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1950년 11 월 26 일


애초에 일기장을 산 것 자체가 실수였다. 그것도 아주 큰 실수.
하지만 후회해봤자 소용없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으니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기장을 산 건지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처음부터 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 P9

내가 일기장을 사게 된 사연은 이렇다. 보름 전 일요일, 나는 아침 일찍 남편에게 담배를 사다주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일요일마다 늦잠을 자는 남편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바로 볼 수 있게 침대 머리맡 탁상 위에 담배를 놓아두고 싶었다. - P9

담배 가게에는 손님이 많았다. (중략).
"저 공책도 한 권 주세요."
나는 돈을 꺼내려고 핸드백을 뒤지며 말했다. 고개를 들자 담배 가게 주인이 엄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안 됩니다. 금지된 일이거든요."
그는 자기가 팔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요일마다 담배 외에 다른 물건을 판매하지는 않는지 확인하려고 경찰이 가게 주변을 어슬렁거린다고 해명했다.* 때마침 가게에는 나밖에 없었다.


*1950년대 이탈리아에서는 담배 가게와 문방구의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 일요일에는 담배 가게에서 담배 이외의 상품을 판매 금지하는 법이 있었다. - P10

 그러자 가게 주인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재빨리 공책 한 권을 집어 들고 계산대 너머로 건네주었다.
"코트 아래에 숨겨요."
나는 공책을 코트 아래 숨긴 채 집으로 향했다. 건물을 관리하는 여자가 가스관 이야기를 하는 내내 행여나 공책을 떨어뜨릴까 두려웠다. - P11

그렇다고 침대 머리맡 탁상 서랍에 넣어두면 미켈레의 눈에 띌 수 있으니 곤란했고, 책상은 이미 리카르도가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에는 나만을 위한 서랍이나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도 없다. 이제부터라도 내 권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1

Date 12월 10일


2주 넘게 한 글자도 못 쓰고 일기장을 감춰만 두었다. 가족들에게 들키지 않을 곳을 찾기 위해 보관 장소를 바꾸느라 첫날부터 애를 먹었다. 리카르도가 공책을 발견하면 대학교 강의 노트로 쓰겠다고 가져가버릴 것이다. 미렐라 눈에 띄면 일기장으로 쓰겠다고 제 방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가버릴 것이다. - P13

나는 축구 경기 티켓 세 장을 구입한 뒤 직장 동료에게서 선물받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티켓을 사기 위해 생활비도 줄여야 했으니 이중으로 거짓말을 한 셈이다.
(중략). 남편과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들이 축구 경기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셋이 내가 파놓은 함정을 향해 달음박질치는 것만 같았다. 남편과 아이들이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후회감이 밀려오면서 가슴이 아렸다. - P14

문제는 막상 나만의 비밀 장소에서 일기장을 꺼내 들고 글을 쓰기 위해 자리를 잡고 앉으면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단한 일상 외에는 쓸 말이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일기장을 겨울 옷을 보관해두는 오래된 여행 가방 속에 숨겨두고 있다. - P14

"우리 엄마가 오늘 기분이 왜 안 좋으실까?"
남편의 말을 들으며 마흔 줄을 넘긴 여자들이 으레 그렇듯 나 역시 과민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남편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깊은 수치심이 몰려왔다. - P15

Date 12월 11일

어제 쓴 일기를 다시 읽어보니 내 성격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 남편이 장난스레 나를 ‘엄마‘라고 불렀을 때부터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미켈레가 나를 그렇게 불렀을 때는 기분이 좋았다. 이 집에서 인생이 무엇인지 아는 유일한 어른이 된 것 같았으니까. - P16

미켈레는 나를 발레리아라고 불러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나를 아직도 피사니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미켈레의 아내이거나 리카르도와 미렐라의 엄마일 뿐이다.
하지만 오직 미켈레에게만큼은 나는 발레리아였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 P17

Date 12월 15일

일기장을 펼칠 때마다 가장 먼저 첫 페이지에 적힌 내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내 수수한 필체가 마음에 든다. 다소 나지막하고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글씨에서 어쩔 수 없이 연륜이 느껴진다.
솔직히 내가 마흔셋이라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 P18

어쨌든 마흔셋이나 됐는데 일기 한번 쓰겠다고 매번 유치한 술수를 써야 한다는 사실이 수치스럽다. 어떻게 하든 미켈레와 아이들에게 일기장의 존재를 알리고 내가 원할 때 방에 들어가 글을 쓸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애초에 시작부터 잘못됐다. - P18

하지만 미켈레는 그날이 대학 등록금 납부 마감일이라 리카르도가 등록금을 제대로 냈는지 묻기 위해 전화를 걸었을 뿐이었다. - P19

Date 12 월 21 일

어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미렐라에게 책상 서랍을 열쇠로 잠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렐라는 놀라면서 그렇게 한지 이미 몇 년이 지났는데 새삼스레 왜 그러냐고 항의했다.  - P20

미렐라는 서랍을 잠그는 것은 그 안에 일기장을 보관하기 때문이라면서, 솔직히 오빠도 자기가 받은 연애편지를 보관하는 서랍을 잠그고 다닌다고 했다. (중략).
"우리에게도 그런 서랍이 있어."
미켈레가 말했다.
"돈을 보관하는 서랍 말이야."
내가 나만을 위한 서랍을 가지고 싶다고 하자 남편이 미소를지으며 말했다.
"그 안에 뭘 넣으려고?" - P20

"우리 엄마가 일기장에 대체 뭘 쓰려고 그러시나?"
남편이 물었다. 미렐라도 방금 전까지 화를 낸 사실을 잊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꿋꿋하게 주장을 굽히지 않자, 리카르도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다가왔다.
"엄마 말씀이 옳아요." - P21

