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신화
서정오 지음 / 현암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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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 전에(2003년 12월 현재) 인터넷 서점을 통해 '신화' 분류에 들어있는 책의 목록을 쭉 훑어보았다. 예상대로 그리스 로마 신화가 가장 많은 권수를 자랑했으며, 가장 잘 팔린 책 열 권 중에도 다섯 권이 그리스 로마 신화 관련 책이었다. 짧은 기간 동안 팔린 책의 권수를 가지고 매긴 순위만 가지고 단정을 지을 수는 없겠지만 이 결과가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줄로 안다. 우리는 다른 어떤 신화보다도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빨리, 자주, 많이 접하며 국내 출판 시장은 끊임없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재해석을 생산해낸다. 한국 신화보다 훨씬 낯익고 친근한 것은 물론이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는 있다. 1970년대 말, 80년대 초부터 시작된 '우리 것을 찾는' 움직임은 지금까지 꾸준히 발전하고 많은 결과물을 내놓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영어를 잘해야 먹고 살기 쉬운 세상이고, 어지간한 학문을 공부하려면 서구 학자들이 서구 중심으로 정립해놓은 이론을 소화하고 끼워맞춰야 하는 실정이다. 그런 만큼 서구인들이 고전으로 꼽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인기일 수밖에. 게다가 뒤늦은 인정이라 미안하지만 그런 이유를 달지 않더라도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야기 구조는 명쾌하고 쉽고 화려하지 않은가. 그리스 로마의......아니 그리스 신들은(로마에도 그리스 신들을 흡수하고 동일시하기 전에 나름의 신화 체계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세계 신화 중에서 가장 성질 더럽고 질투심 강하며 로맨스를 즐기는 이들이라는 점도 매력적이고 말이다. 사실 그리스 신화에 난무하는 근친상간과 동성애와 질투와 복수를 생각하면 국내 학부모들이 어떻게 이 신화를 '교육적'이라고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읽히려 하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리스 신화가 자주 거론되는 데에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료의 방대함이다.

