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뱀=DNA - 샤머니즘과 분자생물학의 만남
제레미 나비 지음, 김지현 옮김 / 들녘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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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라진 열대우림에 에이즈/암 치료제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최근 보존운동에서 비교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카피다. 열대우림의 식물조성은 온대와 전혀 다르다. 어떤 식물종은 아주 좁은 지역에밖에 서식하지 않으며, 그 지역이 파괴되는 순간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열대식물로부터 새로운 돈벌이를 계속 찾아내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 카피는 아마존 우림이 지구 산소의 몇퍼센트를 공급하고 있다는 말보다 훨씬 와닿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런 실용적인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현대과학은 그 식물들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갖춘 원주민들을 무시한다. 아마존 사냥꾼들이 수천년 동안 독화살용으로 이용했던 근육마취제 쿠라레 같은 경우만 봐도 그렇다. 1940년대 이 쿠라레가 수술에 유용하다는 것을 깨달은 과학자들은 화학적으로 쿠라레 유도물을 합성, 특허를 내고 막대한 보상을 받았다. 물론 원래 개발자인 원주민들은 '여러 식물을 조합하여 가열하는 동안 나오는 향기롭지만 치명적인 증기를 피해 72시간 동안 끓여야 하는(본문 중에서 인용)' 물질을 '운좋게' 발견했을 뿐이라고 치부하고서 말이다.

사실은 서두를 다르게 시작하고 싶었다. 소위 서구적이며 현대적이지 않은 문화와 지식은 모두 원시적이고 후진적이며 진보해야 할 것으로 간주되던 때가 있었다고. 지나간 시절을 회고하듯, 과거형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사람 모두가 알다시피 이는 사실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지금 상황은 원주민의 지식을 무조건 쓸모없고 열등한 것으로 보던 몇십년전보다 더 괴상하다. 현대 수학 이론을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공학적으로 응용할 수 있으면 그 이론은 '옳다'고 인정된다. 그런데 아마존 원주민들의 지식을 가져다가 실용적으로 써먹으면서 그들의 지식은 미신으로 치부한다. 이 얼마나 기이한 모순인가. 미신을 기피하는 데는 어떤 미신이 있다(베이컨). 제레미 나비의 "우주뱀=DNA"는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현대과학의 한계선을 넘어서, 그 사각지대 안으로 들어가보는 것. 질문해보는 것이다. 어떤 지식을 현대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말이 진실일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제레미 나비는 글의 내용면에서만이 아니라 형태면에서도 같은 마음가짐을 유지하려 애썼고, 때문에 이 책은 추리소설처럼 차근차근 저자의 내면세계를 따라간다. 1장은 이 책을 쓰기 7년 전인 1985년, 현지조사를 위해 머물던 아마존의 끼리샤리 마을에서 겪은 일을 서술하면서 시작한다. 엄청나게 방대한 아마존 식물에 대한 원주민들의 지식에 감탄한 저자가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아느냐고 묻자 사람들은 식물이나 동물, 땅이나 숲에 대한 모든 지식의 원천은 '아야우아스께로'라고 대답한다. '아야우아스께로'란 '아야우아스까를 마시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되는데 곧 일반적으로 말하는 샤먼이다. 아마존 사람들은 아야우아스까를 마시면 이미지를 통해 무언가 배울 수 있다고, 이를 '숲의 텔레비전'에 비유한다. 저자는 당혹감을 느꼈고, 실제로 이 음료를 마셔봄으로써 강렬한 체험을 하기도 했지만 연구논문에서는 이 부분을 다루지 않았다. 환각을 통해 식물학적인 지식을 배웠다는 언급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가는 학계에서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기 때문에.

그러나 공식적으로 다루지 않았다고 해서 의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후에도 계속 이 수수께끼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떻게 전자현미경도 없는 사람들이 아마존의 8만가지 식물 종들 중에서 환각 성분의 뇌 호르몬을 함유하는 관목 잎사귀를 가려내고, 이것을 소화 효소가 환각효과를 차단하지 않도록 효소 활성화를 막는 물질을 함유한 덩굴과 조합하며 이것을 통해 의식을 변형시키는가, 그런 지식을 모두 환각 속에서 배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의문에, 환각경험 속에서 본 현란한 뱀들의 모습에. 그리고 7년이 지나 책을 쓸 기회가 오자 전력을 다해 그 의문에 달려들었다.  