미켈레는 내 손을 잡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 여보, 이 나이에 무슨 비밀이 있을 수 있겠어?"
미켈레의 말투가 뻔뻔하거나 놀리는 투였다면 바로 반박했을것이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서글프게 들려서 순간내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고 말았다. 나는 리카르도와 미렐라도 내가 잠시 약한 모습을 보인 이유가 질투심 때문이었다고 오해할까봐 아이들이 자기 방에 있는지 확인하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 P22

Date 12월 27일

(전략).
 남편과 아들은 딸과 여동생에게서 처음으로 발견한 매력적인 여인의 모습에 놀라움과 경탄이 섞인 탄성을 내뱉었다. 내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미렐라의 모습에 자부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평소에도 이렇게 스무 살 또래 아가씨들처럼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면 좋겠다고 미렐라에게 말하려다 어쩌면 그애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항상 가족에게 보이는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 P25

리카르도는 어렸을 때처럼 엄마가 기적처럼 모든 걸 해결해줄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주 잠시, 나는 ‘아주 잘 맞는구나‘라고 말해줄까 망설였다.  - P26

우리는 함께 거실로 돌아왔다. 리카르도의 귀는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우리 오늘 무도회에 못 가."
리카르도가 뿔난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애는 드레스를 물어뜯을 듯한 눈빛으로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 P26

"우리 주변에는 죄다 가난한 사람들뿐이네요."
그 말에 미켈레가 쏘아붙였다.
"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그러자 리카르도는 반농담처럼 말했다.
"턱시도를 대여하는 건 어떨까요? 엑스트라 배우처럼요."
"그만하면 됐다."
미켈레가 말했다.
나는 미켈레가 우리 결혼식 때 입었던 연미복과 정장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27

 나는 결국결론을 내렸다.
"무도회에는 미렐라만 가는 걸로 하자."
미켈레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나는 모두의 시선을 외면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턱시도 없이도 살 수있고, 아가씨 혼자 무도회에 갈 수도 있는 거야. 내 시절에는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좋은 면이있는 법이란다. 여보, 당신은 미렐라를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와줘요. 우리 셋이서 즐거운 저녁을 보낼 수 있을 거야. 리카르도는 아쉽지만 이해하렴."
리카르도는 침묵을 지켰다. - P28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라디오 주변에 모여 앉았다. 자정에 따려고 스파클링 와인을 한 병 사두었는데, 날카로운 눈빛으로고집스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아들 때문에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리카르도의 눈빛에서 그런 적의가 느껴지곤 했다. 평소에는 너무나 상냥하고 예의 바른 아이이기에, 그런 표정을 볼때마다 속이 상했다. - P30

사실 리카르도는 전에도 몇 번 미켈레가 오랫동안 은행에서 근무했으면서도 사업가가 되지 못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이야기인즉슨 미켈레가 돈을 제대로 못 모았다는 말이었다. - P30

- 잠시 후 -새벽 두 시다. 일기를 쓰려고 일부러 일어났다. 잠이 오지 않았다. 모든 게 다 이 일기장 때문이다. 전에는 집에서 일어난 일을 곧바로 잊었는데, 일기를 쓰면서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우선 머릿속에 저장해놓았다가, 대체 왜 그런 일이 자꾸만 일어나는 건지 이유를 찾으려 한다. 일기장의 은밀한 존재는 내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었지만, 솔직히 그 덕분에 내 삶이 더 행복해지지는 않았다. - P32

"전쟁 때 아이들한테 암시장에서 신발을 샀다는 걸 학교에 가서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 기억나?"
미켈레는 건성으로 왜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는 거냐고 물었다.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리가 해외 라디오 채널을 듣는 것도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나는 남편에게 그 시절에는 미렐라가 거짓말을 해도 그애를 벌주기가 힘들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었다 - P33

(전략).
그럼에도 나는 과거의 신념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날 나는 남편에게 언제부턴가 미렐라와 리카르도가 우리를 못 미더워하게 된 것은 이러한 우리의 의구심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싶었다. - P34

Date 1951년 1 월 1 일


집에 혼자 있는 느낌이다. 미켈레는 잠이 들었지만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부터는 남편이 나를 놀래주려고 일부러 자는 척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지금은 부엌 식탁에 앉아 일기를 쓰고 있다. - P35

미켈레는 내게 언제나 잠시라도 좋으니 좀 쉬라고 하고 리카르도는 직장을 구하면 제일 먼저 나를 카프리나 리비에라 같은 휴양지로 보내줄 것이라고 한다. 내 노고를 인정하는 순간 자기들은 모든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족들은 허구한 날 심각한 표정으로 그만 일하고좀 쉬라고 한다. 마치 내가 변덕스러워서 휴식을 취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 P36

한마디로 내가 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공표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가족들은 고작 하루 쉰 것을 한 달 내내쉰 것처럼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그런데 그 해에는 겨울이 될 때까지 조금이라도 피곤한 내색을 하면, 가족 모두 입을 모아 휴가를 다녀왔으니 건강이 좋아졌을거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8월에 일주일 쉬었다고 10월까지 피곤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 P37

가족들이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믿어주는 것은 심한 고열이 날 때뿐이었다. 열이 나면 미켈레는 나를 걱정해주고 아이들은 내게 오렌지 주스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나는 좀처럼 열이 나지 않는다. - P37

Date 1월 3일

어제는 줄리아나 집을 방문했다. (중략).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반대하다, 결국에는 생일파티에 갔다.
어제 평소보다 완강하게 생일파티에 가지 않겠다고 하자 미렐라가 말했다.
"어차피 갈 거잖아요. 일부러 그날 쓸 검은 모자까지 수선해놓았으면서."
우리는 서로를 싸늘하게 쏘아보았다. 미렐라에게 뭐라 대꾸하지 못한 건 그애 말이 맞기 때문일 것이다. - P39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머릿속은 온통 모자 생각으로 가득했다. 목 위로 떨어지는 깃털 장식이 달린 모자를 생각하면서, 나는 모델처럼 묘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가족 중에서 내가 딴 생각에 잠겼다는 사실을 눈치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미켈레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평소와 다름없이 "이제 왔어, 엄마?" 하고 나를 반겨줄 뿐이었다. - P40

