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는 정치적 체험을 기초로 별도의 철학 체계를 세우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며, 엄밀히 보면 이는 철학의근대적 방향을 특징짓는 원칙이기도 하다. 그런 관점에서, 철학도 이제하나의 체험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점을 인정하고 나면,
이제 철학을, 철학에만 묻혀 논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 P296

반복하건대, 철학은 종합적인 작업의 방향에서만 가능성의 총체일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비교적 종합적이었던 것은 헤겔의 철학이다. 적어도 그의 초기의 변증 작업을 보면 에로티즘이 그의 이론의 일부를 공공연히 차지했는데, 아마 에로티즘의 체험은 얼핏 보기보다 그에게 더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 P297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는 철학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닥치는 대로 모든 것에 손을 대던 당시의 낭만주의 철학의 특성에 대해 강경한 반론을 제기한 철학자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철학의 영역에서 즉흥적인 것을 몰아내 버런 잘못을 저질렀다고 탓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에서는 즉흥이 아예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헤겔의 빈틈없는 축조 (이것이 철학 용어라고 하더라도 이 용어를 쓰자면)는 특히 수집하게 해 주고, 수집과 체험을 분리시키게 해 주는 전문 분야로서의 가치를 갖추고 있다. - P297

헤겔의 철학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만 지적하고 넘어가면, 헤겔의 철학적 논리 전개는 전문성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헤겔 자신이 그러한 느낌을 못 벗어났던 듯하다. 그는, 반론을 예방하기 위해서, 철학도 시간 속의 전개이며 연속적 부분의 합으로진술되는 하나의 담론 체계임을 강조한 바 있다. 누구나 그렇게 인정할수 있다. - P298

전문화의 노력과 비교해 볼 때, 신성은 변덕스러운 것이다.
성자는 유효성을 찾지 않는다. 그를 자극하는 것은 오직 욕망뿐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에로티즘의 인간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이제 남은 일은 계획의 전문화, 다시 말해 계획의 유효성을 보장해 주는 전문화가 철학, 내가 위에서 말한 가능성의 총체와 종합 작업으로서의 철학의 본질에 가까운 것인지 아니면 욕망이 거기에 더 가까운 것인지를 가늠하는 일이다. - P299

이야기를 더 진행시키기 전에, 비록 본질을 언급하려고 하면 그때마다 기본적으로 부딪히는 난관이 없지 않지만 나는 그 점을 무릅쓰라도에로티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넘어가고 싶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성행위는 금기에 의해 금지를 당하며, 에로티즘의 영역은 그러한 금기들에 대한 위반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동물들의성행위와는 다르다. 에로티즘의 욕망은 금기를 눌러 이기는 욕망이다. - P299

(전략), 그러니까 오늘날 문제되는 나체라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그것들을 고찰할 수도 있다.
사실 나체에 대한 금기는 예나 지금이나 아주 강하게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나체 금기는 역사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며, 그래서 아무도 그것의 무상성, 상대적 부조리를 모르지 않을 뿐 아니라 에로티즘(에로티즘이 되어 버린 성행위, 인간의 성행위, 언어 능력이 있는 존재의 성행위)의 보편적 테마를 디공하는 것은 나체에 대한 금기와 위반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 P300

내 생각에는 우선 금기와 위반의ㅜ이론이 어디서 비롯되는디를 상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중략) 나는 개인적으로 그의 구두 강의를 들은 적이 없지만, 위반에 관한 마르셀 모스의이론은 제자인 로제 카유아의 작은 책자 인간과 신성에 잘 드러나 있다. 더욱 다행한 것은, 로제 카유아는 단순한 편집에 그치지 않고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예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다가 자신의 능동적이고도 확고한 사상까지 가미시켰다 - P300

 나는 여기에 카유아의 진술의 도식을 빌려오고 싶은데, 그의 진술에 의하면, 인종학이 다루는 미개인들의 시간은 세속적 시간과 신성의 시간으로 갈려 있었다고 한다. 세속적 시간이란 일상의 시간으로써 노동의 시간이자 금기를 준수하는 시간이었다. 반면 신성의 시간이란 축제의 시간, 다시 말해 금기를 위반하는 시간이었다. 에로티즘의 차원에서 볼 때 축제는 성적 방종의 시간이다. - P300

내가 비전문적인 철학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문 작업으로서의 철학은 말하자면 하나의 노동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철학은 내가 처음에 언급한 강렬한 감동적 순간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배제한다. - P301

사실 극단적 인간성, 즉 인간의 성행위와 죽음의 폭발을 외면한채 오직 평범한 인간성만을 설명할 뿐인 철학의 기만적인 결과에 놀라는 것은 내가 처음이 아닐 것이다. 내가 보기에 철학의 이러한 싸늘한측면에 대한 반발은 키에르케고르는 말할 것도 없고, 니체에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근대 철학자들의 특징을 이룬다. 당연한 일이지만 철학은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P302

철학은 삶의 극단과 관련된 내가 어디에선가 ‘가능성의 극단‘이라고 표현한 것, 즉 철학적 대상의 극단을 끌어안지 못한 이유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죽음의 철학조차도 기본에 그친다면, 대상을 잊어버리고 만다. 물론 철학은 죽음에 파묻힐 때, 즉 죽음의 끝인 혼미에 자신을 내던질 때만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 P302

