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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을 드세요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저희 아버지는 대식가이십니다. 가끔씩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며 무언가를 요란하게 만드시는데 제가 보기엔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편이 차라리 좋겠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엌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면 막연하게 불안합니다. 엉망인 요리가 나올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된장찌개가 그렇습니다. 평소에 음식을 짜게 드시는 편이라 풀어놓은 된장이 멸치와 만나 간장인지 무언지 알 수 없을 맛의 액체가 만들어 집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정도로 짜고 쓴 어떤 물의 맛. 찌개에 된장 이외에 들어간 것은 썰어놓은 감자 조각들이 유일한 것이라 마치 바닷물에 한번 담근 된장과 어디선가 떠내려 온 감자를 건져먹는 느낌이 납니다. 맛도 맛이지만 더 큰 문제는 만들어 놓은 음식의 양이 엄청나다는 데 있습니다. 그 많은 걸 누가 다 먹어야 합니까. 결국에는 제가 다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출생 자체가 비극인 음식에도 아직 소생 가능하다는 한 가닥의 희망이 존재합니다. 그저 된장을 풀어 놓은 듯한 수상한 액체도 신기하게 어머니의 손을 한번 거치면 된장찌개로 변모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매우 맛있는 된장찌개로.
대단히 특별할 건 없습니다. 물을 조금 추가하여 살살 끊이고 보글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애호박과 양파, 버섯, 두부가 송송 들어갑니다. 보통의 식당에서 볼 수 있는 된장찌개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옆에 서서 변신하는 된장찌개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선 낮은 감탄의 소리가 새어나옵니다. 호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운한 향을 낼 방아잎이 조각조각 들어가면, 긴 여정을 거친 된장찌개가 부활하여 새 생명을 얻습니다. 아! 맛있습니다.
오가와 이토의 『따뜻함을 드세요』는 음식을 소재로 한 소설입니다. 과연 얼마나 맛있는 글일까, 설마 맛은 없고 양만 많은 음식은 아니겠지, 하는 약간의 불안을 갖고서 첫 장을 떠먹어 보았습니다. 소설의 이야기는 약간의 불안과 부재, 상실을 느낀 우리들이 음식을 만들고, 만든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래서 무언가가 치유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맛있게 먹고, 배불러서 만족하고, 행복하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배부른 글.
따뜻한 음식을 소중한 사람과 함께 먹는다는 것은 꽤나 일상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라 현재로선 무언가 그 맛이 어떻다고 말로 표현하여 정의내리긴 어렵지만, 그 맛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될 먼 훗날이 온다면 분명 그 음식을 그리워하며 그 음식만이 갖는 특별한 맛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당연히 미식가는 아닐 테지만 마치 대단한 미식가가 된 것처럼. 그런데 그것은 단지 그리운 맛을 찾기 위한 수색이 아니라 사람과 기억을 쫓는 서글픈 몸부림일 겁니다. 몸이 기억하는 익숙함을 쫓는 당연한 행위. 사람에게 길들여진다는 의미는 바로 이런 것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집에 가면 익숙한 느낌의 찌개그릇과 기억을 담은 밥그릇부터 찾습니다. 일단 부엌에서 들려오는 크고 요란한 소리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합니다. 아버지께서 무언가를 준비하시며 낸 소리가 분명합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굉장히 짜고 쓴 어떤 정체 모를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날 것입니다. 된장인 것 같은데… 뭐, 괜찮습니다. 두 번 끓여 더욱 맛있는 전통의 맛이라고나 할까요. 조금 있으면 어머니께서 된장찌개를 다시 손봐 줄 것이기 때문에 안심해도 됩니다.
저는 두 분이 함께 만든 된장찌개가 좋습니다. 함께 만들지 않으면 이런 맛의 된장찌개가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된장찌개, 오래오래 먹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맛있어서 감사합니다.
반짝거리는 입술 끝을 내 오른손 검지로 닦아서 혀에 대보니 달콤한 맛이 났다. 빙수 시럽의 달콤함이 아니었다. 뭐랄까, 더 복잡한 맛이었다. 역시 할머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달콤하게 발효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할머니의 빙수, 26쪽)
오랜만에 좋아하는 사람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사소한 행복을 느꼈다. 순간, 벅찬 감정이 세차게 몰아칠 것 같았다. 소리 내어 울고 싶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배가 너무 불러 그저 애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아버지의 삼겹살 덮밥, 45쪽)
이 순간이 미칠 것 같다. 쾌락이란 통증과 괴로움 속에 꽂힌 한 가닥의 감미로운 빛 같은 것이리라. (폴크의 만찬, 110쪽)
어째서 그럴까. 잃어버린 뒤가 아니면 소중한 것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 (때아닌 계절에 기리탄포, 145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