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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살인게임 마니악스 ㅣ 밀실살인게임 3
우타노 쇼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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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귀공이 굉장히 많은 책을 읽었다네.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는 행위 자체가 너무나 좋았지. 그래서 낮 동안엔 얼른 집에 돌아가서 책 읽을 궁리만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네. 그런데 한동안 이렇게 많은 책을 읽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이토록 좋아하는 것을 단지 취미로 그칠 것이 아니라 귀공이 한번 직접 책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네. 소비자가 아니라 공급자가 되고 싶었던 게지. 직접 한번 해보면 어떨까… 책 읽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귀공과 같은 생각을 해봤을 거라고 보네.
그런데 귀공은 소설 중에서도 특히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네. 복잡해 보이는 퍼즐과 불가능해 보이는 수수께끼가 명쾌하게 풀리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나도 즐겁거든. 하지만 책을 덮는 순간, 그 모든 즐거움은 순간으로 끝이 난다네. 소설이 보인 것만큼의 대단한 수수께끼가 소설 밖의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게지. 슬픈 현실이야. 미스터리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너무나 빤한 것들뿐이라 솔직히 사는 게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해.
추리소설이 그토록 좋다면 추리소설을 직접 써보면 되지 않은가… 아니라네. 조금 더 근원적인 욕구가 있다네. 조금 더 고차원적인 사고를 한번 해보게. 우리가 진정한 공급자가 될 순 없을까.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추리소설을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존하는 수수께끼를 만들어야 한다네. 진짜 사건을… 생생한 살인사건을… 제대로 된 문제 출제를 위하여 세심한 실험을 거쳐 완성된 밀실살인사건을…, 바로 나! 반도젠 교수처럼 말일세.
반도젠 교수? 귀공의 이름을 듣고 귀공이 누군가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보네. 『밀실살인게임 왕수비차잡기』와 『밀실살인게임 2.0』을 읽었다면 금방 눈치 챘을 테지. 귀공은 밀실살인게임에 존재하는 한 명의 게이머라네. 갑자기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귀공의 존재가 의심스러울 테지. 그리고 귀공의 사고방식이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리는 고안해낸 트릭을 직접 사용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는 게이머들이라네. 처음부터 상식 같은 걸 바라면 안 된다고! 아직도 모르겠는가!
『밀실살인게임 왕수비차잡기』은 게임판을 만들었고, 『밀실살인게임 2.0』은 그 게임판을 뒤집어버렸지. 그러면 『밀실살인게임 마니악스』에선 무엇을 보여줘야 할까. 보여줄 게 아직 남아있긴 할까. 그래서 이번 밀실살인게임은 게임 같은 설정에 대한 소설의 자기합리화, 혹은 작가의 속마음을 풀어놓은 해설 정도로 보면 된다네. 외전 같은 형태지. 그동안 본격미스터리 문제 출제자로서 많은 추리소설 작품을 발표했던 우타노 쇼고, 작가 본인의 푸념을 포함해서 이 소설이 요즘 사회에 만연한 어떤 현상을 지적하려 하는가에 대해 약간의 풀이가 들어간 느낌이라네. 아니,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고, 분명한 밀실살인게임이 존재한다네.
그런데 이토록 최첨단의 기술력을 가진 밀실살인게임이 세상에 과연 존재하긴 할까, 귀공도 사실 정말로 깜짝 놀랐다네. 나름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인다고 자부하는 귀공이네만, 인터넷 AV화상채팅, 스마트폰, 와이파이, 블루투스, 인터넷 공유 프로그램 등… 빠르게 발달하는 기술력을 쫓아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트릭을 사용한 살인게임이라니… 너무 비상식적이지 않은가. 사실 이런 식이라면 세상에 불가능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중요한 건 살인게임을 지켜보던 불특정 다수의 순진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네. 다운로드하고 싶고, 공유하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덧글을 달고 싶고……. 그러다 스스로가 직접 게이머가 되어 어설픈 게임 흉내를 내며 능동적으로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바이러스처럼 스멀스멀 퍼진다는 점, 그점이 대단한 것이라네. 이 얼마나 놀라운 밀실살인게임인가. 반도젠 교수?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닐세. 두광인? 잔갸군? aXe? 044APD?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다네. 우리는 이미 가상의 공간에서 훌륭한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가. 모두를 위한 밀실살인게임은 이미 열려 있는 것이라네.
그래서 지금 참가한 게임이 조금 어설퍼 보였는가. 그래서 게임에 불만을 품고 있는가. 그러면 더 좋은 게임을 직접 만들면 될 것 아닌가. 귀공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보네. 만약 그런 게임이 있다면 얼마든지 귀공을 불러만 주게. 필히 참여할 테니… 어서 그 홈페이지 주소를……. 아, 오해는 마시게. 귀공은 단지 최종답안 제출 뒤 스피커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경쾌한 소리가 좋은 것뿐이라네. 정답! 바로 그 소리가 좋다네.
다만 이 추리게임에는 세간의 일반적인 호사가들이 주고받는 추리 논의와는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다.
여기서 추리 대상으로 삼는 살인 사건은 게임 참여자 각자가 직접 일으킨 것이다. 일단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인 뒤 채팅에 참여하여 수수께끼를 풀어보라고 문제를 내는 것이다. (9쪽)
그 지경이니 서른일곱 살 먹은 미혼 프리라이터의 괴사는 공원에서 죽은 길고양이만큼이나 취재할 가치가 없었던 셈이야. 독이 든 먹이를 먹고 죽은 길고양이는 사회문제로 취급되는 만큼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군. 이 몸은 어렸을 때 사람의 생명은 지구보다 무겁다고 배웠네만, 이 나이를 먹고서야 그 말이 단지 문학적 표현에 지나지 않다는 걸 알았다네. 시정 잡것들의 생명은 정치가가 아침으로 먹다 남긴 빵쪼가리보다 가벼우이. (57쪽)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종종 나 같은 건 도저히 비교도 못할 만큼 지식과 지기와 행동력을 갖춘 사람을 만날 때가 있지. 그런 만남이 인터넷의 매력이기도 해.” (108쪽)
우리가 왜 사람을 죽이냐? 빚을 떼어먹으려고? 회사에서 잘린 나머지 성질이 나서? 그런 흔해빠진 살인이 아니잖아. 수수께끼를 만드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고. 죽였지만 수수께끼가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어. (147쪽)
“첫 번째 문제는 누구나 쉽게 추리에 참가할 수 있게 만들었어. 그랬더니 너무 싱겁다고 야유를 퍼붓더군. 배려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한마디도 못 들었어. 두 번째 문제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기술을 의도적으로 사용해서 추리의 문턱을 극단적으로 높였지. 그러자 또 야유를 퍼붓네. 잘도 이런 트릭을 생각해냈다는 칭찬은 역시 못 들었어. 실은 이 반응을 보고 싶었거든. 이번에는 승패보다도 이게 테마였지. 인간이란 결국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 것만 인정하려는 생물이야. 잘 알았어. 아쉽기는 하지만. 아, 아까 전에도 말했던가. 뭐, 이걸로 댁들 취향은 잘 알았으니까 다음에 출제할 때 참고할게. 다음번에는 너무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문제를 만들 거야.” (188쪽)
게임 속의 진실은 현실이 아니야. 제작자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설정을 꿰뚫어보아야 게임을 공략할 수 있다고, 사가시마. (191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