현재 이야기되는 그리스 신화는 주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 헤시오도스의 <신통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원전으로 하지만 그 외에도 로마 시대에 쓰고 상연했으며 이후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학작품을 통해 여러 차례 재해석된 많은 희곡이 바탕이 된다. 그러니까 과거에 이미 문헌으로 남긴 원자료가 적지 않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위에 세월을 거치며 많은 재해석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리스 신화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를 굳이 문헌신화와 구전신화로 나누는 데에 대해 결국 둘 다 근원은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현시점에서는 이런 분류가 유용한 것이 사실이며, 여전히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채록한 지 20년이 지나 재해석은커녕 해석조차 완전히 되지 않은 신화와 채록한 지 천년이 지나 수많은 연구와 문학작품을 통해 더 풍부한 텍스트로 거듭난 신화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한국 신화의 경우 고대 문헌에 속하는 자료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삼국지 위지 동이전> 정도가 있을 뿐이며 구전신화로 판소리와 민담, 무가 등이 존재한다. 무속이 융성하고 여기에 속한 무가와 설화 등이 풍부한 만큼 이를 따로 무속신화로 분류하기도 한다. 구전신화에 관한 연구는 19세기 말, 20세기 초부터 일본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시작, 해방 후 근대화와 서구화, 새마을 운동 등의 흐름 속에 묻혔다가 1970, 80년대경 '우리 것'과 '전통'으로 눈을 돌리고 인간문화재, 무형문화재 등을 지정하면서 다시 활발해졌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초기 일본학자들의 연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 70년대 말 80년대 초에 '발명된' 전통이 많았던 점, 여전히 채록을 중심으로 할 뿐 다양한 연구의 대상이 된 텍스트가 많지 않다는 점 등 문제점이 산재해 있다. 게다가 국내에 비교신화학이 없고 주로 국문학과 민속학 쪽에서 연구가 이루어진 것도, 그리고 이제까지 나온 관련 서적에 한자가 많이 쓰인 것도 한국 신화를 신화학, 혹은 전체적인 신화 공부에서 고립시키는 이유로 작용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 관련 책이 절반을 차지하는 신화학 베스트 10 중에 들어가 있는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신화(서정오)>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옛이야기 백가지(서정오)>의 가치는 작지 않다. 전자는 무속신화, 후자는 민담 중에서 이야기 구조가 탄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뽑아 쉽고 재미있게 새로 쓴 책으로, 장담하는데 재미있다.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지지고 엎드려 군밤을 까며 듣는 옛날 이야기 같은 맛이라고나 할까. 작가는 서문에서 "이 책의 목적이 신화를 자료로 남기는 데 있지 않고 널리 알리는 데 있는 만큼, 무엇보다도 이야기로서 매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판단" 때문에 이야기의 본모습을 살리는 데 치중하기보다는 그 맛을 살리는 데 더 힘을 쏟았다고 하고 또한 "구전되는 이야기는 한두사람의 것이 아니라 우리 겨레 모두의 것이므로, 글쓴이도 적극 전승과 창작에 참여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이야기를 썼고, 따라서 고치고 다듬는 일을 크게 겁내지 않았다"고 썼는데, 본인은 이 부분에 크게 공감한다. 학문적인 신화 연구조차도 상상력을 동원하고 원뜻을 훼손하는 작업을 피하지는 못하며, 넓게 보아 신화라는 텍스트의 가치는 풍성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끊임없이 변주되어 계속 이어지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작업 자체가 이제까지 쌓인 무가와 민담 채록본과 연구성과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조금 현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쉽고 재미있고 인기를 끄는 글이 나와줌으로써 다른 다양한 작업이 가능한 여건이 마련된다는 이득도 무시할 수 없고 말이다. (웃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신화>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여러 지역의 무가를 넘나들며 뽑은 것으로, 바리데기처럼 비교적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할락궁이나 가믄장애기처럼 낯선 이름들도 등장한다. 여기에 대해 다시 작가의 입을 빌리면 "사실 여러 지역에서 독립하여 전해 온 이야기들을 하나의 틀 안에 묶어 낸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주제넘은 일이요 부질없는 헛손질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글쓴이는 우리 신화에 나름의 질서를 얹고 싶었다. 각각의 독립된 이야기가 거대한 '한국 신화'의 틀 안에서 톱니바퀴 구실을 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도가 충분히 값어치 있는 것이라 믿고 한 일이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의 가르침과 꾸지람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옥황상제 천지왕이 땅 세상의 바지왕과 혼인하여 대별왕과 소별왕을 낳았고 대별왕이 저승을, 소별왕이 이승을 다스린다는 구조나 염라대왕과 각종 저승 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사람들이 생각한 신화 체계가 중국의 신화 구조와 이름을 빌렸을 뿐 의미는 상당히 달랐음을 알 수 있기도 하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원전이 있다고는 해도 엄연히 창작물이고 재창조물이다. 그러나 혹 이 책을 시점으로 하여 한국 무속신화, 이야기들에 관심이 생긴다면 그때가서 원전을 찾아보고 배경에 대해 공부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한가지 귀띔하자면 대별왕과 소별왕, 할락궁이, 가믄장애기, 지장애기, 사만이와 자청비, 남선비와 여산부인과 노일제대귀일의 딸에 얽힌 조왕신과 측간부인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가 제주도 본풀이에 기반하고 있다.

( 거울 신화서적 리뷰:  http://mirror.pe.kr/zboard/zboard.php?id=mythboo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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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두따 - 세계의 고전 인도편 1
깔리다사 지음, 박경숙 옮김 / 지식산업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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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두따란 구름megha의 사자(使者)duta를 뜻한다. 풍요의 신 꾸베라를 섬기는 한 약샤가 잘못을 저질러 저주로 신통력을 빼앗기고 신혼의 아내와 헤어져 1년 동안 인도 중부 라마기리 산중에 유배되는데, 이곳에서 우기를 맞아 북으로 흘러가는 구름에게 부탁하여 히말라야에 남겨둔 아내에게 소식을 전한다는 내용을 취한 서정시다. 남인도에는 '메가삼데사'라고 불리는 이본(異本)이 존재하며 양쪽 다 내용과 양은 비슷하다고 한다.

