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 - 예수 복음의 심장부를 찾아서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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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말하는 '탕자의 비유'는 보통 탕자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라고 부르는 게 더 낫다고 말하며 이 이야기는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흔히 '탕자'로 번역되는 문구의 형용사 'prodigal'은 '제멋대로 군다'라는 뜻이 아니라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라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이 단어는 비유 속의 둘째 아들만이 아니라 아버지를 수식하는 말로도 어울린다. 아버지가 아들의 죄를 따지거나 그에게 죄의 책임을 '돌리거나' 응보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하나님은 앞뒤 재지 않고 아낌없이 다 내주시는 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자녀인 우리에게 그야말로 '탕부'(蕩父)이시다." 

저자는 '하나님의 무모한 은혜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요,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이며, 이 책의 주제도 바로 그것이다.'라고 밝힌다. 

비유에 나오는 동생은 세리와 죄인들에 상응하고 형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해당한다. 저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비유의 타깃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라고 말한다. 즉, 보통 둘째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을 하는데 실제 예수님의 의도와 방향은 첫째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제멋대로 사는 죄인이 아니라 성경대로 행하는 종교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기존 해석과 설교의 핀트가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그분의 이야기는 동생의 해로운 자기중심성을 드러낼 뿐 아니라 형의 도덕주의적 삶도 가차 없이 질책한다. 예수님은 종교적인 사람이나 종교를 등진 사람이나 둘 다 영적으로 잃어버린 존재이고..." 

지금과 예수님 활동 당시의 온도차를 인지해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종교를 등진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당시 종교적이고 성경을 믿던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나아가 지금의 교회인 형이 동생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우리 교회가 생각보다 더 형들의 세상이라고 경고한다. 

둘째 아들이 유산을 달라는 행위는 그 당시로 보면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저자는 아버지의 반응이 더 충격이라고 설명한다. 혼을 내기는커녕 살림(헬라어 단어 비오스로 생명을 뜻함)을 나누어 준 것이다. 

이런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달려 나간다. 제일 좋은 옷은 자신의 옷을 아들에게 입히라고 종들에게 명령한다. 팀 켈러는 이것이 아들의 신분이 회복되었다는 확실한 증표라고 설명한다. 자격이나 조건을 붙이며 둘째 아들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반역하는 둘째 아들을 내보낼 때 헤프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고 다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보여 주시듯이 아버지가 사랑으로 아들을 끌어안은 시점은 아들이 개과천선을 입증하기 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외워 두었던 회개의 대사조차 다 읊기 전이었다. 하나님의 은총은 그 어떤 공로나 뼈저린 참회로도 얻어 낼 수 없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수용은 값없이 베푸시는 선물이다." 

여기까지는 감동의 스토리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첫째 아들인 형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형은 아버지를 부를 때 극진히 예를 갖추어야 하는데, 그냥 "보소서!"라고 말한다. 둘째 아들이 돌아온 이 기쁜 날에 갑자기 첫째 아들이 반항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 역시 놀랍도록 자애롭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들아"라고 아버지는 이야기를 한다.  

"네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욕되게 했다만, 나는 너도 잔치에 동참했으면 좋겠다. 나는 네 동생을 버리지 않을 것이고, 널 버릴 마음도 없다. 내 말대로 자존심을 버리고 잔치에 들어오너라. 선택은 네 몫이다. 들어오겠느냐 말겠느냐?" 

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순응의 길이고 하나는 자아 발견의 길이다. 형은 바리새인들로 도덕적 순응의 길을 대변한다. 하나님의 복과 구원을 받으려면 말씀에 엄격히 순종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도덕성이 중요하다. 동생은 자아 발견의 길을 대변한다. 각자의 목표와 자아실현을 추구한다. 전통, 편견 등이 개인의 자유를 가로막으면 안 된다.  

하나는 착하고 하나는 못됐다. 첫째는 착하지만 아버지와 멀어져 있다. 아버지는 이 잃어버린 두 아들을 함께 사랑의 잔치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첫째 아들은 착하고 순종적이어서 아버지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점이다. 자신의 종교적 헌신과 순종, 그리고 도덕성이 그를 교만하게 만들고 아버지와의 사이를 틀어버렸다. 이는 당시 바리새인은 물론이고 지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격적인 메시지이고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두 형제의 마음은 똑같았다. 둘 다 아버지의 권위를 못마땅해하며 거기서 벗어나려 했다. 둘 다 아버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서려 했다. 다시 말해서 두 아들 모두 반항했다. 방법상 하나는 아주 못 되게 굴었고 또 하나는 지극히 착했을 뿐이다. 둘 다 아버지의 마음을 멀리 떠난 잃어버린 아들이었다." 

결국, 죄라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 자리에 내가 올라서는 것이다.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런 점에서 충분히 죄를 지을 수 있다. 팀 켈러는 '종교적인 사람들도 대개 아주 도덕적으로 살지만 그들의 목표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그분을 통제하고, 자기네 생각대로 그분께 의무를 지우는 것이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착하게 살고 말씀에 순종했으니 하나님이 당연히 복을 베풀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당신도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 든다면 당신의 모든 도덕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삶 속에서 정말 원하는 것들을 그런 식으로 그분께 받아 내려는 것이다." 

이야기 말미에 형에게 잔치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노하여 거부한다. 이에 대해 팀 켈러는 아버지가 동생의 신분을 회복시키자 자기 유산의 지분이 줄어든 형의 본색의 드러났다고 이야기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틀렸으나 모든 사람이 사랑받는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불러 그 사실을 인식하게 해서 변화시킨다." 

스스로 울타리를 치며 자신들을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고 자신들만이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착하고 선택받은 자들이라는 우월감과 선민사상이 의연 중에 그리스도인들 마음에 자리 잡을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결코 이웃을 사랑하고 품을 수 없다. 특히, 예수님은 형 같은 바리새인의 상태가 영적으로 더 절망적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눈이 멀어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들은 기쁨과 사랑의 순종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인한 순종의 삶을 산다. 또한, 죄책감에서 헤어나기 힘들고 메마른 기도 생활을 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형으로 대변되는 이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사귐이 없다. 하나님 안에서 자유함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친밀함이 없다. 가장 큰 위험은 자신이 하나님과 멀어져 있음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형 부류의 사람들은 삶의 상황에 대해 속에서 분노가 들끓고, 쓰라린 원한이 오래가고, 인종이나 종교나 생활방식이 다른 이들을 얕보고, 기쁨 없이 고역에 시달리 듯 살아가며, 기도생활에 친밀함과 기쁨이 별로 없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하나님은 아버지가 두 아들 모두에게 먼저 나가 사랑을 표현하듯이 주도적으로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만나주신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진정한 참회와 뉘우침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나쁜 행실뿐만 아니라 선한 생실에 대한 교만도 회개하며 나아가야 한다. 나아가,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 구원의 길에 동참시키고 함께 잔치에 참여해야 한다. 또한, 예수님이 불의와 악과 죽음을 미워하셨듯이 기아와 질병과 불의를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써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이제는 내 마음대로 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무한한 사랑을 깨닫는다면 더 이상 내 마음대로 살 수 없다. 내 삶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잔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잔치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이다. 저자는 '다른 신자들의 공동체에 깊이 동참하지 않고는 당신은 결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라고 덧붙인다.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에 깊이 동참하여 사랑과 책임의 견고한 관계를 이루어야만 한다. 예수님을 본받고 섬기고 사랑하려 애쓰는 신자들의 공동체에 속할 때에만 당신은 그분을 알아 가고, 달아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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