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슨주의자들과 휘그당원들 사이의 논쟁은 공화주의적 주제들이 19세기 전반에도 여전히 중요한 관심사였음을 보여준다. 양측 모두 경제 관련제도나 조치가 시민의식 차원에 미치는 결과를 강조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정치적 담론과 오늘날의 정치적 담론이 다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 P95
이런 쟁점들 중 하나는 과연 미국이 제조업 국가가 돼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는 이 쟁점이 해소되고 국내 제조업을 옹호하는 주장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 P95
바로 임금노동wage Labor, 즉 임금을 받을 목적으로 수행하는 노동이 과연 자유라는 개념에 부합하느냐는 것이었다. - P96
오늘날 임금노동이라는 개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는 많은 미국인이 이의를 제기했다. 공화주의적 자유 개념에 따르면 임금을 받을 목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로운지는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 P96
부당한 압력이나 강요 없다면 임금노동은자발적으로 계약을 맺는다는 의미에서 자유노동 free labor이다. 그러나 노동을 임금과 교환하는 자발적 합의조차도 자유노동에 대한 공화주의적 개념을 충족하지 못한다.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나‘는 자치에 참여하는 한에서만 자유롭다. - P96
유럽의 무산계급인 프롤레타리아처럼 고용주가 지급하는 임금만으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사람들은 자유 시민으로서 어떤 문제를 스스로 판단할 도덕적 · 정치적 독립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 P97
그러나 19세기 초수십 년 사이에 공화주의자 대부분은 농장에서뿐만 아니라 공장의 작업장에서도 시민적 기본 소양이 배양된다고 믿게 됐다. 19세기 초 미국 제조업의 거의 대부분을 떠맡았던 장인, 숙련공, 기술자들은 일반적으로 생산수단을 소유한 소생산자였다. 게다가 그들은 고용주에게 적어도 영구적으로는 매여 있지도 않았다. - P97
그들은 임금노동을 영구적인 생활방식이 아니라 독립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거치는 하나의 단계로 여겼다. 따라서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자유노동 체계와 모순되지 않았다.‘ - P97
그래서 월렌츠는 "요컨대, 바람직한 덕목을 갖춘 농민이라는 제퍼슨식 사회적 주제의 도시적 변용이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장인이라는 자부심, 의존에 대한 분노와 공포가 수공업에 대한 공화주의적 찬양으로 융합된 것이었다"라고 설명했다.² - P98
대규모 산업 생산이 등장하기도 전에 이미 시장경제가 성장하면서 전통적 수공업 생산의 형태가 바뀌고 있었다. 전국적 시장들에서 경쟁의 압력은 점점 거세지고 비숙련 노동자가 늘어나자 상인 자본가들과 작업장을 가진 고용주장인들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꾀를 냈다. - P98
자기 작업장을 가진 장인은 한층 더 고용주에 가까워졌고, 장인은 한층 더피고용인에 가까워졌다.³ - P99
처음에 고용주들은 공화주의적 용어를 동원해 새로운 질서를 옹호하며 "장인 공화국 artisan republic 이라는 대안적 기업가적 전망을 내놓았다. 공화주의 전통에 충실하게 따르면서 미합중국 연방, 바람직한 시민적 덕목, 독립성이라는 여러 이상을 내세운 것이다. 그들이 강조한 덕목에는 근면, 절제, 사회 화합, 개인의 창의성 등이 포함돼 있었다. - P99
남북전쟁이 끝나고 임금노동 체계의 옹호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자유노동이라는 시민적 개념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겠다는 시도를 포기하고 자발주의적 개념을 채택한다. 즉 그들은 임금노동이 도덕적이고 독립적인 시민을 길러내는 수단이 아니라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 맺어진 자발적 계약의 산물이기 때문에 자유 개념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 P100
그러나 당시의 전환이 결정적 분수령이었음은 분명하다. 이 전환을 계기로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에서 경제 성장과 분배 정의의 정치경제학으로, 공화주의적 공공철학에서 절차주의적 공화주의의 등장을 알리는 자유주의적 버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 P100
자유노동의 의미를 놓고 벌어지는 이 논쟁은 단순히 노동관계만을 따지는 데 그치지 않고, 내용과 형식 면에서 19세기 미국이 맞닥뜨렸던 두 가지 커다란 사건의 영향을 받았다. 두 가지 사건은 바로 산업자본주의의 등장과 노예제를 둘러싼 대립이다. - P101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반대하는 임금노동을 남부 노예제와 동일시함으로써 자기주장을 극대화했다. 실제로 그들은 임금노동 체계를 "임금노예제wage slavery " 라고 불렀다. 임금노동은 노동자를 가난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공화주의적 시민의식에 반드시 필요한 경제적·정치적 독립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노예제와 다름없다는 것이었다.⁷ - P101
"우리의 동료 시민들 가운데 그 누구도 임금노동자로 평생 힘들게 살아가는 운명을 짊어지는 계층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임금노동을 용인해야한다면 반드시 조건 하나가 전제돼야 한다. 어떤 노동자가 인생의 어떤연령대에 도달해 자리를 잡아야 할 때, 자기가 가진 돈으로 농장이든 가게든 간에 자기 소유의 작업장을 마련해 독립적 노동자가 되기에 충분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다."⁸ - P102
뉴욕의 노예제 폐지론자이던 윌리엄 제이 William Jay는 1835년에 쓴 글에서 노예제 폐지론자의 입장은 자발주의적 자유관을 토대로 한다는 점을분명히 밝혔다.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노예해방은 "불만의 모든 원인을 노예에게서 제거할 것이다. 노예가 자유로워지고 노예의 주인도 자유로워진다. 노예는 주인에게 해방 말고 다른 것을 더 요구할 게 없다". - P103
제이의 관점에서 임금노동은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의 자발적 교환이다. 따라서 임금노동은 곧 자유노동이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관점은 전혀 다르다. 임금노동은 자유노동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완전한 시민의식과는 양립할 수 없는 의존적 노동이다. - P104
제이가 해방이라고 여겼던 것을 노동운동에서는 독립성을 가로막는 의존성이라고 바라봤다.¹¹ 1830년대와 1840년대 내내 노동 옹호자들은 노예제 폐지론자들에게 자유에 대한 개념을 확장해 "임금제라 불리는 현재의 비참한 노동 체계를 개혁하는 작업을 운동에 포함시킬 것"을 촉구했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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