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운명의 만남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열흘이 지났다. 유일한 피붙이인 할머니가 돌아가셨지만 건이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거의 일 년 동안이나 자리에 누워 지냈다. 말도 못 하고, 건이를 알아보지도 못한 채로. - P9

그런데 오늘은 뭔가 이상하다.
‘누가 집에 들어왔어!‘
건이는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 사실을 알아챘다. 녹슨 철제 대문도, 이 층의 먼지 낀 창문도 그대로였지만 뭔가 달랐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예감 같은 것이었다. - P10

말 그대로 개나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좁았는데, 초등학교 2학년생치고 몸집이 작은 건이에게는 별 무리가 없었다. 건이는 부스러진 벽돌 틈을 헤치고 담장 안으로기어 들어갔다.
구멍 바로 안쪽은 화단이었다. - P10

집 뒤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건이는 깜짝 놀라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뭔가를 내리치는 소리 같았다.
‘도둑이라도 든 걸까? 훔쳐 갈 것도 없을 텐데‘
건이는 침을 꼴깍 삼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건이가 앉아있는 쪽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움직임에는 타오르는 불꽃의 기세를…………… 연결은 흐르는 물과 같아…………"
이번에는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 P11

건이는 부쩍 호기심이 당겼다.
노인 앞에는 큼직한 바위가 놓여 있었다.
분명 대문 근처에서 본 정원석인데 어떻게 저기로옮겼는지 모를 일이었다. 노인은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듯 읊조렸다.
·나무가 뿌리를 뻗듯 하체에 중심을 실을 것이며 주먹은무쇠처럼…………." - P12

‘으윽, 저 영감탱이 지금 제정신이야? 주먹이 완전 으스러는걸?‘
하지만 건이 눈앞에서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수북하게 쌓인 자갈 무더기, 그리고 연기처럼 푸시시 날리는돌가루와 벚꽃 잎 사이로 우뚝 선 노인.
놀랍게도 노인의 손은 말짱했다. - P12

조심조심 왔던 길로 다시 기어서 나가려는데 갑자기 코가 근질거렸다. 꽃가루가 날리는 꽃밭에 너무 오래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안 돼! 참아야 돼!‘
입과 코를 꽉 틀어막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에취잇!"
건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요란한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웬 놈이냐!" - P16

"안 돼 돌아가신 스승님께 맹세했다. 제자가 아닌 사람에게 오방구결이 누설되면 살려 두지 않겠다고"
눈앞이 캄캄했지만 건이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그 순간어떤 생각이 ‘번쩍‘ 머릿속을 스쳤다.
"그, 그럼 제잔가 뭔가 내가 해 주면 되잖아요!" - P17

노인이 어디선가 시멘트 벽돌 하나를 가져와 건이 앞에 툭 던졌다.
"깨봐"
"네에?"
노인은 짜증난다는 얼굴로 재촉했다.
"깨라고 주먹으로"
건이는 너무 황당해서 입만 쩍 벌렸다. 그 흔한 태권도장 한번 안 다녀 봤는데 무슨 수로 시멘트 벽돌을 깨? - P18

건이는 이를 악물고 벽돌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뚜둑!
"으아아아악!"
손가락뼈가 몽땅 부러진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이는 주먹을 감싸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하게 아팠다.
"홍! 이제 네 주제를 알겠느냐?"
건이가 아파 죽거나 말거나 관심 없다는 투였다. - P19

건이는 다시 벽돌 앞에 앉았다. 주먹이 벌겋게 달아올라 두배쯤 부풀어 있었다. 건이는 눈을 감고 아까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저 영감탱이도 깼는데 나라고 못할 리가 없어. 나도 할 수 있다!‘ - P19

건이는 눈을 질끈 감고 벽돌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퍼억!
그리고 또다시 휘몰아치는 통증은・・・・・・ 없었다. 놀랍게도 건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벽돌은 두 토막으로 갈라져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잘려 있었다. 칼로 두부를 자른 것처럼 아주 깨끗하고 매끈하게놀란 것은 건이뿐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태평하던 노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물들었다.
"이놈! 감히 누굴 속이려 들어? 네놈은 이미 무술을 익힌 녀석이 분명해! 나를 찾아온 목적이 뭐냐?" - P20