그러한 가정은 철학적 계율을 인정하는 동시에 파기를 전제하는데그러면 이제 철학은 모든 가능성의 총체로서의 종합 작업이 될 수 있다. 그 총체는 종합이지 단순한 더하기가 아닌 것이 왜냐하면 그곳은인간의 노력이 한계를 드러내며, 인간이 무기력에 기꺼이 자신을 맡기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계율이 없었다면 철학은 지금의 그 지점에이르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계율이 철학을 그것의 최종 목적지에 데려다 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경험적인 진리이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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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왔어요. 엘리베이터 타고 10층으로 올라와요. 1015호예요. 그냥 들어오면 돼요. 정면으로 쭉 들어와요."
시라이시 씨는 그나저나 참 번거롭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집에 올 때마다 이런 절차를 거칠까. 어이가 없었다. ‘꼭 무슨 의식 같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올라가니 살풍경한 복도가 이어졌다. - P80

‘어디서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는데.
『열대』의 첫머리에 가까운 장면이었다. 남양의 섬에 표류한 주인공은 사야마 쇼이치라는 남자의 안내를 받아 밀림 속에 있는 기이한 건물로 간다. ‘관측소‘라고 불리는 그 건물은 사야마쇼이치를 그 섬에 파견했다는 수수께끼 조직인 ‘학파‘가 세웠다. - P81

베란다에 작은 원형테이블 하나가 보였다.
메리 셀레스트호에 얽힌 해양 기담처럼 테이블 위에는 아직도김이 오르는 하얀 커피잔과 눈에 익은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열대』였다.
시라이시 씨는 망연자실해서 멈춰 섰다.
"어서 와요, 시라이시 씨.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 P81

"왜 의자가 이렇게 많은 건가요?"
"사람에게는 저마다 앉아야 할 의자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미소 지었다. "이건 『열대』에 나온 대사지만요."
시라이시 씨는 머뭇머뭇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왜 그걸 골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밝은 주황색 천으로 앉는 자리를 감싼작은 원형 스툴이었다. - P82

시라이시 씨는 머뭇머뭇 말했다.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면 어떨까요?"
"어머, 이것도 본론이에요."
・・・・・・ 그런가요?"
"세상만사가 『열대』와 관계있답니다."
지요 씨는 수수깨끼 같은 미소를 지었다. - P84

유리문으로 비쳐드는 햇빛 속에 그녀가 책을 폈다.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그게 『열대』의 첫머리라는 것은 시라이시 씨도 기억하고 있었다. - P84

표지는 확실히 눈에 익었다. 붉은색과 파란색의 기하학무늬,
‘사야마 쇼이치‘ ‘열대‘라고 적힌 무뚝뚝한 글자. 빈말이라도 세련된 장정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30년도 더 된 책일 텐데 꼭 제본소에서 막 빠져나온 것처럼 새것이었다. 불길한 예감을 안고 책을 펴자 모든 페이지가 백지였다.
‘가짜잖아요. 너무한데요. 저를 놀리셨군요."
지요 씨는 즐겁게 웃었다. - P85

지요 씨는 책을 내밀었다.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언젠가 쓸모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더니 지요 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을 놀리려고 초대한 건 아니에요. 개인적인 인양 작업을 도와주었으면 해요." - P85

"나한테뿐 아니라 당신한테도 비장의 카드가 될 거니까요.
다른 분들은 모르는 것 같던데 사막의 궁전은 아주 중요한 장면이거든요. 왜냐하면 무풍대를 지나서 있으니까. 그게 무슨의미인지는 알겠죠?"
"무풍대를 통과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건 해봐야 알 수 있겠죠. 나랑 당신 기억을 엮어서 그 장면을 재현해 봐야 해요. 그래서 당신을 초대한 거예요." - P86

시라이시 씨는 휑뎅그렁한 황야에 서 있었다. 황무지를 둘러싸듯 커다란 모래 언덕이 있고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파랗다.
옆에서 지요 씨가 어쩐지 다른 천체에 착륙한 느낌이라며 덧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문장을 읽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기억의 조각들을 주워 모으며 수수께끼 같은 황야를 뇌리에 그려갔다. 시라이시 씨는 "이게 진짜 인양 작업이군요" 하고 중얼거렸다. - P86

"봐요, 『천일야화』가 나왔죠?" 지요 씨가 말했다. "모든 게『열대』와 관계있어요."
"저도 조금은 알아요. 알라딘, 알리바바, 신드바드."
"그건 원래 『천일야화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나카쓰가와 씨한테 물어봐요. 자세히 알고 있으니까."
"전 그 사람이 불편해서요."
"안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 P87

폭풍 생각은 하면 안 된다고 지요 씨가 말했다.
언제나 폭풍에 가로막혀 그 이상 못 나갔다고 했다.
"이 궁전에 사는 사람은 누구죠? 생각해 봐요."
그러나 구름이 늘어나 맑은 하늘을 덮더니 굵은 빗방울이궁전 지붕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런 이미지가 멋대로 부풀어상상의 세계를 뒤덮으려 했다.
"폭풍 생각을 하면 안 돼요." - P88

"보름달의 마녀."
시라이시 씨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그 궁전에 사는 건 보름달의 마녀예요."
두 사람 모두 꿈나라에서 단숨에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 P88

"보름달의 마녀." 지요 씨는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이만 끝내죠"
"네? 벌써 끝이에요?" 시라이시 씨는 당황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요."
아닌 게 아니라 ‘보름달의 마녀‘라는 말을 생각해 낼 수 있었지만, 그게 『열대』라는 소설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궁전이 무엇인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 P89

