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재벌 흑역사 - 상 - 개정증보판 한국 재벌 흑역사
이완배 지음 / 민중의소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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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기록되고 기억된다. 흔히 이야기하듯, 쿠데타는 성공하면 혁명이지만 실패하면 반란, 반역이다. 저자는 부족한 재벌들의 어두운 역사 기록으로 인해 책 원고 작업이 너무나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재벌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고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재벌은 승자이다. 따라서, 재벌 해악을 다루는 기사와 책은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 물론, 재벌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라고 저자도 언급한다. '공'이 있고 '과'가 있는데 '공'에 대한 자료 밖에 없고 '과'에 대한 자료는 부실한 것이 문제이다. 저자는 이것은 불공평하다고 분명히 말하며 책의 집필 의도를 밝히고 있다. 

삼성 창업자는 이병철이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대구, 이 시절 이병철은 '밤의 황태자'로 불릴 만큼 시내 요정을 휩쓸었다고 한다. 이병철은 흔히 말하는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다.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1,000석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농지개혁 직전 한국에서 1,000석 이상 소유한 대지주는 905명뿐이었다고 한다.  

정미소 사업, 김해 평야 투기 사건을 비롯해 여러 사업을 하다 잘 안되어 만주와 중국으로 두 달 여행을 간다. 이 여행에서 유통업의 미래를 보고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한다. 이것이 바로 삼성그룹의 모태이다. 무역업에 이어 국수를 만드는 사업을 시작하는데 대박을 친다. 이어, 양조 사업으로 성공을 한다. 젊은 시절 실패로 인해서인지 이병철은 모험을 즐기는 사업가는 아니었다. 철저히 의식주 위주 사업에 집중한다.  

대구를 떠나 서울 혜화동에 안착한 이병철은 삼성물산공사라는 회사를 세운다. 설탕 제조업(1953년 제일제당 설립), 모직(1954년 제일모직 설립)에도 뛰어든다.  

LG 구인회와 사돈지간인 이병철에게 동양 TV를 넘겨준다. 그런데 이병철이 LG 텃밭인 가전 사업에 진출하여 앙숙이 된다. 효성도 이병철이 자신들 창업주 조홍제 뒤통수를 쳤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병철과 조홍제는 삼성물산공사로 동업을 시작해,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 계열사를 늘렸는데 1960년 이병철이 갑자기 동업 청산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군사 쿠데타는 삼성과 이병철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박정희는 군사 정통성 확보를 위해 기업 경영자 대부분을 부정축재자로 몰았다. 결국, 이병철은 일본 도쿄에서 기자회견 열고 전 재산을 국가에 내놓겠다고 밝힌다. 물론,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1962년 흉년과 1963년 큰 태풍과 호우로 농토가 엉망이 된다. 시중에 식량이 동의 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때 밀가루, 설탕, 시멘트 3대 제품 가격이 급등한 삼분폭리 사건이 벌어진다. 이 시기, 이병철은 오로지 돈벌이에 몰두하여 제일제당 밀가루 가격을 올린 것이다. 문제는 이 밀가루 가운데 4,500톤이 정부가 해외 원로로 받아왔다는 사실이다. 제일제당 설립에 필요한 18만 달러도 정부의 특별 외화 대부로 조달했다. 

"태풍과 흉작으로 국민들이 배를 곯고 있다면, 원조 경제를 바탕으로 재벌로 성장한 이병철은 사재를 내놓아서라도 국민들의 주린 배를 채우는데 '원조'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였다." 

"원조 물자와 원조 자금으로 사업의 기반을 닦은 이병철은 엉뚱하게도 '국민들의 먹을 권리'를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 사용했다. 이병철은 그 제일제당을 기반으로 삼성 재벌을 일으켰다. 지금 삼성이 쌓아놓은 그 수많은 열매는, 밀가루 한 포대를 구하지 못해 곯은 배를 움켜쥐어야 했던 1963년 민중들의 삶을 밑거름으로 열린 것이다."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이맹희가 아버지 이병철에게 밉보여 승계 과정에서 밀려난다. 한국비료 건설 자재로 들어오던 컨테이너 안에 사카린이 대량으로 발견된다. 사카린을 밀수해 국내에 은밀히 유통한 것이다. 고발자가 이맹희나 이창희 둘 중 한 명이 박정희에게 고자질한 것인데, 박정희는 이병희를 내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이맹희, 이창희는 삼성그룹으로부터 멀어지고 3남 이건희가 왕좌를 차지한다. 

