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S.쿤의 책은 읽어본 적 있지만, 칼 포퍼의 책은 아직 한 번도 안 읽었기에, 그리고 최근 읽는 책이 많기에 이렇게 간접적으로 읽는 것이 많이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의문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가장 큰 의문 중 하나는 ‘과연 단칭 명제의 합이 곧바로 전칭 명제가 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20세기 전반에 활약했던 영국 철학자버트런드 러셀의 이름을 딴 ‘러셀의 칠면조‘라는 재미있는 우화가 있다. 칠면조를 키우는 농장주인은 아침마다 맛있는 먹이를 가져다주었다. 칠면조가 태어난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은 날이 선 칼을 들고 나타났다. 그날은 추수감사절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매번 반복되어온 일이 다음 날에도 똑같이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아무리 많은 단칭명제들을 모은다고 해도, 그것을 더해서 전 명제의 옳음을 최종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백조는 희다"라는 전칭 명제는 18세기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한 여행자들이 실제 검은 백조를발견함으로써 부정되었다. 과학이 승승장구한 이유를 귀납적 방법론에서 찾았던 논리 실증주의는 곤혹스러운 위기에 처했다. 비엔나학단은 결국 이 비판을 극복하지 못하고 급격히 힘을 잃어갔다. 과학의특별함을 밝히려는 시도는 이렇게 사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칼 포퍼였다. - P52
포퍼가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잣대로 제시한 반중주의는 말 그대로 반중(反), 즉 반대되는 증거를 말한다. 포퍼에 따르면, 과학의 조건은 반증 가능성이 있어야 하는데, 반증 가능성이란 한마디로 ‘경험적으로 반박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한다. - P53
그러나 반증주의라면 어떨까? 반증주의에 따르면, 진화론이 과학적 진리라고 최종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지만, 진화론이 거짓이라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진화론이 반증이 되지 않는한, 그것은 과학적 이론의 위치에 머무를 수 있다. 진화론은 완벽한이론이 아니고, 아직 불완전한 이론이지만, 아직 반중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과학의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포퍼는 과학적 지식의 성장이란 과학 가설들을 반증 가능성에 노출시켜 혹독한 시험을치르게 하고, 거기서 살아남은 가설을 선택하면서 발전하는 점진적과정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포퍼의 반증주의는 논리실증주의가 봉착했던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과학을 비과학과는 다른 여전히 합리적지식이자 발전적인 지식으로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 P54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크게 2권으로 나누어진다. 제1권은 플라톤과 유토피아를, 제2권은 헤겔과 마르크스를 다룬다. 책 제목에서 말하는 ‘열린 사회‘란 이성을 기반으로 개개인의 어떤 비판도 가능한 사회를 의미한다. 반면, ‘닫힌 사회‘란 하나의 유기체처럼 국가가 시민 생활 전체를 규제하며 개인의 판단은 무시되는 사회를 말한다. 포피가열린 사회의 적들로 규정한 것은 놀랍게도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라는 사상적 거인들이었다. 포퍼에 따르면, 이들의 이론은 모두 역사주의라는 공통된 기반을 갖고 있다. 역사주의의 핵심적 원리란 역사는특수한 역사적 법칙이나 진화적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며, 우리가 이법칙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운명을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 P55
제1권에서 포퍼는 플라톤의 역사주의를 철저하게 파괴한다. 그는 초기 그리스 사상에서 나타난 역사주의는 플라톤에 의해 정점을 이루었다고 본다. - P55
그에 따르면 인류의 정치 퇴보의 과정에는 4가지 정치 체제가 나타난다. 최초의 국가 형태인 완전한 국가 직후에 귀족들이 지배하는금권 정치가 오고, 그 뒤 부유한 문벌들이 지배하는 과두 정치가 오며, 다음으로 방종을 뜻하는 자유가 지배하는 민주 정치가 탄생하고, 마지막으로 전제적 군주가 지배하는 참주 정치가 나타난다. 물론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국가는 완전한 국가이다. 이 완전한 국가는 수호자들과 군인, 노동자들이라는 3개의 계급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지배 계급은 수호자들과 군인들이다. 계급에 대한 플라톤의 입장은 명확한데, 그는 "현명한 자는 통치해야 하며, 무지한 자는 따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 P56
