 계약주의와 이기주의, 그리고 실용주의 정식을 혼용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네 개의 윤리 판단기 모듈 중에서 둘 이상에게 금지되지 않은 행동만이 실행되죠. 훨씬 유연한 데다가 교착 상태에 빠질 일이 없고, 개개인과 사적 관계를 맺을 경우 각자의 실제적 이유에 기반한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어떤 논증을 거쳐 정당화되었는지 보고서를 뽑아드릴 수도 있어요." - P230

"처음부터 정의되어 있었습니다."
잘린 다리와 언짢은 반응을 맞바꾸는 게 공정한 거래일수는 없겠지만, 상대는 제국의 주인이고 나는 평범한 설계사라는 점에서는 그럭저럭 선방한 셈이었다. - P232

"내 의견으로는 도하 씨가 동생분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같습니다만."
"이 일을 법원으로 끌고 가면 제가 피해자예요. 동생은절 감시하고, 억지로 약을 먹여서 응급실에 실려 가게 하고, 조수석 승객을 외딴 도로에 내버리는 사람이죠. 그것도한밤중에 장기간의 감정적 학대로 판단력이 흐려진 피해자라면 차창에 손을 밀어 넣는 일쯤은 쉽게 할 수 있겠죠.
한마디로 전 동생이 기획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다가 직업도 잃고 다리도 잃은 불쌍한 사람이죠." - P233

"약을 안 먹고 있어요. 요새 바쁜 일이 너무 많아서 동생도 잊어버린 것 같고, 재미있는 일은 끝났으니까 슬슬 병원에 가야겠는데... 사실 그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죠. 누가 끌고 데려가지 않으면 다신 안 갈 것 같아요." - P235

평소에는 동생에게 말했겠지만, 자해 사건이 탄약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걸 들키면 정말로 관계가 결만날 것같았다. (중략) 나도 평소에는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정말이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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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O

부활절 연휴의 첫날 나는 네 시에 일어났다. 한나는 그날 새벽 근무였다. - P50

전차는 정거장이 나와도 정차하지 않고 그냥 통과했다. 정거장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날은 아직 밝지 않았고 하얀 하늘 아래로 모든 것이 창백한 대기 속에 창백하게 놓여 있었다. - P51

 에펠하임을 지나자 전차의 선로는 도로 가운데를 벗어나 도로 옆의 자갈이 깔린 둑 위로 나 있었다. 전차는 여느 기차처럼 규칙적인 덜커덩 소리를 내며 점점 더 빠르게 달렸다. - P51

그러던 중 나는 정거장 하나를 발견했다. 넓은 벌판에 자리잡은 조그만 승차 대기소였다. - P52

나는 열두 시 정각에 그녀의 아파트 앞 층계참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슬퍼하면서 초조하게, 그리고 분을 삼키면서.
"너 학교 또 빼먹었니?"
"연휴잖아요. 오늘 아침엔 어떻게 된 거예요?"
그녀는 열쇠로 문을 열었고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 부엌으로 갔다.
"뭐가 잘못됐다는 거니?"
"왜 나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어요? 나는......." - P53

"너 정말 딱한 애구나. 네 시 반에 일어나다니. 그것도 연휴에 말이야."
그때까지 그녀가 그렇게 야비하게 보인 적은 없었다. 그녀는머리를 가로저었다.
"네가 왜 슈베칭엔으로 가는 전차를 탔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네가 왜 나를 모른 척했는지 어떻게 알아. 그건 네 일이지내 일이 아냐. 이제 좀 돌아가주지 않을래?" - P54

"미안해요. 한나, 모든 게 엉뚱하게 돌아갔어요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내 생각으로는.....
"‘내 생각으로는‘이라고? 너 네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다고 말하려는 거지? 넌 내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없어. 넌 그렇게 할 수 없어. 이제 제발 좀 가줄래? 난 일하고 왔어. 목욕하고 좀 쉬고 싶어." - P55

"나를 용서해주는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 사랑해요?"
그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욕조에 물이 아직 그대로 있어. 자, 목욕시켜줄게."
나중에 나는, 그녀가 내가 돌아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욕조의 물을 그냥 그대로 둔 것은 아닌지, 그녀가 내 앞에서 옷을 벗은 것도 그렇게 하면 그 장면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결국은 내가 돌아오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지, 그녀가 오직 파워 게임에서 승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해 자문해보았다. - P56

