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 400만 년 전 인류의 기원부터 21세기 글로벌 사회까지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이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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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세계사를 한 권으로 정리한 책을 다시 요약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책을 읽으며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약 4,600년 전에 만들어진 쿠푸 왕의 피라미드이다. 밑변이 230미터이고 높이가 146미터라고 하는데, 실제로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크기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기회 되면 한 번 꼭 직접 보고 싶긴 하다. 이렇게 큰 피라미드를 만들기 위해 10만 명이 동원되었고 2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엄청난 건축물 이면에는 이름 없는 10만 명의 땀과 노력이 있다. 

고대 그리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비롯한 폴리스라는 도시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이 폴리스 국가들은 페르시아제국으로부터 폴리스를 지키는데 성공한다. 이때 아테네의 승전보를 전한 전령을 기려 마라톤 경기가 생겼다. 그러나,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잘 견뎌낸 폴리스 세계는 내부의 균열로 쇠퇴하게 된다. 바로, 아테네가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다른 폴리스들이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동맹을 맺은 것이다. 결국, 펠로폰네소스전쟁이 30년 가까이 계속되며 아테네는 페스트의 창궐로 인구의 3분의 1을 잃게 된다.  

이처럼, 역사를 보면, 외세의 침략을 잘 막아놓고는 내부의 시기 질투로 인한 분열로 나라가 망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유발하라리의 <대담한 작전>에서도 중세 시대에 난공불락의 요새가 내부 배신자로 인해 허무하게 점령당하는 사례가 많이 나온다. 결국, 외부의 침입자를 잘 막는 것만큼, 내부를 잘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로마제국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무너뜨리고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의미)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그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 등을 거치며 4세기 말 테오도시우스 1세가 동쪽의 그리스적 로마와 서쪽의 라틴적 로마로 제국을 이분했다. 

분리되고 나서 서로마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거센 풍파 속에서 게르만화하며 멸망한다. 반면, 동로마제국은 비잔틴제국이라는 이름으로 1,000년을 이어 가게 된다.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대주교와 사제를 임명하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제후를 이용해 황제를 파문하게 된다. 그리고 제후들이 폐위하려고 하자 1077년에 황제는 교황을 찾아가 눈이 쌓인 성문 앞에서 사흘 동안 맨발로 사죄하고 파문을 철회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카노사의 굴욕이다. 그러고 나서 황제는 나중에 대군을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가 1085년에 교황을 퇴위시켰다.  

카노사의 굴욕 사건을 보면 그 당시 교황의 권위와 권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황제까지 폐위시킬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이후 황제는 반격을 하여 자신의 힘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11세기 후반 이슬람 세계의 패권을 쥔 튀르크의 셀주크왕조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이다. 그래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이 예루살렘을 재점령하기 위해 원정을 시작한다. 200년에 걸친 이슬람교도에 대한 성전(십자군 전쟁)과 그 실패는 결국 비잔틴제국을 쇠퇴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교황권은 권위가 떨어지고 무리한 원정을 강행한 제후와 기사는 몰락하고 왕권은 강화된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은 모직물 산지인 플랑드르 지방과 보르도 와인 산지인 귀엔 지방의 지배권 다툼이 원인이 되었다. 백년전쟁은 영국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으나 17세 소녀 잔 다르크의 등장으로 프랑스군의 사기가 진작되고 프랑스인의 국민 의식이 불타오르며 전세가 뒤집어진다. 잔 다르크는 영국군에게 잡혀 19세의 나이에 처형당한다. 

피렌체의 금융업자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다. 메디치가는 당시 교황청의 재산 관리를 맡았고 유럽에 16개 지점을 두었다고 하니 그 위세가 어마어마했음을 알 수 있다. 한때 피렌체 시의 세금 중 65퍼센트를 납부했다고 한다.  

메카의 상인 무함마드는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는 40세에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고 610년 유일신 알라는 신으로 모시는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이슬람교는 모든 교도가 신 앞에서 평등하다고 가르쳤다. 그는 스스로를 모세, 예수 등 예언자들의 마지막에 위치한 가장 위대한 예언자라고 했다. 그리고 상인 출신답게 이슬람교는 상업 윤리를 중시했고 상업을 천시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이슬람 세계에서 상업이 발전하고 복식부기와 수학도 발달하게 된다. 

3대 후계자가 무함마드의 말씀을 편찬했는데 바로 코란이다. 코란에는 음주와 도박,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지하고 부인은 4명까지 거느릴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일부다처제는 전쟁으로 생기는 미망인을 구제하려는데 그 뜻이 있었다고 한다. 책에서는 현재 이슬람교도의 90퍼센트가 수니파이고 나머지가 시아파(주로 페르시아인)이라고 설명하며 그들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수니파는 칼리프가 무함마드의 정치적 권한을 이어받은 자이며 교의는 교도 전체가 함께 정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시아파는 4대 칼리프인 무함마드의 조카 알리가 종교와 정치의 모든 권한을 물려받은 지도자이며 그가 암살당한 후에는 그 12대 자손 이맘이 정통 지도자임을 주장했다. 시아파는 9세기 후반 이맘이 모습을 감춘 후에도 그가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전까지 인간적으로 뛰어난 학자가 이맘의 권한을 대행해야 한다고 여긴다." 

