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브
알렉스 모렐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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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선택에 대해 옹호하며 추켜세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그들이 힘겨운 결정을 내리기 위해 고민했을 시간과 과정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낮고 얕은 마음으로 어설프게 위로하려던 글을 보면 가끔은 냉소적인 생각이 듭니다. 이런 글 따위, 나를 더욱 상처받게 했으니 나는 그냥 오늘 죽기로 결심하자, 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조심스레 알렉스 모렐의 소설 『서바이브』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내일 죽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의 옆에 지금 당장 죽기로 결심한 사람이 나타났다고 합시다. 곧 죽기로 한 사람의 사연을 듣다 보니 문득, 그래도 산다는 것이 죽는 것보단 더 낫지 않을까요, 하는 조심스런 위로의 말이 무심결에 튀어 나옵니다. 내일이면 죽을 것이기 때문에 그저 무관심하게 흘려보낼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사연을 한번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괜한 동정이 생겨난 겐지 신기하게도 따뜻한 말을 건네게 됩니다. 겨우 하루 간격의 같은 처지에 있다 보니 상대방의 울적한 마음을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자살이라는 최후의 수단은 타인에겐 차마 권하지 못할 자신만의 해결책인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죽기고 결심한 사람의 자살을 내일 죽기로 결심한 사람이 만류하게 되는 묘한 심리가 생겨납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살(Suicide)에서 희생(Sacrifice)으로 변한 심리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타인을 향한 위로의 말을 희생의 말로 바꾸어 스스로에게 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가슴속에 와닿을 만큼의 강력하고 충격적인 어떤 메시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흐릿한 삶 속에서 그만큼의 뚜렷한 메시지를 잘 찾아내지 못합니다. 자살할 생각을 잊게 만들 만큼 굉장히 충격적인 경험을 하는 건 평범한 우리들에게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설에선 살려던 자를 죽이고, 죽으려던 자를 살려 놓습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죽이려 합니다. 이 얼마나 뚜렷한 신의 메시지란 말입니까. 그래서 자살하려 했던 인물 앞에 죽음이란 것이 당장의 현실적인 문제가 됩니다. 스스로가 결정하지 않아도 죽음은 알아서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 주위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고 생명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다는 이야기를 이 소설에서 합니다.

 

 

    어떻게 죽기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마지막 자유이자 유일한 탈출구일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이 선택한 방법으로 죽을 수 없게 된다면, 일단은 화가 치밀어 올라 크게 분노할 것입니다. 왜 죽는 것마저 마음대로 하지 못한단 말인가, 하며 신을 탓할 것입니다. 어디 한번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식의 오기마저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다가 신에 대한 분노의 에너지가 삶을 향한 열정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런 열정이 바로 앞에 놓인 과제 하나에 집중하게 하고, 차근히 오늘을 살자는 생각을 만듭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급하니 엉덩이를 까서 아무대서나 오줌을 싸지르자, 혹은 야만인이고 뭐고 간에 그냥 눈앞의 토끼를 요리해서 뜯어 먹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바이브』는 자살을 마음먹었던 한 사람이 죽다가 살아나는 과정을 보이고 마음을 고쳐먹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자살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을 때 자살하려던 사람은, 그러지 말라는 어떠한 결정적인 계시가 자신에게 내려오길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보인 이러한 계시가 작위적으로 느껴져 엉뚱함을 만들기도 합니다. 정신과 의사의 따뜻한 위로의 상담에서 우리는 자살하지 않아도 될 어떤 이유에 대한 설명을 듣곤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자신의 경우에 도저히 적용할 수 없는, 어떤 특정 조건일 때가 간혹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정말로 난감합니다. 좋은 의도로 했던 말이 오히려 더 큰 좌절을 맛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일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지금 당장 죽어버리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나에게 없었던 바로 그것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기억이란 미래와 같다. 계획 없이 불쑥 나타나고, 일단 나타나면 우리 뜻대로 통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 나쁜 건, 나이를 먹을수록 기억들이 점점 더 슬퍼진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그렇다. (29쪽)

 


    자기한테만 찾아온 행운 때문에 죄책감이 느껴질 때도 있지. (109쪽)

 


    이 세상에 살아 있어야 이런저런 일들도 일어나는 거란다. (123쪽)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제인.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안 벌어져. 예상치도 못한 일을 당하는 것보단 그 편이 낫잖아. (142쪽)

 