지요 씨는 딱하다는 듯 말했다. "학파 분들에게 전해 주세요. 난 오늘부로 학파를 그만두겠어요. 당신도 언젠가 진실을 깨닫게 될 거예요. 당신들이 읽은 『열대』는 가짜예요."
"・・・・・…가짜라고요?"
"내 『열대』만이 진짜랍니다."
몇 분 뒤 시라이시 씨는 아파트에서 나와 멍하니 서 있었다. - P89

적당한 찻집에 들어가 시라이시 씨가 가짜 『열대』를 테이블에 꺼내놓자 이케우치 씨는 앗, 하고 작게 소리치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꼼짝도 하지 않고 『열대』를 응시했다. 시라이시 씨는 자신도 똑같이 속아놓고 이케우치 씨가 워낙 순순히 속아 넘어가 주는 바람에 기쁜 반면 딱한 마음도 들었다.
"가짜예요, 이거." 시라이시 씨는 단박에 책을 폈다. "저도 지요 씨한테 속았지 뭐예요." - P90

하리마 고개의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전화 통화로 주고받은말, 의자와 소파가 흩어져 있는 기묘한 방, 베란다에 놓여 있던가짜 『열대』, 지요 씨의 어린 시절 추억, ‘사막의 궁전‘ 인양 작업 그리고 ‘보름달의 마녀‘,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인데도 벌써 현실감이 엷어져 먼 옛날 일을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었다. - P90

이케우치 씨는 가짜 『열대』를 집어 들고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지요 씨가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모르겠단 말이죠. ‘당신들이 읽은 『열대』는 가짜예요. 내 『열대』만이 진짜랍니다."
"비유적인 표현일지도 모르죠. 시라이시 씨가 말했다. - P91

"지요 씨만이 진짜『열대』를 읽었고 우리가 읽은 『열대』는 전부 가짜였다는 겁니다. 흥미로운 가설 같지 않습니까?"
이케우치 씨는 노트를 펴고 백지에 선 하나를 그었다. - P91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무풍대의 수수께끼가 풀린단 말이죠 우리가 각각 다른 『열대』를 읽었다면 기억하는 조각이 일치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하나의 흐름으로재구성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처음부터 별개의 이야기니까요."  - P92

"그렇지만 『열대』는 사본이 아닌데요. 출판물이잖아요?"
"하지만 나카쓰가와 씨조차도 실물을 입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특수한 출판물이고 세상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는 건 전부 작가인 사야마 쇼이치가 꾸민 걸지도 몰라요. 한 권 한 권이 다 다른, 세상에 한 권뿐인 『열대』인 겁니다." - P92

한 달 만에 학파 사람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본 시라이시 씨는 문득 웃음이 났다.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확실히 『열대』에 얽힌 수수께끼는 흥미롭지만『열대』는 한 편의 소설에 불과하다. ‘학파니 뭐니 해도 요는 평범한 독서 모임 아닌가. - P93

"그 뒤 지요 씨께 몇 번 전화를 해봤습니다만 연락이 안 됩니다."
이케우치 씨가 말했다.
"지요 씨는 반칙을 할 생각인가 보군요."
"반칙이라뇨?"
"뻔하죠. 『열대』를 손에 넣는 겁니다."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일까. 그날 이야기해 본 인상으로는 지요 씨가 원하는 것이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P94

"우리는 이렇게 모여 1년도 더 넘게 『열대』에 관해 조사를벌여 왔습니다. 그동안 진전이 거의 없었습니다. 중대한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죠. 그런데 당신이 오자마자 꽤나 큰 발전이있군요."
"제가 뭔가 더 숨기는 게 있다는 말씀인가요?" - P94

"여러분, 좀 냉정을 되찾으시는 게 어떨까요? 『열대』는 그냥소설이에요.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을 만났으니까 수수께끼를 즐기면 되는 거예요. 전 아는 걸 전부 말했어요. 그런데 의심하신다면 전 두 번 다시 여기 오지 않겠습니다."
이윽고 이케우치 씨가 "맞는 말씀입니다"라고 동조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는 『열대』에 홀렸습니다. 정상이 아니에요." - P95

나카쓰가와 씨가 인양 작업 일람표를 펼쳤다.
지요 씨가 한 말을 믿는다면 사막의 궁전은 무풍대를 지나서 나온다. 이케우치 씨는 이야기의 후반에 펼쳐진 공백에 ‘사막의 궁전‘이라고 썼다. 화살표를 그리고 ‘보름달의 마녀?‘라고덧붙였다. 그러나 그 이름을 기억하는 학파 멤버는 없었다.
나카쓰가와 씨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건 ‘마왕‘ 하고 다른 인물입니까?" - P95

마왕은 『열대』에 등장하는 마술사다. ‘창조의 마술‘로 섬들을 만들어 내고 주인공이 표류한 해역을 지배한다. - P95

이케우치 씨는 머뭇머뭇 지난번 내놓았던 가설을 설명했다.
자신들이 읽은 사야마 쇼이치의 『열대』는 전부 내용이 각기 다른 책이었다는 가설이다.
나카쓰가와 씨는 뜻밖에 흥미가 동한 듯했다.
"재미있는 가설이군요. 현실적이진 않지만 저는 좋은데요." - P96

"애초에 왜 끝까지 읽은 사람이 없는 걸까요?"
"지난번에는 나카쓰가와 씨가 우연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우리는 다들 『열대』를끝까지 읽으려고 했습니다. 도중에 그만둔 게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책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디만 보세요, 책은 물체 아닙니까? 확고하게 그곳에 있는 겁니다. ‘읽는 도중에 사라지는 책‘은 만들 수 없어요. 무슨 마술도 아니고." - P97