튀르크인은 수니파를 믿었다. 튀르크인이 세운 첫 이슬람 국가는 10세기 중엽 카라한 왕조였다. 그 이후, 튀르크인은 비잔틴 제국령과 소아시아에 빈번히 침입했다. 이슬람 세계는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 대제국에 의해 사라지고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몽골제국의 재건을 꾀했지만 중도에 좌절한 타무르왕조는 북인도를 침입하여 1526년 무굴제국을 세운다. 이슬람교도에 의해 건국된 무굴제국은 다신교를 믿는 힌두교의 관습을 무시하고 전 영토를 이슬람화하려고 시도한다. 타지마할은 무굴제국 시대에 5대 황제 샤자한이 39세에 떠난 왕비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2만 명의 기술자와 노동자를 동원하여 22년에 걸쳐 묘를 만든 것이다. 

13세기 말, 몽골인의 지배를 피해 소아시아로 이주한 튀르크인이 세운 나라가 바로 오스만제국이다. 오스만제국은 1453년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견고했다. 어이없게도 콘스탄티노플은 성문 하나를 깜빡하고 잠그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튀르크군이 쳐들어갔고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고 만다. 

잉카와 아스테카는 1519년 병사 500명, 말 16마리, 총약 50정을 가지고 상륙한 스페인의 코르테스에게 망하고 만다. 이렇게 쉽게 무너진 이유는 아스테카왕국은 그 당시 흰 피부의 신이 다시 돌아와 자기들을 지배한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스페인 사람들을 보고 착각한 것이다. 잉카제국은 스페인 출신의 피사로에 의해 멸망한다. 그리고 인디언들은 노예가 된다. 특히, 인디언들은 스페인인들에게 살해당할 뿐 아니라 천연두와 파상풍 등으로 대다수가 죽었다. 

절대주의 시대(16~18세기) 유럽은 식민지와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다른 지역에 진출한다. 16세기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에 포르투갈은 아시아로 진출했고 17세기 전반 네덜란드가 패권을 잡는다. 그리고 뒤늦게 참여한 다른 나라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맞서기 위해 네덜란드의 흐로티위스가 고안한 '선점'원칙을 이용한다. 선점 원칙은 간단히 말하면 주민이 지배하는 것은 의미 없고 국가가 먼저 차지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살고 있던 원주민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원칙을 정했다는 것이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이 시대에는 원주민을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그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다. 노예를 물건 다루듯이 다루었으니. 세계사에 대한 공부를 할 때는 사실만 다루어서는 안되고 지금의 윤리적 잣대를 항상 놓고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유명한 나폴레옹은 61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 나선다. 그러나 추운 날씨와 긴 전쟁으로 단 3명만이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이 패배로 나폴레옹은 지중해의 앨바섬에 유배된다. 그는 위암으로 인생을 마치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한 말이 '프랑스', '군대', 그리고 첫 부인'조세핀' 이었다고 한다. 

미국은 독립 후에, 남북이 대립의 길을 가게 되는데, 남부는 영국에 면화를 대규모로 공급했고 북부는 공업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에 따라, 남부는 노예제 허용, 자유무역, 주의 자립을 주장했고 북부는 노예제 폐지, 보호무역, 강력한 중앙정부를 주장했다. 그리고 북부 출신의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남북전쟁이 발발한다. 처음엔 남부가 유리했으나 링컨이 흑인 노예 해방을 선언해 유럽과 국내의 지지를 얻고 게티즈버그 격전 이후 결국 북부가 승리했다. 링컨은 재선되고 남부군도 관대하게 대했으나 결국, 연극 관람 중, 남부주의자 배우에게 저격당한다. 

여기서도 생각해볼 거리가 충분히 있다. 관대함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라는 부분이다. 관대함과 포용은 필요하고 위대한 일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생명과 목숨이 위협된다면 즉각적인 관대함이 아닌, 점진적인 관대함이 필요하다. 5년에 걸쳐서 정치적 안정을 꾀할 수 있는 기회인데, 목숨을 잃게 되면 정치는 다시 혼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컨의 위대함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경위도 흥미롭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에 기념식 차 참석했는데 시청사로 가는 도중 차에 폭탄이 떨어졌다. 그러나, 다행히 황태자는 무사했다. 그러고 나서, 식이 끝나고 예정된 길을 변경해서 고속으로 달렸는데, 운전사가 그만 길을 잘못 들어 모퉁이에 잠시 차를 세운 틈에 저격당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가 시리아를, 영국은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라는 명목 아래 식민지로 지배했다. 이런 식의 강대국의 간섭과 지배는 지금도 여전하다. 우리나라도 625전쟁 이후,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로 인해, 분열되었다. 강대국은 약소국의 아픔과 어려움을 위하는 척하지만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기에 바쁘다. IMF도 마찬가지다. 금융 위기를 만들어 놓고 도와주는 척하지만, IMF 구제금융을 받은 나라들의 결핵 사망률이 더 높다.  

2차 세계대전까지 끝나고 국제연합은 미국, 영국, 소련, 중국, 프랑스가  주축이 되어 발족이 된다. 인간이 그렇듯, 세계도 끊임없이 공동의 적을 만들게 되고 적이 없으면 서로 다투게 된다. 국제연합도 마찬가지로 공동의 적이 없어지자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붕괴된다. 소련은 이제 약해졌지만, 영원한 일인자는 없듯이, 지금은 미국과 중국이 여전히 대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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