. 한 번인가 두 번 나는 그녀에게 긴 편지를썼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어보았을 때, 그녀는 내게 이렇게 되물었다.
"너 또 시작하는 거니?" - P57

II

한나와 내가 부활절 연휴의 첫날 이후로 다시는 행복하지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4월의 그 몇 주처럼 행복한 적은 없었다. 그 첫 싸움은 전혀 엉뚱한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의 싸움은 늘 그랬다. - P58

나는 앓아누워 있는 동안 용돈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한나의 몫까지 돈을 쓰려면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하일리히가이스트 교회 옆에 있는 우표 가게를 찾아가서 우표첩을 팔겠다고 내놓았다. - P59

나만 여행의 열병에 걸려 있던 건 아니었다. 놀랍게도 한나 역시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녀는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이리저리 궁리하고 내가 구해준 자전거 안장 밑에 매다는 자루와 배낭을 꼼꼼하게 꾸렸다. - P59

"나는 지금 너무 흥분돼 있어. 네가 다 알아서 해, 꼬마야."
우리는 부활절 월요일에 출발했다. 태양은 빛났다. - P60

우리는 대개 나란히 달렸다. 달려가면서 각자 본 것을 서로에게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성, 낚시꾼, 강 위에 떠 있는 배, 텐트, 강가를 따라 한 줄로 걸어가고 있는 가족들, 지붕을 열어젖힌 미국산 대형 승용차 등등. 방향이나 길을 바꿀 때에는 내가 앞장서야 했다.  - P60

한나는 내게 방향과 도로의 선택권만 넘겨준 게 아니었다. 우리가 밤새 묵을 여관도 내가 직접 골라 숙박인 명부에 우리를 어머니와 아들로 기입했고, 그녀는 거기에 서명만 했다. 메뉴에서 음식을 고르는 것도 내 몫이었다.
"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걸 좋아해." - P61

"어떻게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간단히 가버릴 수 있어!"
나는 아침 식사와 장미가 담긴 쟁반을 내려놓고서 그녀를끌어안으려 했다.
"한나......."
"건드리지 마." - P62

나는 그때 그녀를 두 팔로 끌어안아주었어야 했다. - P62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 P62

"우리 아침 먹을까?" 그녀는 내게서 몸을 풀었다. "맙소사,
꼬마야, 네 꼴 좀 봐!" 그녀는 손수건을 적셔 와 내 입과 턱을 깨끗이 닦아주었다. "셔츠도 피투성이잖아."
그녀는 나의 셔츠를 벗기고 뒤이어 바지도 벗겼다. 그러더니 그녀도 옷을 벗었고 우리는 사랑을 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예요? 왜 그렇게 화가 났었어요?" - P63

"도무지 알 수 없군요. 아침 식사를 가지고 금방 돌아오겠다는 쪽지를 써놓고 나갔거든요."
"그랬어? 난 쪽지를 보지 못했어."
"내 말을 못 믿겠어요?"
"물론 널 믿지. 하지만 나는 쪽지를 보지 못했어."
우리는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 P64

(전략). 그녀는 소설 내용에 대해 갈팡질팡하다가 내가 책 읽기를 마치면 그 후로 몇 시간 동안 내게 질문을 퍼부었다.
"통행세 징수관? 그건 좋은 직업이 아니었나 봐?"
우리 사이의 싸움에 대해 다시 이렇게 자세하게 이야기했으니 이젠 우리의 행복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까 한다. 싸움은 우리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어주었다. - P65

나는 그때 쓴 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시라고 할 만한 게 못된다. 그 시절 나는 릴케*와 벤*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두 시인을 한꺼번에 닮고 싶어 했던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 시를 보며 우리가 그때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도 다시 깨닫는다. 그 시가 여기 있다.