중산층 법조인 가문 출신인 아버지는 내가 학교 친구들 이름을 이야기할 때마다 뿌듯해했다. 반면에 베네토 지역의 몰락한 귀족가문 출신이었던 어머니는 내가 친구 이야기를 해도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오히려 친구들 가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어머니는 그들 가문의 족보를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 P42

그날 나는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처음 입학했을 때 그애들의 빠른 프랑스어를 이해하려고 애썼던 것처럼 말이다. 카밀라는 교묘한 술수와 지혜로 남편에게서 값비싼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낸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았다. - P43

마르게리타는 우리를 가르쳐주시던 수녀님의 캐리커처를 그려서 반 친구들에게 돌리던 때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마르게리타의 남편이 갑자기 들이닥친다면, 수녀님에게 그림을 들켜서 교실에서 쫓겨났을 때처럼 얼굴이 새빨개졌을 것이다. - P44

"학창 시절 기숙사에서 지내지 않는 학생들을 데리러 오던 통학 버스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너희도 그 버스 기억나지?"
내 말에 다들 학창 시절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다고 하면서 포옹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카밀라, 마르게리타, 지아친타는 다음 주 금요일에 카드놀이를 하기로 했다. 모두 세심하게 남편이 출근하지 않는 일요일은 피해서 약속을 잡았다. 마르게리타는 한숨을 내쉬며 자기는 베이비시터가 나오지 않는 목요일에도 약속을 잡을수 없다고 했다. - P45

순간 과연 나는 정말 좋은 아내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할부로라도 내가 번 돈으로 옷을 맞추는 비용이나 미용실 비용을 지불하는 바람에 오히려 미켈레가 어떤 식으로든 이러한 경쟁에 참여하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47

Date 1월 5일


내일은 주현절이다. 이로써 드디어 연말연시 연휴도 끝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해가 갈수록 연말연시가 되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 P49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집에 돌아오면 아무리 피곤해도 그날이면 유난히도 얕은 잠을 자는 아이들을 깨우지 않도록 까치발을 하고 난로로 직행했고, 미켈레는 그런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곤 했다.
"대체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 당신이 선물을 얼마나 힘들게 준비했는지 아이들이 알아줄 것 같아?"
미켈레의 물음에 나는 아이들은 내 노고를 알아줄 거라고 대답했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그것이야말로 이기주의가 아닐까?" - P50

오늘 밤도 변함없이 나는 잠을 자지 않고 아이들에게 줄 소박한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미켈레가 곁에 있어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고맙지만 괜찮으니 어서 들어가 자도록 해요."
사실 그렇게 말한 진짜 이유는 선물 포장을 마친 다음에 일기를 쓰고 싶어서였다.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일기장의 존재가 느껴진다. 하루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에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P51

Date 1 월 7 일

(전략).
마지막으로 전화번호부를 바꾼 것이 불과 6~7년 전이었는데, 그새 옛 수첩 앞부분에 있던 이름 대부분이 쓸모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 이름 옆에는 연필로 급히 받아 적은 후임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 P53

어찌 되었든 평생 친구로 지내기는 힘든 법이다. 살다보면 모두 변하기 마련이니까. 어떤 이는 앞으로 나아가고, 어떤 이는 같은 자리에 머무른다. 가는 길이 달라지면 만나기도 힘들고 공통점도 없어진다. - P55

이혼 후에 클라라는 영화 연출을 시작했고, 그러면서 우리 부부는 잘 모르는 사람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꽤 유명해져서 극장에 가면 그녀의 이름이 자주 오프닝 크레딧에 등장하곤했다. 가끔 만나러 가도 그녀는 정신없이 바빴다. - P55

새 수첩에 번호를 모두 옮겨 적은 후, 나는 적어도 나와 미켈레는 몇 년 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변했더라도 둘이 함께 변해서 다행이라고 말이다. - P56

Date 1월 9일


걱정되고 속상하다. 미렐라에게 제멋대로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젯밤에는 열 시가 다 되어서 들어왔다. 그애가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한 번만 더 늦게 들어오면 저녁을 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럼 당장 오늘부터 그렇게 하세요."
미렐라가 상냥하지만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투로 말했다.
"저녁은 안 먹어도 되니까 안녕히 주무세요."
순간 미렐라가 남자랑 밖에서 저녁을 먹고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 P57

나는 새삼스레 다시 남편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이라면 이런 문제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남편을 보고 있자니 그가 음악에서 위안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마음이 애틋해져서 미켈레 곁으로 다가갔다.
"그만 가요, 여보."
순간 나는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 P58

이게 다 일기장 탓이다. 일기장을 없애야겠다. 그렇다. 반드시 일기장을 없앨 것이다. 누군가 휴지통에서 일기장을 찾아낼 수도있다는 위험만 없다면, 지금 당장 내다버릴 텐데. 그렇다고 일기장을 불태우면 남편과 아이들이 종이 타는 냄새를 맡을 것이다. (중략). 이번주 일요일에 없애야겠다. - P59

Date 1월 10일


최근 미렐라의 태도가 너무 안 좋아져서 일기장에라도 하소연하지 않으면 참기 힘들 정도다. (중략). 그런 일이 있었는데 태평하게 잠을 자다니.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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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냘프다: 몸이나 팔다리 따위가 몹시 가늘고 연약하다.