    표시는 그냥 표시일 때도 있으니까. 가끔은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고.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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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재익, 크리에이터 - 소설.영화.방송 삼단합체 크리에이터 이재익의 거의 모든 크리에이티브 이야기
이재익 지음 / 시공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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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책의 첫 장을 열어보기 전까지 과연 이 책은 어떤 이재익이 쓴 글일까 궁금해 했습니다. 이재익이라는 이름이 흔한 이름은 아니지만, 소설가 중에서도 두 명 정도 있었던 것 같고, 영화나 방송, 혹은 광고 쪽에서도 들어본 듯한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모두 다 동일인이었습니다. 심지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쓴 것으로 착각하고 있던 소설들도 모두 동일한 작가의 소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알고 있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크리에이터 이재익『나 이재익, 크리에이터』을 통해서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세상의 젊은이들에게 실용서적에 가까울 만큼 생생한 현장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소설가 겸, 영화 시나리오 작가 겸, 라디오 PD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겪었던 시행착오와 성공 노하우 전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다방면의 사회경험이 말하는 그의 경력이 보인 무게감 때문인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왠지 납득이 갑니다, 납득이. 조금 먼저, 조금 빨리, 그 방면으로 넘어간 형님이 술자리에서 조심스레 들려주는 크리에이티브한 세상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일단 우리들에게 겁부터 주고 시작합니다. 크리에이터는 천재만 되는 것이다, 엄청난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고, 그러한 노력과 희생 또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 때가 허다하다, 하지만 인내를 갖고 혼자서 외롭게 계속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인정해주지 않은 일이 생긴다, 영원히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다 간혹 인정받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단, 천재가 아니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더 좋다, 라고 충고합니다. 중요한 건 바로 이것입니다. 재능이 없으면 시작해선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재능이 없다는 걸 알았다면 지금 당장 그만둬야 한다는 것.

 


    그런데 막상 그가 겁주듯 수많은 단점들을 나열하고 무서운 충고를 했지만, 계속해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가슴속에선 무언가 설렘이 생겨나 심장을 계속 두근거리게 합니다.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크리에이터는 꽤 재미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더 크게 스멀스멀 자라납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내가 만약 크리에이터가 된다면, 하는 상상까지 해보게 합니다. 상상 속 자신의 모습은 왠지 모를 자신감으로 가득 차 무슨 일이든 잘 할 것만 같은 확신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확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납득시켜 진짜 크리에이터가 될 것인지, 그것이 참으로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납득이 가야 하는데, 납득이.

 

 




 

    내가 아는 한 가장 나쁜 크리에이티브는 돈값을 제대로 못하는 크리에이티브다. 보고 나서 돈이 아까운 영화, 읽은 시간이 아까운 책, 다운로드 한 손이 싫어지는 노래, 던져버리고 싶은 휴대폰, 폐차시키고 싶은 차. 크리에이터는 결과물에 자신이 없으면 내놓지 말아야 한다. 당장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으나 결국 이는 크리에이터로서 자기 신용을 깎아먹는 자살 행위다. (25쪽)

 


    인내가 필요하다.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이들은 특히 직관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많다. 그래서인지 조직생활을 힘들어하고 한 조직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는 경우를 쉽게 본다. 나 역시 그랬으니. 그러나 어느 분야든 내 기대를 100퍼센트 충족시켜주는 분야는 없다. 부디 밖에서 그리던 세계와 안에서 본 세계가 다르더라도 포기하기 전에, 때려치우기 전에 조금만 더 참아보기를. (44쪽)

 


    반드시 명심해줬으면 좋겠다. 한두 편의 끝내주는 소설은 직관으로도 써낼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이 오랜 기간 동안, 또는 나처럼 평생 소설가로 살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반드시 성실하고 겸손해야 한다. 그것이 초보 소설가의 수렁에서 탈출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84쪽)

 


    평소에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많이 갖기를. 호기심을 귀찮아하지 말기를. 다방면의 문화적 자극에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노출하기를. 설령 취향에 맞지 않더라도. 그것이 감성 훈련의 밑바탕이 된다. 더 많은 무게를 들기 위해 근육을 키워야 하는 것처럼 더 나은 크리에이티브를 위해서는 감성을 훈련해야 하고, 감성을 불리기 위해 필요한 단백질이 간접경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108쪽)

 