깔리다사가 젊은 시절에 쓴 이 작품은 뛰어난 관찰력과 절묘한 묘사력, 감각적인 표현으로 절찬받고 있으며, 후세 '두타 문학'의 선구이기도 하다. 국내에 소개된 책은 총 121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편 뿌르와메가와 후편 우따라메가로 나뉜다. 전편에서는 구름이 약샤의 전갈을 가지고 히말라야까지 가면서 지나갈 곳들에 대해 그리고, 후편은 히말라야 집과 그곳에 있을 아내의 모습과 마음에 대한 묘사가 중심이 된다.

시, 그것도 서정시를 다른 나라 말로 옮겼으니 감정적으로 와닿기는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재미있게 읽기에는 '샤꾼딸라' 쪽이 훨씬 좋다. 특히 시 곳곳에 나오는 표현이며 인도 풍습에 관해 친절하게 주석을 달았고, 맨 뒤에 관계된 여러 신화를 짧게 정리하여 시로 읽고 문학적 감동을 받기보다는 인도 신화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길잡이로 이용하기에 더 좋아보인다. 그러나 어느 정도 바탕 지식을 갖추고 주석까지 꼼꼼히 읽은 다음 두 번, 세 번 읽자 새삼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외국의 서정시를 우리말로 옮겼을 때 과연 그 묘미가 전해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남아있지만......

덧붙임. 깔리다사가 쓴 것이 확실시되는 작품은 <메가두따>와 <샤꾼딸라> 외에 다섯 편의 작품이 더 있다. 서사시로는 라구 왕가의 역사를 노래한 <라구왕샤>, 전쟁의 신인 스깐다의 탄생을 읖은 <꾸마라삼바와> 두 편, 희곡으로는 뿌루라와스 왕과 요정 우르와쉬의 사랑을 그린 <위끄라모르와쉬야(깔리다사를 이야기하며 언급한 작품)>, 아그니미뜨라 왕과 아름다운 여인 말라위까의 사랑을 그린 <말라위까아그니미뜨라> 두 편, 그리고 서정시로 계절을 노래한 <르뚜상하라>까지다. (모두 메가두따/샤꾼딸라의 발음규칙을 적용. 원문병기는 생략) 2년 전에 두 권을 낸 것을 끝으로 '세계의 고전'이라는 시리즈도 이어지지 않고 있는 이상 다른 작품이 소개될 가능성은 별로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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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꾼딸라 - 세계의 고전 인도편 2
깔리다사 지음, 박경숙 옮김 / 지식산업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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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여년 전, 북인도는 동서에 걸친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굽타 왕조의 통치하에 번영과 풍요를 누렸다. 힌두교가 나오고, 숫자 0이 발명되고, 아잔타 석굴이 만들어졌으며, 산스크리트(싼쓰끄리뜨)어가 공용어 겸 엘리트 언어로서의 지위를 획득한 시기다. 이 굽타 왕조의 제 3대 왕이었던 찬드라굽타 2세는 영토를 크게 넓힌 무인이면서 동시에 음악과 문학을 사랑하여 '시인의 왕'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는데, 그의 궁정에는 아홉개의 보물이라고 일컫는 아홉 명의 시인이 있어 작품활동에 후원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 중에 깔리다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위대한 방랑객으로 유명하며, 괴테와 실러에게 영감을 주었고, 인도인들이 세익스피어와도 바꾸지 않는다고 호언하는 시인.