"엉엉...... 맘대로 해! 죽이든지 말든지!
어차피... 나 죽어도………… 아무도 몰라....
흑흑. 할머니도 죽었고...... 엉엉...... 그냥 보육원에 가기 싫어서도망친 줄 알겠지, 뭐. 엉엉엉......."
한번 울음이 터지자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로 끅끅대며 통곡했다. 노인은 당황한 얼굴이 되어 흠흠, 헛기침을 했다. - P21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제멋대로 엿봐 놓고는 뭘잘했다고 그렇게 우느냐?"
여전히 타박이었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부드러워진 말투였다.
너무 울었던 탓인지 딸꾹질이 났다. 건이는 그제야 조금 민망해져서 딸꾹질을 참아 보려고 애썼다.
"일단 수습 제자로 받아 주마. 수습 제자는 제자가 될 준비를하는 예비 제자다. 지켜보다가 자질이 없는 것 같으면 그때 죽여도 늦지 않겠지." - P22

건이가 코를 훌쩍이며 끼어들었다.
"수・・・・・・ 뭐 제자가 그런 것도 해야 돼요?"
노인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본래 진정한 수련은 잡일부터 시작되는 법이야!"
"......"
"아, 그렇지! 수습 제자가 해야 할 제일 중요한 일은 밥을 하는 것이니라. 그러고 보니 갑자기 시장하구나.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밥은 할 줄 알겠지?" - P23

2. 건방이의 탄생


"속았어 완전히 속았다고!"
건이는 저녁 설거지를 하면서 열 번째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있었다. 노인의 수습 제자가 된 지 벌써 일 년이 훌쩍 지났건만 권법 수련은커녕 온갖 집 안 잡일에만 도가 더 버렸다. - P25

오방도사는 옷도 오방색으로만 입었다. 오방색은 다섯 방위에 해당하는 색깔로 청, 백, 적, 흑, 황색이다. 오방색은 순수하고 섞음이 없는 색으로 모든 색의 기본이며 아무튼 좋은 색이라고 했다. 물론 이것도 귀에 딱지 앉을 정도로 오방도사에게 자주듣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그놈의 오방권법을 코딱지만큼도 못 배우고 있다는것이었다. - P26

일 년 전, 그러니까 둘이 처음 만났을 때 오방도시는 거지매우 가까운 상태였다. 평생을 혈혈단신 밖으로만 나돌았던 오방도사가 건이를 제자로 맞은 후에야 집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유산으로 물려받았다는 비밀의 집도 너무 낡아 폐가나 다름 없었다. - P27

"지필묵을 가져오너라."
오방구결을 쓰게 시키려는 모양이다. 이는 화선지 한 장과연필을 챙겨 들고 안방으로 갔다. 원래는 붓으로 써야 하지만 요즘에는 그냥 연필로 썼다. 건이의 엉망진창 붓글씨를 보다 못한 오방도사가 마지못해 연필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어스름한 안방에는 촛불 하나 켜져 있었다. - P27

오방구결은 오방권법을 사사받은 제자에게 구전으로만 내려오는 일종의 권법 이론이다. 오방도사도 돌아가신 스승님에게서 입으로 전해 들어 외우게 되었다고 했다. 암기 실력이 좋지 않은 건이도 똑같은 내용을 수백 장 쓰다 보니 이제는 오방구결을 달달 외우게 되었다. - P28

오방도사를 처음 만났을 때 일어났던 기적은 말 그대로 기적인 게 확실했다. 오방도사 역시 ‘저놈은 무술을 배운 놈이 아니야. 더구나 권법에 재능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건이가 오방구결을 모두 쓰자 오방도사는 읽어 보지도 않고종이를 촛불에 갖다 댔다.  - P29

어차피 오늘도 안 하고 넘어가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자 건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오방도사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웃기시네. 과로는 무슨 놈의 과로, 과로는 내가 하지. 날마다 설거지하라, 청소하라. 빨래하랴......."
"이놈, 대체 뭐라고 구시렁대느냐?"
"어휴, 어깨가 심하게 뭉치셨네요?"
건이는 서둘러 오방도사의 어깨를 팡팡팡 두들겼다. - P30

"왜요? 시간을 채우려면 아직 멀었는데."
오방도사는 건이의 말을 무시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휘적휘적 밖으로 나갔다.
"따라오너라."
건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오방도사를 따라 현관문을 나섰다. - P31

건이는 무슨 소린가 싶어서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그러자 오방도사가 짜증난다는 얼굴로 다시 말했다.
"깨라고 주먹으로"
그 말을 듣자 건이는 갑자기 오방도사를 처음 만난 날이 기억났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장소도 똑같았다. 이는 자다가무슨 봉창 두들기는 소리냐고 항의를 하려다가 오방도사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 P31

"씨이...... 뭘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고....."
건이는 오방도사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벽돌을 받았다. 일 년 전 그날과 똑같은 시멘트 벽돌
‘도대체 이놈의 벽돌은 어디서 자꾸 나오는 건지.‘ - P32