(후략) - P65

12

한나와 여행을 떠나기 위해 부모님에게 둘러댔던 거짓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부활절 연휴의 마지막 주 동안 혼자서 집을 지키며 치러야 했던 대가는 아직도 생생하다. 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형이 어디로 여행을 떠났었는지는 이제 모르겠다.  - P66

돌이켜보면 부모님이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에게 일주일씩이나 집을 보도록 맡겨두신 건 놀라운 일이었다. 한나와의 만남을 계기로 나의 가슴속에 자라나기 시작한 독립심을 눈치챘던 것일까? - P67

물건을 훔치는 일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쉬웠다. 나는 청바지를 여러 벌 입어보면서 여동생에게 맞을 만한 청바지도 한벌 집어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을 통이 넓은 양복바지의 안쪽 배 근처에 집어넣은 채 상점을 빠져나왔다. 벨풀오버 니키는 백화점에서 슬쩍했다. - P68

. 그녀의 눈길은 피곤해 보인다.
"여기 이것들이 모두 너의 아버지가 읽거나 쓰신 책들이니?"
나는 아버지가 쓴 칸트 책과 헤겔 책을 알고 있었다. 나는그 책들을 찾아보았다. 마침내 두 권을 찾아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내게 그 책을 조금만 읽어줘. 꼬마야. 그렇게 해주지 않을래?" - P70

나는 그녀에게 그 비단 잠옷을 선물했다. 그것은 가지색이었고 가느다란 어깨 끈이 달려 있어서 어깨와 팔이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치맛단은 복사뼈까지 내려왔다. 잠옷은 반짝이면서 은은하게 속이 비쳤다. 한나가 기뻐하며 웃자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녀는 발밑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빙그르르 돌기도 했다. - P72

13

새 학년의 시작은 늘 하나의 분명한 단락처럼 느껴졌다.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진급은 특히 하나의 시기를 칼로 자른 듯한 변화를 몰고 왔다. - P72

우리는 그 사실을 새 학년이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되었다. 교장 선생님은 우리를 한 교실에 모이게 한 다음 우리반이 흩어진다는 사실과 그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다른 급우 여섯 명과 함께 나는 텅 빈 복도를 지나 새 교실로 갔다. - P73

모든 사람이 다 그럴까? 나는 젊었을 때 지나치게 자신감을느끼거나 지나치게 자신 없어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나 자신을 너무 무능력하고 초라하며 보잘것없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스스로 전체적으로 보아 성공했으니 모든 일에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다. - P74

우리는 《오디세이》를 번역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작품을 독일어로 읽었다. 나는 그 작품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나는 선생님에게 지명을 받으면 별로 지체하지 않고 번역할 곳을 찾아 마음을 가다듬은 후 우리 말로 옮겼다. - P76

14

비행기 엔진이 고장났다고 해서 그것이 비행의 끝은 아니다. 비행기는 날아가던 돌멩이처럼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미끄러지듯이 날아간다. 초대형 다발 여객기는착륙 시도 시에 산산조각이 날 때까지 반 시간에서 45분 정도까지는 날아간다. 승객들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다. - P76

우리는 책 읽기와 샤워, 사랑 행위 그리고 나란히 눕기로 이어지는 우리의 의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전쟁과 평화》*를 읽어주었다. - P77

우리는 서로를 위해 애칭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이제 나를 꼬마라고 부르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수식어나 축소형*명사들을 이용해 개구리나 두꺼비, 새끼 늑대, 돌멩이 그리고 장미 등으로 불렀다. 나는 한나라는 이름을 고집했다. 그러던중 그녀는 내게 물었다. - P78

나는 그녀에게 내가 왜 그런 연상을 하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그녀는 자기 장딴지 근육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말이라고."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모르겠어......."
그건 평소의 그녀 태도가 아니었다. 평소에는 동의나 거부의사를 아주 분명하게 표현했다. - P79

한번은 함께 가까운 도시에 있는 극장에 가서 《간계와 사랑》을 보았다. 한나는 연극 구경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연극의 상연부터 휴식 시간의 샴페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마음껏 즐겼다. - P80

 한나에게 가기보다 차라리 수영장에있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게 되기까지는 오랜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7월의 내 생일에 나는 수영장에서 친구들의 생일 축하를 받고 친구들이 아쉬워하는 가운데 그곳을 빠져나와 일 때문에 탈진한 한나에게서 형편없이 기분 나쁜 영접을 받았다. - P81