오답노트 영숙이는 체구가 가냘퍼서 불쌍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가냘파서


‘가냘프다‘의 ‘ㅡ‘가 중성 모음인데 ‘갸날파‘처럼 양성 모음이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냘프다‘는 ‘가냘프니‘, ‘가냘파서‘처럼 활용한다. ‘가냘프다‘의 어간 ‘가냘프‘의 끝 모음이 ‘으‘인 경우 ‘‘ 모음의 바로 앞의 모음(‘날‘의 ‘ㅑ‘가 양성 모음)을 기준으로 모음 조화가 적용된다. 따라서 양성 모음과 연결되어 ‘가냘파서‘로활용한다. - P17

가든그리다: 가볍고 간편하게 거두어 싸다. 가동그리다·가둥그리다(x). - P18

가득히

‘ㄱ‘ 받침 뒤에서 ‘히‘로 적는 말이다.


가뜩이

‘ㄱ‘ 받침 다음에 ‘이‘가 오는 경우이다. - P18

‘가디건‘은 잘못된 말

영문 철자를 보면 카디건(cardigan)으로 표기됨을 알 수 있다. - P18

가랑이


‘내기, 냄비, 동댕이치다‘ 등을 제외하고는 ‘ㅣ‘ 역행 동화 현상에의한 발음을 표준 발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 P19

가량假量

접미사로 앞말에 붙여쓴다. - P19

가로놓이다

‘가로놓이다‘는 한 단어이므로 붙여 쓴다. - P19

가름(x): ‘다른 것으로 바꾸어 대신함‘은 ‘갈음‘이 올바른 말이다.

가름하다: ‘각각을 따로 나누다. ‘상황이나 사물을 구별하거나 분별하다. 예 이번 대회의 우승은 선수들의 조그만 실수가 가름했다. [법원직 9급 ‘08]



가름


‘쪼개거나 나누어 따로따로 되게 함‘의 뜻으로는 ‘가름‘이 올바른말 이다. - P20

가만이(x):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의 뜻으로 쓰이는 말은 ‘가만히‘가 올바른 말이다.



가만히

부사의 끝음절이 ‘이‘나 ‘히‘로 소리 나는 것은 ‘히‘로 표기한다. - P21

가새표: ‘X‘의 이름. 틀린 것을 표시하거나 알지만 고의로 드러내지않음을 나타내는 기호 [예; 틀린 답에 정확하게 가새표를 쳐서 100점을 맞았다.]


가새표

‘가위표‘와 함께 복수표준어이다. - P22

가소롭다: 행동이 격에 어긋나 눈꼴사납고 우습다.

오류노트
 이 녀석 하는 짓이 어지간히 가소로와야지 봐줄 수 없네.→가소로워야지.


‘가소롭다‘의 ‘-롭-‘이 양성 모음인데 뒤에 ‘와‘가 아닌 ‘워‘가 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ㅏ‘ㅗ‘에 붙은 ‘ㅂ‘ 받침 뒤에 ‘-아‘가 결합하는 경우에는
‘워‘로 적는다.
(반갑+아→ 반가워, 가소롭+아 → 가소로워).
‘곱다, 돕다‘만 예외로 ‘고와, 도와‘로 적는다.
(곱+아→고와, 돕+아→ 도와) - P22

가십난Gossip欄

‘가십+난欄‘의 형태. ‘난‘ 앞에 한자어가 오면 ‘란‘으로 표기하고, 순우리말이나 외래어가 오면 ‘난‘으로 표기한다. - P23

가운데 발가락(x): 다섯 발가락 중에서 셋째 발가락‘은 ‘가운뎃발가락‘이 올바른 말이다.
가운데 손가락(x): 다섯 손가락 중에서 셋째 손가락‘은 ‘가운뎃손가락‘이 올바른 말이다. - P23

가운뎃점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쓴다.

① 쉼표로 열거된 어구가 다시 여러 단위로나누어질 때 쓴다. [예, 영윤·병호, 용상·원규가 서로 짝이 되어 윷놀이를 하였다.]
② 짝을 이루는 어구들 사이에 쓴다. [예, 한(韓)·이(伊) 양국 간의 무역량이 늘고 있다.]
- P24

가지다

‘가지다‘의 준말은 ‘갖다‘이다. ‘갖다‘의 어간 ‘갖-‘ 뒤에 ‘-어‘, ‘-은‘ 등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가 오지 못한다. 대신, 자음으로 시작하는 어미만 올 수 있다. 따라서 ‘갖아‘, ‘갖은‘처럼 활용하지 않으며 ‘가져‘, ‘가지는‘처럼 활용한다. 이 외에도 ‘내디디다, 머무르다, 서두르다, 서투르다‘의 준말 ‘내딛다, 머물다, 서둘다, 서툴다‘도 모음어미가 붙어 활용하지 않는다. - P25

가파르다: 산이나 길 따위가 매우 비탈지다. [예 가파른 언덕을 넘어가면 우리 집이 보인다/계단이 너무 가파르니 오르기 힘들다.]

오류노트: 등산길이 너무 가파라서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가팔라서.

‘가파라서‘로 표기하면 안 될까?

‘가파르다‘와 같은 ‘르‘ 불규칙 동사는 어간의 끝 음절 ‘르‘가어미 ‘-아, 어‘ 앞에서 ‘ㄹㄹ‘로 바뀐다. 따라서 ‘가팔라서‘로 활용한다. - P26

간지럽히다

‘간질이다‘와 함께 복수표준어이다.


간질이다

‘간지럽히다‘와 함께 복수표준어이다. - P28

걸판지다: 매우 푸지다.
걸핏하면: 조금이라도 무슨 일이 있기만 하면 곧바로 얼씬하면·얼핏하면(x). - P41

겉잡다

‘형세를 붙들어 잡다‘의 ‘걷잡다‘와 ‘대충 헤아리다‘의 ‘겉잡다‘를 혼동하지 않도록 하자. - P41

게걸스럽다: 몹시 먹고 싶거나 하고 싶은 욕심에 사로잡힌 듯하다.