당연한 듯이 적었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찬드라굽타 2세의 궁정시인이라고는 하지만 깔리다사가 우자이니를 특히 자주, 잘 묘사하고 있으니 우자이니 출신이거나 그곳에서 살았을 것이며, 비크라마디티아(위끄라마디띠야. 태양이 내딛는 발걸음이라는 뜻. 찬드라굽타 2세의 별호) 왕을 그리는 희곡을 쓴 것으로 보아 그렇게 추측하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이런 추측이 맞다 해도, 위대한 방랑객으로 유명한 시인이 어떤 식으로 궁정의 후원을 받았을까. 방랑을 끝내고 궁정에 정착했던 것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후원을 받아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잠깐씩 궁정에 들러 작품을 바쳤을까? 방랑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느낌대로 혼자 걸어다녔을까, 아니면 혹시 말이 방랑이지 편안하고 호화로운 유람을 다녔던 건 아닐까. 깔리다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추측할 단서도 하나 없는 지금은 모든 것이 안개 속에 잠겨있을 뿐이다. 

그런 깔리다사의 대표작 두 작품이, 그것도 영어 중역이 아니라 산스크리트어 완역으로 국내에 출간되어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지식산업사에서 '세계의 고전: 인도편'이라는 이름하에 나란히 낸 '메가두따'와 '샤꾼딸라'. 인도에서 팔리(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고 있는 역자의 손으로 이루어진 작업이다. 역시 인도에서 미술을 공부한 일러스트레이터가 삽화를 그렸다. 훌륭한 주석이 달려있기는 하지만 역시 읽기 쉽게 정리한 인도 신화 책을 몇 권은 읽고 보는 편이 좋겠고, 기왕이면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를 읽고 보기를 권한다.

두 권 중에서 '샤꾼딸라'는 (어쩐지 상술같은 표현이지만) 괴테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바로 그 작품. 원제는 '아비즈냐나샤꾼딸라' -즉 '샤꾼딸라를 알아보는 증표'인데 1789년 영어로, 1791년 독일어로 번역되면서 '샤꾼딸라'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원래 '마하바라따'에 들어있는 이야기에 깔리다사가 살을 붙이고 재구성하여 7막의 희곡으로 만들어낸 이 작품은 산스크리트 문학의 꽃으로 불린다.

겸손한 왕 두샨따는 사냥을 갔다가 성자의 양녀이며 요정의 딸인 샤꾼딸라와 우연히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하여 각자 홀로 마음을 태우다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을 약속하지만, 사랑에 빠진 샤꾼딸라는 두르사와스라는 성자를 홀대하는 바람에 '사랑하는 사람이 너를 기억하지 못하리라'는 저주를 받고 만다. 다른 이들의 애원에 마음이 조금 풀린 성자는 왕이 증표로 주고 간 가락지를 보면 기억을 돌이키리라 예언하는데, 흔히 그렇듯 아이를 배고 왕에게 가던 샤꾼딸라는 가락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비탄에 젖은 샤꾼딸라는 설화나 민담, 혹은 동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줄거리지만 이 희곡은 실로 우아한 데다, 뭐니뭐니해도 재미가 있다. 희곡이라는 장르를 별로 즐기지 않는 본인도 정신없이 읽었을 정도니까 안심해도 좋을 것이다. 메가두따보다 이해하기 힘든 표현도 훨씬 적다.