(전략)
"방금 그 이야기를 듣고 하나 생각난 게 있는데요."
"뭡니까, 탐정 군."
"물리적인 독이 아니라도 되지 않을까요. 전 언어학이 전공인데, 언어 자체라기보다 언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있어서 전부터 최면이나 자기 암시에 관해 여러모로 조사해왔거든요. 그래서 생각났는데, 말하자면 열대에 언어적인 독이 있었다면 어떨까요?" - P99

이케우치 씨의 질문에도 신조 군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만약 『열대』의 목적이 암시에 있는 거라면 이야기 자체는중요하지 않아요. 서두 부분은 우리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썼습니다. 그건 먹잇감을 유인하기 위한 덫이죠. ‘언어적인독‘이 있는 건 그 다음이에요. 거기까지 유인하고 나면 이야기의 맥락 같은 긴 필요 없거든요. 중반 이후 우리 기억이 일치하지 않는 것도, 일관된 이야기를 찾지 못하는 것도 애초에 그런게 없기 때문이에요. 무풍대는 언어적인 독을 감춘 장소에 불과한 거죠." - P100

신조 군은 문득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죠. 시라이시 씨말처럼 『열대』는 그냥 소설이거든요.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푹 빠져 있는 걸까요. 꼭 저주 같잖아요." - P100

시라이시 씨가 두 번째로 참가한 학파 모임은 멤버들이 각각 『열대』에 관한 황당무계한 가설만 제시하고 끝났다. 그러나 결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학파 멤버 전원이 『열대』에 홀려 있다는 것만은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꼭 저주 같잖아요.
신조 군이 한 말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 - P101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편 뒤 지요 씨가 준 가짜 『열대』를 생각했다. 학파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는데 꺼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뭐, 상관없다. 어차피 가짜인데.
‘좀 더 냉정해져야지‘
학과 내에서만 『열대』이야기를 하는 게 문제다. 시라이시씨는 학창 시절 친구에게 전화를 해봤다.
"야호, 오랜만이네. 웬일이야?"
친구 모스키를 드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나는 듯했다. - P103

"그렇지만 재미있겠는데. 좀 조사해 볼게." 친구는 말했다.
"다음에 같이 밥 먹자."
그때부터 시라이시 씨는 앓아누워 그다음 주까지 일어나지못했다. 병원 검사 결과 유행성 독감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열이 유달리 내리지 않아 화장실에 가기도 힘겨울 정도였다. 감기에 걸리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 P104

고열에 시달렸던 사흘 동안 그녀는 『열대』와 관련된 꿈을 종종 꾸었다.
하나같이 단편적이고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여 있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남양의 섬이 나왔다가, 찻집 메리에서 열린 모임이 나왔다가, 하리마 고개의 아파트가 나왔다가 했다. 열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 데다 커튼 친 방에 몸져누워 있다보니 자칫하면 자신이 어디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지곤 했다. 사막의 궁전도 꿈에 등장했다. 모래에 파묻힌 텅 빈 궁전을 홀로 끝없이 방황하는 꿈이었는데, 꼭 진짜 기억처럼 현실감이 느껴졌다. - P104

 금요일에야 만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점심 지나 뜻밖에 이케우치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중략)
"………이케우치 씨, 무슨 일 있으세요?"
"금요일 밤에 교토로 갑니다." 이케우치 씨는 말했다. "낮에 모형 상점에 찾아뵐 수 없는데 저녁에 식사를 같이 할 수 없을까요? 교토로 가기 전에 『열대』에 관해 꼭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시라이시 씨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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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공백의 시간


구름이 하늘을 가득 뒤덮었다. 아까는 달빛도 비쳤는데 이제 별빛하나 보이지 않는다.
겐지가 손전등으로 탑을 비췄다.
몇 단인가 되는 계단이 앞에 있는 탑 입구의 두 짝 문이 보였다. 이문이나 그 위에 튀어나온 짧은 처마나 주위의 벽도 온통 밤의 어둠속으로 녹아들 것만 같은 검은색뿐이다. - P112

 나는 머릿속으로 그 모양을 그려보았다. 서로 같은 각도로 만나는 같은 길이를 지닌 열 개의 변. 하나의 내각은 144 도라는 계산이나온다. 서양식 탑에서 뜻밖에 자주 볼 수 있는 육각형이나 팔각형보다 당연히 훨씬 원에 가까운 도형이다. - P113

겐지는 말을 잇지 않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내내 탑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불쑥 나를 쳐다보았다.
"줄리앙 니콜로디라는 이름을 아나?"
겐지가 내게 물었다.
나는 허를 찔린 기분으로, "글쎄요"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P115

힐끔 나를 쳐다보고, 겐지는 탑 입구로 발길을 옮겼다. 나는 서둘러그 뒤를 따랐다. 땅바닥에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 검은 문 앞에 섰다.
"늘 자물쇠가 걸려 있다고 츠루코 씨에게 말했죠."
"응, 그럴 텐데."
겐지는 문 손잡이 부근을 비췄다.
"어? 아하, 이렇게 된 건가?"
자물쇠가 풀려 있나 보죠?"
"- 망가졌어." - P116

2

서늘한 습기를 머금은 짙은 어둠을 손전등 불빛으로 더듬었다.
지저분한 벽, 먼지투성이인 바닥,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판자 조각과 막대기 조각들………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내부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를 제대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손에든 손전등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 P117

탑의 꼭대기 층은 3층이었다.
다 올라가자 겐지는 바로 옆의 벽에 손전등 불빛을 향하더니 "좋았어" 라고 중얼거렸다.
"다행이군. 초가 남아 있네"
겐지가 라이터를 켜고 초에 불을 붙였다. 불꽃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시야를 좁히고 있던 어둠이 천천히 옅어져갔다. - P118