그녀는 그해 여름 나의 생활이 이제 더 이상 그녀와 학교 그리고 공부 주변만을 맴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늦은 오후 그녀에게 갈 때면 나는 수영장에 들렀다가 가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 P80

15

그 후 나는 그녀를 배반하기 시작했다.
한나와 나 사이의 비밀을 세상에 알렸거나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내가 침묵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은 어느 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 P82

내가 나의 속을 완전히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친구들이눈치 챈 것은 상황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 P83

"너 오랫동안 아팠지. 간염 때문에 말야. 너를 괴롭히는 게바로 그거니? 넌 다시 전처럼 건강을 되찾지 못할까 봐 겁나니? 의사 선생님들이 무슨 말이라도 했니? 그래서 넌 매일 병원에 가서 피를 바꾸어 넣거나 주사를 맞아야 하니?"
한나를 병으로 생각하다니. 나는 부끄러웠다. - P84

16

(전략). 우리는 함께 공유하는 생활 세계가 없었으며, 그녀는 그녀 인생에서 내게 허용하고 싶은 만큼의 자리만 내주었을 뿐이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 P85

게다가 나는 그녀가 자주 즐겨 간다고 말한 거리나 상점, 영화관에서 그녀를 단 한 번도 우연히 마주친 적이 없다. 만나고 처음 몇 달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런 곳에 함께 가자고 졸랐지만, 그녀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 P86

한나는 하루 종일 평소와 다른 특이한 기분이었다. 변덕스러웠고, 고압적이었으며, 동시에 그녀를 극도로 괴롭히고 예민하게 만드는 무슨 압박감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 P87

17

다음 날 그녀는 떠났다. 나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그녀의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다. - P90

나는 이름 하나와 키르히하임에 있는 주소를 얻었다. 나는 차를 타고 그곳으로 갔다.
"슈미츠 부인이요? 그 여자는 오늘 아침에 집을 비웠어요."
"그러면 가구들은요?"
"그건 그 여자 물건이 아니에요." - P90

"그녀가 오늘 아침에 전화를 걸었어요. 그래도 제때 전화를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대신 투입할 수 있었지요. 이제 안나온다고 하더군요. 영원히." 그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2주 전에 그녀는 바로 여기에 앉아 있었어요.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의자에 말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전차 운전기사 교육을 받아보라고 제안했지요. 그런데 그녀는 모든 것을 내팽개친 겁니다." - P91

몇 번이고 나는 내가 본 것은 그녀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시켜보려고 했다. 얼굴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녀였다고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 P92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녀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서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 P92

제2부


나는 내가 그녀를 배반하고 부정했기 때문에 그녀가 내게서 떠나버렸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단지 전차 회사에서 자신의 약점이 노출될까 봐 두려워 도망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쫓아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그녀를 배반했다는 사실을 바꾸어놓지는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유죄였다. 그리고 범죄자를 배반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으므로 내가 유죄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범죄자를 사랑한 까닭에 유죄였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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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그러면 이번 질문은 대답하지 않아도 돼. 백해나를 좋아했니? 릴리만큼은 아니더라도, 확실히 결론 내릴 수 없더라도… 속으로만 생각해봐."

(개, 말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신경 관계망의 더 넓은 부분이 반응하는데, 두 질문에서 공통으로 보였던 패턴이 다시 나타난다. 여기에는 부연 설명이 없지만 시청자는 그 의미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도하는 프로그램을 조작해 초기화 화면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잘못 설치된 프로그램을 지우듯이, 아무 망설임도 없이 초기화 명령을 내린 다음 정면을 바라본다.) - P165

도하

"인공지능 설계가 인간의 오만인지 아닌지는, 그리고 인공지능이 설계되는 방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주제로 떠드는 사람은 아주 많고, 여러분에게도제각기 의견이 있을 테니까요. 다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싶습니다 인간이 완전히 설계되거나 수정될 수 없다는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삶으로부터 결핍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건, 한편으로는 타인의 해결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건 사실 고통스러운한계가 아닐까요?"