덧붙여 이 책에는 부록으로 '산스크리트 문학' 개관과 간단한 발음규칙이 실려있다. 우리나라는 외국어 표기법상 '꾸베라'가 아니라 '쿠베라'로, '마하바라따'가 아니라 '바하바라타'로, '싼쓰끄리뜨'가 아니라 '산스크리트'로 옮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역자는 원어 발음을 중시하여 전자와 같이 표기했으며, 그에 따라 이 리뷰에서도 책 내용에 관계된 표기는 모두 그대로 적고, 익숙한 표기대로 적은 경우에는 괄호 안에 원어 발음을 병기했다. 문제는 'v'자 발음이다. 된소리로 쓰느냐 거센소리로 쓰느냐 정도의 차이는 알아보기 어렵지 않지만 'va'를 기존의 '바'가 아니라 '와'로 읽기 시작하면 같은 이름도 상당히 달라 보인다. 쉬바를 쉬와로, 바루나를 와루나로 읽는 식이다. 외국어 발음을 완벽하게 옮기기는 불가능하다 해도 우리식으로 하면 더 가깝게 표기할 수 있는 것을 굳이 영어식으로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역자의 판단이다. 이제까지 익숙해진 발음이 있고, 앞으로도 표기규정이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는 현실적 한계는 있지만 충분히 의미있는 시도이며, 고마운 부록이다. 덕분에
고전으로, 인도 문학으로, 희곡으로만이 아니라 신화에 관심있는 사람에게도 추천할 만한 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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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점성학
리즈 그린 지음, 유기천 옮김 / 문학동네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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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성학은 신문이나 잡지에 한꼭지씩 실리는 심심풀이 별자리 운세와는 많이 다를 뿐더러,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난해한 학문이다. 당장 출생천궁도만 해도 그렇다. 별자리운세를 두고 어떻게 세상 사람의 12분의 1씩이 같은 운명을 공유할 수 있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 출생천궁도는 태어난 때의 황도궁(태양궁)만이 아니라 상승궁, 태음궁, 기타 행성궁들과 행성들끼리 이루는 각도와 위치 등으로 복잡하게 짜여진 패턴이다. 12가지 분류로는 턱도 없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현대 점성학은 황도 12궁과 10행성으로 이루어진 출생천궁도란 예정된 길로 사람을 끌고 가는 운명이 아니라 내면의 특징과 무의식을 일깨워주는 나침반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떤 때에 어떤 운이 기다리고 있음을 이야기해줄 뿐, 결국 선택과 개척은 개인의 몫이라는 뜻이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신화와 점성학"은 이런 흐름을 잇는 현대 점성학 중에서도 융 심리학과 캠벨의 신화분석을 받아들여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심리 점성학psychological Astrology자 리즈 그린의 저서 "The Astrology of Fate" 3부작 중에서도 점성학적인 기본 지식을 많이 요구하지 않는 2부만 따로 떼어 국내에서 점성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유기천이 옮기고 주석을 단 책이다. 물론, 아무리 융과 캠벨을 이었다 해도 무슨 별자리가 어떤 신화를 배경으로 하며 그 별자리에 속하는 사람들은 주로 어떤 경향을 보인다...... 같은 내용이 주라면 이 자리에서 다루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의 '운명'이 두 가지로 나뉘어 있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하나는 강력한 힘인 케르ker로, 이 힘이 분노하여 복수를 시도하면 에뤼니에스가 되고 태어날 때 개인에게 주어지면 모이라가 된다. 모이라는 운명의 부정적이고 억압적인 측면을 나타내며, 집단적이고 비개인적이다. 반면 또 하나의 운명을 나타내는 '다이몬daimon'은 수호신이며 운명의 우호적 요소다. 개인의 내부로부터 인상을 형성해가며 자신의 운을 개척하거나 망치는 힘이다. 모이라가 '몫'이라면 다이몬은 '나누어주는 자'이며 복수형인 다이모네스는 '신들'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이 다이몬의 단수형태, 각 개인의 수호신이 점성학의 출생천궁도와 결부된다.

여기서부터 다시 이야기하자.

