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의 시민적 삶이 마찰을 빚고 있다. 선거에서 패배한 대통령이 성난 군중을 선동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폭력 행위를 조장했다. 의회가선거 결과를 승인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였다. 조 바이든 Joe Biden 시대인 지금까지도 공화당원들 대부분은 도널드 트럼프 Donald Trump에게 돌아가야 할 승리를 도둑맞았다고 믿고 있다. - P8
트럼프 대통령이 임기 때 추진했던 일들의 결과가 빚어낸 여파는 미국민주주의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나 우리가 안고 있는 시민적 차원의 여러 문제는 트럼프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며 그의 패배로 끝나지도 않았다. - P8
승자와 패자 사이에 난 분열의 골은 수십 년에 걸쳐 깊어졌으며, 정치에 독이 되어 사회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이후로 엘리트 지배층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작업을 진행했다. - P9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승자에게 돌아가는 이득을 패배자에게도 나눌 수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땅한 보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 P9
정부는 경제 권력의 집중화를 막는 균형추역할을 포기한 지 오래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월스트리트에 대한 규제 완화 흐름에 동참하면서 선거 기부금을 챙기는 데만 급급했다. - P9
구제금융과 저임금 국가로의 일자리 역외 이전에 시민은 분노했고, 대중적으로 타오른 분노의 불길은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정치 스펙트럼전반으로 확산됐다. - P9
트럼프 지지자들 가운데 일부는 트럼프가 외치던 인종차별적 호소에 호응했다. 트럼프 자신도 정당한 불만에서 비롯된 분노를 이용했다. 지난40년 동안 이어진 신자유주의 통치는 1920년대 이후로 볼 수 없었던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초래하며 사회적 계층의 이동성을 더욱 정체시켰다. - P10
주류 정당들은 노동자에게 불평등과 임금 정체를 해결하려고 맞서려 하기보다 대학 학위를 따는 방식으로 세계화에 맞춰서 스스로를 개선하길 강요했다. - P10
그러나 엘리트층과 그들이 추진하는 세계화 프로젝트에 대해 트럼프가 보인 적대감은 노동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쌓는 비용을 멕시코에게 부담하게 하겠다는 그의 약속이 적대감을 자극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 P10
전 세계가 미국의 힘과 의지를 우습게 여기고 또 세계화 현상이 빚어낸 다문화적이고 세계적인 정체성 때문에 애국심과 소속감이라는 전통적 발상이 혼란을 겪던 시점에 등장한 장벽 건설 조치가 ‘미국을 다시 한 번 더 위대한 국가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 P11
이 책의 초판이 나온 1996년에는 냉전이 끝나고 미국판 자유주의와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살아남아 승리하는 체제처럼 보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종말이 코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 P11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은 여전히 끈질기게 이어진다. 팬데믹, 극단적 당파주의, 극악한 인종차별, 유독한 소셜미디어 등으로 촉발된 오늘날의 불만은 사반세기 전보다 훨씬 더 예리하고, 한층 더 원한이 깊으며, 심지어 치명적이다. - P12
자치 프로젝트가 위축되자 시민들 사이의 유대감도 약해졌다. 글로벌협치 기관들로서는 시민의식의 전제조건인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이해 및 상호의무의 정신‘을 키워나갈 수 없었다. 국경선이 갖는 경제적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국가를 향한 충성심도 약해졌다. - P12
기업도 지구 반대편에서 노동자와 소비자를 찾을 수 있게 되면서 자국민들에게 덜 의존하게 됐다. 반면 생계의 끈이 생활 터전으로 한정됐던 노동자들은 이런 현상에 주목했다. 경제 활동을 조직하는 세계화라는 새로운 방식은 불평등을 고조시키고 일과 노동의 존엄성을 약화시키며 국가 정체성과 충성심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 P12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반대가 편협한 인식으로 치부된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애국심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 즉 갈등 없는 개방된 세상을 마다하고 그로부터 도피하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인식됐다. - P13
2016년 영국은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했다. 그로부터 일곱 달 뒤에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는 사건과 마찬가지로 시장경제 체제에서 특권적 혜택을 누리던 대도시의 엘리트들에게 충격을 준 결과였다. - P13
심지어 유럽연합도 그렇다. "초국가적 supranational 통치기구로서 가장 성공한 실험으로 평가받는 유럽연합조차도 구성원들 사이에 경제적·정치적 통합체의 메커니즘을 지지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력한 유럽의공동 정체성을 배양하는 일에는 지금까지 실패"했다.³ - P13