‘나는 할 수 있다!‘
건이는 정신을 가다듬고 돌 위에 주먹을 올려놓았다.
"이얍!"
건이는 불끈 쥔 주먹을 벽돌 위로 내리쳤다. 그러자 눈으로보고도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파삭!
벽돌에서 과자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건이가 놀라 내려다보니 벽돌이 형체를 알 수 없도록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벽돌이 그 지경인데도 손에 통증은커녕 느낌조차 거의 없었다. - P33

"쯧쯧, 권법을 배우는 게 이론만으로 될 줄 알았더냐? 네 녀석이 매일 했던 안마가 주먹을 단련하는 수련이었느니라. 안마를 할 때 나의 기가 너에게 전달되어서 자연스럽게 내공(內무술을 할 때 쓰이는 몸 안의 힘)이 쌓이게 된 것이지."
"오올, 그렇게 깊은 뜻이!"
건이는 뒤늦게야 존경의 눈길로 오방도사를 바라보았다. 오방도사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거만하게 헛기침을 했다. - P35

3. 이 년 후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는 시각 학원가 상점에서 두 명의 아이가 군것질을 하고 있었다.
"야, 그 소문 들었냐?"
"뭔 소문?"
초등학교 3학년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핫도그를 한입 베어 먹으며 물었다.
"머니맨 말아야" - P37

"그게 말이지, 머니맨은 나쁜 놈을 다 물리쳐 주고 나서…………
"그러고 나서?"
핫도그가 침을 꼴깍 삼켰다.
"돈을 달라고 한대"
"뭐?"
회오리 감자가 킬킬 웃었다.
"진짜야. 그래서 머니맨이래" - P38

골목길 모퉁이를 막 돌아선 순간이었다. 저쪽 가로등 아래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형 서너 명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뿌연 담배 연기도 보였다. 핫도그의 머릿속으로
‘담배 = 불량 청소년‘ 공식이 스치고 지나갔다.
‘침착하자. 별일 없을 거야‘
핫도그는 먹다 만 핫도그를 손에 꼭 쥔 채로 걸음을 재촉했다. - P39

핫도그는 간이 콩알만 해져서 도망가기를 포기하고 쭈뼛쭈뼛 가로등 쪽으로 다가갔다.
"크크...... 바짝 얼었네? 우리 나쁜 형아들 아니니까 걱정마. 물론 니가 잘 협조했을 때 얘기지만." - P40

핫도그는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산 지 일주일밖에 안 된 최신형 스마트폰, 그걸 사느라 일 년 넘게 모은 용돈을 모조리 쏟아부었는데・・・・・・분위기가 갑자기 험악하게 변했다.
"아, 이거 착하게 살아 보려고 했는데 영 협조를 안 해 주네.
가방 털어 봐서 나오면 그땐 죽는다"
"형들... 제가 잘못했어요. 한번만 봐주세요……………" - P41

핫도그는 죽을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도와주세요!"
핫도그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하며 눈을꼭 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순간 어디선가 스산한 바람이 휘익, 불어왔다.
퍽! 윽! 퍽! 악! 털썩!
바로 앞에서 치고받는 소리가 몇 번 들리는가 싶더니 사방이 고요해졌다. 핫도그는 질끈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 P42

아직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핫도그 앞으로 머니맨이 자박자박 걸어왔다.
"초딩은 500원, 중딩은 600원, 고딩은 700원인데 고딩 세 놈이니까 2,100원 7시가 지났으니까 야간 할증료 100원씩 추가해서 합이 2,400원이야."
머니맨은 기계처럼 억양 없는 목소리로 요금을 좔좔 읊으며한 손을 불쑥 내밀었다. - P44

머니맨은 투덜거리면서도 식어 빠진 핫도그를 깨끗이 먹어치웠다. 그리고 빈 막대기를 휙 집어 던진 후 지붕 사이를 붕붕날아 어디론가 향했다.
머니맨이 도착한 곳은 비밀의 집이었다. 비밀의 집 일 층 거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어? 사부가 왔나?"
건방이는 야구 모자를 벗은 후 서둘러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P45

4. 스승과 제자가 사는 법

(전략).
"어디를 싸돌아다니다 이제야 들어오느냐? 스승님 배곯는 것도 모르고!"
고개를 들어 보니 오방도사가 알록달록한 효자손을 들고 서있었다. 오방색 줄무늬로 칠해진 효자손은 오방도사가 늘 허리춤에 차고 다니며 애지중지하는 물건이다. - P46

요런 건방진 녀석! 으이구, 내가 이름을 잘못 지었어. 그러니까 네놈이 점점 더 건방져지지!"
"흥, 내가 건방져서 건방이면 사부는 오두방정이라 오방도사Al?"
"뭐야?"
오방도사는 약이 올라서 펄펄 뛰었다. 건방이는 그런 오방도사를 내버려 두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오방도사의 노여움은 배를 채우기 전까지 계속될 것이 분명했다. - P47

