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기사 - 칼비노 선집 3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5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199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전쟁터. 수많은 기사들 사이에 반짝이는 백색 갑옷을 입은 (아니 갑옷으로서만 존재하는) 아질울포라는 기사가 있다. 그는 실체가 없는 인물이다. 때마침 신참내기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혈기에 불타는 젊은 기사가 도착한다. 그는 아질울포에게서 안정감을 느낀다. 전쟁터에는 강력한 여자 기사가 한 명 있다. 그녀는 아질울포를 사랑한다. 젊은 기사는 그녀를 사랑한다.

아질울포가 기사 서임을 받은 것은 어느 귀족 여인의 순결을 지켜준 일인데, 그녀가 순결하지 않았다는 고변이 들어온다. 아질울포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통째로 무너뜨릴 수 있는 이 말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전쟁터를 떠난다. 그는 자신의 거울상인 종자 - 실체가 있으나 존재를 모르는 - 를 달고 떠난다. 그 뒤를 여기사가 뒤따른다. 그 뒤를 젊은 기사가 따른다.

모험은 '아더 왕 이야기'에 나올 법한 패턴대로 따라가지만 기묘하게 뒤틀려 있고, 마침내 사건은 뜻밖의 오해로 종결을 맺는다. 아질울포가 존재를 포기해 버린 것이다. 그게 끝이냐고? 아니다. 시종일관 이야기를 서술하던 정체모를 수녀가 아직 남아있다. 그녀는 소설 끝에서야 정체를 밝히고, 수녀복을 집어던지고 뛰쳐나간다. 그녀가 바로 여기사였다.

조금은 침침하게 뒤틀린 동화같은 느낌을 주는 이 소설에서 사실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모든 사건의 중심에 놓인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있다. 이 말 자체가 대단한 역설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투명인간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갑옷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일들을 신경쓰고, 실제로는 아무도 챙기지 않는 기사도를 곧이 곧대로 행하는 미덕의 화신이며, 놀라울 정도로 여성에게 친절하고도 헌신적이며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 기사 중의 기사다. 당연히 그런 인물이 존재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의 특수성 -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 을 접어두고 보면 이거야말로 영웅소설에 나오는 이상적인 기사상이 아닌가? 내가 보기에 존재하지 않는 기사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거기에 있었다.

아질울포의 '비존재성', 그러니까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성격은 현실적인 인물들과 강한 대비를 이룬다. 그는 갑옷 마디를 철컥이며 환상적인 전쟁터 위를 걸어다닌다. 그 전쟁터에는 고딕소설에서 나올 법한 사건과 인물, 사랑과 우정이 있지만 그 모두가 기묘하게 뒤틀려 있다. 어떤 것도 그리 진지하지 않으며, 누구도 아질울포만큼 신념에 충실하지 않다.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하다. 그것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는 것도 한 가지 재미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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