저자는 "자연은 기호로 말하며 그 언어를 이해하는 비밀은 형태나 모양의 유사성을 알아차리는 데 있다"는 카를로스(아마존에서 만난 아야우스께로)의 말과, 입체영상을 보려면 '초점을 흐려야 한다'는 깨달음을 잣대삼아 수많은 문헌을 파고들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에 마주친다. 자신이 환각상태에서 보았던 뱀과 전세계 신화에 등장하는 '우주뱀', 그리고 서로를 휘감고 있는 이 쌍둥이 뱀과 DNA 사이에 나타나는 또렷한 유사성...... 분자생물학자가 아마존 샤먼 출신의 화가가 그린 그림에서 콜라겐의 삼중나선이나 풀어진 형태의 DNA 등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재미있지만 쓸데는 없는 지식쯤으로 가볍게 여길 수도 있었을 이 발견으로 저자는 한 가지 방향을 잡게 된다. DNA가 모든 생명체 안에 있다면 그것은 곧 식물과 인간이 공유하는 '생명의 핵심원리'가 있다는 의미이며, 그것이 바로 아마존 샤먼들이 이야기하는 우주뱀일지도 모른다. 즉 어쩌면 분자생물학을 파고듦으로써 아마존 샤먼들의 말을 이해할 수도 있을 지 모른다고, 혹은 역으로 샤먼들의 말을 통해 분자생물학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한 것이다.

이후 내용은 지그재그로 신화와 현대과학을 오가며 진행된다.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물고 실마리가 다른 실마리를 물어온다. 분자생물학도 사실 DNA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 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이 내놓은 '유향포자 가설', 한 사람 몸 속에 있는 DNA의 실을 모두 풀어 늘어놓으면 지구를 5백만번은 돌고도 남을만큼 길다는 것, 세포를 채우고 있는 소금물의 염분 농도는 바닷물과 비슷하며 뱀 숭배에 대한 주류 학설 몇 가지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라는 사실들. 현대과학이 환각은 물론이고 시각의 메커니즘조차 완전히 밝혀내지 못했다는 사실과 DNA가 초미세 레이저에 비할 만한 규칙성을 가진 포톤을 방출하고 있다는 점. DNA의 90프로 이상을 차지하나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정크 DNA'...... 이렇게 나열해놓으면 파편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이런 단서들을 가능한 한 쉽고 찬찬하게 풀어가는 과정에서 점차 저자의 가설은 윤곽을 드러낸다. 만약 '아야우아스까로' 같은 환각제가 일종의 '초점 흐리기'를 가능케 해줌으로써 DNA가 방출하는 바이오포톤을 감지하게 해준다면? 인간의 DNA가 어떤 정보를 방출한다면 다른 생물의 DNA 또한 그러하지는 않을까? 생물학자들이 오만하게도 '정크(쓰레기)'라고 부르는 부분은 그 정보를 송수신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제레미 나비는 여기까지 와서도 바로 그렇다, 이것이 진리다! 라고 외치지는 않는다. 시종일관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하며 온유하게 '아마존 샤먼들의 말은 바로 그런 뜻이 아닐까?'라고 물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아무리 놀라운 깨달음이라 여긴다 해도 이런 내용이 현대과학의 근본에서 부정당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이 시도가 샤먼들의 지식을 제한시키고 어느 정도 왜곡시키는 작업이라는 사실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서 어디까지나 이 책은 명확한 대답이 아니라 독자들과 학계에 던지는 가설이고 질문이며 한계를 넘기 위한 호소에 머문다. 그러나 그 안에서 혹자는 경이감을, 혹자는 영감을, 혹자는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식과 재미는 물론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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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가 남긴 세계의 모든 문양
아리엘 골란 지음, 정석배 옮김 / 푸른역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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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서점을 둘러보다가 "아니, 이런 책이 나오다니?" 하고 눈을 의심할 때가 있다. 그다지 풍요롭다고는 하기 힘든 국내 출판계에, 그 중에서도 상당히 척박한 분야에, 훨씬 기본적이거나 고전적인 텍스트도 소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척 보기에도 공은 많이 들고 이득은 별로 없을 듯한 책을 보았을 경우다. 해외에서 많이 팔렸다는 명분도 없고, 누구나 아는 고전으로 인정받은 것도 아니면서 '좋은' 이런 책이 번역 출간될 때는 그저 관계자들의 취향에 감사할 수밖에 없나니, 지난 6월 서점에 깔린 "선사시대가 남긴 세계의 모든 문양(원제 Myth and Symbol: Symbolism in prehistoric religions)을 보았을 때도 그랬다.

