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골목의 추억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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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가 서로를 배려해 연락하지 않기로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기로 했으니 저는 우직하게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왜 힘들어 하고 있을 때 연락해주지 않았냐는 핀잔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일이니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용케 잘 견뎠잖아, 그걸로 된 거지, 하며 말입니다.



    요시모토 바나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그들 안에 작은 우주를 품고 있습니다. 고집부리고 집착하고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 식의 똑 부러지는 식의 곧은 자아를 은연중에 내비칩니다. 또 자기 안의 가장 이성적인 모습이라 확신하며 합리적이라 여긴 사유를 통해 어떠한 결론에 이르면 그 결정을 확고하게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록 작은 결단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인물들이 매우 감상적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대화를 통해 어떤 결론에 이르더라도 상대방에게 자신의 결정을 쉽게 내비치지 않고 자기 안으로 삼키며 그걸로 괜찮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의 작은 우주가 변했으니 세상도 그와 동시에 크게 변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믿음을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내곤 조용히 기다립니다. 신의 뜻이라는 듯 체념하며 인내합니다.

 


    가끔은 이런 나약한 믿음과 기다림이 우리를 치유하기도 합니다. 무언가 강하게 설득하려 하거나 강요하려 들지 않고, 소복소복 쌓아 둔 사진첩을 보여주며 지난날의 여행을 추억하려는 느낌입니다. 그러다 문득 과거 자신의 세계는 이런 모습이었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별일 아니었다는 생각으로 다음 사진을 향해 사진첩을 넘깁니다. 이거 보세요, 이제는 아무렇지 않으니 괜찮죠, 하는 단 한마디의 확인도 없이 그냥 넘어갑니다.

 


    우리는 우리가 상처받은 이유에 대해 속으론 분명 답이라고 여길만한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겁니다. 그저 그런 고민을 옆에 있는 누군가의 입을 통해 다시 듣길 바라고, 혹은 자신의 입을 통해 다짐하듯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 모릅니다. 



    그 사람과 함께 푸른 잔디밭에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가 따로 있지만 차마 그 이야기가 쉽게 나올 것 같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굽이굽이 물결치며 갈라져 엇갈리기까지 한 사유의 길을 꽤 복잡하게 한번 걸어봅니다. 그러다 불쑥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이야기가 끝나면 사뭇 진지한 표정을 내비치곤 생긋 웃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켭니다.

 


    『막다른 골목의 추억』은 그런 모습을 한 단편집입니다.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사람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리움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과정과 결정, 치유와 행복에 관한 기억입니다. 누구나 갖고 있을 아주 사소한 기억, 우리 안의 작은 우주가 조용히 변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거의 섹스해도 괜찮겠어? 응, 괜찮아, 하는 대화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어렴풋한 슬픔 속에서. (유령의 집, 33쪽)

 


    돌아갈 집이 있는데도, 사랑받고 있는데도 외로운 게, 그게 젊음인지도 모르지. (유령의 집, 39쪽)

 


    모두들, 일단은 생긴 대로 처신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속에 있는 멋진 것을 서로 나누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

    하지만 나는 그날, 나도 모르는 새 야마조에 씨처럼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이상한 길로 빠질 뻔했던 자신을, 부조리하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불확실한 이 세상 시스템 속에서 간신히 살아가는 인간이란 존재의 훌륭함이 건져 올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엄마!, 97쪽)

 


    ‘왜 하필 나야?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오늘도 온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몸이 찢어질 듯한 심정으로 이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렇다. 신은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다. 도모 짱의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게 해 주지도 않았고, 도모 짱이 강간을 당할 때도 하늘에서 벼락을 치든 어떻게든 해서 멈춰 주지 않았고, 도모 짱이 병원 정원에서 홀로 울 때도, 불쑥 나타나 어깨를 안아 주지 않았다.

    (…)

    하지만 신이라 부르기에는 아주 하찮은 힘밖에 없는 눈길이, 언제든 도모 짱을 보고 있었다. 뜨거운 애정도 눈물도 응원도 보여 주지 않았지만, 다만 투명하게, 도모 짱을 향하고, 도모 짱이 소중한 것을 차근차근 모아 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도모 짱의 행복, 168쪽)

 


    이곳에서는 혼자였기 때문에 책을 읽어도 글자가 유독 마음에 스미고, 슬픔으로 감성이 풍부해져 계절의 변화도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토록 투명하고 아름다운 가을을 나는 오랜만에 만끽했다. (막다른 골목의 추억, 214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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