    어쩌겠는가. 크리에이터는 일할 때도 혼자이듯 일이 잘 안 풀릴 때도 혼자다. 정말 괴로울 때 말고는 혼자 견디고 이겨내는 습관을 기르도록. 자꾸 징징대지 말라는 얘기다. (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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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웨딩드레스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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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히 새로운 형태의 소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어떤 점이 그렇게 새로운 것인가에 대해 묻는다면 무어라고 대답하기가 참으로 애매합니다. 지난번에 피에르 르메트르의 『알렉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프랑스 추리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냄새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 소설 역시 그런 느낌입니다. 깊고 어둡고 습하고 칙칙한 느낌. 그런데 너무 프랑스식의 예술을 추구하려던 느낌은 아니었고, 어느 정도 헐리우드의 대중적인 느낌을 고려한 스릴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를 영화로 비유하자면 <킬빌>, <데쓰 프루프>, <미저리>, <사이코>, <새>, <현기증>,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소재 면에서 이 같은 영화들과 크게 닮았던 것은 아니지만, 공포와 긴장을 서술하는 형태가 닮아 보입니다. 불길함을 만들어 내는 방식, 혼돈과 죽음을 예고하는 형태,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만드는 서술이 닮았습니다. 영화와 소설을 두고서 그런 비교를 한다는 게 조금 억지스러워 보일지 모릅니다만, 글로 이 같은 영상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랍고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피에르 르메트르의 글은 추리소설치곤 꽤 여성적입니다. 이런 여성적인 느낌이 비슷한 형태의 다른 영화와 소설들 간의 미묘한 차이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끔찍함을 경험하고 공포가 피어나며 복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성에게 조금 더 힘을 내고 용기를 내라고 응원하도록 유도하는 장치가 있는데, 그러한 것들이 소설의 여성성을 만들어 냅니다. 단, 너무 미묘한 차이라 그저 제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습니다.

 


    가끔은 수많은 범죄들 중에서 어떤 범죄가 더 흉악한 것인가를 생각해봅니다. 가령 요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소아성애자를 예로 들자면, 그들을 처단하기 위해 비슷한 방식으로 고통을 주고 끔찍한 방식으로 살해해서 어떤 복수에 성공했다는 기사를 접한다면 우리는 짧은 순간 놀라운 통쾌함을 느낄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복수를 감행한 자의 범죄를 조용히 응원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덱스터>에서 연쇄살인마의 완전범죄를 보고 응원하듯 말입니다. 이런 미묘한 심리를 피에르 르메트르의 소설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하나의 큰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반전의 형태로 우리에게 불쑥불쑥 나타나는데, 이 부분이 꽤 큰 혼란을 만들어 냅니다.

 


    『알렉스』에서 반전을 반전했다고 한다면,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은 복수를 복수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들이 굉장히 조심스럽습니다. 목차에서도 볼 수 있듯이 소설은 소피와 프란츠라는 인물이 교차로 서술하는 방식을 보입니다. 그런데 프란츠라는 이름은 소설 내도록 등장했던 횟수를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 매우 조심스럽게 숨어있습니다. 소설은 하찮은 것부터 관찰하고 조심스럽게 준비하며 소설을 읽는 우리들의 반응을 살핍니다. 그런 조심스러움이 일종의 행위하는 예술이란 느낌의 좋은 소설을 만들어 냈다고 봅니다.

 




 

 

    외부세계와의 관계를 최소한으로 축소한 그녀로서는 이 여자들이 자신을 알아보듯 슬며시 인사를 던지고, 서로 알아가기 시작하는 한 동네 주민으로서 그 인사에 화답할 때마다 뭔가 따스한 위로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다. 더구나 이들도 그녀처럼, 내가 과연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라고 자문하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90쪽)

 


    은밀하고도 점진적인 작은 접근들이다. 점진적인 접근…… 매우 한심한 짓거리지만, 이게 바로 핵심이다. (175쪽)

 


    그녀는 자신에 대해 순진하면서도 냉철한 태도를 지닌, 한마디로 지극히 자학적인 감수성의 소유자로 보인다. 그녀의 유년기를 지배한 신경증에는 두 개의 모순적인 감정이 결합되어 있는데, 하나는 생존자의 죄책감, 다른 하나는 자신이 관심받을 만한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부모에게 버림받았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많은 고아들에게서 발견되는 모욕감이다. (345쪽)

 


    기묘한 분위기였다. 그녀는 밤에서 빠져나오고 있는데, 그는 거기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347쪽)

 


    …의기소침, 고정된 시선, 슬픔과 근심, 때때로 나타나는 공포가 짙게 드리운 표정, 끊임없는 정신적 가공, 죽음에 대한 숙명적 태도, 뚜렷한 죄의식, 기묘한 사고, 징벌을 받고자 하는 욕구…… (361쪽)

 


    그건 완전히 제멋대로 쓴 글이에요. 하지만 그 분야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럴듯하게 보일 수도 있겠죠. (3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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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의 추억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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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가 서로를 배려해 연락하지 않기로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기로 했으니 저는 우직하게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왜 힘들어 하고 있을 때 연락해주지 않았냐는 핀잔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일이니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용케 잘 견뎠잖아, 그걸로 된 거지, 하며 말입니다.



