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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장의 살인 ㅣ 시인장의 살인
이마무라 마사히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8년 7월
평점 :
2018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2018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위 등의 상을 휩쓴 작품이다. 큰 기대 없이 시작한 책이라 그런지 꽤 재미있게 읽었다. 가벼운 오락 소설이라 평점이 좋을 줄 알았는데 알라딘 페이지 별점이 낮아서 서평을 둘러보니 형편 없다는 악평이 많아 놀랐다.
줄거리:
신코 대학의 경제학부 1학년생인 하무라 유즈루는 미스터리 소설 ‘덕후’이다. 하무라를 포함해 부원이 단 두 명뿐인 미스터리 애호회의 회장이자 같은 대학 3학년생 아케치 교스케. 여름 내내 학생 식당에 앉아 줄을 선 학생들의 점심 메뉴를 추리하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 앞에 어느 날 미모의 탐정 겐자키 히루코가 기묘한 거래를 제안한다. ‘신코 대학교 영연부 합숙’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동행하되,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묻지 말 것’이 그 조건이었다.
작품 촬영을 위한 합숙을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졸업생과 재학생 간의 ‘미팅’이라는 영연부 합숙 일주일 전, 동아리방에서 “다음은 누구냐”라고 적힌 협박장이 발견된다. 작년 합숙에서 있었던 어떤 ‘사건’을 암시하는 듯한 협박장의 내용에 많은 동아리 부원이 불참의사를 밝히지만 영연부 부장은 어쩐 일인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합숙을 강행한다.
졸업생의 부모가 운영하는 커다란 펜션에 도착한 신코 대학 영연부 학생들과 하무라, 아케치, 겐자키. ‘미팅’이라기엔 강압적이고 미묘한 분위기에 어색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다같이 담력 훈련을 떠난 그 순간, 그들의 눈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진다. 완벽하게 고립된 펜션, 그리고 벌어지는 연쇄 살인, 이들은 범인을 밝혀내고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을까?
색다른 소재로 밀실을 구현해냈다는 점이 상당히 참신하게 느껴졌다. 살짝 지루한 초반의 전개 때문에 며칠에 걸쳐 꾸역꾸역 넘기던 책장이 ‘그 사건’ 이후로 휙휙 넘어가 날 새는 줄 모르고 읽었다. 재미있었다는 후기를 기대하고 방문한 알라딘 상품 페이지에서 다양한 혹평을 읽으며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일본의 남성 미스터리 작가에게 대단한 여성관이나 인권 의식을 기대하는 것도 좀 곤란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읽기에 껄끄러운 묘사나 장면이 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 남성향 아니메(라노벨이라고 표현한 글들을 봤는데 어느 쪽이 적확한 표현일 지는 모르겠다)의 망상 도식에 따라 여자 캐릭터가 움직인다 -> 그렇지만 귀여우니 ok입니다. 여성주의를 언급하기도 하던데 애초에 여성주의적 읽기란 ‘어 이 책 개빻았어 노잼 사형 땅땅’을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요.
- 이상한 억지 교훈을 주려고 한다 -> 일본인의 자연재해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어 흥미로웠다. 주인공 하무라의 입을 빌려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요상한 비장함이 있어 가뜩이나 아니메적인 대사나 연출에 더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 지나친 라노벨적 연출 -> 시체가 난무하는데 갑자기 미연시 도키도킷 모드로 전환되는 부분은 솔직히 나도 실소를 금할 길이 없었다.
- 가볍고 평면적인 캐릭터 설정과 뻔한 트릭 -> 인물들이 그다지 입체적이지 않았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인물에 대한 묘사가 아니메스러웠기에 오히려 더 눈에 그릴 듯이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트릭과 반전이 아쉬웠다는 점도 자주 언급되는데 작가가 안내한 대로 읽어나가며 상상하는 것에도 나름의 재미가 있지 않나? ‘깜짝 놀랄 만한 반전’을 주기 위해 오직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순간만을 노리며 서사나 인물 구성에 구멍을 내는 전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
결론: 인물 서사 사건 배경 전개 트릭 모두 아니메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나처럼 아니메/만화적 연출을 좋아하거나 시각적 묘사를 통한 몰입감을 중시하는 사람에게는 즐거운 독서 경험이 될 것이나, 일본 아니메 특유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오글거리고 시시한’ 작품이라는 인상을 남길 것이리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일본 아니메식 연출에 단련된 나도 534 페이지에서는 책장을 덮을 수밖에는 없었다.
시리즈물로 기획 중인 모양인데 이후에 나온 <마안갑의 살인>도 꽤 기대된다. 더 많은 속편이 나오면 좋겠다.
덧: 쓰다 보니 내가 ‘그 존재’가 나오는 매체에 워낙 문외한이라 별 생각 없이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존재’ 마니아들에게는 어떤 인상을 남겼을지 궁금하다.
가벼운 책은 가볍게 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