1200쪽이 넘는 무겁고 뿌듯한 장정본을 보면 바로 짐작이 가겠지만 이 책은 '신화 상징 백과사전'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방대한 내용을 자랑한다. 우선 시간적으로는 구석기시대부터 19세기까지를, 공간적으로는 유라시아 대륙을 중심으로 하되 전세계를 가로지르며 동굴 벽화와 그릇 문양과 건축과 장식 문양을 총망라해놓은 그림이 압도적이다. 아직 의미를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거나 기존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여겨지는 몇몇 상징에 대해 재해석을 내리는 전반부에서는 수많은 그림을 헤집으며 퍼즐 맞추기를 해야 할 정도다. 그리고 이 방대한 문양을 논리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비교 분석한 신화와 역사, 고고학적인 발견과 언어학적인 자료, 축제와 풍습과 민담과 속담과 장신구와 건축 등에 남아있는 잔재들 또한 입이 딱 벌어지는 양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쳤다면, 그러니까 단순히 그림과 도상만 모아놓았다면 1995년 열화당에서 출간한 조르쥬 나타프의 <<상징, 기호, 표지>>과, 자료를 쌓고 기존의 해석을 정리하는 데 그쳤다면 1994년 까치글방에서 출간한 진 쿠퍼의 <<그림으로 보는 세계 문화상징사전>>과 차별성이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이 모든 자료를 통해 저자 자신만의 해석과 새로운 이론을 내놓고 있다는 데 있다.

저자는 우선 몇 가지 가정에 기초하여 신화, 상징의 뿌리를 찾아 올라간다. 그 가정이란 크게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부분적인 해석에 필요한 가정들은 생략하겠다)

첫째, 대부분의 문양에는 원래 상징적인 의미가 존재한다.
둘째, 비슷한 상징은 공통의 기원을 갖는다. 즉 같거나 비슷한 문양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발견될 때 그것이 우연의 결과일 가능성은 없다.
셋째, 상징의 의미는 오독과 전파에 의해 잊혀지거나 변할 수 있다.

이런 가정에 동의하든 않든 저자가 자신있게 내놓은 몇 가지 결론과 그에 이르는 과정은 상당히 그럴싸하다. 본래 태양숭배는 그렇게 널리 퍼져 있지 않았다는 점, 따라서 기존에 태양으로 해석하던 원판형 기호 대부분은 하늘 기호일 것이라는 점이 그렇고, 시대가 변하면서 신앙 형태가 변하고 그에 따라 옛 기호를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가설이 그렇다. 그보다는 훨씬 신중하게 받아들여야겠지만 신석기시대, 초기 농경민에게는 크게 큰여신(하늘여신) - 그 배우자인 큰신(지신, 지옥신) - 그들의 자식인 쌍둥이신(성장의 신)이라는 세 가지 거대한 신성이 존재했고, 그들 각각이 상당히 모순적인 속성을 지녔던 것으로 파악한 부분도 대단히 흥미롭다.

저자는 책 앞부분에서 문양을 통해 큰여신-큰신-쌍동이신이라는 거대한 신화 공식을 짜낸 다음, 도저히 이 지면으로 정리할 수 없는 다양한 문제를 이 도식으로 수렴시킨다. 예컨대 이 책을 읽고 나면 현재 기독교에 속해 있는 교리와 연희와 상징과 이야기들 중에 '독자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크리스마스와 산타 할아버지와 루돌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될 테고 말이다(웃음)

몇백쪽이 넘어가도록 후대의 이름과 풍습과 신화들이 저자의 해석을 뒷받침하고 그에 따라 재해석되면서 공식은 좀 더 완전해지며, 마침내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또 수백쪽이 이론 정리에 할애된다. 25장 큰여신, 26장 흑신, 27장 백신이 바로 그 부분이다. 여기에서는 큰여신과 큰신이 얼마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 정리하고 또한 몇몇 문화권에서 일어난 '신들의 세대 교체'를 재구성하는데, 너무 많은 것들을 같은 범주에 밀어넣다 보니 읽으면서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받아먹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자료 면에서도, 문양 해석과 신화적 사고에 대한 가설 면에서도 이 책의 가치는 크다. 저자가 자신의 오랜 연구 경험에 비추어 자신있게 단언할 때조차 신중함을 잊지 않는 학자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책의 맨 뒤 100여쪽은 저자가 재구성한 세계관 변화를 다시 설명하고, 이 모든 연구의 뿌리가 된 셈인 다게스탄 문양 연구를, 마지막에는 어떤 문양 해독은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어떤 것은 추측 수준에 그친다고 여기는지를 정리하는 데 할애되었다. 덕분에 독자는 언제나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직접 판단할 수 있다.