    요시모토 바나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그들 안에 작은 우주를 품고 있습니다. 고집부리고 집착하고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 식의 똑 부러지는 식의 곧은 자아를 은연중에 내비칩니다. 또 자기 안의 가장 이성적인 모습이라 확신하며 합리적이라 여긴 사유를 통해 어떠한 결론에 이르면 그 결정을 확고하게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록 작은 결단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인물들이 매우 감상적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대화를 통해 어떤 결론에 이르더라도 상대방에게 자신의 결정을 쉽게 내비치지 않고 자기 안으로 삼키며 그걸로 괜찮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의 작은 우주가 변했으니 세상도 그와 동시에 크게 변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믿음을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내곤 조용히 기다립니다. 신의 뜻이라는 듯 체념하며 인내합니다.

 


    가끔은 이런 나약한 믿음과 기다림이 우리를 치유하기도 합니다. 무언가 강하게 설득하려 하거나 강요하려 들지 않고, 소복소복 쌓아 둔 사진첩을 보여주며 지난날의 여행을 추억하려는 느낌입니다. 그러다 문득 과거 자신의 세계는 이런 모습이었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별일 아니었다는 생각으로 다음 사진을 향해 사진첩을 넘깁니다. 이거 보세요, 이제는 아무렇지 않으니 괜찮죠, 하는 단 한마디의 확인도 없이 그냥 넘어갑니다.

 


    우리는 우리가 상처받은 이유에 대해 속으론 분명 답이라고 여길만한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겁니다. 그저 그런 고민을 옆에 있는 누군가의 입을 통해 다시 듣길 바라고, 혹은 자신의 입을 통해 다짐하듯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 모릅니다. 



    그 사람과 함께 푸른 잔디밭에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가 따로 있지만 차마 그 이야기가 쉽게 나올 것 같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굽이굽이 물결치며 갈라져 엇갈리기까지 한 사유의 길을 꽤 복잡하게 한번 걸어봅니다. 그러다 불쑥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이야기가 끝나면 사뭇 진지한 표정을 내비치곤 생긋 웃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켭니다.

 


    『막다른 골목의 추억』은 그런 모습을 한 단편집입니다.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사람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리움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과정과 결정, 치유와 행복에 관한 기억입니다. 누구나 갖고 있을 아주 사소한 기억, 우리 안의 작은 우주가 조용히 변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거의 섹스해도 괜찮겠어? 응, 괜찮아, 하는 대화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어렴풋한 슬픔 속에서. (유령의 집, 33쪽)

 


    돌아갈 집이 있는데도, 사랑받고 있는데도 외로운 게, 그게 젊음인지도 모르지. (유령의 집, 39쪽)

 


    모두들, 일단은 생긴 대로 처신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속에 있는 멋진 것을 서로 나누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

    하지만 나는 그날, 나도 모르는 새 야마조에 씨처럼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이상한 길로 빠질 뻔했던 자신을, 부조리하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불확실한 이 세상 시스템 속에서 간신히 살아가는 인간이란 존재의 훌륭함이 건져 올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엄마!, 97쪽)

 


    ‘왜 하필 나야?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오늘도 온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몸이 찢어질 듯한 심정으로 이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렇다. 신은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다. 도모 짱의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게 해 주지도 않았고, 도모 짱이 강간을 당할 때도 하늘에서 벼락을 치든 어떻게든 해서 멈춰 주지 않았고, 도모 짱이 병원 정원에서 홀로 울 때도, 불쑥 나타나 어깨를 안아 주지 않았다.

    (…)

    하지만 신이라 부르기에는 아주 하찮은 힘밖에 없는 눈길이, 언제든 도모 짱을 보고 있었다. 뜨거운 애정도 눈물도 응원도 보여 주지 않았지만, 다만 투명하게, 도모 짱을 향하고, 도모 짱이 소중한 것을 차근차근 모아 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도모 짱의 행복, 168쪽)

 


