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물은 그 나라 그 장소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건축물 만큼 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들어가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대하고 웅장하고 상징적인 건물일수록 그냥 지어진 경우는 없다. 그 당시의 모든 사회적, 과학적 학문 지식이 총동원된다. 

 

책에서 소개하는 걷고 싶은 거리에 대한 접근 방식은  저자의 뛰어난 통찰력과 논리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걷고 싶은 거리는 우연성과 이벤트가 넘쳐나는 거리이다. 그럼 우연성과 이벤트는 어떻게 만드는가? 단위 면적당 블록 코너의 개수가 많을수록 보행자는 선택의 경우가 많아지게 되고 이는 우연성과 이벤트로 연결된다. 또한 단위 면적당 상점의 개수도 마찬가지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걷고 싶은 거리가 바로 '명동'이다. 명동 거리를 보면 위에서 말하는 것과 맞아떨어진다. 특히, 명동은 보행자 전용거리라서 건너편 상가와도 밀접하게 붙어 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저자는 '도시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대형 콤플렉스 건물을 만들 더라도 거리와 접한 면에는 작은 소규모 가게들이 많이 배치되도록 디자인'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으로 도시의 통일성과 다양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현대에 들어 다양한 재료의 수입이 가능해지면서 형태가 아닌 재료를 통한 다양성이 발생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도시를 보면 재료는 통일되고 형태가 다양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스의 산토리니 섬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펜트하우스가 비싼 이유를 권력 때문이라고 한다. 펜트하우스는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 반면에, 자신은 남들에 의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꼭대기라 하더라도 옥탑은 전혀 다른 공간이다. 왜냐하면 옥탑은 아무나 넘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꼭대기 층인 펜트 하우스만 같은 공간만이 권력의 공간이 된다. 그리고 감시하는 자와 감시받는 자라는 두 계층이 발생하게 된다.

 

감시라는 것은 물론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책에서 나오는 단적인 예가 바로 공원이다. 폭이 너무 넓은 공원은 사각지대가 발생하게 되고 결국, 밤에는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는 공간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주변의 고층건물이나 주거 건물에서 내려다볼 때 전체가 보일 수 있는 폭의 공원은 오히려 감시로 인해 안전한 공간이 된다. 초등학교의 경우도 밤에 지나가면 으슥한 경우가 많다. 초등학교 주변에 카페나 레스토랑 같은 시설이 들어선다면 '학교 중심의 공동체 형성과 학교의 보안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조언한다.

 

또한 부동산으로 돈을 벌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간단하게 말하는데, 지나가며 한 말이지만 의미심장한 말이다.

 

"부동산으로 돈을 벌고 싶다면 이제 홍대 앞에서 쫓겨난 예술가들과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쫓겨나는 건축가들이 가는 지역이 어디인지 알아봐야 할 시점이다."

 

즉,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곳이 독특한 문화와 색깔을 가지게 되면서 자본이 몰리게 되고 집값이 상승하게 된다. 그럼, 가난한 예술가들은 월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또 다른 곳을 찾아 떠나야 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뉴욕과 홍대에서 발생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문화재에 대한 저자의 생각도 남다르다. 남대문의 경우 그 재료인 나무가 오래되어서 문화재가 아니라 그 건축물을 만든 생각이 바로 문화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남대문이 불타서 최신 재료로 새로 지웠다고 해서 결코 문화재로서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중국의 만리장성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건축의 진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기독교는 초기의 제사 중심의 예배에서 군중 설교 체제로 예배의 형식이 바뀌면서 점점 대형화되었다고 설명한다. 특히, 모세의 성막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서 솔로몬의 성전, 예수가 전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는 제사를 다 수행했기 때문에 기존의 제사가 필요 없게 된 점, 카타콤, 국교로 제정되는 전체 흐름을 훑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흐름을 설명하면서 기독교의 핵심 교리(진리)까지 포함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아서, 만약에 저자가 기독교인이라면 이 책이 복음 전도의 한 방편으로 쓰일 것을 고려하며 집필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악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후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이 커튼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고 나온다. 이 사건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로 인해서 막혔던 관계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해소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둘로 나누었던 공간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희생양이 되어서 한 번의 십자가형으로 제사를 대신하게 되었고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되는 기독교가 된 것이다."

 

다음 주제는 마당이다. 계속해서 바뀌는 마당은 다양한 이벤트를 제공한다. 따라서 아무리 넓은 거실이 있더라도 마당을 따라잡을 수 없다. 저자는 '마치 마당은 매일매일 벽지와 가구가 바뀌는 거실'이라고 표현한다. 

 

사무실과 관련해서도 이야기하는데, 먼저 형광등이다. 대부분의 사무실은 천장이 3m를 채 넘지 않는다. 공간 활용을 최대한으로 하기 위해 천장 높이는 최소화되는 것이다. 만약, 형광등이 없었다면 이런 구조가 불가능하다. 햇빛이 들어오기 위해서는 햇빛이 들어오기 위해서 천장 높이를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천장 높이가 높은 사무실이 창의적인 환경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소개한다.

 

한옥과 아파트를 비교하며 아파트의 방들에 있는 창문이 거실 쪽으로 나 있었으면 가족들간에 좀 더 많은 대화가 있지 않았을까라고 제안하기도 한다. 문은 그대로 존재하여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유지하되 창문을 통해 서로 건너다볼 수 있고 이에 따라 문을 닫고 있어도 느슨한 관계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거리의 건물들이 조금은 새로워 보이고 앞으로 어떤 집을 짓고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구조가 관계와 소통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도 발견하게 되고 마당이 있는 집이 있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도 가지게 된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고 나니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생각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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