오류노트

 저 사람의 게걸스런 먹성 좀 보게. 며칠은 꼬박굵은 것 같군.→게걸스러운. - P42

게을러빠지다: 매우 게으르다. 게을러터지다. [한국어교육검정 ‘11]

게을러터지다: 매우 게으르다. [예 그렇게 게을러터져서야 무슨 큰일을 이루겠느냐. 게을러빠지다.] - P42

견짓살: 닭 겨드랑이 부분의 하얀색 살. 견지살(x). - P43

고집스럽다固執-

‘고집스럽다‘의 어간 ‘고집스럽‘ 뒤에 ‘-은‘이 오면 어간 말음 ‘ㅂ‘이 ‘우‘로 변하므로, ‘고집스러운‘처럼 써야 된다. - P50

그렇잖다.

어미 ‘-지‘ 뒤에 ‘-않-‘이 붙어 ‘-잖-‘이 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그렇잖다). - P68

극성스럽다極盛
‘극성스럽다‘의 어간 ‘극성스럽-‘ 뒤에 ‘-은‘이 오면 어간 말음 ‘ㅂ‘이 ‘우‘로 변하므로, ‘극성스러운‘처럼 써야 된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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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
이백 년 전 프로이센에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태어난 두사람이 있었다. 둘은 풍성한 수염을 길렀고 오래도록 남을 선언문을 런던에서 발표했다. 추종자들은 이십여 년 후 파리의일부를 점거하고 혁명을 선포했다. 바리케이드 안쪽 술집에서 한 철도공이 기분에 취해 몇 줄의 가사를 썼다. 혁명정부는 백일이 되기 전 진압당했지만 가사는 남았고 한 가구공이 멜로디를 붙였다. - P111

수십 년 뒤, 미국을 대표하는 두 팝스타는 아프리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노래를 공동 작곡했다.
<We Are The World>.
노래는 전 세계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고 당시에만 천사백만 장가량 팔렸다. 육 년 뒤에 소비에트연방은 해체되었다.
두 명의 스탠퍼드 대학원생이 기숙사에서 ‘구글‘이라는 검색엔진을 만들고 있을 때 서울의 한 부부는 외환 위기의 여파 속에서 서로의 무능을 탓하며 악다구니를 썼다. - P112

21세기. 평양에서 두 정상은 악수를 나누었다. 컨츄리꼬꼬가 예능계를 정복하는 동안 다이나믹듀오는 핸들이 고장난 8톤트럭이 되었고 유노윤호는 지상파 무대 위에서 최강창민의 생일을 축하했다. - P113

 대개는 내야 할 어떤 돈을 내지 않았다는 안내문이었다.
그날 봉투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중략).
‘너도 봉투 받는 애구나.‘
여자애라거나 남자애라거나, 귀엽다거나 못생겼다거나, 공부를 잘한다거나 못한다거나 이전에 권진주와 김니콜라이는 서로를 그렇게 알아봤다. - P114

남자애들은 유행어를 시끄럽게 주고받으며 조르고 밀치고 뛰었다. 그러다 누가 니콜라이를 이렇게 도발하곤 했다.
"나 러시아어 할 줄 앎. 쓰바씨바! 앙 니콜라이!"
앙 기모띠, 앙 급식띠, 앙 회오리감자 같은 말을 외치고다녀서 별명이 앙맨인 녀석이었다. 니콜라이가 앙맨에게 "씨바 디졌다 너" 하면서 우당탕 추격전이 시작됐다. - P114

진주가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동안 니콜라이는 자격증 대비반에서 쇠를 깎았다.
진주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난 담임교사를 신뢰했다. 애들은 비즈니스 담임이라며 욕했지만, 그녀는 진주의 가정 사정이 법적으로 어떻게 규정되어 있는지 정확하게 인지했고 국내최고의 대기업이 매년 벌이는 장학 사업에 연결해주었다 - P117

"부모님 밖에서 기다리시겠다. 얼른 가봐."
니콜라이는 기능반에서 전국 대회를 준비할 정도로 재주가 좋진 않았지만 성실히 수업을 들었다. 한 고위 공직자의 자녀문제로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시끄럽던 사이 조용히 재외동포법이 개정되었다. 4세대들도 장기 체류가 가능해졌다는 사실이 니콜라이의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 P118

현장실습은 어째서인지 냉동 만두 공장이었다. 만두 봉지를 스티로폼 보냉 박스에 넣고 테이핑한 뒤 팰릿에 올리는 게 일이었다. 그걸 사백 번쯤 하면 하루가 갔다. 팰릿을 지게차로 옮기는 형은 기능사 같은 건 자기도 네 개나 있다며 차라리 지게차 면허가 쓸모 있다고 했다. (중략).
"그래도 여긴 실습생한테 죽을 일은 안 시켜." - P119

오 년이 지나는 동안 둘은 다양한 사람을 만났으나 그보다많은 사람과 헤어졌고 몇몇은 다시는 안 볼 사이가 되었다. (중략). 대신 버스에서 이런저런 커뮤니티 게시판을 스크롤하며 킥킥거렸다. 검성 고길동이 양아치 둘리를 베어버리는 만화는 진짜 웃겼다. 여윳돈이 없어서암호 화폐를 사지 못했고 ‘떡락‘하는 차트를 본 이병헌이 "으악 안 돼!"라고 외치는 영상을 보며 웃었다. - P119

볼빨간사춘기가 1인 그룹이 되는 사이 맥도날드와 김밥천국으로부터 홍콩반점과 할매순대국으로 혼자 갈 수 있는 음식점이 늘어났다. ‘그 돈이면 뜨끈한 국밥이 삼천 그릇이지‘ 같은 댓글에 추천을 눌렀다. 한 번쯤은 ‘네가 선택했잖아‘라는 말을 들었고 그건 그렇다고 끄덕거렸다. - P120