    이곳에서는 혼자였기 때문에 책을 읽어도 글자가 유독 마음에 스미고, 슬픔으로 감성이 풍부해져 계절의 변화도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토록 투명하고 아름다운 가을을 나는 오랜만에 만끽했다. (막다른 골목의 추억,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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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을 드세요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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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희 아버지는 대식가이십니다. 가끔씩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며 무언가를 요란하게 만드시는데 제가 보기엔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편이 차라리 좋겠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엌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면 막연하게 불안합니다. 엉망인 요리가 나올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된장찌개가 그렇습니다. 평소에 음식을 짜게 드시는 편이라 풀어놓은 된장이 멸치와 만나 간장인지 무언지 알 수 없을 맛의 액체가 만들어 집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정도로 짜고 쓴 어떤 물의 맛. 찌개에 된장 이외에 들어간 것은 썰어놓은 감자 조각들이 유일한 것이라 마치 바닷물에 한번 담근 된장과 어디선가 떠내려 온 감자를 건져먹는 느낌이 납니다. 맛도 맛이지만 더 큰 문제는 만들어 놓은 음식의 양이 엄청나다는 데 있습니다. 그 많은 걸 누가 다 먹어야 합니까. 결국에는 제가 다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출생 자체가 비극인 음식에도 아직 소생 가능하다는 한 가닥의 희망이 존재합니다. 그저 된장을 풀어 놓은 듯한 수상한 액체도 신기하게 어머니의 손을 한번 거치면 된장찌개로 변모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매우 맛있는 된장찌개로.

 


    대단히 특별할 건 없습니다. 물을 조금 추가하여 살살 끊이고 보글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애호박과 양파, 버섯, 두부가 송송 들어갑니다. 보통의 식당에서 볼 수 있는 된장찌개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옆에 서서 변신하는 된장찌개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선 낮은 감탄의 소리가 새어나옵니다. 호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운한 향을 낼 방아잎이 조각조각 들어가면, 긴 여정을 거친 된장찌개가 부활하여 새 생명을 얻습니다. 아! 맛있습니다.

 


    오가와 이토『따뜻함을 드세요』는 음식을 소재로 한 소설입니다. 과연 얼마나 맛있는 글일까, 설마 맛은 없고 양만 많은 음식은 아니겠지, 하는 약간의 불안을 갖고서 첫 장을 떠먹어 보았습니다. 소설의 이야기는 약간의 불안과 부재, 상실을 느낀 우리들이 음식을 만들고, 만든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래서 무언가가 치유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맛있게 먹고, 배불러서 만족하고, 행복하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배부른 글.

 


    따뜻한 음식을 소중한 사람과 함께 먹는다는 것은 꽤나 일상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라 현재로선 무언가 그 맛이 어떻다고 말로 표현하여 정의내리긴 어렵지만, 그 맛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될 먼 훗날이 온다면 분명 그 음식을 그리워하며 그 음식만이 갖는 특별한 맛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당연히 미식가는 아닐 테지만 마치 대단한 미식가가 된 것처럼. 그런데 그것은 단지 그리운 맛을 찾기 위한 수색이 아니라 사람과 기억을 쫓는 서글픈 몸부림일 겁니다. 몸이 기억하는 익숙함을 쫓는 당연한 행위. 사람에게 길들여진다는 의미는 바로 이런 것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집에 가면 익숙한 느낌의 찌개그릇과 기억을 담은 밥그릇부터 찾습니다. 일단 부엌에서 들려오는 크고 요란한 소리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합니다. 아버지께서 무언가를 준비하시며 낸 소리가 분명합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굉장히 짜고 쓴 어떤 정체 모를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날 것입니다. 된장인 것 같은데… 뭐, 괜찮습니다. 두 번 끓여 더욱 맛있는 전통의 맛이라고나 할까요. 조금 있으면 어머니께서 된장찌개를 다시 손봐 줄 것이기 때문에 안심해도 됩니다.

 


    저는 두 분이 함께 만든 된장찌개가 좋습니다. 함께 만들지 않으면 이런 맛의 된장찌개가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된장찌개, 오래오래 먹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맛있어서 감사합니다.

 

 





 

    반짝거리는 입술 끝을 내 오른손 검지로 닦아서 혀에 대보니 달콤한 맛이 났다. 빙수 시럽의 달콤함이 아니었다. 뭐랄까, 더 복잡한 맛이었다. 역시 할머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달콤하게 발효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할머니의 빙수, 26쪽)

 


    오랜만에 좋아하는 사람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사소한 행복을 느꼈다. 순간, 벅찬 감정이 세차게 몰아칠 것 같았다. 소리 내어 울고 싶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배가 너무 불러 그저 애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아버지의 삼겹살 덮밥, 45쪽)

 


    이 순간이 미칠 것 같다. 쾌락이란 통증과 괴로움 속에 꽂힌 한 가닥의 감미로운 빛 같은 것이리라. (폴크의 만찬, 110쪽)

 


    어째서 그럴까. 잃어버린 뒤가 아니면 소중한 것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 (때아닌 계절에 기리탄포, 145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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