자치가 원활하게 작동하려면 경제적 강자에게 민주적 책임을 지우는 정치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 아울러 시민은 자신들이 공동의 사업에 참여한다고 여길 정도로 서로에 대한 동일성을 충분히 느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두 가지 조건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 P14
미국인은 정부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이익집단들에 사로잡혀 그들의 이익만 대변하느라 일반 시민의 발언권은 깡그리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상은 좌파와 우파의 진영을 넘어 정치적 스펙트럼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 P14
한편 미국 사회는 뿌히 깊이 분열돼 있다. (중략) 민주당을 지지하는 주에 사는 사람들과 공화당을 지지하는 주에 사는사람들, 도시 거주자와 시골 거주자, 대학 학위를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않은 사람들 등이 점점 더 분리된 채 살아간다. - P15
우리가 처한 곤경의 두 가지 측면, 즉 경제적 강자의 책임 회피와 양극화의 고착은 서로 연결돼 있다. 그리고 둘 다 민주주의 정치를 무력하게 만든다. - P15
민주주의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최근 수십 년 동안 이어졌던 기술 관료주의 정치에 가린 두 가지 질문을 놓고 토론해야 한다. - P15
하나는 ‘경제가 민주적 통제에 순응하게 하려면 어떻게 경제를 재구성해야 할까‘이고, 다른 하나는 ‘양극화를 누그러뜨리고 효과적인 민주시민으로 거듭날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공적 삶을 재구축해야 할까‘이다. - P16
전자는권력과 제도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정체성과 이상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중심 주제는 두 개의 작업이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 P16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은 대세에 어긋난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을 시민으로 생각하기보다 소비자라고 생각한다. 소수의 대기업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목격할 때 시민사회의 건전성이 훼손되길 걱정하기보다 독과점 때문에 가격이 오를 것을 걱정한다. - P16
루이스 브랜다이스 Louis Dermbitz Brandels 가 ‘거대함의 저주 curse of bigness‘라고불렀던 현상은 소비자뿐만 아니라 자치의 작동에도 문제가 된다. 제약 산업이 너무 강력해지면 건강보험 개혁을 방해할 것이고, 심지어 팬데믹의와중에도 복제약 및 복제백신 제조를 장기적으로 금지하는 특허 보호를 주장할 것이다. - P16
그러나 오늘날, 빅테크와 소셜미디어가 중요하게 대두되면서 ‘거대함‘ 이 퍼붓는 ‘저주‘는 높은 소비자가격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님을 상기시킨다. 페이스북은 무료다. 그러나 소셜미디어 확산에 뒤따르는 피해로 민주주의가 훼손된다. - P17
시민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든 결과를 사람들은 이제야 비로소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들이 대중의 주의력 유지 능력을 부식시키는 효과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도 않았다. - P17
익숙하지 않다. 경제 정책을 다루는 토론 주제는 대부분 경제 성장과 (이것보다 비중이 적긴 하지만) 분배정의distributive justice 다. 즉 ‘파이를 어떻게 하면 크게 만들까‘와 ‘파이를 어떻게 하면 공정하게 분배할까‘를 두고 토론한다. - P17
즉 경제 권력이 민주주의의 통제 대상이 돼야 한다는뜻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존엄한 조건에서 상당히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어야 하고, 직장과 공적인 분야에서 발언권을 가질 수 있어야 하며, 공동선 common good에 대해 숙고할 기회를 제공하는 폭넓은 시민 교육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 P18
나는 한층 폭넓은 시민성 차원의 경제 논쟁 전통을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 politicaleconomy of citizenship‘이라고 부른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이러한 전통은 실종됐지만 미국 역사의 많은 부분에서 공적인 담론을 구성하던 한 축이었다. - P18
이 책의 초판이 출간된 뒤로 사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지났는데, 그동안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은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이 불만은 민주주의의 미래가 암울하게 보일 정도로 깊고도 예리하다. - P19
초판에서는 전체 내용을 두 부분으로 나눠서 설명했다. 하나는 미국의헌법적 전통, 다른 하나는 경제에서의 공적 담론을 다루면서 당대의 ‘자유주의 공공철학 public philosophy‘이 각각의 영역에서 어떻게 전개됐는지 설명했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헌법 부분을 빼고 ‘경제‘ 주제에 집중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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