융과 캠벨의 이름을 보고 짐작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저자 리즈 그린은, 혹은 심리 점성학은 우선 신화mythos가 '이야기'이자 '틀'로서 인간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입장을 취한다. 여러 신화, 특히 영웅 신화의 여러 단계는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에 따르는 정신적인 변화를 반영한다. - 여기까지는 캠벨의 신화관을 연상시킨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저자는 점성학 역시 '이야기'이자 '틀'로서 인생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신화와 같은 면을 공유하며, 출생천궁도가 암시하는 패턴에 어떤 신화가 공명할 때 그 신화는 개인의 삶 속에서 다이몬의 기능을 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는 물론 하나의 신화가 하나의 별자리에 대응한다거나, 특정 신이 개인에 대응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론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서론에 이어지는 본론은 황도 12궁 각각에 해당하는 여러 신화를 이야기하고 그 속에서 성격과 심리, 경향을 읽어내는 방식의 맛보기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주로 그리스 신화를 이야기하고 가끔 이집트와 북구 신화를 끼워넣으면서 이것은 자신에게 이 신화들이 친숙해서일 뿐이며, 더 친숙하고 더 연상하기 쉬운 신화는 각자 다를 수 있다고 했다. 저자가 보여주는 신화 지식의 폭은 결코 얕지 않다. 예컨대 쌍둥이자리의 경우에 주된 이야기는 주로 제우스와 안티오페의 자식인 제토스와 암피온, 제우스와 레다의 자식인 카스토르와 풀룩스, 로마의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차지한다. 여기에 힌두의 아쉬빈이 잠깐 언급되고, 빛과 어둠의 쌍둥이라는 의미에서 북유럽의 발데르와 로게, 니벨룽겐의 반지에 나오는 말베리히와 보탄, 지크프리트와 하겐, 성서의 카인과 아벨, 수메르의 이난나와 에레슈키갈, 그리스의 아르테미스아 아프로디테 같은 대립적인 신들이 열거된다.

그러나 아무리 신화읽기의 한 가지 방식이라 해도 이 책의 기둥은 신화가 아니라 점성학이다. 그런데 '쌍둥이'가 무엇을 상징하며 그에 관련한 신화들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한 느슨한 이야기 흐름 속에서 정작 쌍둥이자리 사람들이 어떤 성격/경향을 갖는가에 관한 이야기는 드문드문 조금씩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아무리 신중할 필요가 있다 해도, 책을 쓴 목적이 별의 움직임과 신화가 개인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살피고자 함이었다면 이건 좀 무책임한 것 아닌가? 그런 의문 덕에- 라고 하면 아이러니하지만, 출생천궁도와 그 천궁도 안에 살아있는 신화읽기를 연관짓는 이 책의 방식이 타로카드에서의 이미지읽기와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타로에 흥미를 가져본 사람이라면 역량에 따라 미래를 예측하지는 못해도 질문자 개인의 상황이나 성격, 심리를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 상당 부분 동의할 것이다. 타로카드는 질문자와 점치는 사람 간의 관계와 상황, 태도, 질문 내용 등 많은 변수를 가지며 그런 의미에서 점성학이나 사주팔자와 달리 임의적이고 개인적인 면이 많다. 그런 타로카드도 기본적인 규칙은 어느 정도 공유하며, 각 카드와 그림의 의미를 푼 매뉴얼이 존재하고, 초보자가 매뉴얼대로만 읽어내도 표층적인 의미에서는 오류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타로에는 '점술' 혹은 '좋은 상담 수단' 외에 또 한가지 의미가 있다. 그것은 타로가 상징의 집약체라는 점이다. 그리고 타로에는 매뉴얼로 읽을 수 있는 체계적인 상징 외에도 그림이 나타내는 이미지에서 순간적으로 읽을 수 있는 '흐르는 상징'이 있다. 점성학에서 신화 읽기가 타로에서 이미지 읽기와 비슷하다고 말한 것은 이런 뜻이다. 점성학은 천체의 순환과 규칙, 수학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우주와 움직임과 개인의 운명을 연결시켜 해석해보려 한 학문이고 따라서 타로보다 훨씬 단단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질서있는 상징체계라기보다는 역동적 이미지의 흐름인' 신화가 차지하는 자리는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면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이 '흐르는 상징'과 '삶'의 교차점을 찾으려는 노력이야말로 현대 점성학과 현대 신비학이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임을 떠올리고 싶다.

