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 하트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5월
평점 :
품절


빅 픽처로 유명한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 '데드하트'이다. 빅 픽처 이전에 출판된 작품인데 빅 픽처가 인기를 끌게 되어 뒤늦게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것 같다. 

 

닉 호손은 미국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삶에 무료함을 느끼고 우연히 발견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도를 보고 무작정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한 여자(앤지)를 만나게 된다. 잠깐의 만남을 즐기려는 닉 호손의 의도와는 달리, 앤지에 의해 납치(?) 되어 지도상에 나타나지도 않는 울라누프라는 작은 마을에서 앤지와 부부가 되어 생활하게 된다. 
 
울라누프는 높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가장 가까운 마을이 1,400km나 떨어진 완전히 세상과 단절된 마을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닉 호손은 도망갈 수 없는 천연 감옥에 갇힌 것이다. 오십여 명 되는 네 가족이 자신들의 화폐(치트)와 법을 정하여 자치구처럼 살아가고 있는데, 앤지의 아빠인 '대디'의 말이 곧 법인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닉 호손은 거기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잠깐 오스트레일리아 여행을 온 것뿐인데, 자칫 잘못하여 평생을 울라누프라는 아무도 모르는 작은 마을에서 살 운명이 되어 버렸다.

 

울라누프는 저축의 개념이 없었다. 일주일간 일을 하면 치트라는 화폐를 받는데 유효기간은 일주일이었다. 일주일이 지나면 쓸 수 없는 화폐였던 것이다. 따라서 따로 모아놓을 필요도 없었고 그저 한 주 벌어 한 주 먹고사는 단순한 삶의 형태였다. 

 

"우리는 저축이라는 개념을 싫어하지. 돈을 쌓아 놓게 만들고, 서로 경쟁하게 만들고, '네가 나보다 많이 가졌잖아.' 같은 말을 하게 만드니까. 우리가 '치트'를 사용하기로 결정한 이유야. 그 주에 번 돈은 저축하지 말고 다 써야 한다는 원칙이지. 재산 문제로 빚어지는 분쟁의 싹을 아예 싹둑 잘라 버리기 위해 모두를 평등하게 만든 거야."

 

<데드하트> 곳곳에는 현대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치트 화폐도 그런 비판 중 하나였다. 현대 시스템의 한 축은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사유재산과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다. 그러나 이것은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분쟁의 싹이 되어 우리를 괴롭힌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유산 때문에 싸우는 형제들을 우리는 수 없이 듣고 보지 않았는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숙연하고 엄숙한 자리에서, 자신들의 자식들이 보고 있는데도 서로 고함을 지르며 멱살을 잡는 추태를 부리는 이들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무엇이 인간을 이처럼 바닥으로 떨이 지게 만드는가. 바로 돈과 탐욕이다. 울라누프는 최소한 이런 추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재산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데드하트>는 현대 사회의 또 다른 점을 비판한다. 닉 호손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힘든 노동에 더욱 큰 목적이 있는 척하며 삶을 견딘다. 노동이 그저 의식주를 해결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더욱 큰 목적이 있는 척한다. 결국 우리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일할 뿐이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초라한지 마주하지 않기 위해 일할 뿐이다. 계속 바삐 일하다 보면 우리의 삶이 절망적으로 무가치하다는 사실과 우리 스스로 빠져든 막다른 길의 깊은 수령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일을 하지 않으면 소득이 없기 때문에 살아갈 수 없다. 일을 하는 것은 일 자체의 의미도 있지만 그것을 통해 수입을 얻고 의식주를 해결하는 수단이자 도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너무나 의미가 있는 일인것처럼 착각하고 그 일에 몰입한다. 먹는 시간, 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다. 스스로를 계속 펌프질하며 쉬면 안 된다고 채찍질한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시간이 잘 가서 좋다고 하고 쓸데없는 고민을 하지 않아서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작, 무엇이 중요하고 내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전혀 돌아보지 않은 채. 많은 현대인들이 바쁜 일상으로 인해 자기가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하는지 돌아보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돌아보고 싶지 않아 더 바쁘게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혹시나 내가 막다른 길,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발견할까 싶어서.

 

닉 호손은 울라누프에서 3주 동안 밴에 매달려 수리를 하고 멋지게 고쳐놓았는데 고쳐놓자마자 대디가 다시 때려 부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는 침대에 드러누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게 지내게 된다. 첨에는 말도 못하고 정신이 나간 바보처럼 연기하려고 하는데, 나중에는 자신이 마냥 연기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앤지의 말대로 나는 똥오줌이 질펀한 매트리에서 잠을 자야 했다. 앤지는 나를 똥오줌 천지인 매트리스에 내버려 두고 빈백 의자에서 잠들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벌인 짓이 마냥 연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머릿속이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내 자신도 알 수 없는 세계에 다다라 있었다. 연기였다면 지금쯤 포기해야 마땅했다. 밤새 똥오줌 천지인 매트리에서 누워 잔다는 건 연기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는 마치 영화 엑스페리먼트(The Experiment, 2001)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과 비슷하다. 영화 엑스페리먼트에서는 일반인을 모집하여 실험을 하는데 아무 기준 없이 일반인을 간수와 죄수로 나눠 각자의 역할에 맞게 행동하라고 지침을 내린다. 처음에는 모두들 어색하게 자신의 역할에 따라 행동을 하다가 나중에는 간수 역할을 한 사람은 진짜 자신이 간수인 것처럼 말과 행동이 거칠어지고 결국 죄수를 죽이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처럼 처음에는 연기로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이처럼 연약해서 생각과 환경에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

 

<데드하트>는 닉 호손이라는 인물과 울라누프라는 마을을 통해 현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데드하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중부를 부르는 표현이지만 직역하면 죽음 심장, 죽은 마음이다. 현대 사회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겉보기에는 열심히 일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은 시간을 때우는 것이 전부인,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데드하트'를 가진 현대인들에게 다시 한 번 자신이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라는 일침을 가하고 있다. 

 

"여태껏 지금 달리고 있는 길에 필적할 만큼 잔혹하고 위험한 길로 들어서본 적이 없었다. 황량하고 메마른 땅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잠시 더위를 식힐 나무그늘도 없었다. 마른 잡초조차 없었다. 생명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생명체가 나타나면 여지없이 죽여 버리는 무시무시한 황무지였다. 평평하게 펼쳐진 메마른 세계, 검붉은, 녹아내린, 대륙의 데드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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