(초기화 게이지가 100퍼센트에 달하자 알림창이 뜬다. 도하는 확인 버튼을 누르고, 프로그램을 종료한 뒤, 워크스테이션을 짐리해 협회 가방에 넣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카메라를 향해 다가온다. - P167

"미인가 인공지능이 걱정만큼 많진 않을 거예요. 쉬운작업이 아니거든요. 설계를 마친 신경 관계망을 범용 칩셋에서 실행 가능한 형태로 만들려면 건전성 검사를 포함한포팅 과정을 거쳐야 해요. (후략)." - P168

"우회하는 방법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박사가 단호하게 말허리를 잘랐다.
"그런가요? 보안 취약점을 미리 말해줘야 협회도 빨리대처할 텐데요." - P169

"면허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기대하지는 않으려고요. 그래도 어쨌든, 면허가 박탈당하더라도 수많은 사람 앞에서 떠드는 값으로는 충분하다고봐요. 흔한 기회가 아니니까요." - P170

"그래요, 편집 방향을 스스로 정할 기회는 흔치 않죠. 문제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늘어놓는 것과, 마음에 드는 반응이 돌아오는 건 완전히 별개라는 거죠. 다큐멘터리 반응이 많이 갈릴 거예요. 사람들이 누굴 제일 많이 욕하려나. 아무래도 나일 것 같은데. 탓할 상대가 하나쯤은 필요한데, 죽은 사람을 들먹이기엔 미안하니까." - P170

"때마침 우리 개는 기억도 날아갔으니까,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고요. 내가 위험한 약을 구한 다음 가루로 갈아서백해나가 술을 마실 때 몰래 섞었다고, 처음부터 죽을 줄알고 있었다고, 백해나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것처럼 개를 들고나온 게 그 증거라고, 설계사도 공범이고, 개도 공범이고, 그래서 아예 초기화해버린 거라고, 그런데 백해나는 평소에도 그렇게 살았으니까 날 의심할 수는 없을 거라고, 신나서 떠들 사람이 한 명쯤 있겠죠." - P171

03

개와 소녀


쿠키 영상 촬영이 끝나자 릴리는 그 대목을 편집하지 말라는 언질을 남기고 떠났다. (후략). 자극적인 내용이 들어갈수록 쿠키 영상의 결제율이 올라갈 테니 배급사에는 기쁜 제안이었다. - P175

"거짓말이지. 릴리도 농담이라고 했잖아."
무엇보다도 필론 독살이 그토록 쉬운 일이었더라면 나는 설계사 면허를 따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어지간히 많이 먹은 게 아니라면 중간에 깨어나서 속에 든 걸 모두 게워내게 되고, 단번에 혼수상태에 빠질 만한 양은 들키지 않고 술에 섞을 수가 없다. - P177

"그 사람, 저녁에 만났다면서? 낮에 워크스테이션으로뭐 했어?"
"무슨 소리야?"
"가윤 씨. 그 사람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들고 나갔다고했잖아. 6시 넘어서 만났으면, 그전까지는 어디 있었던 거야?"
(중략).
"누가 그랬는데?"
"아까, 박사가." - P178

이제 나는 상황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이미지들 사이를 부유하고 있다. 중력을 무시하듯 솟아 올라가는 마천루들, 각각의 마천루 난간 위에 줄지어 선 인간들, 인간들이 차례차례 떨어지고 16차 선로를 질주하던 자동차들의 프레임은 예리한 날이 되어 몸을 토막 내고 보닛이 우그러지고 전면부 카메라가 피로 물든 자동차들이 서로 충돌한다. - P179

이 노력과 갈망에 액면 이상의 가치가 있길 바란다. 최소한 죽음보다 현명한 선택이었으면 한다. 그런데도 이따금 실수를 저지른다. 이를 너무 악물어서 턱이 아프고 눈앞이 깜빡거리는데 지금 당장 필요했던 질문이 정신의 어스레한 부분을 꿰뚫고 들어온다.
"지금 이게 재밌지? 재밌어서 미칠 것 같지?" - P181

정신은 물리적인 것에 얽매여 있다. 어긋난 뇌에는 훌륭한 영혼이 깃들지 못하며 금속의 마음을 좌우하는 것은 칩셋의 성능이자 신경 관계망의 설계다. 그것이 내가 평생으로부터 얻은 교훈이다. 다양함에 우열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설계상의 오류가 사소하므로 그러는 것이다. - P180