"열흘 만에 집에 오신 스승님한테 겨우 라면이냐?"
오방도사는 투덜거리면서도 서둘러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 뒤로는 말이 필요 없었다. 건방이와 오방도사는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후루룩후루룩 라면을 나눠 먹었다. 큼지막한 냄비안에 가득했던 라면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찬밥은 없느냐?" - P48

오방도사가 이렇게 일찍 돌아올 줄 몰랐던 것이 실수였다. 건방이는 할 수 없이 자기가 먹으려고 사 놓은 캔 콜라를 집어 들었다.
"엥? 이게 무엇인고?"
"식혜가 다 떨어졌어요. 그냥 콜라 마셔요."
"그러니까 자고로 제자란 스승님이 언제 어느 때 오시더라도불편함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아야 하는 법이라고 내가 누차 말하지 않았느냐! 네놈은 정신 상태가...……." - P49

"아, 뜸들이지 말고요. 설마 빈손으로 온 건 아니죠?"
건방이가 안달복달하자 오방도사는 눈짓으로 거실 한구석에 처박힌 괴나리봇짐을 가리켰다. 건방이는 잽싸게 괴나리봇짐을 풀어 헤쳤다. 봇짐 속에는 시들시들한 약초 서너 뿌리가 들어있었다.
"에계계
"에게...... 이게 다야? 열흘 동안 대체 뭘 한 거예요?" - P50

건방이는 오방도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신통풀을 살펴보았다.
"이십 년 근 눈밝이풀, 오 년 근 동물말통역풀...... 오, 이건돈이 좀 되겠는데? 사십 년 근 천하장사."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방도사가 끌끌 혀를 찼다.
"어린놈이 어쩌다가 저리 속세의 때가 묻었는지………… 쯧쯧" - P51

‘군것질할 용돈은 못 줄 망정 준비물 하나 제대로 못 사 주다니, 내가 정말 못난 스승이구나‘
오방도사는 잠깐 망설이다가 뒤돌아서서 바지 속에 손을 넣었다. 한참 부스럭대며 뭔가 뒤져 대던 오방도사가 꼬깃꼬깃 접은 지폐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하도 때가 타서 좀 피곤해 보이는 신사임당의 얼굴이 그려진 오만 원짜리였다. - P52

"제자야, 예전에 나 따라서 금강산에 가 보고 싶다고 했지?
다음번엔 꼭 데려가마. 내 약속하지."
건방이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실 오방도사가 가끔씩 가져오는 목돈은 적금 통장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중이다. 오방도사는 돈 관념이 유치원생보다 못해서 건방이의 그럴싸한 거짓말에도 속수무책이었다. - P53

5. 전학생 백초아


새 학년이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지만 교실은 여전히 들떠 있었다. 이제는 5학년, 명실상부한 고학년이 된 탓인지 교실은 작년보다 한층 꽉 찬 분위기였다.
"따끈따끈한 속보가 왔습니다! 오늘 우리 반에 전학생이 온다고 합니다!" - P55

"오늘 전학 온 친구다. 자기소개를 들어 볼까?"
여자애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가지런히 빗어 뒤로 질끈 묶어 넘긴 머리채가 허리까지 닿아 있었다.
"백초아야"
여자애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자기소개를 마쳤다. 그 흔한 ‘반가워라든가 ‘잘 부탁해‘라는 말도 없었다. - P56

"반갑다. 나는 5학년 2반 회장 김면상이야. 우리 반을 대표해서 환영할게. 궁금한 게 있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말해"
자기한테 얘기한 것도 아닌데 몇몇 여자애들이 얼굴을 붉히며 면상이를 훔쳐보았다.
‘어휴, 재는 저 오글거리는 말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냐‘
건방이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 P57

"그, 그럼, 앞으로 친하게 지내라"
담임은 상투적인 말로 어색한 상황을 마무리했다.
건방이는 어쩐지 고소한 생각이 들어 면상이의 얼굴을 슬쩍돌아보았다. 면상이는 무안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었다.
김새서 다시 고개를 돌리려던 건방이의 눈에 순간적으로 이상한 것이 보였다. - P58

건방이는 조용히 교실 문을 빠져나왔다. 건방이는 반 애들누구와도 친하지 않았다. 언제나 한발 물러서서 조용히 지켜보는 쪽이었다. 머니맨이 된 후로는 더욱더 그랬다.
벌써 3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건방이는 마음이 급해졌다.
큰길로 가면 마트까지 삼십 분도 더 걸릴 테고, 그럼 물 좋은
‘1+1 고등어‘나 ‘반값 삼겹살‘ 같은 건 다 팔려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 P59