"신화와 점성학"은 넓은 의미에서의 오컬트에 관심을 둔 사람 모두에게 흥미로운 책임에 분명하다. 타로나 점성학을 활용하면서 그럴싸하게 이야기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책이자 (반만 농담이다), 상징과 심리학에 대한 책이며, 신화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결국에는 인간이 어떤 식으로 우주와 연관을 맺고 있는지, 그래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누군가가 파고든 고민의 흔적이다. 그 흔적에 꼭 공감하라거나 배울 필요는 없다. 무심코 집어든 이윤기 산문집에서 '당신에게 깃들여 있는 신께 문안 드립니다'라는 뜻을 지닌 인삿말 '나마스떼'를 빌어 자신도 '여러분 안에 깃들여 있는 신화에게 문안 드립니다'라고 말하곤 한다고, 신화 읽기란 우리들 안에 흐르는 강 같은 신화를 마중하는, 혹은 다시 흐르게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는 대목을 읽었다. "신화와 점성학"도 출발점에서는 거의 같다는 생각이 드니, 그것만 해도 재미있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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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 카이에 소바주 1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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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제목은 무겁지만 일본의 종교학자 나카자와 신이치가 강의한 "비교종교론" 수업 내용을 정리해 펴낸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 1권인 이 책은 드물게 쉽고 재미있는 신화학 입문서다. 얕은 지식으로나마 국내 출간된 책 중에 "신화공부에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쉽고 재미있으면서 새로운 신화읽기 방식을 보여주는" 책을 꼽아본 적이 있는데,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그 목록에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와 캠벨의 몇몇 저작밖에 올라가 있지 않았다. 부연하자면 엘리아데나 정진홍 저작은 종교학 성격이 강하고, 레비스트로스나 지라르는 어렵고, 뒤르껭이나 말리노프스키나 그밖에 신화를 다룬 인류학/민속학 저작들은 너무 전문적인 것 같고, 몇 권 되지 않는 국내 저자들의 신화입문서는 책은 너무 개설서스러운 느낌이다. 프리차드의 '원시종교론'이나 오오바야시 타료우의 '신화학입문' 같은 책은 구하기도 어렵고 번역이나 편집 방식 때문에 읽기가 힘들다.

물론 이 책은 강의를 글로 옮겼다는 점에서 몇 가지 생래적인 단점을 안고 있다. 흔히 강의는 훌륭한데 논문이나 저작은 엉성하거나 반대로 강의는 지루한데 책은 훌륭한 학자들을 보게 되지만, 학생들에게 있기있는 명강쯤 되고보면 대개 직선적이고 명쾌한 논리를 선택하고, 기본적인 흥미 유발을 위해 과감한 생략이나 비약이라는 위험도 감수하게 마련이다. 논의를 누구의 어떤 연구에서 빌려왔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고 말이다.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도 그런 단점들은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러나 깊이있는 신화연구로서는 한계점이 될 요소가 교양/입문서로서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게다가 뭐니뭐니해도 내용이 재미있다.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는 "신데렐라 신화"를 중심으로 신화가 '서로 다른 인식 영역을 연결시키는 능력의 소산'이며 따라서 가장 오래된 철학이라는 주장을 펼쳐 나간다. 우선 서장에서 일본 고사기의 '고노하나사쿠야히메' 신화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신화의 특성을 분석하고, 1장과 2장에서는 '카구야히메' 신화(참고로 이 신화는 만화 "월광천녀"의 모티브이기도 하다)에 나오는 연석(燕石)의 의미-제비집-미국의 새집뒤지기-피타고라스가 제비와 누에콩을 싫어한 이유-일본이나 아메리카 인디언, 고대 그리스에서 콩이 상징하는 의미 등을 한 줄에 꿰어 그 밑에 깔린 논리를 끄집어낸다.