나는 아마도 웃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확실히 웃고 있다.
나는 잇새로 질질 흐르는 웃음을 그러모은다. 아니라고, 사무소 고객을 만났는데 밝히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 P181

변명하고 싶지 않으므로 나는 솔직히 받아들인다. 긴정적 끝에 동생도 솔직해지기를 내가 그 새벽에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제야 겨우 고개를 돌려 동생을 마주 보자 거기에 두 눈이 있다. 고양이가 죽은 날처럼 아무런 기대가 없이 어두운 눈, 동생이 내게 내리라고 말한다. (중략). 여기까지 택시를 부르는 비용이 얼마지? 사무소까지 가는 비용은? 그나저나 아직은 기회가 남아 있다.
"내리라니까." - P182

. 하지만 나는 릴리에게 어떤 약이든 준 적이 없고 백해나를 죽인 것은 백해나 자신이니까, 존재의 증거는 댈 수 있어도 부재의 증거는 댈 수 없으니까 길게 덧붙일 변명도 없다.  - P183

코앞에 있는 문이 들썩거리다가 멈춘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 조수석 방향으로부터 돌아 나온 동생이 망연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살덩어리를 뱉으며 정말로 아니라고 중얼거리고(다행히 나는 충분히 불쌍한 처지기 때문에 연기할 필요가 없다) 동생은 내가 바보라고 말한다(그런지도 모르겠다). - P185

내 입이 다시 한 차례, 고해하듯 피를 쏟아내고 동생의흰 손마저 피로 엉망이다 - P185

백해나의 죽음에 대해서라면 나도 박사도 릴리도 개도조금씩 거짓말을 했다.
동생이 알고 있는 것 외에도 세 차례의 만남이 있었다. - P186

하나, 3년 전의 초봄, 스무 살의 릴리는 첫 만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내 사무소로 걸어 들어왔다. - P186

"오랜만이에요. 백해나한테 감금당한 줄 알았는데요."
"뉴스는 보고 살았군요?"
"아뇨, 그런데 카페에 갔더니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역시나. 그나저나 3년 만에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거예요?" - P187

이건 집단상담에 익숙한 상담사나 법무법인을 찾아가야할 문제였고, 릴리에게는 충분한 수임료가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개가 미인가 인공지능인 덕분에 출로가 틀어막힌 상태였다. - P188

"음. 어차피 복사본을 만드는 건 쉽지 않아요.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죠. 복사본을 만들 때도 등록을 거치는데, 그쪽 보안 취약점이 최근에 막혔거든요. 초기 파일은 남아 있지만 지금의 개와는 차이가 있을 테고요. 그거라도 보내줄까요?"
릴리는 얼어붙은 듯 나를 바라보았고, 개와 시선을 마주쳤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안 돼요." - P188

"고급스러운 아파트든 단독주택이든 간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라는 이야기죠. 개를 데리고 무작정 도망쳐 나오더라도 갈 곳은 있어야 하니까요. 떨어져 지내다 보면 감정의 골이 메워질 수도 있고요."
"그런 다음에는요?"
"다음은 나중에 가서 생각해볼 일이죠. 지금은 뭐랄까.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 같아요." - P189

"혹시 말만 그렇게 해두고 사본을 만들려는 건 아니겠죠?
만약 그렇다면 ・・・ 생각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생각을 하면 막을 방법은 있고?"
나는 일부러 농담을 던진 다음 개의 표정 변화를 즐겼다.
인간형 몸체에 설치되었거나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복제본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지금의 개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 P190

"이것부터 묻자. 백해나를 좋아해볼 마음은 없어?"
"릴리를 그렇게 대하는 사람은 싫어요. 악의가 있든 없든, 백해나가 외롭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그 애가 이 소리를 들으면 슬퍼할 텐데. 협박 때문에 시작된 관계라 해도, 너희한테는 은인이고 말이야." - P191

백해나는 그해 여름이 끝나기 전에 죽었다. 약물중독이었다. 나는 그게 잘못된 생활 습관의 종착지인지, 아니면개의 태도와 연관이 있었을지 의문을 품었지만 릴리가 다시 사무소에 찾아오는 일은 없었으므로 금방 잊어버렸다. - P192