박정희와 이병철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군사정부를 이끌 돈줄을 이병철을 통해 확보했다. 한국비료도 박정희 요청으로 설립했다. 박정희가 농민들 표를 얻기 위해선 비료 공장이 필요했다. 사카린 밀수도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것이었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용인자연농원 땅과 관련해서도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으로 기이한 우연 아닌가? 이병철은 용인 일대의 땅을 휩쓸었고, 나라는 법을 고쳐 "새로 조림한 산림은 증여세를 면제한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뒤 등기를 살펴보니 그 땅의 대부분은 이병철의 아들 이건희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제일제당은 1997년 삼성그룹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다. 2002년 사명을 CJ로 바꿨다. 신세계 백화점 오너 이명희는 이병철의 막내(넷째) 딸이고 이건희의 여동생이다. 이명희 아들이 신세계 부회장 정용진이다. 이명희는 열정적으로 아버지를 따르는 막내딸이었다. 5남 7녀 중 막내였지만 이명희는 한 그룹을 맡게 된다. 2006년 신세계는 정용진 부회장이 증여세를 내고 떳떳하게 기업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발표한다. 이는 인정해줄 만한 대목이나 두 번의 세무조사에서 발견된 상당한 규모의 차명계좌로 '떳떳한 증여가 미완성 작품'이라고 저자는 평가한다. 신세계는 특이하게 이명희나 정용진이 등기임원이 아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릴 수 있는 권리는 그대로 가지고, 법적 책임은 회피하는 자세, 신세계그룹은 그것을 '신뢰 경영이라고 부르는 반면 세간에서는 그것을 '무책임 경영'이라고 부른다." 

이건희는 자동차를 사랑했다. 이건희는 삼성에버랜드 스피드웨이 자동차 경기장에서 람보르기니, 페라리 등을 직접 몰며 스피드를 즐겼다. 2015년 9월 한 주간지가 국토교통부의 자료를 근거로 이건희의 자동차 보유 대수를 공개했는데 1억 원 이상 수입차가 모두 124대였고 다 합친 가격이 477억이었다고 한다. 물론, 개인 사유재산과 취미활동은 시비를 걸면 안 된다. 

문제는 삼성자동차를 설립한 것이다. 김영삼 정부 때 승인을 받는다. 삼성자동차의 첫 제품은 SM5였다. 그러나 시기가 좋지 않았다. 출시일이 외환위기가 절정을 향해 치닫던 1998년 2월이었다. 결국, 삼성자동차는 실패한다. 이 실패에 대한 책임으로 이건희는 삼성생명 주식 400만 주를 내놓는다. 한 주에 9,000원에 매입한 비상장 주식을 70만 원으로 책정해 내놓았다. 삼성자동차 4조 원이 넘는 부채 대부분을 비상장 주식으로 처리했다.  

이건희와 미래에셋 박현주는 풍수지리를 매우 중요히 여긴다. 증권사는 대부분 본사가 여의도에 있는데 삼성증권과 미래에셋증권 본사는 여전히 4대문 안에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옛 삼성증권 본사였던 종로타워는 건물 상층부가 뚫려 있는데 그 땅에 재앙의 기운이 워낙 강해 이를 빼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건희는 신입사원 면접 때도 관상가이자 역술인인 함양의 박재현 도사를 대동했다.  

삼성의 인재 관리는 엄청나다. 금융관계, 변호사, 검사, 판사, 국회의원, 대학교수, 기자 등 관리 대상도 폭넓다. 심지어 저자는 기자 5,6년 차 시절 자신도 삼성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특히, 골프도 안 치는 걸로 나와 있다고 말할 정도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삼성과 중앙일보는 1세대 이병철과 홍진기를 이어 2세대 이건희와 홍석현 시대에도 끈끈한 교류를 이어간다. 홍석현은 스스로 브로커가 되어 삼성으로부터 받은 정치자금을 이회창 측에 건넨다. 검찰의 삼성 봐주기로 박근혜 정부 세 번째 국무총리에 오른 황교안은 당시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었는데 이건희, 이학수, 홍석현 등 주요 인물을 모두 무혐의 처리한다. 그 해 중앙일보는 황교안을 사회 분야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다. 