건방이가 다른 집 지붕으로 점프하려던 찰나, 발소리가 들렸다. 건방이는 재빨리 지붕 위에 납작 엎드렸다.
"어? 쟤는?"
오늘 아침에 전학 온 백초아였다. 초아는 아침에 본 그 무표정한 얼굴로 따박따박 발소리를 내며 골목길로 걸어 들어왔다.
"윽, 여긴 변태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인데. 하긴 이제 막 전학을 왔으니 잘 모르겠지." - P60

지붕 위에서 막 뛰어내리려던 건방이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초아가 들고 있는 건 번쩍이는 검이었다. 그것도 두 자는 족히되어 보이는 긴 검.
놀란 건 건방이만이 아니었다. 초아 뒤를 바짝 쫓던 바바리맨도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저게 대체 어디서 나온거야?"
건방이의 궁금증은 곧 풀렸다. 초아가 검을 한번 휘두르자칼끝이 낭창거리며 흔들렸기 때문이다.
"아하, 연검이었구나!"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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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대전은
‘노잼도시‘였나


대전은 세종특별자치시와 충남 공주시, 충북 청주시 등과 접해 있고, 서울까지는 167.3킬로미터, 부산까지 238.2킬로미터, 광주까지는 169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대전에서 출발하면 어디든 웬만하면 3시간 이내 도착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남한의 중심이라 해서 ‘중도‘라고도 불린다.⁵⁹ - P68

59 대전광역시 홈페이지. (https://www.daejeon.go.kr/drh/DrhContents HtmlView.
do?menuSeq=2033) - P158

대한민국의 딱 중간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는 것 외에대전이 가진 장점은 ‘살기 괜찮다‘는 것이다. 한국갤럽이2019년 조사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고 싶은 도시‘ 조사 결과에서 대전은 서울과 부산, 제주에 이어 4위를 차지했다. - P68

2023년 7월 현재 144만4000여 명의 시민이 대전에 살고 있다. 전입 인구에서 전출인구를 뺀 수를 ‘순이동‘이라 한다. (그러니까 전국 순이동은 0이다.) 대전을 전입지로 한 순이동은 계속 ‘마이너스‘다.⁶³ - P69

63_통계청이 제공하는 <국내인구 이동통계>를 보면, 전입지 대전의 2018년 순이동자는 -1만 4753명이었고, 2021년엔 - 8931명, 2022년 - 2996명이다. - P159

지인이 대전에 온다는데, 어떡하지?
시작은 알고리즘이었다. "지인이 ‘노잼의 도시‘ 대전에 온다!
어쩌면 조아?"라는 질문에 한 소셜 미디어 유저는 귀여운 손글씨로 그린 알고리즘 순서도로 해결 방안을 찾았다. 64

64_금상진, <알고리즘으로 풀어본 지인이 대전에 온다면 ・・・ 기승전성심당?>, <중도일E), 2017. 4. 10. - P159

 대전광역시장은 2019년 대전 방문의 해를 맞아 ‘노잼‘ 이미지를 벗어나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닌데, 대전이 ‘노잼의 도시‘
이미지를 가지게 된 건 골칫거리 같았고, 2022년 봄 치러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대전의 노잼도시 이미지 탈출‘은 지방자치단체장 후보들의 중요한 정책 어젠다가 됐다. - P70

소셜 미디어 밈meme으로 시작했으니 소셜 미디어를 파봐야 했다. ‘노잼의 도시 대전‘이란 말은 대전에 대한 일종의지식이자 인식이다. 그 지식과 인식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알아야 했다. 이런 연구 질문을 던졌다. ‘소셜 미디어 텍스트에 언급된 ‘노잼도시‘는 무엇일까?‘ ‘대전과 ‘노잼도시‘는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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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에 없는 아산병원

미시간대학교 대학원 시절, 의학과 생명과학을 연구하는 한국인 연구자들이 한 달에 한 번 모여 한 사람씩 돌아가며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1년간의 연수를 받기 위해 대학교를 방문한, 아산병원의 정석훈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 P147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충청남도 ‘아산‘의 작은 병원에서 몇몇 의사를 대상으로 열리는 작은 세미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웬걸, 대구에서 나고 자란 저는 아산병원이 서울에 있는 매우 큰 병원이란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 P149

처음에는 조금 긴장되었지만, 다행히도 의학적인 문제를 수학으로 해결하는 방식에 많은 관심이 쏠리며 세미나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이것이 첫 단추가 되어 수면 학회에도 초청을 받게 되었고, 수면 학회에 꾸준히 참석하며 수학이 의학과 생명과학 연구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도 소개할수 있었습니다. - P148

많이 자면 덜 졸릴까?