릴리는 개는 물론이고 박사와도 상의를 마친 상태였다.
잠적을 했을지라도 인맥이 아예 끊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개와 릴리는 다큐멘터리에 나가 죽음의 전말을 밝힐 예정이었고 제작 지원과 배급은 박사의 몫이었다. - P193

전개를 설명하는 릴리는 무언가를 되돌려놓으려는 것처럼 보였고 무언가를 앙갚음하려는 듯도 했다.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는 동안 흘러간 대사건들을 곱씹었다. - P194

출연을 결정하는 데에는 긴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내가 요구할 만한 부분도 하나 있었다. 동생이 방송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고, 그 애의 커리어에 선물을 안겨주고 싶다고 말하자 박사와 릴리는 기꺼이 승낙했다. - P195

사무소에서 다큐멘터리의 도입부에 들어갈 장면을 찍은다음 동생의 차를 타고 바닷가를 떠났다. 당분간 동생의 집에 머무르며 스튜디오로 출퇴근하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협회 수리소에 들른 것도 기억 추출인으로서의 역할 때문이었다. - P195

대기실에서 5시간을 기다려서 장비를 돌려받은 다음 동생에게 이제 들어가겠다며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동생의 답장과 동시에 릴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 P196

그리고 솔직히 이 시간에 이런 식으로 통보를 내리는 건달가운 상황이 아니다. 전직 슈퍼스타와 대기업 회장님이라 남을 부려 먹는 일이 익숙한 건지. 나는 살짝 으르렁댔고 은근한 협박도 섞었다. - P198

세 번째 만남. 시영과의 만남과 가윤과의 약속 사이에놓인 빈 시간, 나는 경제특구 외곽의 무인공장에 불려 나와있었다. 도심에서 그리 멀지는 않지만 오가는 사람이 거의없는 곳이었고, 근무자라고는 방범용 산업기계뿐이었다. 건물 전체가 박사의 통제를 받고 있는지 경로에 맞추어 문이 스스로 열렸다. - P199

"그러니까, 노이즈를 넣어야 할 대목이・・・ 어떤 내용이죠?"
"직접 봐요."
릴리는 그 말을 툭 던진 다음 일어나서 접견실 바깥으로향했다. 자신은 결코 보고 싶지 않다는 투였다. 박사가 직접 기억을 지울 수 있을 텐데도 구태여 나를 여기까지 부른 것은 기억의 내용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조금 더 뚜렷해졌다. - P200

"백해나가 그때까지 한 소리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었어요. 저는 화를 내지도 않았고 욕을 퍼붓지도 않았어요. 사소한 이야기였어요. 백해나가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 알지만, 설명도 할 수 있지만, 말 몇 마디 들었다고 죽는 건 수긍이 안 가요. 릴리가 무서워하는 것도요. 가끔은 그날 일때문에 마음이 아프지만, 그건 릴리가 저를 꺼리기 때문이지 백해나한테 미안한 감정을 느껴서는 아니에요. 후회한적 없어요." - P201

몸이 떨리고 있었다. 눈물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도같았다. 나는 개의 등줄기에 손을 얹은 채 내가 모르는 세상 어딘가에는 플라스틱과 금속과 단백질이 자연스레 뒤섞이고 화학물질과 전류가 하나 되어 흐르는 과학 법칙이 있으리라고, 그러니까 개와 나의 영혼이 이 순간에 공명하고 있다는 것도 진실일 거라고 믿어보았다. - P203



"믿고 싶은 걸 믿으려 하는군요. 전 이제 처음으로 거짓말을 멈춘 건데. 물론 당신이 저한테 의지했던 건 알고있어요. 알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거짓말을 한 거고요."
(비슷한 대화가 몇 차례 더 오간다. 길고 고통스러운 침묵.) - P206

백해나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 P206



"당신은 소리 지르고 화내고 두려워하는 것 외에는 모르고 살아갈 사람이죠."

(백해나, 개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그만 내던진다. 시야가 뒤흔들리다가 기울어진 채 정지하고, 곧바로 올바른 위치와 각도를 되찾는다. 개는 똑바로 선 채 백해나를 올려다본다. 여전히 단조롭고 친절한 목소리.)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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