 두 시간 뒤에 니콜라이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커다란 눈이 튀어나온 초록색 개구리가 하얀 이가 보이도록 씨익 웃으며 엄지를 치켜든 이미지. 진주도 아는 개구리였다. 때로 침울한 표정으로 밧줄을 목에 걸고, 때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춤추는 개구리. 진주는 삼 년전에 구입한 펭수 이모티콘을 골라 답장했다. - P121

니콜라이는 냉동만두와 선풍기, 피부과에서 쓴다는 의료기기 부품 공장을 거쳐 자동차 전조등 생산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2차 하청이었지만 굴지의 대기업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지 일해본 공장 중에서는 가장 나았다. 벨트에서 하우징을 내려 작업대에 고정시킨다. - P122

진주는 대학생활 내내 편의점과 생과일주스 가게와 무한으로 즐기는 돼지갈비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졸업하고는 사무실 두 군데에 취업한 적도 있었다. 수당 없는 초과근무와 급여 지연, 갑질과 성희롱. 차라리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대형마트가 깔끔했다. 주 5일 35시간 근무. 최저임금보다 천원 많은 시급을 칼같이 계산해서 정확한 날에 입금해줬다.  - P123

"다음에는 내가 삼."
<타짜>의 곽철용이 손가락을 치켜들며 ‘묻고 더블로 가!‘라고 외치는 이미지도 함께 날아왔다. 진주는 잔망 루피가 ‘군침이 싹 도노‘라며 짓궂게 웃는 이미지로 답했다.
이 주 뒤 두 사람은 보글보글 끓는 감자탕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일인용 뼈해장국에는 감자를 안 넣어준다는 ‘국룰‘을 함께 규탄하였다. - P124

"우리 무슨 맛집 동아리 같다. 그치?"
두 사람은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페퍼로니 피자와코다리갈비찜과 치즈김치전을 먹으러 다녔다. 한번은 맥주를시켰는데 종업원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진주가 "아직 살아 있네" 하며 헤헤 웃었는데 니콜라이가 거소신고증을 꺼냈다.
"나 외국인 노동자인 거 몰랐냐? 헤헤."
이번 공장은 내국인이랑 돈을 똑같이 주고 보험도 다 가입해줘서 좋다고 덧붙였다. - P125

(전략). 물론 영주권을 받는 데도 여러 조건이 있었다.
"소득 기준이 있다고?"
니콜라이는 전년도 한국인 평균 이상을 벌어야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으며, 그건 연봉 삼천팔백만원 정도라고 설명했다. - P125

수백억을 두고 목숨을 건 게임을 한다는 줄거리의 한국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흥행했다. 어느새부터 힙합은 안 멋졌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으며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니콜라이에게는 투표권이 없었다. 진주에게는 투표권이 있었지만 어떤 쓸모가 있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 P127

(전략).
라면 다섯 봉지와 계란 여섯 알, 조미김 한 팩과 인스턴트건조 미역국을 주문하는 사람. 그것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비싼 캐나다산 개 사료를 한 번에 다섯 봉지씩 주문하는 사람. 오만이천원짜리 스페인산 올리브유 아홉 병을 한 번에 사는 사람은 무엇을 요리해서 먹는지, 십삼만구천원짜리 이탈리아산 소가죽 벨트를 쏜살배송으로 주문하는 사람의 생활은 어떤지 궁금했다. - P127

정말 여유로운 사람들은 마트에 직접 오는 사람들일지도 몰랐다. - P126

. 공장에 오래 다닌 아저씨들은 새 정권이 주 52시간 근로제를 손보면 다시 2조 2교대 시절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수군거렸다. 오년 전만 해도 어지간한 공장은 다 주야 2조 2교대였다고, 그정도는 해야 돈을 번다고 하는 아저씨들도 있었다. 니콜라이도 셈을 해봤다. 주당 72시간을 근무한다고 치면 연 삼천팔백만원을 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 P129

낙엽이 다 떨어지는 동안 진주와 니콜라이는 서로의 방에몇 번 갔다.
다를 것도 없는 방이었다. 자취생들이 애용한다는 인터넷쇼핑몰에서 낮은 가격 순으로 검색해 고른 가구들. 다이소에서산 생활용품들. 당장이라도 상자 두어 개에 쑤셔넣을 수 있으며 일부는 실제로 상자에 담긴 채 방치된 것들. 집이라기보다는 이사와 이사 사이에 잠시 머무르는 방. - P131

"요즘 애들은 어쩔티비 저쩔티비 그런 말을 한대."
진주도 들어본 말이었다.
"뒤에 다른 걸 막 붙이는 거지. 어쩔시크릿쥬쥬리미티드에디션, 어쩔엘지트롬스타일러, 어쩔다이슨V15디텍..... 아씨이건 뭔지도 모르겠다. 어쩔메르세데스벤츠에스클래스내돈내산......"
"뒤에 더 비싼 걸 붙이면 이기는 거야?" - P132

 가끔은 나란히 누워서 햇볕을 쬘 사람이 있는 삶. 이 정도면 괜찮다고 여기면서도 어두운 골목을 걸어 다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면 불안해졌다. 어느 날 흰 봉투가 날아와 계약 종료 통지서나 처음 들어보는 병명의 진단서를 덜컥내놓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 - P133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
빨간 모자를 쓴 해병 병장은 네가 선택한 길이니 악으로 깡으로 버티라 했고 김정은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추노꾼 장혁이 오열하며 삶은 계란을 씹었고 개구리도 눈물을 줄줄 흘렸다. 물에 젖고 물만 맞는 여기는 아마존. 안 젖을 수 없는 여기는 아마아마 아마존, 펀하고 쿨하고 섹시한 미소를 짓는 옆 나라의 정치인, 인생이란 역시,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끄덕), 둘리가 답했다. 아이 싯팔 - P134

