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그러면 이번 질문은 대답하지 않아도 돼. 백해나를 좋아했니? 릴리만큼은 아니더라도, 확실히 결론 내릴 수 없더라도… 속으로만 생각해봐."
(개, 말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신경 관계망의 더 넓은 부분이 반응하는데, 두 질문에서 공통으로 보였던 패턴이 다시 나타난다. 여기에는 부연 설명이 없지만 시청자는 그 의미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도하는 프로그램을 조작해 초기화 화면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잘못 설치된 프로그램을 지우듯이, 아무 망설임도 없이 초기화 명령을 내린 다음 정면을 바라본다.) - P165
도하
"인공지능 설계가 인간의 오만인지 아닌지는, 그리고 인공지능이 설계되는 방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주제로 떠드는 사람은 아주 많고, 여러분에게도제각기 의견이 있을 테니까요. 다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싶습니다 인간이 완전히 설계되거나 수정될 수 없다는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삶으로부터 결핍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건, 한편으로는 타인의 해결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건 사실 고통스러운한계가 아닐까요?"
(초기화 게이지가 100퍼센트에 달하자 알림창이 뜬다. 도하는 확인 버튼을 누르고, 프로그램을 종료한 뒤, 워크스테이션을 짐리해 협회 가방에 넣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카메라를 향해 다가온다. - P167
"미인가 인공지능이 걱정만큼 많진 않을 거예요. 쉬운작업이 아니거든요. 설계를 마친 신경 관계망을 범용 칩셋에서 실행 가능한 형태로 만들려면 건전성 검사를 포함한포팅 과정을 거쳐야 해요. (후략)." - P168
"우회하는 방법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박사가 단호하게 말허리를 잘랐다. "그런가요? 보안 취약점을 미리 말해줘야 협회도 빨리대처할 텐데요." - P169
"면허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기대하지는 않으려고요. 그래도 어쨌든, 면허가 박탈당하더라도 수많은 사람 앞에서 떠드는 값으로는 충분하다고봐요. 흔한 기회가 아니니까요." - P170
"그래요, 편집 방향을 스스로 정할 기회는 흔치 않죠. 문제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늘어놓는 것과, 마음에 드는 반응이 돌아오는 건 완전히 별개라는 거죠. 다큐멘터리 반응이 많이 갈릴 거예요. 사람들이 누굴 제일 많이 욕하려나. 아무래도 나일 것 같은데. 탓할 상대가 하나쯤은 필요한데, 죽은 사람을 들먹이기엔 미안하니까." - P170
"때마침 우리 개는 기억도 날아갔으니까,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고요. 내가 위험한 약을 구한 다음 가루로 갈아서백해나가 술을 마실 때 몰래 섞었다고, 처음부터 죽을 줄알고 있었다고, 백해나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것처럼 개를 들고나온 게 그 증거라고, 설계사도 공범이고, 개도 공범이고, 그래서 아예 초기화해버린 거라고, 그런데 백해나는 평소에도 그렇게 살았으니까 날 의심할 수는 없을 거라고, 신나서 떠들 사람이 한 명쯤 있겠죠." - P171
03
개와 소녀
쿠키 영상 촬영이 끝나자 릴리는 그 대목을 편집하지 말라는 언질을 남기고 떠났다. (후략). 자극적인 내용이 들어갈수록 쿠키 영상의 결제율이 올라갈 테니 배급사에는 기쁜 제안이었다. - P175
"거짓말이지. 릴리도 농담이라고 했잖아." 무엇보다도 필론 독살이 그토록 쉬운 일이었더라면 나는 설계사 면허를 따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어지간히 많이 먹은 게 아니라면 중간에 깨어나서 속에 든 걸 모두 게워내게 되고, 단번에 혼수상태에 빠질 만한 양은 들키지 않고 술에 섞을 수가 없다. - P177
"그 사람, 저녁에 만났다면서? 낮에 워크스테이션으로뭐 했어?" "무슨 소리야?" "가윤 씨. 그 사람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들고 나갔다고했잖아. 6시 넘어서 만났으면, 그전까지는 어디 있었던 거야?" (중략). "누가 그랬는데?" "아까, 박사가." - P178
이제 나는 상황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이미지들 사이를 부유하고 있다. 중력을 무시하듯 솟아 올라가는 마천루들, 각각의 마천루 난간 위에 줄지어 선 인간들, 인간들이 차례차례 떨어지고 16차 선로를 질주하던 자동차들의 프레임은 예리한 날이 되어 몸을 토막 내고 보닛이 우그러지고 전면부 카메라가 피로 물든 자동차들이 서로 충돌한다. - P179