왜 카구야히메는 신랑후보자에게 연석을 가져다달라고 했는가? 왜 피타고라스는 제비를 싫어했는가? 이야기 속에 들어있을 때에는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그 요소를 끄집어내어 다른 경우와 비교해 보면 무엇을 상징하는지 드러난다. 신화만이 아니라 민담, 전설, 놀이나 농담에 이르기까지 활용할 수 있다. 이런 부분에서는 확실히 레비스트로스의 신화 이론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역력하다. 잠시 옆길로 빠지게 되지만 '카이에 소바주Cahier Sauvage(야생적 사고의 산책)'이라는 시리즈 이름 자체가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에 기댄 것으로, 저자는 이 대학자에게서 많은 감명을 받은 듯 하다. 다만 그 이론을 완전히 자기화하고 있어서 저자가 레비스트로스 이야기를 할 때면 다른 사람 눈으로 보는 풍경처럼 낯설게 여겨지지만 말이다.

다시 줄거리로 돌아와서, 이런 방식으로 비교해낸 결론은 "매개채"다. 앞에서 열거한 요소들을 양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삶과 죽음, 여성과 남성, 물과 뭍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읽을 때 이 요소들이 들어간 각각의 신화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명확해진다. 그리고 결국에는 각 요소만이 아니라 신화 자체가 매개적인 성격을 지닌 이야기라고, 저자는 그렇게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3장에서 7장에 이르기까지 강의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흔히 알려져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프랑스의 샤를 페로가 동화로 정리한 판본, '재투성이 상드리용'에서 출발한다. 원래 전해지던 이야기에서는 가죽신 혹은 털신이었던 것을 샤를 페로가 유리구두로 '오역'했다는 것도 꽤 유명한 일화지만, 이야기의 구조나 줄거리가 흡사한 민담/설화는 전세계에 수백 가지나 존재한다. 이런 분포와 변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일단 그 부분은 넘어가고, 수많은 이본(異本) 중에서 저자가 골라낸 판본은 딱 여섯 가지다. 앞서 말한 샤를 페로의 동화, 그림 형제의 '재를 뒤집어쓴 소녀', 포르투갈의 '아궁이 고양이', 중국의 유양잡조에 실린 이야기, 북아메리카 미크마크족이 구전 신데렐라를 받아들여 재창조한 '보이지 않는 사람' 이야기, 마지막으로 러시아,터키, 그리스 등지에서 구전되는 '털가죽 아가씨'까지. 단순히 이본이라고 보기는 힘들만큼 차이가 큰 판본들이면서, 차례차례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며 읽다보면 수긍할 수 있을 만큼 비슷한 이야기들이다.

다른 판본을 나란히 놓고 보면 어떤 요소가 빠지고 어떤 요소로 대체되었는지가 일목요연하게 나타나며, 각 요소들이 상징하는 바는 결국 연결되어 있다. 신데렐라는 '재'를 뒤집어썼다는 점에서 생사를 연결하는 존재이며, 낮은 곳(아궁이)과 높은 곳(왕자)을 연결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판본에 따라 이런 점을 상징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한쪽 신발을 떨어뜨린다'는 요소도 오이디푸스 신화와 관련, 삶과 죽음 사이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꽤 일관성 있는 분석이다.

결국 저자는 신화가 현실과 환상을 중개하고, 때로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을 경고한다고 읽고 있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의미있는 시각임에는 분명하다. 앞서 지적한 대로 글의 성격상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연구내용이나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 많은 것은 유감이지만, 꽤 유명한 저서들이 인용되어 있으니 이 분야에 관심을 갖는 한 자연스럽게 연관된 출처를 알게 되리라 본다.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의 저작으로는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가 2권 "곰에서 왕으로 - 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 3권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 물신 숭배의 허구와 대안"까지 두 권이 더 나와 있고, 같은 출판사에서 몇 달 전 "불교가 좋다"는 저작을 내놓기도 했다. 이 책들은 신화학 입문서로 보기에는 약간 성격이 다르지만, 여전히 읽을 만한 관련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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