어느 주말 진주가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방에 누워 있다고 답장했을 때, 니콜라이는 ‘이불을 덮은 개구리‘와 ‘격렬하고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고양이‘ 이미지를 고르려다가 그 꼿꼿이 선 소녀를 택했다.
"기립하시오 당신도!" - P135

두 사람은 경기도 서남부의 한 도시에 함께 도착했고 같이 살아보기로 결정했으며 그것에 대하여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않았다. - P139

진주와 니콜라이가 <인터내셔널가>의 작고 뾰족한 재생 버튼을 눌러본 것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밤이었다. 그리고 알고리즘은 진주와 니콜라이의 검색어를 기억했다. - P137

나흘 뒤 늦은 밤에 귀가했을 때 현관 앞에 묵직한 택배 상자가 놓여 있었다. (중략).
"피자나라 치킨나라도 아니고, 피자왕자 치킨공주도 아니고, 왜 피자나라 치킨공주인 거야?" - P140

처음으로 함께 산 가구였다. 음식이 오고 있었다. ‘메이드인 차이나‘는 역시 ・・・・・・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대륙의 저편에 있는 금형 공장과 달아오른 기계, 기름때가 묻은 러닝셔츠를입은 중국인 혹은 중국인이 아닌 누군가, 그가 점심으로 건져올리는 이름 모를 하얀 국수가 떠올랐다. 젓가락을 쥔 손가락들을 상상하니 어쩐지 탓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 P141

 연애가 망하더라도 사랑은 망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저렴한 각본으로 사랑하느니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어차피 첫 단추부터 이상했으니까.
차라리 이것은・・・・・・ 딩동. 음식 도착을 알리는 초인종이 울렸다. 두 사람이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우리는 친한 사이야." - P142

세상 모든 바다

당신은 ‘세상 모든 바다‘의 팬입니까.
아무에게나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다른 사람에게 해도 될까. - P9

나는 그날 잠실에 모인 십삼만 명 중 한 명이었다.
서울에서 유학중이었으므로 잠실 주경기장에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전철로 삼십 분. 콘서트 티켓은 없었다. 구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경쟁이 치열하기도 했지만, 나는 공연을 꼭 눈앞에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 P10

그리고 공연 며칠 전부터 트위터에서 돌던 소문이 있었다.
첫 투어 종료를 기념하여, 티켓을 구하지 못한 팬들을 위해 경기장 바깥에서 게릴라 라이브를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 세모바다운 아이디어긴 했다. 그녀들은 늘 모든 팬에게, 아니 모든 사람에게 닿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하지만 분명히 해두자면,
나는 그 소문을 믿진 않았다. - P11

잠실에 모인 이들은 인권과 환경에 대하여 세모바가 보여준 꿈을 나누고 있었다. 누군가 88올림픽 이후 잠실이 가장 세계적인 순간‘이라고 트윗했던 것이 기억난다. 88올림픽은 군사정권이 꾸며낸 꿈이었지만, 지금의 잠실은 자발적으로 이뤄낸 것이기에 아름답다는 의견이 수만 번 리트윗되기도 했다. - P12

"오 외국인? 일본인이에요?"
그런 질문은 내겐 괜히 까다로웠다. 나의 부모님은 모두 재일 교포 3세다. 나는 스물두 살 때 자이니치 4세가 되는 것을포기하고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나로서는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부모님도 반대하지 않았다. - P13

"Yes. I‘m from Japan."
99솔직히 말해서 한국어로 대답하면 대화가 길어질 듯했다.
영록의 첫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투박한 운동화와 어정쩡한핏의 청바지. 스포츠 브랜드의 로고가 커다랗게 박혀 있는 땀에 젖은 티셔츠. 바싹 올려 멘 백팩에 도수가 높아 보이는 안경. 어째서 세계 오타쿠들의 패션은 같은 방향으로 수렴하는거야, 라며 나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마이 네임 이즈 백영록. 나이스투미츄!" - P14

일본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에 나는 나가사키라고 대답했다. 사실은 그 옆 동네지만, 정확히 말해도 그가 알 것 같지 않았다. 영록은 "아이 원트 투 잇 나가사키 짬뽕" 같은 소리를 하다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말했다.
"아임 프롬 해진. 유노 해진군? 경상북도?"
평범한 외국인이라면 해진군을 모를 것이다. 한국인에게조차 낯선 곳이니까. - P15

계산을 마치고 나와서, 영록에게도 티켓이 없다는 사실을알게 됐다.
나 자신도 티켓이 없었으면서 참 이상하지만, 당연히 영록이 콘서트를 보러 온 줄 알았다. 가본 적이 없어 정확히는 몰랐으나 해진은 경상북도의 어디였고, 분명 먼 곳이었다. 수 시간 버스나 열차를 타야 하는, 아마도 번거롭게 환승도 해야 하는 곳. - P17

나만큼이나 인기가 없던 친구를 따라 후쿠오카에서 열린 라이브에 간 적이 있다. 지하 소극장에는 한국인들이 상상하는 그대로의 일본 오타쿠들이 잔뜩 있었다. - P18

 라이브가 끝나고 쉰내 나는 오타쿠들 틈에 섞여 극장을 나올 때, 나는 지나가던 여고생의 수군거림을 들었다.
"기모이キモい......"
기분이 나쁘다는 뜻이다. 요새 한국말로는 ‘극혐‘ 정도일 것이다.
나는 그 기이한 오타쿠들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았다. - P19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쯤 케이팝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블랙핑크나 트와이스 같은 그룹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주로 귀여움을 판매하는 일본의 걸 그룹에 비해 케이팝의 그녀들은 더 유능하고 당당해 보였다. 멋있는 프로페셔널로서 지지할 수 있는 느낌. - P19

"하쿠 상은 좋겠다. 좋아하는 거 다 말할 수 있어서."
무슨 이야기인지 되묻자 그는 대답했다.
"내가 걸 그룹 좋아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두 가지로 반응해첫째는 ‘네가 여자가 없으니까 그러지고, 둘째는 ‘네가 그러니까 여자가 없지‘야." - P21