솔직히 이런 책을 쓴 아리엘 골란이나, 번역한 정석배 교수나, 출판한 푸른역사나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워낙 두껍고 무거운(들고 볼 수도 없고 무릎에 올려놓아도 다리가 쑤신다!) 데다 집중력을 요구하는 내용이라 읽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만한 고생을 감수할 가치는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상징 관련 서적 두 권보다 훨씬 재미있다는 점도 보장한다. 신화에 관심이 있다면 꼭 읽으라고 권하는 데 있어 걸림돌은 두께만큼이나 만만치 않은 가격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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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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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싶은 좋은 책.

한편으로는 사멸해가는 언어의 보호가 생태계 보호나 동물 보호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쓴 책이지만, 현재의 언어 상황과 그 역사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원인을 이야기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총체적인 문제를 이야기해야 했다. 언어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것이 그렇듯이. 언어적인 다양성이 집중된 지역은 생물학적/생태학적 다양성이 집중된 지역과 거의 일치하며, 사멸해가는 소수 언어들의 상황은 생태계는 물론이고 중심과 주변, 다수와 소수, 지배와 억압의 체계 전체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하나의 식물이, 동물이, 문화가 사라지는 것은 하나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이고 하나의 언어가 사라지는 것은 세상을 보는 창이 하나 사라지는 것이자 우리가 엿볼 수도 있었을 세상이 하나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위기 상황에 처한 언어를 보호하자는 것은 단순히 그 언어를 박제화시키자는 뜻이 아니라 (박제화도 차선책, 혹은 지연책은 될 수 있겠지만) 그 언어가 위기에 처한 상황 전체를 보고 대안을 생각해보자는 호소다. 아무리 몇천명, 몇만명의 소수민족이 쓰는 언어라 해도 그 언어가 열등해서 사라지지는 않는다. 과거에는 유럽인들의 대량 학살 때문에 많은 언어가 사라졌고, 지금은 경제적인 압박과 제1세계의 산업에 유리한 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독재자 지원과 자본주의 논리와 되풀이되는 중심-주변의 폭력 때문에 또 많은 언어가 사라지고 있다. 언어가 사라져갈 때 그 언어의 주인들은 언제나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게 마련이다. 

고릴라의 멸종을 막는 것과, 숲과 초원이 파괴되는 것을 막는 것, 무기상들만을 위한 잔치로 전쟁을 벌이거나 무도한 독재자들을 지원하여 굶어죽는 아이들이 무수히 나오게 만드는 짓을 막는 것, 부가 소수에게만 집중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들며 그럭저럭 살만한 사람들도 박탈감과 피로에 시달리게 만드는 시스템을 막는 것, 그리고 소수민족이 단지 소수라는 이유만으로 전통을 버리고 자기네 언어를 포기하고 술에 찌들어 살아가지 않도록 하는 것(미국에서 흑인과 인디언의 지능평가가 낮게 나오는 이유는 그 지능평가의 기준이 '영어'와 그와 연결된 생활방식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주변부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들
을 경멸하고 그들의 생활방식을 추레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 것......무엇보다도 다르다는 것이 틀린 것이 되지 않는 사회와 삶을 누리는 것, 이것들은 각기 따로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며 당연히 해결 역시 단독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문제의 핵심이 같기 때문이다. 우리와 관계없는 '저 멀리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님은 물론이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며, 생태계의, 자연의 원리는 강한 것 하나가 다른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약육강식(사실 이것 자체도 약육강식이라는 말의 의미 자체를 기이하게 해석한 것이지만)이 아니라 다양성이라는 점.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외에도 다른 대안이 가능하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어쩔 수 있나'라고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수많은 탄압과 폭력의 일화들을 읽다보면 (그리고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자행되는 많은 일들을 떠올리면) 인간은 원래 이런 존재인데 아닌 척 발버둥치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하는 암울한 생각마저 몰려들지만, 그래도 여전히 저자들의 호소는 마음에 남는다. 