대충 설명하자면 정십각형의 바닥면 전체가 두 부분으로 나뉘어있었다. 우리가 서 있는 계단 언저리의 한 부분과 나머지 부분. 다만칸막이벽이 전면 목조 창살로 되어있어, 이 위치에서도 방전체의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 층이 툭 트인 공간으로 되어 있었다.
"이건"
나는 겐지를 바라보았다.
"마치 무슨・・・・・…."
마치 감옥 같다고 느꼈다. 창살로 나뉜 맞은편 쪽이 감옥 안, 이쪽이 바깥. - P119

"이 방은 대체 뭐하는?"
"뭐하는 방으로 보이나?"
겐지가 되물었다.
"아까 뭔가 이야기하려고 했잖아?"
"아, 그건."
"감옥 같다고?"
"예."
겐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깊은 숨을 들이쉬고 토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맞았네." - P120

"누구를 여기에?"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겐지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비밀이야. 그건 우라도 가문의 비밀. 그걸 알게 되면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걸." - P120

겐지는 몸을 돌려 방 안쪽으로 갔다. 손전등 불빛에 활짝 열려 있는 창문이 보였다.
"여기는 창문이 네 개 있어. 그 중에 발코니가 있는 것은 분명히 이것 하나뿐이지."
바닥에서 어른 키 높이까지가 창인 그것은 두 짝짜리 덧창이었다.
하지만 안쪽에 유리 창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비를 막는 문 역할을 하는 판자문이 붙어 있었다. 발코니로 나가서야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상하다면 이상한 모습이었다. - P122

"이 아래로군. 틀림없어."
그러면서 겐지는 난간에서 떨어져 발코니 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발자국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으음, 지금은 확실치 않군. 탑 안에는 남아 있는데."
"발자국이? 그래요?"
"아니, 눈치 채지 못했나? 하긴 이렇게 어두우니 할 수 없겠지."
당연한 이야기이기는 했다. 오래 사람이 출입하지 않은, 따라서 물론 청소도 하지 않았을 건물이다.  - P123

"이런 걸 발견했어."
그렇게 말하며 겐지는 왼손을 내밀었다. 나는 들고 있던 손전등 불빛으로 겐지의 손을 비췄다.
" - 시계?"
"그래. 회중시계야. 은으로 된 줄이 달려 있군." - P123

"문자판 유리는 무사한데, 바늘은 멈춰있네. 떨어지면서 망가진건가? - 여섯 시 반 지진이 일어났던 시각이지? 딱 들어맞는군."
"맞습니다."
"어?"
"뭔가, 또?"
"뒷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건・・・・・…."
겐지는 오른손의 손전등을 고쳐 쥐면서 왼손에 든 시계를 얼굴 앞으로 들어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 P124

"TE, 라고 되어 있네."
"TE...… 이니셜일까요?"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겐지는 회중시계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이 시계가 그 정년 물건이란 건 일단 틀림없을 거야. 그리고 이T-E라는 이니셜. 이게 그 친구 이름 머리글자일 가능성도 매우 높고,
어쨌든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겨우 발견되었군." - P124

내가 우라도 겐지와 처음 만난 것은 올 봄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이야기하면 지금으로부터 5개월 전- 4월 하순의 어느 날 밤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건물들, 특히 오래된 서양식 건물들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를 여러 날 쉴 때면 여기저기 여행을 하며 곳곳의 많은 건축물을 보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다행히도 고등학생 주제에 어쩌고 하며 그런 행동을 뭐라 하는 사람은 내 주변에 없었다.
물론 저 녀석은 좀 이상한 녀석이니까‘ 하는 생각이 주위 사람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날은 기타구北区 니시가하라西ヶ原에 있는 옛 후루카와 남작의 저택을 보러갈 생각이었다. 유명한 영국인 건축가 조셔 콘 JosiahCondler(1852~1920). 일본 건축 초창기에 크게 기여한 건축가가 지은 북방 고딕 양식을 갖춘 중후한 석조 서양식 저택이었다. 이 저택에 대해서는 이미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한번도 가볼 기회가 없었다. - P126

...... 여기까지다. 내 기억이 또렷한 것은.
그 뒤의 일에 관해서는 분명히 내가 한 행동이고 체험일 텐데 무엇하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끊어진 기억.
공백의 시간 머릿속에 남은 그 다음 기억은 병원의 약 냄새 나는 침대에 누운나를 낯선 사람들이 둘러서서 지켜보는 장면이다. - P126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머리에 둔한 통증을 느꼈지만 움직이는 것 자체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 나는 대체 누굴까?
초조한 의문이 옅은 안개가 깔린 듯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왜 내가 여기서 이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화요일 - 4월 22일 아침의 일이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우라도 겐지와의 첫 만남이었지만, 겐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 P128

그때, 또는 그 뒤에 겐지의 입을 통해 들은 객관적인 정보로 파악할 수 있었던 ‘사실‘은 이러했다.
일요일 밤 7시 30분경, 나는 고이시카와식물원 옆에 있었다.
옛 후루카와 지태에서 거기까지, 상당한 거리를 똑바로 남쪽으로내려왔다는 이야기다. 빗속을 걸어온 것인지, 아니면 무슨 교통수단을 이용해 이동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센다기에 있는 하숙집으로가지 않고 왜 그런 곳에 있었던 걸까? 물론 이유가 있어서 한 행동이었을 테지만 그 까닭을 나는 알지 못한다. - P128