이 노력과 갈망에 액면 이상의 가치가 있길 바란다. 최소한 죽음보다 현명한 선택이었으면 한다. 그런데도 이따금 실수를 저지른다. 이를 너무 악물어서 턱이 아프고 눈앞이 깜빡거리는데 지금 당장 필요했던 질문이 정신의 어스레한 부분을 꿰뚫고 들어온다. "지금 이게 재밌지? 재밌어서 미칠 것 같지?" - P181
정신은 물리적인 것에 얽매여 있다. 어긋난 뇌에는 훌륭한 영혼이 깃들지 못하며 금속의 마음을 좌우하는 것은 칩셋의 성능이자 신경 관계망의 설계다. 그것이 내가 평생으로부터 얻은 교훈이다. 다양함에 우열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설계상의 오류가 사소하므로 그러는 것이다. - P180
나는 아마도 웃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확실히 웃고 있다. 나는 잇새로 질질 흐르는 웃음을 그러모은다. 아니라고, 사무소 고객을 만났는데 밝히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 P181
변명하고 싶지 않으므로 나는 솔직히 받아들인다. 긴정적 끝에 동생도 솔직해지기를 내가 그 새벽에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제야 겨우 고개를 돌려 동생을 마주 보자 거기에 두 눈이 있다. 고양이가 죽은 날처럼 아무런 기대가 없이 어두운 눈, 동생이 내게 내리라고 말한다. (중략). 여기까지 택시를 부르는 비용이 얼마지? 사무소까지 가는 비용은? 그나저나 아직은 기회가 남아 있다. "내리라니까." - P182
. 하지만 나는 릴리에게 어떤 약이든 준 적이 없고 백해나를 죽인 것은 백해나 자신이니까, 존재의 증거는 댈 수 있어도 부재의 증거는 댈 수 없으니까 길게 덧붙일 변명도 없다. - P183
코앞에 있는 문이 들썩거리다가 멈춘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 조수석 방향으로부터 돌아 나온 동생이 망연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살덩어리를 뱉으며 정말로 아니라고 중얼거리고(다행히 나는 충분히 불쌍한 처지기 때문에 연기할 필요가 없다) 동생은 내가 바보라고 말한다(그런지도 모르겠다). - P185
내 입이 다시 한 차례, 고해하듯 피를 쏟아내고 동생의흰 손마저 피로 엉망이다 - P185
백해나의 죽음에 대해서라면 나도 박사도 릴리도 개도조금씩 거짓말을 했다. 동생이 알고 있는 것 외에도 세 차례의 만남이 있었다. - P186
하나, 3년 전의 초봄, 스무 살의 릴리는 첫 만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내 사무소로 걸어 들어왔다. - P186
"오랜만이에요. 백해나한테 감금당한 줄 알았는데요." "뉴스는 보고 살았군요?" "아뇨, 그런데 카페에 갔더니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역시나. 그나저나 3년 만에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거예요?" - P187
이건 집단상담에 익숙한 상담사나 법무법인을 찾아가야할 문제였고, 릴리에게는 충분한 수임료가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개가 미인가 인공지능인 덕분에 출로가 틀어막힌 상태였다. - P188
"음. 어차피 복사본을 만드는 건 쉽지 않아요.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죠. 복사본을 만들 때도 등록을 거치는데, 그쪽 보안 취약점이 최근에 막혔거든요. 초기 파일은 남아 있지만 지금의 개와는 차이가 있을 테고요. 그거라도 보내줄까요?" 릴리는 얼어붙은 듯 나를 바라보았고, 개와 시선을 마주쳤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안 돼요." - P188
"고급스러운 아파트든 단독주택이든 간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라는 이야기죠. 개를 데리고 무작정 도망쳐 나오더라도 갈 곳은 있어야 하니까요. 떨어져 지내다 보면 감정의 골이 메워질 수도 있고요." "그런 다음에는요?" "다음은 나중에 가서 생각해볼 일이죠. 지금은 뭐랄까.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 같아요." - P189
"혹시 말만 그렇게 해두고 사본을 만들려는 건 아니겠죠? 만약 그렇다면 ・・・ 생각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생각을 하면 막을 방법은 있고?" 나는 일부러 농담을 던진 다음 개의 표정 변화를 즐겼다. 인간형 몸체에 설치되었거나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복제본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지금의 개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 P190