다소 감정적으로 썼지만 -_- 책은 상당히 균형이 잡혀있고 생각해볼 여지도 많다. 이 책을 읽고 당장 위기언어 보호론자로 돌아설 필요는 없다. 미시적인 관점과 거시적인 관점을 모두 제공하며, 폭넓은 역사해석과 언어학/생태학에 관련된 풍부한 사례가 들어있고, 글도 재미있고 읽기 편하게 썼으니, 그저 재미있게 읽고 한 번 더 생각할 기회만 가진다 해도 책 한권의 몫으로는 족하지 않겠는가.

덧. 한국어는 위기에 놓여있는 언어도 아니고, 소수어는 더더욱 아니다. 한국어는 사용자의 숫자상으로 세계 14위의 '덩치 큰' 언어이며, 아직도 새로운 표현과 새로운 분화과정이 지속되고 있는 비교적 안정적인 언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사멸해가는 언어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먼 것만은 아니다. 영어 공용화론도 그렇지만 각종 지방 사투리들도 '단지 중심에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억압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

<...해결책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며, 공식적으로 부과된 정체성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하는 목소리를 잠재우려고 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해결책은 권력의 불균형이 시정되도록 노력하는 데 있다. 현대화가 반드시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지역적 정체성을 상실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국민 국가의 대안이 되는 다른 형태의 통치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국민 국가 체제는 서구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 아래서 생겨났으며, 정치적 통일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언어적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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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돌 1 - 제1부 뉴턴의 대포 환상문학전집 9
그레고리 키스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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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가 만유인력의 법칙으로만 알고 있는 아이작 뉴턴이 사실은 연금술사요, 신비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사실이다. (사실 우리가 엄정한 과학의 기반을 닦은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 중에 연금술이나 신비주의와 무관한 사람도 별로 없다)

이 책 철학자의 돌(원제 비이성의 시대)>은 그 부분을 전면에 내세운다. 뉴턴이 연금술을 연구하다가 곁다리로 다른 법칙을 발견한 게 아니라, 진짜 연금술의 핵을 얻어냈다면? 마법이라는 게 허황된 기적이 아니고, 일정한 규칙이 있고 발견과 발명이 가능한 자연법칙이라면? 그랬다면 역사는 어떻게 굴러갔을까. 이것은 바로 그런 생각 위에서 18세기 역사를 새로 써낸 대체역사물이다. 뉴턴은 철학자의 돌을 만들어내고 루이 14세는 영약을 써서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가며, 천재 발명가 벤자민 프랭클린은 알 수 없는 어둠의 그림자에 쫓기는 세상.

하지만 이 마법에는 또다른 마법--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힘이라는 그림자가 있고, 연금술과 마법 역시 지금 우리가 아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만큼 위험한 법이다. 기왕이면 18세기 세계사, 그 중에서도 특히 유럽의 역사를 알수록 즐겁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젊은 주인공들이 겪는 파란을 따라가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벤자민은 좀 얄밉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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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시체 - 길 잃은 고양이, 한 밤의 침입자 애프터 다크 1
게리 디셔 외 지음, 숀 탠 외 그림, 정진영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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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면 학교에는 언제나 무서운 이야기가 떠돈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보다는 대개 비슷비슷한 이야기, 비슷한 배경. 몇 년에 한번씩 새로운 히트작이 탄생하기는 하지만 (엘리베이터 이야기처럼) 대개 괴담이란 상식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이야기의 변주곡을 반복하며 소름끼쳐 하곤 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 알고 있는 비밀이기에 더 선명한 공포감을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거듭거듭 되풀이되는 이야기들이야말로 우리가 정말 두려워하던 바로 그 부분을 찌르는 것일 테니까.

이 시리즈에 실린 이야기들은 때로는 끔찍하고, 잔인하고, 무섭다. 각기 다른 작가가 쓴 만큼,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공포담을 총망라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처럼 고등학교 시절까지 괴담 이야기를 즐겨 듣고 즐겨 하던 사람의 상상력을 벗어나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건 소설이다. 괴담 모음집이 아니라, 공포소설인 것이다.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고 뒤통수를 치는 게 소설의 목적은 아니다. 소설이 정말 공포스러우려면, 사람의 심리를 제대로 읽어내고 스멀스멀 그 틈으로 기어들어오는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리즈는 제법 만족스러운 공포소설을 여러 편 담고 있다. 플롯은 깔끔하고, 심리묘사는 적절하다. 스케치화같은 삽화도 마음에 든다.

이렇게 다커버린 다음이라도 편안하게 즐길 수 있기는 했지만 (다 커버린 다음이라서일까?) 확실히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청소년 정도 아이들에게 더 생생한 인상을 남길 듯 싶다. 물론, 무서운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추천하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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