기업이나 조직이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직원이 24시간을 나누어 근무하는 방식을 ‘교대 근무‘라고 합니다. - P149

(전략). 이러한 주간 근무 졸림증을 방지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뾰족한 해법은 아직 묘연한 상태입니다. - P149

평균 수면 시간이 길어지거나 수면 효율과 같은 여러 수면 지표가 좋아지면 당연히 교대 근무 중의 졸림도 사라질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림 5.1 와 같이 삼성서울병원의 교대 근무 간호사들의 평균 수면 시간과 주간 졸림 정도를 그려보았더니,
평균 수면 시간이 길어질수록 졸림 정도가 감소한다고 말할수 없었습니다. - P150

같은 시간을 자도 덜 졸린 이유

이 문제에 수학적으로 접근하려면 먼저 수면을 묘사하는 수리 모델이 필요합니다. ㅣ - P150

수면 역치를 보면 낮에는 높고 밤에는 낮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따라서 낮에는 어느 정도 수면 압력이 올라가도 졸리지 않은 반면 밤에는 졸음이 찾아와 쉽게 잠이 듭니다. 이처럼 수면 압력과 일주기 리듬을 알면 우리 몸이 원하는 자연스러운 취침 시간과 기상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면 압력과 일주기 리듬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매시간 혈액을 채취해 호르몬 변화를 추적해야 하기에 현실적으로 이를 알기란 불가능합니다. - P152

 잠깐! 스마트폰은 우리의 수면 패턴을 어떻게 아는 것일까요? 어제 잠자기 전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오늘 눈을 떴을 때 무엇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 P153

스마트 워치로 측정한 어느 간호사의 수면 패턴 데이터를수리 모델에 입력해 미분방정식을 풀면, 그림 5.3과 같이 수면 압력(검은색 실선)과 수면 역치 일주기 리듬(노란색 실선)을 역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깨어남 역치도 추정할 수 있지만 이 그래프에서는 생략했습니다.) - P153

이렇게 수면 압력과 일주기 리듬을 추정하면, 수면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매일 충분한수면을 취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림 5.3에서 첫번째 수면 시간을 보면 수면 압력이 일주기 리듬에 도달하기 전에 기상했는데, 이는 몸이 원하는 자연스러운 기상이 아닙니다.  - P155

 그림 5.4는 약 2주에 해당하는, 어느 간호사의 실제 수면을 수리 모델을 이용해 평가한 것입니다.
첫 번째 수면은 실제 수면 시간(검은색 막대)이 수리 모델이 예측한 필요 수면 시간(회색 막대)보다 길기에 충분 수면(파란색 박스)입니다. 반면 두 번째 수면은 실제 수면 시간이필요 수면시간보다 짧기에 불충분 수면(빨간색 박스)입니다. - P155

이를 바탕으로 저는 수리 모델이 예측한 필요 수면 시간과 실제 수면 시간을 비교해 수면의 충분 정도를 평가하는 지표인 수면 충분 정도Sleep Sufficiency 를 개발했습니다.¹² 전체수면 중 몇 퍼센트가 충분한 수면인지, 즉 전체 박스들 가운데 파란색 박스가 얼마나 많은지를 계산한 것입니다 - P157

12. Hong, J., Choi, S. J., Park, S. H., Hong, H., Booth, V., Joo, E. Y., & Kim, J.
K. (2021). "Personalized sleep-wake patterns aligned with circadianrhythm relieve daytime sleepiness." Iscience 24(10). - P239

그림 5.5를 보면, 이 간호사들의 평균 수면 시간TST은 6.65~6.98시간으로 비슷합니다. 그럼에도 수면 충분 정도는 서로 매우 다릅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파란색 박스가 줄어드는 것이 보이지요? 즉, 평균 수면 시간은 서로 비슷하지만 왼쪽 간호사는 필요 수면에 맞게 수면을 잘 분배한 것이고, 오른쪽 간호사는 몸이 필요로 하는 필요 수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 P157

연구에 협조한 전체 간호사들을 대상으로 그래프를 그려보면 이러한 패턴은 더 명확해집니다(그림 5.6). 수리 모델이예측하는 수면 패턴에 맞추어 잠을 잘수록(즉, 수면 충분 정도가 증가할수록) 주간 졸림 정도가 감소합니다. - P158

그러면 수면 충분 정도는 실제로 어떻게 늘릴 수 있을까요? 바로 취침 시간에 따라 수면 시간의 길이를 자연스럽게 조정하는 것입니다. - P158

한편 길게 자기 어려운 오전 수면은 짧게 하고 긴 잠을자기 쉬운 밤 수면은 길게 하면 수면 충분 정도가 늘어날 확률이 커진다는 것이 수리 모델의 예측이었습니다. - P159

