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는 어떤 것들이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이 있다. 이 사상은 정의, 향수, 무한, 사랑, 죄 같은추상적인 개념들이 천상의 에테르적 차원에 머물면서 인간이 발견해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가 그것들의 이름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본다. - P93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눈을 굴리며 수학을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으면 숫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오? 파이를 품고 있지 않은 원이 있다면 어디 한번 내게 보여주시오." - P93
이 세계에는 실재인 것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아도 실재인 것들이 어떤 분류학자가 어떤 물고기 위로 걸어가다가 그 물고기를 집어 들고 "물고기"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물고기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이름이 있든 없든 물고기는 여전히 물고기인데... 맞지? 맞겠지?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할 것이다. - P95
그리고 모든 성스러운 유물이 그러하듯 이 완모식 표본들도 안전한 장소에, 그러니까 전 세계의 박물관이나 학술기관들에 보관된다.. - P96
하나의 종을 최초로 명명할 때 그들은 그 최초의 표본을 특별한 명예를 부여한 매우 특별한 유리단지에 넣어둔다. 그 표본은 공식적인 과학의 기록부에 오를 때 그종의 유일한 구성원으로 기재된다. 분류학 용어로 모든 표본을 "모type"이라고 하는데, 최초의 신성한holy 모식은 영광스럽게도 "완모식, holotype"이라 부른다. - P95
완모식 표본에 관해서는 아주 중요한 규칙이 하나 있다. 만약 완모식 표본이 소실되어도 새로운 표본을 그 성스러운 유리단지에 대체해서 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안 될 말이다. 그러한 상실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하고 애도하고 상실되었다는 표시를 남긴다. - P96
복도에서 또각거리는 소리가 난다. 리놀륨을 밟고 지나가는 발소리다. 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스스로 자기 이름을 붙인 유일한 바닷물고기를 보러 가는 중이다. (중략). 마침내 우리는 성스러운 완모식 표본 앞에 당도했다. 표본 번호 #51444. 아고노말루스 요르다니 Agonomalus jordani.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1904년에 일본 연안에서 발견하여 명명한 것이다. 유리용기 바닥에 놓여 있는 그것은 작고 검은 용 같았다. - P98
고요한 오싹함이 나를 덮친다. 데이비드가 만난 수천 가지 물고기 중에서 자신의 이름을 붙이기로 선택한 단 하나가 왜 하필 이것이었을까. 물론 숨이 멎을 만큼 경이로운 건 분명하지만, 무섭기도 하다. - P99
분류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종의 물고기들이 물리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고노말루스 요르다니. 모서리가 없는 조던. 뫼비우스 띠처럼 두 개의 면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하나인 면. 두 면 사이의 경계는 결코 찾을 수 없다. 데이비드는 왜 하필 이 생물이 자신을 반영한다고 느꼈을까? - P99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데이비드가 물고기를 더 많이 수집할수록 우주가 더 난폭하게 반격하는 것 같았다는 점이다. 그가 혼돈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우주가 빼앗아간 것은 그의 아내 수전과 아기 소라뿐이 아니었다. 우주가 빼앗아간 존재 중에는 그의 친한 친구 허버트 코플랜드도 있었다. - P100
그렇다면 이들의 죽음이 데이비드로 하여금 겁을 집어먹고단 1초라도 질서에 대한 추구에서 물러서게 했을까?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혼돈이 공격해올 때면 더욱더 강한 힘으로 반격하는 그 특유의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는 고기를 잡는 더 공격적인 기법을 발명하기 시작했다. - P100
또다시 그는 이름 붙일 수 있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새로운 종들을 발견해나갔다. 스탠퍼드대학에 있는 그의 사원과도 같은 사암 연구실에 이상한 물고기 사체들이 점점 더 높이 쌓여갔다. 그는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 혀에 닿는 달콤함, 질서정연함과 행위주체성의 감각을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 P101
어느 날 데이비드가 일본에서 물고기를 수집하고 있을 때 아홉살 바버라는 성홍열에 걸려 몸져누웠다. 데이비드는 서둘러 바버라 곁으로 돌아갔지만 샌프란시스코 부두에 도착했을 때 이미늦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데이비드는 이 일을 "우리가 겪은가장 잔인한 개인적 재앙"이라고 말했다. "아내에게나 나에게나가장 파괴적인 충격으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밝은 빛이 꺼져버린일이었다. 20년이 지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어제 겪은 일처럼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⁸" - P102
데이비드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그를 괴롭히는 적은 혼돈만이 아니었다. 데이비드가 40대 후반으로 접어들고 그의 콧수염에 처음으로 흰 수염들이 돋아날 무렵, 검고 긴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제인 스탠퍼드는 계속해서 데이비드에게 잔소리를 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의문을 품고 그를 홱 잡아당겨 물고기들에게서 떼어놓았다. - P102
(전략), 제인은 결국 그를 감시할 스파이까지 심어두었다.⁹ 그 스파이는 독일학과의 수염을 기른 대머리 교수 줄리어스 괴벨이었다.¹⁰ - P103
9 Bliss Carnochan, "The Case of Julius Goebel: Stanford, 1905," The AmericanScholar, Jan. 2003, 97; Cutler, The Mysterious Death of Jane Stanford, 73. 10 Luther William Spoehr, "Freedom to Do Right: David Starr Jordan and theGoebel and Rolfe Cases" (adapted from Luther William Spoehr: "Progress" Pilgrim:David Starr Jordan and the Circle of Reform, 1891-1931," PhD dissertation, StanfordUniversity, 1975), 2. - P283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1905년 초 어느 밤 하와이를 여행 중이던 제인이 예기치 않게 사망한 것은 그에게는 아주 행운이었던 셈이다.¹⁵ 우주가 그제야 데이비드에게 좀 관대해진 것처럼 보였다. 제인이 죽은 뒤 데이비드는 그 스파이를 스탠퍼드에서 해고했다.¹⁶ 이제 뒤에서 성가시게 항의할 사람도 없어졌겠다, 그는 또한 번 장기간 유럽을 도는 여행을 계획했다.¹⁷ - P104
15 "mrs. stanford dies, poisoned," San Francisco Evening Bulletin, March 1, 1905. 16 Carnochan, "The Case of Julius Goebel: Stanford, 1905, 101. 17 Jordan, The Days of a Man, Volume Two, 158-64. - P283
데이비드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중략) 어느 생물이 어느 생물을 낳았는지에 관한 실마리, 생명이 흘러가는 방향에 관한 실마리, 인간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실험에 관한 실마리, 그리고 어쩌면 사람들을 개선하기 위한비결에 관한 실마리를 샛비늘치는 정확히 어떻게 빛을 발하는 것일까? 불가사리는 팔을 어떻게 재생하는가? 날치는 어떻게 나는것인가? 인간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인류를 더 높이 끌어올리기위해 어떤 적응 방법을 빌려올 수 있을까? 그는 각 물고기의 내장과 신경, 인대, 부레, 쓸개, 뼈와 눈알을검토하고, 돌돌 말린 뇌 속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이런 관찰은 자기 앞에 놓인 것을 다 이해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몇 시간 혹은 몇 주, 때로는 몇 년까지도 이어졌다. - P105
미지의 생물에게 자신의 깃발을 꽂기 위해 그는 주석 이름표에 그 성스러운 이름을 펀치로 새기고, 그 이름표를 유리단지 속 표본 곁에 담그고 뚜껑을 닫았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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