플라톤은 국가 권력은 사실상 지배 계급의 손에 있으므로, 그들을 단합시키는 것이 국가를 지키는 최선의 길이라고 보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지배 계급에게 공산주의를 도입하는 것이다. 누구도 자기 부모를 알 수 없고, 다툼의 씨앗이 되는 사유 재산은 일절 배제되며, 교육과 양육도 지배 계급의 보존이라는 목적에 맞추어진다. 그것은 한마디로 어떤 개인의 비판적 참여도 봉쇄되는 전체주의이자, 완전 국가라는 이상을 탐닉하는 유토피아주의이다. 결국 포퍼에 따르면, 플라톤의 완전 국가는 비타협적 급진주의이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성을 던져버리고 혁명과 같은 정치적 기적을 갈구하게 만드는 헛된 망상일 뿐이다. - P56
제2권은 헤겔과 마르크스에 대해 논한다. 포퍼에 따르면 독일 철학자 헤겔은 현대 역사주의의 원천을 형성하며, 플라톤의 전체주의와 현대 전체주의의 교량 역할을 했다. 헤겔은 역사가 정론, 반론, 종합의 변증법 3단계의 과정을 반복하며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의 이념은 이 헤겔의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에 필연적인 발전 경로가 있다고 보았고, 따라서 스스로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 P57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법칙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되고 사회주의가 도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본의 집중은 빈익빈 부익부를 부추기며,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은 사회혁명으로 귀결되고, 사회 혁명이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성취되고 나면, 계급과 착취가 없는 사회주의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 발전 법칙 안에서 개인은 철저하게 계급에 종속되는 존재이자, 그 법칙을 따르는 존재여야 한다. - P57
그러나 포퍼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이런 주장은 이미 현실과 맞지 않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증거는 없으며, 혁명은 역사적으로 볼 때 다양한 정책적 수정, 예를 들어 과세 제도, 독과점 금지법 등 부르주아의 폭주를 막는 수단들에 의해 적절히 제어되기도 했다. - P57
한마디로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 법칙은 실제 역사적 경험에 의해 이미 반증된 것이나 다름없다. 포퍼는 21 장 마르크스의 예언에 대한 ‘평가‘에서 주장한다. - P58
이처럼 포퍼는 마르크스주의가 지닌 역사주의에 대항했고, 그 결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종말을 선언했다. - P58
그러나 동시에 반론도 쏟아졌다. 포퍼가 닫힌 사회의 예로 들었던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의 철학에 대한 이해가 너무 피상적이라는비판에서부터 ‘과연 포퍼가 말한 열린 사회가 정말 자유로운 토론이가능한 사회인가?‘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를 과연 누가 판단할 수 있는가?‘ 또 ‘포퍼가 말한 점진적 사회공학(개량)이 과연 인간 사회의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어쩌면 급진적 사회 혁명이 인류의 역사를 발전시켰고, 봉건주의를무너뜨린 자본주의도 그런 급진적 사회 혁명의 결과물임을 포퍼도부인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 P59
그러나 이 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포퍼의 이론이 갖는 의의가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닫힌 사회의 종말을 예상했을 뿐만 아니라, 비판적 합리주의라는 현대 사회의 가장 강력한 가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 P59
과학의 점진적 발전의잣대로 반증주의라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포퍼에 맞서 쿤은 과학의 합리적, 누적적 발전이라는 관념에 계속해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 P60
20세기 중엽을 넘어서면서 과학적 상대주의 진영은 강력한 힘을 얻었고, 지금은 과학의 합리성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포퍼가 제시한 반증 이론은 여전히 과학적 합리주의 진영에서 가장 강력한 아성을 구축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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