이건희는 2009년 8월 배임과 조세포탈죄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 원을 선고받는다. 그런데, 4개월 뒤, 이명박 정부는 IOC 위원이었던 이건희가 사면되어야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에 유리하다는 이유만으로 이건희 딱 한 명만 사면한다. 저자에 따르면 대한민국 건국 이래 단 한 명 만을 위한 사면 조치가 내려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재용 승계와 관련해서 큰 역할은 한 것은 에버랜드 전환사채이다. 문제는 전환사채 전환가격을 당시 시가의 10분의 1도 안되는 가격으로 발행했다는 것이다. 발행한 전환사채 절반을 이재용에게 몰아준다. 1998년 삼성그룹 지배구조 정점에 있던 회사는 삼성생명인데, 에버랜드가 삼성생명 주식 3444만 주를 매수한다. 문제는 에버랜드는 삼성생명 주식을 주당 9,000원 정도에 인수한다. 저자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이재용은 48억 원에 에버랜드를 삼켰고, 에버랜드는 300억 원에 삼성생명을 삼켰다. 그런데 당시 이재용이 집어삼킨 에버랜드 주식의 가치는 세법에 따라 계산하면 800억 원에 육박했고, 에버랜드가 집어삼킨 삼성생명의 가치는 2조 3,437억 원이었다. 48억 원으로 800억 원을 만들고, 800억 원짜리를 2조 3,437억 원으로 불리는 이 눈부신 재테크 과정이 성사된 기간은 단 1년이었다." 

저자는 이어서 대부분 편법이고 아주 일부만 불법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국 세법은 삼성이 발전시켰다는 말도 나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비상장기업을 저가에 사거나 팔 수 없다. 이재용 이후 제도와 법이 보완된 덕분이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기상천외한 합병도 이재용의 삼성전자 지배권 강화로 설명한다. 에버랜드 후신 격인 제일모직은 놀이동산을 운영하고 패션 사업을 한다. 삼성물산은 건설과 종합상사가 주력이다. 두 회사가 합병하여 시너지를 내고 성장성을 높인다는 전략이다. 이재용은 제일모직을 충분히 지배할 만큼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제일모직이 다른 계열사들에 대한 지배력은 충분했는데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만 매우 약했다는 점이다. 이재용도 삼성전자 지분을 단 0.57% 들고 있었는데 다행히 삼성물산이 삼성전자 지분을 4.1% 보유하고 있었다. 

이 구조를 간파한 벌처펀드가 바로 폴 싱어가 이끄는 엘리엇 매니지먼트이다.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삼성물산 지분을 7.12% 장내 매수한다. 삼성물산 주가가 5만 원 초반일 때 집중적으로 사들인다. 이어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부당함을 알리기 시작한다. 삼성물산은 제일모직 자산의 세 배가 넘었는데 시총으로 합병 비율을 평가하다 보니 제일모직 1주와 삼성물산 0.35주가 합병 비율이 되었다. 삼성물산에 심각하게 불리한 합병 비율인 것이다. 

"이재용이 최대주주로 있는 제일모직의 주식은 최대한 비싸게 쳐주고, 이재용이 한 주도 갖고 있지 않는 삼성물산은 최대한 싸게 쳐준 상태에서 두 회사를 합병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KCC(삼성물산 지분 5.76% 보유)와 연기금(삼성물산 지분 11.21% 보유)이 삼성 편을 들어주며 합병은 찬성률 69.53%로 승인했다. 문제는 연기금은 공적 자금으로 중요한 표결권을 행사할 때 반드시 의결권 자문사를 통해 객관적인 자문을 받도록 되어 있다. 보통은 이 의견을 그대로 수용한다. 그런데, 삼성물산 합병 관련해서는 세계적인 의결권 자문사들의 반대 의견을 듣지 않고 찬성을 던진다.  

박검수 특검팀은 이재용에게 징역 12년 형을 구형했다. 1심에서 12년 형은 5년 형으로 줄어든다. 이재용 지배력 확보도 있지만 계열사 이익에도 기여하는 면이 있다는 점, 수동적 뇌물이란 점을 드는데 저자는 이에 대해 몰상식을 보여준다고 평한다. 2 심은 더 나아가 정경유착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국민을 바보로 만든 판결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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