 아이비리그 출신으로 한국 굴지의 엔터사에서 빠르게 임원이 된 프로듀서는 말했다. 선도적인 문화 콘텐츠로서 케이팝은 이제 ‘공존‘이라는 시대적 화두에 답해야 한다고.
어떤 사람들은 왜 그들이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후반의 여성이어야 하는지, 열한 명 중에 아프리칸은 한 명뿐인데 아시안은 일곱 명이나 되는지를 문제삼았다. - P22

오래전부터 축적된 케이팝의 팬덤 조직 문화는 세모바에 이르러 결실을 맺은 것처럼 보였다. 빛나는 순간들. 샌프란시스코 도심을 행진하던 성소수자들 속에도, 홍콩 코즈웨이베이의 시위대 속에도 팬들은 있었다. 그들이 세모바의 노래를 제창하는 영상은 천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 P23

 트위터에 홍미로운 소문이 있다고. 티켓이 없는 팬들을 위해 경기장 바깥에서 게릴라 라이브를 할지도 모른다고.
"왓? 리얼리?"
영록이 그 소문을, 내가 ‘rumor‘라고, ‘maybe‘라고 강조한 그 이야기를 얼마나 믿었는지는 알 수 없다. - P24

나는 그 일에 대해 구체적이고 정확한 증언은 할 수 없다.
그건 내가 집에 돌아온 뒤의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날 잠실에 모인 십삼만 명 중에 한 명이었다는 것 역시 완전한 사실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 P25

아니, 이런 것이야말로 내 상상일 뿐이다.
팬들이 장대비 속에서 그곳에 있다고 믿은 세상 모든 바다는 진짜가 아니었다.
가발과 의상까지 준비해 세모바인 것처럼 꾸민 열한 명의사람들, 그리고 몇몇 조력자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불러야 할까. 어떤 매체들은 그렇게 표현했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세모바를 카피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적당히 이목을 끌고 나면 모형 총을 꺼내어 서로 쏘고 쓰러진다. - P26

너무 그럴듯한 모형 총을 준비한 게 문제였을까. 목격자들은 누군가 영어로 ‘Gun!‘이라고 외쳤고, 곧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진술했다. 음악에 미리 덧입혀둔 총소리는 조악했다. 사람들은 총소리보다 비명소리에 겁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 P27

영록은 그 속에서 안경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홉 명이 죽고 이백여 명이 다쳤다. 사고 일주일 뒤, 추모를 위해 팬들이 만든 웹 페이지가 공개되었다. (중략). 영록은 ‘경상북도 해진군의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다‘라는 프로필뿐, 어떤 소셜미디어 계정도 없이 중학교 졸업 사진이 게시되어 있었다. - P27

영록이 사망자 중 가장 어리며, 해진 주민이었다는 점을 많은 팬이 언급했다. 그가 영어 회화 동아리의 부회장이었다거나, 늘 교실의 분리수거를 담당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소셜미디어에 돌아다녔다. 영록의 장래 희망은 외교관 혹은 다른 글들에 의하면 선원이거나 만화가였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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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말한 것으로, 연금술이 시작된 시대 이래로 이중의 사실이 있었음이 충분히 밝혀졌을 것이다. 하나는 실험실의 실용적이고 화학적인 작업이지만, 또 하나는 심리학적 과정으로서 그것은 부분적으로 의식된 정신적인 과정이었으며 부분적으로는 무의식적인 과정으로 투사되어 질료의 변환 과정에서 보게 된 과정이다. - P62

연금술사의 정신Psyche이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원인과 출발점으로서 작업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실험자의 심적 영적seelisch-geistig 상태와 입장이 왜 그렇게 강조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알피디우스Alphidiu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⁸⁰ "네가 너의 영Geist을 신을 위해 정화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해서 너의 심장에 있는 모든 부패와 타락을 모조리 청소하지 않는 한, 너는 이 학문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 P63

83 Auroral, IX장, 네 번째 우화(p. 76; 라틴어 원문은 『전집』을 보라). - P302

마지막 문장에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모리에누스가 일반적인 교화를 이야기한것이 아니라, 신적인 기술Kunst과 작업에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비슷하게 미하엘 마이어Michael Maier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화학에는 어떤 고귀한 돌lapis이 있다고 한다.
이것의 시작은 상당히 비참하지만 끝은 기쁨으로 충만하고 환희가 넘친다; 그래서 나는 내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가정한다: 처음은힘겹고 슬프고 불쾌하지만 나중은 기쁘고 밝은 모든 것들이 나를 맞아줄것이다."⁹¹ - P66

91 Majer, Symbola aureae mensae duodecim nationum, Frankfurt, 1617, p. 568, - P303

 만일 "진지한 열중seria meditatio"
이 단순한 허풍이 아니라면-물론 우리가 이런 가정을 할 만한 이유가 없지만-우리는 아마도 고대 연금술사들이 비범한 집중력으로,
그러니까 종교적인 열정으로 그들의 작업을 해나갔다고 상상할 수 밖에 없다(아래와 비교). 그러한 헌신적 태도는 물론 가치와 의미들을 헌신적인 탐구 대상 속에 깊이 투사시키고 그것을 형태와 형상으로 채우는 작업에 적합하다. 그런데 이 형태와 형상은 우선 연구자의 무의식에 근원을 둔 것들이다. - P66

C. 명상과 상상


위에서 방금 기술한 견해는 ‘명상meditatio‘과 ‘상상imaginature‘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연금술사들의 독특하고도 주목할 만한 방식과 일치한다. 1612년에 편찬된 쿨란드의 연금술사전Lexicon Alchemiae』은 ‘명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메디타치오meditatio‘라는 낱말은, 사람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다른 이와 내적인 대화를 나눌때 사용되는 말이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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