겐지는 깜짝 놀라 나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내 반응은 뜻밖이었다고 한다. 도랑에 얼굴을 처박고 엎어져 있을 뿐,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넘어질 때 머리 어딘가를 세게 부딪힌 모양이었다.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응급조치를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사실을 겐지는 바로 깨달았다.  - P129

그렇게 병원으로 옮겨진 나는 그 병원에서 신속한 치료와 검사를 받았다.
치료 과정의 비교적 초기 단계에서 나는 일단 의식만은 쉽게 되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사실도, 그때 의사나 겐지로부터 들었던 설명들도,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어쩌다 사고를 당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였다. - P130

"교통사고 같은 것을 당했을 때, 사고를 당하기 어느 정도 전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뒤의 기억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닙니다."
담당 의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지만 학생의 경우에는 사고 발생 이후는 물론이고 - 당신 자신의 과거에 관한 기억 대부분을 현재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건 꽤 드문 증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지니고 있던 스케치북이나 가방은 모두 겐지가 병원까지 갖다주었다. - P130

"일시적인 기억상실 상태. 몸에 이상은 보이지 않으니, 굳이 이야기하자면 심인성, 또는 쇼크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됩니까?"
담당의사의 견해는 낙관적이었다.
"너무 심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문득 모든 것이 기억날 때가 올 겁니다. 지나치게 초조해하지 말고, 일단 천천히 요양을 하도록 하죠." - P131

다. 이렇게 되새겨보면 그날 그 병실에서 겐지와 만났던 그때부터 나는 내내 자신이 그때까지 살아왔던 현실과는 미묘하게 괴리된 묘하게 실체감이 옅은 세계 속을 계속 방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구마모토 산속에 있는, 암흑관이라 불리는 이 기묘한 저택을 방문하고 있는 것도 분명히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 P132

4

‘십각탑‘ 을 나와 우리는 바로 섬의 문으로 향했다. 겐지가 선착장을 살펴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청년이 어떻게 이 섬으로 건너왔는지, 역시 신경 쓰이지 않나?"
나무들 사이로 난 오솔길을 잰걸음으로 걸으며 겐지는 그 이유를설명했다. - P132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정보인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겐지는 그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엄청난 양의 커다란 자연석으로 단단하게 쌓아올린 이높은 ‘성벽‘. 아무리 풍부한 자금이 있었다 해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이런 것을 처음부터 쌓을 생각은 어지간해서는 하지 못할 테니까. - P133

"당시에 이 집에 들어와 살던 일꾼의 아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지만 말이야. 아이가 헤엄치다가 빠진 것을 어머니가 구해내려다 그만 두 사람 다."
나는 계속 물이 찰랑거리는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겐지가 말을 이었다. - P134

긴 돌계단을 내려와 기슭에 있는 잔교로 걸어가고 있었다. 겐지는나와의 대화를 중단하고 손전등 불빛을 그쪽으로 비쳤다. 겐지는 당연히 그 문제의 배가 거기 떠 있는 광경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 - 없군."
잔교에서 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 - P134

"배 말고 뭔가 섬으로 건너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건가요?"
"그래, 있네."
겐지는 대답을 하다가 "어?" 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오른손에 든 손전등을 고쳐 들더니 잔교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츄야, 저기." - P135

겐지는 잔교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수면으로 불빛을 비추고 있었다. 깊은 어둠의 틈새에 이상하게 출렁이는 물결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힘없이 흔들리는 검은 그림자.
-배다.
"어째서 저기에…..…."
"저 배를 섬까지 타고 온 다음에 제대로 로프에 묶어두지 않았던거로군. 그래서 떠내려간 거야."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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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 이론 -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자연과학선집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지음, 장헌영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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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을 써야지 생각을 하며 빈 백지를 보면 뭘 써야할 지 모르겠다.
예전에 쓴 것들은 그저 종이에만 새겨졌을 뿐, 어디로 이동된 적 없다. 옮기기도 귀찮다.

과학책은 요 근래 완독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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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의 기념품 코너 옆에 작은 책꽂이가 있었다.
마음대로 가져가도 되지만 대신 자기가 다 읽은 책을 두고가는 시스템인 듯했다. 마침 다 읽은 문고본이 있어서 그것을 책꽂이에 두고 한 권을 고르기로 했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책과 함께 긴 가을밤을 보내는 것도 근사한 일이다. - P58

"그냥 평범한 책이었는데요. 문고본보다 조금 긴 사이즈표지에 기하학무늬가 그려져 있고……… 한 10년 전에 나온 것일 법한 심플한 디자인이었습니다. 그 자태가 그때 제 기분과딱 맞더군요"
"운명의 만남인가요?" - P58

 이윽고 머리맡에 책을 두고 잠이 들었다.
나머지는 집에 갈 때 신칸센에서 읽을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아침이 되니까 책이 사라지고 없는 겁니다."
・・・・・・ 사라져요? 어떻게요?" - P58

"그걸 알 수 없단 말이죠. 하지만 분실한 건 어쩔 수 없으니까 도쿄로 돌아온 다음 찾아봐야지 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헌책방과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제가 읽은 소설을 찾을수가 없는 겁니다." - P59

이케우치 씨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노트를 쓰다듬었다.
"지금도 저는 그 책을 찾고 있습니다."
"어지간히 재미있는 소설이었나 봐요."
"사야마 쇼이치의 『열대』라는 소설이랍니다."
작가 이름과 제목을 들었을 때 어느 벤치에 앉아 책을 펴들고 있었던 기억이 갑자기 시라이시 씨의 머리를 스쳤다.
"그거 저 읽어본 것 같은데…………." - P59