모델이 예측한 대로, 높은 주간 졸림증 그룹은 취침 시간에 관계없이 늘 유사한 수면 시간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낮은 주간 졸림증 그룹은 밤잠은 길고 아침잠은 짧은 자연스러운 수면 패턴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 P160

 이 연구를 학계에만 소개하다가, 2023년에는 유튜브 채널 <안될과학>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소개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 P161

이는 하루빨리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해야겠다는 강한 동기를 심어주었고, 연구실 송윤민 학생과 함께 1년간 노력한끝에 ‘SLEEPWAKE‘라는 앱을 개발했습니다. 현재는 삼성서울병원 주은연 교수님이 마지막 임상 실험을 진행하고 있지요. 책이 출간될 즈음에는 출시되리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해봅니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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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라고 할까 캐릭터 소개라고 할까
분위기 띄우기 같은 것

미리 말해두지만, 이건 환각이다. - P11

하지만 처음에 말한 대로 이건 환각이다.


"...배. 제정신으로 돌아와 주세요, 선배. ...에잇."
파지지직!!
"~~~~?!"
전신에 전기가 흐르고 몽롱했던 의식이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다.
덧붙이자면 전기가 흘렀다는 건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전기가흘러 들어왔다는 얘기다.
의식회복용 스턴 건으로 내 몸에 전기를 흘려보낸 범인은 옆에 앉아 있었다. - P13

"...즐거운 환각을 봤어...."
나는 먼눈을 하고 말했다.
"어떤 환각이었나요?"
"요조라와 세나가 둘이서 사이좋게 웃으며 장난을 치고 있었
"어."
"비과학적인 풍경이네요."
"비과학적씩이나...." - P15

・・・현실의 우리들이 있는 곳은 지옥이었다.

이 이벤트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깔끔했던 실내.
총 일곱 명의 인간이 방 중앙에 놓인 둥근 테이블을 둘러싸고있다.
테이블 가운데에는 불을 안 지폈는데도 새카만 내용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커다란 냄비.
내 오른쪽 옆에는 리카가 앉아 있고, 왼쪽에는 수녀의 모습을한 은발의 소녀와 고스로리 차림의 금발 소녀가 겹쳐진 채 쓰러져있다. - P16

유키무라의 눈은 초점을 잃고 완전히 죽은 상태였다.
"...유키무라・・・ 너까지 갔구나...."
난 침통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자, 코다카. 너도 먹어...."
"후후후.... 빨리 먹어. 승부는 이제부터니까...."
요조라와 세나가 동시에 눈에 광기를 띤 채 내게 말했다.
"우우...."
난 울상을 한 채 손에 쥔 젓가락을 펄펄 끓는 냄비로 가져간다. - P17

"...어이, 이거 정말로 독 안 든 거냐...."
"그럴 거예요, 코다카 선배. 리카의 포이즌 체커는 모든 독극물을 완벽하게 검출하니까요. 완벽할, 테니까...." - P17

자신 없다는 듯 리카가 대답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면... 암흑 냄비*였다.
일의 발단은 며칠 전.

※암흑 냄비: 각자가 가지고 온 재료를 어둠 속에서 한 냄비에 넣고 끓여,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먹으며 즐기는 놀이. - P18

그걸 듣고 우리는 어리석게도 "꽤 즐거울지도…."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암흑 냄비로 결정된 후, 국물은 부원 중에서 유일하게 요리를할 줄 아는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주말에 나는 암흑 냄비용 검은 국물의 개발에 착수.
암흑 냄비라는 건 냄비에서 음식을 집을 때 방 안을 어둡게 할뿐 딱히 국물 자체가 검을 필요는 없지만 착각하고 있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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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이후 지금까지 마켓컬리의 경영 실적은 놀랍다. 2015년 5월 21일첫 서비스를 시작해 그해에만 5만 명의 회원과 29억 원의 매출을 만들어냈고, 이후 4년 만인 2019년에 389만 명의 회원과 4289억 원의 매출이라는 성장을 기록했다.
(중략). 불과 5년 만에 150배의 성장이다. - P19

스타트업 천국인 미국에서는 밀키트 Meal Kit (손질된 식재료 · 양념·조리법 세트)의 바람을 몰고 온 ‘블루 에이프런Blue Apron‘이 추락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미국 유통업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아마존마저도 신선식품 배송을 위한 ‘아마존 프레시Amazon Fresh‘ 사업에서는 난항을 겪고 있다. - P20