"이것부터 묻자. 백해나를 좋아해볼 마음은 없어?" "릴리를 그렇게 대하는 사람은 싫어요. 악의가 있든 없든, 백해나가 외롭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그 애가 이 소리를 들으면 슬퍼할 텐데. 협박 때문에 시작된 관계라 해도, 너희한테는 은인이고 말이야." - P191
백해나는 그해 여름이 끝나기 전에 죽었다. 약물중독이었다. 나는 그게 잘못된 생활 습관의 종착지인지, 아니면개의 태도와 연관이 있었을지 의문을 품었지만 릴리가 다시 사무소에 찾아오는 일은 없었으므로 금방 잊어버렸다. - P192
릴리는 개는 물론이고 박사와도 상의를 마친 상태였다. 잠적을 했을지라도 인맥이 아예 끊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개와 릴리는 다큐멘터리에 나가 죽음의 전말을 밝힐 예정이었고 제작 지원과 배급은 박사의 몫이었다. - P193
전개를 설명하는 릴리는 무언가를 되돌려놓으려는 것처럼 보였고 무언가를 앙갚음하려는 듯도 했다.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는 동안 흘러간 대사건들을 곱씹었다. - P194
출연을 결정하는 데에는 긴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내가 요구할 만한 부분도 하나 있었다. 동생이 방송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고, 그 애의 커리어에 선물을 안겨주고 싶다고 말하자 박사와 릴리는 기꺼이 승낙했다. - P195
사무소에서 다큐멘터리의 도입부에 들어갈 장면을 찍은다음 동생의 차를 타고 바닷가를 떠났다. 당분간 동생의 집에 머무르며 스튜디오로 출퇴근하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협회 수리소에 들른 것도 기억 추출인으로서의 역할 때문이었다. - P195
대기실에서 5시간을 기다려서 장비를 돌려받은 다음 동생에게 이제 들어가겠다며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동생의 답장과 동시에 릴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 P196
그리고 솔직히 이 시간에 이런 식으로 통보를 내리는 건달가운 상황이 아니다. 전직 슈퍼스타와 대기업 회장님이라 남을 부려 먹는 일이 익숙한 건지. 나는 살짝 으르렁댔고 은근한 협박도 섞었다. - P198
세 번째 만남. 시영과의 만남과 가윤과의 약속 사이에놓인 빈 시간, 나는 경제특구 외곽의 무인공장에 불려 나와있었다. 도심에서 그리 멀지는 않지만 오가는 사람이 거의없는 곳이었고, 근무자라고는 방범용 산업기계뿐이었다. 건물 전체가 박사의 통제를 받고 있는지 경로에 맞추어 문이 스스로 열렸다. - P199
"그러니까, 노이즈를 넣어야 할 대목이・・・ 어떤 내용이죠?" "직접 봐요." 릴리는 그 말을 툭 던진 다음 일어나서 접견실 바깥으로향했다. 자신은 결코 보고 싶지 않다는 투였다. 박사가 직접 기억을 지울 수 있을 텐데도 구태여 나를 여기까지 부른 것은 기억의 내용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조금 더 뚜렷해졌다. - P200
"백해나가 그때까지 한 소리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었어요. 저는 화를 내지도 않았고 욕을 퍼붓지도 않았어요. 사소한 이야기였어요. 백해나가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 알지만, 설명도 할 수 있지만, 말 몇 마디 들었다고 죽는 건 수긍이 안 가요. 릴리가 무서워하는 것도요. 가끔은 그날 일때문에 마음이 아프지만, 그건 릴리가 저를 꺼리기 때문이지 백해나한테 미안한 감정을 느껴서는 아니에요. 후회한적 없어요." - P201
몸이 떨리고 있었다. 눈물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도같았다. 나는 개의 등줄기에 손을 얹은 채 내가 모르는 세상 어딘가에는 플라스틱과 금속과 단백질이 자연스레 뒤섞이고 화학물질과 전류가 하나 되어 흐르는 과학 법칙이 있으리라고, 그러니까 개와 나의 영혼이 이 순간에 공명하고 있다는 것도 진실일 거라고 믿어보았다. - P203
개
"믿고 싶은 걸 믿으려 하는군요. 전 이제 처음으로 거짓말을 멈춘 건데. 물론 당신이 저한테 의지했던 건 알고있어요. 알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거짓말을 한 거고요." (비슷한 대화가 몇 차례 더 오간다. 길고 고통스러운 침묵.) - P206
백해나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 P206
개
"당신은 소리 지르고 화내고 두려워하는 것 외에는 모르고 살아갈 사람이죠."
(백해나, 개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그만 내던진다. 시야가 뒤흔들리다가 기울어진 채 정지하고, 곧바로 올바른 위치와 각도를 되찾는다. 개는 똑바로 선 채 백해나를 올려다본다. 여전히 단조롭고 친절한 목소리.)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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