"아바레야 책방?"
""날뛰는 밤‘이라고 쓰고 ‘아라비야‘라고 읽지." 주인은 가슴을 펴면서 말했다. "이것저것 재미있는 책이 많아."
여행지에서 책을 사는 것도 추억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책꽂이에 늘어선 책등을 훑어봤다.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제목들이었다.
"서점 포장마차는 처음 봤어요." - P61

이야기를 듣던 이케우치 씨는 "그렇군요"라며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소설의 결말은 어떻게 됐습니까?"
"글쎄요, 어땠더라…………"
시라이시 씨는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서두뿐. 한없이 모호한 기억만 남아 있었다. - P62

"...………아뇨,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열대』가 원래 그렇습니다."
무슨 뜻일까, 하고 시라이시 씨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 P62

시라이시 씨는 턱을 괴고 계산대에 앉아 『열대』를 생각했다.
맨 처음 떠오른 이미지는 새벽 바다를 달리는 열차였다. 모래사장에 서서 열차를 망연히 바라보는 젊은이. 그게 주인공이었다. 그는 기억을 송두리째 잃고 남양의 섬으로 흘러들어 왔다. 그 섬에서 그가 맨 처음 만난 인물이 ‘사야마 쇼이치‘다. 뜻밖에 작가 이름이 나온 탓에 그것만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단편적인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 P62

계속해서 허탕을 치는 사이에 그녀는 점점 화가 났다. 의미심장한 복선을 깔아놓고 회수하지 않다니 이케우치 씨도 무책임하다. 애를 태워 관심을 끌려는 작전일까. 자신은 이케우치씨의 덫에 걸린 걸까.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에둘러 유혹하는 사람이 존재할 리 없다.
어느새 그녀는 『열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P63

"실은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내일 오후 저희 독서 모임에 참가해 주실 수 없을까요? 아마 메리 찻집에서 보신 적이 있을텐데………."
"그거 독서 모임이었어요?"
"저희는 ‘학파‘라고 부르죠."
"...·학파? 어째 굉장한데요." - P64

"단편적인 기억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시라이시 씨는 입을 다물고 짙은 노란색 노트를 쳐다봤다.
찻집에서 본 수수께끼의 모임이 뇌리에 떠올랐다. 베레모씨, 말라깽이 군, 마담. 수수께끼의 소설 『열대』를 둘러싼 독서모임이었나. 멤버들 사이에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을 만도 했다. 더없이 수상쩍은데 설마 영검한 단지를 강매하는 것은 아니겠지. - P65

그녀가 들어섰을 때 학파 멤버들은 이미 구석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이케우치 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노트 페이지를 넘기고, 베레모 씨는 버터를 바른 토스트를 조금조금 먹고, 말라깽이 군은 일심불란하게 안경을 닦고 있었다. - P65

무척 기이한 분위기였다. 그녀는 ‘역시 괜히 왔다‘ 하고 생각했다.
이케우치 씨가 정신을 차린 듯 그녀를 소개했다. 
"이분은 시라이시 씨입니다. 이 건물 철도 모형 상점에서 일하시죠."
그 뒤 학파 멤버들이 자기소개를 했다. - P66

이 특이한 모임은 원래 지요 씨와 이케우치 씨의 만남에서시작됐다고 했다. 본격적으로 『열대』에 관해 조사하기 시작한그들은 이윽고 『열대』를 읽은 신조 군과 나카쓰가와 씨를 만나게 됐다. 네 사람이 모였을 때 나카쓰가와 씨가 이 모임에 ‘학파‘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 P66

이케우치 씨의 말에 시라이시 씨는 띄엄띄엄 이야기했다.
『열대』의 첫머리, 기억을 잃고 남양의 섬에 표류한 젊은이는 그 섬에 사는 사야마 쇼이치라는 인물에게 구조된다. 사야마에따르면 섬 주위는 마왕이 지배하는 해역이라고 한다. 마왕은
‘창조의 마술‘로 섬들을 마음대로 만들거나 없앨 수 있다. 사야마는 마술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학파‘라는 조직이 이 해역에 보낸 밀정이다. 이윽고 주인공은 사야마 쇼이치와 함께 마왕이 지배하는 군도로 쳐들어간다.
그러나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부분은 거기까지였다. - P67

이윽고 신조 군은 낙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야, ‘무풍대‘까지도 못 갔잖아."
"......‘무풍대‘가 뭐죠?"
"그건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이케우치 씨는 시라이시 씨에게 말한 다음 다른 멤버들을달래듯 말했다. - P67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할게요."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시라이시 씨는 머뭇머뭇 손을 들었다. "질문 좀 해도 될까요? 혹시 다른 분들도 끝까지 못읽으셨나요?"
"그렇습니다. 아무도 결말을 몰라요." 나카쓰가와 씨가 말했다.
"네? 그런 우연이 있어요?"
"있지 뭡니까." - P68

신조 군이 중얼거리자 나카쓰가와 씨가 히죽히죽 웃었다.
"신조 군은 탐정 소년이지만 벌써 1년 가까이 어물어물하고 있으니 명 추리를 기대하기는 이미 틀렸죠. 이 아가씨도 별로 믿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 P68

"그럼 인양 작업에 관해 설명합시다."
나카쓰가와 씨가 가방에서 둥글게 만 종이를 꺼내 테이블위에 폈다.
A4 용지를 이어 붙여 만든 연표 같은 것이었다. 학파가 설립된 뒤 그들은 기억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열대』의 편린들을 모아 이 종이에 적었다고 했다. - P69