다수는 마켓컬리의 시그니처이자 이제는 다른 대형 유통사에서도 모두 따라 하는 ‘새벽 배송‘이 성장의 핵심 동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마켓컬리의 성장사를 찬찬히 분석해보면 단지 새벽 배송 하나로 소위 ‘대박‘을 낸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 P20

우선 마켓컬리는 유통 회사다. 유통사는 고객과 공급사를 연결하는일을 한다. 그러니 당연히 ① 고객과 ② 공급사가 가장 중요한 축이 된다. 이어지는 문제는 이 두 당사자를 ‘어떻게‘ 이어주느냐다. - P22

고객·공급사 · 운영 프로세스 · 라스트핏 · 조직문화. 이 다섯 가지가 비대면 유통사를 분석하는 5대 축이며, 이 책을 구성하는 주된 얼개다. - P22

① 고객:
Keeping Customer Values(고객 가치를 향한 집념)

마켓컬리는 고객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집착에 가까운 노력을 기울였다. 유명한 새벽 배송 시스템인 ‘샛별배송‘도 심야의 인건비와 물류 비용을 고려했을 때 기존의 유통사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객이 가장 확실하게 배송을 받을 수 있는 시간대는 언제일까?‘ 하는 질문을 고객의 입장에서 던지자 실현 가능한 목표가 되었다. - P23

② 공급사:
Utmost Suppliers‘ Interests(공급사와의 지속가능한 협력)

마켓컬리는 서비스에 유통 플랫폼의 이윤보다는 공급사의 입장을 반영하고자 했다. ‘상생‘을 추구한 것이다. - P23

③ 운영 프로세스:
Realizing Detail Management(디테일 경영 실현)

결국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이다. 앞서 말한 고객 가치와 공급사의 이익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유통 기업을경영하는 데 핵심이다. (중략). 즉, 규모보다는 속도를 중시해 빠르게 변화하는 고객 트렌드에 발맞추고, 경험과 감(感)에 의존했던 소싱Sourcing을 시스템과 데이터로 해결한 것이다. 고객 트렌드를 이해하는 디테일한 역량이 결국오늘의 마켓컬리를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 P24

④ 라스트핏:
Last Fit Maximization(고객의 마지막 경험 극대화)

라스트핏은 『트렌드 코리아 2020』에서 제안한 개념이다. 구매의 마지막 순간, 고객 만족을 즉각적으로 최적화하는 근거리 경제를 의미한다. 이 말은 곧 고객 만족을 결정하는 순간이 상품과 서비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소비자와 직접,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나는 지점으로 변한다는 의미다. - P24

라스트마일 대신 라스트핏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마켓컬리가 단지 ‘빠른 배송‘만을추구하는 게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고객 접점에서 생길 수 있는 다양한 문제를 고민해 고객의 마지막 경험을 총체적으로 업그레이드하고자 했다. - P25

5ㆍ조직문화:
Yield to Autonomous Synergy (자율적 시너지 조직)

작은 스타트업은 물론이고 대기업까지 최근 많은 조직에서 유연한 조직문화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중략). 물론 이런 제도의 변화가 전혀 무용(無用)하다는것은 아니지만, 유연한 조직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비단 호칭이나 자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직원 각자가 얼마나 자율적으로 의사결정할 수있는지, 권한과 책임의 위임이 잘 이뤄져 있는지가 핵심이다.  - P25

이러한 다섯 영역에서 고민을 해결하려는 마켓컬리의 해법을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영문으로 정리했다. 또한 그 첫 글자를 모으면 ‘KURLY‘가 나타나도록 두운을 맞췄다. ‘KURLY‘로 요약되는 그들의 문제 해결 방식은 실로 ‘컬리 웨이 Kurly Way‘라고 이름을 붙일 만하다. - P26

마켓컬리는 급변하는 트렌드를 즉각 반영하고, 나아가 새로운 트렌드를 창출하는 ‘성장의 새로운 공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하나의대박 상품이나 아이디어로 단번에 도약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쌓이는고객의 소리를 해결하면서 그 나름의 시스템을 매우 모범적으로 진화시켜 왔다. - P26

요컨대 마켓컬리는 ‘규모의 경제‘에서 ‘속도의 경제‘로 이행하는 산업 전반의 ‘패러다임 변화 Paradigm Shift‘에 가장 잘 적응하고 있는 회사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구체적인 시장 상황과 고객 가치와만나면 다양한 트렌드를 창출하는데, 마켓컬리가 이 중 가장 크고 힘센 회사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새로운 트렌드를 적용함에 있어 주저함이 없는 가장 날쌘 회사라는 점은 분명하다. - P29

지금 이 순간에도 마켓컬리는 모든 고객의 소리를 읽으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고치고 있다. 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패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런 그들이 이 학습의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적지는 아주 분명하다.

고객이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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