시라이시 씨는 흥분했다. 그래, 자신이 읽은 『열대』는 이런 이야기였다. 하여간 괴상야릇한 이야기.
그러나 뒤로 갈수록 점점 메모는 혼란을 띠어 분기와 공백과 물음표가 많아졌다. - P69

시라이시 씨는 그 편린들을 가리켰다.
"이 다음부터는 지리멸렬한데요…………."
"그 부근이 아까 말이 나왔던 무풍대입니다." 이케우치 씨가말했다. "보십시오. 중반까지는 저희의 기억을 조합해서 『열대』의 전개를 꽤 극명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그 전략이 통하지 않는 겁니다. 어째서인지 저희 기억도 점점 불분명해진단 말이죠. 아무리 거듭 검토해도 편린을 올바르게 나열할 수 없어요. 이야기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혼돈의 영역을 저희는 무풍대라고 부르는 겁니다." - P70

시라이시 씨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종이를 응시했다.
한번 더 처음부터 『열대』의 이야기 전개를 살펴봤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 남방 섬의 관측소, 사야마 쇼이치라는학파의 남자, 마왕이 지배하는 해역, 지하 감옥의 죄수, 도서실을 드나드는 마왕의 딸, 마왕과의 대면 그리고 북방 유배, 그 부근부터 그녀의 기억도 모호해졌다.
그러나 기억을 뒤지던 그때 갑자기 하나의 정경이 떠올랐다. - P71

그녀는 용기를 내말해봤다.
"여기엔 ‘사막의 궁전‘이 없네요."
"사막의 궁전?"
학파 멤버들은 마주봤다.
"어떤 전개였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런 장면이 있었어요.
모래 언덕으로 둘러싸인 광대한 황무지 한복판에 궁전이 있거든요. 주인공은 누군가를 만나러 그 궁전을 찾아가요." - P71

이케우치 씨가 서둘러 볼펜을 꺼내 무대에 ‘사막의 궁전‘
이라 쓰고는 시라이시 씨에게 미소 지었다.
"이게 ‘인양 작업‘입니다."
이케우치 씨는 말했다.
"여기서부터 시작합시다." - P72

다음 모임은 1월 말에 열리는 모양이다.
헤어질 때 이케우치 씨는 말했다.
"뭔가 생각나는 게 있으면 노트에 적어두시면 좋습니다."
"글쿠나."
"네?"
"그런 속셈으로 노트를 주셨군요." - P72

머리에 문득 떠오른 편린을 기록하다 보면 또 새로운 것이 생각났다. 일련번호를 붙인 편린들이 쌓일수록 예전에 자신이 읽은 『열대』가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기억이 되살아나면 되살아날수록 『열대』는 더욱 수수께끼처럼 느껴졌다. - P73

이케우치 씨의 기억과 일치하는 것도 일치하지 않는 것도있었다. 하지만 끈기 있게 편린을 맞춰가다 보면 무풍대를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1월 말이 기다려지네요."
시라이시 씨가 말하자 이케우치 씨는 "글쎄요"라며 미소 지었다. - P73

"학파 사람들은 다들 『열대』의 수수께끼에 매료돼서 모였습니다. 실마리가 될 정보를 공유하기로 약속했죠. 하지만 강제는 아니고 강제하고 싶어도 강제할 수가 없어요. 나카쓰가와씨도 지요 씨도 신조 군도 자기만의 ‘비장의 카드‘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기엔 그렇습니다. 다들 『열대』를 독차지하고 싶은 거겠죠." - P74

지요 씨는 시라이시 씨를 응시했다. "꽤열심히 이야기 나누고 있죠? 두 사람이 반칙할 생각이라고 신조 군이 말하던데요."
(중략(
"다들 따로 속셈이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이케우치 씨도 예외는 아니에요. 신사적으로 보이지만 그 사람도 『열대』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서 애가 탄다고요. 우리는 일치단결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아요. 친목 클럽이 아니니까요." - P75

 어안이 벙벙한 시라이시 씨에게 "그럼 잘 있어요"라고 말하고는 안경을 끼고 우아하게 손을 흔들며 밖으로나갔다. 시라이시 씨는 흡사 우주인이 시비를 걸어온 것 같은기분으로 망연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만 봤다.
"이케우치 씨 예상이 맞았네." - P76

그런데 이케우치 씨는 지요 씨의 접근에 흥미진진해했다.
"역시 그렇게 됐군요. 이거 재미있어졌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례해요."
"원래 자기 길을 가는 분이거든요."
"그래도 그렇지….…." - P76

"학창 시절까지는 교토에서 지내다가 그 뒤 도쿄와 외국을왔다 갔다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 직장의 고객이시라 만나게됐죠. 파트너인 우미노 씨는 건축사무소를 경영하신답니다."
"....…… 영 마음이 안 내키는데요."
"당신도 비장의 카드를 손에 넣게 될지도 몰라요.‘
"전 비장의 카드 같은 거 필요 없다니까요." - P77

시라이시 씨는 삼촌이 준 철도 시계를 꺼냈다. 바늘은 오후1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고 옷의주름을 펴고 신발이 지저분하지 않은지 점검했다. 다른 사람집을 방문하는 것은 오랜만인 데다 지요 씨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꼭 면접 보러 갈 때처럼 배가 무지근해졌다. - P78

시라이시 씨는 지시 받은 대로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이케우치 씨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정말 잠복중일까, 전화해 볼까 하고 잠깐 생각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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